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공부가 재미있어지는 순간 - 공부에 지친 청소년들을 위한 힐링 에세이
박성혁 지음 / 다산3.0 / 201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젠 두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름대로의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있어서인지 대학입시에 대한 관심이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입시 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관심이 가는 책읽기였습니다. 사실 ‘공부가 유일한 재미였어요’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정말 특별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요즈음 청소년들은 공부를 잘 해야 남들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어른들의 말이 귀에 딱지가 않을 정도로 듣고 있을 것입니다만, 그 옛날에는 학교에서 수업 열심히 듣고 숙제를 빠트리지 않고 해가면 공부 잘하는 학생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과도 잘 어울려 놀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가방을 마루 귀퉁이에 던져 놓고 나가서는 해가 지도록 놀다 저녁 먹으라고 불러야 집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물론 저녁을 먹고 나면 졸다가 잠들기 일쑤였지요.

 

저는 그랬습니다만, 제 아이들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선행학습은 기본이고, 내신 때문에 체육 예능까지 과외를 해야 했으니 힘들었을 것입니다. 공부를 지겨워하던 아이에게 네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부여받았을 역할이 있었을 것이라면서,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흔한 학원 하나 없는 시골마을에서 실컷 놀다보니 어느 날 갑가기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밀려 있는 공부를 따라잡기 위하여 몰입하다 보니 공부가 재미있어지더라는 자신의 경험을 담은 <이토록 공부가 재미있어지는 순간>의 저자도 있습니다. 서울대 법대, 연세대 경영대, 동신대 한의대에 모두 합격한 저자가 자신의 과거를 들어 공부가 지겨워진 청소년들의 마음을 다독이는 에세이를 냈습니다. 아니 이 책은 자신이 공부에 마음을 두기 시작할 무렵, 그저 ‘너를 믿고 있겠다.’라고 하셨던 체육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책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겠습니다만,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합니다. 공부 역시 일단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마음을 굳게 먹는 것이 제일 먼저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뒤에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책의 어디를 펼쳐보아도 ‘마음’을 먹는 일을 화두로 삼고 있습니다.

 

저자는 아마도 이 책을 청소년들이 읽어서 도움을 얻기를 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내용들은 비교적 고학년이 되어야 이해가 될 법한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최선을 다했다는 말, 함부로 쓰지 마라. ‘최선’이라는 말은 내 자신의 노력이 나를 감동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쓸 수 있는 말이다.”라는 조정래님의 장편소설 <태백산맥>의 한 구절을 인용해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과연 저자는 공부를 해보려 마음을 먹었다는 중학생 시절에 이 책을 읽은 것일까요? 저자가 이 책을 준비하여 내놓기까지 8년 정도 준비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현재 저자의 나이는 20대 후반을 지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요즈음 10대가 바라보는 것과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처음에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할 때만하더라도 10대도 이해하기 쉬운 흐름을 만들어가다가, 어느새 ‘공부는 나를 영혼이 강한 사람으로 단련시킨다’라는 제목처럼 공부를 해야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어른들의 상투적인 말을 꺼내놓고 있습니다. 즉,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예능계로 진출하는 꿈을 꾸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 아이들 역시 공부를 잘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설명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연예계에서 활동할 수 있는데 필요한 것들을 공부하는 일이 자신에게는 최선이겠지만, 그 길을 보다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사를 품은 영어 이야기 - 천부적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영어의 역사
필립 구든 지음, 서정아 옮김 / 허니와이즈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영어공부를 시작한 지가 벌써 50년 가까이 되고 있습니다만, 영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 빌브라이슨의 <빌브라이슨 발칙한 영어 산책; http://blog.joins.com/yang412/13471036>에서 미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영어 단어에 얽혀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 그리고 영어를 둘러싼 미국의 역사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유럽에서 건너온 시점에 머물고 미국 영어에 영향을 미친 요소들, 즉, 인디언들과 이민자들에 관한 이야기 정도에 그쳐 영어의 짧지 않을 영어의 역사를 제대로 조망하기에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영국 작가 필립 구든의 <세계사를 품은 영어 이야기>는 빌 브라이슨과 유사한 구조를 따르지만, 영어의 근원에 이르는 방대한 영역을 다루고 있어 영어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바벨탑 이야기를 인용하여 만국 공통어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만, 인류가 동시 다발적으로 지구상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면 문자는 차치하더라도 당연히 공통적으로 사용하던 언어가 있었을 것입니다.

