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프라시압 이야기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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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소천하신 장인어른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누군가 데리러 왔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를 정신의학에서는 대개 환시나 환청으로 해석합니다. 우리 옛 이야기에도 저승사자가 등장하는 것들이 있는데, 어쩌면 이런 이야기는 다른 나라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양입니다. 중국에서는 자신을 데리러 온 저승사자를 속여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동방삭 이야기도 있는데, 저승사자가 등장하는 터키 소설을 만나고 보니, 터키에서도 저승사자 이야기가 전해오는 모양입니다. 에게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이흐산 옥타이 아나르교수의 <에프라시압 이야기>가 바로 저승사자가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죽을 때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승사자를 따라 나서는 모양입니다만, <에프라시압 이야기>에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어 생긴 이야기입니다. 시작은 압툴라흐만이라고 하는 건달이 저승사자와 내기를 걸었는데, 각자 한 사람씩 데리고 와서 편먹고 으뜸패라는 시합을 하는 것입니다. 압툴라흐만은 친구를 데리고 왔고, 저승사자는 자신에 데리고 갈 젯잘 데데라는 노인을 데리고 갑니다. 승부는? 당연히 저승사자가 이겼습니다. 저승사자는 자신과 편먹고 시합을 한 젯잘 데데에게도 같은 기회를 주기로 합니다. 저승사자는 이기기 위한 게임이 아니라 게임 자체가 주는 즐거움 이외에는 그 어떤 목적, 규칙 그리고 조건이 없는 게임을 제안합니다. 한 가지 주제를 정하고 서로에게 이야기를 해주기로 말입니다. 이야기 한편 당 한 시간의 목숨을 더해주기로 합니다. 이야기는 저승사자가 데려가야 할 우준 이흐산(키큰 이흐산이라는 뜻이랍니다)을 붙잡을 때까지 이어가게 되는데, 문제는 우준 이흐산이 신출귀몰하게도 저승사자의 코 앞에서 사라지기 일쑤인 것입니다. 당연히 이야기는 첫 번째 주제인 공포에서 시작하여 종교, 사랑, 천국으로 바뀌어갑니다. 저승사자와 젯잘 데데가 한 꼭지씩 이야기를 내놓기로 했으니,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무려 여덟 꼭지가 이어지는 셈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여덟 꼭지의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패러디, 상호텍스트성 등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학적 기법들을 통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옮긴이는 작가에게 있어 죽음이라는 존재는 마치 내기를 좋아하는 변덕스러우면서, 감정이 봉인된 채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존재로 이해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사실 저승사자가 젯잘 데데에게 이야기하기라는 게임을 제안한 것도 젯잘 데데가 손자들을 앉혀놓고 옛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나톨리아 마을에 사는 아이들의 밤이 아주 길고, 아주 재미있고, 약간은 ‘소름 끼치게’ 지나가는 이유 중 하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들여주는 정령과 요정 이야기들 때문이다(51쪽)”라고 적은 것을 보면 터키 사람들 사는 모습이 우리네와 참 닮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렸을 적에 집에 큰 고모께서 놀러 오시면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대던 기억이 있습니다. 첫 번째 주제, 공포에 관하여 젯잘 데데가 죽음의 사자에게 전한 이야기는 손으로 만지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바꾸는 재주를 가진 비다즈왕을 되살리는 이야기인데, 그리고 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다스왕과 겹치는 이미지입니다. 터키가 그리스와 붙어 있어 옛 이야기까지도 공유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을 주제로 이야기를 마쳤을 때, 저승사자와 젯잘 데데의 생각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랑만으로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지만, 열망하며, 열의를 가지고 노력하면 이루어지곤 하지요. 난 사랑을 가슴에 담고 있는 한 그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오(243쪽)’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젯잘 데데를 읽으면서 저 자신은 사람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지 돌아보게 되면서 아쉬움이 남는 듯합니다.

