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러 심리학 입문 - 심리학 대가의 심리학 해설
알프레드 아들러 지음, 김문성 옮김 / 스타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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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책을 읽어보았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기도 합니다. <아들러 심리학 입문>은 그 질문과 맥이 통하면서도 질문을 하신 분이 생각한 책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저에게 질문을 하신 분은 일본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와 작가 고가 후미타케의 <미움 받을 용기>를 비롯하여 아들러 심리에 관한 <아들러 심리학 읽는 밤>, <버텨내는 용기>를 의미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이들의 설명을 들으면 아들러 심리학을 쉽게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한 차례 걸러진 생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고른 책이 <아들러 심리학 입문>입니다.

 

최근 아들러 심리학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타인과의 경쟁을 통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경쟁은 갈등을 낳고, 갈등은 고민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아들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고민들은 모두 인간관계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욕심을 가진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명제를 세웠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의 심리문제를 백 년 전에 내다보았으니 대단한 혜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인심리학을 창시한 아들러는 프로이트, 융과 함께 3대 심층심리학자로 꼽힙니다. 1870년 2월 오스트리아 빈의 유복한 유태인 가정에서 출생한 아들러는 4남 2녀 중 둘째였습니다. 차남인 저는 일반화된 차남의 성격에 동의하지 않는 편입니다만, 첫째와 비교되는 것을 싫어하고 욕심이 많은 둘째 특유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아들러는 구루병과 후두경련과 같은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던 데다가 다른 형제들보다 학교성적이 부진하였던 까닭에 나름대로는 열등의식을 가지고 성장했던 모양입니다. 그의 심리학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열등감, 보상심리, 인정욕구, 권력욕 등은 그의 성장배경에서 엿볼 수 있는 요소들이라고 합니다.

 

1895년 빈에서 의사자격을 얻어 정신심리학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아들러는 둘러싸고 있는 전체적 환경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환자를 치료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인간의 문제에 대하여 인도주의적이고 전체적이며 유기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1902년부터 프로이트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지만, 1907년에 출간한 <신체적 열등과 그에 대한 정신적 보상에 관한 연구>에서 “사람은 신체적 장애와 이에 수반되는 열등감을 심리적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하며, 만족스럽지 못한 보상은 신경증 및 수많은 감정과 정신의 기능적 장애를 가져올 수 있다”라는 가설을 세우면서 프로이트와는 거리를 두게 되었고, 종국에는 아동기 초기의 성적 갈등이 정신질환을 초래한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1911년 결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음 백과사전, ‘아들러’편 참고)

 