 

유럽에서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언어들은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고, 중세까지도 라틴어는 유럽사회에서 중요한 언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실생활에서는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마도 로마제국이 무너지고 수많은 나라들로 쪼개지면서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토착어가 만들어지고, 그 언어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니 결국 언어라는 것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역량에 따라 생명이 결정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영어는 영국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영국에는 처음부터 영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섬나라 영국에 처음 살기 시작한 사람들은 켈트인라고 합니다. 따라서 지금은 사라진 켈트어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기원 1세기 초 로마가 영국을 침략하였고 라틴어를 강요하지 않았지만 라틴어가 확산되었는데, 400여년을 지배한 로마인이 돌아간 후에는 라틴어를 사용했다는 흔적조차 사라지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5세기 초 로마인들이 물러날 무렵 유럽의 북서부에 거주하면서 호시탐탐 영국 이주를 노리던 앵글로색슨족이 들어오면서 켈트인들은 서쪽으로 밀려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앵글로색슨족들은 문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문자가 없는 고대 영어가 살아남고 켈트어가 현대의 웨일즈어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대 영어는 현대 영어의 바탕이 되었는데, 여기에는 영국을 침공한 바이킹이라던가 노르망디에서 온 노르만족이 영향을 남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든 이민족들 간의 접촉은 언어를 풍부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던 것인데, 영어에 힘을 불어넣은 것은 제프리 초서와 그 뒤를 이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였던 것입니다. 물론 결정적인 것은 영국을 세계의 제국으로 이끈 엘리자베스1세였고, 이어서 미국이 영어를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현재 지구상에서는 중국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가장 많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가 가장 영향력 있는 언어가 되고 있는 것은 인터넷이라고 하는 기술적 요소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정보가 어떤 언어로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는데, 세계정세는 물론 과학 등 모든 학문분야를 미국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관련 정보들이 대부분 영어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저자는 영어가 형성되고 발전하는데 기여한 다양한 요소들을 꼼꼼하게 챙겨 정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풍부한 자료를 곁들여 눈으로 보는 재미도 있고, 흥미로운 사건의 경우는 별도 상자에 넣어서 따로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 점은 읽는 흐름을 끊는 부작용은 있지만, 특별한 관심을 둘 수도 있는 장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발견한 진전은 영어의 발전에 인쇄술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적으면서도 금속활자가 구텐베르그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아시에서 발명된 것을 유럽에 소개한 것이라고 적은 것인데, 아쉬운 점은 한국에서 처음 발명했다고 적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그랬습니다.

 

영어가 발전해온 과정에 얽힌 세계사적 사건들이 잘 요약되어 있고, 때로는 영어 단어의 기원을 밝히기도 해서 영어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오랫만이야’라는 의미의 'long time, no see'가 피진어에서 기원하였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앞으로는 사용을 자제해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먼저 ‘100세 노인이 창문을 너머 도망칠 근력이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100세 이상 생존한 분들이 많아지고 있다고는 합니다만, 타인의 도움없이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분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첫 번째 의문은 그렇다고 치고, 두 번째로 든 의문은 “이 노인은 왜 창문을 넘어 도망쳤을까”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작가가 분명하게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저 양로원에 웅크리고 앉아 <이젠 그만 죽어야지>라고 되뇐 것은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몸뚱이는 늙어서 삭신이 쑤실지라도, 알리스 원장에게서 멀리 벗어나 실컷 돌아다니는 일이 치 친구처럼 여섯 자 땅 밑에 누워 있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지 않겠는가?(10쪽)”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동기는 참 바람직한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를 소진하는 것보다는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찾아나서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의 트렁크를 훔쳐 달아나고, 우연이라고는 하지만 살인을 저지르고도 이를 은폐하기를 반복하는 일이 가능하겠나 싶습니다.

