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 - 혜초의 길 서정시학 시인선 42
이승하 지음 / 서정시학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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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 전 신라 성덕왕(또는 경덕왕) 때 스무살의 승려 혜초는 신라를 떠나 부처가 불법을 깨달은 천축국을 두루 순례하고 남긴 기록이 <왕오천축국전>입니다. 어쩌면 불도를 깨치기 위한 여행이었을 것입니다. 이승하 시인은 혜초의 길을 따라가며 시를 만들었습니다. 시인이 “밥 한 술 얻어먹을 수 있는 어느 담벼락 밑이면 / 나는 또 짚신 벗고 앉아 / 먹을 갈며 나 자신을 갈아야 한다.(혜초의 길 4, ‘사람을 만나 울다’의 마지막 연, 21쪽)”라고 노래한 것을 보면, 또한 나름의 도를 깨치기 위한 긴 여정이었을 것입니다. 시인이 2000년에 실크로드를 여행하면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었다는 둔황의 막고굴을 지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에 해설을 쓴 송희복님이 “인간의 역사는 길로 시작되고 길로 뻗어 나아가고 길이 끊기고 길을 부활하는 과정을 무수히 반복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162쪽)”라고 한 것처럼 길은 인간의 삶이요 역사인 것입니다. 시인은 혜초의 길에서 지상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뒤쫓고 있습니다. 마치 그 옛날 혜초가 불도를 구하려고 고난의 길을 떠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혜초의 길은 간단한 여행길이 아닌 것입니다. “영취산 올라가는 길은 돌로 된 산길 / 나무들 제멋대로 몸 비비꼬며 서 있고 / 산새들 재잘재잘 신이 나서 깝친다 / 어떤 나무는 죽은 채 땅에 박혀 있고 / 어떤 벌레는 죽은 채 땅 위에 나뒹군다(혜초의 길 6, ‘사이’의 두 번째 연의 일부, 24쪽)”라는 구절에서 보면 길에서 만난 모든 것들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끔을 길 떠난 사람의 가슴 한 켠에 쌓이는 미묘한 느낌을 적은 부분은 공감이 가기도 합니다. “月夜瞻鄕路 浮雲颯颯歸 / 타향의 하늘에서도 이국의 하늘에서도 / 두둥실 떠 있던 원반형의 달 / 어머니 등에 업혀 쳐다보았던 달 / 사랑하는 사람 등에 없고 쳐다보았던 달 / 오늘밤 저 달은 한껏 발그레해지리라(혜초의 길 19, ‘달의 행로’의 두 번째 연, 52쪽)”에서는 지난 해 다녀온 스페인 여행 초반에 바르셀로나에서 지중해 위로 뜬 보름달을 바라보았을 때의 감정이 오롯이 되살아나게 됩니다. 시인은 때가 되면 나만을 기다리는 노모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노래했지만, 고향에서도 저를 기다려주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니 마음이 공허해지는 느낌입니다. “날이 밝았으니 자, 가세 / 새들은 벌써 둥지를 떠났네(혜초의 노래 27, ‘즐거운 여행의 첫연, 68쪽)”라고 노래하는 것을 보면, 도를 구하는 여행이라고 해서 힘들고 어려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시인은 꼭 1300년 전 혜초의 구도여행이나, 자신의 실크로드 여행에서만 시를 구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혜초가 지난 길에서 생긴 일이라면 최근에 생긴 사건에서도 시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혜초가 지나간 길에서 얻어낸 시가 모두 61편이나 됩니다. 꼭 오천축국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길을 따라가다보면 비슷한 생각을 얻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내 재산 보시해서 쌓은 탑과 ‘ 남의 재산 약탁해서 쌓은 재산 / 세상의 불협화음 너무 일찍 알아 / 절간 문 닫아걸고 절 바깥으로 안 나간 / 최초의 세계인(世界人) 혜초여(혜초의 길 44, 마지막 연, 110쪽)”을 읽으면서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 얽힌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영국, 프랑스 등 세계적인 박물관들은 이력이 수상한 작품들을 다수 수장하고 있다고 합니다만, 프라도 미술관은 스페인이 잘 나가던 시절 왕실에서 구입한 작품들만 수장하고 있어 도덕성을 내세우고 있다고 들은 것과 시인의 노래가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프라도 미술관을 적을 때는 이 부분을 꼭 인용해서 언급하려고 합니다.