알프레드 아들러가 쓴 것으로 되어 있는 <아들러 심리학 입문>에서 몇 가지 모호한 점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인생의 낙오자를 만들지 않은 아들러’라는 제목의 들어가는 말은 저자가 아닌 삼자의 글인 것으로 보입니다만, 필자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이 우선 눈에 띕니다. “이 책은 아들러가 ‘어떻게 이 사람들을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시하여, 그 치료에 도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라고 요약하고, “1장부터 6장까지는 사례와 치료법을 중심으로 정리해 놓았다.”라는 출판사의 소개글 역시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보겠습니다. 제1장 사회적 협력의 의미, 제2장 몸과 마음의 관계, 제3장 열등감 보상과 우월감 추구, 제4장 기억이 알려주는 비밀, 제5장 꿈의 이해와 사용법, 제6장 어려움을 해방시키는 용기, 등으로 나뉜 제목을 보면,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을 정리했다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지난 주말에 큰 아이가 임관을 하고, 오늘부터 임지에서 맡은 바 임무를 시작하게 됩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학교 공부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아이를 학창시절 제가 창설한 진료동아리의 하계진료현장에 데리고 간 적이 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아들러가 말하는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지만, 세상에 나와서 해야 할 그 무엇이 있지 않겠느냐고 설명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소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늘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빠트리지 않았는데, 큰 아이의 삶이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았기에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들러는 사회적 협력에 큰 의미를 두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세 개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인간이 직면하는 모든 문제는 이들 관계의 방향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관계가 사람들의 현실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 세 가지 관계 가운데 가장 근본은 우리가 지구라는 혹성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며, 우리 주위에는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어 우리는 인류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이 뒤를 잇습니다. 그리고 이성 간의 관계가 마지막으로 직면하는 관계입니다. 이 세 가지 관계로부터 직업, 친구, 성이라는 세 가지 문제가 대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과거의 경험이 그 사람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최면요법 등을 통하여 과거의 경험에서 지금 제기된 문제의 단초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들러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바로 그 의미에 의해 ‘스스로 결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잘라 말합니다. 즉 우리는 경험의 충격, 이른 바 외상으로 고통스러워할 게 아니라 그 경험 속에서 자신의 목적에 합치되는 바를 발견해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우리 주변에 숨어있는 외상 후 스트레스로 고통 받는 분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벌써 1주기가 넘어가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은 세월호 사고의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들러는 인생의 경험에 잘못된 의미를 부여하게 만드는 흔한 상황으로 응석받이를 인용하였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스스로에게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타인들과의 협력의 유익함이나 필요성에 대해서도 배운 일이 없다. 따라서 곤란한 상황에 빠지면 스스로 대처하지 못하고 오직 타인에게 요구하는 방법 외에는 모른다(34쪽)”라고 진단하고, 해답으로는 그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작고 올바른 방향으로 스스로 훈련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그들이 하는 모든 일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열등감이 개인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정리하는 부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열등감이란 개인이 어떤 일에 대해 잘 적응하지 못하거나 혹은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그 일을 해결할 수 없다는 자기의 확신을 언행으로 표현하는 경우에 나타난다(88쪽)’라고 한 저자는 “열등감에 빠진 사람은 자기의 활동 범위를 한정하려고 함으로써 성공을 향해 전진하기보다는 패배를 피하는 일에 몰두한다. 난관에 부딪히게 되면 망설이면서도 꼼짝도 하지 않거나 뒷걸음질 치는 모습마저도 보이게 된다.”고 합니다. 위험으로부터 몸을 사리는 행동 가운데 가장 철저한 표현이 자살이라고 합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자신이 직면한 모든 문제를 포기하고, 자시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다는 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자살하는 사람의 대부분이 자신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문제해결의 출발은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완전하거나 부족함으로써 야기되는 열등감을 회피하거나 기만하려 들면 내재된 갈등요소가 축적되어 임계점을 향하고, 종국에는 파국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열등감으로 인한 강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불완전하거나 부족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강점 즉 우월한 부분을 극대화시키는 노력을 병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좁게는 가족, 나아가 주변 인물은 물론 이들을 통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협력의 길을 모색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나 달성하고자 하는 우월이라는 목표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월이라는 목표는 개개인에게 있어서 매우 개인적이며 독창적인 것이다. 그 목표는 한 사람이 인생에 부여한 의미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 의미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그 사람의 독특한 인생 방식 속에서 만들어지며, 스스로 창작한 기묘한 멜로디처럼 인생을 관통하여 울려 퍼진다.(184쪽)”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전체를 아우를 수 있도록 다양한 시각을 견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정한 시각만으로 사안을 들여다보게 되면 그만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결정을 내림으로써 일이 잘못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열등한 상황을 우월한 입장으로 변환시키기 위하여 반드시 기억해야 할 두 가지 사항은, 첫째, 우리가 선택하는 어떤 곳에서나 출발할 수 있다는 사실과, 둘째, 우리에게는 막대한 양의 재료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표현은 우리들이 같은 방향으로 돌며 인격이 형성되는 유일한 동기와 유일한 특수성으로 이끌어갈 것이며, 모든 언어, 생각, 행동이 우리 인간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최근에는 아들러 심리학을 ‘사람들에게 미움 받을 용기, 평범해질 용기, 행복해질 용기에 대해 이야기한다.’라고 정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넘쳐나고 있는 자기계발서를 대하는 방식으로 해석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열등감에 싸여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을 심리를 치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완벽한 행복을 완성하기 위하여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위안을 삼기 위하여 회피의 수단으로 해석하는 것 아닌가 싶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나름대로의 완성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인데, 그 목표 자체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면 결국 무한경쟁이 될 수밖에 없고 이는 개인의 능력을 비교하면 금방 답이 나오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의 우월함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열등감을 느끼게 되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이상행동으로 표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열등감을 과도하게 보상받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지구별에 태어난 이상 아들러의 세 가지 관계는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과 그 개인을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결과는 개인의 심리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따라서 개인의 심리적 문제 역시 사회적 맥락 안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이성, 사회적 관심, 자기초월 등의 특징이 있는 반면,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은 열등감, 타인을 지배할 수 있는 힘, 우월감 및 자기 안전을 위한 자기중심적인 관심 등의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다음 백과사전, ‘아들러’편 참고) 건강한 사람 역시 모두 완전한 존재라서 열등감을 느낄 수 있는데, 이때 느끼는 하지만 건전한 열등감은 타인과 비교해 생기는 것이 아닌, ‘이상적인 나’와 비교했을 때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 나’와 현실의 나를 비교하였을 때 생기는 간격, 즉 열등감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 되는 셈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그 차이를 좁히기 위하여 나름대로의 생활양식을 만들어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여 우월한 무엇을 만들어 극복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아들러 심리학이 찻잔 속의 태풍처럼 잠시 지나는 신드롬에 그칠 것이라고 말합니다만, 완성된 삶을 위하여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는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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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 폐허를 걸으며 위안을 얻다
제프 다이어 지음, 김현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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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러스킨은 <기억의 일곱 등불; http://blog.joins.com/yang412/13284036>에서 건축물의 기억에 관한 다음과 같은 설명에서 폐허에 담긴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건물의 가장 위대한 영광은 돌이나 금과 같은 재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영광은 건물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에 달려 있고 말하고자 하는 바의 울림과 엄밀한 관찰의 깊이에 달려 있으며, 또한 찬성이나 비난이 교차하더라도 인간애의 물결로 오랫동안 씻긴 그 벽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불가사의한 공감에 달려 있다. 오랜 시간을 견뎌온 그 증인이 인간을 마주할 때, 그리고 잠시 머물다 가는 모든 사물과 조용히 대비를 이룰 때 영광이 있다.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며 왕조의 탄생과 쇠퇴가 반복되고 지구의 표면과 해안의 경계가 바뀔지라도, 거기에 있는 돌은 그 고된 시간 동안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며 잊힌 시대와 다가올 시대를 서로 연결하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그래서 이미 그 민족 정체성의 절반을 구현하는 힘의 크기 안에 그 영광이 있다.(240~241쪽)”

