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맛 - 몽테뉴와 함께하는 마흔 번의 철학 산책
앙투안 콩파뇽 지음, 장소미 옮김 / 책세상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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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사자성어는 논어 위정편에 있는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라는 의미의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온고지진 가이위사의)에서 왔습니다. ‘옛 것을 익히고 그것으로 미루어 새것을 안다’라고 새기는 것이 제일 마음에 와 닿습니다. 논어, 도덕경 등 다양한 옛 문헌들을 새롭게 해석하는 경향이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온 것은 중국어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해석하기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고, 또한 변모하는 세태에 맞게 해석하여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경향은 서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 『페드라(Paedra)』의 경우처럼 아무래도 우리에게 소개되는 기회가 많은 문학부문에서 두드러진다는 느낌이 듭니다. 영화 『페드라(Paedra)』 그리스 3대 비극시인으로 꼽히는 에우리피데스가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의 후처 페드라와 전처의 아들 히폴리투스 사이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히폴리투스(Hippolytus)』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1962년 작품입니다. 학창시절에 유행하던 음악다방에 가면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의 『토카다와 푸가』의 장엄한 연주를 배경으로 한 마지막 장면을 OST로 신청해서 듣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의 학문적 성과들을 번역하거나 재해석하는 작업은 이슬람제국의 문화적 전통이었다고 합니다. 이슬람제국의 그와 같은 문화 사업은 멸실될 뻔했던 그리스문명의 정신적 산물이 현대로 전해지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러한 전통은 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 [북소리]는 16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미셀 드 몽테뉴의 수상록의 일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앙투안 콩파뇽의 『인생의 맛』을 소개합니다. 벨기에 태생인 저자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공학을 전공하였지만, 졸업 후 문학을 다시 공부하여 2006년부터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프랑스 근현대문학을 강의하면서 프루스트 전문가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2012년 여름에 프랑스의 국영 라디오 채널 ‘프랑스 앵테르’의 제안으로 「몽테뉴와 함께하는 여름」이라는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삿갓 북한방랑기」처럼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에 끼어 넣은 프로그램으로, 5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몽테뉴의 사상을 밀도 있게 소개하였는데, 의외로 청취자들의 열렬한 반응을 얻어 방송내용을 책으로 묶어내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방대한 분량의 『수상록』을 부분적으로 인용하는 경우 조롱을 면치 못하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일정한 틀 없이,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40개의 주제를 골라 그 역사적 깊이와 여전한 현재성을 보여주겠다는 무모한 도전에 나섰다는 것입니다.

 

‘참여’에서 ‘세상의 왕좌’에 이르기까지 모두 40개의 이야기가 원전인 『수상록』의 순서와는 무관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참여’를 첫 번째 주제로 정한 것은 몽테뉴의 삶을 규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1533년 프랑스 보르도 근처 몽테뉴 성에서 태어난 몽테뉴는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라틴어를 먼저 배웠으며, 6살이 되어 고전을 읽을 정도로 라틴어에 유창해진 다음에서야 모국어인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보르도의 기옌 중학교를 졸업하고 툴루즈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페리괴의 조세재판소를 거쳐 보르도 고등법원에서 심사관으로 일했습니다. 1568년 6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몽테뉴의 넓은 영지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는 영주자리를 물려받았다. 2년 뒤에는 영지로 은퇴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와 명상으로 보내면서 9년여에 걸쳐 『수상록』제1권과 제2권을 저술했습니다.

 

은퇴한 다음에도 가톨릭교도인 앙리 3세의 시종이 되는 등 궁정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는데, 이 무렵 나바라왕 엔리케와 기즈 공 앙리 사이에 왕위계승과 관련된 권력다툼과 종교적 대립으로 시작된 갈등이 신교와 구교 사이의 전쟁으로 비화되어 몽테뉴의 생애 동안 이어졌다고 합니다. 전쟁의 와중에 몽테뉴는 종교에 대한 관용을 내세우면서 인간 중심의 도덕을 제창하였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 위하여 에세(essai)라는 문학 형식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수상록(Essais)』은 라틴 고전에 대한 그의 해박한 교양을 바탕으로 인간정신에 대한 회의주의적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다음 백과사전은 시대에 따른 몽테뉴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동시대인들은 그의 자화상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그의 금욕주의적 경구를 존경했다. 17세기 사람들은 그에게서 주로 회의주의적이고 '정직한 인간'을 보았고, 장 자크 루소와 후기 낭만파들은 그의 자화상과 자유분방한 문체에 매혹되었다. 19세기의 생트 뵈브는 자연스럽고 독자적인 그의 도덕성에 감동을 받았다. 20세기 독자들은 이 도덕성과 그의 자화상이 갖는 보편성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다음 백과사전, 몽테뉴;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07m4408b)

