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 평범에서 비범으로
게리 클라인 지음, 김창준 옮김 / 알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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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우연이고, 두 번은 인연이며. 세 번은 운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몇 번째인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의학을 전공하는 분들은 이미 알려져 있는 질환의 양상과는 다른 사례가 반복되는 것에 비교적 민감한 편입니다. 새로운 질환을 만날 가능성을 최대한 열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기존의 질환의 범주에서 설명하려고 최대한 노력을 하지만, 차이점은 분명하게 정리를 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첫눈에도 기왕의 경우와 다르다는 것을 꿰뚫는 비범한 분들, 즉 통찰력이 뛰어난 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갖추는 것은 복잡다단한 세상을 잘 살아내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바로 40년 이상 인지과학 분야를 연구한 자연주의적 의사결정이론을 창시한 게리 클라인박사가 <통찰, 평범에서 비범으로>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더 나은 이야기로의 예상치 못한 이동’이라고 통찰을 정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통찰은 우리가 이해하고, 행동하고, 보고, 느끼고, 욕구하는 것을 바꾼다고 설명합니다. 무엇이 깨달음이 번뜩이도록 만드는지를 뒤쫓기 위하여 저자는 다양한 자료에서 120건의 통찰의 사례들을 수집하여 분류를 해보니, 연결, 우연의 일치, 호기심, 모순, 창의적 절망이라는 서로 다른 다섯 종류의 전략을 통하여 통찰이 일어나는 경향이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통찰, 평범에서 비범으로>에서는 통찰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한 저자의 연구과정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1부, ‘통찰의 문으로 들어가다’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무엇에 눈을 뜨게 하는 통찰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찾는 과정입니다. 살아있는 벌레에 초록색 형광 단백질을 집어넣어 이 단백질이 어떻게 퍼져가는지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마틴 챌피의 사례, 역사상 최대의 폰지사기를 저지른 나스닥회장 버니 메이도프를 10년여 추적하여 결국은 자수하도록 만든 무명의 금융분석가 해리 마르코폴로스의 사례, 에이즈의 유행을 처음 알아차린 UCLA의 마이클 고톨리프박사의 사례 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 분들의 분야가 아닌 경우에는 다소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제 경우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을 발견하고 이 세균이 위궤양 및 위암과 연관이 있음을 증명하여 노벨상을 받은 배리 마셜박사의 사례나 황열병이 모기에 의하여 매개된다는 사실을 밝혀낸 월터 리드박사의 사례처럼 질병과 관련하여 통찰력을 발휘한 사례들이 있어 조금 이해가 쉬웠습니다.

 

사례분석을 통하여 저자는 다섯 가지의 통찰에 이르는 전략들 가운데 연결, 우연의 일치 그리고 호기심이 ‘함의의 발견’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을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비일관성을 찾아내는 ‘모순경로’, 함의를 발견하는 ‘연결경로’ 그리고 막다른 골목을 탈출하는 ‘창의적 절망 경로’의 세 가지 경로로 압축해냈습니다. 이들 경로에서는 이야기를 재구성하기 위해 약한 닻을 사용하거나, 새로운 닻을 추가하거나, 약한 닻을 버리는 활동을 통하여, 행동, 보기, 느끼기, 원하기 등 우리의 이해를 바꾸기에 이른다는 결론을 맺게 되었습니다.

 

