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 후기 시집 문예 세계 시 선집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송영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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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많이 알지 못하는 필자도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 들에다는 많은 바람을 풀어 놓으십시오.”로 시작하는 「가을날」을 기억하는 것을 보면, 라이너 마리아 릴케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시인도 드물 것 같습니다.

 

폰 에코노모뇌염의 후유증으로 생긴 파킨슨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페니 마셜감독의 영화 『사랑의 기적(1991); http://blog.joins.com/yang412/4271286』의 한 장면을 보면서 릴케에 대한 필자의 관심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뉴욕 알버트 아인슈타인의대 신경과교수 올리버 색스(Oliver Sacks)가 뉴욕시의 변두리에 있는 갈멜산 요양원에서 만난 환자들에 대한 기록을 적은 『깨어남; Awakening (1973년)』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로빈 윌리엄스가 환자를 진료하는 세이어박사역으로, 로버트 드니로가 파킨슨병환자 레너드 역을 맡아 소름 돋는 연기를 보였습니다.

 

무표정하고 자극에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뇌염후 파킨슨병 환자들이 나름의 세계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세이어박사는 글자판을 이용하여 환자들과 대화를 시도하게 됩니다. 그때 레너드가 써낸 글자가 바로 ‘표범’이었고, 세이어박사는 릴케의 시 「표범」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나치는 창살들로 그의 눈길은 / 너무 지쳐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 오직 수천의 창살만이 있는 듯하고, / 그 수천의 창살 뒤에 세계는 없는 것 같다. // 탄력 있고 힘찬 소리가 나지 않는 걸음걸이는 / 아주 작은 원을 그리며 맴돌고 있다. / 크나큰 의지가 마비되어 서 있는 / 하나의 중심을 도는 힘의 무도와도 같다. // 오직 때때로 눈동자의 꺼풀이 / 소리 없이 열린다-그러면 한 가지 모습이 그 속에 비쳐들어 / 고요한 사지의 긴장을 뚫고 지나간다. / 허나 다음에는 그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세이어박사는 그 무렵 개발된 엘-도파를 처방하여 뇌염후 파킨슨병 환자들의 증상을 호전시킬 수 있었지만, 이내 부작용이 발생하여 치료를 중단하면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그 과정이 마치 릴케의 시 「표범」의 느낌을 닮아 있습니다. 즉, 주변의 변화는 알고 있지만 그런 변화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환자의 심정이 우리에 갇혀 있는 표범과 같은 신세라는 것을 레너드는 나타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많은 릴케의 시들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는데, 최근에는 릴케의 후기 시작품들을 묶은 시집이 나왔기에 [북소리] 독자 여러분들께 소개합니다. 『릴케 후기 시집』은 릴케의 전기 시작품을 묶은 『릴케 시집(2014)』에 이어 릴케의 후기 시작품을 묶은 것입니다. 영화 『사랑의 기적』을 본 다음에 샀던 시집 『릴케(1991)』을 번역한 송영택교수님이 번역을 맡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생각할 점들이 있었습니다. 송영택교수님은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의 시인’이라는 제목으로 릴케의 시세계를 정리한 글에서 릴케의 시작품들을 이렇게 구분하였습니다. (1) 낭만적인 동경과 꿈에 집중한 『제1 시집』과 『초기 시집』, (2) 신의 탐구, 그러면서도 인간보다 신의 우위성을 인정치 않는 범신론적인 신앙 고백서인 『시도집(詩禱集)』, (3) 존재 양식의 형상화에 성공한 『형상(形象) 시집』, (4) 자아와 사물과의 사이에 하나의 차원을 이룩하는 『새 시집』, 사랑과 고독의 독자성을 해명한, 20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산문인 『말테의 수기』, (6) 이상의 것들을 모두 종합하면서 동시에 삶과 죽음을 극복하는 찬가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보내는 소네트』(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송영택 옮김, 릴케, 140쪽, 천우펴냄, 1991년)

 