 

천국의 이야기까지 마쳤을 때, 젯잘 데데를 뒤쫓던 손자들을 등장하게 되고, 저승사자는 젯잘 데대와 손자들에게 마지막 게임을 제안합니다. 자신을 웃게 만들면 젯잘 데데를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이 게임은 어떻게 끝이 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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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실재론 과학문화연구 6
정광수 지음 / 이담북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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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학생 때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탓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과학의 정수에는 이르지 못하고 그저 겉껍데기만 핥는 정도였다고 하겠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보려 노력하고 있는 가운데 관심을 두어왔던 과학의 본질에 관한 관심도 커지고 있습니다. 과학철학에 대한 연구를 하시는 정광수교수님의 <과학적 실재론>을 읽게 된 것도 저의 관심이 확대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 이론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즉, 완벽한 이론은 없다는 것이겠지요. 결국은 우리가 관찰해온 자연현상들을 가장 잘 설명하는 이론이 살아남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새로운 이론이 나오게 되면 기존의 이론은 쓸쓸하게 퇴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퇴장하는 이론을 세웠던 분을 격하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만큼 인류에 공헌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적 실재론>은 과학 영역의 이론이 설명하는 대상들이 실재하는가 혹은 설명력 또는 예측력을 가지는 훌륭한 이론들은 옳다고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과학 이론의 인식적 격위’라는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 주제에 관하여 과학적 실재론자(scientific realist)와 반실재론자(antirealist)-여기에는 도구주의자, 구성주의자, 약정주의자 등이 포함됨-가 이론과 이론적 용어들에 대한 ‘해석’의 수준과 훌륭한 이론의 진리성과 이론적 대상의 실제성의 정당화에 대한 지식론적 수준에서 토론하고 있다고 합니다.

 

과학적 실재론을 거슬러 올라가면 2세기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에 이른다고 합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가 운동한다고 설명하는 지구-중심 천문학체계를 세웠고, 이 이론은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 천문학체계가 나올 때까지 확고한 위치를 지켰습니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문학자는 현상들을 잘 설명하는 수학적 모델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 될 뿐, 행성들의 실제 운동에 관한 이론을 제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수학적 모델은 행성의 실재 운동에 관한 옳고 그름을 설명하는 것보다는 단지 계산 장치, 즉 지적 도구일 뿐이라고 주장하여 과학적 실재론의 시조라고 할 만하답니다.

 

<과학적 실재론>의 목차를 보면, 1. 과학 이론의 인식적 격위, 2.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전통적 정당화, 3. 반 프라센의 지식론적 반실재론, 4. 해킹의 실험 실재론, 5. 해킹 실재론에 대한 비판과 대응 등의 순서로 되어 있어, 실재론과 반실재론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즉, 실재론과 반실재론의 격돌하는 상황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물론 다음과 같은 부분은 반실재론으로 기우는 느낌도 있습니다. “한 이론이 최선의 설명 이론이라는 사실은 그 이론이 (근사적으로) 옳다는 신념을 위한 충분한 근거가 아니고, 한 종류의 이론적 대상들이 최선의 설명의 것이라는 사실도 그것들이 실재한다는 신념을 위한 근거는 아니다. 그래서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리’에 근거한 일부 과학적 실재론자들의 과학적 실재론에 대한 정당화는 설득력이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35쪽)”

 