 

제프 다이어의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는 바로 폐허로 떠난 여행기라는 카피에 홀려 읽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야기는 폐허가 되어가고 있는 건물이 즐비한 로마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사실은 아테네에서 시작하는 것이 더 어울렸을 법합니다만, 그리시와 이탈리아라고 하는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읽다보니 건축물이 무너져 내린 폐허보다는 폐허화되어가고 있는 자신의 내면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로마의 유적에 서 있는 거대한 돌에서 역설적으로 생명의 기운을 느끼고, 돌 사이에 펼쳐진 고요함에서 시간의 흐름에 무심해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리비아의 렙티스 마그나에서는 수직으로 세운 것이 경외의 대상이 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궁극에 가서는 그마저도 무너져 수평적으로 된 것들이 주는 매혹에 저항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웁니다.(정말 어렵습니다.)

 

그리고는 뉴올리언즈, 태국, 암스테르담, 발리 등으로 여행이 이어지는데, 여행지에서 만난 여성과의 원나잇스탠드, 마약과 같은 일탈을 반복하면서 여행지에 관한 이야기는 사라지고 여행지에서의 일상이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 모호하게 나열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행에 관한 내용일 것으로 기대했던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망각이 이야기의 핵심이 되면서 저자의 내면에 대한 성찰을 한 겹 내보이기도 합니다. “마흔이 지나면 온 세상이 오리가 지나간 자리의 물결처럼 되는거야. 마흔이 지나면 인생은 원래 낭비하기 위해 있는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149쪽)” 마흔을 불혹의 나이라고 했던 공자님이 들으시면 개 풀 뜯는 소리냐 하셨을 것 같습니다. 급기야는 호텔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 헤매기까지 합니다. 길을 헤매는 일은 캄보디아의 프놈펜에서 메콩강을 거슬러 시엠립으로 가는 길에 톤레삽에서 배가 좌초되는 일로 이어집니다. 그에게 있어 시엠립은 앙코르왓의 신비보다는 프놈바켕의 석양이 더 큰 의미를 남겼고, 프레룹사원에서 콜라를 파는 소녀와의 실강이기 더 기억에 남았던 모양입니다.