『릴케 후기 시집』에서 뽑은 시들은 릴케의 『새 시집』에서 32편을, 『새 시집』 이후의 시에서 25편을, 『두이노의 비가』에서 첫 번째와 여섯 번째 비가를, 『오르페우스에게 보내는 소네트』에서 22편을 그리고 후기의 시들 가운데서 27편입니다.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이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간에 해당되는 시들을 ‘후기의 시’라고 묶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릴케는 ‘장대한 넓이나 깊고 무거운 세계가 아닌, 그동안 그가 도달한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밝고 순수한 새로운 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송영택교수님의 번역으로 소개한 시집 『릴케(1991)』은 그의 전기 작품에서 많이 뽑았던 것 같습니다. 61편의 시를 담은 『릴케(1991)』와 108편의 시를 담은 『릴케 후기 시집』에 같이 실린 시는 오직 「표범」 한 편 뿐입니다. ‘파리 식물원에서’라고 주석이 달려 있는 것처럼, 이 시는 1902년 릴케가 로댕에 관한 글을 쓰려고 찾은 파리에서 생활하면서 쓴 『새 시집』에 담긴 것입니다. 옮긴이가 『릴케 후기 시집』을 위하여 번역을 새롭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릴케(1991)』에 담긴 「표범」과는 달리 『릴케 후기 시집』에 담긴 「표범」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나가는 격자 때문에 지쳐버린 표범의 눈은 /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 그의 눈에는 수많은 격자가 잇는 것 같고, / 그 격자 뒤에는 세계가 사라지고 없는 것 같다. // 더없이 작은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 유연하고 늘름한 발로 자늑자늑하게 걷는 걸음새는 / 하나의 커다란 의지가 마비되어 서 있는 / 하나의 중심을 둘러싼 힘의 무용 같다. // 다만 때때로 눈동자의 장막이 소리 없이 열리면 / 그때 하나의 형상이 들어가서 / 사지의 긴장된 정적 속을 지나 / 심장에서 문득 사라진다.” 필자에게는 생소하다 싶은 ‘자늑자늑하게’라는 시어를 채용하였는데 뜻을 찾아보니, ‘움직임 따위가 가볍고 부드러우며 차분한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합니다. ‘창살’ 대신 ‘격자’를 사용했는가 하면 ‘무도’대신 ‘무용’을 사용한 것을 보면 세월의 흐름에 따른 우리네 언어생활의 변화를 반영하였구나 싶기도 합니다만, 시 전체의 흐름은 전작이 간결한 느낌입니다.

 

언젠가 독일어를 전공한 분과 함께 독일어 논문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같이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독일어를 구문적으로만 번역해서는 의미가 헷갈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표범」의 마지막 연에 나오는 ‘눈동자의 꺼풀’ 혹은 ‘눈동자의 장막’이란 눈꺼풀을 말하는 듯한데, 눈꺼풀은 각막은 물론 결막을 포함하여 밖으로 드러나는 안구 전체를 덮고 있는 것이지 각막의 안쪽에 자리한 눈동자만을 덮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지나치게 의학적 사실을 강조하는 ‘아는 체’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요즈음 쓰고 있는 스페인 여행기에서 인용하기에 적절한 시를 여러 편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수확일 뿐 아니라 관심을 두고 있는 눈물에 관한 시를 여러 편 발견한 것도 역시 커다란 수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눈물, 내 몸을 뚫고 나오는 눈물”이라고 시작하는 「눈물」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드러내주는 언어적 기능을 다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듯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눈물을 담는 눈물항아리를 노래하는 시가 두 편이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아 대지여, 눈물 항아리를 만들 깨끗한 점토를 / 나에게 다오. / 나의 존재여, 너의 내부에 막혀 있던 / 눈물을 쏟아내라”로 시작하는 「아 대지여, 눈물 항아리를 만들」이라는 시와 ‘떨어지는 눈물을 위하여 속을 비운다’라고 노래한 「눈물 항아리」입니다.

 

사실 눈물은 안구 위편에 있는 눈물샘에서 만들어져 안구표면을 따라 흐르면서 안구가 마르지 않게 하고, 눈 안쪽에 있는 누공을 통하여 비강으로 빠져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양파나 최루가스와 같은 물질이 안구를 자극하거나 감정적으로 북 바쳐 눈물샘이 눈물을 많이 만들게 되면 누공이 감당하지 못하여 눈물이 밖으로 흘러내리게 되는 것인데, 이렇듯 흘러내리는 눈물을 담기 위하여 점토로 눈물항아리를 만든다는 생각은 참으로 참신한 것 같습니다. 오래되어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2009년에 ‘엣지있게’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낸 드라마 『스타일』이 방영되었습니다. 이 드라마의 마지막 회에서 패션잡지 ‘스타일’의 에디터 심균이 동료 차지선에게 프러포즈할 때 들고 나온 소품이 바로 눈물항아리입니다. 그동안 너를 위해 남몰래 흘린 눈물을 담은 눈물항아리라면서 이제 그 눈물을 마셔버리는 것으로 너에 대한 나의 마음을 보이겠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 오글거리는 프러포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릴케의 눈물항아리가 내부에 막혀있던 눈물을 쏟아내 담을 그릇을 마련하는 것으로 마음을 옥죄고 있던 굴레를 벗어내 느낀대로의 감정을 풀어낼 수 있기를 노래한 것과 통하는 무엇이 있는 듯합니다.