2부, ‘문을 닫다’에서는 통찰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짚고 있습니다. 행동에서의 어리석음이라거나, 결함이 있는 믿음, 통찰을 가로막는 조직 등의 요소들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과학자들이나 의사들 역시 자기 믿음과 모순되는 이례적인 일을 대충 얼버무리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이를 ‘지식 방패’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하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저자는 문제를 지적하는데 그치지 않고, 통찰을 촉진시킬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3부, ‘문을 열다’에서 설명하였습니다. 나 자신을 돕고, 다른 사람과 조직을 돕는 것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도움을 얻게 되는데, 이는 결함이 있는 믿음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제시한 통찰에 이르는 세 가지 경로 모형아 대체적으로 잘 맞아 들어간다고 하면서도 반드시 올바른 해법이나 만족스러운 결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도 했습니다. 특히 사람들에 대한 통찰의 경우가 그렇다고 합니다.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마술과 같은 통찰력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개인적인 노력이 효과를 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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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든다는 것과 늙어간다는 것 - 마음의 평정에 이르는 10가지 길
빌헬름 슈미트 지음, 장영태 옮김 / 책세상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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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노화방지(anti-aging)이라는 말을 일상처럼 듣게 되었습니다. 나이 먹는 것을 거부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남들보다 젊어 보인다는 말은 나이가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의 꿈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노화방지를 내세운 상술에 놀아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되돌아볼 필요도 있습니다. 저는 젊어서부터 새치가 많은 편이었습니다. 환갑을 넘긴 금년에는 반백이 넘어가고 있기 때문인지, 염색을 하면 훨씬 젊어 보일 것이라는 조언을 흔히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생긴 대로 살아간다는 원칙을 정하고서 들은 척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책을 만났습니다. ‘영혼의 치유사’라고 하는 독일의 대중 철학자 빌헬름 슈미트가 쓴 <나이든다는 것과 늙어간다는 것>입니다. 슈미트는 ‘노화방지’ 대신에 ‘노화의 기술(art of aging)’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나이 든다는 것에 맞서 살아가는 대신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긍정하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나이 듦의 멋진 기술, 즉 멋지게 나이 들어가기 위한 삶의 기술을 익히게 되면 인생이 아름답고 긍정할 만한 가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자는 나이 듦의 자연적 의미는 각자가 자기 삶이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점차 익숙해지는 것이며, 나이 듦의 문화적 의미는 지금의 삶을 좀 더 수월하고 풍성하게 해주는 정신적 원천을 발견하는데 있다고 정의하였습니다. 저자는 ‘마음의 평정’이야 말로 정신적 원천 가운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특히 현대사회는 인간들을 욕망으로 선동하고 교란하며 삶을 심하게 소용돌이치게 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평정에 대한 사람들의 동경은 점점 커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랜 세월을 삶의 기술을 뒤쫓아온 저자가 관찰과 경험 그리고 사유의 결과를 바탕으로 시기, 특성, 습관, 행복, 고통, 접촉, 사랑, 사색, 준비 그리고 그 후 라는 주제어로 정리하고 있는 ‘마음의 평정’에 이르는 10단계 과정을 이 책에 담았습니다. 시기란 인생을 분기로 나누어 보았을 때, 중년의 위기와 갱년기를 겪게 되면서 나이듦이나 죽음에 대하여 생각을 시작하는 시기야말로 바로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어야 하는, 1단계라는 것입니다. 나이듦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이 삶의 국면이 가지는 특성들을 파악하는 일입니다. 즉, 마음의 평정을 가능하게 하는 변화에 대한 열린 관심을 가지는 일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어느 누구도 노화가 어떻게 진행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살아온 방식, 즉 습관을 바꾸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합니다. 생각 같아서는 좋지 않은 습관을 바꾸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만, 고통까지도 이미 몸에 배어 있다는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인 듯합니다. 네 번째 단계에서는 살아오면서 겪은 노고를 보상하는 차원에서 즐거움을 의식적으로 누려도 좋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즐거움은 소박할수록 좋을 것 같습니다. 즉 너무 큰 것을 바라면 그것이 스트레스가 될 것이니까요. 다섯 번째 고통까지도 마음의 평정을 얻는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고통은 삶을 해치기 마련이지만 그 고통마저도 스스로 결정한 범위 안에서 수용하다보면 마음의 평정을 이루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단계는 접촉인데, 외톨이가 되지 않고 누군가와 접촉을 유지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독서는 무언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정신적인 접촉이자 접촉받음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곱 번째 단계는 사랑인데,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덟 번째 단계는 사색입니다. 사색을 통하여 마음을 즐겁고 차분하게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살아온 길을 돌아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돌아보는데서 그치지 않고 다시 눈을 미래로 돌려보면 삶을 마무리하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아홉 번째 단계는 죽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죽믕과 함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죽음의 의미도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죽음을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은 역설적으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건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단계는 죽음 이후의 단계가 되겠지요.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소멸하고 말까요? 자아를 완성한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살아 영원히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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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파력 - 1등석 스튜어디스 출신 CEO가 당신에게만 코치해주는 '될성부른 남자'를 한눈에 알아보는 법
미즈키 아키코 지음, 이서연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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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클래스 승객은 펜을 빌리지 않는다; http://blog.joins.com/yang412/13219457>로 만났던 미즈키 아키코의 책을 다시 만났습니다. <퍼스트클래스 승객은 펜을 빌리지 않는다>이 우리말로 소개된 것은 2013년이고, <간파력>은 2012년에 소개된 바 있습니다만, 일본에서는 <퍼스트클래스 승객은 펜을 빌리지 않는다>이 2009년에 그리고 <간파력>이 2010년에 발표가 되었으니, 우리나라에 소개된 순서가 바뀐 셈입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난 느낌은 발표된 순서대로 소개되는 것이 옳았겠다 싶습니다. <간파력>을 읽고는 실망이 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등석 스튜어디스 출신 CEO가 당신에게만 코치해주는 ‘될성부른 남자’를 한눈에 알아보는 법”이라는 부제가 의미하는 것은, ‘좋은 남편을 점찍는 방법’이라고 한 마디로 잘라 말하면 될 것 같습니다. 대학에 입학해서는 수많은 미팅을 통해서, 스튜어디스로 일하는 동안에는 남자 승객, 특히 1등석 손님을 상대하면서 수많은 남자들을 만나고 관찰해온 결과 ‘될성부른 남자’를 감식하는 눈이 생겼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시원치 않아 거들떠보지 않았던 남자가 나중에 보니 잘 나가고 있더라는 이야기는 밀쳐놓더라도, 두 번이나 결혼에 실패했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 저자가 정말 남자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졌다는 주장이 옳은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두 차례의 이혼과 여러 차례의 사업실패를 겪고서야 어떤 남자가 행복을 함께 할 수 있는 파트너인지 깨닫게 되었다는 것인데, 과연 그럴까 싶습니다.