 

1999년에 방문했다는 파리의 에피소드를 읽기 시작하면서, 뉴올리언즈 여행이 1991년이었음을 상기하면서 이야기들이 여행순서와는 무관하게 저자의 기획의도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디트로이트에서 이 책의 주제가 드러나게 됩니다. 로마에서 처음 기획할 때는 고대 유적지의 폐허에 대한 글이 될 참이었는데, 그 사이에 자신이 폐허가 되고 말아 읽기나 쓰기는 물론 집붕력을 요구하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기하고 있던 책쓰기를 디트로이트에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저야 디트로이트를 그저 운전해서 지나친 기억 밖에 남아 있지 않아 도시에 대한 구체적인 인상이 없어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바다의 블랙록 사막이야말로 저자에게는 모든 욕망이 충족되는 ‘구역’이었다는 것입니다.

 

책읽기를 마치고는 그저 어렵다는 느낌만 남은 것 같습니다. 다시 읽어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는 불길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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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독서 두번째 이야기 - 길을 안다는 것, 길을 간다는 것 여행자의 독서 2
이희인 지음 / 북노마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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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독서; http://blog.joins.com/yang412/13651913>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랬기에 두 번째 이야기를 써낼 힘을 얻었겠지요. 새로운 여행지에서 읽으면 좋을 책을 골라주실 모양이라는 생각으로 두 번째 이야기를 펼쳤습니다만, 목차에서 무언가 다름을 발견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구원을, 사랑을, 이야기를, 그리고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었는데, 두 번째 이야기는 추억을, 희망을, 낙원을, 그리고 낭만을 찾아 떠나지 말라고 넌지시 비틀고 있습니다. 반어법일까요? 그래서 더 꼼꼼하게 읽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서문에서 저자는 여행과 독서의 즐거움이 줄지 않는 한 이런 원고를 계속 써보겠다는 욕심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무런 욕심도, 의무도 없이 여행하고 책을 읽던 때가 행복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두 번째 이야기에 녹여진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을 읽고서는 첫 번째보다 더 참담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모두 21꼭지나 되는 이야기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더 많은 여행지 가운데 가본 곳은 오직 한 곳 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무엇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자가 여행에 들고 갔다는 56권의 책들 가운데 제가 읽어본 책은 불과 10권밖에 되지 않는 것도 조금 그렇습니다. 그나마 년 전에 쿤데라 전집 읽기를 한 덕을 조금 보았습니다.

 

호즈를 제외한 5대주를 고루 포함하고 있습니다만, 아시아지역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잘 알려진 여행지보다는 처음 듣는 곳도 많은 것 같습니다. ‘추억을 찾아 떠나지 마라’는 이야기들 속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여행과 책은 대게 세 지점에서 만난다. 여행 전과 여행 중, 그리고 여행 후. 일상에서 만난 어떤 영감에 가득 찬 책은 독서가를 여행으로 내몬다. 길 위에서의 책은 여행자의 고달픈 길에 길동무가 되어준다. 여행 뒤에 만나는 책은 다녀온 땅에 대한 지식과 감상을 완성시켜준다.(22쪽)” 전적으로 동감합니다만 일상의 독서에서 여행을 결단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책에서도 가끔은 토로를 하고 있습니다만, 저자는 책을 꼼꼼히 읽는 편인가 봅니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읽기를 중단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일단 펼쳐든 책은 반드시 끝을 보는 저와는 다소 다른 책읽기 습관인 것 같습니다. 꾸준한 책읽기가 제일 어렵다고들 합니다만 길가기와 책읽기에 대한 저자의 이런 생각을 들으면 달라지지 않을까요? “길 가기와 책 읽기에 관해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 부지런히 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다. 부지런히 읽는 책이 가장 빨리 읽는 독서다. 어느 날 뒤를 돌아보면 막막했던 길들이 내 등 뒤에 납작 엎드려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뒤돌아보면 저걸 언제 읽지 했던 책들이 내 손때를 잔뜩 묻힌 채 서가에 꽂혀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한숨 쉬지 말고 가던 길을 갈 것. 읽던 책을 읽어나갈 것(329쪽)”

