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세계를 삼키다 - 작지만 강한 한국 중소기업의 성공 DNA
진병호 외 지음 / 이담북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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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현대와 같은 글로벌 기업이 등장하였지만, 탄탄한 중소기업이 뒷받침하지 못하면 빛 좋은 개살구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취업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이 그저 대기업만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만, 탄탄한 중소기업이 많으면 좋은 취직자리도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기업은 취업인력의 15%만을 고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85%는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로벌 강소기업의 중요성이 누누이 강조되고 있지만, 글로벌 강소기업을 일구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알려주는 책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브랜드, 세계를 삼키다>는 중소기업의 국제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힘을 모아 정리한 강소기업을 일구는 길을 안내합니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강소기업의 사례를 분석하여 성공요인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방법을 채택한 저자들은 국내 중소기업들 가운데 자사 브랜드를 가지고 해외진출에 성공한 13개의 강소기업을 골라 그들이 걸어온 길을 분석하였습니다. 기존의 자료와의 차별점으로는 첫째, 소비재 분야에서 자사 브랜드를 수출하는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입니다. 둘째, 사례분석을 통하여 실제적인 시사점을 도출해냈다는 점입니다. 셋째, 회사의 공식적인 자료는 물론 회사의 핵심인사를 대상으로 한 인터뷰를 통하여 수집한 자료까지 포함하였다는 점입니다. 저자들은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글로벌경쟁력을 제고하고 청년 일자리의 창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담아내려고 노력했다고 하였습니다.

 

저자들의 연구대상이 된 글로벌 강소기업들은 우리나라에서 중소기업을 하는 사람들이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생각의 틀을 뛰어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실행전략에 있어서는 차별점들이 있었는데, 실행전략에 따라 점진 성공형, 마케팅 승부형, 금의환향형, 다품종 소량생산형, 일인 벤처형 등 다섯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점진 성공형은 해외 또는 국내 대기업에 OEM방식으로 남품하는 형식으로 출발하여 자사 브랜드를 개발하는 단계로 이행하여 이제는 국내판매보다는 해외매출이 더 많은 회사들입니다. 마케팅 승부형은 OEM방식을 건너뛰어 자사 브랜드를 가지고 국내에서 인지도를 쌓은 다음 해외시장에 진출하는 경우로 활발한 마케팅으로 해외인지도를 높여나간 회사들입니다. 금의환향형은 자사 브랜드가 국내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여 고전을 하는 바람에 눈을 해외로 돌려 성공을 거둔 다음에 거꾸로 국내시장을 장악하게 된 회사들입니다. 다품종 소량생산형은 다양한 해외 바이어의 입맛을 맞추기 위하여 디자인, 수량, 납기 등을 조절하는 발빠른 전략이 성공을 거둔 회사들입니다. 일인 벤처형은 독특한 사례로서 독특한 디자인으로 해외바이어의 관심을 끌게 된 브랜드를 하청을 통하여 생산하여 공급하는 방식으로 최소의 인원으로 해외주문에 응하고 있는 회사입니다.

 

