그림이 그녀에게 - 서른, 일하는 여자의 그림공감
곽아람 지음 / 아트북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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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에는 일부러라도 미술에 관한 책들을 읽을 기회를 만들려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요약정리는 하지 못하고 있지만, 꾸준하게 읽다보면 선무당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선일보의 곽아람기자의 <그림이 그녀에게>도 같은 맥락에서 읽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전문적인 미술사 서적도 아니고, 세련된 커리어우먼의 멋들어진 명화감상기는 아니지만, 이십대를 보내면서 만났던 그림들에 대한 이야기를 같은 또래의 여성들과 공감하기 위하여 수다를 떨 듯이 적어보았고 하였습니다.

 

서른 개의 작품을 각각, 공감, 그리움, 위로, 휴식이라는 주제어로 나누어 배치하였는데, 살면서 얻는 느낌을 맞춤한 그림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주제어 공감의 첫 번째 이야기는 저자가 여성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 느끼게 된 ‘차별’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의학공부를 시작하던 시절 만해도 여자 동기가 10퍼센트도 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만, 요즈음에는 절반이 넘어선 지가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처음 공부하던 시절도 그랬습니다만, 지금도 여성을 차별하는 분위기는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자들 세계에서는 답답한 무엇이 있는 모양입니다. 혹시 여자라서 특별한 대우를 바랐던 것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그래서 저자는 <그림 드리는 여자>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던 이 작품은 19세기 초반에 프랑스화단에서 활동한 마리 드니즈 빌레르의 작품이라고 알려졌는데, 처음부터 그녀의 작품이라고 알려졌더라면 이 작품이 유명해졌겠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19세기는 서양사회가 여성이 한 곳에서 재능을 발휘하는 것을 금기로 여기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여성들은 오히려 여성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프릴 달릴 블라우스 증후군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서른 개의 이야기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먼저 저자가 살면서 느꼈던 생각에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이 잘 어울리는 그림을 소개하고, 그 그림을 그린 화가와 화가가 활동하던 시절의 분위기 혹은 작품의 배경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그 그림을 인용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림에 관한 이야기와 자신의 이야기를 종합해서 전체적인 느낌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내용을 읽다보면 마치 곁에 앉아서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쉽게 읽힌다는 점입니다. 저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 도치법으로 문장을 구성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그만하면 ‘예쁘장한 인생’이었다, 취직하기 전까지는.(14쪽)” 저도 가끔은 그렇습니다만, 주어를 생략하는 문장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별로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림을 인용하는 것도 독특합니다. 제목과 그 아래 본문에서 핵심이 되는 글을 일부 따오고, 다음 면에 그림을 실었습니다. 그런데 화가와 그림 제목은 달았지만,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오른편 쪽의 맨 위에 그림의 일부를 손톱크기로 잘라내서 실었습니다. 그 쪽에 담겨 있는 본문의 내용이 시사하는 그림 내용을 다시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글 내용이 더 쉽게 이해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여자의 외로움은 드라마에 빠져있기 때문에 비롯된다는 주장에는 공감할 수 없습니다. 제가 드라마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외롭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별로 없습니다. 남성이라서 외로움을 덜 타는 것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우울할 때, 한 점의 그림이 위로가 된다는 것을 적으면서 저자는 존 싱어 사전트의 <카네이션, 릴리, 릴리, 로즈>를 인용합니다. 그런데 저자가 런던의 테이트겔러리에서 이 그림을 보았을 때 얼어붙는 듯했다고 합니다. “그림 속 어스름은 화폭 밖으로 뿜어져 나와 전시실을 가득 채웠고, 흐드러진 백합과 장미 꽃송이들이 해질녁 대기와 어우러져 싱그러운 향기를 품어냈다. 그리고 마치 천사처럼 창백한 두 소녀들! 나는 전시실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굶주림에 허덕이던 이가 먹을 것을 탐하듯 정신없이 눈으로 훑어 그림을 탐닉했다. 눈물이 흘렀다. 순간, 화재겅보기가 울렸고, 미술관에 있던 관람객들은 모두 밖으로 쫓겨났다. 만남은 짧았지만, 그림은 더욱더 뇌리에 남았다.(144쪽)” 그림을 마주한 순간 눈물을 흘렸다는 감수성이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제임스 엘킨스의 <그림과 눈물; http://blog.joins.com/yang412/12435742>에서 읽었습니다만, 여기 또 하나의 사례를 더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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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원하는 인생을 살아라 - 카이스트 윤태성 교수가 말하는 나를 위한 다섯 가지 용기
윤태성 지음 / 다산북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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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회사원으로 출발해서, 일본 유학생, 일본대학교수, 벤처창업 그리고 귀국해서는 카이스트의 교수로 한우물만 파고 있는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파란만장(?) 삶을 살아온 윤태성교수께서 꿈을 찾는 청년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담아 대답해준 인생설계에 관한 이야기를 모았다고 했습니다. 저자는 인생을 산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오른 산을 스스로 정한 것도 아니고 그 산을 내가 즐긴 것도 아니라, 그저 살다보니 그 산을 오르게 되었고 무심코 산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산을 내려올 뿐’이라고 하신 부분은 조금 수긍이 가지 않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살아가면서 자신이 나아갈 바, 즉 진로는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스스로 결정하기 마련 아닐까요? 물론 심사숙고를 하더라도 최선이 아닌 선택을 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선택할 길도 상황에 따라서는 변화를 줄 수 도 있는 것이고 삶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얻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부침이 있기 마련이니, 인생이 산에 오르는 것과 비유하는 것은 참 적절하다고 하겠습니다. 산을 오를 때도 체력이라든가, 시간, 동행하는 사람 등 다양한 요인 때문에 원하는 산을 오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상황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원하는 길을 선택하는 용기를 낼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뿐인 인생을 원하는 대로 디자인해서 살아가는 데는 다양한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저자는 흔들리지 않을 용기, 내 삶을 원하는 대로 다자인할 용기, 한 번쯤 방황할 용기, 행복을 선택할 용기 그리고 더 큰 세상을 펼칠 용기 등 다섯 가지 용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용기란 신중하게 결정해야지 만용이라고 할 정도로 터무니없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계기로 자신의 본능과 능력을 끌어내 모두가 원하는 인생을 디자인해가기를 바란다.’라고 마무리합니다.