 

1755년 일어난 대지진과 해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리스본의 벨렝지구는 테주강이 대서양과 만나는 지점입니다. 벨렝지구에서는 ‘지상의 길은 / 바다에 이르면 죄다 끊어진다 / 회인한 여인의 자궁에 / 고통의 덩어리가 들어 있듯이 / 자연의 거대한 자궁인 바다/ 수많은 주검들의 무덤인 저 바다)혜초의 길38, 95-96쪽)’라고 노래하고, 뿐만 아니라 ‘길이 끝나는 곳에서 펼쳐지는 / 통증으로 울부짖는 바다를’로 마지막 연이 끝나고 있음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면 주머니에 넣어가서 한구절씩 씹어가며 읽어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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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사락 - 읽고 들으며 말하고 쓰다
임석재 지음 / 이담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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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와 같이 한 가지 일로 두 가지를 얻는 경우를 빗댄 비유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화투판에서도 ‘일타쌍피’라는 사자성어까지 만들어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로 두 가지를 얻는 경지를 넘어 네 가지를 얻을 수 있다면 무조건 해봐야 하는 일이 아닐까요? 하나로 네 가지를 얻을 수 있는 놀라운 비법을 담은 책을 소개합니다. 독서가 임석재님의 <독서사락>입니다. 저자가 따로 밝히지는 않았습니다만, ‘독서로 즐기며 배워보는 읽기와 듣기, 말하기와 쓰기의 모든 것!’이라는 카피를 달아놓은 것을 보면, 독서사락은 ‘讀書四樂’임이 분명합니다. 독서로 얻을 수 있는 네 가지 즐거움인거지요.

 

저자는 ‘활자중독’이라는 핀잔을 들을 만큼 지독한 독서습관 덕분에 책읽기를 넘어 젊은 나이에 책을 두 권이나 써내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저자는 ‘쓰고 싶다. 쓰고 싶다. 문득 글을 쓰고 싶었다.’라고 글쓰기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반복하여 적는 것으로 <독서사락>의 서문을 시작합니다. 이런 저자의 욕구가 충분히 이해되는 것은 저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독후감을 남긴 책읽기가 천권을 넘어가면서 글쓰기가 조금씩 나아지는 느낌과 함께, 이런 책을 써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책으로 대표되는 활자로 된 무엇인가를 손에서 놓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생활의 폭이 좁아지고 있다는 의미’라는 저자의 생각을 저 역시 느끼는 것을 보면, 책 읽는 사람들의 공통분모 같은 것이 생기는 모양입니다.

 

‘왜 읽기․듣기․말하기․쓰기인가?’라는 의문에 대하여 저자는 이 네 가지가 삶을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네 가지를 일정수준 이상 할 수 있다면 어느 분야에서건 평균 이상의 몫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어느 한 가지를 매우 잘하거나, 두 가지 이상을 평균 이상으로 잘하거나, 아니면 세 가지 이상을 그럭저럭 잘하는 사람을 쉽게 만나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저자는 책을 읽어 찾아낸 읽기․듣기․말하기․쓰기에 관하여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방법들을 정리해보려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대학생, 취업준비생, 사회초년생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고 합니다만, 딱히 제한을 둘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고민을 해본 문제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읽기’를 제일 앞에 두었습니다. 아마도 읽기가 바로 종자돈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정보를 얻습니다. 그래도 책읽기가 가장 보편적이며 정확한 정보를 얻는 길일 것입니다. 책읽기는 다양한 이점을 가지는데, 우선 읽는 사람이 마음대로 시간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점이 될 것 같고, 정보의 대가로 지불하는 비용이 비교적 저렴하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정보의 비교도 용이하고 설명하고 전달하는 방법도 다양하기 때문에 각자의 수준에 맞는 것을 고르면 됩니다. 단순하더라도 정보가 지식이 되고, 지식이 쌓여서 자신만의 가치로 전환되면 지혜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정보에서 지식으로, 지식에서 지혜로, 지혜에서 철학적 사유까지 상승할 수 있는 사고의 전환을 이끌어 낼 내적 역량은 책읽기를 통하여 길러진다(25쪽)”라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점은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있습니다. 저자는 모두 열 두 가지의 읽기의 원칙을 소개합니다. 그 첫 번째는 “시간을 정하지 말고 ‘지금’ 읽어라”입니다. 책읽기가 화제에 오르면 ‘시간이 없어서...’라면서 말꼬리를 흐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마도 두툼한 책을 언제 다 읽을까 하는 마음에서 선뜻 책장을 열어보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우리네 속담처럼 일단 시작하고 꾸준하게 읽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쪽을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자는 “무엇이든 처음부터 크고, 거창하며, 화려한 것은 욕심이다. 작고 소박하지만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차곡차곡 조금씩 실행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습관이 된다.(30쪽)”라고 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얇고 가벼운 책으로 시작해서 책읽기가 습관이 되면 관심의 대상이 점차 넓혀가면 되겠습니다. 경지에 이르면 작가가 선택한 단어와 문장을 꼭꼭 씹듯 읽으면서 읽는 것과 동시에 이미지를 그려보라고 주문합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치매에 걸린 위험이 줄어든다고 합니다. 그것은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을 하므로 신경세포들이 서로 활발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주제어는 ‘듣기’입니다. ‘듣는 것이 뭐가 어려워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외국인들과 이야기할 때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어떻게든 전하는데 정작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면 이야기가 끝나는 것입니다. 지난 해 스페인을 거쳐서 모로코로 여행을 할 때의 일입니다. 배에서 내려 여권을 검사하는 모로코 경찰에게 배 안에서 열심히 외운 대로 ‘살라 말레꿈’이라고 말을 건넸습니다. 아랍어로 ‘안녕하세요’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경찰이 무어라고 대답을 했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으니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말레꿈 살라무’라고 대답한다고 배웠는데 경찰은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혹시 ‘이 사람이 왜 그래?’ 그러지 않았을까요?

