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기록 - 버나드 루이스의 생과 중동의 역사
버나드 루이스.분치 엘리스 처칠 지음, 서정민 옮김 / 시공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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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책읽기도 인연 따라 가는 면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해 마그레브지역을 여행하면서 이슬람과 유대교에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100년의 기록>은 그런 인연으로 만난 책입니다. 여기 더하여 이 책을 번역하신 서정민교수님을 오래 전에 만났던 인연을 가지고 있어, 번역하신 책을 통하여 서교수님을 반갑게 만날 수 있어 좋았습니다.

 

<100년의 기록>은 현존하는 최고의 중동역사학자인 버나드 루이스교수의 삶과 학문의 세계를 집대성한 기록입니다. 1916년에 태어났으니 이제 11 개월 정도 지나면 한 세기를 살아낸 셈이 됩니다. 들어가는 말에서도 짚고 있습니다만, 중동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반드시 이슬람의 기원과 경전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고 합니니다. 저자는 학창시절부터 이미 쿠란과 선지자 무함마드의 전기를 비롯하여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을 읽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유대인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보니 [북소리]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메카로 가는 길; http://blog.joins.com/yang412/13596903>을 쓴 저명한 무슬림 작가 무함마드 아사드 역시 유대인이었습니다. 물론 유대교와 이슬람은 가톨릭과 함께 같은 뿌리를 가진 형제 사이라고 합니다. 중세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한 이슬람제국에서는 유대인들과 공존하면서 다양한 문화적 성취를 이루었던 것이나, 사회적 여건이 변하면 서로 개종을 하기도 하는 등 종교적 갈등이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루이스교수는 종교적인 관점을 떠나 자신이 역사학자이며 문명사에 관심이 있다고 밝히면서 현재 우리는 거대한 힘들이 역사를 위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역사란 집단의 기억인데 역사의 부재는 기억상실증이고 왜곡된 역사는 신경증을 일으킨다고 비유합니다. 따라서 역사학자는 ‘도덕적이고 직업적인 책임감을 바탕으로 과거의 진실을 정확히 찾아내고, 파악한 그대로를 제시하고 설명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스스로 이런 책무를 다하기 위해 진정으로 노력해왔다고 고백합니다.

 

유대인들의 저서를 보면 자신의 뿌리를 거슬러 밝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가와 외가의 조부모에서 시작해서 부모님들이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신이 출생하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성장과정을 정리하여 자신의 학문적 성취가 어떠한 배경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읽는 이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자의 학문적 배경에는 어렸을 적부터 몸에 밴 책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눈여겨 보게 되는 대목입니다. “나는 어렸을 적에 어떤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책을 소유하면 그것을 읽는 기쁨이 배가 되고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책을 읽을 수 있으며, 도서관이나 법적 소유권자에게 번거롭게 돌려줄 필요가 없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특정 구절에 대한 감상과 이해가 더욱 쉬워진다.(27쪽)” 그래서 저자는 책을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언어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과정에서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오페라를 즐겨 부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이탈리아어에도 익숙해 있었으며, 유대 젊은이라면 누구나 열세 살에 치루는 성년식 바르미츠바행사를 위하여 히브리어를 배웠습니다. 유대의 성년식 전통은 기원전 76년 즉위한 하스모니안 왕조의 알렉산드라여왕이 유대민족의 내부단결을 도모하고자 모든 남자들에 대한 의무교육을 시작하였는데, 이로서 유대인 가장들 사이에서는 문맹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뒤로 유대인들은 세 살부터 히브리어를 배워 율법을 암기하였고, 성년식에서는 모세오경 가운데 한 편을 모조리 암송해야 했으며 성인식에 참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토대로 준비한 강론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교육방식은 유대민족의 탁월한 지적능력을 향상시켰다고 합니다.(홍익히 지음, 유대인 이야기 161-162쪽, 행성:B잎새, 2013년; http://blog.joins.com/yang412/13617145)

 