 

가수나 작가들 가운데는 자신이 부른 노래나 작품과 닮은 삶을 산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릴케를 이야기하면서 작품과 닮은 삶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릴케 후기 시집』에 실려 있는 마지막 시, 「장미여, 아 순수한 모순이여」때문입니다. 이 시는 릴케가 생전에 자신의 묘비명으로 미리 써 두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릴케는 대단한 예언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위하여 장미를 꺾다가 그 가시에 찔린 것이 곪아서 죽음에 이르렀다고 하니 말입니다. 아름다우면서도 날카로운 가시를 가지고 있는 장미를 두고, ‘장미여, 꽃의 여왕이여’라고 노래한 릴케에게 장미는 모순으로 비쳤던 모양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즐기려다 영원한 잠에 들게 되었으니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념비를 세우지 마라. / 그저 해마다 그를 위하여 장미꽃을 피게 하라. / 왜냐하면 그것은 오르페우스니까. 이것저것 속의 / 그의 변신인 것이다, 우리는.(…)”이라고 노래한 것 역시 릴케 자신이 오르페우스라는 가객(歌客)의 후예임을 암시하는 듯한 「기념비를 세우지 마라」에서 그저 해마다 장미를 볼 수 있으면 족하다는 생각을 내비친 것 같습니다. 1912년부터 1922년에 걸쳐 「두이노의 비가」의 연작시 열편을 쓴 것에 비하면, 1922년 2월에 보름도 안 되는 기간에 무려 55편을 달하는 오르페우스에 대한 헌시를 쏟아낸 것을 보면 아무래도 오르페우스의 돌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릴케는 오르페우스의 후예일 것 같습니다. 물론 릴케 시의 정점이라고 하는 「두이노의 비가」와 단순비교하는 것이 적절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두이노의 비가」는 1912년 릴케가 트리에스테 근처의 두이노 성(城)에 있을 때 제2비가까지 두 편을 완성하였지만, 연작시의 일부였기 때문에 발표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그러니까 릴케가 오스트리아 육군에 소집되기 전인 1915년 가을에 제4비가를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두이노의 비가」를 이어간 것은 1921년 여름, 스위스 후원자의 초청으로 발레리 지방의 론 강가에 있는 뮈조의 성(城)에 머물면서였습니다. 1922년 2월 7일에서 11일 사이에 단숨에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이때를 전후하여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55편을 완성하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시상이 샘물처럼 흘렀다고 하겠습니다.

 

릴케의 시에는 ‘주님’ 혹은 ‘천사’와 같은 종교적 대상이 등장합니다만,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반대한 니체처럼 릴케 역시 “생과 죽음, 지상과 공간, 시간의 차원 등을 모두 포함하여 통일적으로 응축된 ‘우주 내재적 공간’이라는 일원적 우주론을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이 시기의 릴케의 시에서 삶과 죽음을 동시에 긍정하는 찬가라는 느낌을 얻게 됩니다. 『릴케 후기 시집』을 옮긴 송영택교수님은 “10편의 「두이노의 비가」는, 참다운 결실을 위해 끊임없이 변신해 죽음 속까지 정화되는 사람만이 참으로 인생을 영위하는 것이라 하고, 인생에서 진실한 것이라 믿어지는 사랑이 실은 고독하고 괴로운 것이며 서로가 일체될 수 없는 개별적인 것이라 노래한다.(228쪽)”라고 설명합니다. 그의 『새시집』에서만 해도「붓다」 라는 제목의 시가 두 편이나 되고, 「붓다의 영광」을 노래한 것을 보면 그리스도교가 그의 삶에서 유일한 목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 너는 느낀다, 이제는 너에게 매달리는 것이 없음을. / 너의 외피는 무한 속에 있고, / 거기에는 진한 과즙이 충만하다. / 바깥에서 한 줄기 빛이 그것을 거들고 있다.(…)”라는 시어에서 불교의 심원한 원리를 느끼게 됩니다.

 

릴케의 주옥같은 후기 작품들을 통하여 우리의 참다운 삶을 정의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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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의 겨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1
안토니오 무뇨쓰 몰리나 지음, 나송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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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반도를 다녀와서인지 제목만으로도 반가운 소설입니다. 안토니오 무뇨스 몰리나의 <리스본의 겨울>은 스페인의 북서해안 도시 산세바스티안과 수도 마드리드 그리고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을 연결하여 현재의 시점에서 먼 과거로부터 가까운 과거를 돌아보는 독특한 구조입니다. 그 과거는 기억과 상상이 교차되고 있어 책읽기에 나름 신경이 쓰이기도 합니다.