 

우리말도 그렇습니다. 상대가 하는 말을 잘 듣기 위해서는 집중을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관점, 주장, 의견에 대하여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오해할 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만큼 듣기가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역시 열두 가지로 요약한 ‘어떻게 들을까?’하는 방법론을 보면 재미있으면서도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단 귀를 열어야 하고, 세상만사에 귀를 기울이라고 권합니다. 공통의 관심사를 이야기할 때는 아무래도 잘 들리고 쉽게 이해되기 마련입니다. 공부를 하러 미국에 갔을 때, 제일 먼저 신문을 구독하고, 매일 다만 몇 개의 기사라도 읽으려 노력했습니다. 출근하면 미국인 동료들과 그날 신문에 난 기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다보면 귀에 들어오는 말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라디오를 켜면 무슨 소리를 떠드는 지 잘 들을 수 없었습니다. 요즈음에도 차를 운전할 때는 영어방송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듣는 영어방송은 그때보다 훨씬 많이 들린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저에게 익숙한 화제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 번째 주제는 ‘말하기’입니다. 말하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학회에서 발표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준비를 열심히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상에 올라서 발표를 시작하면서부터 떨리던 목소리는 결국은 울음에 가까워졌습니다. 이런 경험이 몇 차례 이어진 끝에 드디어 떨지 않고 발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 만해도 발표할 내용을 미리 써서 외우다시피 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발표 자료를 만들 때 전체의 틀을 고려하면서 만들기 때문에 발표할 문장까지 일일이 외우지는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적절한 비유를 끌어오려면 정해진 대로 따라하는 발표가 적절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말하기는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잘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말하기에서 중요한 점을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 사투리 등 개인에게 국한된 습관을 고쳐야 한다. 둘째, 자신의 실력에 자만하지 말고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셋째,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등입니다. ‘어떻게 말할까?’하는 방법으로 역시 열두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인상적인 것은 말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야 하고, 핵심을 콕 집어서 이야기 하라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실 준비가 충분하지 못하면 놓치기 쉬운 점이기도 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말할 수 있는 시간에 제약이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학술대회와 같은 공식적인 행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넘기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설명하려는 의욕이 앞서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 발표자는 그만큼 시간에 쫓기게 되어 자칫 실수하거나 자신이 전할 내용을 줄여야 해서 결국은 청중의 피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시간을 지키지 않은 발표자가 비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충분히 연습을 하고, 발표할 때도 시간을 확인해가면서 주어진 시간 안에 발표를 마무리해야 합니다.