 

다섯 가지 용기로 나눈 각장에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문제들을 주제어에 맞게 배치하고, 저자 나름대로의 답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각 장의 앞머리에는 저자가 처음 직장을 잡고 겪은 이야기들을 짧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처음 직장을 정하게 되면 조직에 적응하는 동안에는 아무래도 들떠 있기 마련일 것입니다. 아무리 정교하게 준비한 부품들이라고 하더라도 조립되어 완성된 기계를 시운전할 때는 부품들이 제 자리를 잡고 정확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사회 초년생은 역시 뿌리를 내리기 전까지는 흔들릴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저자의 제안을 옳고도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처음에 하는 일이 내 마음에 쏙 드는 모습으로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집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무언가 삐걱거리는 데가 있으면 문제를 진단하고 다시 조정하는 기회를 가져야 하겠지만, 조정을 하더라도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으면 타성에 젖어 그냥 허송세월하지 말고 과감하게 하던 일을 정리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자와는 다른 결과를 얻고 있기는 합니다만, 몇 차례 직장을 옮겨본 제 경험에 비추어도 역시 옳고도 옳은 이야기입니다. 인내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지요. 이 시점이야말로 내 삶을 원하는 대로 디자인할 용기가 필요한 것이지요. 세상에 늦은 일이란 없습니다. 늦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바로 무언가를 시작할 시점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진로를 바꾸려다보면 때로는 방황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음먹은대로 인생을 설계하는데 있어 필요한 조건은 아니지만, 충분한 조건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방황도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는 행복을 선택할 용기입니다. 누구나 행복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행복한 길을 선택할 때는 때로 욕심을 내도 좋습니다. 그리하여 더 큰 세상을 펼칠 수 있는 용기가 만용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꿈을 크게 가지는 것은 절대로 나쁜 일이 아니라는 점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요즈음 스페인에 다녀온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그것도 인터넷신문에 연재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시간이 날 때마다 정리하면 아직도 지지부진하고 있을 일입니다만, 마감시간을 정하고 원고를 보내야 하는 규칙을 정했기 때문에 제대로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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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반양장)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 / 예경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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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리치에서 에코까지, 세상을 바꾼 미술 명저62’라는 부제를 단 이진숙의 <위대한 미술책; http://blog.joins.com/yang412/13494632>이 소개하고 있는 미술 명저들을 찾아 읽어왔습니다. 전체의 10퍼센트를 조금 넘었으니 아직도 읽어야 할 책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부제에서 보는 것처럼 이진숙의 위대한 미술책의 여정은 곰브리치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00쪽에 가까운 두께에 질려 자꾸 순서가 밀리다가 드디어 읽어냈습니다. 읽기를 마치고서 우선 ‘제일 먼저 읽었어야 할 책을 미루었구나’하고 후회했습니다. 이진숙은 서양미술사에 관하여 10종의 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마 국내에 소개된 책들 가운데 고른 것 같습니다. 어떻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베스트 가운데 베스트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부피에 눌려, 그리고 작은 활자에 겁을 먹고 책장열기를 멈칫거리는 분이 계시다면 우선 읽어보시라고 말씀드립니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라는 유명한 첫 문장이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책장이 날개돋힌 듯이 넘어가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원시 미술부터 시작되는 긴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굽이굽이 넘어간다. (…) 서술은 잠시간 쉴 틈도 주지 않고 독자를 몰입시킨다. 한 편의 소설을 읽고 있는 듯,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이진숙, 위대한 미술책 159쪽, 민음사, 2014년)”라고 적은 이진숙은 그 이유는 바로 ‘이야기의 힘’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진숙은 곰브리치가 서양문화를 기준으로 타 문화를 비교하는 서양문화 우월론자들과는 달리 각 나라와 각 시대의 다양한 미술현상을 차별하거나 서열화하려들지 않고, 서로 다른 미적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있습니다.