 

저자는 행복한 삶을 즐기고 있는 여자들의 특성을 분석해본 결과 첫째, 될성 부른 남자를 알아보는 ‘간파력’, 그런 남자의 마음을 휘어잡을 수 있는 독특한 ‘매혹력’, 그리고 남자친구 혹은 남편을 ‘된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육성력’을 갖추고 있더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모두 61가지의 간파력에 관한 글과, 23가지의 매혹력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17가지의 육성력에 관한 이야기로 정리해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성공과 행복을 쟁취하는 여자들의 101가지 비밀무기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는 주장입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될 성 부른 사람’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더라는 이야기에서 잠시 읽기를 멈춥니다. <퍼스트 클래스 승객은 펜을 빌리지 않는다>에서도 짚었던 이야기입니다. 책읽기를 즐기는 사람으로서 으쓱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만, 책을 멀리 한다고 해서 될 성 부른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공한 남자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그려지는가. 돈이 많고 매너도 좋고, 세련되고, 폼 나며, 빈틈이 없는 남자를 떠올리는 여성이 많을 것이다.(89쪽)”라고 적고 있는 것을 보면 저자가 말하는 ‘될 성 부른 사람’은 돈을 잘 벌거나 지위가 높은, 즉 세속적 의미의 ‘된 사람’을 의미한다는 느낌이 강해서입니다. 책을 즐겨 읽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어 세속적인 성공하고는 거리가 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매혹력을 갖춘 대표적 여성으로 꼽고 있는 스튜어디스는 체계적인 훈련의 산물이라고 적었습니다. 균형잡힌 자세, 미소, 헤어스타일 등등 세심한 부분까지 많은 시간을 들여 훈련한 결과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만들어진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훈련에 마음까지 따라가는 것일까?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직업적인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즉 가식적일 수도 있겠다는 것입니다. 될 성 부른 남자를 유혹하기 위하여 만들어내는....