 

‘참여’에서 콩파뇽은 시대적 갈등의 중재자로 활약한 몽테뉴의 삶을 정의하였습니다. 현재 우리사회는 양극화된 세력이 끝이 보이지 않은 갈등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중재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도 대화의 통로는 유지하면서도 상대의 입장을 고려한 제안을 하는 정치인이 계셨는데, 지금은 인용하기에도 적절치 않은 ‘사꾸라’라는 비난을 받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태를 수습하는 중재자를 자임하려는 사람이 등장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가 되고 만 것입니다. 갈등의 양측에 걸치고 있는 사람은 때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맞기도 합니다. 그런데 몽테뉴가 그 힘들다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몽테뉴는 그 까닭을 『수상록』제3권 1장 ‘유용성과 정직성’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갈라놓는 이 거듭되는 분열 속에서 나는 미흡하나마 왕들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고, 그 결과 그들에게 오해를 사거나 가면으로 그들을 대하는 일은 용케 피했다. (…) 나는 사람을 처음 사귈 때 마음을 터놓는 태도로 상대에게 쉽게 스며들어 상호신뢰를 구축한다. 순박함과 진실한 태도는 시대를 초월해 통용된다.(12쪽)”

 

콩파뇽은 몽테뉴가 유용성과 정직성이라는 문제를 ‘공적 윤리, 목적과 수단, 혹은 국익 우선주의라는 차원에서 접근했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일단 당시 유행하던 마키아벨리즘적 사고를 부정하였다는 것입니다. 국가의 안정을 최고선으로 규정하고, 이를 위해서라면 국익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하고 약속을 어기고 심지어는 살인까지도 허용되었던 것이 마키아벨리즘입니다. 몽테뉴는 어떠한 경우에도 기만과 위선을 거부했으며, 국익을 위해 개인의 윤리를 희생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실함과 자신이 뱉은 말을 지키는 충실함이야말로 가장 득이 되는 태도입니다. 이는 모든 시대에 꼭 같은 무게를 지니는 진리일 것입니다. 심지어는 마키아벨리가 활동하던 시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몽테뉴는 『수상록』의 곳곳에서 의사라는 직업에 대하여 부정적 시각을 드러냈다고 하는데, 이는 오랫동안 몽테뉴를 괴롭힌 신장결석을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의사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합니다. 콩팥은 오줌을 걸러내는 기능을 하는데 오줌에는 다양한 염류가 녹아있습니다. 무기염류가 지나치게 많아지면 고체로 변하면서 서로 뭉쳐 돌을 만들게 됩니다. 신장이나 방광처럼 공간이 넉넉한 곳에 생긴 돌은 별다른 증상이 없는 경우가 많지만, 작은 돌이 요관이나 요도로 내려가다가 걸리면 극심한 통증을 일으키게 됩니다. 기본적으로는 통증을 가라앉히면서 수분을 섭취하여 돌이 내려가기를 기다리기도 합니다만, 이와 같은 고식적 치료에도 반응하지 않으면 과거에는 수술로 돌을 꺼내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약을 먹어 돌을 녹이는 방법을 쓰기도 하고, 요관경을 이용하여 돌을 꺼내거나, 체외충격파쇄석기로 돌을 부수어 나오도록 하기도 합니다. 고식적 치료 방법으로 소변의 양을 늘리기 위하여 맥주를 마시면 돌이 빠져나간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요로결석으로 인한 통증은 고통의 정도가 엄청나기 때문에 이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해주지 못하는 의사에 대한 몽테뉴의 불신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몽테뉴는 이렇게까지 의사를 비난하였습니다. “내가 아는 한, 의료 혜택이 미치는 범위 안의 족속보다 더 일찍 병들고 늦게 회복되는 이들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의 건강은 의학 처방의 속박으로 인해 나빠지고 손상된다. 의사들은 병자들을 관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가 어느 때라도 그들의 권위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건강한 이들을 병자로 만들어놓는다.(134쪽)” 몽테뉴보다 한 세기 뒤에 활동한 몰리에르는 마지막으로 쓴 희곡 『기분으로 앓는 사나이(Le Malade imaginaire)』에 등장하는 의사를 지식은 있으되 양식(良識)은 전혀 없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의사가 멀쩡한 사람을 환자로 만들어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들기도 하는 것을 보면 그 무렵의 서양의학의 수준, 특히 내과영역에서는 환자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을 이어받은 서양의학자들이 이롭기보다 해가 되는 치료를 환자에게 시술하여 새로운 재앙을 추가하기까지 했겠나 싶습니다.