 

마지막 주제는 ‘쓰기’입니다. 쓰기의 문제는 자신 있다는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쓰기를 의외로 많이 하고 있습니다. 특히 SNS가 대세인 요즈음에는 간단한 쪽지를 써 보내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이 또한 쓰기인 것입니다. 쓰기에 자신이 없다고 하는 분을 만나면 일단 써보시라고 권합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일기숙제를 해보셨을 터인데, 대개는 일기숙제가 끝나면 일기쓰기를 그만두는 것 같습니다. 저는 중학교 2학년 무렵 시작한 일기 쓰기를 가급적이면 빠트리지 않고 대학 다닐 때까지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인근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던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해서 편지친구를 늘려갔습니다. 사무실 책장에 간직하고 있는 편지를 지금 꺼내보면 치졸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만, 그때는 대단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일기쓰기와 편지쓰기는 저의 글쓰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요즈음에는 큰 아이가 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라서 매일 한통의 편지를 써 보내고 있습니다. 5주의 훈련을 받는 동안 편지를 받아볼 수 있는 4주 정도 이어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 무렵에 편지지를 펼치고 펜촉에 잉크를 묻혀 첫줄을 쓰기 시작하면 단숨에 A4용지 두 장 분량을 써내려 갑니다. 편지 전체의 내용을 미리 가늠해두고 쓰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냥 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틀린 문장이 나오기도 합니다만, 별로 고치지 않고 마무리를 합니다.

 

필요하면 말을 하면 되지 굳이 쓰기까지 해야 하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말하는 것과 쓰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말하기는 현장성이 있어 중요한 내용을 전하려면 실수를 하지 않도록 긴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수를 하게 되면 이를 번복하기 위하여 몇 배나 힘이 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쓰기는 특정 공간에 함께 한 상대에게 바로 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써놓은 내용을 충분한 시간을 두어 검토한 끝에 최종적으로 결정된 문안을 보내면 되기 때문에 실수의 가능성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저자는 역시 열두 가지의 방법을 ‘어떻게 쓸까’라는 의문에 답변으로 내놓았습니다. 그 첫 번째는 ‘생각나는 대로 써보자’입니다. 제가 흔히 써먹는 방법입니다. 일단 써놓고 손질을 하면서 이어지는 좋은 생각들을 더하여 다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저의 약점이기도 한 ‘짧은 글을 잘 써야 한다.’입니다. 저 역시 문장이 길어지면 전체 내용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약점이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문장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는 초고를 다시 읽어가면서 적당하게 문장을 끊어 짧은 문장으로 나누는 것으로 해결합니다. 그래서 ‘퇴고의 즐거움을 누리자’라는 저자의 권유에 공감을 하게 됩니다.

 