 

<여행자의 독서; 두 번째 이야기>까지 읽고서도 여전히 책 읽는 시간을 만들기 위하여 여행을 한다는 저자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책을 읽고서 느낌을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모를까 그저 책을 읽기 위한 여행은 여전히 호사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책을 통하여 우리에게 소개되어 있지 않으면 여행지 선정 목록에서 뒤로 밀리게 되나요? 사람들마다 여행의 목적이 다를 것이기 때문에 저자가 여행을 하는 목적도 분명 독특하면서도 의미가 있다는 점은 저도 인정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와 같은 여행을 꼭 따라할 필요는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나름대로의 여행의 기술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제 경우는 여행을 통하여 나의 앎의 지평을 넓히는데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다녀와서도 책읽기를 통하여 부족했던 앎을 넓히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기도 합니다.

 

<겨울 나그네>의 3번째 곡 ‘얼어버린 눈물’에서 인용한 대목은 리뷰에 남겨두어야 하겠습니다. “얼어버린 눈물이 떨어지네, 내 볼 위로 / 그럴 수 있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울고 있었다니? / 오 눈물, 내 눈물아, 넌 그렇게 미지근하구나 / 하지만 이제 얼어버렸네, 차가운 아침 이슬처럼.(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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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집 - 불굴의 인간 토니 주트의 회고록
토니 주트 지음, 배현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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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열심히 읽는다고는 하지만 이미 읽었어야 할 책들이 얼마나 되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기억의 집>의 저자 토니 주트 역시 이미 친숙한 이름이 되었어야 마땅함에도 이제라도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1948년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 킹스 칼리지와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을 시작으로 옥스퍼드 대학, 버클리 대학, 뉴욕 대학에서 유럽역사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전후 유럽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받는 <포스트워 1945~2005Postwar: A History of Europe Since 1945>를 발표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는데, 저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책입니다. 하지만 최근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들어는 본 기억이 있어 조만간 읽어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토니 주트는 불의를 목격할 때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본래적인 의미의 지식인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메카로 가는 길; http://blog.joins.com/yang412/13596903>의 저자 무함마드 아사드가 이슬람에 심취한 유대인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토니 주트가 조국 이스라엘의 잘 못을 비판하기를 서슴치 않았다는데서 유대인에 대한 저의 편견을 버리게 될 것 같습니다. <유대인 이야기; http://blog.joins.com/yang412/13617145>에서도 확인하였던 것처럼 저 역시 유대인들은 뛰어나지만 배타적인 경향이 강한 민족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10대 시절 몇 차례 여름방학을 이스라엘의 키부츠에서 보내면서 이미 시온주의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키부츠는 타국 땅에서 뿌리를 못 내리는 디아스포라들을 본토로 귀국시켜 퇴보상태에서 구출해야 한다는 도덕적 목적으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일종의 유토피아적 관점에서 시작된 노동 시온주의는 아랍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는 바람에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상황을 초래하였을 뿐 아니라 구성원들에게 커다란 제약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트는 일찍 깨닫게 되었다고 저자는 고백합니다. “집단 자치 정부를 꾸렸다거나 소비재를 평등하게 배급한다고 우리가 더 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타인에게 더 관용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실은, 자부심이 극단에 이를수록 가장 악질적인 인종적 유아론만 강해질 따름이다.(103쪽)” 키부츠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그는 이스라엘은 감옥과 같았고 키부츠는 감방같다는 것을 깨우친 것입니다. 특히 6일 전쟁이 끝난 다음 골란고원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혈기왕성한 유대인 젊은이들이 패전한 아랍인들을 잔혹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시온주의와 결별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나아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도, 코뮌주의를 믿는 이스라엘 정착자가 되는 것도, 모두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편적 사민주의자가 되었다.