 

그 시절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발전한 현대의학의 기준으로 볼 때, 의사가 질병을 더 나빠지게 만든다는 부분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의사들이 병자를 그들의 권위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만큼은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다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자주 병을 앓으면서도 의사의 도움 없이 참다보니 금방 나았다는 몽테뉴의 주장이 옳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암과 같은 중병도 초기에 발견하면 비교적 쉽게 완치가 가능한데, 방치하여 다른 장기로 전이가 생긴 말기에 접어들면 치유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완치에 대한 조급증으로 생기는 치료과정에 대한 불신으로 이 병원 저 병원을 떠도는 환자도 문제입니다. 이번 메르스 사태를 키운 중요한 요인 가운데 환자들이 자신의 병력을 속이고 병원을 돌아다닌 행태가 꼽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콩파뇽 역시 “이번만큼은 몽테뉴의 충고를 너무 쉽게 따르지 말자. 오늘날의 의술은 더 이상 르네상스 시대의 어설픈 마법이 아니다. 우리는 현대의학을 믿어도 좋을 듯하다.(137쪽)”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변천에 따른 고전의 새로운 해석의 전형이라고 하겠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붙들고 있는 화두인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몽테뉴는 죽음에 관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콩파뇽은 키케로에서 차용한 제목 ‘철학, 그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의 한 대목을 뽑았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적지는 죽음이고, 죽음은 우리가 목적으로 하는 필연적 대상이다. 만일 죽음이 두렵다면 어떻게 떨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그에 대한 보편적인 치료법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리라. (…) 머릿속에 죽음보다 더 빈번히 떠오르는 것은 없도록 하면서, 죽음이 낯설다는 생각을 버리고 연습하고 적응해보자(138-139쪽)”

 

아마도 몽테뉴의 시절 페스트와 전쟁으로 속절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죽음이란 임의로 연습해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평범한 백성들의 무심함이야말로 참된 지혜를 이루며 기꺼이 독배를 받아든 소크라테스의 무심함만큼이나 고귀하다고 깨달았던 것 같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앞서 인용한 한 대목에 대하여 저자는 몽테뉴의 유머러스한 면을 발견합니다. ‘죽음은 끝(bout)이지 인생의 목표(but)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삶은 삶 자체를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며, 그리 살다보면 ‘죽음은 홀로 찾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프랑스 사람답다는 느낌이 드는 대목입니다.

 

옮긴이에 따르면 몽테뉴의 『수상록』은 수많은 2차 저작물을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복잡한 현대의 생활에서도 몽테뉴가 제안하는 삶의 윤리가 여전히 유효한 것은 삶을 어떻게 아름답게 살 것인가로 귀결되는 삶의 미학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저 역시 옮긴이의 조언에 따라 『수상록』을 주문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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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30 0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처럼 2015-07-01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지고 계시다면 꼭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
저는 수상록을 주문할 예정이랍니다.
 