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의 흐름을 선사 및 원시미술부터 20세기 전반까지,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을 끝으로 모두 28개의 장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2세기에서부터 11세기까지의 이슬람과 중국의 미술을 ‘동방의 미술’이라는 별도의 장으로 구분하고 있기도 합니다. 1993년에 쓴 한국어판 서문에서 ‘위대한 한국의 미술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은 한국미술의 아름다움이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신비로운 불후의 업적들을 직접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하여 다루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자는 이 책이 막 미술세계를 발견한 10대의 젊은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썼다고 했습니다. 책이 쉽게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아직 낯설지만 매혹적으로 보이는 미술이라는 분야에 처음 입문하여 약간의 오리엔테이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썼다고 겸손하게 표현하였지만, “신참자에게 세부적인 것에 휘말려 혼돈됨이 없이 이 넓은 분야의 지세를 보여주고, 까다롭고 복잡한 인명과 각 시대의 양식들을 알기 쉽게 정리함으로써, 보다 더 전문적인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는 집필의도를 잘 구현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저나 제 아이들은 이른 나이에 이 책을 읽을 기회가 없었습니다만, 손자만큼은 일찍 읽을 수 있도록 권해볼 생각입니다.

 

이진숙은 곰브리치가 연대기나 사조 분류를 가급적 기피했다고 보았습니다.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인상주의 등의 명칭은 사후에 붙여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조를 중심으로 미술가들을 분류하게 되면 편리할 수는 있겠지만, 개별 예술가의 문제의식이 특정 사조의 공식에 환원되지 않는 불합리한 점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곰브리치 역시 연대와 사조를 전혀 무시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는 미술의 역사, 즉 건축, 회화, 조각의 역사를 논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안다는 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왜 미술가들이 그처럼 독특한 방법으로 일을 했는지, 그리고 그들은 왜 특정한 효과를 노리는가 하는 점들을 이해하게 도와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미술가 역시 자신의 작업을 통하여 얻으려는 효과가 무엇인지를 미리 예견할 수 없었을 것이며, 후대의 미술사가들이 비슷한 경향의 예술가들을 사조라는 틀에 묶어 쉽게 분류하고 이해하려는 의도가 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쉽게 쓰려했다는 것은 전문적인 용어를 제한했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독자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독자들을 일깨워주기보다는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학술적인 용어’를 남용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구름 위에서 ‘우리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아닐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이처럼 전문적 용어를 제한하는 것 이외에도 몇 가지 원칙을 적용했다고 합니다. 첫째, 도판으로 보일 수 없는 작품은 가능한 언급을 회피한다. 둘째, 진정 훌륭한 작품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단순히 어떤 취향이나 유행의 표본으로서만 흥미가 있는 작품은 배제한다. 셋째, 널리 알려진 걸작이나 개인적 기호 때문에 제외하지 않겠다. 이러한 부정적 원칙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하여 저자가 구현하고자 한 목적은 “미술의 역사를 평범한 말로 다시 한 번 설명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미술사의 전후 이야기가 어떻게 들어맞는지를 이해시켜주고, 장황한 설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화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의도에 관하여 몇 마디 암시를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의 미술 감상을 돕고자 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곰브리치가 이 책에서 인용한 첫 번째 도판은 플랑드르의 화가 루벤스가 그린 <아들 니콜라스의 초상>입니다. 루벤스는 아들의 귀여운 얼굴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이고,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아들을 귀엽게 보아주기를 원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이 현실 생활에서 보고자 하는 것을 그림 속에서도 보기를 원하기 때문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작품 속에 간직해주는 미술가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실물과 꼭 같이 그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고, 대상의 특징을 분명하게 잡아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충분히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사물을 보이는 대로 묘사하지 않고 다르게 변형시켜서 묘사하거나 때로는 왜곡시키는 것이 옳을 때도 있는 것(25쪽)”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의 정확성을 따질 때에는 다음 두 가지를 자문해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미술가가 그가 본 사물의 외형을 변형시킨 이유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 둘째는 우리가 옳고 화가가 그르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 한 작품이 부정확하게 그려졌다고 섣불리 그것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제일 큰 장애물은 개인적인 습관과 편견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 태도이다.(29쪽)”라는 곰브리치의 지적을 새겨두어야 하겠습니다.