반실재론자인 반 프라센의 경우는 이론적 대상들이 관찰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실재하는가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Seeing is believing’이라는 옛 경구에 따르는 셈인데, 저 또한 일정 범위에서는 옳은 입장이라는 생각입니다. 심지어 반 프라센은 어떤 도구의 도움 없이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감각기관을 통하여 느끼는 과정이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면 도구의 사용 여부를 부정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하여 해킹은 반 프라센의 근본 입장이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면서 실재론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맨눈으로 볼 수 없는 어떤 대상을 우리가 현미경을 통하여 관찰할 수 있다면 실재를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인 것입니다. 해킹의 실재론은 대상실재론에서 실험실재론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즉 실험적 과정을 통하여 존재가 입증된다는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의 설명력 또는 예측력은 이론적 대상의 실재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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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독해져라 - 현실에 흔들리는 남녀관계를 위한 김진애 박사의 사랑 훈련법
김진애 지음 / 다산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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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로 또 국회의원으로 유명한 김진애박사가 사랑을 주제로 한 책을 냈다고 하여 놀랐습니다.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이지만, 공부와 건축에 관한 책을 주로 내온 분이 사랑을 이야기한다 해서 조금은 쌩뚱 맞아 보였다고 할까요? “‘사랑에 대한 책을 쓰겠다!’고 하니까 반응이 묘했다”라고 서문을 열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런 생각은 저만의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저야 매스컴을 통하여 얻어 듣는 수준이라서 사정은 잘 모릅니다만, 김진애박사를 싱글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꽤나 있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결혼을 하셨고, 금슬도 남다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관한 저자의 철학은 우리네 전통과는 달리 쿨한 듯합니다. 그래서 사랑도 현실의 범위에서... 즉 ‘생지옥 같은 괴로움 속에서 살지는 말자’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 생지옥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생지옥에서 살지 말고, 사랑에 대한 집착 때문에 생지옥에서 살지도 말고, 겁이 나서 사랑을 피하는 생지옥에서 살지도 말고, 사랑이 끝날까 봐 두려워하는 생지옥에서 살지도 말자. 알면서도 생지옥에 빠지지 말고, 생지옥인지도 모른 채 남아 있지 말고, 헤어 나올 방법을 알면서도 빠져나올 용기가 없어서 생지옥에 남아 있지도 말자.(10쪽)” 그리고 보면 생지옥의 종류도 참 다양한 것 같습니다.

 