도미노 공부법 - 한 문제를 이해하면 백 문제가 ‘와르르’ 풀리는 가장 단순한 공부 원리
권종철 지음 / 다산에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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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시험을 70년대 초반에 겪었으니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라도 입시가 치열하기는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요즘 대학동기들끼리 만나면 요즘 같은 입시경향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아마도 의과대학에 입학도 못했을 거라고 농담을 합니다. 그때도 물론 공부를 잘하는 방법이 전해기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문제가 남느냐 내가 쓰러지냐는 식으로 단순 무식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전해지는 다양한 공부법들을 보면서 그 옛날 이런 비법을 알았더라면 무엇이라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이들도 일단 공부를 마쳤기 때문에 관심이 예전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공부하는 새로운 비법이라도 나오면 은근히 관심이 가는 것은 아무래도 버릇 탓인것 같습니다. 권종철선생님의 <도미노 공부법>은 제가 참여하고 있는 서평단에서 추천한 책이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뭔가 색다른 공부법이라고 해서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아이들이 결혼 전입니다만 손주라도 생기면 할아버지가 좋은 공부법을 알려줄 수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젊어서는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간혹 즐기던 오락도 요즘에는 별로 기회가 없습니다만, 그 동네에는 ‘초반 끝발이 개끝발’이라는 유명한 경구가 있습니다. 바로 그 경구처럼 ‘중학교 때까지 공부 잘하던 아이가 왜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잘 못하게 되는가?’라는 단순해 보이는 의문에 대한 답을 <도미노 공부법>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추스르면서 칼을 갈았지만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상승세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끈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고비를 넘기지 못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불안감이라고 저자는 진단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최대의 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의 불안감을 극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간절한 열망을 실현시키는 방법을 터득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목을 도미노에서 찾은 것처럼 공부에 빠져들게 만드는 결정적 한방은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결정적 한 방이 바로 ‘깊은 공부의 경험’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공을 경험한 사람은 그 성공을 이어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네 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는 <도미노공부법>의 전반부에서 저자는 문제를 진단하고 후반부에서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도미노게임을 보면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첫 번째 도미노를 밀었을 뿐인데 엄청나게 많은 도미노들이 순차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이렇든 경이로운 장면을 연출하기 위하여 첫 번째 도미노를 제대로 쓰러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진단하는 과정도 흥미롭기는 합니다만, 저자는 ‘나를 진단하라’, ‘생각의 흐름에 집중하라’, ‘성공의 경험을 축적하라’고 하는 세 가지를 첫 번째 도미노에 해당하는 ‘깊은 공부’의 3요소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지피기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확인하고, 목표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작은 성공이라고 우선은 성공을 이루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4장에서는 과목별로 깊은 공부를 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역시 국어, 수학, 영어의 세 과목이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만, 다른 과목들은 이들 세 과목의 방법을 원용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특히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깊은 공부에 접근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어 공부하는 학생들이라면 더 쉽게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깊은 공부를 시작하기 위하여 우선 세 가지 능력을 쌓아야 한다고 합니다. 즉 집중력, 이해력, 응용력입니다. 중학교 때까지는 기초적인 학습능력에 해당하는 이 세 가지 능력을 쌓는 공부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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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안), 캄보디아
정의한 지음 / 나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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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관한 글을 쓰다 보니 다양한 여행기를 읽게 되는데, 참 다양한 이유로 여행을 다니시는구나 싶습니다. <安, 캄보디아>도 독특한 여행을 하시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단지 추위가 싫어서 어디든 남쪽으로 가야해서 고른 캄보디아여행이라고 합니다. 이미 다녀온 앙코르와트를 제외한 지역을 한달에 걸쳐 돌아보고 한달 쯤 시엠립에서 살아볼 계획으로 떠났다고 하니, 참으로 부러운 여행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여행을 통하여 여행과 생활이 적절하게 이어져 해당국가에 대한 객관적인 복기와 애정의 여부를 어느 정도 가늠하고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뉴욕과 엘에이, 멕시코시티, 페루의 뜨루히요, 태국의 치앙마이, 뉴질랜드의 오클랜드, 그리고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경험들을 누군가와 공유하기 위하여 글을 쓰고, 그렇게 쓴 글을 출판하기 위하여 1인 출판사까지 차렸다고 하니 참 치열하게 사는 분 같습니다. 저자의 이런 생각은 70세가 되는 해에 집을 정리하고 세상을 떠돌며 생활하고 그 경험을 누군가와 나누는 마틴씨 부부의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 >에서도 읽을 수 있는데, 저자는 혼자서 여행을 하는 것이 차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시엠립 부근에 있는 캄보디아 제2의 도시 바탐봉에서 여행을 시작한 저자는 뽀삿을 거쳐 프놈펜에 도착하고, 이어서 캄퐁탐-시하눅빌-스떵뜨렁-반룽, 라따나끼리-끄라체-샌모노롬, 몬둘끼리-트벵 민체이와 쁘레아 비히어까지 돌아보았다고 합니다. 겨우 시엠립에 다녀온 것이 전부인 저로서는 저자가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녔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자신이 돌아다닌 경로를 지도 한 장으로 요약하는 정도의 성의를 보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뭐 이런 불평입니다.

 