 

마드리드에 있는 메트로폴리타노 바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비랄보를 화자가 2년 만에 다시 만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화자의 정체는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도 밝혀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이야기의 주인공인 산티아고 비랄보를 객관화한 가상의 인물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전체 이야기는 비랄보가 산세바스티안에 있는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의 술집에서 연주활동을 할 때 만났던 루크레시아와 그녀의 남편 말콤 사이에 벌어지는 위태로운 삼각관계가 기본 골격입니다. 여기에 미술품을 암거래하는 말콤의 사업파트너 투생 모퉁과 그의 비서 다프네, 그리고 비랄보와 함께 연주하는 트럼펫 연주자 빌리 스완,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오스카, 드럼을 연주하는 부비, 그리고 레이디 버드의 주인 플로로 블룸 등이 엮여듭니다.

 

옮긴이는 작품해설을 통하여 이 소설에서 도시의 밤, 서스펜스, 도망과 추적, 폭력과 죽음, 권총, 레인코트, 중절모, 우울한 호텔방 등을 그려내고 있어 마치 이 마치 누아르 영화의 장면이 연상된다고 적었습니다. 사실 부적절한 관계는 아슬아슬하기 마련입니다만, 레이디 버드에서 만난 비랄보와 루쿠레시아는 단숨에 사랑에 빠지지만, 이내 말콤이 눈치를 채면서 말콤과 루크레시아는 밀항선을 타고 베를린으로 빠져나가고 맙니다. 유럽 각국으로 연주여행을 다니던 가운데 루크레시아와 연락이 닿아 편지가 오가면서도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이야기의 주요 무대는 리스본이 됩니다. 비랄보가 루크레시아를 만날 때 리스본을 꿈꾸는 그녀를 위해서 ‘리스본’이라는 곡을 작곡하기도 하는데, 정작 비랄보는 리스본에 가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잠시 본 리스본은 예뻤다기 보다는 신비로웠다는 느낌이 남습니다. 그래서 “산세바스티안이나 파리만큼 안개가 많은 도시일 거라 상상했었다. 투명한 공기, 붉은 황토색이 뚜렷한 가옥들, 하나같이 똑같은 빨간 지붕들, 방금 내린 빗물처럼 영롱함이 감싸는 도시 언덕에 정적인 황금 빛줄기는 그를 놀라게 했다.(165쪽)”라고 그린 리스본의 인상이 공감되었습니다. 비랄보가 리스본에서 묵은 호텔은 꼬메르시우광장 가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광장 한 복판에 서 있는 기마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몰랐다고 하지만, 1755년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된 리스본을 재건한 주인공 주제1세의 기마상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루크레시아가 ‘리스본에 들어가는 것은 세상의 끝에 도달하는 것과 같을 거야(167쪽)’라고 말한 이유를 알듯합니다.

 

루크레시아의 행적을 찾는 말콤과 투생 모퉁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 비랄보가 말콤과 열차에서 사투를 벌이고, 한적한 곳에 은신하고 있는 루크레시아를 만나 다시 사랑을 이어가는 곳도 리스본입니다. 그래서 리스본의 모습은 비교적 많이 그려지고 있는 반면, 정작 현시점에 되는 마드리드의 모습은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은유적으로 묘사하는 산세바스티안의 풍경은 한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만에서 조용하게 부서지는 파도와 타마린도 나뭇가지에 깃든 장밋빛 황혼(32쪽)’, ‘암초에 부서져 만들어진 차가운 물거품이 가끔씩 튀기는 마리티모 산책로(104쪽)’ 등입니다.

 

작가는 1975년 프랑코의 사망과 함께 스페인 사회에도 고립된 인간들로 채워진 불안정한 도시의 분위기가 생겨나면서 정열적인 사람들이 투우와 플라멩코로 넘치는 축제가 일상이던 스페인의 전통적 이미지를 과거로 묻고 있다고 했습니다. ‘옛것은 아름다운 것이여’라던 광고카피가 생각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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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5-22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듣기에도 반가운 도시들이 나오군요. 특히 산세바스티안의 유명한 해변에 갔던 기억이 나네요. 흐린 날에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졌는데 파도가 격하게 춤을 추던 광경이 ^^

처음처럼 2015-05-26 19:56   좋아요 1 | URL
우와~~~. 그 바다를 보셨군요..
그러시다면 리스본의 겨울을 제대로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장서의 괴로움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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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이야 세부전공으로 나뉘는 추세이지만 처음 전공분야를 공부할 때는 모든 임상과목들을 커버할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전공의 특성상 특히 컬러사진이 중요한데, 비싼 원서를 구할 수 없어 많이 어려웠었다는 선배님들 세대와는 달리 화질은 조금 떨어지지만 불법복사판 책이라도 저렴하게 공급되던 시절입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쥐꼬리만큼 되는 월급은 술값과 책값으로 남아나지 않았는데, 덕분에 남은 것이라고는 저질체력과 쌓여가는 책이었습니다. 책도 그림이 중요하기 때문에 무거운 아트지로 되어 있는 것들이 많아서 이사를 할라치면 엄청 힘이 들었습니다.

