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살람, 마그레브! - 지중해 연안, 북아프리카 4개국을 가다
이철영 지음 / 심산 / 200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구문명의 태동을 이룬 현대사의 주역이라고 생각한 유럽을 주로 여행하던 저자가 눈길을 돌린 곳이 북아프리카라고 했습니다. 서계역사의 변방으로 알았던 북아프리카 여행을 준비하면서 저자는 이곳에 로마의 유적이 그렇게 거대하게, 또 광대하게 존재할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들이 오스만투르크라는 이슬람제국과 가톨릭을 앞세운 유럽 열강의 식민지였음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주변부의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들은 역시 불쌍한 인생이라고 안쓰럽게 생각하는 눈치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북아프리카의 역사를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로마가 지중해를 지배하기 이전에 북아프리카는 소아시아에서 건너온 페니키아 사람들이 정착하여 카르타고를 건설하였고, 카르타고가 로마에 멸망한 다음에도 다시 소아시아에서 건너온 아랍사람들이 이곳을 거쳐 이베리아반도까지 지배하는 거대한 이슬람왕국을 건설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북아프리카의 원래 주인인 베르베르족이 세운 알모라비데왕국과 알모아데왕국이 이베리아반도까지 지배한 적이 있습니다. 이슬람제국은 중세유럽이 그리스에서 발아한 문명을 어둠에 묻어두었을 때, 이를 소중하게 이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해석까지 더하여 유럽이 르네상스를 열 수 있도록 기여하였으니, 인류사에서 중세 이슬람의 역할은 분명 제대로 평가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근세 유럽 제국주의의 침탈을 받은 것으로 이 지역을 과소평가하는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저자는 2007년에 튀니지에서 시작하여 리비아, 알제리를 거쳐 모로코까지 여행하면서 마그레브 지역을 여행하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그레브란 “해가 지는 지역” 또는 “서쪽”이라는 의미를 담은 아랍어로 오늘날의 북아프리카 지역, 즉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를 아우르는 지역을 말하며, 역사적으로 이슬람이 지배한 이베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몰타를 포괄하여 지칭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저자가 리비아를 포함하여 마그레브라고 적은 것은 1989년에 출범한 북아프리카 5개국(알제리, 리비아, 모로코, 튀니지, 모리타니)의 지역협력체, 아랍 마그레브 연합과 혼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자의 여행담을 읽다보면 모로코를 제외한 세 나라는 사회적으로도 불안정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관광인프라가 열악하여 배낭여행을 하는데 어려움이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언어의 소통 문제는 기본적으로 어렵고, 숙소나 교통편을 미리 예약하는 일도 수월치 않은데다가 주로 이용하게 되는 택시비용 역시 눈치껏 협상을 해야 한다고 하니 섣불리 나서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행에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자료도 빈약해서 저자의 경우는 론리플래닛을 토대로 여행을 준비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럽을 많이 여행한 탓인지 저자는 로마문명에 대하여 경도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지역에 산재해있는 로마의 유적을 보면서 “로마가 더 대단해 보이고, 문명사의 모든 분야에서 모범이 될 뿐 아니라, 후대에까지 이렇게 많은 감동과 영향을 주는 제국은 흔치 않다(37쪽)”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카르타고와의 전쟁이 끝난 다음에 이들이 존재하지 못할 정도로 파괴한 로마에 대해서는 로마를 파괴한 반달족을 비난하는 반달리즘은 있으면서 로마이즘이란 말은 없는가 묻는 것에 머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어렵게 찾아갔다는 리비아의 로마유적지 렙티스마그나는 최근에 읽은 제프 다이어의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에서도 어렵게 찾아가 감동을 적고 있는 것을 읽으면서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곳인데, 많은 사진을 곁들인 상세한 설명을 새겨두게 됩니다.

