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로부터의 선물 - 세계도시여행
이나미 글 사진 / 안그라픽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조만간 터키에 가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해 스페인을 다녀오고서 여행은 준비된 만큼 즐길 수 있다는 진리를 확인하였기에 터키를 제대로 즐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우선적으로는 여행지의 역사, 예술, 사회적 배경 등을 우선적으로 챙겨보고 있습니다. 여행관련 서적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여행을 통하여 느낀 바를 적은 책들은 개인의 성향에 크게 좌우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탄불로부터의 선물> 역시 그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터키에서 보아야 할 것들에 대한 정보는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숙소 찬가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조금은 의외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저자에게는 크게 인상적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숙소가 여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가 되는가 하는 문제는 여행자마다 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 다른 곳과는 다른 무엇이 있는 것 같습니다.

 

책을 읽고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터키의 전통에 관한 저자 나름대로의 해석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히잡을 쓴 여성들을 바라보면서 ‘히잡 속에 갇힌 여성의 삶에 대해, 여성에 대해 설정되어 있는 불공평한 종교적 규율에 대하 깊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26쪽)’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물론 뒤에 가서는 무슬림 여성의 삶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있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부분도 ‘히잡은 남성우월주의적 발상의 종교적 억압이다-와 같은 우리들의 생각이 무슬림 여성들에게도 모두 공감을 얻으리라는 가정은 경솔하였다.(262쪽)’라는 고백 역시 일방적은 추론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일단 그곳에 오래 머물면서 그들의 삶에 들어가지 않고서 피상적으로 관찰하는 것만으로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잠시 스쳐 지나는 인상으로 그들을 재단하지는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야 소피아성당이나 지하궁전, 메블레비 템플에서의 세마의식 등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저자의 뛰어난 감성과 표현력을 엿볼 수 있고,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담소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일상을 마치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듯 적어놓고 있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나중에서야 미루어 짐작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서는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 집 딸은 작년에 시집 가더니 벌써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네, 걸음마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 집 손주가 벌써 유치원에 가게 되었구나, 공부 잘하던 옆집 아들이 박사학위를 받았단다, 노환으로 누워계신 뒷집 어르신 병세는 원만하신가.... 와 같은 인사말들이 평화롭게 오고가는 장면은 꼭 언어로 소통할 수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244쪽)”

 

따님과 함께 간 터키 여행에서 클럽까지 순례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그 클럽에서 터키 전통음악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연주되고 그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하는 모습이 우리네와 다르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기는 합니다만.... 한 가지 더, 터키 사람들과 나눈 대화들을 곳곳에 영어로 늘어놓은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독자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영어라는 생각이셨겠지만, 꼭 그래야 했을까요? “어느새 12시가 넘고 클럽 안의 열기는 점점 고조되어 간다. Hassan is coming.(214쪽)” 누군가는 여행지에서 조심해야 할 부분이 현지인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무탈하게 여행을 즐기셨을 수도 있겠지만, 저자의 정보에 따라서 클럽을 찾아나선 젊은 여성들이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당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니 불편한 느낌만 늘어놓은 셈이 되어 훌륭한 여행을 마치고 좋은 정보를 담아주신 저자에게 누가 되는 점이 큰 것 같다는 생각도 없지는 않습니다.

 

책의 편집이 불편한 점도 적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가뜩이나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인데, 쪽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헌책과 같은 느낌을 주도록 색깔과 디자인을 처리하고 있어 산뜻한 맛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면을 모두 차지하거나 심지어는 두면에 걸쳐 사진을 처리하고 있는 것도 공연히 쪽수를 늘리기 위한 것 아닌가 하는 불편한 느낌이 남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의 대지 / 야간비행 / 어린왕자 / 남방 우편기 동서문화사 월드북 218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안응렬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지난해 포르투갈에 갔을 때 테주 강변의 공원에서 전시된 쌍엽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1922년 가구 코티뉴(Gago Coutinho, 1869~1959) 대위와 사카두라 카브랄(Sacadura Cabral, 1881~1924) 대위가 타고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출발해서 남미의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처음 횡단비행에 성공한 비행기라고 합니다. 훅 하고 입으로 불어도 날릴 것 같은 작은 비행기로 그 먼 거리를 날아갔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비록 두 사람이 탔다고는 하지만 얼마나 두려웠을까 싶습니다.