 

어땠거나 사건은 주인공 알란 칼손이 100세 생일을 맞은 2005년 5월 2일 기념파티를 앞두고 스웨덴의 말름세핑 마을에 있는 양로원의 창문 넘어 도망치면서 시작되는데, 버스터미널에서 우연히 만난 청년이 맡긴 범죄와 관련된 돈 3750만 크로나로 채워진 트렁크를 들고 시외버스를 타고 떠나게 됩니다. 돈을 잃어버린 청년은 알란의 뒤를 쫓게 되고, 알란은 율리우스 욘슨, 베니, 예쁜 언니, 베니의 형 보세를 차례로 만나 범죄조직의 추적을 피하는 과정에서 볼트와 양동이를 살해하지만, 사체를 해외로 빼돌려 수사를 피합니다. 일반인이라면 우발적인 사고로 사람이 죽게 되더라고 이처럼 교묘하게 처리할 방법을 생각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들을 뒤쫓던 범죄조직의 우두머리 예르딘마저도 이들과 의기투합하게 된다는 설정을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진행이 됩니다. 알란이 100세 생일이 되던 2005년 5월 2일부터 스웨덴의 말름세핑에서 시작해서 6월 16일 일행이 인도네시아 발리에 정착하기까지와 1995년 말름세핑에 가까운 플렌에서 태어난 알란이 요양원에서 100세를 맞을 때까지의 행적을 뒤쫓고 있습니다. 알란이 100세가 될 때까지의 행적도 황당무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스페인에서 프랑코총통을 만나고, 미국에서는 트루먼대통령과 친분을 쌓게 되며, 이란에서는 처칠의 목숨을 구하고,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다가 그 정보를 모스크바에 건네주지만, 블라디보스톡에 수감되기도 합니다. 한국전쟁기간 중에 북한으로 탈출하여 김일성과 모택동을 만나기도 하고, 인도네시아를 거쳐 파리로 갔다가 이번에는 미국 CIA의 스파이가 되어 모스크바에 다시 잠입하면서 소련이 붕괴되는데 기여하고는 말름세핑으로 돌아와 요양원에서 지내게 되었다는 이야기의 얼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만난 인연이 결국은 100세가 되던 날 일으킨 사고를 마무리하고 친구의 부인이었던 아만다와 결혼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알란이 100세가 될 때까지의 삶의 궤적이 007시리즈의 제임스본드보다 허무맹랑할 뿐 아니라, 두 건의 살인이 완전범죄가 성립되는 과정이 허술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런 황당무계한 이야기에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였다는 것이 신기하기 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면 최근 판타지물이 주목받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해내는 것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한다는, 뭐 그런 이야기말입니다. 범인이 잡히지 않기를 바라는 심리도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요? 언젠가 이야기가 막히면 등장인물을 죽이고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키던 소설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알란의 생애는 큰 흐름에서 보면 정교하게 짜 맞춘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있을 수 없는 우연이 연속된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깨어보니 꿈이었다고 마무리했더라면 훨씬 공감이 갔을 이야기라서 읽고 나서도 허망하다는 느낌이 진하게 남는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금속의 세계사 - 인류의 문명을 바꾼 7가지 금속 이야기
김동환.배석 지음 / 다산에듀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철기업에서 만든 광고에서 보면 우리가 실생활에서 쓰는 다양한 도구에서 금속을 제외하면 남는 부분이 별로 없어 웃기는 모양새가 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철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금속이 우리의 실생활을 편하고 윤택하게 해주고 있는지 아마 우리는 잘 모르고 사는 것 같습니다.

 