 

아무래도 젊은 탓인지 현지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말을 엮어가는 모습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특히 여성들과 작업(?)을 쉽게 거는 능력자라는 것을 과시하는 듯해서 불편한 느낌이 남는 것은 공연한 투정일 수도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트남 견문록 - 외교관 임홍재, 베트남의 천 가지 멋을 발견하다
임홍재 지음 / 김영사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해 베트남 하롱베이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 다녀온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보려 하고 있습니다. 여행의 느낌만 소략하게 적어두었던 것을 여행지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곁들여 이곳을 가려는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여행기가 되었으면 해서 고른 책입니다. <베트남 견문록>은 2007년부터 2년 6개월 동안 베트남에서 근무하신 임홍재대사께서 재임 기간 보고 느꼈던 베트남의 역사, 문화, 자연 등을 정리하고, 특히 프랑스, 미국, 중국 등 강대국들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동력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 세대는 베트남하면 청룡부대, 맹호부대, 백마부대 등 파월장병과 관련된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베트남 입장에서 보면 적국인 셈입니다. 월남파병과 관련하여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그런 과거에도 불구하고 베트남과 우리나라가 외교관계를 맺은 지가 벌써 18년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2,000여 개의 한국 기업이 베트남에 진출해 있고, 9만 여 명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거의 같은 숫자의 베트남인들이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우선 베트남에 부임하면서 느낀 첫인상을 ‘너는 내 운명’이라고 느꼈다는데, 그 이유를 한국과 베트남이 문화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낯선 고장에 가면 그곳 사정을 알아보는 것이 우선일 터이다. 그래서 저자는 ‘베트남은 어떤 나라인가’를 요약하고,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 얽혀 있는 질긴 인연을 들추어냅니다. 상대를 이해하려면 그들의 역사를 잘 알아야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래서 베트남의 뿌리를 찾아들어갑니다. 그 뿌리는 베트남 민족의 발원이 되는 용의 전설에까지 이릅니다. 전설에 의하면 바다의 용과 산의 요정이 결혼해서 100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이들이 산과 들로 나가 비엣(越)족의 선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서북쪽이 험한 산악지형인 반면 동남쪽으로는 바다를 면하고 있는 베트남의 지역적 특성에서 나온 전설로 보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인류학자들은 50만 년 전부터 베트남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추정하지만 베트남의 역사는 대체로 기원전 1000년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트남사람들은 그들의 역사과정을 ‘1000 + 1000 + 900 + 80 + 30 + 40’으로 표현한다고 하는데, 이는 청동기 시대 1000년, 중국 지배 1000년, 베트남 민족 독립 왕조 시대 900년, 프랑스 식민통치 80년, 독립 통일 전쟁 30년, 개방과 국제화, 지역화 40년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프랑스 식민통치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과정과 미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가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베트남 사람들의 저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리고 그들을 승리로 이끌어낸 결정적 리더십을 보인 호찌민의 삶과 철학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나 그 이후 읽은 책을 통하여 알게 된 호찌민 주석의 삶에 대한 철학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호찌민 주석은 일생을 베트남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살았으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136쪽)”라는 지나치게 간략해 보이는 저자의 요약이야 말로, 길어지면 군더더기가 되어 호찌민주석을 욕되게 할 수도 있는 점에서 최선의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는 이어서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는데, 생각 같아서는 프랑스나 미국과의 전쟁에 앞서 정리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노이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베트남 사람들의 인식이 무엇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설명하고 그로부터 베트남의 숨은 매력과 미래까지도 아우르는 치밀한 생각이 감추어져 있다고 보았습니다.

 

한반도를 토끼에 비유한 것은 일본의 간계이며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라고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도차이나반도의 동쪽 바다를 따라 길게 늘여져 있는 베트남을 떼어놓고 보면 용을 닮았다고 합니다. 1박2일로 하롱베이를 스치듯 구경한 것을 가지고 베트남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적절치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번 기회에 베트남을 제대로 공부해볼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각은 죽지 않는다 - 인터넷이 생각을 좀먹는다고 염려하는 이들에게
클라이브 톰슨 지음, 이경남 옮김 / 알키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니콜라스 카가 2011년에 출간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http://blog.joins.com/yang412/13186966>에서 미디어혁명과 인간 사고의 확장, 그리고 인터넷의 발달이 인간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 이래, 디지털 툴의 발전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던 바 있습니다. 혹자는 인터넷 미디어 혁명을 구텐베르그의 인쇄술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터넷과 인쇄술은 기존의 미디어체계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공통점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쇄술의 발달로 사람들이 쉽게 책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책읽기를 통하여 사고의 깊이를 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책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전달받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생각을 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터넷을 통하여 다양한 정보를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된 것은 분명 혁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폭주하는 정보를 적절하게 다루는 기술이 아직 몸에 익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필요한 정보를 꼼꼼히 읽고 생각을 통하여 나름대로의 생각으로 정리해야 나만의 철학이 완성되는 것인데, 넘쳐나는 정보를 욕심껏 챙기기에만 급급하여 정보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물론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새뮤엘 존슨이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어떤 주제에 대해 직접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련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책을 통하여 정보를 얻던 시절의 한가한 이야기입니다. 인터넷혁명은 이제 몇 개의 키워드만으로도 필요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기억을 아웃소싱하게 된 것입니다.