13개 개별회사들의 연혁으로부터 창업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발전과정, 해외진출의 계기와 전략 등을 상세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난관을 어떻게 돌파하였는지에 관한 내용들은 관계자의 인터뷰를 통하여 생생하게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였습니다. 개별 사례를 통하여 차별점들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한 다음, 말미에는 이들 기업의 공통점을 정리하였습니다. 13개 기업의 사례에서 추출한 성공요인으로는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확실한 제품력, 과감한 연구개발, 틈새시장 공략, 정직과 신뢰,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적극적인 마케팅 등으로 요약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사 브랜드를 가지고 해외시장에 진출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진 분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제언을 더하였습니다. 세상은 넓다. 분명이 우리 제품을 팔 시장이 존재한다는 적극적인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넓은 만큼 시장이 다양하기 때문에 시장에 따라 차별화된 공략법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제품별로 다른 전략을 세워야 하며, 단숨에 승부를 내기보다는 긴 호흡으로 실력으로 승부를 내려는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독특한 아이디어로 세계시장에 진출하려는 아이디어를 가진 사업가에게는 좋은 참고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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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상처가 더 아프다 - 유독 마음을 잘 다치는 나에게 필요한 심리 처방
최명기 지음 / 알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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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전문의가 된 다음 미국으로 건너가 경영학을 공부한 특이한 경력을 가진 최명기원장님은 필력도 대단하셔서 매년 한 권의 책을 내겠다는 목표를 실천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무엇이 당신을 일하게 만드는가; http://blog.joins.com/yang412/13093962>와 <내 몸은 내가 지킨다; http://blog.joins.com/yang412/13073430>를 읽으면서 대단하다는 느낌과 함께 책을 이렇게 써야한다는 것을 배우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읽었던 두 종류의 책들은 심리에 관한 내용과 보건의료 정책에 관한 에세이였는데, 이번에는 전공을 살려 본격적인 심리치료에 관한 책을 냈다고 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작은 상처가 더 아프다>는 누구나 금방 공감하는 내용을 특유의 쉽게 읽히는 필치로 설명합니다.

 

요즘은 쉽게 만날 수 없습니다만, 옛날에는 프로권투가 대중들의 사랑을 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권투시합을 구경하다보면 잽을 자주 던져야 한다는 해설을 듣게 됩니다. 큰 펀치 한방에 넉다운이 되는 것을 보기에는 시원하지만, 쉽게 만날 수가 없는데, 오히려 잔펀치를 맞다보면 가벼워 보이는 한 방에 넉다운되는 경우를 보기도 합니다. 잔매에 장사 없다는 우리 옛말이 꼭 맞아 떨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사람 사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 한 마디에 마음이 크게 상하는 경우를 경험하게 되니 말입니다. 그래서 작은 상처가 왜 더 아픈지, 작은 상처를 입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정리해냈습니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가랑비에 옷젖는 줄 모른다고 작은 상처가 쌓이면 큰 상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작은 상처는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작은 상처를 이기는 방법을 3단계로 구성하였습니다. 