 

저 자신도 초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미술품 감상에 입문하는 초심자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에 대한 곰브리치의 다음 지적도 새겨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카탈로그를 손에 들고 화랑을 걸어가는 것을 본다. 그들은 한 그림 앞에 걸음을 멈출 때마다 그 그림의 번호를 열심히 찾는다. 그들은 카탈로그의 페이지를 넘기다가 그 그림의 제목이나 화가의 이름을 찾으면 다시 걸어간다. (…) 그것은 그림의 감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종의 지적인 유희에 불과하다.(37쪽)” 역시 미술가들이 그처럼 독특한 방법으로 일을 했는지, 그리고 그들은 왜 특정한 효과를 노리는가 하는 점을 이해함으로써 미술작품을 보는 눈을 날카롭게 하고, 그림의 미묘한 차이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조금 안다는 초짜들이 흔히 저지르는 다른 형태의 실수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미술에 약간의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때로 그림 앞에 서서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적합한 설명서에 관한 그들의 기억을 찾는 데 몰두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처럼 설익은 지식과 속물근성이 안고 있는 생태적인 위험성애 대하여도 조심할 것을 당부합니다.

 

본격적으로 원시미술로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은 마치 강물의 흐름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낙동강은 태백시에 있는 황지연못에서 시원해서 천삼백여 리를 흘러내려 남해로 흘러든다고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낙동강에 흘러드는 물줄기 가운데 남해에서 제일 멀리 있는 곳이 황지연못이라는 것이고, 황지연못 이외에서도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낙동강에 합쳐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류에 들어서면 삼각주를 이루면서 강이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지기를 거듭하게 되는데, 삼각주가 발달한 나일강 같으면 지중해로 나가는 강의 출구가 여럿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미술 역시 따로 발전해오던 경향이 만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고, 이렇게 만들어진 형식이 갈라져서 나중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발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신과 영웅들을 아름다운 형상으로 시각화하는 것을 인간에게 가르쳐준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은 또한 인도 사람들에게도 불타의 형상을 창조하도록 도와주었다.(124쪽)”라고 적은 것처럼 곰브리치는 미술의 이런 움직임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러나 신자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종교적인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운 또 하나의 오리엔트 종교는 유태교였다.(127쪽)”라고도 했습니다. 당연히 로마에서도 이런 흐름이 강화되어 갔는데, 6세기말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책이 해주는 역할을, 그림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중세 막강한 힘을 가진 가톨릭이 회화의 발전에 기여하게 된 배경입니다.