 

<기억의 집>은 토니 주트의 사후에 세상에 나온 유고집입니다. 저자는 2008년 세칭 루게릭병이라고 하는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으로 진단받고 투병하다가 2010년 타계하였습니다.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은 미치 엘봄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로 우리에게 알려졌고, 우리 영화 <내 사랑 내 곁에; http://blog.joins.com/yang412/11091960>로 우리와 가까워졌습니다. 루게릭병 환자는 대뇌와 척수에 있는 운동신경세포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조금씩 죽어가면서 증상이 나빠집니다. 처음에는 손과 손가락, 다리의 근육이 약해지고 가늘어지는 증상과 함께 말하기나 음식물 삼키기가 어려워집니다. 점차 근력이 떨어지면 움직이기 위하여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결국은 침대에 누워 지내야 합니다. 우리 몸에 있는 근육을 움직이는 신경세포가 죽어가는 것이라서 의식이나 감각은 죽을 때까지 정상을 유지 됩니다. 그래서 주트는 ‘자신의 육체가 마치 한 주가 지날 때마다 6인치씩 면적이 줄어드는 감방’같다고 비유했을 것입니다.

 

책을 받으면서 궁금했던 원제 <The Memory Charlet; 샬레의 기억>이나 <기억의 집>이란 제목의 의미는 서문에 이어 나오는 글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밤’에서는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어려움을 토로하는데, 특히 혼자서 보내야 하는 밤은 전혀 사소한 일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불면증으로 고통을 받아본 사람은 그나마 조금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만, 베개에 머리를 내려놓는 순간 대부분 꿈나라로 가는 저는 충분히 실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자의 해결책은 이렇습니다. “나의 삶과 나의 생각, 나의 환상과 기억, 잘못된 기억 따위를 샅샅이 훑는 것이다. 정신이 자신을 가둔 육신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사건과 인물 혹은 이야기에 매진하게 만들었다. 이런 정신적 의식은 나의 주의를 사로잡을 만큼 충분히 흥미로워야 하고, 귓속이나 등허리의 참기 힘든 가려움을 견디게 해줘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잠을 부르는 전주곡으로도 작용할 수 있도록 충분히 지루하고 뻔해야 한다.(29쪽)”

 

