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오퍼스 9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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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진을 모티프로 한 <사진에 관하여; http://blog.joins.com/yang412/13505861>와 <타인의 고통; http://blog.yes24.com/document/7834214>을 읽으면서 수전 손택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독특한 면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녀의 주장에 공감하는 점도 많지만, 동의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습니다. 그런 인연에다가 특히 질병에 대한 그녀의 사유를 담았다고 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각기 따로 출판되었던 <은유로서의 질병(1978)>과 <에이즈와 그 은유(1989)>를 하나로 묶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볼 때는 일반적으로 있는 그대로 기술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담아 설명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손택은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이미지나 은유 등의 해석을 덧씌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고 주장해왔다. 그렇지만 그녀의 글에서도 나름대로의 해석한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손택은 결핵과 암에 대한 은유의 역사를 살피고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다섯 살 때 결핵을 앓다 숨진 아버지와 마흔 두 살 때 본인이 앓게 된 유방암이 있습니다. 특히 어머니는 아버지가 결핵으로 숨졌다는 사실을 손택에게 철저하게 숨겼다고 하는데, 그 배경에는 결핵이라는 전염병의 가족력이 손택이 알아서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어머니의 배려를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질병, 특히 치유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질병을 신비화하는 경향을 비판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손택이 <은유로서의 질병>을 쓴 십년 후에는 친구가 에이즈로 세상을 하직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에이즈라는 질병을 곱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분위기에 경종을 올리기 위하여 <에이즈와 그 은유>를 발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은유로서의 질병>을 발표한 시점이나, <에이즈와 그 은유>를 발표한 시점의 의학수준으로 결핵이나 암, 그리고 에이즈는 일반적으로 치유가 가능한 질환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질환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신비화하거나, 혹은 종교적 이유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비유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입니다. 작가는 문학작품 혹은 개인서한 등을 통하여 이들 질병과 관련된 서술을 두루 인용하면서, 그와 같은 서술이 나오게 된 배경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질병에 대한 저자의 인식이 분명하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결핵은 하나의 기관, 즉 폐의 빌병으로 알려진 반면에 암은 어느 한 기관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다음, 몸 전체로 확산되는 질병으로 알려져 있다.(23쪽)”라고 적었습니다만, 결핵은 우리몸의 대부분을 침범하는 전염병이며, 암은 특정 기관마다 특정한 종류의 암이 발생할 수 있고, 신체로 전이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는 다양한 행동양식을 보이는 질환인 것입니다.

 

질병에 대한 작가의 리뷰는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질병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지 않는 과거의 은유가 과연 질병이 생기는 기전이 상당히 밝혀지고 치유가 가능하게 된 현재의 시점에서 재해석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다시 예를 들면, “결핵이 병든 자아의 질병이듯, 암은 타자의 질병이다(101쪽)”라는 저자의 주장이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질병은 늘 사회가 타락했다거나 부당하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고발해 주는 은유로 사용되어 왔음’을 지적하고(106쪽), 오히려 이러한 상상력을 부추기기보다는 가라앉히려는 목적으로 질병의 은유에 관한 글을 썼다고 하였습니다. “질병이 가장 큰 불행이듯이, 질병이 가져오는 가장 큰 불행은 고독이다. 질병이 감염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환자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찾아오지 않을 때, 의사조차도 찾아오는 것을 두려워할 때.... 이것은 환자에 대한 사회적 추방이며 파문이다.(163쪽)”라는 부분이야말로 저자의 생각이 잘 드러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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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 - 루이스 세풀베다 산문집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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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칠레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루이스 세풀베다의 산문집 <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칠레는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FTA를 체결한 나라입니다만, 지리적으로 먼 탓인지 관심이 낮은 것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술을 끊은 탓에 칠레산 와인을 마실 기회가 없어서일까요?