 

대륙이나 대양을 건너 먼 거리를 나는 모습을 떠올리다가 우편비행기를 몰았던 생텍쥐페리가 쓴 작품들, 특히 <야간비행>을 비롯하여 <인간의 대지>, <남방우편기> 등을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마침 동서문화사에서 이 작품을 묶어서 내놓은 것을 찾게 되었습니다. 여행기에서도 몇 곳을 인용해서 야간비행을 하는 비행사가 느끼는 고독감이라든가, 장거리 비행을 하면서 만날 수 있는 위험한 순간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대지는 우리에게 만 권의 책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왜냐하면 대지가 인간에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장애물에 맞닥뜨렸을 때 비로소 자기의 진가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 장애물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하다.(11쪽)” <인간의 대지>의 첫머리에서부터 작가는 대자연 앞에 인간이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지를 역설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때만 해도 비행을 도와줄 수 있는 정교한 장치들이 개발되기 전이라서 비행사의 경험이나 육감에 의존하는 비행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가슴이 떨리는 순간이 얼마나 많았을까 싶습니다. 특히 동료 기요메와 작가 자신이 경험한 비행기 추락사고에서 필사적인 노력으로 생환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에 맞선 인간의 위대한 승리에 박수를 보냅니다.

 

작가가 실제로 일했던 사하라 사막을 지나는 항로나 남아메리카의 항로를 비행하면서 겪을 일을 따라가다 보면 책읽는 이가 마치 조종간을 쥐고 자연에 도전하는 것 같은 느낌이 생깁니다. 사실 요즈음에는 비행을 도와주는 자동항법장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후변화가 그리 심하지 않은 고도를 운항하기 때문에 과거에 비하면 훨씬 안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구름 위의 풍경이 그저 평화롭게만 보이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상황은 그리 많이 겪어보지는 못했습니다.

 

비행에 관한 작품들 사이에는 <어린 왕자>도 있습니다. 이 작품은 지금으로부터 40년도 넘은 옛날에 처음 읽었던 기억이 여전히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미 어른이 된 탓인지 “어른 들은 혼자서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언제나 그들에게 설명해준다는 것은 어린이들로서는 힘이 드는 일이다.(218쪽)”라는 구절을 그때는 어떻게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친구를 찾아 우주를 헤매는 어린 왕자의 심정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만큼 세상이 각박해진 탓일까요? 그리고 여우가 어린 왕자와 작별하면서 알려준 팁, “잘 가라, 내 비밀을 알려줄게. 아주 간단한 거야.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271쪽)”을 제대로 마음에 새겨둡니다.

 

<남방우편기>에서는 프랑스 툴루즈를 출발해서 스페인 바로셀로나, 모로코 카사블랑카를 거쳐 남아메리카로 운항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 지난 여행에서 들어본 친숙한 이름들이 등장하기 때문인지 금새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끝에 더한 <어머니에게 드리는 편지>는 어머니에 대한 작가의 뜨거운 사랑이 전해지면서 과연 나는 어머니께 얼마나 잘 해드렸는지 돌아보기도 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소식을 주시지 않고 저를 내버려두실 수 있습니까? 그것이 저에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잘 아시는 어머니께서요?(424쪽)”라고 적은 것을 보면 엄친아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작가의 어머니가 진즉부터 헬리콥터 맘의 전형을 보였나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어머니에게 꾸준하게 근황을 적어 보내 걱정하실 어머니를 안심시키는 것을 보면 착한 아들이었구나 싶기도 하고, 그가 비행 중에 행방불명되었을 때 그 어머니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의 아름다운 준비 - 유대인 랍비가 전하는
새러 데이비드슨.잘만 섀크터-샬로미 지음, 공경희 옮김 / 예문사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지난 주에 이어 삶의 마지막 순간에 관한 책을 읽었습니다. 지난 주에 소개한 <어떻게 죽을 것인가; http://blog.joins.com/yang412/13678678>에서 아툴 가완디는 의료인들이 삶의 마지막 단계에 이른 환자를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 하는 관점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해보라는 것인데, 치료의 성과에 집착하여 환자가 받을 고통을 무시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환자 역시 삶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에 읽은 새러 데이비슨의 <인생의 아름다운 준비>는 제가 화두로 붙들고 있는 ‘품위있게 죽기’에 깨달음을 더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아툴 가완디도 언급을 했습니다만, 잘 죽는 기술, 즉 아르스 모리엔디(ars moriendi)에 관한 내용입니다. 저명한 칼럼니스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새러 데이비슨이 예순 중반이던 2009년 여든다섯 살이 된 랍비 잘만으로 부터 ‘인생 12월을 맞이하는 지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고, 매주 금요일 만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매주 금요일 랍비 잘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두 해 사이에 새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자살 폭탄테러를 피해가기도 하고, 치매를 앓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며, 자신도 미로염을 앓으면서 죽음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새러와 랍비 잘만이 오랜 시간을 두고 삶의 본질과 삶을 어떻게 마무리하는 것이 최선인지에 대하여 나눈 이야기를 묶은 것이 <인생의 아름다운 준비>입니다.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의 금요일 판이 되는 셈입니다. 두 책을 모두 공경희님이 우리말로 옮긴 것도 재미있는 인연인 것 같습니다.