여행기를 읽으면서 자주 드는 생각입니다만, 무수하게 삽입되어 있는 사진들은 무슨 사연을 담고 있는지 모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좋은 사진은 설명이 필요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책읽는 사람이 항상 저자와 텔레파시가 통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활자의 배경에 담긴 이미지 역시 책읽기에 불편함을 주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여행을 마친 다음에 시엠립에서 한달 정도 살 예정이라고 했지만, 시엠립에서 캄보디아사람들과 같이 살면서 느낀 점은 여기에 담기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행하면서 스치듯 만난 사람들, 예를 들면 숙소와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 혹은 가이드와 나누는 몇 마디로 그 사람들의 깊은 속사정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결국은 밖으로 드러나는 그 사람들에 대한 인상을 바탕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조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버스 옆자리에는 무척 어려 보이는 어린 엄마와 그녀의 역시 어린 아기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로 보이는 가족이 자리했다. 그들은 모두 얼굴이 어두웠고 심지어 참담했다. 분명컨대 그들의 얼굴은 고민이나 그 너머의 수준마저 넘은 얼굴이었다. 삶에 근본적으로 고단함이 배어 있는 사람들, 난 그들과 나의 삶에 필연적인 거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연민 같은 싸구려 감정만을 가져본다.(15쪽)” 물론 그 가족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을 수 있겠지만, 한 가족의 인상으로 캄보디아 사람 전체를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일 수 있습니다. 곁들여진 많은 사진에 등장하는 캄보디아 사람들의 표정은 구김없니 밝은 것을 보면 특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정해진 일정이 없이 현지사정에 맞추어 일정을 짜는 여유로운 여행은 분명 좋은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쫓기듯 혹은 스쳐 지나듯 보는 여행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무엇이 분명 있을 터이니 말입니다. 다만 숙소를 비롯하여 먹는 것 교통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일 것 같습니다. 하나더... 저자는 앙코르와트 이전의 유적을 돌아보기 위한 여행이었다고 하면서도 유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있습니다. 애당초 문외한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해석이나 미술적인 접근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설명으로 가름하고 있는데, 여행지를 잇는 교통편이나 숙소에 대한 느낌이나 설명을 상세하게 늘어놓는 것은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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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30 0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처럼 2015-07-01 14:37   좋아요 0 | URL
저도 지난 해 다녀왔는데, 이 책은 앙코르와트를 뺀 다른 지역을 돌아보셨더라구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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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었습니다. 장르소설을 좋아하는 큰아들 덕분입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오래된 잡화점에서 벌어지는 기묘하고 따듯한 이야기’라는 카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금새 알아차렸습니다만, 비교적 짧은 첫 번째 에피소드가 끝나고 두 번째 에피소드가 시작되면서 ‘옴니버스 스토리인가?’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두 개의 에피소드는 별개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세 번째 에피소드가 시작되면서는 ‘옴니버스 스토리 맞네’라는 생각으 들었지만, 이내 이야기의 흐름이 서서히 뒤섞인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서 그렇다면 따로 풀어낸 스토리들이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하는 의문에 답을 찾기 위하여 이야기에 빠져들었습니다.

 

타임슬립을 소재로 한 드라마는 많습니다. 특히 사람이 과거 혹은 미래로 이동하는 형식을 수많은 작품들을 만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소품-이 작품에서는 편지-가 이동하는 작품도 간혹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영화로는 <시월애>가 편지를 매개로 하여 서로 다른 시간대에 사는 남녀가 편지를 매개로 연결되는 스토리를 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만난 타임슬립을 주제로 한 스토리에서는 등장인물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등장인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에 쉽게 집중할 수 있는데 반하여,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등장하는 무수한 인물들은 모두 나미야 잡화점과 환광원이라고 하는 아동복지시설과 관련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나미야 잡화점을 처음 열었던 나미야 유지씨는 동네 아이들의 장난스러운 고민에 나름대로 깊이 있는 답변을 달아주던 것이 어느새 진지한 고민을 상담하는 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는 잡화점을 경영하는 일보다 오히려 고민상담이 더 중요한 일과가 되고 말았던 것이고, 나미야씨의 선행이 세상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도 합니다.

 

사실 본인의 문제에 대한 답은 본인이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정답을 알면서도 뭔가 다른 길은 없을까 알아보기 위하여 상담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이미 답을 정해놓고 자신이 정한 답에 누군가 동조해주기를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상권이 옮겨가면서 손님이 들지 않는 잡화점을 지키던 결국은 도쿄의 아들집으로 옮겨가지만 이내 간암이 발병하여 결국은 죽음을 맞게 됩니다. 궁금한 것은 죽음을 앞둔 나미야씨가 마지막으로 잡화점을 찾던 날 아들에게 유지를 남깁니다. (자신이 죽은 뒤 33번째 기일이 다가오면 나미야 백화점의 상담창구가 한시적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공고를 내달라는 내용입니다. 나미야씨의 아들 역시 자신의 생전에 아버지의 부탁을 들어드릴 수 없어 아들, 그러니까 나미야씨의 손주에게 그 일이 넘어가게 됩니다.) 바로 그날 밤 나미야 잡화점에서는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던 모양입니다. 우선 나미야씨가 아들에게 남긴 유지대로 33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 그동안 나미야씨의 상담을 받았던 사람들 혹은 상담자와 관련이 있던 사람들로부터 33년의 시간을 넘어서 배달된 답장을 받은 것입니다.