<사랑에 독해져라>라고 주문하면서도 자신만의 사랑론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 여정을 여섯 단계로 구분하였는데, 첫째 장에서는 사랑이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늠해보고, 두째 장에서는 ‘이 사람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가져보라고 합니다. 셋째 장에서는 ‘헤어지는 법’에 대한 공감을 다루는데, 헤어짐도 사랑의 한 과정으로 이해한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넷째 장에서는 진흙탕 같은 현실 속에서 남녀관계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여덟 가지 훈련방식을 설명합니다. 이쯤 되면 관전 포인트가 달라지는 데, 쿨한 듯 하면서도 전투적 사랑을 시사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다섯째 장에서는 ‘남녀관계가 흔들릴 때’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논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여섯째 장에서는 ‘사랑의 로망’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고 합니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영국 작가 줄리언 반스의 소설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를 읽으면서였다고 합니다. 아내의 죽음을 붙들고 있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절절하게 묘사하는 내용을 읽으면서 ‘진정 사랑한다면 사랑을 내려놓을 수도 있어야 한다’는 한줄 평을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갑자기 아내를 잃은 중년 남자의 텅 비어가는 내면이 참 아름답다고 보았다고 하니, 같은 책을 읽고 얻는 느낌이 사람마다 참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책의 구조를 뜯어보면 요약을 잘하는 범생이 다운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2장에서 내 짝을 변별하기 위하여 관계의 바닥선을 판단하기 위하여, 섹스, 스킨십, 돈, 살림, 말, 지혜, 시간 그리고 공간 등 8가지의 기준을 제시하면서 설명합니다. 그리고 남녀관계도 꾸준한 훈련을 통하여 만들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역시 여덟 가지의 훈련법을 제시합니다. 훈련 방법의 제목이 길어서 일일이 예를 들기가 조금 뭐해서 하나만 예를 들면, 시사와 드라마에 일가견을 가지라는 주문입니다. 저도 드라마를 즐겨 봅니다만, 책에서 드라마를 인용하는 것과 책의 내용을 인용하는 것은 읽는 이의 이해를 돕는데 있어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든 저자께서 드라마, 영화, 소설 등 장르 구분 없이 광범위하게 관련 자료를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엄청 바쁘신 분께서 참 다양한 분야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용자료의 확인이 필요한 부분도 있습니다. 저자가 고등학생 시절에 읽었던 소설의 한 장면에 대한 해석입니다. “어스름한 석양 무렵에 집집마다 따뜻한 불이 켜지며 저녁 식사가 시작되는 시간에 남의 집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밝은 빛 속에 펼쳐지는 단란한 가족의 장면을 한 남자가 바라보면서 부러워하는 감정과 회피하려는 감정을 동시에 오가는 장면이었다.(117쪽)” 오래 전 기억이 분명치 않아서 인 듯 합니다만, 장면의 설명으로 추론해 보건데 알프레드 테니슨의 작품 <이노크 아든>의 한 장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배를 타고 나갔다고 조난된 선원이 오랜 세월이 지나 고향에 돌아왔지만, 남편이 죽은 줄 알았던 아내는 재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렸고, 그 모습을 바라본 남편은 아내의 행복을 위해 돌아선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떻든 저자가 멜로보다는 로코를 좋아하는 편이라는 점이 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생각의 차이가 분명하다는 느낌이 남았습니다. 독하게 사랑하라는 제목은 더 근사하게 사랑하라는 이야기를 반어적으로 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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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짐에 대하여
장 보드리야르 지음, 하태환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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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장인어른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지난 해 여름에는 어머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는데 망극할 일이 잇달아 생기고 보니 요즘 젊은이들 말대로라면 정신줄을 놓게 생겼습니다. 사람이 영생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세상을 뜨기 마련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것은 태어나는 것과는 달리 순서가 따로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더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막상 죽을 때가 되면 ‘조금 더 살 수 있다면 좋겠다’라는 말씀을 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오래 전부터 죽음에 대한 공부를 해오고 있습니다. 저 역시 아직까지도 자신은 없습니다만 죽음을 담담하게 맞을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장 보드리야르의 <사라짐에 대하여>도 죽음에 대한 저의 앎을 더하기 위한 책읽기입니다. 보드리야르는 모든 사물의 죽음, 즉 사라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물이라 하면 생명을 가진 생물은 물론 유무형의 무생물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장 보드리야르는 프랑스의 대표적 사상가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큰 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아 그의 지적 전통에 충실하였다고 하며, 시뮬라시옹(가장, 위장) 이론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 이론은 실재가 실재가 아닌 것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흔히 영화 <매트릭스>에서 보는 가상현실을 예로 들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우리의 역사를 역사책보다는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더 실감하는 경향이 있다는평가를 들어 설명해보려 합니다. 드라마나 영화는 흥행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극적인 상황을 설정하기도 하는데, 이런 작업들이 때로는 역사를 왜곡한다는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결국 드라마나 영화를 본 젊은이들은 역사책보다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장면이 각인되면서 학습효과를 높이게 되고, 결국은 왜곡된 역사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실재(實在)했던 과거가 실재(實在)하지 않은 가상의 과거로 대치되어 굳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뮬라시옹이론은 이렇게 현실과 가상의 관계가 전복된 현상에 주목하여 탄생한 것입니다. 보드리야르는 원본에 대한 복제를 의미하는 시뮬라크르와 그것을 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시뮬라시옹의 두 가지 개념으로 이러한 현상을 설명합니다. 우리가 매일 부딪히는 현실은 바로 시뮬라시옹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시뮬라크르의 세계라는 것이 보드리야르의 세계관입니다.