결국 저자는 런던대학교에 입학하여 역사학, 특히 중동역사를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이집트를 거쳐 팔레스타인, 시리아 그리고 터키를 여행하는 행운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대학원과정을 마칠 무렵 터진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저자는 정보부대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중동에 파견되어 근무하면서 정보를 분석하는 작업에 참여했는데, 이 무렵에는 러시아어, 아랍어, 터키어, 알바니아어를 비롯하여 다양한 언어를 어느 정도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언어적 능력은 역사학자라면 필수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다양한 원전자료를 독해할 수 있기 때문에 중역으로 인한 원전의 왜곡을 피할 수 있는 장점을 갖춘 셈입니다. 결국 1949년에는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오스만제국의 기록보관소를 방문하여 자료를 살펴볼 기회까지 얻어 중동역사의 권위를 세울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기록보관소는 수 세기 동안 유지된 오스만제국의 엄청난 분량의 자료가 쌓여 있다고 합니다. 1955년에는 UCLA에서 객원교수로 근무하게 되었고, 그 무렵부터는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모스크바 등지에서 열리는 이슬람관련 학회의 초청으로 무슬림국가들을 방문하는 기회가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이 책을 만나는 기회가 있다면 ‘왜 역사를 공부하는가?’라는 제목의 장을 꼼꼼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필자로서는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저자의 글제목을 보면서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저자의 학생들은 다양한 이유로 역사를 공부한다고 말했다는데, 저자는 그들에게 기본적으로 역사가로서 정직해야 한다고 당부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역사연구 역시 과학적으로 상당히 진화했으며, 무분멸한 자유보다는 검증 가능한 과학적 방법을 선호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진실은 정답이 하나인 수학과는 다르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사건도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역사는 과학이 아니며 불완전하고 단편적이며, 일치하지 않거나 때로는 모순되는 증거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명확하지 않은 인류의 삶과 지식에 통찰력을 제공한다고 저자는 믿고 있습니다.

 

저자는 정직한 역사 연구에 두 가지 조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가설은 분명한 목적과 인식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 둘째, 학자는 증거에 따라 자신의 가설을 어떤 단계에서라도 수정하거나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의 중요한 목적과 용도의 하나는 정당화라고 합니다(202쪽). 과거를 이용하여 현재를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학자 역시 인간인지라 다른 사람들처럼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피해야 할 일이지만, 특정 이념이나 권력에 대한 충성심과 편견이 학자의 역사 인식과 표현을 왜곡할 수 있는데, 진솔한 역사가는 이런 위험을 잘 알고 고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1974년 저자는 결혼생활을 청산하면서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직장은 물론 조국까지도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뉴저지의 프리스턴대학교이 근동학과 학과장직과 프린스턴 고등학술연구소의 연구원을 겸직할 수 있는 제안을 받은 것입니다. 교육과 연구를 병행하면서 미국 정부의 중동정책에 관하여 자문하는 경우도 늘었다고 합니다. 특히 이집트와 이스라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사이의 평화협정이 타결되는 과정이 요약된 부분도 인상적입니다.

 

최근에는 이슬람 과격주의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저자는 처녀작인 <이스마일파의 기원>에서 이스마일파의 아사신(assassin)을 주제로 하였습니다. 이스마일파는 주류 수니파에서 떨어져 나온 시아파의 과격한 분파로 이단 중의 이단이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공격목표는 십자군과 같은 외부 세력이 아니라 이슬람권의 지배 엘리트와 지배이념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중세의 아시신에게 공격을 당한 피해자들은 이슬람세계의 통치자들, 군주들, 장관들, 장국들, 그리고 주요 종교 지도자들이었으며, 이들은 항상 단검을 무기로 사용하였고, 공격 대상을 쓰러뜨린 후에도 자신은 도주하지 않았으며, 아시신을 보낸 세력 역시 아사신을 구하기 위한 구출작전도 없었다고 합니다. 임무를 끝낸 아사신은 살아남는 것을 불명예로 여겼다는데,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오늘날의 자살폭탄테러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민간인을 원격조종하여 무차별적으로 살상을 하고 인질납치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오늘날의 테러리스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합니다. 이슬람의 교리, 전통, 법은 이슬람의 이름으로 테러를 감행하는 사람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슬람법은 무차별적인 민간인 살해 혹은 협박을 위한 인질납치와 같은 행위를 명시적으로 금지한다고 합니다.