 

진료현장을 떠나면서도 언젠가는 돌아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그 많은 책들을 끌어안고 있다가 어느 해인가는 결단을 내려서 모두 버리고 말았습니다. 파지로 팔았더라면 적지 않은 돈이 되었을 터인데 지나고 보니 잘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도 최근 몇 년 동안 책읽기에 열을 올리다 보니 사무실이나 집에 다시 책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책 사이로 길을 내야 하는 상황이 걱정되어 대책을 고민하다가 사무실 밖에 작은 도서실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4년이 지나고 보니 500여권 가까운 책을 같이 일하시는 분들과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도 블로그 친구들과 나눈 책들도 만만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고도 남은 책이 천여 권은 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규모를 가지고 장서가를 운운한 처지는 아니지만 쌓여가는 책들로 중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싶습니다.

 

남들은 이런 고민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해답을 얻기 위해서 읽게 된 책이 오카자키 다케시의 <장서의 괴로움>입니다. 비록 일본의 경우라서 저자가 인용하는 책들이나 그의 저자들 대부분을 알지 못하는 아쉬움을 건너뛰면 책을 가지고 있으면서 느꼈음직한 어려움을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헌책방을 통하여 책을 습관적으로 사들이고 고민하는 분들인 것 같습니다. 전공과 관련된 책을 사들일 때는 그렇지 않았지만, 전공이 아닌 도서의 경우는 제 손에 들어온 책들은 일단 모두 읽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관심분야가 아니면 바로바로 방출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보유하기로 결정한 책들은 나름대로 기획하고 있는 책쓰기에 필요하거나, 칼럼 등을 쓸 때 참고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저자로부터 사인을 받은 책들은 기본적으로 보유하고 있습니다. 저도 몇 권의 책을 냈지만, 제가 사인을 해서 드린 책을 버린 분을 보면 저의 성의가 무시된 것 같아 공연히 화가 나는 편이라서 입니다.

 

헌책방을 순례하면서 사들인 책들을 다시 헌책방을 통하여 싼 값으로 파는 사람들의 사례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저자를 보면서 왜 그렇게 사는지 정말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손님을 맞는 거실에 책장을 두고 화려한 장정의 전집들을 전시용으로 꽂아두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웃기는 짓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는 것을 박철상님의 <서재에 살다; >에서 읽으면서 실없게 웃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결혼 전에 살던 집에 앵글로 만든 간이 책장을 사용했던 적이 있습니다. 밤에 자면서 책장이 넘어져 꽂아둔 책이 덮치지나 않을까 공연히 걱정한 적도 있습니다만, 지진이 많은 일본이라면 책장에서 쏟아진 책 때문에 부상을 당할 우려도 클 것 같습니다. 요즈음 우경화되고 있는 일본에 대하여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제2차 세계대전을 끝막음하면서 원자폭탄이라는 가공할 무기를 사용한 것 때문에 전승국인 미국이 패전국인 일본에게 빚을 진 것 같은 느낌을 가졌던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일본은 그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전쟁을 일으킨 원죄를 덮으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분위기는 이 책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미공군의 공습으로 귀중한 책들이 불타 사라진 사례들을 인용하면서 은근히 비난을 담은 듯한 느낌은 저의 오지랖일까요? 많은 책을 모아 연구를 하는 학자들이 전쟁 당시 공습으로 장서들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전한 곳에 책을 보관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을 지적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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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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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나름대로 정한 원칙을 지키려 노력을 하지만 때로는 현실과 타협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아주 드물지만 원칙을 고수하는 분들을 만나게 되면 한편으로는 고지식을 탓하면서도 원칙을 고수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합니다. 스웨덴 작가 프레드릭 베크만의 <오베라는 남자>를 읽으면서 원칙을 고수하는 멋진 모습을 만나서 좋았고, 그러면서도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가는 모습이 더 보기 좋은 것 같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의 주인공 스크루지 영감처럼 세상과 담쌓고 사는 사람들 이야기가 드물지는 않습니다. 이야기들은 대부분 주인공이 얼어붙었던 마음을 열고 사람들과 교감을 이룬다는 식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역시 더불어 사는 모습이 보기에도 좋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베라는 남자>에서는 생각에 빠져들게 하는 대목이 몇 가지 있습니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일터에서 내몰리는 상황, 아내가 죽었을 때도 일터를 지켰던 남자가 일터를 잃자 죽음을 모색한다는 상황, 그리고 주민들마다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정해진 지침에 따라서 업무를 집행하는 공무원 등등...