 

저자가 만난 랍비 잘만 섀크터-샬로미는 1924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빈에서 자랐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나치가 오스트리아로 침공하면서 유대인들을 겁박하던 크리스탈나하트(수정의 밤, 1938년 11월 9일)에 충수돌기염으로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게슈타포가 저지른 끔찍한 만행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날 밤 사건의 충격으로 잘만의 가족은 독일을 거쳐 벨기에로 갔다가 비씨정권의 프랑스에서 구금생활을 하던 중에 미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잘만의 가족처럼 운이 좋았던 유대인들은 나치의 만행을 피할 수 있었지만, 많은 유대인들이 나치의 만행에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새러는 이 점에 대하여 ‘같은 처지의 난민과 사랑에 빠지고, 유대인들이 몰살당하는 판국에 신을 찬미하는 경전을 공부하다니! 신을 향한 분노는 어떻게 됐느냐(93쪽)’라고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분노의 뿌리를 이해해야 해요. 뿌리는 내게 주어진 그 신, 항상 이스라엘을 보호해 줄 그 신, 약속을 어긴 그 신이었지요. 내가 분노한 것으로 더 이상 신을 원치 않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동안 가지고 있던 신에 대한 관념을 지우고 새로운 관념, 즉 더 보편적인 영의 신으로 채울 수 있게 되었어요.”라고 랍비 잘만은 답변합니다.

 

역사를 통하여 유대인만큼 시련을 받은 민족도 없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진 시련 속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민족이기도 합니다. 홍익희님이 <유대인 이야기; http://blog.joins.com/yang412/13617145>에서 정리한 것을 보면, 수메르 문명권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 우르에 살고 있던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족이 그곳을 떠나 척박한 땅 가나안으로 이주하면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아브라함이 “나는 여러분들 가운데서 나그네로, 떠돌이로 살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4백여 년간의 이집트에서의 종살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광야에서 보낸 40년, 아시리아의 바빌론으로부터 나라를 빼앗겼던 포로시대, 로마제국에 의해 세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2천여 년을 살아온 유대인들의 역사는 바로 유랑과 핍박의 역사였습니다. 웬만하면 벌써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렸을 민족입니다만,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살아남아 세계 속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근성 있는 민족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의 민족성도 중요하지만 일찍 교육체계를 바로 세워 지켜온 것이 핵심요소라고 하겠습니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 유다왕국 사람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바빌론의 유수가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영적 딜레마에 빠진 유대민족에게 선지자 예레미아와 에스겔은 “성전에 재물을 바치는 것보다 믿음을 갖고 율법을 지키는 일이 하느님을 더 즐겁게 하는 길이다”라고 역설하면서, 성전에 고착되어 있었던 종교를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움직이는 종교로 바꾸었습니다. 즉, 사제가 없는 시나고그(synagogue)에서 학자인 랍비를 중심으로 모여 율법낭독과 기도중심으로 드리는 새로운 예배를 방식을 도입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하스모니안 왕조가 로마의 속국으로 있을 무렵인 기원전 76년 살로메 알렉산드리아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유대교를 재건하려면 모든 국민이 <성경>을 읽고 율법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전국에 학교를 짓고 노소를 가리지 않고 남자들에 대한 의무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율법을 암기하고 배우기 위하여 세 살부터 히브리어를 배웠고, 열세 살에 성인식을 치루기 위하여 모세오경 중 한편은 반드시 암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성인식에 참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토대로 자기가 준비한 강론을 해야만 했는데, 이런 전통은 유대민족의 탁월한 지적능력을 향상시키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아무리 나쁜 상황에 처하더라고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살아남는 방안을 마련해왔습니다. 그만큼 적응능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랍비 잘만은 유대인들의 유연성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러는 랍비 잘만의 삶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십 대 시절에는 예시바(탈무드를 연구하는 유대 학교)에서 금서로 정한 심리학과 철학 서적을 읽었고, 나중에는 타 종교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의식을 확장시키는 약물을 복용했다. 그는 열정적이고 살아 있는 전통의 보존을 돕기 위해 ‘유대부흥운동’을 창시했다.(21쪽)” 랍비 잘만은 18세기 폴란드에서 시작된 하시디즘의 랍비로 임명되었는데, 하시디즘은 기도와 찬양을 통해 신과 하나가 되며 율법을 엄격하게 지킬 것을 강조하는 유대 경건주의 운동입니다. 즉 랍비 잘만은 전통적인 유대교에 뿌리를 두었지만, 그 전통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아름다운 준비>는 새러와 랍비 잘만이 나눈 대화를 기본으로 하고, 두 사람이 살아온 삶의 여정을 녹여내면서 끝에 가서는 어떻게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 최선인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유대인등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보다 사후세계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훨씬 약하다고 합니다. 물론 유대교파 가운데 신비주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카발라 종파의 경우에는 환생과 현생 이후를 기록한 문서도 있다고 합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품위있고 평화롭게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새러의 질문에 대하여 랍비 잘만은 “그건 그분들의 죽음이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그분들이 선택하도록 해야 할 것(129쪽)”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분이 죽음을 원하신다고 해서 약을 드리거나 머리에 총을 겨누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분이 식사를 거부하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은 선택한다는 것은 죽어가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살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죽기 위하여 약을 먹는 행위를 적극적 자살로, 식음을 전폐하는 것을 소극적 자살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랍비 잘만은 적극적 자살은 분명 반대하는 입장인 것 같지만, 소극적 자살은 허용할 수도 있다는 입장으로 보였습니다. 식사를 중단하는 결심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바뀌면 다시 식사를 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적극적 자살이나 소극적 자살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행위는 유대의 율법에서 금하고 있지만, 금지된 것과 허용된 것 사이에 회색지대가 있을 수 있다고 잘만은 해석합니다. 가톨릭교회나 유대교 회당만이 사람들의 윤리를 결정했던 시절의 종교지도자들은 “신이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가져가신다. 당신들에게는 간섭할 권리가 없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교회법에 따라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현대에서는 개인의 선택을 존중해주면서도 신의 뜻을 지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점입니다.