 

‘문명의 충돌’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사실 문명의 충돌의 대표적인 사례는 8세기 이베리아반도에 이슬람제국이 건설된 것과, 오스만 투르크제국이 보스포루스해협을 건너 발칸반도를 점령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이슬람과 기독교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 독특한 문명양식을 만들어냈고, 그 유적들이 현재까지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특히 코르도바의 메스키타에서는 거대한 이슬람사원의 일부를 뜯어내고 가톨릭성당이 자리 잡은 독특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18세기 무렵에 작성된 에스파냐 주재 모로코대사관에서 작성된 문서에는 ‘알라께서 이곳을 이슬람의 품으로 빨리 회복하시길’이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요즈음에도 코르도바 메스키타를 방문하는 이슬람신자는 ‘한때 이슬람 사원이었던 이 신성한 곳에 오니, 오후 기도를 드리고 싶네요(339쪽)“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기도 한답니다. 과거의 영광을 회고하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이슬람 강경파들을 ‘이슬람 원리주의'로 칭하는 관행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는 저자의 지적도 새롭습니다. ’원리주의‘라는 용어의 근원은 1910년 무렵 일부 개신교 교회들이 주류 교회들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만든 <원리들: 진실에 대한 증언>이라는 팸플릿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자유주의 신학과 성경에 대한 비판을 배격했다는 것입니다. 즉 성서는 문자 그대로 신성함을 가지며 거기에는 오류가 없다는 입장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 배경을 가진 원리주의가 1980년대 들어 특정 이슬람단체를 묘사하는데 동원되었는데, 이들 무슬림단체는 미국의 개신교 원리주의자들과 하등 유사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100년의 기록>은 무슬림과 유대인에 대한 시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서구적인 일방적인 시각으로 중동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양쪽을 고루 보면서 학문적 활동을 해온 루이스 교수의 학문적 배경이 잘 녹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방대한 분량을 우리말로 옮긴 서정민교수님은 “<100년의 기록>은 루이스 교수의 학문적 삶을 모두 담아낸 책이다. 또 100년에 가까운 삶을 정리하며 집필한 개인적 회고록의 성격도 갖고 있다. 연구를 하면서 그가 직면한 학문적 고민과 논쟁에 대해서도 솔직히 담아냈다. 이혼이라는 개인사도 여과 없이 기술했고, 노년에 시작한 새로운 사랑에 대해서도 부끄럼 없이 진솔하게 밝혔다.(12쪽)”라고 이 책의 성격을 요약했습니다.

 

이 책을 소개하신 서정민교수님은 이집트 카이로아메리칸대학교의 정치학과를 거쳐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중앙일보 카이로 특파원을 지냈습니다. 서정민교수님이 카이로에서 올리는 따끈따끈한 중동소식을 블로그에서 읽으면서 교감을 하다가 일시 귀국한 서교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안내로 한남동에 있는 이슬람중앙성원을 처음 방문한 작은 인연의 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그의 노고가 밴 번역서 <100년의 기록>을 만나면서 서정민교수를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갑습니다.

100년의 기록

버나드 루이스와 분치 엘리스 지음

서정민 옮김

512쪽

2015년 6월 18일

시공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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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의 이방인
김성희 글.사진 / 북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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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두 번 쓰는 초유의 상황을 맞았습니다. 지난 주에 썼지만 포스팅을 하기 전에 USB가 깨지는 바람에 생긴 일입니다. 도서관에서 빌려와 리뷰를 쓰고는 반납을 했기 때문에 다시 빌리러 도서관에 가기도 불편한 무엇이 있습니다. USB에 담겨 있는 스페인 여행기 가운데 일부도 깨진 상황이라서 비용을 들여서라도 복구를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복구가 된다면 사라진 리뷰를 다시 포스팅하기로 하겠습니다.

 