김동환, 배석박사님 역시 <금속의 세계사>에서 ‘금속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서문을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인류를 1만년 전 우연히 금속 물질을 사용하기까지 무려 300만년을 오로지 흙과 돌만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하여 허덕여왔던 것인데, 금속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로 단지 1만년 만에 경천동지할 변화를 일구어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짧은 시간에 금속은 인간의 삶을 변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금속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왔는지에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금속의 세계사에 주목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수십 가지나 되는 금속들 가운데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 구리, 납, 은, 금, 주석, 철, 수은 등 일곱 가지의 금속이 우리에게 다가온 과정을 뒤쫓아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자들은 고고학적 성과는 물론 다양한 분야의 정보를 모아 알기 쉽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제일 처음 실생활에 끌어들인 금속은 구리였습니다. 고고학자들이 찾아낸 자료들을 보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구리제품이 발견된 곳은 이스라엘의 북동쪽, 요르단 국경에 가까운 텔 타프입니다. 이곳은 기원전 5100-4600년에 형성된 고대 유적지인데 대규모 저장시설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2007년 이곳을 발굴하는 동안 길이 41밀리미터 길이의 부식된 구리 송곳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송곳은 이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구리 성분으로 만들어졌고, 놀랍게도 흑해연안의 그루지아공화국에서 나는 구리로 만들어졌고, 지표상에서 얻을 수 있는 구리가 아니라 제련과정을 거친 것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이렇게 고고학적 사실들도 매우 흥미로운데, 구리에 관한 이야기를 로마황제 카이사르가 권력을 잡은 다음 자신의 얼굴을 새겨 넣은 동전을 쓰도록 한 사실을 들어 구리가 우리의 실생활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장소라고는 해도 외국에 있는 장소는 머리에 쉽게 떠오르지 않는 점을 감안하여 저자들은 상세지도를 곁들이는 친절함에 더하여 현지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도록 사진도 첨부하는 성의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당연히 유물의 사진을 기본이구요. 물론 대부분의 금속들이 외국에서 먼저 사용되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야기속에 등장할 틈이 없을 것이라서 섭섭해하실 분들을 위하여 우리나라의 금속사용기술 등에 관해서도 빠트리지 않는 자상함을 보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옛날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놋그릇에 관한 이야기를 구리편에서 소개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된 원인(遠因)이 바로 조선이 개발한 우수한 은제련법을 일본에 전수해주었던 것이라는 사실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서 김감불과 김검동이 함경도 단천에서 채굴되는 납을 가지고 순도높은 은을 더 많이 제련하는 단천연은법을 개발해내는데 성공했다는 기록을 인용하면서, 이는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最高)의 은 제련법의 하나로 중국이나 일본, 또는 서양의 제련법에 비해 순도가 더 높은 은을 추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단천연은법은 중국과 일본으로 전해졌다고 하는데, 특히 일본에 전해진 단천연은법은 일본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에는 대규모의 은이 매장되어 있었지만, 제련기술이 없어 방치되었던 것인데, 바스코 다 가마의 동인도항로의 발견에 이어 중국으로 진출한 유럽의 상인들은 일본의 은과 중국의 자기 등을 엮는 삼각무역을 키우면서 일본은 전세계 은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크게 늘어났던 것이고, 이를 통하여 부를 축적한 일본은 네덜란드로부터 총기류 등을 수입하여 조선을 침략하는 기반을 쌓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으니, 은혜를 원수로 갚은 일본입니다.

 