 

‘육성력’이라는 것도 다시 생각해보면 남자를 자신이 원하는대로 만들어낸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과연 그 남자는 언제까지나 육성하는 대로 따라 올 것인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남자도 지키고 싶은 무엇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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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카로 가는 길 - 이슬람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영적 가르침
무함마드 아사드 지음, 하연희 옮김 / 루비박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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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중동국가들과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해오고 있어 이미 이슬람과 친숙하신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만, 필자는 그런 인연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카타르 등 중동국가들과 보건의료관리체계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면서부터는 아무래도 관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최근 터키에서 실종된 우리나라 젊은이가 이슬람 무장단체에 가입한 정황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중동지역과 이슬람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 해 말 우리말로 번역된 <메카로 가는 길>은 1954년에 출간된 대표적인 이슬람교의 안내서입니다. 이 책은 유럽 출신의 저명한 무슬림 작가 무함마드 아사드(1900-1992)가 이슬람에 매료되고 무슬림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자전적 기록입니다. 1900년 오스트리아령이었던 폴란드의 르보프(지금은 우크라이나령이라고 합니다)의 유복한 유대계 가정에서 레오폴트 바이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저자는 대를 이어 유대교 랍비가 되는 가풍 덕분에 일찍 유대교의 경전을 공부하게 되었지만,그 결과는 오히려 유대교에 대하여 회의였다고 했습니다. “경전 전반에 걸쳐 강조되는 도덕적이고 올바른 삶, 예언자들의 신심 등에는 물론 경의를 표했지만, 구약이나 탈무드에서 말하는 신은 너무 과도하게 의례에 집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히브리인 외에 다른 민족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71쪽)”

 

모험과 사건에 관심이 크던 10대 후반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는데 나이가 어려 참전이 불가능했고, 결국은 종전 후에 빈대학에서 2년간 예술사와 철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서구의 종교가 말하는 ‘신의 뜻’이란 인간의 독단적 판단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스스로 신을 ‘정의’할 권한이 있다고 여기는 독선적인 종교수호자들의 자의적 해석으로 인해 세상이 혼란에 빠진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그만두고 기자의 길로 선택했다고 합니다. 독일의 권위 있는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자이퉁>의 외신부 기자로 아라비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이란, 이라크,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곳곳을 누비면서 중동 사람들의 시선으로 본 중동의 문제들을 기사로 송고했고, 그의 기사는 유럽사회는 물론 중동국가의 유력자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 유럽인이 이슬람을 알게 되고 그들의 사회에 동화되는 과정을 묘사한 <메카로 가는 길>은 이슬람과 서구 사이의 높은 장벽을 조금이라도 낮추어보려는 의도에서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자는 “그리하여 실체를 드러낸 이 책은 인도로 가기 위해 아랍을 떠나기 전까지 리비아 사막과 눈 덮인 파미르 고원, 보스포루스 해협과 아랍 해 사이에 있는 거의 모든 국가를 여행하며 보냈던 시간을 기록하고 있으며, 1932년 여름이 끝나가던 무렵 메카로 향했던 마지막 사막 여행의 시점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15쪽)”고 요약하였습니다. 저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이븐 사우드국왕의 요청으로 나즈드와 이라크 사이 국경지대에 위치한 카스르 아타이민에 가게 되었는데, 임무를 마치고 메카로 돌아가는 길에 네푸드사막을 지나 고대 오아시스 타이마에 들러 메카로 가기로 했다고 합니다.