우선 왜 나만 상처를 받는지 파악하는 단계입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주변의 변화를 특히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쉽게 상처를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그런 형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은 왜 그러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의 성격은 물론 심리까지도 파악하여 적절하게 대응해야 나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차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구체적인 전략을 짜는 것인데, 우선은 스스로를 변화시켜 정신적으로 무장하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의도적으로 혹은 무심결에 던지는 도전을 마음에 담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의 도전에 단호하게 대응하여 나를 다시 보도록 만드는 것도 좋은 전략이라고 합니다.

 

작은 상처에 대응하는 방법을 3단계로 구분한 것처럼 ‘1부 왜 나만 상처받을까’ 쉽게 상처를 받는 사람들의 전형을 7가지로 정리하였습니다. ‘2부 왜 너는 상처를 줄까’에서는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의 전형을 6가지로 정리하였고, ‘3부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에서는 작은 상처도 허용하지 않는 비법 6가지를 소개합니다. 모두 19개의 장에는 전형적인 상담사례를 먼저 소개하여 자신의 모습과 비교해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일종의 진단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1부와 2부에서도 구체적인 대응방법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사례는 물론 저자의 설명을 읽다보면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그만큼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순간들을 잘 포착하여 글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들 같으면 대범하게 넘길 수 있는 상황임에도 상처를 쉽게 받는 사람에게 스스로를 진단하고, 자주 상처를 주는 상대방을 파악하여 맞춤형 대응방안을 안내하는 좋은 참고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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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학교 | 섹스 - 섹스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는 법 인생학교 1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미나 옮김 / 쌤앤파커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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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순탄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누구나 한번쯤은 고민하는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던 간에 말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삶의 궤도를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큰 경우도 있겠고, 찻잔 속의 태풍처럼 금세 수습될 정도로 작은 경우도 있겠습니다. 물론 남이 보기에는 별게 아닌 문제라고 해도 정작 문제를 안고 있는 본인으로서는 심각한데 어디에 하소연할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문제를 의논하고 나름대로의 해답을 얻었지만, 요즈음에는 그런 문제를 일정한 범주로 나누어 포괄적으로 다루는 방식의 프로그램으로 개발하여 대중화시켜 관심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알랭 드 보통의 <인생학교 섹스>는 2008년 영국에서 처음 문을 연 ‘인생학교’ 프로젝트에서 다룬 돈, 일, 섹스, 정신, 세상, 시간 등 여섯 가지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배움을 다시 삶의 한가운데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인생학교’는 삶의 의미와 살아가는 기술에 대한 강연과 토론, 커뮤니티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글로벌 프로젝트라고 합니다. 이 시대의 뛰어난 저술가들이 개별 주제를 맡고 있는데, 인생학교의 창립멤버인 로먼 크르즈나릭교수가 ‘일’을, 심리치료사이자 작가인 필립파 페리가 ‘정신’을,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존 폴 플린토프가 ‘세상’을, 철학자이자 미술사가인 존 암스트롱교수가 ‘돈’을, 작가이자 시사평론가인 톰 체트필드가 ‘시간’을, 그리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알랭 드 보통이 ‘섹스’를 맡고 있습니다.