 

일찍이 기억을 아웃소싱하게 된 것을 우려한 사람이 있습니다. 플라톤의 <파이드루스(Phaedrus)>에는 이집트에서 문자를 발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집트의 나우크라티스 라는 곳에 살고 있는 발명의 신테우스는 “왕이여, 여기에 내가 심혈을 기울려 완성한 작품이 있소. 이것은 이집트인의 지혜와 기억력을 늘려 줄 것이오. 기억과 지혜의 완벽한 보증수표를 발명해낸 것이지요.”라면서 자신이 발명한 문자를 이집트 사람들에게 널리 보급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였습니다. 이에 타무스왕은 “문자를 습득한 사람들은 기억력을 사용하지 않게 되어 오히려 더 많이 잊게 될 것입니다. 기억을 위해 내적 자원에 의존하기보다 외적 기호에 의존하게 되는 탓이지요. 당신이 발명해낸 것은 회상의 보증수표이지, 기억의 보증수표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문자를 습득하여 스스로 지혜로운 자라고 착각하는 자들의 오만을 경계한 타무스왕이 오늘날의 인터넷혁명을 보고받게 되면 어떤 답을 내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디지털기기의 발전으로 기억을 아웃소싱하게 된 결과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 생각이 없는 디지털 치매에 이르도록 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에 이르렀습니다. 만프레드 슈피처박사는 <디지털 치매; http://blog.joins.com/yang412/13166541>에서 그저 편리하다는 이유로 디지털기기에 의존하고 기억을 늘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조기에는 중독이라는 부작용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보면 치매라고 하는 불청객을 일찍 만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이러한 우려에 정면으로 맞서는 주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클라이브 톰슨의 <생각은 죽지 않는다>입니다. ‘종말론은 정서적으로 자기방어적이다’라고 잘라 말하는 클라이브 톰슨은 인터넷혁명에 대한 비관적 시각에 대하여 “첨단 기술이 문화의 기반을 흔든다고 투덜대면, 알맹이도 없는 소셜 네트워킹의 유행에 현혹되지 않은 예리한 비평가로 보일 테니까. 그렇게 하면 과거를 더 풍부하고 심오하게 이해하며, 오늘날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일시적 현상에 초연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모른다.(402-403쪽)”라고 비꼬기도 합니다. 대단한 긍정주의자로 보이는 저자는 기술 과학 분야의 베테랑 저널리스트로서 특히 디지털 기술과 그것의 사회적ㆍ문화적 영향력에 집중하며 이에 대한 연구와 집필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 역시 종말론자처럼 새로운 기술은 하나같이 오랫동안 몸에 익은 행위를 버리고 새로운 유형의 행동을 배우도록 밀어붙인다는 데 동의합니다. 해럴드 이니스는 이를 ‘새로운 툴의 편향성’이라고 불렀는데, 새로운 기술이 일상생활을 어느 쪽으로 치우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오늘날의 디지털 툴이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적인 편향성을 세 가지로 요약하였습니다. 첫째, 디지털 툴은 엄청 규모의 외부 메모리를 활용한다. 둘째, 오늘날의 툴은 아이디어와 사진과 사람과 뉴스 사이의 연관성을 찾기 쉽게 만들어준다. 셋째, 디지털 툴은 커뮤니케이션과 생각 공개의 과잉을 부추긴다. 저자 역시 ‘우리가 두뇌를 자주 활용하지 않거나 부정행위를 하거나 지름길만 찾으려 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툴이 우리가 일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나치디스처럼 툴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면, 종말론자들이 우려하는 상황을 맞을 수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컴퓨터가 출현한 이후로 체스의 그랜드마스터 지위에 오르는 나이가 점점 더 어려지고 있는 현상을 보면 분명 IT기술을 인간을 더 똑똑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http://blog.joins.com/yang412/13176657>와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 http://blog.joins.com/yang412/13189206>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들의 놀라운 기억력이 부러우면서도 모든 것을 기억하는데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은 이율배반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경험에 따르는 고통을 회피하기 위하여 망각기능을 발전시키는 진화를 선택하였다는 주장에 공감을 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탈리 샤롯 지음, 설계된 망각; http://blog.joins.com/yang412/13173328)