 

‘낙타 두 마리가 저마다 한 사람씩 태운 채 터덜터덜 앞으로 나아간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타오르는 듯한 붉은빛 모래언덕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숨 막히는 침묵이 주위를 감싼다. 휘청휘청 걷는 낙타 등에 올라타고 있노라면 최면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태양도, 뜨거운 바람도, 사막도 모두 뇌리에서 사라진다.(18쪽)’라고 시작하는 사막여행에 대한 기록 사이사이에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자가 이슬람에 귀의하게 되는 과정은 물론 진정한 이슬람정신이 무엇인지, 서구와 이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시각의 차이가 무엇인지 등을 적고 있습니다.

 

그저 막막하기만 할 뿐 사람의 그림자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사막에서도 사람들을 만나고 그와 같은 만남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옛날이야기가 이끌려 나오고 있습니다. 토끼 한 마리가 만들어낸 작은 사건은 저자를 사막폭풍으로 몰아넣고, 사막의 지형을 바꾸어놓은 폭풍 때문에 길을 잃은 저자는 물 한 방울 없이 사흘 동안 사막을 헤매기도 합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저자는 “공포와 굶주림, 궁핍과 실패로 반드시 너희를 시험할 것이다. 그래도 굴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고난 앞에 ‘보라, 우리는 신께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38쪽)”라는 코란의 한 구절을 떠올립니다. 사막은 텅 비어있지만 역설적인 아름다움으로 채워져 있고, 그런가 하면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납치된 일본인 기자들을 처형하겠다고 하는 이슬람국가(IS)의 위협은 결국 인질을 처형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고 합니다. 중동과 아프리카의 이슬람지역이 이방인들에게는 위험천만한 곳이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이 지역을 누빌 때만하더라도 사막의 베두인족들까지도 이방인들에게 우호적이고,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슬람국가(IS)는 수니파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라고 합니다. 지중해지역원이 <지중해의 전쟁과 갈등; http://blog.joins.com/yang412/13580816>에서 이슬람원리주의에 대하여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1300여년 이상을 아랍민족에게 보편적 삶의 방식을 자리잡아온 이슬람은 정교일치의 지도이념으로 강력한 정치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세에 들어 부상한 서구문명의 영향을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서구문명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하여 내세운 아랍민족주의와 같은 세속적 정치이념 역시 실패로 귀결되면서 결국은 이슬람만이 유일한 해결방안이라는 인식이 태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통이슬람이 정치현실에 무관심해지고 부패하면서 무슬림 공동체가 쇠락해진 것이라고 생각한 이슬람사회가 초기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즉 이슬람부흥의 단초를 전통에서 찾아내겠다는 인식을 가졌던 것인데, 세계문명의 용광로 역할을 했던 초기 이슬람의 ‘열린 인식’과는 맥을 달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서구의 발전된 문명을 수용하여 이슬람국가를 개혁해야겠다고 행각한 집권자들의 세속적 정책에 대항하기 위하여 급진적이고 배타적인 행보를 택한 이슬람원리주의가 1970년대 말에 이란에서 이슬람혁명이 성공하면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특히 일부 급진적 성향의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의 과격한 무장활동은 대다수의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이 테러리스트로 오해받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슬람세계가 문화적 쇠락에 빠져있는 원인에 대하여 저자는 카이로 알아자르대학의 신학자 무스타파 알 마라기의 설명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미 몇 세기 전부터 진정한 학자들이 나오지 않고 있어요. (…) 과거 추동력은 거의 소멸됐어요. 발전이 있으려면 남의 생각을 반복하기보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저 암송이니 하고 있으니....(218쪽)” 7세기 예언자 무함마드가 창시한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이룩한 이슬람공동체는 다음 세기에는 동으로는 인도북부, 북으로는 카스피해 북쪽, 서로는 아프리카 북부를 거쳐 유럽의 이베리아반도에까지 영역을 넓혔습니다. 이토록 광대한 영역을 다스리기 위한 철학을 세우기 위하여 그리스문명은 물론 페르시아, 인도, 멀리는 중국의 문명까지도 받아들여 의학, 응용수학, 천문학, 점성술, 연금술, 논리학 등 다양한 부문에서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입니다.