은 이외에도, 신라의 금관, 조선의 철화백자 등이 당당히 금속의 세계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방대한 자료에 우리의 역사를 녹여낸 저자들의 세심한 배려에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을 어떻게 말할까 - 아버지와 함께한 마지막 한 해
윌리 오스발트 지음, 김희상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뉴스위크는 최근 전 세계적으로 안락사가 확대되고 있다고 전하면서 안락사에 대한 다각적 시각을 소개하였습니다.(2015년 3월 1일자 중앙일보 기사; “극단으로 치닫는 안락사” ; http://blog.joins.com/yang412/13619515)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한 네덜란드에서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의사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2013년에는 4829명의 네덜란드사람이 의사의 도움으로 죽음을 선택했는데, 네덜란드인의 사망 28건 당 1건 꼴이었고, 2002년보다 세 배로 증가한 것이라고 합니다. 네덜란드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한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두 명의 의사가 인정하면 안락사가 가능한데, 매년 그 적용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락사제도의 도입에 찬성했던 네덜란드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해 초에 KBS 1TV의 [TV 책을 보다]에 패널로 초대되어 영국 작가 조조 모예스의 소설 <미 비포 유>에 대한 생각을 말씀드릴 기회가 있었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3369126). 이 책은 라포르시안의 [북소리]에서도 소개를 드렸기 때문에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16274). 교통사고로 목을 다쳐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삶이 불가능한 현실에 절망한 윌이 안락사를 결심하였는데, 마침 윌을 간병하게 된 루이자와의 사이에 사랑이 싹트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이 결심을 번복하지 않는다는 줄거리입니다. 방송에서는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만, 안락사 시술을 받기로 한 날이 되기 전에 윌이 폐렴에 걸려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삶이 고달파 죽음을 결심하고 있는 환자가 굳이 정해진 날짜에 안락사를 시행하기 위하여 치료를 받는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미 비포 유>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만, 안락사를 선택하는 환자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사람들이 받게 될 심리적 충격은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의사조력자살을 다루었던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 http://blog.joins.com/yang412/4074659>가 있습니다. 가족들에게 자신의 병을 알리지 않고 외로운 죽음을 선택한 주인공과 그의 의사친구의 선택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시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던 ‘고개숙인 아버지’에 대한 연민에 묻히고 말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미 비포 유>에서도 아들의 안락사 결정을 번복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던 부모가 결국은 아들의 결심에 따르게 되는데, 만약 부모님이 안락사를 결심하는 경우에 자녀들은 어떤 입장일까 궁금해집니다. 스위스의 언론인 윌리 오스발트의 <죽음을 어떻게 말할까>가 참고가 될 것 같아 이번 주에 소개합니다. <미 비포 유>에서도 소개되었지만, 스위스는 자국민이 아니더라도 합법적으로 안락사를 시행할 수 있기 때문에 안락사가 불법인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안락사를 시술받기 위하여 스위스로 간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아버지가 선택한 죽음을 ‘자유죽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유죽음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http://blog.joins.com/yang412/13302734> 가운데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너무 늦게 죽고 몇몇 사람들은 너무 일찍 죽고 있어’ 그래서 “알맞은 때에 죽어라”하고 차라투스트라는 가르친다고 합니다. “삶을 완성시키는 자는 희망을 가진 자와 맹세하는 자들에 둘러싸여 승리에 찬 죽음을 맞는 것처럼 인간은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나를 찾아오는 자유로운 죽음을 권한다.(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25쪽, 민음사 2004년)”라고 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작가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에서는 자살을 대체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자살이라는 단어가 금기시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이란 무수한 선택으로 구성되는 것인데, 탄생의 순간부터 죽어가는 과정이 삶이라고 한다면, 어느 시점에서 죽기를 선택하는 것 역시 각자의 삶의 주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으로 인정해주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장 아메리는 “자유죽음은 부조리하지만,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자유죽음이 갖는 부조리함은 인생의 부조리를 늘리는 게 아니라 줄여준다. 적어도 우리는 자유죽음이 인생과 관련한 모든 거짓말을 회수하게 만든다는 점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 오로지 그 거짓이라는 성격 때문에 괴롭게 만든 것을 자유죽음은 원점으로 되돌려놓는다.(장 아메리 지음, 자유죽음 249쪽, 산책자 펴냄, 2010년)”라고 말합니다.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의 범주를 <죽음을 어떻게 말할까>에서는 저자의 아버지가 선택한 조력자살로까지 확대한 것입니다.

 

<죽음을 어떻게 말할까>의 저자 윌리 오스발트는 아흔 살인 아버지가 자유죽음을 결정하자,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함께 하면서 자유죽음에 대한 자신의 시각이 이중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독자를 위한 서문에서 “아버지의 죽음 이후 끊임없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내 문화권에서 흔히 그러하듯 죽어감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금기시할 필요가 무엇이냐 하는 물음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두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한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여기는 사람일지라도 인간의 품위 있는 죽음이라는 주제의 논의에는 동참해야 마땅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썼다(8-9쪽)”라고 전했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노인이 늘어가는 추세인데, 많은 노인은 이제 인생에 넌더리를 낼 정도로 늙어, 생의 마지막 시절을 곤궁하고 비참하게 보낼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 아침 뉴스는 독거노인들의 시신기증이 늘고 있다고 전합니다(2015년 3월 8일자 머니투데이 기사. “버림받는 노인들…‘죽으면 내 시신 좀 가져가 주오’”). 자신의 시신을 의학발전과 질병치료에 기여할 연구목적으로 이용해달라는 숭고한 의미가 시신기증에는 담겨 있습니다.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밟아야 할 학습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해부나 새로운 수술기법을 연구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독거노인들의 시신기증의 배경에는 “자신이 죽고 나서 자식들이 장례도 치르지 않을 것 같으니 스스로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이유가 더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장례비용 때문에 부모의 시신을 기증하겠다는 자녀도 있는 모양입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사회복지의 구조적 결함으로 생기는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순리적으로 맞아야 할 죽음을 강제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드는 것입니다.

 

저자의 아버지는 자유죽음을 희망하는 고모가 조력 자살단체의 도움으로 죽음을 맞았다고 하면서 자기도 그런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정작 어머니는 절대 반대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뇌종양으로 남편보다 먼저 죽음을 맞게 되었고, 그녀의 희망대로 수술이나 화학치료를 받지 않고 묵묵히 죽음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미국계 회사의 대표이사를 지낸 저자의 아버지는 상당한 재산을 모았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두 아들에게는 각각 2만 프랑을 남겨줄 것이며, 나머지 재산은 어머니에게 가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정작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면서 공개된 유언장에는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두 아들이 스스로의 인생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던 아버지는 재산규모를 자녀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저자는 이따금씩 돈다발을 안겨줘야 하는 미성년자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아서 유산을 얼마 받을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아버지가 가끔씩 주는 돈을 감사하게 받아썼던 모양입니다.