 

간단하게 끝날 수도 있는 이야기가 33년이 지난 다음에 나미야씨가 공고한 그 시간에 잡화점에 우연히 스며든 쇼타, 고헤이, 아쓰다 등 세 명이 백수청년들에게 이번에는 과거로부터 상담편지가 날아든 것입니다. 세 사람이 잡화점에 머무는 동안 시간은 정체되는데, 세 사람은 나미야씨와는 다른 방식으로 상담편지에 답장을 보내고, 그 답장은 과거의 사람들의 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영향은 세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박경리선생님의 <토지>처럼 등장인물이 많은 작품에서는 등장인물의 관계가 애매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는 한치의 어색함이 없이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나미야씨는 남의 고민에 나름대로는 최선의 답을 고르려 노력하면서도 자신의 조언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습니다만, 세 명의 청년은 자신들의 상담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쉽게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미래에서 과거의 사람들에게 조언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타임슬립을 확인하기 위하여 청년들이 상담편지 투입구에 집어넣은 백지편지에 대한 나미야씨의 답장에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 대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백지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 하기 나름인 것이지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가능성은 무한히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멋진 일입니다. 부디 스스로를 믿고 인생을 여한 없이 활활 피워보시기 진심으로 기원합니다.(447쪽)” 백수인 세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상담이 없을 것 같습니다. 눈앞에 닥친 일이 힘들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라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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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30 0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처럼 2015-07-01 14:38   좋아요 0 | URL
책을 읽게 되는 것도 다 연이 닿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들 녀석 덕분에 읽게 된 책입니다.
 
아메리카노 - 라틴아메리카의 독립투쟁 역사도서관 교양 17
존 찰스 채스틴 지음, 박구병.이성형.최해성 외 옮김 / 길(도서출판)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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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그런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역시 커피 브랜드에 관한 책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메리카노>는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라틴아메리카의 독립투쟁의 과정과 의미를 정리한 책입니다. 옥스퍼드대학 출판부가 기획한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의 하나로 라틴아메리카 독립투쟁 발발 200주년을 기념하여 발간된 것입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채플 힐 캠퍼스)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19세기 라틴아메리카, 특히 브라질과 리오데라플라타 지역의 정치문화와 대중문화를 연구하고 있는 존 찰스 채스틴교수가 썼습니다.

 

북아메리카에서 열리는 학회에는 선뜻 나서게 되지만 남아메리카의 학회는 너무 멀어 그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멀다보니 관심도 적고 그러다보니 남미 여러 나라에 관한 정보들도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정열의 나라, 본고장 영국보다 축구를 잘하는 나라라는 막연한 이미지만 가지고 있어서인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알레프>, <픽션들>,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 등을 읽으면서도 작품 속으로 깊이 빠져들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남아메리카가 얼마나 멀리 있는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여행작가 정은선님의 독특한 형식의 에세이 소설에 나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게스트하우스OJ에서 만난 나작가는 서울에서 복닥거리는 삶에서 벗어나려고 온 사람이었습니다. 나작가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 사연은 이렇습니다. “이런 지옥 같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 곳이 어디일까? 여기가 생지옥이니까 가장 먼 곳은 당연히 천국일 것이다. 책상 앞에 놓인 지구본을 발견했다. 왼손 집게손가락으로 대한민국을 찍고 그 반대편을 찾아 오른손으로 찍었다.”(정은선 지음, 찾거나 혹은 버리거나 in 부에노스아이레스 150쪽, 예담, 2009년; http://blog.joins.com/yang412/13685980) 직선거리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 곳이 바로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것입니다.

 