 

모두 마흔 개의 에피소드에 달려있는 제목들은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오베라는...’, 그리고 ‘오베였던...’. 그렇습니다. ‘오베였던...’이라는 제목의 글들은 오베의 과거사입니다. 성장해서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그리고 아내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합니다. 그런가하면 ‘오베라는...’이라는 글은 지금의 오베가 겪는 일들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오베의 과거와 현재가 교대로 등장하며, 때로는 현재와 과거의 일이 선후가 뒤바뀌기도 해서 헷갈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책을 읽는 이로 하여금 집중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일까요?

 

이야기를 되돌려서 아내의 장례를 치루고 바로 출근했던 오베가 일터를 잃은 뒤에, 아내의 빈자리를 절감하면서 살아있을 이유가 없어 죽어야 하겠다고 마음먹는 과정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주변사람들에게 무언가 미심쩍은 행동을 보인다고 하는데, 오베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런 전조증상을 깨닫지 못하면서도 우연히 오베의 죽음을 방해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어 조금은 아쉬운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충분히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점’을 저자가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조금은 불만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오베의 과거를 돌아보면 세상과 담을 쌓고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온갖 세상일에 간섭하면서 살아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을 자치회장을 맡아 마을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신경을 써온 것이라든가, 공무원들의 말도 안되는 행정을 바로잡기 위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끈질기게 투쟁하여 소신을 관철시키는 모습 등이 그렇습니다. 그의 소신 가운데 ‘남을 고자질하지 않는 일’은 정말 따라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보고 들은 것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가슴에 품음으로 해서 자신이 도둑으로 몰리는 상황이 되어도 오베는 남을 고자질하는 일은 할 수 없다는 소신을 지켰던 것입니다. 이런 오베를 알아본 그의 아내 소냐 역시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읽어가면서 깨닫게 됩니다. 친구들이 그녀의 선택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했을 때도, ‘정의와, 페어플레이와, 근면한 노동과, 옳은 것이 옳은 것이 되어야 하는 세계를 확고하게 믿는(206쪽)’ 오베가 역시 오베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아내가 되어 달라고 청혼해 줘요’라고 오베에게 말한 소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융통성이 없는 남자, 오베가 주인공인 탓인지 옮긴이도 융통성을 발휘하지 않고 원고에 충실하였던 것 같습니다. BMW로 차를 바꾼 루네를 다시는 보지 않았던 오베가 새차를 사려는 아드리안을 위하여 딜러와 협상하여 도요타를 살 수 있도록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나마 이런 조건으로 도요다 정도면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그 빌어먹을 꼬마는 현대차를 보던 중이어서, 하마터먼 더 나빠질 수도 있었다(422쪽)’라는 장면을 곧이곧대로 번역을 해놓은 것입니다. 만약 제가 번역을 맡았더라면 거꾸로 옮겼을 것 같습니다. ㅋ

 