 

“아버지의 평생에 걸친 조급함, 어렸을 때부터 나를 따라다닌 그 찍어 누르는 강제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통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았음에도. 이런 나 자신이 이기적이고 냉정하게 여겨졌다.(84쪽)”라고 적은 것처럼 저자는 아버지 생애의 마지막 시기를 함께 하면서 아버지에게서 일어나는 변화를 기록하고, 살아오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마을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자유죽음을 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데, 저자의 아내는 생각이 달랐다고 합니다. 저자의 아버지가 고통스러워하는 우울증이 노인이면 흔히 앓는 병으로 치유가 가능한 것으로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아픔도 당연히 인생의 일부이며 죽어 가는 과정에서 아마도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며 중요한 의미를 일깨워 주는 것(85쪽)”이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저자 역시 아내의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아버지 편에 서기로 했다면서도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저자의 아버지는 자신의 마지막 가는 길에 동행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스위스 법에서는 유산상속권을 가진 자가 자유죽음에 동행하는 경우, 개인적 이해관계라는 동기를 의심받게 된답니다. 한편 저자의 아버지가 준비한 ‘사망의 경우’라는 제목의 서류는 참고할만합니다. 형제 각자가 받는 유산이 균형을 이루도록 세심하게 배려한 것은 물론, <가장 먼저 할 일>, <부고>, <장례 절차와 규모>, <마지막 유지>, 심지어는 장례식에서 낭독할 고인 이력과 서신으로 부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 명단에 이르기까지 당장 장례를 치를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하게 정리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아내를 제외하고는 가족 모두 저자의 아버지가 선택한 자유죽음을 수용하는 분위기였지만,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가 만나온 베티나여사가 동의하지 않아 아버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인생의 기쁨을 충분히 누릴 수 없었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책하였고, 아버지가 선택한 자유죽음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자녀들이 사무적인 변호사처럼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죽더라도 가까웠던 사람들만큼은 계속 평안하고 즐거운 삶을 이어 가지 바랐던 것인데, 베티나 여사가 괴로워하는 모습 때문에 마음 아파했다고 합니다. 이 점에 대하여 저자는 “다른 사람의 평안을 자기 의견대로 주무르려는 사람이야말로 월권과 오만이라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99쪽)”이라며 아버지를 설득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아버지의 자유죽음을 적극 권장하는 모습입니다.

 

충격이었던 장면은 아버지 생의 마지막 날, 저자는 형과 함께 아버지의 죽음에 동행하고 그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흐린 잿빛을 머금어 창백해 보이는 푸른 하늘은 천천히 아침 햇빛의 서늘한 노란빛에 잠겨 든다. 오늘은 화창한 봄날이다. 죽기에 이 얼마나 좋은 날인가! 나는 이미 어제부터 오늘 어떤 옷을 입을지 궁리해 두었다.(136쪽)” 과연 얼마나 많은 자식들이 부모가 스스로 정한 죽음을 맞는 순간에 입을 옷을 고를 수 있을까요? 뿐만 아니라 모두 둘러 앉아 건배까지....? 자살하는 사람의 일반적인 심리는 복잡하기 때문에 주저하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 조력자가 준비한 나트륨펜토바르비탈을 건네면서 “한스 그거 굉장히 써요”라고 말하자 “아, 괜찮아요. 인생에서 쓴맛은 충분히 보았소”라면서 죽음의 약을 단숨에 들이킬 수 있을까 싶습니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이는 “품위로 이어지는 영원한 인생, 곧 존엄으로 빛나는 인생을 원한다면, 정신을 갈고 닦을 노릇이다. 이 책이 우리의 정신을 키워갈 계기를 마련해 주기 기대한다.(174쪽)”라고 마무리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췌장암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로 암을 이겨낸 카네기멜론 대학의 포시교수의 방식이 더 좋습니다.(제프리 재슬로 지음, 마지막 강의, 살림펴냄, 2008년; http://blog.joins.com/yang412/102482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