이렇게 밤의 시간에 기억의 심연에 가라앉아 있는 먼 기억까지도 추슬러 만든 이야기들을 다음날 구술하여 글로 정리하였는데, 문제는 저자의 말대로 ‘몇 시간 뒤에 회수 할 어떤 생각을 공간적으로 정리하는 일’이 만만치 않더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초기 모더니즘 사상가와 여행가들이 세부 묘사를 저장해 두고 회상하기 위해 이용한 기억 방식에 착안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조너선 스펜스의 <마테오 리치의 기억의 궁전>에 언급되어 있다고 합니다. 기억술사라고 불러도 될 그들은 자신들의 기억이 머물 공간으로 거대한 궁전을 지었다고 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옛날 사람들은 기억이라는 것이 우리의 의식 속에 있는 창고에 넣었다 꺼내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트가 밤새 엮은 생각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이용한 나름대로의 기억의 집은 1950년대 후반 가족들이 함께 갔던 스위스 빌라르 지방의 고즈넉한 마을 체지에르에 있는 가족호텔 샬레였다고 했습니다. 샬레 자체를 기억의 방아쇠에서 기억의 저장장치로 변모시켰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샬레의 구조 하나하나까지도 사실적으로 눈앞에 샅샅이 그릴 수 있을 뿐 아니라 방문하고 또 방문하고 싶은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샬레는 무한히 재구성되고 재분류된 회상들의 저장고 노릇을 하는 기억의 궁전이 되기에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 주트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건축물이 되었습니다. 저자는 매일 밤낮으로 샬레도 되돌아가 친숙한 좁은 복도를 지나 거실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안락의자 가운데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다음 날 쓸거리에 사용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불러내고 정리하고 배열한 다음에 그 이야기를 샬레의 객실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 작은 책에 실린 글들을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쓴 것들이 아니다. 다만 스스로의 즐거움을 위해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라고 전제하고 그래서 ‘부모님이나 나의 유년 시절, 또는 전처와 현재의 동료들을 언급하는 지점에서 나는 글이 말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여기에는 에두르지 않는 솔직함이라는 장점이 있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이 때문에 상처를 받는 이가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저자의 기억에 담겨있는 20세기 초반의 런던 변두리 마을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자연스럽게 그려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저자의 고집스러운 철학이 녹아들어 있다는 느낌을 첫 번째 글 「금욕」에서부터 엿볼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물자부족으로 배급을 실시하던 시기를 지나오면서 금욕이 몸에 밴 저자는 끊임없이 서민들의 금욕을 요구하는 위정자들에게 할 말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익을 위해 끝없는 상거래에 양보했고 우리의 지도자들이 더 높은 포부를 품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 더 나은 통치자를 원한다면, 우리는 통치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우리의 이기심은 줄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약간 금욕적일 필요가 있다.(42-43쪽)”라고 마무리하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고향을 이야기합니다만, 저자는 그 범위를 더 좁혀서 ‘집을 마음이 깃든 곳’으로 말합니다. 사는 동안 많은 집들을 전전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스스로를 노숙자라고 한탄하면서도 네 살 때부터 열 살 때까지 살았던 런던 남서부의 퍼트니를 애틋하게 기억하고 있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열 살 때 살던 집에 관한 기억이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지금은 재개발이 되어 사라져버린 야트막한 언덕 꼭대기에 있는 집엘 가려면 돌계단을 헉헉거리면서 올라야 했고, 수도가 없어 한겨울에도 언덕 아래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 날라야 했습니다. 게다가 집 뒤로는 도시 변두리에 있던 미군기지에 근무하는 미군들을 상대하는 그런 집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이듬해 언덕동네를 떠나 도심 가까이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어떻든 주트는 퍼트니의 골목길에서 빅토리아시대적 느낌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퍼트니는 그의 런던이었고, 런던은 그의 도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기억에는 고향동네에서 버스 혹은 전철을 탔던 일부터 기차를 타고 조금 멀리 여행하기, 혹은 배를 타거나 차를 몰아 유럽을 여행하는 일까지 담겨 있습니다. 여행을 통하여 나를 둘러싸고 있는 테두리들을 벗어나는 경험을 맛보면서 생각의 틀을 키워나갈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행을 좋아한 저자는 “혼자서 어딘가로 가고 있을 때만큼 행복한 일은 없었고, 그곳에 다다르는 시간이 오래면 오랠수록 더 좋았다. 걸으면 유쾌했고, 자전거를 타면 즐거웠으며, 버스 여행은 재미있었다. 하지만 기차는 곧 천국이었다.(75쪽)”라고 말합니다.

 

앞서 저자를 역사학자라고 설명하였습니다만, 책을 읽어가다 보면 다소 변화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저자는 늘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고, 심지어 열두 살 무렵에는 필요한 학위를 따는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기도 했다는 것인데, 정작 30대 초반에는 옥스퍼드에서 정치학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중년에 맞는 위기의 포인트에서 아내를 바꾸거나 차를 바꾸는 다른 남자들과는 달리 자신은 전공을 바꾸었다는 것 같습니다. 동서냉전과 그에 따른 범죄의 책임에 관한 논쟁이 계기가 되어 체코어를 배우게 되었고, 프라하를 방문하였으며 동유럽사를 가르치고 저술하기 시작했으며, 종국에는 <포스트워>를 집필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중년의 위기에서 자신의 선택에 대한 긍지를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덕분에 나는 포스트모던 학파의 방법론적 유아론(唯我論)으로부터 완전히 치유되었다. 덕분에 좋든 나쁘든, 나는 믿음직한 대중 지식인이 되었다. 우리가 서양 철학을 통해 꿈꾸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 천상과 지상에 존재했고, 나는 그중 일부를 뒤늦게야 보았다.(181쪽)”

 