지난해 스치듯 다녀온 모로코와 모로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고 해서 뽑아든 책이었습니다. 물론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말씀을 미리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선 저자께서 하시는 일을 꼭 주얼리 디자이너라고 하셔야 되는 지입니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우리말이 생소할 수도 있겠다 싶다고 하더라도 보석디자이너라고 하면 품위가 떨어지나요? 모로코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하였는데, 적지 않은 분량이 자신의 본업인 보석디자인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모로코에 관한 이야기, 특히 카사블랑카에서 있었던 이야기 역시 자신의 사업과 관련된 이야기가 주가 되는 것 같습니다. 모로코의 보석상인의 지원을 받고 있어서인지 모로코에서의 일상이 겁이 없어 보인다는 느낌입니다. 아마도 수년 동안 모로코에서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익숙함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독자가 모로코를 처음 여행하면서 저자와 같은 행동을 하다가는 봉변을 당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 같습니다. 특히 페스에 도착해서는 현지에서 가이드를 섭외하는 것도 무모해보일뿐더러 그렇게 결정한 가이드와 함께 메디나의 미로 관광에 나설 수 있을까 싶습니다. 더군다나 가이드가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눈치를 보이자 가이드를 마치도록 하고, 이번에는 가이드 없이 메디나의 미로에 뛰어드는 용감함, 아니 무모함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소개하는 카사블랑카, 마라케시, 페스, 그리고 에사위라에 관한 내용에서 모로코를 여행할 계획을 가진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라케시와 에사위라는 제가 가보지 않아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만 카사블랑카와 페스의 경우를 보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마라케시에서던가 마차를 타고 관광을 했다고 설명하는 중에 마차관광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걸어 다니기에는 도시가 너무 크고 택시를 타면 천천히 구경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173쪽)’ 느림의 미학이죠? 그런 점에서는 통하는데가 있기는 한데, 마라케시에서 마차를 타고서 볼 수 있는 것은 역시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페인의 론다에서 그리고 세비야에서 마차를 타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만, 단체관광 중이었기 때문에 그림의 떡이라서 아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처럼 비엔날 혹은 뉴욕에서 마차를 타는 일은 선뜻 당기지 않아서 저는 포기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어떻든 보석디자이너라는 영역과 모로코에서의 삶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러다 보니 어느 하나도 내실을 기하지 못한 느낌입니다. 역시 두 마리 토끼를 쫓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닌 듯합니다. 한 마리에 집중해서 확실하게 잡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옳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로코에서 자신이 어떻게 지냈다는 이야기보다는 책을 읽는 사람들이 모로코에 가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소개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곁들여진 사진에 대하여 좋은 평을 적어주신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설명없는 사진을 보면 답답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전공하는 병리학에서는 사진을 많이 사용합니다만, 사진은 찍은 사람이 제일 잘알고, 남이 찍은 사진을 설명하는 일은 정말 어렵다고들 이야기한답니다. 즉 찍은 사람이 무엇을 나타내고자 했는지 설명을 해주는 친절함이 아쉽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여행기가 무수한 사진들을 설명 없이 늘어놓는 경향이 있지만 누구도 말씀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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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록 동서문화사 월드북 5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김희보.강경애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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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었습니다. 이미 세상에 나온 책들은 아예 말할 것도 없고, 매일 새롭게 선보이는 책들도 엄청난 상황에서 본다면 책읽기 역시 연이 닿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는 중세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이자, 문학자, 신학자로서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고백록>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겠습니다. <고백록>은 그가 46살이 되었을 무렵 완성한 13권으로 구성된 자전적 작품으로, 성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즉 유소년 시절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외적인 행적은 물론 내적인 마음의 궤적까지 담고 있는 전반부에서는 방탕한 생활과 생각까지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후반부는 오랜 방황 끝에 하나님께 귀의하게 된 과정으로부터 그때까지의 방탕한 생활을 뉘우치며 명상에 이르게 되는 과정, 치열한 명상으로 얻은 신학적인 결과물은 물론 천지창조와 창세기, 그리고 삼위일체에 대한 주해를 담았습니다.

 

<고백록>을 읽게 된 것은 종교적 이유라기보다는 제10권 뉘우침 뒤의 명상편에 담긴 기억에 관한 내용이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제10권의 제8장으로부터 13개의 장을 기억에 관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의 유혹을 비롯하여 후각, 청각, 시각 등 감각의 유혹에 대한 태도를 정리하고 있어 미각에 의하여 기억이 일깨워졌다는 프루스트의 이야기를 생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선 “먼저 하느님을 부르며 찬양하고서, 이 세상에 태어나 열다섯 살에 이르기까지 살아온 일을 돌이켜 생각한다. 유년시절과 소년시절에 지은 죄를 고백하며, 그 무렵 놀이에 빠져 학문을 게을리했음을 고백한다.(21쪽)”라고 서두를 떼고 있습니다.