 

새러는 랍비 잘만과의 대담을 통하여 삶을 정리하는 단계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인생 12월을 여행한다고 비유하였습니다. 그 깨달음을 모두 23꼭지의 이야기로 정리하였습니다. 아마 적지 않은 24번째 꼭지는 죽음이 되겠지요? 사실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은 계절이나 열두 달은 끝없이 순환하는 구조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12월은 인생의 마지막달이 아니라 새로운 1월을 맞기 위하여 준비하는 달이라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떻든 새러는 랍비 잘만과의 오랜 대담을 통하여 인생의 마지막 구간을 여행하면서 준비해야 할 것을 ‘인생 12월 여행을 준비하다’로 정리해냈습니다.

 

모두 열두 가지로 정리된 준비과정은 이렇습니다. 1. 용서로 치유하다, 2. 감사한 마음을 갖자, 3. 신에게 푸념하다, 4. 내 존재감을 인식하다, 5. 몸과 마음을 분리하다, 6. 아픔을 받아들이다, 7. 직감에 귀를 기울이다, 8. 고독과 친구하다, 9. 지난 인생을 돌아보다, 10. 하고 싶은 일을 하다, 11. 자동차에 종 매달기, 12. 마지막 순간을 연습하다, 등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여행에서 가장 중요하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용서로 치유하기’라고 합니다. 그 대상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내가 해를 입힌 사람, 나에게 해를 입힌 사람 그리고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 해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가 해를 입힌 사람으로부터 용서를 구하는 일은 상대가 있는 탓에 결코 쉬울 것 같지 않습니다. 저자는 내가 해를 입힌 사람의 명단을 만들고, 그들을 직접 만나 용서를 구하던지, 편지나 기도로서 용서를 구할지 방법을 결정하라고 조언합니다. 직접 만나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상개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멀리 있어 직접 만날 수 없는 경우라면 편지를 쓰고, 상대가 앞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소리 내어 읽으라고 합니다. ‘영혼들은 서로 연결되는 장이 있기 때문에 용서에 대한 표현이나 요구가 그 장으로 들어갈 것(312쪽)’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 제일 어렵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과정의 끝은 ‘마지막 순간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도 자신의 장례를 체험하기도 합니다. 연습과정은 모두 일곱 가지로 구성됩니다. 1. 놓아 버리기 연습을 한다, 2. 죽는 연습, 궁극적으로 내려놓기 연습을 한다, 3. 재정 상태와 행을 마감할 때의 문제를 정리한다, 4. 작별인사를 하고 싶은 이들은 누구인가?, 5. 마지막 순간을 연습한다, 6. 자기 부고 기사를 쓴다, 7. 살아 있는 추모식을 연다. 등입니다. 모두 쉽지 않은 일입니다만, 살아있는 동안에 추모식을 여는 일은 참석하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야 하는 일이라서 더욱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살아온 세월을 정리하고 남은 사람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남기는 일은 혼자서 결정하면 되는 일이라서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저의 선친께서 돌아가셨을 때, 생전에 남기신 글을 정리하면서 ‘사세(辭世)’라는 제목으로 따로 남겨두신 글을 발견했습니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고 감사하는 마음을 담으셨던 것이라서 아마도 돌아가실 날을 대비해서 미리 써두신 것 같았습니다. 아버님께서 생전에 남기셨던 글을 묶어 유고집을 내면서 이 글을 제일 앞에 넣었습니다. 저도 때가 되면 선친처럼 세상에 감사하는 글을 남기려고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센트럴파크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작품을 장르소설의 범주에 넣는다면 추리소설로 할 것인지 아니면 스릴러소설로 할 것인지 모호해질 것 같습니다. 