임석재님의 <독서사락>을 읽다보면 아마 나도 이런 책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분도 생길 것 같습니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서한을 묶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http://blog.joins.com/yang412/13613538>에는 두 아들에게 책읽기 중요성, 책 읽는 방법을 일깨우는 내용도 나옵니다만, 책을 쓰는 요령도 있습니다. 다산의 책 쓰는 요령을 참고하여 <독서사락>의 구조를 보면 전체를 아우르는 서문이 있고, 읽기․듣기․말하기․쓰기의 각각에 대하여 필요한 이유, 정의, 이어서 열두 가지의 방법을 적고 있습니다. 책 쓰기의 첫 번째 작업은 ‘책을 왜 쓰는지’를 먼저 생각하고, 이어서 전체의 얼개를 구성하여 목차를 정하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지 일단 해보면 다음부터는 쉬워진다고 합니다. 책 쓰기를 한번 해보시렵니까? 그렇다면 일단 책읽기부터 시작해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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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0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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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고등학생 때 처음 읽었는데, 그때는 어떻게 읽었던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습니다. 이번에 다시 읽게 된 것은 스페인 여행기를 쓰면서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투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는 헤밍웨이가 27살이 되던 해 완성한 첫 장편소설이며,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의 유럽사회에 불어 닥친 무기력하고 시대적 불안과 상실감에 빠진 소위 ‘길잃은 세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합니다. 주요 등장인물은 신문사 특파원으로 파리에 머물고 있는 미국인 제이크 반스, 그와 특별한 관계인 영국인 간호사 브렛, 그녀의 약혼자 마이크 캠벨, 브렛에게 빠져드는 미국인 작가 로버트 콘, 그리고 미국에서 잘 나가는 소설가 빌 고턴 등입니다.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정리해가는 1부는 조금 누가 주요 등장인물인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주인공인 반스는 엉뚱하게도 콘이 지내온 삶을 정리하질 않나, 로버트와 그의 약혼자 프랜시스와 함께 놀러갈 의논을 하지 않나, 심지어는 카페에서 처음 만난 조젯과 함께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가 그곳에서 다른 일행과 함께 온 브랫과 따로 자리를 뜨지 않나. 도무지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들이 정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목적 없이 순간순간을 즐기는 듯 한 느낌만 남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제이크와 브렛이 서로에 대하여 사랑하는 감정의 편린들이 조금씩 드러나기도 하는데, 제이크가 브렛에게 강하게 대시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쟁 중에 입은 부상으로 성기능이 마비된 때문이고, 그 사실을 브렛이 알고 있기 때문에 거리를 두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진정 사랑하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물론 현실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요. 한편 “우리 둘이서 함께 살 수 없을까, 브랫?”이라고 묻는 제이크에게 “안 돼, 난 누구하고나 쏘다녀서 당신을 배반하고 말 거야. 당신은 견딜 수 없을 거야!”라고 답변하는 것을 보면 브랫을 자신이 남자를 밝히는 탓에 제이크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등장인물들 사이의 기본적인 역학관계에 대한 설명이 1부에서 다소 모호하게 전개되다가, 2부에서는 무대를 스페인으로 옮겨갑니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여 팜플로나의 산페르민 축제를 즐기기로 한 것인데, 제이크와 빌은 먼저 출발해서 부르게테에서 낚시를 즐기다가 팜플로나로 이동하여 일행들과 합류를 하게 됩니다. 작가는 산페르민 축제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마치 동영상으로 보는 것처럼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황소들이 울타리에서 풀려나 투우장까지 들어갈 때 사람들이 황소를 피해 달아나는 모습 등인데, 이런 전통은 팜플로나의 성인인 산 페르민 주교가 스페인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순교를 하게되는데, 그때 처형자들이 산 페르민주교를 황소에 매달아 끌고 다닌대서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도 등장하는 것처럼 황소에 쫓기다 보면 자칫 황소에 떠받혀 죽는 사고도 생기는 모양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브랫은 팜플로나축제에서 만난 열아홉살난 에이스 투우사 로메로에게 반하고 두 사람은 사랑의 도피행을 하게 되고,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들 일행은 주먹다짐까지 벌입니다. 물론 페터급 권투선수생활을 한 로버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지만, 브랫이 떠난 뒤 로버트는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투우에 열광하는 스페인 사람들이고 보면 멋쟁이 투우사는 뭇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일 것 같습니다. 요즈음으로 치면 아이돌 스타라고 하겠지요? 투우를 아주 좋아하는 헤밍웨이는 당연히 이 작품에서 벌어지는 투우경기를 상세하게 묘사하기도 합니다. 스페인에 갔으면 투우경기를 구경했어야 하는 건데 많이 아쉽네요.

 