칠레와의 FTA가 계기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남미가 우리나라와 많이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새로운 여행지로 뜨고 있다는 남미를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무언가를 버리려 가는 여행이 아니라 무언가를 찾으러 가는 여행으로 말입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겠지요? 그래서 그들의 역사를 공부하려고 합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근대사를 독립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정리한 <아메리카노>를 읽게 된 이유입니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독일의 박물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가 라틴아메리카 여행을 시작한 1799년부터 그가 죽은 1840년까지를 서술대상으로 하였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처럼 저 역시 ‘왜 훔볼트일까? 그리고 훔볼트가 누구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 훔볼트인가?’하는 의문의 답은 이렇습니다. 19세기 초반 라틴 아메리카에서 독립투쟁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데 적절한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훔볼트가 누구지?’하는 의문을 가진 분은 2013년 4월에 [북소리]에서 소개했던 <여행의 기술; http://blog.joins.com/yang412/13104741>을 다시 살펴보시기를 권합니다. <여행의 기술>에서 알랭 드 보통은 ‘호기심’이라는 여행의 주제를 설명하기 위하여 훔볼트를 인용하였던 것입니다. “훔볼트는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들을 놓치지 않았다. ‘해발 5,076미터인데도 눈 위로 바위 이끼가 보였다. 이끼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800미터 정도 아래서였다. 봉플랑 씨[훔볼트의 동행자]는 해발 4,500미터에서 나비를 한 마리 잡았으며, 거기에서 500미터를 더 올라가서도 파리를 볼 수 있었다.’(153쪽)”라고 적어 훔볼트가 왜 뛰어난 박물학자인지를 알려주는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호기심이 여행을 얼마나 풍성하게 만드는가를 잘 설명하는 인용이었습니다.

 

훔볼트는 스페인왕 카를로스4세를 설득하여 남아메리카 여행을 허락받았을 뿐 아니라 탐험비용까지도 해결하여 1799년부터 5년간 남아메리카를 여행하였습니다. 여행을 마친 뒤에는 파리에 정착하고 30권에 달하는 <신대륙의 적도지역 여행>이라는 제목의 여행기를 20년에 걸쳐 출간했습니다. 훔볼트가 여행을 떠날 무렵 만해도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의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는 전혀 없었던 상태였습니다. 훔볼트는 5년 동안 1만5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남아메리카의 북쪽 해안선과 내륙을 여행했고, 1,600가지 식물을 채집했으며, 크로노미터와 육분의로 측정한 결과를 바탕으로 지도를 새롭게 그렸습니다. 아마존 유역 주민들의 혈족의식을 지리와 문화적 특성을 연관하여 추론해냈습니다. 해류의 개념을 생각해냈는데, 오늘날 태평양의 동쪽 칠레와 페루연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남극의 차가운 바닷물을 적도방향으로 밀어가는 페루해류를 처음 발견한 공로로 훔볼트해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훔볼트가 카를로스4세의 허락을 얻어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할 무렵에는 지금의 멕시코지역으로부터, 브라질을 제외한 남아메리카의 전체 지역이 스페인의 식민지였습니다. 영토가 너무 광대하여 4개 지역으로 나누어 임명한 부왕이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지금의 멕시코와 괘테말라에 이르는 누에바에스파냐, 콜롬비아에서 베네수엘라에 이르는 적도부근의 누에바그라나다, 지금의 페루와 칠레가 포함되는 페루, 그리고 볼리비아와 아르헨티나를 포함하는 리오데라플라타 등입니다. 하지만 고산지대와 아마존의 밀림을 지나는 경계가 분명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메리카노>에서는 이야기에 앞서 알파벳순으로 소개하고 있는 등장인물만 해도 57명에 달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생소하면서도 긴 스페인 이름이 혀끝에서 겉도는 느낌이 들어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편년체 방식을 취하여 정해진 기간 동안에 일어났던 이야기들을 나열하고 있어서, 사건이 흩어져있고, 독립투쟁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지역을 넘나들며 활동하였던 탓에 서로 연관을 가졌던 부분이 머릿속에 쉽게 정리되지 않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기전체로 풀었더라면 이해가 더 쉬웠을까요?

 