여자 주인공이 파리경찰청 소속 강력계 팀장이고, 연쇄살인사건을 뒤쫓고 있다고 하면 추리소설로 보아야 할 것이고,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과 갑작스럽게 여자 주인공과 엮여들었다고 본다면 스릴러 소설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요즘은 술을 거의 줄이다시피 하고 있습니다만, 옛날에는 거리에서 눈을 뜬 적도 있어 어떤 기분이 들지 알 것 같은 상황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여자 주인공인 알리스가 뉴욕의 센트럴 파크의 벤치에서 눈을 뜬 것입니다. 전날 밤 파리에 있는 술집들을 전전하면서 술을 마시고 차에 올라탄 것까지만 기억이 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왼손에 채워진 수갑이 모르는 남자의 오른손에 채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경찰이 파리에서 납치되어 뉴욕으로 옮겨져진 상황은 어떻게 해도 설명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알리스가 자고 있는 가브리엘에게 총을 겨누면서 깨우는 장면에서 의혹을 가졌어야 했던 것 같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남자는 불과 몇 센티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자신을 향하고 있는 총구를 보더니 흠칫 놀라는 시늉을 했다.(12쪽)” 강력계 형사의 촉으로 시늉으로 보았으면 상대남자를 의심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날 아일랜드 더블린의 바에서 술을 마신 것까지 기억이 난다는 이 남자와 함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공조에 들어간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편 작가는 알리스가 뒤쫓던 연쇄살인사건에 관한 그녀의 기억을 삽입하여 현재의 상황이 그녀가 과거에 맡았던 미제사건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풀어갑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임신하지만 범인을 뒤쫓는 과정에서 남편과 아이를 잃는 끔찍한 일을 겪는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됩니다. 여교사 클라라 마튀랭이 스타킹으로 목이 졸려 살해된 다음, 항공사 여승무원 나탈리 루셀은 마튀랭의 스타킹으로, 간호사 모드 모렐은 루셀의 스타킹으로, 은행원 비르지니양은 모렐의 스타킹으로 목이 졸려 살해된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뒤쫓던 알리스는 수사과정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추정한 범인의 집을 찾아갔다가 그만 범인의 칼로 난자당하는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사실 강력계 형사가 잔혹한 범인을 뒤쫓으면서 단독행동을 한다는 것은 수사의 기본원칙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사고를 부를 수 있는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러니까 이야기를 이어갈 수도 있는 것이겠지요.

 

어떻든 범인은 알리스를 공격한 다음에 추가 범행을 벌이지 않았지만, 알리스가 뉴욕으로 건너온 다음에 다시 범죄가 이어지는 상황이 벌어지고 알리스는 가브리엘과 함께 범인을 뒤쫓기 시작합니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 상황이 뒤엉켜들면서 사건의 본질이 흐려지는 것 같습니다. 결국 독자는 작가의 의도대로 4부에 들어서야 다시 의혹이 일고, 대반전에 이르러서야 작가에게 말렸다는 느낌이 들게 됩니다. 반전치고는 허무하다는 느낌이 남습니다. 그리고 그 반전의 장치 역시 작가적 상상에 의한 것으로 보여서 어떻게 보면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럴 수가 있나 싶기도 합니다. 반전에 대한 암시라고 할 만한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예를 들면, “나는 기억한다.....”라는 제목으로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들 같은 것입니다.