아무리 사랑에 빠져 눈이 먼다고 해도, 현실을 현실인거죠. 브랫은 서른넷인 자신과 열아홉인 로메로의 미래를 그려볼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헤어지기로 결정을 하는데, 그리고는 생각나는 사람은 마이크도 아니고 로버트도 아닌 제이크이었다는 것입니다. 제이크 역시 전보를 받고 브렛을 찾아 마드리드로 달려가는데... 브렛은 찰나적인 삶을 버리고 규범적인 삶을 선택하게 되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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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사기꾼들 - 노벨상 수상자의 눈으로 본 사이비 과학
조르주 샤르파크 외 지음, 임호경 옮김 / 궁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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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타로점을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딱히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하는 일이 꼬인다 싶어 답답한 마음에 위로가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점이라는 것이 마음의 위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언뜻 눈에 띄어 집어든 책입니다. ‘노벨상 수상자의 눈으로 본 사이비 과학’이라는 부제가 눈에 띈 탓일 것입니다. 점성술과 마술, 텔레파시, 차력 등의 본질을 논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는데, <신비의 사기꾼들>이라는 제목은 너무 나갔다 싶었습니다.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 비판의 날을 세우는 분들을 회의론자라고 부릅니다. 우리들에게도 친숙한 마이클 셔머의 <과학의 변경지대; http://blog.joins.com/yang412/12502415>에서는 과학과 비과학 그리고 그 경계에 있는 학문들을 논함으로서 과학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마이클 셔머는 이 책에서 창조론, 대학살 반대론, 원격 투시, 점성술, 바이블 코드, 외계인 납치, 빅풋, UFO, 프로이트 정신분석 이론, 기억 회복 등을 비과학, 의사과학, 엉터리에 속하는 것들이라고 분류하였습니다. 그래도 사기꾼이라는 직설적인 표현을 삼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비의 사기꾼들>의 저자들인 조르주 샤르파크와 앙리 브로크는 직선적인 분들인가 봅니다. 저자들은 인류가 수백만년에 걸쳐 진화해 오면서 험난한 투쟁과 생존의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여 지난한 노력을 기울여온 끝에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대견한 오늘의 문명을 만들어냈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사회적 행동양식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사회구성원들은 나름대로 과학적 사고를 지니고, 그것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부는 본능적 반감으로 과거에 집착하면서 미신, 점성술, 초자연현상, 교묘한 트릭에 이끌리고 있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자신의 창조적 자질로 창출해낸 변화에 적응하는 데 있어서, 사이비과학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저자는 점성술사나 마술사가 대중의 눈을 홀리는 방법을 논리적으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흔히 누가 직접 보았다고 하면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런 경향 역시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기억의 과정이라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상기하려 할 때, 일종의 구축작업을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이 구축 작업은 본질상 재구축 작업, 일종의 조작(꾸며내기)이기도 하다. 바로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 즉 모종의 신비적 현상에 ‘의심의 여지없는 증거로 작용하는’ 체험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이 증언을 매우 신중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47쪽)”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해서 달표면에 꽂아놓은 성조기가 휘날리는 모습을 보면서 바람이 없는 달에서 가능하지 않다면서 아폴로계획은 거대한 연극이라는 음모론이 허구라는 설명도 재미있습니다. 즉, 우주인들이 꽂은 성조기는 깃대에 직각으로 이어진 수평 가지에 성조기를 매달았는데, 깃대를 꽂을 때 힘차게 흔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기저항이 없는 달표면의 특성상 성조기는 관성에 따라서 오랫동안 펄럭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소 아쉬움이 남는 점은 체르노빌 사고를 인용하면서도 그로 인한 방사선의 위험이 그때까지 원폭실험 등을 통하여 대기중으로 배출된 방사성물질보다 양이 많지 않다고 설명하면서, 방사선의 강도가 천연 방사선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경우, 방사선을 무조건 위험하게 보는 것은 우습기 짝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이 근무하고 있는 CERN을 격렬하게 비난한 물리학자의 반핵주의에 기반한 주장을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잘라 말한 것도 적절치 않아 보였습니다. 물론 어떠한 인위적 방사선도 존재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완전히 중단해햐 한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옳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유전자변형작물을 지지하는 견해 역시 적절한가 의문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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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과 비정상의 과학 - 비정상의 시각으로 본 정상의 다른 얼굴
조던 스몰러 지음, 오공훈 옮김 / 시공사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비정상의 정상화’는 박근혜정부의 핵심 국정과제입니다(http://www.normal.go.kr). 박근혜대통령님께서 2013년 광복절을 맞아, “우리사회의 비정상을 바로 잡아 ‘기본이 바로 선 나라’를 만들어갈 것”을 선언한 것이 시발점입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부정부패, 부조리, 불법, 편법 등의 ‘비정상’을 바로 잡아, 법과 원칙이 바로 서고, 투명하고 효율적인 국가와 사회를 만들어 사회적 자본이 축적된 ‘정상’을 구현하는 데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정상과 비정상은 쉽게 구분이 될 것 같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모호한 구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관행이라는 인식이 비정상을 정상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정상을 분명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상과 비정상의 과학>이라는 제목의 책이 눈을 끌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정신의학과의 조던 스몰러교수가 쓴 이 책의 원제는 <The other side of normal>입니다. ‘정상의 이면’으로 번역을 하면 평범해 보일 것 같아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우리정부의 국정 아젠다를 끌어온 것같습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과학>은 정신의학 영역의 화두가 되고 있는 정상과 비정상의 개념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정신의학에서는 정상과 비정상을 길가름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라고 합니다.

 

저자는 에드거 앨런 포가 <도난당한 편지>에 적은 “너무나 주제넘고 너무나 명백하며 너무나 자명하여 마땅히 고려해야 할 사항을 그냥 모른 척 간과하고 지나가버리면, (바로 이 때문에) 지적 능력이 고통을 받게 되지”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파악하다’라는 제목의 서문을 시작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도난당한 편지>에서는 누군가의 정치적 생명이 걸린 중요한 편지를 훔친 도둑이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감추었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중심 줄거리입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준비를 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인용입니다.