 

<고백록>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부분은 아들이 방탕한 생활과 심지어는 이교에 빠져들고 있음을 지켜보면서 일구월심으로 하느님에 귀의하기를 기도해온 어머니 마리아의 정성입니다. “그때 주님의 충실한 하인이었던 어머니는 나를 위하여 우셨나이다. 세상의 어머니들이 사랑하는 자식의 죽음 앞에서 우는 것보다 더 심하게 주님을 향해 울었사옵니다.(77쪽)” 다행이었던 것은 결국 아들이 하느님의 품에 드는 것을 확인하고 숨을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어머니의 눈을 감겨드렸습니다. 그러자 커다란 슬픔이 내 가슴속에서 용솟음쳐 올라왔습니다. 마침내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곧 내 눈은 마음의 강력한 명령을 받아 넘쳐흐르는 눈물을 다시 흡수해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눈을 메마르게 하였습니다.(239쪽)” 어머니의 장례를 통곡과 탄식으로 치르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대개 죽은 사람의 불행을 슬퍼하는 것이 상례이겠지만 어머니는 죽었어도 불행이 아니며 완전한 소멸의 고통을 겪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슬픔을 참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억에 대한 저자의 인식은 기억에 관한 많은 연구가 축적되고 있는 현대의 시점에도 보더라도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학문에 의한 기억은 감각을 통하여 직접 경험한 것들을 기억하는 것과는 분명 다른 바가 있다고 적었습니다. 기억 속에는 감각으로 터득할 수 없는 지식이 있다고 한 부분은 조금 더 깊이 있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망각 또한 기억 속에 있다고 한 점 역시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어서 ‘기억 속에 간직되어 있지 않다면 잃은 것을 찾을 수는 없다’라고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지창조에 관한 창세기를 해석하는 것은 관념론적인 접근을 하고 있어 현대에 들어 축적된 과학적 자료를 접했더라면 그의 해석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어떻든 신학적인 해석 부분에 관하여는 저의 앎이 많지 않아 별도로 논하지 않으려 합니다.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아무도 내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물을 때 설명하려 하면, 나는 알지 못합니다(317쪽)“라고 적은 부분을 보면 솔직한 점에 놀라면서도 과연 그와 같은 설명으로 질문에 대한 답이 될까 싶습니다. 기억에 관한 생각들을 정리할 기회가 될 때 다시 읽어 저자의 심오한 뜻을 새겨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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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한 시간관리 인생관리 습관
마크 포스터 지음, 형선호 옮김 / 중앙경제평론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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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대부분 사람들은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너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은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중요해보이지 않은 일에 매달려 있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초단위로 쪼개서 숨 가쁘게 살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느리게 살기가 화두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 시간에 쫓기듯 사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바로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의 <모모; http://blog.joins.com/yang412/13436681>입니다. 회색신사들의 유혹에 빠져 시간의 노예가 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만,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시간에 쫓겨 허덕이고 있는 분이라면 도움이 될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마크 포스터의 <스마트한 시간관리 인생관리 습관>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하고도 놀 수 있는 시간 갖기>라는 원제목이 더 매력적인 이 책의 저자는 시간에 쫓겨 허덕이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놀 줄도 알아야 일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목표 없이 무의미하게 일하는 것보다 목표를 갖고 집중해서 일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시간을 이용하고 남은 시간으로 개인적인 삶을 풍요롭게 하는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우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의 삶을 더 잘 관리할 수 있다는 전제를 세우고, 시간을 관리하는 기법들을 소개하며, 궁극적으로는 기법을 넘어 시간활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깊이 활동’을 소개합니다. 물론 선천적으로 삶을 잘 관리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 관리에 문제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 관리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의 특징을 보면, 충동적이며, 사소한 것들에 얽매이고, 시간관리 시스템이 없거나 나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등등 원인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시간 관리의 핵심 요령은 ‘No라고 말하기’라고 합니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의식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월간 <신동아>에서 ‘차기 대통령에게 바란다’라는 특집에서 저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면 좋겠다”는 의견을 적었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2867378). 민심을 자극하는 인기영합적인 정책을 내놓는 지도자를 경계하고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 대통령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결국 개인의 삶에서 가치가 낮은 활동에는 ‘No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저자는 쉬어가는 페이지에서 동화 한편을 소개합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한 것으로 보아 저자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저자는 동화로부터 시간 관리의 요점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우선순위, 바로 지금 하라, 할 일들의 목록을 만들어라, 미리 시간을 정하라, 자신이 가장 겁내는 것을 제일 먼저하라, 흐름에 따라가라.(75쪽)” 하지만 중요한 것은 원칙을 고집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상황에 맞추어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합니다.