각설을 하고, 읽다보면 슬그머니 웃음도 나오고, 가슴이 짠한 장면도 나와 다양한 감정을 연주하게 만드는 정말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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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눈물 철학 스케치 5
올리비아 비앙키 지음, 에두아르 바리보 그림, 김동훈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북소리]를 시작하고 두어 달쯤 지나서 김선희교수님의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http://blog.joins.com/yang412/12474996>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따로 적어둔 한 줄 요약을 보니,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적 배경인 인간의 고통에 대한 사유가 어떻게 결실을 맺게 되었는지를 뒤쫓고, 이를 바탕으로 현대철학이 현대인의 삶에 기여할 방도를 도출하고 있습니다.”라고 정리되어 있습니다. 김신영교수님은 “울고 있다, 우리 시대는. 울고 있다, 나는. 현대인의 눈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고여 있다.”라고 프롤로그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자신이 울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눈물이 보이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삶이 너무 고단해서 울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김신영교수님은 철학자야말로 이처럼 울고 있는 세상을 치유할 사람이라고 합니다. 철학한다는 것은 바로 사유를 통하여 물음을 던지는 일이자 던져진 물음에 답을 구하는 일이며, 철학적 탐구의 목적은 지식과 진리, 현실, 이성, 의미, 가치에 대한 통찰을 얻는데 있기 때문이라도 합니다. 그래서 “삶이 고달플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달픈 삶에 대한 차분한 성찰이다. 마치 쇼펜하우어가 그랬고 니체가 그랬듯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쇼펜하우어의 눈물은 ‘고통의 근원’을 찾는 그리고 니체의 눈물은 ‘고통의 치료제’를 찾는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쇼펜하우어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헤겔의 눈물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헤겔을 전공한 올리비아 비앙키가 쓴 <헤겔의 눈물>에서 같이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위키백과사전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은 관념철학을 대표하는 독일의 철학자이다. 칸트의 이념과 현실의 이원론을 극복하여 일원화하고, 정신이 변증법적 과정을 경유해서 자연·역사·사회·국가 등의 현실이 되어 자기 발전을 해가는 체계를 종합 정리하였다.”라고 소개하였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절정에 달했던 시절 헤겔철학은 비판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우선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나치가 헤겔철학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한 것을 두고 헤겔철학의 본질이 전체주의적 세계관과 맞닿아있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고, 후대의 철학자들이 자신의 철학을 세우기 위하여 헤겔 철학을 극복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헤겔의 철학은 난해한 바 있어 선뜻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던 면도 있었습니다. “헤겔은 어렵다. 헤겔로 철학 공부를 시작하느니 라흐마니노프로 피아노에 입문하거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로 영어 공부를 시작하는 편이 더 재미있을 것”이라고 출판사가 소개하는 농담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이유입니다. 그런 점에서 올리비아 비앙키의 <헤겔의 눈물>은 헤겔철학의 좋은 입문서가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입문서들이 긍정적인 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과는 달리, 이 책에서는 헤겔 철학의 난점이나 모순까지도 비판하는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겔의 눈물>에서 보는 또 다른 특징은 에두아르 바리보의 그림입니다. 모두 61개의 글에 곁들여진 71개의 도판은 올리비아 비앙키의 헤겔철학에 관한 텍스트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한 것들입니다. 때로는 난해하지만, 텍스트의 개념이 금방 머릿속에 들어오기도 합니다. <헤겔의 눈물>을 기획한 ‘철학 스케치 시리즈는 저자와 삽화가가 기획 단계에서부터 공동으로 참여한 프로젝트라고 합니다. 위대한 철학자들의 핵심 철학을 개성 있게 포착하는 일종의 시각적 실험으로, 난해한 용어와 개념 사용을 피하는 동시에 재치와 깊이가 공존하는 글과 삽화로 즐기는 철학, 보는 철학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보려는 의도라고 합니다.

 

‘헤겔철학’하면 정반합(正反合)의 개념으로 요약되는 변증법이 우선 떠오릅니다. 세상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변증법은 본질적으로 내부에 포함되어 있는 자기부정 즉 모순에 있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합니다. 즉 만물은 이 모순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원래의 상태를 정(正)이라 하면 모순에 의한 자기부정이 반(反)으로 등장하면서 새로운 합(合)의 상태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변화의 결과물인 합(合)이 다시 정(正)이 되면서 새로운 변화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반합이라는 표현은 하인리히 샬리베우스(Heinrich Moritz Chalybaus)가 헤겔의 변증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하며, 헤겔은 ‘즉자-대자-즉자대자’, 혹은 ‘긍정-부정-부정의 부정’이라는 표현했다고 합니다.(위키 백과사전;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에서 인용)

 

올리비아 비앙키는 헤겔의 철학을 ‘자기실현의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개인에게 자기실현이란 무엇보다 자연에 대한 의존의 고리를 끊는 것이다. 전적으로 온전한 자유를 실현하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정신을 확인할 수 있게 보여 주려면, 영원히 기계적으로 윙윙거리며 작동하기만 하는 직접적인 자연적 실존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16쪽)”라고 합니다. 헤겔에게 자연은 정신이 그것을 딛고 일어서게 되는 기반이지만, 극단적인 기후조건에서는 인간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아프리카의 찌는 듯한 열기는 너무나 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 이를 극복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의미로 트레오레(아프리카 흑인을 지칭하는 개념)의 눈물을 말합니다. 헤겔의 이런 생각은 당시 유행하던 유럽 밖의 세상은 열등하다는 서구중심의 사고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프라 안젤리코는 예수 수난의 이야기들을 그리면서 너무 큰 감동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눈물을 참지 못했다고 합니다. 헤겔은 <미학강의>에서 안젤리코의 경험을 인용하면서 위대한 예술가는 자신이 묘사하고 있는 상황에 스스로를 일치시킨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안젤리코의 그림에서 보는 화가의 천재적 재능은 화가의 것이 아니라 종교에 자신을 맡긴 결과로서 기독교의 천재성이라고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프라 안젤리코는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사로서의 삶을 살면서 신앙과 회화예술을 성공적으로 접목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미술관에서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를 감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동정녀 마리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할 것임을 알려주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14세기에 그려진 작품임에도 채색이 선명한 것은 나무판에 그려진 템페라방식으로 그려진데다가 금과 청금석이라는 보석을 갈아서 사용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의 종교는 신적인 정신의 산물이지 인간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것은 신적인 것이 인간 안에서 활동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다.(125쪽)”라고 헤겔은 말했습니다. 인간이 신과 화해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 한 말입니다. 신 자신이 인간들과 화해하기를 원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적, 시간적 존재가 된 신은 인간과의 화해를 최종적으로 확정한 것이라고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흘린 눈물은 하느님의 아들이 겪고 받아들인 고통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인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본받아 신과 자신의 화해를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기독교를 완결된 종교로 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신적인 것에 대한 서로 다른 신념을 표현하기 위해 서로 다른 종교가 각각 존재하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종교를 자연종교, 정신적 개별성의 종교 그리고 계시된 종교로 분류했습니다.