 

과학자들은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왔지만 기술적 장애와 심리적 장애로 인하여 제약을 받아왔다고 주장합니다. 기술적 장애라 함은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기에 마땅한 도구가 없었다는 것이고, 심리적 장애라 함은 저자가 ‘도난당한 편지 효과’라고 부르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너무 자명한 일은 간과하는 경향이 있어서 쉽게 본질을 드러내지 않는 문제입니다. 저자는 ‘정상’을 정의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이라는 말을 ‘올바른’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정상이라 함은 ‘올바르다, 표준이다, 혹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저자는 18세기 프랑스 생리학자 프랑수아 요제프 빅토르 브루세가 “병적 측면은 본질적으로 정상과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건너뛰지 않고’ 정상적인 것으로부터 병적인 것까지 두루 계속해서 지나가기 때문이다.(12쪽)”라고 정리한 정상의 의미에 공감한다는 것입니다.

 

서문의 말미에 이 책의 구성이 잘 요약되어 있어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우리는 ‘정상’의 정의를 고찰한 다음, 이어서 과학에서 가르치는 생물학이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또 기질과 성격의 유전학적 뿌리를 탐구한 다음(2장), 생애 초기 사람의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로 뛰어들게 될 것이다(3장). 이어지는 장에서는, 아동기와 성인기에 핵심을 이루는 정신적 기능 발달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여기에는 사회 인지와 공감(4장), 애착 및 신뢰의 생물학(5장), 성적 매력의 근원(6장), 감정과 공포는 어떻게 학습과 기억을 형성하는가(7장)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같은 내용을 쭉 따라가며, 우리는 이 분야에서 발견된 내용을 통해 이른바 정신 질환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8장에서는 우리가 공유한 인간성, 우리 삶의 유일무이한 궤적, 우리가 정신적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의 측면에서 ‘정상의 생물학’이 무엇을 가르쳐줄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16-17쪽)”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정신질환의 기준에 들어맞는 증상을 보인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 해 [북소리]에서 소개했던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 http://blog.joins.com/yang412/13392396>을 기억하신다면 이 질문에 공감하실 것입니다. 정신장애를 진단하는 교본으로 사용되고 있는 정신장애진단편람 3판(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DSM-III)과 3판의 개정판(DSM-IIIR)을 정리하는 작업에 참여하였고, 정신장애진단편람 4판(DSM-IV)의 작성책임을 맡았던 듀크대학 정신의학과의 앨런 프랜시스교수는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에서, 최근 만들어진 DSM-5에서는 정신장애의 진단기준이 지나치게 완화되어 정신질환이 양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며 그 이면에는 정신질환의 치료제를 개발하는 제약회사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제가 전공하고 있는 병리학에서도 정상을 잘 이해해야 비정상을 진단할 수 있습니다. 정신질환을 정의함에 있어서도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일이 중요할 것입니다. 문제는 정상이 무엇인지 밝히는 작업이야말로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저자는 먼저 정신질환을 정의하기 위하여 정상과 비정상의 정의를 내리는 일이 시간과 장소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역사적 순간이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하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서양의학이 주도해온 정신질환의 진단기준은 불안정한 마음과 고장 난 뇌와 같은 극단적인 증상만 분류하여 장애를 구성해왔지만, 이제는 정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하여 “마음과 뇌의 기본구조는 물론, 마음과 뇌가 어떻게 맞닥뜨리는 환경과 경험을 파악하는지 이해하면, 우리는 기능 장애가 어디서 발생하며 어떻게 정상적인 인간 체험의 범위에서 나타나는지 알아낼 수 있다.(49쪽)”라고 설명합니다.