 

<사라짐에 대하여>는 시뮬라크르의 세계가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사유를 담고 있습니다. 100쪽이 채 안 되는 얇은 두께에다가 한쪽은 디지털 이미지를 나타내는 기호로 가득 차 있어서 금세 읽을 것 같지만, 막상 읽다보면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프랑수와 리보네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는 마태복음 25장 29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공허의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보드리야르가 말하려는 ‘사라짐이란 결국 사라져 비어버림’이란 공허라는 개념을 새롭게 하려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드리야르는 ‘왜 모든 것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가?’라는 물음을 두고, “내가 시간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아직 없으며 / 한 장소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사라져 버렸고 / 한 인간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이미 사망했으며 / 시절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13쪽)라는 알쏭달쏭한 말로 ‘사라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렇기에 보드리야르가 공허의 한계를 더 멀리 밀어내고 공허의 실체를 밝히면서 공허가 인생에서 본질이라고 한 것을 리보네는 지적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공허’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반야심경에 나오는 色卽是空 空卽是色(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구절이 떠오릅니다. 이 구절은 ‘사리불이여! 물질적 형상으로 나타나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텅 빈 본질세계와 다르지 않고, 텅 빈 그 본질 세계 또한 눈에 보이는 물질적 형상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물질적 형상의 세계는 곧 텅 빈 본질세계이며, 텅 빈 본질세계는 곧 물질적 형상의 세계인 것이다.’라고 새기는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라는 말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주의 본질이 비어있는 듯 채워져 있다는 불교의 인식이 최근 들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는 것이 놀랍다는 생각을 하면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사상 역시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중생은 끊임없이 삼계 육도(三界六道)를 돌고 돌며 생사를 거듭한다’라고 보는 윤회사상(輪廻思想)은 우리는 어느 한 시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은 업(業)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삶을 돌아가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과학의 발전에 의하여 밝혀진 바에 따르면, 생명체는 종에 따른 특별한 유전자 구성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죽은 다음에는 그 생명체의 특징이 발현되도록 했던 유전자 역시 단위 원소로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렇게 자연으로 돌아간 원소들은 다른 생명체를 규정하는 유전자를 구성하는 요소로 재조합되는 것이니 바로 결국 윤회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만 과학에서는 불교의 윤회사상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업(業)의 본질을 아직 규명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보드리야르는 인간이 사라져 버린 세상을 예언합니다. 자연의 고갈, 종의 멸종은 물리적 과정이거나 자연적 현상일 따름이기에 인간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보드리야르의 생각에는 인류의 폭발적 증가로 인하여 지구의 부존자원의 고갈이나, 혹은 지구환경의 오염 때문일 것이라는 환경보호론자들의 주장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마치 이런 운명(인류의 잠재적 사라짐)이 어딘가에 프로그램화 되어 있고, 우리는 이 프로그램의 장기적 집행자에 불과한 것(23쪽)”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세포가 자체 파괴를 하도록 미리 프로그램된 과정, 즉 아포토시스를 떠올리게 한다’라고 는 주석을 달아놓은 것을 보면 인류의 사라짐 역시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이상 짊어져야 할 숙명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합니다. 다만 그 설명으로 가져온 아포토시스는 개체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개체의 특성을 인류라고 하는 거대한 생물종의 집단의 특성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라져야 할 인간의 숙명은 인간이 세상을 분석하고 변형하려고 하면서 세상과 작별하고 동시에 세상에 현실성의 힘을 주기 시작한 것이라고 저자는 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인류는 자연법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특별한 사라짐의 방식을 새롭게 승화시킨 유일한 종이라고 규정합니다. 역설적으로 세상이 존재함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세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언젠가 미래에는 인간 역시 지구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점에 주목하였습니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인간이 사라지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이 저지른 무엇 때문일 수밖에 없기 입니다.