 

칠레는 남아메리카대륙의 서쪽으로 태평양을 끼고 남북으로 약 4,300km에 달하지만 폭은 175km인 띠모양으로 늘어진 나라입니다.3세기에 걸친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 1810년 독립을 선언하였고, 1818년에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민주주의를 따라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하여 왔지만, 20세기 초반 군부 쿠데타로 독재정권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1964년 기독교민주당 정권으로 거쳐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사회주의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197년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공군 장성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였다. 16년간의 군부독재기간 동안 정치적 반대자들을 고문하고 학살하였는데, 피살자가 3000여명, 고문피해자가 만여명, 가혹행위를 당한 사람이 10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피노체트의 독재정권에 대하여 민주화운동이 이어져 1989년에는 선거를 통하여 정권교체에 성공하였습니다.

 

<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는 피노체트 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펼치다가 라틴 아메리카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떠돌면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들을 담담하게 적고 있습니다. 특히 가난과 독재정권 때문에 꿈을 잃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칠레의 아름다운 자연을 파괴하는 자본의 손길에 대한 격렬한 분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의 대표작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의 실제 주인공인 노인과 인디언부족을 만나게 된 과정도 읽을 수 있습니다. <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를 읽어가다 보면 민족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이 절로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산문에서부터 칠레 사람들의 지극한 자존심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피노체트 독재가 무너지고, 일 주일 뒤 머물고 있던 독일을 떠나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를 찾아간 세풀베다가 라 빅토리아 거리를 찾아가던 장면을 이렇게 그렸습니다. “산티아고 시민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구경하러 몰려든 관광객들이나 이것저것 캐묻고 다니는 사람들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다.(24쪽)” 사실 남이 살고 있는 곳을 방문했을 때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 첫 번째 산문은 20여년 전에 기고한 기사이기도 합니다. <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가 그의 발길이 닿은 다양한 곳에서의 경험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첫 번째 글이 그에게는 매주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20여넌 전에 쓴 육필원고를 다시 만났을 때의 느낌은 어떨까요? “누구든 오래전에 쓴 글을 우연히 발견하면 오랜만에 자기 자신을 만난 듯 가슴이 뭉클해지기 마련이다. 글을 읽자 과거의 기억이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9-10쪽)”

 