 

이야기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조발성 알츠하이머병(젊은 나이에 치매증상을 보이는 알츠하이머병으로 가족력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이 요즈음 화두가 되는 것 같습니다. 오래 전에 읽은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http://blog.joins.com/yang412/12247552>라는 소설 역시 조발성 알츠하이머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로 그 책을 바탕으로 한 영화 <스틸 앨리스>가 요즈음 상영되고 있습니다. 원작의 핵심 포인트를 잘 잡아서 화면으로 옮긴 것 같습니다. 아직 영화 리뷰는 정리를 하지 못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소개할 예정입니다.

 

사실 마니아층이 두텁다는 기욤 뮈소의 작품은 처음이었지만, 확 당기는 맛은 그리 강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건이 정리된 다음에 서로에게 끌리는 듯 보이는 것도 생뚱맞아 보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것도 아닌 작은 일
카미유 앙솜 지음, 양영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아내로부터 첫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던지는 분명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당연히 기쁘기도 하고, 안심도 되고, 뭐 이런 복잡한 심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내는 저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아내를 지켜보면 우선은 커다란 기쁨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품에 안는다는 것은 일단 대단한 일일 것이며, 그런 대단한 일이 기다렸던 것이라면 기쁨이 더 커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대단한 일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벌어지게 되면 어떤 느낌이 들지는 당해보지 않아서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아이를 가지게 된 여성이나 그런 상황을 만들어낸 남성이 각각 생각이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일을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작은 일’이라고 슬쩍 눙치면서도 속으로는 엄청나게 많은 것을 생각했다는 여성의 속마음을 담은 <아무 것도 아닌 작은 일>을 읽다보면 세상에서 아이를 갖는 일은 결코 ‘아무 것도 아닌 작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도 남녀관계가 쿨하다고 듣고 있는 프랑스에서 말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작은 일>은 프랑스의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카미유 앙솜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 해야 할까요? 생각지도 않은 임신과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담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세상의 엄마들은 자신이 엄마가 되리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순간을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는 일이라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한다.(7쪽)”라고 적은 첫머리를 읽으면서, 프랑스의 젊은 여성들은 아이를 가지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생각할 것이라는 저의 생각이 잘못된 선입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남녀라면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안 순간 어떤 생각을 할까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닙니다. 요즈음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에서도 고등학교에 다니던 여자주인공이 임신을 하자 학교를 그만두고 남자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아이를 낳기에 이르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만, 결코 쉽지 않은 결심이라는 것은 누구나 생각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 역시 피임방법에 문제가 있어 생긴 임신을 두고 많은 고민을 한 끝에 아이를 낳기까지의 과정, 특히 심리적 변화를 꼼꼼하게 적어가고 있습니다.

 

이 책에 실린 내용은 엘르라는 잡지가 뽑은 인기 블로그의 하나인 ‘여자들의 카페’의 주인이 자신의 경험을 써내려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점을 암시라도 하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어떤 것은 한쪽을 넘어가기도 하지만, 어떤 것들은 불과 몇 줄에 불과하기도 합니다. 임신에서 출산까지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많은 상황들 가운데 가장 황당한 것은 역시 아이의 아빠가 중절을 요구하며 떠나는 장면이 될 것 같습니다. 그 녀석은 여자 친구를 진정 사랑하기는 한건 지 원.... 그렇게 무책임한 남자의 아이라면 미혼모라는 굴레를 써가면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지 싶기도 합니다.

 

어쩌면 저자 역시 처음에는 임신을 중단하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낳지 말자’라고 하는 남자 친구나, 역시 자신을 생각해서 임신을 중단하는 것이 좋겠다면서 압박하는 부모님 등, 주변 사람들이 온통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 자신만이 절망적 상황에 대한 유일한 판관이다(43쪽)’라는 판결문의 한 구절에 꽂혔기 때문에 임신을 유지하기로 결정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용감한 것인지 무모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저자의 생각을 이끌어내고 공감해준 대모님이나 절친이 있어서 가능한 결심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생명은 그만큼 소중한 것이니까요.

 

결심은 쉽게 했을지 몰라도 아이가 금새 세상에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임신기간 동안 오만가지 생각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런 저자의 생각들을 따라 읽으면서 이 엄마가 끝까지 행복하기를 빌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