 

보드리야르는 사라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사라짐으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는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술을 비롯하여 제도, 가치, 금기, 이데올로기, 신념 등은 사라졌으면서도 암암리에 남아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 이르게 되면 앞서 말씀드린 시뮬라시옹을 행할 주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더 이상의 시뮬라크르는 만들어지지 않게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실재가 실재하지 않은 상황에서 영원성을 얻은 시뮬라크르에게 과연 특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이어서 사라질 운명을 가진 인간이 창조해낸 예술 역시 사라진다는 숙명을 피할 길이 없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예술 자체도 현대에는 그 사라짐의 기초 위에서만 존재한다.(29쪽)”라고 정의합니다. 그런데 예술은 사라진 다음에도 살아있는 모든 것의 패러다임이 되는데, 예술의 사라짐을 연기하는 사람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뮬라시옹이론에 따르면 온갖 형태의 가상현실 뒤로 현실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형태로서의 사라짐에 특정한 목적이나 목표를 부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시뮬라크르로 재탄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실제적인 것과 그 사라짐과 우리의 관계가 매우 모호하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자는 디지털 이미지의 운명으로 주제를 옮깁니다. 아날로그적 이미지가 디지털 기술로 대치되면서 놀랍도록 간편하게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지만, 결국 아날로그적인 이미지는 영원하게 파멸을 맞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디지털화가 진행될수록 필름, 즉 사물이 음화로 기입되던 그 민감한 표면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될 것이고, 이미지를 촬영하고 재생하고 합성할 수 있는 이미지 소프트웨어 패키지만 남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사진을 잘 모릅니다만, 사진에 조예를 가지고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날로그 사진은 분명 디지털 사진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특장을 가지고 있어 전문가의 입장에서는 아날로그 방식을 결코 버릴 수는 없다고 합니다. 간편성이나 시간적 요소에서는 강점이 있지만 사진을 찍는 행위를 비롯하여 정밀성에서는 여전히 아날로그방식이 우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디지털 이미지 기술이 가져온 폭력성의 하나로 저자는 컴퓨터 합성 이미지의 폐해를 들었습니다. 디지털 이미지는 원본적 매체로서의 사진을 사라지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아나로그 이미지가 음화를 바탕으로 하여 다양하게 표현되는 것과는 달리 디지털 이미지의 원본이란 쉽게 사라질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자매체를 통하여 광속도로 확산될 수 도 있어 원본을 확인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디지털 이미지가 엄청난 자가증식을 통해 확산되면 그것은 더 이상 이미지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미지 죽이기의 일부가 되어 정보적 가치가 전혀 없는 상황에 이를 것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이는 주인이어야 하고, 고유의 상징적 공간을 가져야 하는 이미지의 주권에 가해지는 폭력이라고 했습니다. 사진적 행위의 디지털 자유화 속에 기술적 중재 이외에 아무런 다른 중재행위가 없는 탈인간화가 가속되다보면, 적어도 이미지의 영역에서는 인공 지능과 등가물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저자는 인간이 이룩한 기술적 발전은 궁극적으로 기술적 헤게모니의 전이를 예견했습니다. “인간 본연의 의미가 자신의 가능성의 극단에까지 가지 않는 것이라면, 기술의 본질은 자신의 가능성을 소진하고 훨씬 멀리까지 간다. 따라서 기술은 자신과 인간 사이에 결정적인 구분선을 긋고, 결국에는 인간에게 반대하는 끝없는 가능성을 전개하고, 조만간 인간의 사라짐을 초래할 것이다.(21쪽)” 인간의 지능과 비교될 수 있는 인공지능의 탄생을 예견한 듯합니다. 이로부터 저자는 그 기계가 완전히 자율적으로 움직이게 되면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죽음의 대가로만 존재하게 될 수도 있음을 이끌어내고 우려합니다. 즉, “기계 속에 인간의 모든 지능이 탑재되고, 그 기계가 완전히 자율적으로 움직이게 되면, 인간은 오직 자신의 죽음의 대가로만 존재하게 된다. 인간은 오직 기술적 사라짐의 대가로만, 디지털 질서 속에 새겨지는 대가로만 불사(不死)가 된다(81쪽)”라고 하였습니다. 존재하지 않으면서 영생을 얻는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지 역시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는 ‘모든 것은 사라지게 되어 있는가?’라는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을 피하려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인류적 혁명을 통하여 현재의 ‘디지털 혁명’과는 정확히 반대의 것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이와 같은 혁명이 고려된 적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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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눈뜨게 한 삶