이 글은 사진작가 안나 페터젠이 찍은 아이들의 사진에서 발견한 순수한 모습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산티아고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이자 억압과 고통의 상징인 라 빅토리아에 사는 아이들이었지만, 그들은 해맑은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독재정권이 무너진 시점에 이 아이들이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해서 그들의 사진을 다시 찍기 위하여 찾아갔던 것입니다. 8년 전에 해맑은 모습이던 그 아이들 가운데 하나는 어쩔 수 없어 물건을 훔치다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졌고, 수소문해서 찾은 아이들은 담배를 달래서 피우면서 ‘꿈도, 희망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고 말합니다. 한창 꿈에 부풀어 있을 나이의 십대가 꿈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삶이 얼마나 신산한 것인지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그 아이들을 모아 다시 사진을 찍는 작가 안나는 손수건을 꺼내 눈을 훔쳤다고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세풀베다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고 적었습니다. 산티아고에 사는 아이들의 모습이 부끄러울 수도 있지만, 이를 알리기로 한 것은 “어린아이들의 순수함과 따뜻한 사랑이 넘쳐 흐르는 세계를 힘껏 지키고자 하는 전 세계 남자들과 여자들이 읽게 되기를(62쪽)”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글을 쓴다고 해서 세풀베다가 문약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면 실수하는 것입니다. 망명길에 머문 리카라콰에서는 <시몬 볼리바르 국제 여단>의 의용군으로 지원하여 총을 들고 싸운 경험도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핏줄에는 프랑스혁명을 이끈 민중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혁명정신은 여전히 마음 속에 살아있다고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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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심청 - 사랑으로 죽다
방민호 지음 / 다산책방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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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의 고전을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한 작품을 만나는 경우가 아주 드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판소리 수궁가를 새롭게 해석한 방민호교수님의 <연인 심청>을 만나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판소리 심청가는 물론이고, 책으로 된 심청전을 제대로 읽은 기억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당연히 심청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버지 심봉사의 몫도 적지 않습니다. 딸을 낳다 죽은 아내를 대신하여 갖은 고생을 해가면 젖먹이를 키워낸 심봉사가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다 개울에 빠지고 말았는데, 공교롭게도 심봉사를 구해준 것은 몽운사 화주승이었습니다. 화주승은 ‘세상을 다시 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객쩍은 신세타령을 하는 심봉사에게 공양미 삼백석이면 ‘눈을 뜰 수도’도 있다고 부축입니다. 그리고 보면 그 옛날에도 근거없는 의료행위를 하는 무면허 의사들이 도처에 숨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간사해서 공양미 삼백석에 눈을 뜰 수 있다는 허황한 희망을 품게 된 심봉사는 입이 가벼운 사람이었던지 딸 청이에게 전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청이는 임당수를 지나는 뱃사공들이 제물로 바칠 처녀를 산다는 도사공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제물로 사달라고 청합니다. 이리저리해서 청이는 임당수에 제물로 바쳐지고, 공양미로 바칠 삼백석을 얻은 심봉사는 몽운사에 시주를 하지만 눈은 떠지지 않습니다. 한편 임당수에 뛰어든 청이를 동해 용왕이 구해서 연꽃이 담아 세상으로 내보내고, 연꽃을 본 뱃사람들이 건져 왕궁에 바쳤다는 것이죠. 연꽃에서 나온 청이를 본 왕이 왕비로 삼았고, 청이는 아비를 걱정하여 맹인잔치를 열었는데, 잔치에서 만난 아비를 알아보고 부르는 바람에 놀란 심봉사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행복한 결말에 이르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우리의 고전을 그대로 적으면 읽어도 별다른 느낌이 없을 터인데, 작가는 우리가 아는 주요 등장인물에 조역을 대거 배치하고 있습니다. 열다섯 심청을 둘러싼 삼각관계 귀동이와 윤상이입니다. 귀동이 어머니가 청이네 집을 제집처럼 도와주지만 정작 청이의 마음은 건너 마을 장상서 댁의 서자인 윤상에게 끌리는 모양입니다. 외로운 처지가 비슷해서일까요? 부모보다는 사랑을 선택하는 요즈음 젊은이와는 달리 청이는 아버지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선택을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생각이 복잡해졌습니다. ‘평생을 눈 못 보는 아비를 봉양해야 하는 자신의 신세에 절망하였기 때문은 아닐까?’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어려운 살림임에도 밥투정이나 하고 투전판을 기웃거리는 아버지를 둔 딸이라면 충분히 절망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게다가, ‘너나 나나 아버지답지 않은 아버지 때문에 고생이구나’하는 윤상의 말이나, ‘오매불망 눈 뜨기를 원하는 아버지를 위해 자기를 송두리째 바칠 수 있다면, 그것은 부질없는 삶을 결말지을 수 있는 가장 값진 이가 되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는 심청의 모습에서 유추하게 되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작가는 또 다른 장치를 두었습니다. 심청과 심봉사가 천계의 자미원에서 죄를 짓고 인간세계로 귀양온 몸으로 죄를 씻어야 하는 숙명이라는 점입니다. 청이는 심지어 죽음으로 아비를 봉양하는 모습으로 상제의 용서를 받게 되지만, 심봉사는 작가가 새롭게 투입한 계투요원 애랑이라는 창부에게 홀려 딸이 목숨과 바꾼 돈을 홀딱 빼앗기고, 그나마 남은 돈마저도 마무리투수 뺑덕어미에게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심봉사의 모습을 보면서 도저히 구제받을 수 없는 바닥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아비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청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심봉사를 구원의 길로 안내하기 위하여 작가가 배치한 장치라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청이의 영원한 보디가드 윤상은 구중궁궐에 숨겨진 암투의 희생양이 될 뻔한 청이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칩니다. 청이는 윤상의 상여를 붙들고 “만약 사람이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이렇듯 한 생애를 걸고서야 이룰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생에 저에게 주어진 운명이란 오라버니를 사랑하고 그 사랑 속에서 행복을 얻음이 아니요, 앞 못 보고 어리석은 아비를 구하여 바른 길로 제도하는 그것이었나 봅니다.(386쪽)”라고 말합니다. 아무래도 작가는 사람은 미리 정해진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천계의 신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인간의 삶에 끼어들어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천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는 합니다만,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모습은 별로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든 <연인 심청>이 계기가 되어 우리 고전을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한 작품들을 쉽게 만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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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증상이 의심되면 즉시 가까운 병원으로 가세요 !!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급성기뇌졸중 치료를 가장 잘하는 병원을 찾는 법