 

살만큼 산편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다른 주제들은 별로 당기지 않는 반면 <인생학교 섹스>는 저자의 유명세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이와 무관하게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라고 하겠습니다. 지금은 별별 책들이 서점의 판매대에 올려지고 있습니다만, 제가 자랄 무렵 만해도 어떤 경로로 팔리는지 분명치 않은 책들이 있었습니다. 주로 성이나 이념에 관한 책들이었는데, 요즘에는 이런 책들을 빨간책이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이재익 등 지음, 빨간책, 시공사, 2015년; http://blog.joins.com/yang412/13668551) 알랭 드 보통의 <인생학교 섹스>도 시절을 잘 만나 서점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만, 그 옛날 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인생학교 섹스>에는 ‘섹스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는 법’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들어가는 글과 맺음말을 제외하면 이 책은 섹스의 기쁨과 골칫거리에 관한 이야기로 나뉘어 있습니다. ‘정상적’이라는 용어의 정의가 어떻게 되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저자는 ‘톡 까놓고’ 말해서, “섹스에 관한 한 조금이라도 ‘정상적인 ’사람은 거의 없다(18쪽)”라고 단정합니다. 이렇듯 섹스에 관해 스스로를 비정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성생활의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작금의 상황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고 합니다. 성에 관한한 개방적이라고 생각하는 유럽에서도 성생활의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하지 못한다고 하니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성적 취향’이라는 화제는 누군가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를 희망하는 사람이라면 공공연한 화제로 삼기에는 여전히 껄끄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섹스의 요령에 관한 것보다는 스스로 섹스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고통을 편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논하려고 한다고 방향을 제시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섹스의 기교문제가 아니라, 에로티시즘과 외로움, ‘섹시함’은 심오해질 수 있는가, 나탈리냐 스칼렛이냐 등의 제목으로 구성된 ‘섹스의 기쁨’편 역시 또 다른 시각에서의 섹스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논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결국은 잘 어울리는 짝을 만나 후손을 퍼트리려는 욕망을 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잘 어울리는 짝을 만나는 일이 사실은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견딜 수 있는 범위에서 스스로의 욕망과 타협을 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부분은 종족을 발전시킬 특정 요소의 상징에 불과하다’라는 진화생물학적 관점에 대하여 수긍할 수 있는 점도 있지만, 특정한 사람과 섹스를 하고 싶어지는 의식적 동기에 대해서는 납득할만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언제 어디서나 예의바르게 행동할 것을 끊임없이 강요받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공격성, 무분별함, 탐욕, 경멸 등 우리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악한’ 본성을 억눌러야만 남들의 관심과 애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즉, 주위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면에 감춘 내밀한 욕망을 드러내서 상대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는 과정이야말로 관계의 완성에 이르기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서로를 탐색하면서 거리를 좁혀가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관계를 맺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진화생물학적 이유 외에도 “섹스를 통하여 얻는 쾌감은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과정, 그리고 행복한 삶의 요소들을 인정하고 확실히 받아들이는 과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67쪽)”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섹스 후에 비참한 기분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섹스와 일상의 격차로 인한 심리적 문제 때문이라 것입니다. 성욕이 수그러들고 나면, 방금 전까지 황홀했던 자신이 어쩔 줄 모를 만큼 부끄럽고 낯선 느낌이 남기도 합니다. 섹스는 특유의 다정함, 격렬함, 열정, 쾌락이 지배하는 반면, 삶의 일상적인 측면들은 반복, 지루함, 억압, 어려움, 냉담함으로 가득해서, 이 둘 사이의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특정한 사람과 섹스를 하고 싶어지는 의식적 동기, 즉 성적 취향은 진화생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저자는 성적 취향에 심리적 내력이 간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독일의 미술사학자 빌헬름 보링거의 <추상과 감정이입>이론을 인용하였습니다. 보링거에 따르면 우리는 누구나 성장하면서 내면의 무언가가 결여되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결함이 미술작품을 감상할 때 호감 혹은 반감의 취향을 좌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보링거의 이론에 따라 94쪽과 95쪽에 아그네스 마틴의 「우정(1963년작)」과 카라바조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1599년작)」를 나누어 싣고 독자의 뜻을 물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아름다운 걸작이지만 사람에 따라 둘 중 한쪽에 유독 마음이 끌린다. 유독 한쪽에만 끌리는 건, 그것이 자신의 결핍을 채워주기 때문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우정」은 그녀 작품의 특징인 격자 줄무늬 캔버스에 금박과 젯소(젯소는 페인트가 잘 발라지도록 초벌작업의 용도로 사용하는 제품입니다)로 구성된 추상화입니다. 카바라조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르는 유디트」는 구약성서의 유디트서에 나오는 일화를 그렸습니다. 기원전 2세기 경에 앗시리아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쳐들어온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여 만취하게 만든 다음 목을 자르는 장면입니다. 여러 화가가 이 장면을 그렸지만, 카라바조는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홀로페르네스와 이런 일에 서툰 듯 겁먹은 표정의 유디트를 대비시켜 무기에 서툰 여인이라도 유혹으로 한 남자를 살해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피가 튀는 끔찍한 장면이기는 하지만 화가의 의도가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카바라조의 그림이 더 눈에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추상화를 잘 이해하시는 독자라면 아그네스 마틴의 그림을 고를 것 같습니다만, 저는 카라바조의 그림에 눈이 더 가는 것 같습니다.

 