김성찬 / 책만드는집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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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환자 진료를 전공하신 선생님 가운데 자신도 암으로 죽음을 맞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급성심근경색증이나 뇌졸중과 같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면 죽음을 준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게 될 것을 두려워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다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최근에 세상을 떠나신 장인어른께서는 말기암으로 진단을 받으시고도 거의 3년 가까이 투병을 해오셨습니다. 그 가운데 적어도 2년 이상은 비교적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셨는데, 3년째 들어 체력이 떨어지면서 생긴 폐렴을 극복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3년 가까운 시간을 버텨오셨다면 주변을 잘 정리하셨을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돌아가신 다음에 보니 그렇지 않은 면도 있고, 또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조금 더 사실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곤 해서 역시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처음 암에 걸리셨다는 사실을 알린 것도 저이고 보면 암치료는 씩씩하게 잘 받아오셨을 뿐 아니라 돌아가시기 전에는 대세도 받으시고,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만나보셨다고 해서 나름대로는 행복한 죽음을 맞으셨을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다만 오늘 읽은 <죽음이 눈뜨게 한 삶>을 진즉 권해드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말기암환자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으로는 거의 정답에 가깝다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눈뜨게 한 삶>은 저와 갑장인 저자가 2006년 8월 말기대장암으로 진단을 받고 힘겹게 투병을 하면서 체감한 투병경험을 진솔하게 담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분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제목들을 보면 암과의 싸움도 결국은 스스로를 어떻게 다스리는가 하는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마무리를 위한 시작, 죽는 연습, 지금 이 순간에 살기, 밝은 마음으로 살기, 느린 마음 갖기, 죽은 것처럼 살기, ‘나’에게서 벗어나기, 좋은 말 하기, 명상하기, 사랑이 으뜸, 끊임없이 수행하기, 감사하는 마음 갖기, 종교적인 삶 등 투병과정에서 느낀 점을 28개의 화두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는데, 모든 내용이 마음에 절절하게 와 닿는 내용들입니다. 그 내용들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람은 항상 죽는 연습을 하여 내일 당장 죽더라도 아무런 여한 없이 죽을 수 있어야 한다.(25쪽)’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죽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죽는 연습은 밝고 평온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삶에 대한 집착이나 미련과 근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태어난 저자는 어려운 환경에서 상업고등학교를 나와 일찍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야간에 법대과정을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했는데, 얼마 전까지와는 달리 합격자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저자가 살아온 길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연수원을 거쳐 검사로 재직하면서도 다양한 도시를 돌면서 일이 우선이던 세월을 살아냈던 것입니다. 힘든 세월을 살아온 끝에 찾아온 불청객이 암이었으니 왠만한 사람이라면 ‘왜 내가 이런 불행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불만이 폭발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내 스스로를 추슬러 암과의 싸움을 시작하여 잘 버텨왔던 것 같습니다. 모두가 마음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종교를 가졌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모든 종교에서 얻을 수 있는 좋은 면들을 모아 삶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책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책읽기’와 ‘글쓰기’가 마음공부에 큰 몫을 해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책읽기는 새겨 읽으면서 글에 담은 저자의 생각을 사색하가면서 읽어야 참뜻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기 때문에 정독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또한 글쓰기는 명상이 곁들여지는 효과와 함께 생각한 것을 실천에 옮기는 힘을 가지게 되는 등 다양한 효과를 가지더라는 경험적인 말씀이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고요한 마음, 즉 평정심을 유지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말기암환자는 검사결과에 일희일비하거나 치료성적에 예민해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면 치료효과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암질환이 치명적이던 시절에서 이제는 만성질환의 하나로 치부하는 시설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쉽지 않은 상대인 것도 사실입니다. 암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나 그 가족들, 혹은 암에 걸릴 것을 두려워하는 분들에게는 좋은 참고서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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