 

http://blog.daum.net/hira-qa/9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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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2015-02-15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정보가 정말로 가치있는것인지.. 효용성이 있는지.. 나아가서.. 잘치료하는 병원이 실제로 있기는 한 것인지.. 아니면 말고인지.. 누군가 상당한 국민의 혈세를 쓴 것인지는 알겠지만.. .. 가늠이 안되는 군요..

처음처럼 2015-02-16 19:37   좋아요 0 | URL
일단 전문가들도 동의하는 평가라는 점을 먼저 말씀드리구요.
기본적으로 환자가 응급실에 도착하면 곧바로 가이드라인에 따라 진료가 시작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환자의 생명을 구하고,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이지요.
정보의 가치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시는 근거는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사회적 뇌 인류 성공의 비밀
매튜 D. 리버먼 지음, 최호영 옮김 / 시공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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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네트워크의 시대라고 합니다. 특히 인터넷을 매개로 사회관계망을 강화하는 SNS, 즉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가 폭발적으로 확산되면서 사회관계망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웹을 통한 소통과 정보의 공유는 사회관계망의 개념 자체를 바꾸었습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사회관계망은 지구상에 등장한 모든 생물체가 이용하여 살아남은 본능 같은 것 같습니다. 다만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얼마나 촘촘하게 망을 짜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사회관계망에 관한 저술들은 이미 적지 않게 소개되어 있지만, 이번 주에는 새로 나온 사회신경과학 분야의 저명인사인 매튜 리버먼교수의 <사회적 뇌, 인류 성공의 비밀>을 읽어보겠습니다. 저자는 철학에 관심을 두고 사회심리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는 사회심리를 연구하면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간의 본질을 파고들다보니 바로 뇌가 인간을 규정하는 중심부위임을 깨닫고 인간의 사회적 행동과 뇌와의 관계를 추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했습니다. 저자는 ‘인간의 뇌는 우주에서 발견된 가장 복잡한 장치’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뇌에는 수십억 개의 신경세포가 존재하며 이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셀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신경적 교규를 주고받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큰 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추상적 사고를 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생존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복잡한 도구를 발전시켜왔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뇌가 크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뇌무게는 약 1,300그램 정도인데, 아프리카 코끼리의 뇌는 약 4,200그램이고 몇 종류의 고래의 뇌는 약 9,000그램에 이른다고 합니다. 일단 덩치가 크면 뇌도 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뇌의 무게로만 따지면 동물들 사이에서 아래쪽에 위치하는 인간도 뇌에 들어 있는 신경세포의 숫자로 따지면 약 115억 개로 수위에 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범고래가 약 110억개 정도로 인간을 바짝 뒤쫓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범고래는 사람들과 당당히 맞서 지구의 한쪽을 지배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경세포의 숫자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뇌의 크기를 신체의 크기와 비교하여 예상치를 벗어나는 정도를 나타낸 대뇌화(encephalization)지수입니다. 대뇌화지수를 따지면 인간은 다른 동물들을 월등하게 따돌리면서 수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도 인간의 뇌무게와 비슷한 병코돌고래의 대뇌화지수가 8이 조금 안되는 인간에 이어 5보다 조금 큰 숫자로 뒤를 잇고 있습니다.