 

민족과 국가 그리고 역사에 관한 헤겔의 철학 역시 저자의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역사는 이성의 지배를 따르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파악할 것이며, 직업적 역사가들에 의해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헤겔은 경고합니다. <역사철학강의>에서 역사는 세 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설명하는데, “첫째 단계에서는 외부의 앞선 문명으로부터 지식과 문화를 흡수하여 내부에서 일어나는 힘과 융합되며 민족이 차근히 발전해 나간다. 그 끝 무렵에서는 외부로부터의 유입과 내부로부터의 분출이 성공적으로 융화되어 선행하는 문명과 대결할 수 있는 독자적 역량을 북돋운다. 둘째 단계에서는 마침내 선행 문명에 대한 승리를 거두어 행복의 시기를 구가하나, 이렇게 민족이 외부를 향하게 되면 내부의 정치기구가 느슨해지고 긴장이 이완되어 내부 분열이 생겨난다. 그러한 단계를 거쳐 마침내 마지막 단계에서는 좀 더 고도의 정신을 소유한 민족과 충돌하여 몰락하게 된다. 헤겔은 이러한 과정을 세계사의 모든 민족에게서 동일한 양상으로 발생하는 보편적 과정이라고 주장한다.”라고 요약합니다.(위키백과, ‘역사철학강의’에서 인용)

 

정신이 보편적 역사 속에서 파악한 자기의식을 바탕으로 발전하면서 민족과 국가라는 구체적 형태를 갖추어 가게 되는데, 그 정신의 활동이 활기를 잃게 되면 정신은 그 민족을 버리고 다른 민족을 향해 떠나간다고 비유합니다. 과거의 지구상에서 꽃을 피웠던 이집트, 그리스, 로마, 이슬람 문명의 부침과정을 보면 쉽게 이해되는 대목입니다.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진보를 향한 치열한 고민이 사라지고 타성적 흐름에 맡기는 순간 개인이나 민족은 몰락의 길에 접어드는 것입니다. 로마가 게르만족의 침략으로 멸망했지만, 이미 멸망 이전부터 멸망에 이르는 수순을 밟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의 역사를 보더라도 한 때 본토를 지배했지만 지금은 존재조차 희미한 민족들이 있습니다.

 

헤겔은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신이 그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점을 입증하려 했으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역사를 이루는 개인들이나 개별적인 사건들은 이성이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에 헤겔의 철학을 결과의 철학이라고도 합니다. 악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기전을 이성의 책략이라고 하는데, ‘이성이 자기 대신 열정이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을 이성의 책략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그 결과 피해와 손실을 겪는 것은 오직 이성이 그것을 통해 현존에 이르게 되는 수단인 열정뿐이다.(50쪽)’라고 설명합니다.

 

헤겔에 있어 국가는 최고의 이성적 실체로 인간이 시민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의무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정신이 세계 안에서 구체화되는 계기가 바로 국가이기 때문에 국가보다 더 높은 것은 없으며, 개인은 국가를 통해서만 자신의 합리적 존재 의미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분이 있다가도 외국과의 전쟁을 통하여 국내의 평화를 이룩할 수도 있다고 보았는데, 이는 전쟁이 역사적인 필요악으로 보았던 칸트와는 달리 헤겔은 전쟁이 민족의 생존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보아, 절대적 악이 아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전쟁 또한 세계를 움직이는 모순의 하나로 본 것입니다.

 

다시 철학으로 돌아가면, 존재하는 것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입니다.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이성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사유 안에서 자신의 시대를 파악하는 것이지 자신이 속한 세계를 초월하라는 것은 아니라고 헤겔은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철학이 근원적으로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했던 니체와는 다른 입장을 가졌던 것입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이야기로 이야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철학이 회색으로만 세상을 그리게 되면 하나의 삶의 방식이 낡은 것이 되며, 회색으로만 그리는 것으로는 다시 젊음을 되찾을 수 없고 오로지 인식될 수 있을 뿐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해질녘이 되어서야 날기 시작한다.(104쪽)”는 말은 <법철학>의 서문에 적혀 있습니다. 철학자는 현실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미화할 필요가 없으며, 그저 존재한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회색조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철학은 언제나 너무 늦게 도착하며, 실제 세계가 몰락할 때 그것에 대해 서술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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