콜럼버스가 발견한 북대서양항로를 통하여 스페인이 라틴아메리카를 쉽게 손에 넣은 과정도 이해되지 않는 바가 많습니다. 오랜 세월을 통하여 이 지역에서 마야문명과 잉카문명을 꽃피워왔던 사람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 이유가 그저 정복자들이 가진 신식무기 때문이었을까요? 물론 우리 사회에서 크게 이슈가 되고 있는 메르스처럼 그때까지 원주민들이 겪어보지 못한 천연두와 같은 신종전염병도 크게 기여한 바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밖에 더 생각할 무엇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식민당국의 탄압으로 줄어든 원주민의 노동력을 대체하기 위하여 아프리카에서 붙잡아온 노예까지 더해져서 스페인에서 이주한 사람과 원주민 등이 복잡하게 섞이면서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정체성이 복잡해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스페인왕실에 대한 라틴아메리카의 충성심은 크게 변하지 않았던 것도 미스테리입니다.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독립의 기운에 싹트게 된 것은 아무래도 1789년 프랑스에서 부르봉 왕조를 무너뜨리고 국민 의회를 열어 공화 제도를 이룩한 시민 혁명 영향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오랜 세월을 통하여 라틴아메리카를 지배해온 신분차별을 지각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신분의 차이는 아프리카사람이나 원주민은 물론, 심지어 이베리아반도에서 건너온 스페인 사람과 라틴아메리카에서 출생한 스페인 사람 사이에도 차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운동에 불을 당긴 결정적인 계기는 프랑스혁명에 이어 등장한 나폴레옹이 유럽의 지배할 야심을 가지고 이베리아반도를 침략한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침략에 대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대응은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1807년 포르투갈의 주앙6세는 리스본을 떠나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로 천도하는 결단을 내립니다. 반면 프랑스가 포르투갈을 공격하는 길을 내준 스페인은 이듬해 나폴레옹의 공격을 받고 카를로스4세 왕과 페르난도 왕자가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스페인은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나폴레옹이 왕위에 올라 스페인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의 반발도 거세었던 탓에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 주민들의 봉기를 대량학살로 진압한 프랑스에 대하여 스페인은 군대와 민간이 힘을 합쳐 나폴레옹에 대항하게 됩니다. 프랑스가 점령하지 못한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저항협의체를 구성하고 군주가 없을 때는 주권이 각 지역에 귀속된다고 선언하였는데, 세비야가 핵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비야의 지역협의체는 누에바에스파냐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스페인 부왕령에서는 스페인왕실에 대한 충성도가 여전히 높았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혁명과 미국의 독립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원주민과 메스티조(유럽인과 원주민의 혼혈)와 파르도(유럽인과 아프리카계의 혼혈)의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앞세워 광범위한 참여를 유도하였지만, 훈련을 받지 않은 반란군은 부왕령의 정규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야기된 군주의 부재를 틈타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보려던 반란세력은 군주지지파에 밀려 반란이 실패한 것입니다. 문제는 영국의 지원을 받아 나폴레옹을 이베리아반도에서 축출하는데 성공한 뒤에 왕위에 오른 페르난도7세가 라틴아메리카의 독립투쟁을 극단적으로 탄압하는 바람에 라틴아메리카의 독립투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원주민과 혼혈인들을 권력투쟁에서 배제한 채 크리요오(아메리카 태생의 백인)와 페닌슐라르(이베리아반도 출신의 백인) 간의 대립으로 발전하였으며 결국은 크리요오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이후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 미국까지도 신생독립국가의 내정에 깊숙하게 간섭하였고, 상업적 침투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스페인의 식민통치의 특징은, “식민지 아메리카가 ‘공포, 무지, 가톨릭’이라는 세 개의 족쇄에 묶여 있었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혁명가 마리키타 산체스의 말에 잘 함축되어 있습니다. 처형과 폭력을 통해 주민을 지배하여 공포를 조장했고, 일반인의 시민교육을 박탈함으로써 자유로운 사상이 뿌리내릴 수 없도록 하였으며, 가톨릭교회는 이단심문소를 통하여 지배세력의 이런 행위들을 종교적으로 정당화시켰다는 것입니다.

 

90퍼센트에 이르는 문맹률에도 불구하고 독립투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확보된 인쇄기를 통하여 만들어낸 정치팸플릿을 통하여 자유주의 사상이 다양한 형태로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공화주의자였지만 이들은 지역 내의 대중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의 세계적 분위기가 공화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던 덕을 본 것입니다. 독립을 쟁취한 이후에도 라틴아메리카의 주민들은 여전히 기존의 사회적 위계질서에 따르는 보수적인 경향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주권재민을 기본으로 하는 국가형태가 자리를 잡기까지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19세기의 초반 대서양 양안을 뜨겁게 달구었던 라틴아메리카의 독립투쟁은 인도양을 건너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라틴아메리카 독립투쟁의 의미를 “탈식민 세계의 주권을 확립한 것”이라고 저자는 요약하였는데, 식민지배를 탈피하여 주권이 인민들에게 있다는 점을 세계가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독립 직후에도 보통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유예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계기로 기승을 부리던 서양의 식민통치가 막을 내리게 되는데 ‘탈식민화의 최우선 원칙’이 크게 기여하였던 것입니다.

 

저자는 유럽계, 아프리카계 그리고 원주민의 혈통이 혼합된 독특한 라틴아메리카만의 다인종국가를 사회적으로 통합된 공화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초반을 달구었던 독립투쟁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이 씨를 뿌린 자유주의적 이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독립투쟁은 서양의 정치적 가치들을 전 세계로 확대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평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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