 

인간의 뇌가 큰 이유는 신피질이 크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신피질이 다른 동물에 비하여 큰 이유를 따지는 일은 어쩌면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나타난 생물종들 가운데 진화과정의 정상에 있는 인간의 신피질이 진화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필요에 의하여 조금씩 신피질의 부피가 늘어났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신피질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현세의 우리는 돌연변이로 큰 신피질을 가지게 된 행운을 누린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즉 커진 신피질을 제대로 활용하여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진화인류학자 로빈 던바는 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 즉 인간의 신피질이 커진 이유는 영장류가 집단을 이루어 살면서 더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매튜 리버먼교수의 연구는 기능성MRI를 활용한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람의 신체적, 정서적 활동으로 뇌의 어느 구역이 활성화되는지 확인이 가능한 검사장비입니다. 예를 들면 왕따를 당하여 사회적으로 고립되거나 버림을 받는 고통을 받으면 전대상피질이라고 하는 뇌구역이 활성화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때문에 비통해하는 사람,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져 슬픔에 잠긴 사람, 주위의 부정적 평가로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 심지어는 거부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상대를 바라보는 사람에서도 배측 전대상피질이 활발한 활동을 보인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아스피린과 같은 진통제를 처방하게 되면 사회적 고통을 덜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신체적 통증을 치료하는 진통제가 마음의 고통을 다스리는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회적 관계에 관심을 가지게 된 진화적 동기는 고통을 회피하고 쾌감을 얻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저자는 사회적 연결을 추구하는 동기가 갓난아기 시절부터 우리 모두에게 절박한 실제적 욕구라는 점을 실험자료를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출산과 육아 역시 단순한 관심을 넘어 혈연과 가족이라는 기본적인 사회적 유대관계를 만드는 일인데, 이러한 사회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경우 역시 신체적 장애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건강에 해롭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사회적 유대에 대한 의존성 역시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의존도가 높은 사람은 사회적 유대가 흔들릴 때마다 심리적 고통을 크게 받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더 노력을 기울이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 유대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타인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저는 가위 바위 보를 잘 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잘 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타인의 마음을 읽으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 증명한 것은 프리츠 하이더였다고 합니다. 저자의 주장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또 그것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한다(162쪽)”라는 것입니다. 19세기 독일 철학자 프란츠 브렌타노가 제시한 ‘지향적 사고가 인간심리의 핵심’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를 토대로 한 사회적 지능 역시 대뇌의 신경망이 작용한 결과라고 합니다. 특히 배내측 전전두피질, 측두두정 접합, 후대상, 측두구와 같은 부위가 참여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전두엽의 전운동피질, 전두정간구, 하두정소엽을 포함하는 거울체계의 발견은 인간이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신경과학은 역시 어렵죠? 신경병리를 전공한 저 역시 이런 부위가 어디쯤일 것이라고 가늠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사회적 유대에 의존하는 정도는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을 앞서 드렸습니다만, 제 경우는 의존도가 비교적 낮은 것 같습니다. 저자는 저 같은 사람을 ‘사회적 외계인’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저자 역시 그 범주라고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자는 사회적 유대관계의 형성에 어려움을 겪는 자폐증을 설명하는데 상당히 공을 들였습니다. 인구의 1퍼센트가 앓고 있다는 자폐증은 사회적 상호작용과 언어 소통의 장애 그리고 반복적 행동을 주요 증상으로 합니다. 저자는 ‘공감이 사회적 마음의 꼭대기라면 자폐증은 사회적 마음의 골짜기에 해당한다(243쪽)’라고 비유하였습니다. 