 

흥미로운 점은 인간에게 망각이라는 놀라운 기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아웃소싱하는 방식으로 보고들은 것을 모두 기억할 수 있기를 꿈꾸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디지털기기의 발전으로 이룩해낸 인간의 메모리의 무한한 확장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토탈 리콜에 도전하게 된 것입니다. 디지털 카메라와 녹음기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할 뿐 아니라 열어본 모든 웹 페이지와 주고받은 이메일, 전화통화 내용까지도 기록하는 사람을 라이프로거(lifelogger), 즉 ‘일상을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기록한 내용을 불러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두뇌의 회상기능과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기기에 수록한 기억은 단서가 없거나 데이터가 올바른 방식으로 저장되어 있지 않다면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두뇌는 관련된 단서들을 떠올리다 보면 번쩍하고 떠오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국 기억을 아웃소싱할 수는 있지만, 저장된 기억을 불러내는 회상과정은 여전히 불완전한 인간의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와 같은 SNS가 활성화되면서 사람들은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글이 아닌 사진 혹은 영상으로 SNS를 구성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런 경향은 최근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SNS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대중과 공유하는 일이 의외의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그 누군가를 의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취중에 써 올린 포스팅 이 의도치 않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블로그와 트위터를 통하여 세상과 교감을 하고 있습니다만, 때로는 SNS에 올린 글이 사실과 다르다는 지적을 받고 포스팅을 내리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양한 글쓰기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청중효과’ 때문일 것입니다. 청중효과는 공부과정에 있는 학생들의 글쓰기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알려졌습니다. 스탠퍼드대학의 앤드리아 런스퍼드교수가 미국 젊은이들의 글쓰기문화에 대하여 연구한 바에 따르면 요즈음 학생들이 써내는 에세이의 길이는 한 세기전보다 여섯 배 이상 길어졌지만, 문법 실력은 별로 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백 년 전에는 ‘봄에 피는 꽃’처럼 에세이 주제를 정해주었지만, 1980년대에는 학생들의 개인적인 경험을 주로 쓰게 하다가, 요즘에는 논증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근거를 찾아 자신의 논리를 입증하는 에세이가 훨씬 많다고 합니다.

 