 

사실은 ‘정상’이라는 개념에는 프랑스 출신의 천재 수학자 아브라함 드 무아브르가 18세기에 정립한 ‘정규분포’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통계학적 기술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정규분포는 물리학적 현상, 생물학적 현상 심지어는 사회현상에 이르기까지 경우의 수가 분포되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래프에 나타내면 평균을 기준으로 하여 양쪽이 대칭을 이루는 종모양을 나타내게 됩니다. 즉, 정규분포는 평균과 분산이라는 두 개의 숫자로 정의되는 개념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경계를 어디에서 끊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낮과 밤의 경계선은 없다’라는 아주 재미있는 비유가 나옵니다. 흔히 우리는 밤과 낮이 분명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물어보면 분명한 기준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밝은 낮과 어두운 밤은 분명 알지만, 해가 지면서 어둠이 내리는 것은 시나브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몰이라는 현상을 참고할 수도 있겠지만, 지역적 여건에 따라서 일몰의 분명한 정의가 쉽지 않은 문제가 남습니다. 그래서 정규분포곡선에서 표준편차를 이용하여 정상의 범위를 정하는 방식을 적용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보다 많은 전문가들이 공감하는 기준을 도출해내는 것입니다. 물론 그 공감이라는 것도 시대에 따라 변화될 수 있다는 한계를 가지는 것이기는 합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기질, 정서반응, 성격 등에 따라 정신질환에 대한 감수성에 차이를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 요소는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요? 한 때 인간에 관한 모든 것들이 유전자에 담겨진 유전정보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유전적 요소에 더하여 환경요소 역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유전정보가 뇌에 작용하여 기질을 만들어 내는 과정과 양육을 통하여 정서반응이나 성격이 완성되는 과정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총론적인 이야기는 어느 영역에서나 전문적인 경향이 있어서 이해가 쉽지 않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모호한 상태에서 요약설명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이 부분은 생략하고자 합니다. 요즈음 주목받고 있는 후성유전학의 개념을 조금 소개하면, 환경이나 인간이 삶에서 얻는 경험은 뇌에서 일어나는 유전자의 발현을 미세하게 조정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DNA 자체에 흔적을 표시하는 화학적 변화를 촉발하거나, DNA 주위에 있는 단백질을 바꾸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서 종종 일란성 쌍둥이가 서로 상당히 다른 상태를 보이는 경우를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각론에 해당하는 공감과 믿음, 성적 취향과 기억에 관한 설명 가운데 저의 개인적 취향에 따라 기억에 관한 부분만 정리하겠습니다. 어린 시절 겪은 나쁜 기억을 지우기 위하여 새로운 인격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이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드라마를 즐겨 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두려움과 정서 기억의 생물학’이라는 부제를 달아 나쁜 기억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불과 7년 전 우리는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면 온 국민이 광우병에 걸려 죽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공포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까지의 과학적 데이터들은 크게 우려할 사항이 아님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만, 특정 목적을 가진 세력들이 위험을 지나치게 부풀려 국민들의 눈을 가렸던 것으로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역시 저만의 잘못된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2008년 광우병 사태처럼 우리가 두려움의 위력에 유독 민감한 까닭은 두려움이 우리의 마음에서 우위를 점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뇌는 자연선택을 통하여 두려움을 느끼도록 신경망이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지구상에 처음 등장했을 때는 세상이 온통 힘센 동물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우리의 조상은 살아남기 위하여 위험을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도록 진화된 신경조직을 갖추게 된 것인데, 이와 같은 진화의 산물이 지구의 우세종이 된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발목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이란 ‘인지된 위협에 대해 보이는 정서 반응’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은 특히 조건화된 경우 가중된 효과를 나타냅니다. 동료 가운데 닭고기를 먹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닭에게 쪼이는 무서운 경험이 고착된 때문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오히려 닭고기를 먹음으로서 무서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분의 경우는 공포의 대상을 회피하는 것으로 이미 두려움을 극복하는 기제를 갖추었기 때문에 도전이 필요치 않다는 생각일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이 선택한 것처럼 공포의 기억을 잊는 방식으로 회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불안해하는 마음이 깔려있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 극단적으로 위축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결국 문제의 원인이 되었던 사건으로 돌아가 해결방법을 찾아낼 필요가 있겠습니다.

 

사건사고가 많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과 같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사건을 겪은 당사자들이 조건화된 불안장애에 빠지는 경우를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라고 진단합니다. 외상이 심신을 쇠약하게 하는 심리증상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는 광범위한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때로는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기도 합니다. 저자는 우리의 기억이 시냅스에 새겨져 있는 것이라서 가소성이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공포를 느끼지 않도록 학습하는, 즉 공포소멸을 통하여 불안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분자 수준에서 공포소멸이 가능한 약물이 개발될 것으로 전망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저자는 뇌와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비정상을 정상화하는 새로운 문을 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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