 

삶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저항과 미루기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항이라고 하는 것은 굳어진 습관을 바꾸는 것을 말하고 미루기라는 것은 말 그대로 당장 해야 할 일을 다양한 이유로 미루는 것을 말합니다. 아마도 금연이 저항의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금연에 성공한 사람과는 말도 섞지 말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금연이 어렵다는 것은 습관의 저항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저자는 큰 저항을 무너뜨리기 위한 기법으로 ‘분출’을 들고 있습니다. 저자의 뜻이 정확하게 요약된 단어인지 애매합니다만, 아마도 여러 가지의 일을 섞어서 진행하는데, 일정 시간 단위를 부여하고 일을 마무리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줄여나가는 기법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실전 연습이 필요한 항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분출을 기본 기법으로 하고 깊이 활동을 통하여 심화시키는 것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점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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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0개의 치즈
빌렘 엘스호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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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만, 전공을 살린 사업을 시작해보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시장규모가 엄청나게 커졌지만, 그때만 해도 막 시작할 때였고, 지방에서는 전무한 상황이어서 전망은 밝다고 할 수 있었는데, 결국은 시작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무렵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고, 사업에 대한 경험이 없다는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가보지 않은 길이 되고 말았지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옳다고 지금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을 읽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비교적 벨기에 출신 작가 빌렘 엘스호트의 대표작 <9990개의 치즈>입니다. 평범한 직장인이 우연히 만난 형의 친구의 소개로 사업을, 그것도 무역업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국제 상거래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얼마 전에 읽은 이기찬님의 소설 <무역의 신; http://blog.joins.com/yang412/13688742>에서도 맛을 보았습니다만, 지금 다니는 직장도 사업과는 전혀 무관해서 사업에 관한 경험이라고는 전혀없는 평범한 직장인이 과연 사업을, 그것도 무역사업에 뛰어들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하는 것이 관점인 것 같습니다.

 

조선소에 다니는 우리의 주인공 라르만스는 우연히 형 친구 스혼베커 변호사의 초대로 그의 집에서 열리는 모임에 참석하게 되는데, 그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든든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오가는 이야기의 변두리를 빙빙도는 그가 안쓰러워 보였던지 스혼베커씨는 네덜란드의 치즈회사 사장 호른스트라씨에게 부탁해서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총판권을 따게 해준 것입니다. 라르만스는 덜컥 네덜란드로 가서 호른스트라씨를 만나게 되는데, 첫 만남에서 치즈 20톤을 보내겠다는 제안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치즈는 라르만스씨의 뒤를 따라 바로 도착하게 되는데....

 

정작 우리의 주인공은 치즈를 어떻게 팔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보다 회사이름 정하기, 편지지 도안만들기 사무실 꾸미기에만 바쁩니다. 당연히 화물 탁송회사에 도착한 치즈를 보관할 곳도 마땅치 않아 결국은 탁송회사의 창고에 집어넣고 일부만을 집으로 가져와서, 그때부터 판로를 개척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려 20톤에 달하는 9990개의 치즈를 팔아치워야 하기 때문이죠. 누구나 치즈를 먹기 때문에 파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편하게 생각했던 것이 치명적이었습니다. 당연히 시장조사도 하고, 미리 소매상도 모집을 해야 했던 것이죠. 뒤늦게 대리점을 모집했는데, 적지 않는 대리점 희망자가 나섰지만 그들 역시 치즈판매를 해본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사실 라르만스씨가 사업을 시작했던 것도 의문이었지만, 호른스트라가 라르만스씨에게 치즈 20톤을 덜컥 보낸 것도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분명한 이유가 설명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읽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는데, 스혼베커씨의 저녁모임에 나가면서 허영심이 부풀어오른 라르만스씨의 엉뚱한 해프닝으로 읽혔습니다. 돈키호테적인 도전이 자칫 온 가족을 불행의 늪에 빠트릴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일찍 허황된 꿈을 접는 바람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위안을 삼아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작가 빌렘 엘스호트는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벨기에 작가로 이 작품 역시 1933년에 발표한 <9990개의 치즈>가 대표작으로 소시민적 삶을 그려냈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라르만스씨는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적 차이가 있어 시대적 배경을 다르지만 등장인물들의 면면이나 이야기의 전개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도 주목거리라 하겠습니다. 짧은 분량의 이야기지만 큰 울림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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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7-01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보는 책이고 저자입니다. 관심 가네요.

처음처럼 2015-07-02 20:19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처음 만나는 작가입니다.
최근에 다양한 나라의 문학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는 것은 좋은 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