디지털 툴이 창의력과 기억력을 후퇴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봅니다. 알키메데스가 ‘유레카!’라고 소리칠 수 있었던 것은 풀어야 할 문제에 매달리는 과정에서 관련 지식을 많이 쌓아놓았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저자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즉 정신적 연료 없이 창의적인 통찰력이 번득이는 순간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흥미를 느끼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지식에 대하여는 좀처럼 기억의 스위치를 꺼놓지 않는 것 같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잘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들은 아웃소싱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다만 디지털 툴을 이용함에 있어 주의력을 분산시키는 문제는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착과 열정이 우리의 집중력과 기억력을 추진시키는 힘이라고 한다면 그런 집착과 열정을 폭넓은 대상으로 향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제가 일하는 회사의 업무 특성상 회의가 많은 탓인지 회의를 줄일 수 있다는 부분을 꼼꼼하게 읽어 보았습니다. 베이비붐 세대는 사무실에 모여 회의를 통하여 집단의식을 형성하고 집단적 결정을 내리는 방식을 선호하였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전통적 회의는 의견대립만 조장하는 거추장스러운 절차라고 생각하고, 짧고 비공식적 회의를 선호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서로의 상황을 알리는 연락을 수시로 취하고 온라인으로 정보를 공유하면서 물리적으로 했던 업무를 디지털방식으로 처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참고할 점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디지털 툴이 가지는 가장 큰 힘은 디지털 툴을 통하여 모두가 연결되는 사회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책임할 것 같은 디지털 세대들은 책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집단적 무지가 문제가 되는데, 이는 주변에 태도와 신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모르거나 과소평가할 때 일어난다고 합니다. 결국은 정보의 흐름이 원활하게 일어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개선하게 되면 잘 보이지 않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알게 하면 집단적 무지는 의외로 쉽게 몰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IT강국임을 반영하듯 우리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언급하고 있는 것도 특징입니다. 예를 들면, 네이버가 구굴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낸 비결이라든지, 생각이 날듯 말듯한 상황을 표현하는 ‘입안에서 뱅글뱅글 돈다’고 하는 우리의 관용구가 훨씬 재미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2008년 제2차 광우병사태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회원수 100만을 자랑하는 동방신기의 팬카페 카시오페아의 여학생들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결정되자, 대통령의 결정이 옳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고 청계천광장에 모여 촛불을 켰는데, 10대 소녀들이 경찰에 구타당하는 장면이 공개되면서 군중을 해산시키려는 진압작전이 역효과를 불러일으켰고, 대통령의 유감과 내각은 총사퇴를 표명했다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과연 사실은 얼마나 될까요?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디지털 세상은 아직까지는 많은 문제를 품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해결방안을 마련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분명 인쇄술에 이어 인간의 사고체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릴 혁명이 완성될 것으로 믿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 - 아내들이여, 가슴 뛰는 삶을 포기하지 마라
김미경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저자임에도 책은 처음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년초에 원장님의 선물로 받은 책입니다. 몇 종류의 책들 가운데 고르는 것이었는데, 이미 읽은 책들이 많아서 선택의 폭이 그리 넓지는 않았습니다. 제목 때문에 책 읽는 아내를 위하여 고른 책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아내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해지게 되었습니다. ‘아내들이여, 가슴 뛰는 삶을 포기하지 마라’라는 카피를 달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집밖의 세상을 꿈꾸는 여성들에게 더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집을 지키면서 육아와 아이들 교육에 정성을 다하는 여성들의 삶은 적어도 저자에게는 꿈꾸던 삶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자녀나 남편에 대한 배려는 ‘이기적인 아내, 이기적인 엄마가 되라’고 설파하는 저자에게는 씨알도 먹힐 수 없는 단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친구 집에서 엄마가 만든 피자를 얻어먹은 일이 부러웠던 딸의 볼멘 투정에, “집에서 (네가) 엄마를 볼 수 있는 시간은 학원에 가기 전 딱 한 시간이야. 근데 네가 친구 집이나 놀이터에서 놀다 오면 그 한 시간에도 너는 엄마를 못 보겠지. 결국 엄마도 널 괜히 기다린 것이 되고, 그러면 자, 그 한 시간 때문에 왜 엄마가 24시간 집에 있어야 하는지 네가 설명해봐.”라고 자랑스럽게 따졌다는 저자의 설명이 공영한 궤변으로 들리는 것은 아무래도 제가 고루한 옛날 사람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하지만 미국의 유명대학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뒤 잠시 조교수로 근무하다가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면서 붙드는 대학을 뿌리치고 귀국한 저의 선배는 결국 대학을 그만두었다고 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더욱이 놀란 것은 대학을 그만 둔 이유가 아이가 한창 클 때 제대로 돌보아주지 못한 것이 오랫동안 마음에 맺혀 있었는데, 더 늦기 전에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저자와는 생각이 달라도 너무 다른 것 같습니다.

 