앞서 저자가 시온주의와 결별한 유대인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래도 저자 나름의 정체성으로 고민한 흔적을 「언저리 사람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저자가 자랄 무렵 영국에서 유대인은 명백하게 문화적 편견의 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부모님들은 조직적인 유대인 공동체를 멀리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유대명절을 쇠지 않았고 랍비들의 권고에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유럽사를 가르치는 학자로서, 영국인인 동시에 유대인임을 강하게 느끼면서도 ‘유대스러움’이 많이 통용되고 있는 현대 미국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유아론적 사고와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뿌리 없는 코스모폴리탄’이라고 모욕적으로 불리면서도 스스로를 언저리 사람들로 규정하는 것은 저자가 살고 있는 뉴욕이라는 곳의 특별함에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뉴욕이 여전히 세계의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인들이 모여 서로 부비로 살고 있으며 세계를 향하여 열려 있는 도시, 뉴욕. 그런 사람들에게 관대한 도시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언저리 사람들」이 저자의 마지막 글이 되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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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독서 - 책을 읽기 위해 떠나는 여행도 있다 여행자의 독서 1
이희인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빈약하기만 한 회사 도서실이 소장한 책들 가운데 더는 눈길을 끄는 책을 찾을 수 없을 지경인데, 그나마도 폐쇄키로 했다는 소식이 암울했던 터라서 구청에서 운영하는 동네 도서관에 등록했습니다. 등록한 기념으로 고른 책이 이희인님의 <여행자의 독서>입니다. 요즘 들어 일과 무관하게 즐기는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만, 업무 차 여행을 떠날 때도 몇 권의 책을 골라 담곤 했습니다. 오가는 비행기에서 시차 때문에 설치는 시간을 위한 책읽기였기 때문에 굳이 여행지와 관련이 있는 책을 고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여행자의 독서>는 독특한 면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행지 혹은 여행과 관련이 있는 책을 나름대로는 고심해서 고르고, 현지에서 여유를 부리면서 읽고, 또 그 느낌을 확인한다고 할까요? 저자께서 “저로서는, 여행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은 배낭을 싸는 시간, 그중에서도 어떤 책을 넣어 갈까 고민하는 시간들입니다. 어떤 책이 가고자 하는 땅과 어울릴까 고민하는 일은 여행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합니다.(5쪽)”라고 서문에 밝힌 것처럼 여행 중에 시간을 내어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책을 고르는 시간에 의미를 크게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면 ‘책과 여행’은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여행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점에서 책이 여행에 긍정적인 면이 있을 뿐 아니라 저자처럼 여행지에 관한 책을 가지고 간다면 여행이 책에 빛을 더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이고,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다!(6쪽)”라는 멋진 말을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광고 분야에서 일하시는 분답게 재기가 반짝이는 것 같습니다.

 

우선 놀라운 것은 <여행자의 독서>에 올려 진 이야기가 모두 22꼭지나 되는데, 여행지는 그보다도 더 많다는 것이고, 모두 각각의 여행인 것 같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한해에 몇 차례나 해외여행을 다녀오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책 제목에 걸맞게 여행보다는 책에 방점이 찍히는 탓인지 여행지에서의 느낌보다는 그곳과 관련된 책 내용이 비중을 더 차지하는 글이 많다는 것도 독특한 점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꼽은 책의 내용 뿐 아니라 작가를 포함하여 다양한 배경지식까지도 풀어놓은 것을 보면 저자의 엄청난 책읽기 내공이 저절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면 일반적인 여행객이 그 고장의 명소를 찾는 여행이 아니라 책에 나오는 특정한 장소를 찾아가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래도 되나 싶기도 합니다.

 

저자가 여행에 들고 갔다는 39권의 책들 가운데 제가 읽어본 책은 불과 6권밖에 되지 않습니다. 가본 곳이 불과 4곳 밖에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다 싶습니다만, 가본 곳에 관련된 책인데도 읽지 않은 것이 많아 이번 기회에 찾아서 읽어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본격적인 여행과 책 이야기를 풀어놓기 전에 소개하고 있는 사진도 이야기해야 하겠습니다. 가끔은 풍경을 담은 사진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주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물론 저 자신을 사진에 담는 일도 별로 없습니다만, 저는 누군가의 얼굴을 사진에 담는 일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부럽다면 부럽고, 이래도 될까 싶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어떻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진들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아마도 사진 찍는 공부를 따로 하셨던 모양입니다.

 

어떻든 이 책에서 여행지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곳을 갈 때 이런 책을 들고가면 좋겠다는 도움은 분명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이고,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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