 

앞서 미술사조를 어떻게 구분하는가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재미있는 것은 사조를 나타내는 단어들이 처음 쓰일 때는 낮추어 평가하거나 조롱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딕’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르네상스시대의 이탈리아 미술비평가들이 야만인이라 생각한 고트족이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뒤에 이탈리아에 도입한 양식이라고 생각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매너리즘’ 역시 17세기 비평가들이 16세기말의 미술가들을 비난하는데 사용했던 가식과 천박한 모방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터무니없다거나 기괴하다는 의미를 담은 ‘바로크’라는 말도 17세기의 예술 경향에 대하여 반감을 가졌던 후대의 비평가들이 조롱하기 위하여 사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413점이나 되는 도판 가운데 제가 알고 있는 작품이 불과 23점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알고 있는 미술가인데도 다른 작품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저자가 풀어놓는 이야기의 흐름에 맞는 작품을 고르다보니 유명한 작품을 인용해서 이야기를 비틀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아직 미술에 대한 저의 관심이 일천한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12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수태고지를 담은 작품을 무려 7점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미술의 기법이나 분야를 설명하면서 인용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별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끝이 없는 이야기’라는 제목의 마지막장은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미술작품이 당대의 유행을 십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면 미술사가 유행의 변천사로 오해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가장 최근의’ 미술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최근의 유행을 표현하고는 있다고 하지만, 이런 경향이 역사로 남게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조의 변화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각 세대는 어떤 시점에서는 그 전세대의 규범에 반대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각 예술작품은 그 작품이 한 것뿐만 아니라 그 작품이 하지 않고 내버려둔 것으로부터도 동시대인들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이 파행하는 것이다.(9쪽)”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과거 역시 변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 발견되어 과거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놓을 새로운 사실들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저자가 잘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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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면을 쓴 사람이 인정받을까 - 사람을 얻으며 이기는 10가지 가면 전략
무거 지음, 류방승 옮김 / 청림출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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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나온 직장내 처세술에 관한 책까지 소개되기에 이른 것 같습니다. 직장이란 어디나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아무리 작은 사회라고 하더라도 조직문화라는 것이 있고, 그 조직문화는 그 나라의 전통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기 마련입니다. 중국이 우리와 지리적으로 가깝고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고는 하지만, 분명 차이가 존재할 것입니다.

 

저자는 베이징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사관리 전문가이자 경제경영·자기계발 전문 작가라고 합니다. 비교적 생소한 중국 직장에서 사람들이 관계를 어떻게 맺고 있는지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저자는 사천지방의 전통극인 변검(變瞼:중국 전통극에서 배우가 신속하게 얼굴 표정 가면을 바꾸는 것)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합니다. 배우가 움직임으로 관객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이끌면서 순간적으로 다른 얼굴표정을 나타내는데, 분장용 도랑이나 가면을 이용하여 얼굴색과 표정을 바꾸기 때문에 관객들의 놀라움을 이끌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저자는 직장이라는 작업무대는 공연무대보다도 훨씬 더 방대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상황에 맞게 가면을 쓸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가면을 쓴다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읽어가다 보면 저자가 말하는 가면이은 항간에서 유행하는 후흑학(뻔뻔함과 음흉함을 처세의 덕목으로 삼는 학문)이 아니라 직장 내 처세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침묵, 칭찬, 약세, 거절, 용인, 능동, 후퇴, 유머, 추종, 과시 등 모두 열 개의 가면을 준비하면 좋다고 했습니다. 의미가 겹치는 부분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만, 분명 차이는 있는 것 같습니다.

 