자폐증이 마음이론 능력의 결함과 관련이 있다는 점은 상당한 공감을 얻고 있지만, 마음이론만으로는 자폐증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마음이론이란 경험, 내재적 상태 및 행동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사고체계를 의미합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실제 세계의 경험이 행동으로 이행하기까지에는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신념, 지식, 동기, 정서, 의도 등의 내재적 상태, 즉 마음이 존재하며, 이러한 마음이 행동을 매개하고 결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자폐증 환자가 보이는 마음이론 능력의 장애는 거울체계에 문제가 생긴 탓으로 설명하는 ‘깨진 거울 가설’을 인용합니다. 자폐증 환자가 다른 사람 흉내를 내는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입니다. 자폐증 진단이 통상적으로 세 살 이후에 이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하여 한두 살 때의 홈비디오를 분석해보면 자폐증으로 진단받을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인용합니다. 그런데 기능성MRI검사결과를 보면 자폐증 환자의 거울체계가 특이하지만 자폐증의 여러 증상에 분명하게 대응시킬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하여 자폐증의 발병과 관련하여 ‘강력한 세계 가설’에 무게를 두기도 합니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강력한 세계가설은 ‘자폐증이 있는 아이들은 사회적 세계에 대해 둔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민감한 것은 아닐까?(260쪽)’라는 의문에서 출발합니다. 어린 시절의 스트레스 때문에 사회적 세계를 회피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심리화 체계의 정상적인 성숙에 필요한 사회적 입력들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자폐증 환자의 유전적 소질 때문에 사회적 세계에 대해 둔감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종의 반직관적인 이론으로 상당한 양의 경험적 근거가 쌓여가고 있지만, 아직은 본격적으로 수행된 연구가 별로 없다고 합니다. 자폐증은 여전히 다수의 잠재적 원인과 발달경로가 개입된 매우 복잡한 심리장애로 분류되고 있습니다만, 저자는 강렬한 세계 가설을 희망적으로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회적 유대를 강화시켜가는 과정에서 타인과 연결망을 만들고, 타인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내게 되면 다음 단계는 타인과의 조화를 이루는 단계가 될 것입니다. 타인과의 관계를 조화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자신을 통제하는데 실패하면 타인으로부터 소외될 뿐 아니라 그 정도가 심각하다면 사회에서 퇴출될 수도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은 의과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최고의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의사들 가운데 만약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또다시 의사가 되겠다고 응답한 사람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의과대학에 입학하기 위하여 엄청난 자제력를 발휘하고 무수한 시간을 쏟아 부어야 하고, 막상 의과대학을 졸업하더라도 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 행복이 따라오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의사가 되는 것은 의사 자신보다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더 가치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저자는 사회적 관계망의 확대를 통하여 인류는 더 현명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사회 안에서 타인들과 관계를 연결하고, 타인의 마음을 읽어내며,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 스스로를 통제하는데, 일련의 과정들은 대뇌의 신경망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모두에서 인터넷을 매개로 사회관계망을 강화하는 SNS가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나 직장 내의 ‘왕따’, 아동 학대, 은둔형 외톨이, 사이코패스, 반윤리적 범죄 같은 문제들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습니다. 일본의 정신과의사 오카다 다카시는 ‘개인, 개성, 자아만을 존중하는 사회적 풍토가 인간의 사회성을 후퇴시켰으며, 이로 인해 타인의 감정, 정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급격히 상실되었다’라고 주장합니다(오카다 다카시 지음, 소셜 브레인, 브레인월드, 2010년). 그리고 최첨단 네트워크는 결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소셜은 기계가 매개하는 건조한 것이 아니라, 원초적이며 인간적인 관계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이 결코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회적 관계망 하나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 오히려 위험해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 점에서 하버드대학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행복학’ 강좌를 이끌고 있는 숀 아처교수의 주장은 참고할만합니다. 즉, 지능지수(IQ), 감성지능(EQ), 그리고 사회지능(SQ)을 통합하여 행동과 실천으로 옮기는 긍정지능이야말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손 아처 지음, 행복을 선택한 사람들, 청림출판, 2015년).

 

오늘은 고 김광석씨가 행사를 마무리할 때 전했다고 하는 메시지로 리뷰를 마치려합니다. “[북소리] 독자 여러분!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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