밖에서 일을 하다 보니 가사 역시 남편과 나누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남편이 제 역할을 못해서 문제가 생겼을 때, “당신 회사에 다니지? 나도 회사에 다니지? 그런데 왜 나만 집안일하고 애보고 그래야 해? 당신은 애와 관련이 없어? 당신 아빠 아니야? 낳아 녾기만 하면 다야?(157쪽)”라고 몰아붙였다고 자랑하면서도 남편도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거나, 남편의 자신감을 완전히 충전시켜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율배반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사회생활과 가정을 양립시키기 위해서는 그만큼 품이 많이 든다는 사실은 외면하고 싶은 것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은 완벽하게 성숙한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 어미가 돌보아주어야 합니다. 물론 돌봄의 범위에 대하여 논란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사회에 나갔을 때 또래의 아이들과 비교해서 바른 생각을 가질 수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아이들은 저절로 큰다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과거 식구가 많을 때 서로 도와가면서 살 때의 이야기이고, 같이 사는 가족이 단촐한 요즈음에는 어림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딱히나 ‘사’자가 붙은 직업이 아니더라도 ‘자기다운 삶’을 사는 진정한 인재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세 가지를 바란다고도 했습니다. 그 바람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은 회사에서 자기계발을 위하여 외부 강사를 모시는 경우가 그리 반갑지만은 아닌 것이 이순에 이른 나이에 누구의 말을 듣고 살아온 방식을 바꾸기가 결코 쉽지 않은 노릇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다양할수록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여성들이 집밖을 꿈꾸는 세상이 과연 좋은 지도 생각해볼 일입니다. 결국은 저자 자신의 삶이 꿈꾸던 것이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억의 오류가 의도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음을 알게 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http://blog.joins.com/yang412/12623266>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죽음을 붙들고 있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절절하게 묘사한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http://blog.joins.com/yang412/13423768>로 친숙해진 줄리언 반스의 신작 <용감한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2005년 맨부커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작가가 심혈을 기울였던 작품이라고 합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셜록 홈스의 창시자인 소설가 아서 코난 도일과 영국 사법 시스템에 상고법원을 만들도록 한 조지 에들지라는 두 실존인물의 삶을 통하여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영국사회의 정치와 종교, 사법체계, 인종의 문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야기 가운데 이야기의 시작에 해당하는 부분을 다룬 1권의 초반인 ‘시작들’이라는 작은 제목을 단 1장은 아서와 조지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가 서로 교차되면서 다소 지루하게 전개되지만, 이 또한 당시 영국가정의 자녀교육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아서는 에든버러의 남루하지만 고상한 가정, 조지는 스태퍼드셔 촌구석의 목사관이라는 판이한 성장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하여 상상력을 키웠던 아서는 의학을 공부하지만 결국은 셜록 홈즈라는 인물을 창조하면서 유명한 소설가가 됩니다. 반면 인도계 혈통을 가진 조지는 엄격한 아버지의 영향 아래 순종적으로 살면서 사무변호사가 됩니다. 1장에서는 조지의 삶을 결정적으로 꼬이게 만들 사건이 태동하게 됩니다. 여전히 결말을 읽지 않은 상태라서 단정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대목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포스터라는 이름의 하녀가 이상한 행동을 하다가 해고되는 장면입니다. 이런 인물을 만나는 것 자체가 재앙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과의 만남도 운명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2부는 조지의 삶이 꼬여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한편 평탄한 삶을 살아가는 아서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서와 조지의 이야기가 균형을 이루던 1부와는 달리 조지의 비중이 자연히 커지게 됩니다. 교직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두 사람이 결국은 만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조금씩 커지게 됩니다. 아서 혹은 조지의 이름으로 전개되던 이야기가 147쪽에 이르러 ‘아서 &조지’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면서 드디어 두 사람이 만나게 되는구나 싶었습니다만, 두 사람과 전혀 무관한 인물이 등장하여 말을 훼손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서나 조지가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을 예고하는 것이라는 점은 한참 뒤에서야 깨닫게 됩니다. 그만큼 반스는 치밀한 계산 아래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1권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아서가 조지를 의식하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인 상황입니다. 아서가 받은 편지에 조지 에들지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것입니다.

 

2부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의 핵심은 조지가 사는 목사관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동물훼손 사건과 이를 수사하는 경찰이 조지가 범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접근하는 양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당연히 범인이 조지를 타깃으로 벌인 탓도 있겠지만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이 인도계혈통인 조지가 이방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경찰에 의하여 범인으로 기소된 조지가 재판을 통하여 유죄로 판결 받고 감옥에 수감되는 과정을 보면 이러한 선입견이 경찰에만 국한된 것이 아나리 영국사회에 광범위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결핵으로 투병하는 아내를 헌신적으로 돌보던 아서가 진이라는 젊은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아서의 아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http://blog.joins.com/yang412/13229364>를 즐겨 읽는다는 대목에서 잠시 멈추었습니다. 서기 1441년에 토마스 아 켐피스 수도사에 의하여 쓰여진 책으로 영어권에서는 성서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혀 제 2의 복음서라 칭송받고 있다는 이 책이 등장하는 것도 저자의 장치인가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1권에서는 동물훼손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조지가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되는 상황으로 마무리가 되어 사건이 어디로 전개될지 궁금증이 증폭되는 가운데 끝이 났습니다. 2권을 읽고 리뷰를 적었어야 하겠지만, 2권에서는 또 다른 관점들이 등장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에 일단 리뷰를 정리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