열 개의 가면에 따라 장을 구분하고 몇 개의 사례를 들어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상황을 맞은 직장인이 선배 혹은 동료로부터 가면에 관한 조언을 듣고 대응방식을 바꾸어 성공에 이른다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설명에 맞추어 사례를 만들어낸 것 같다는 느낌이 남습니다. 연기자가 아닌 다음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행태를 금방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직장생활도 관성의 법칙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직장인이 저자가 생각하는 대로 쉽게 생활태도를 바꿀 수 있다면 천편일률적이 되어 새로운 전략을 내놓아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저자가 추천하는 열 가지 가면 가운데 각자 제일 잘 할 수 있는 부분을 보다 강화하여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을 사용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직장 초년생이라면 자신이 일하는 곳의 분위기에 맞는 방식을 선택하여 스스로의 생활방식을 만들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즉,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실패 사례가 먹히는 직장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직장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만, 자신의 타임과 맞지 않는 직장에서 에너지를 낭비하고 삶을 망가뜨리는 것보다는 직장을 바꾸는 편이 훨씬 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각 장의 말미에 둔 가면의 사용설명서와 주의사항을 꼼꼼하게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부분 중국사람인 것을 보면 중국내 회사에서 인사관리 혹은 직장인 심리를 연구해온 저자의 경험을 녹여서 창조한 인물들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추종의 가면을 설명하면서 인용한 렁 이사의 사례인데, 상품의 질이 떨어지고 생산량이 하락하고 있어 몇 개월 간격으로 이사를 갈아치우는 회사에 부임한 이사가 이틀도 안되어 회사의 산적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이틀이면 업무보고도 끝나지 않았을 시점 아닐까요? 그래도 서양에서 나온 처세술 원리 뿐 아니라 중국의 고사에서 가져온 처세술의 원리들도 두루 인용하고 있어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후퇴의 가면을 설명하면서 인용한 뛰어난 부하직원과 그를 알아보고 발탁하는 상사의 이야기를 ‘천리마는 어디에나 있지만, 이를 알아보는 백낙은 드문 법’에 비유한 것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저는 여전히 가면보다는 진심이 통한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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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되고 싶었던 아이 - 테오의 13일
로렌차 젠틸레 지음, 천지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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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계속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 이야기입니다. 우리 아이에게 무엇을 보여주었던가? 아이가 내게 무언가를 물었을 때 진지하게 답변을 해주었던가?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여덟 살 난 테오가 불과 13일 동안 겪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 또래의 아이가 이렇게 심각한 일을 생각할까 하는 생각도 역시 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테오가 열하루 째 되는 날, 자신의 죽음만이 가족들의 문제, 특히 매일 싸우기만 하는 부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는 시점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테오는 부모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전투라고 보고, 전투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는 나폴레옹만이 자신을 도와줄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하긴 여덟 살 때는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테오의 부모는 달걀을 익히는 사소해 보이는 일까지도 싸움거리가 됩니다. 날선 비난을 한 마디 던지면 받아들이는 법이 없이 곧바로 반격이 날아갑니다. 그런데 남이 볼 때는 항상 웃는 이중적인 모습이 테오는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테오의 부모는 가벼운 언쟁을 즐기고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소한 말다툼은 심각한 위기상황을 피하게 하는 완충역할을 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인데, 테오가 그런 것까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것 같습니다.

 

테오의 여덟살 생일날 평소와는 달리 테오의 부모님은 <나폴레옹의 모험>이라는 책을 사주었고, 그 책에서 주인공 나폴레옹이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폴레옹은 워털루전투에서 지는 바람에 유배를 가게 되지요. 어떻든 테오의 소박한 소망은 ‘엄마아빠가 천장까지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소리로 대화하지 않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에게 해결방법을 물어보기로 합니다. 그런데 책의 끝부분에 ‘나폴레옹은 1821년에 죽었다’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는 잠시 절망합니다. 하지만 예전에 아빠가 오르페우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주면서 죽은 아내를 데려오기 위하여 저승까지 갔다고 한 말을 기억해냅니다. 오르페우스도 했는데, 내가 못하라는 법은 없다고 테오는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깜찍한 아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테오의 부모님은 테오의 깜찍함을 몰랐던 모양입니다.

 

어떻든 테오는 나폴레옹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 나폴레옹이 천당에 있는지 지옥에 있는지부터 알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천당과 지옥에 갈 수 있는 자격이 무엇인지도... 누나의 컴퓨터를 잠깐 사용하기도 하지만, 주로 친구들의 생각에 많이 의존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구요. 아빠나 엄마는 테오가 궁금해 하는 것에 답변을 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또래 아이들은 대부분이 그렇지요? 하지만 결정적인 정보는 엄마의 초상화를 그리러 온 화가 랭보씨로부터 얻게 됩니다. 랭보씨는 테오를 데리고 국립도서관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다양한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랭보는 그것들은 나폴레옹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의 초상화가 다양하듯 진짜 나폴레옹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해주면서 진짜 나폴레옹의 몸은 보이지 않지만 눈을 감으면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치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바람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처럼 말입니다.

 

랭보씨 덕분에 죽어 나폴레옹을 만나겠다는 테오의 생각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테오반의 외톨이 시엔은 나폴레옹이 진적이 한 번 있다는 사실도 알려줍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지하철역에 열차가 들어오는 순간 뛰어들 생각을 한 테오가 역 앞에 앉아있는 거지에게 5유로를 적선하면서 벌어지게 됩니다. 고등학교 역사 선생을 하셨다는 거지를 이곳에서는 나폴레옹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테오는 드시어 나폴레옹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이기는 비결을 알려줍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를 너무 작은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216쪽)”입니다. 테오는 드디어 해답을 얻었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테오가 해답을 얻는 동안 테오의 가족은 별 도움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그 점이 안타까웠습니다.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막을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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