(정인경 지음, 동서양을 넘나드는 보스포루스 과학사 106~121쪽, 다산에듀 2014년;  http://blog.joins.com/yang412/13572745) 그런데 수백 년에 걸쳐 번창했던 이슬람과학은 정치적으로는 십자군전쟁으로 사회가 분열되고, 종교적으로는 보수화되면서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일면으로는 무슬림 세계가 쇠락한 원인을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두고 있는 서구의 시각이 틀리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나 유대교에 비하면 이슬람은 종교라 부르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이슬람에는 사막 특유의 광신, 미신 숭배, 어리석은 운명론이 뒤섞여 있어 인간을 우민화의 사슬로 옭아매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사회에 들어가 직접 체험한 저자가 보기에 서구의 이런 시각은 왜곡된 것으로 코란은 신의 창조물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지적인 욕구와 육체적 충동, 영적인 갈구와 사회적 필요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슬람세계가 퇴보하고 있는 것은 이슬람이라는 종교 자체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무슬림이 이슬람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서구문명 역시 인간의 육신과 사회적 필요, 그리고 영적 욕구의 조화를 실현하는데 실패했다고 보았습니다. 자신들이 발전시킨 문명이 세상에 행복과 빛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오만한 서구인들은 18~19세기에는 기독교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매몰되어 전 세계에 전파시키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이제 그들의 종교는 동력을 상실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종교를 대신해서 과학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서구식 라이프 스타일’을 전파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신께서 주신 선물임을 깨닫지 못하고 그 자체로 숭배의 대상이라 착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331쪽)’는 것입니다. 순수함이나 자연과의 교감 따위는 잃은 지 오래이며 스스로를 고립시키기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형이상학적 방향성을 잃었기에 기계와 기술에 의존하여 실존을 증명하려 애를 쓰게 되었는데, 기계는 새로운 욕망과 두려움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기계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심화되었다고 합니다. 애초에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기계를 발명했다는 목적은 사라지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기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기계를 탐욕스러운 신으로 탈바꿈시켰고, 기계를 만들어내는 과학자들이 사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슬람 세계의 매력에 빠져들던 저자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아프가니스탄을 여행할 때였다고 했습니다. 당시 저자는 눈덮힌 힌두쿠시를 넘어 헤라트에서 카불로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한 신앙심이 먼 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타고 있던 말의 편자가 벗겨지는 바람에 쉬게 된 하자라자트에서 만난 하킴과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믿음이 확고했던 무슬림들이 불과 한 세기만에 자신감을 상실하고 서구의 이념과 관습에 쉽게 물들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명확하고 단순한 예언자의 가르침이 억측과 말장난에 가려지고, 이슬람의 가치관을 모두 부정하는 아타튀르크 같은 가짜 무슬림이 중흥의 상징이 되어 버린 이유를 묻자, 하킴은 저자에게 ‘당신도 무슬림이 아닙니까?’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저는 무슬림은 아니나 이슬람의 아름다움을 무슬림들이 그저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런다’고 대답하였는데, 하킴은 ‘당신은 무슬림이 맞습니다.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요’라고 개종을 촉구했다고 합니다. 1926년의 일입니다. 베를린으로 돌아와 미루던 결혼을 한 직후에 아내와 함께 전철을 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창 번영의 물결을 타고 있던 시절임에도 전철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지옥 같은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집에 돌아와 펼친 코란에서 “무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탐욕은 계속 커진다. 아니다. 그대는 결국 깨닫게 될 것이다. (…) 그날이 오면, 귀중한 인생을 무엇에 썼느냐는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347쪽)”라는 구절을 읽고는 바로 베를린의 작은 무슬림 공동체 지도자를 찾아가 ‘신 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가 그의 전령임을 증언한다.’라고 선언하여 개종을 하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슬람을 미화하고자 하는 의도나 이슬람교를 포교하려는 목적으로 이 책을 쓴 것은 아니고, 다만 이 책을 통해 무지와 편견으로 가려져 있던 안개가 걷히며 이슬람의 정신과 문화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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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의 역사 에코 앤솔로지 시리즈 2
움베르토 에코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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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은 <위대한 미술책; http://blog.joins.com/yang412/13494632>에서 ‘곰브리치에서 에코까지’라는 부제에 걸맞게 <미의 역사; http://blog.joins.com/yang412/13508185>, <추의 역사> 그리고 <궁극의 리스트; http://blog.joins.com/yang412/13493806>까지 에코의 책들을 꼽았습니다. 순서대로 읽어보는 것이 옳았을 터이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추의 역사>가 제일 늦었습니다. 아마도 미에 대한 관점을 역사적으로 정리한 것은 있어도 추한 것에 대한 관점을 역사적으로 정리한다는 것이 가능할까하는 의구심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또 한 가지는 <미의 역사> 나아가 <궁극의 리스트>를 읽으면서 많은 인내심이 필요했던 기억 때문에 읽기를 미루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진숙이 ‘에코의 대단한 기획은 현실논리에서 끝내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176쪽)’라고 적은 것은 ‘그가 이 책에서 제시한 작품들은 대부분 일반적인 미술사에서 보기 힘든 작품들이다. 그림으로 말하면 현기증이 날 만큼 많은 사물들의 이미지가 집적되어 있고, 문학으로 마하면 마침표를 찾기 힘든 기나긴 문장의 나열로 이루어진 것들이다.(176쪽)’ 물론 인용하고 있는 작품들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간간이 자신의 생각이 섞여들기는 하지만 그 인용한 원전의 일부를 모조리 나열하고 있는 열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적었던 것 같습니다만,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라서 관심있는 분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의 경우는 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전혀 설명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은 <미의 역사>의 편집방식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각설하고 에코는 미에 대한 관념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를 겪기는 했지만, 그 변화를 뒤쫓을 수 있는 반면 추에 대한 관념의 변화를 뒤쫓아 정리한 결과물을 찾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대에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가 괴기스럽고 추한 이미지를 신화의 한 부분으로 창조해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렇게 창조된 신화는 시대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되면서 예술작품으로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지옥과 악마 괴물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가 점차 정교한 이론을 정립하면서 종교와 관련하여 천국에 반대되는 지옥, 천사와 대립하는 악마의 존재를 표현하게 되었고, 악마의 꼬임이 넘어가 고통 받는 인간들의 모습을 추하고 잔혹하게 표현하기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중세에 이르러서는 사탄과 마녀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역시 괴기한 분위기가 강조되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질병에 의하여 변형되어가는 인간의 모습 역시 보기에도 추하였을 것입니다.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사물들이 쇠락하거나 어지럽게 나뒹구는 모습도 역겹고 추한 것이 되고 말았고, 그런 것들을 추상적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미적인 것을 패러디하여 미에 대비된 추한 모습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면 추한 모습을 상상하던 방식에서 추한 것들을 보이는대로 그려내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다시 추한 모습을 재창조하여 초현실적으로 표현하기에 이르렀으니 추에 대한 관념 역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모해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에코가 집대성한 것들을 두고 이진숙은 ‘추라고 쓰고 미라고 읽다’라고 개념적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즉 인간은 추를 통해서 미를, 거짓을 통해 진실을, 죽음을 통해 삶을 말할 수 있게 됨으로써 선과 미의 공고한 관계가 무너지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즉 ‘아름다운 악마’는 ‘아름다운 천사’보다 더 매력적인 존재가 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맞게 된 것입니다. 에코의 대단한 기획의도를 파악하기에는 아직 미학에 대한 저의 공부가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아마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 다시 읽어보면 또 다른 시각이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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