성적 취향의 심리적 측면을 설명하기 위하여 저자는 객관적으로 막상막하의 미모를 자랑하는 나탈리 포트만과 스칼렛 요한슨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스칼렛 요한슨의 외모에서 풍기는 자극적이고 과장된 듯한 느낌과 걸핏하면 격렬한 분노를 터트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습니다. 반면 나탈리 포트만은 굳은 의지와 실용적인 성격이 느껴진다고 했는데, 어쩌면 저자의 취향이 반영된 평가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저자는 사랑에 빠지는 행위를 자신의 약점을 넘어서고 싶어 하는 인간적인 희망의 승리라고 규정하면서 섹스도 그와 같은 의미에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섹스의 기쁨에 이어 저자는 섹스의 골칫거리를 논합니다. 가볍게는 상대로부터 거절당하는 것부터, 오래된 커플의 권태, 외도, 포르노, 결혼제도에 이르기까지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실연을 당했다고 해서 소란을 피우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젊은이도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거부당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상대를 거부하는 이유가 의외로 단순하기 때문에 심각할 이유가 없다고 합니다. 즉 상대방이 우리의 영혼까지 들어다보고 우리의 모든 면을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상대의 거절은 이성의 힘이 닿지 않는 무의식과 억압된 잠재의식에 의한 판단이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바꿀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면 위안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No는 그냥 No일 뿐이니 복잡하게 생각해서 사건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권태와 발기불능 역시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에서 빠질 수 없는 섹스의 골칫거리입니다. 이 문제들 역시 섹스와 일상의 격차가 원인이 될 수 있는데, 상대에게 자신의 욕망을 강요하는 무례를 범하거나 상대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해서 불쾌감을 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생기는 일종의 문명병이라고 진단합니다. 또한 세상의 모든 커플은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사소하고 터무니없는 일들을 놓고 티격태격하다가 원망으로 발전하고 심하면 건너올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서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문제의 출발인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살아온 세월만큼 무덤덤해지려는 자신을 잘 다스려 처음 만났을 때의 감정을 지켜가면서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야 행복한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인터넷 세상에 넘치고 있는 포르노물에 대하여도 따끔한 일침을 아끼지 않습니다. 요즘 나오는 포르노물은 지나친 선정성으로 윤리, 미의식, 지성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스토리는 황당하고, 대사는 엉터리이며, 배우는 소모품 취급을 받으며 착취당하는 수준일 뿐 아니라, 배경도 엉성하고 촬영도 거의 관음증 환자도 눈을 돌릴 지경이 태반입니다. 결국 다 보고나면 혐오감만 남는 형편없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역설적으로 과거 기독교 미술에서 포르노가 지향해야할 미래적 방향을 찾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위트나 친절함, 기발함, 성실한 노동윤리 같은 고결한 인간 본성을 일깨움으로써, 성적 흥분을 통해 행복한 삶을 이루는 섹스 이외의 다른 요소들에까지 존경심을 갖도록 만드는 것” 말입니다.

 

섹스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외도 역시 빠트릴 수 없는 주제입니다. 의외로 외도에 환상을 가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이 점에 대해서, “결혼을 사랑, 섹스, 가족이라는 우리의 모든 희망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으로 보는 것이 순진한 착각이라면, 마찬가지로 외도가 결혼생활의 모든 좌절을 해결해줄 효과적인 해결방법이라는 생각도 순진한 착각이라는 것이다(210쪽)”라는 저자의 생각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는 성욕이 없었더라면 인간은 더 행복했을지 모른다고 전제하면서도, 성욕 때문에 생기는 고통을 감수하는 이유는, 그로 인해 우리는 고통에 더 둔감해졌을 수도 있고, 감성이 메마른 존재가 되고 말았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아픔을 이겨낸 인간은 더욱 성숙해지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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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8-31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를 몇 권 갖고있어요. 인생은 죽을 때까지 배움의 장이라 할 수 있겠지요. 알랭 드 보통의 사유와 철학을 좋아합니다

처음처럼 2015-09-01 07:01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에도 인생학교가 개설될 예정이라죠?
기대되는군요...
 
눈물편지 - 죽음을 통해 풀어낸 더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
신정일 지음 / 판테온하우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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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에는 무슨 일로 울기라도 하면 사내가 눈물이 흔하면 안된다는 말을 듣곤 했습니다. 심지어는 ‘예로부터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운다’라는 말이 내려온다고까지 했습니다. 태어났을 때,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나라가 망할 때야말로 남자가 울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릴 일을 당해도 겉으로 표현하지 말고 속으로 삭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연행에 나선 연암선생이 요양의 백탑이 모습을 드러내는 산모롱이에서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는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박지원 지음,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상) 135쪽, 그린비, 2008년;  http://blog.joins.com/yang412/13129725)라고 외쳤다는 것을 읽고는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뭔가 잘 못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전송렬교수님의 <옛사람들의 눈물; http://blog.joins.com/yang412/12254105>을 읽으면서 분명해졌습니다. ‘조선의 만시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옛사람의 눈물>에는 모두 35편의 만시(挽詩)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만시(挽詩)란 죽은 자를 애도하여 지은 시를 말합니다. 이 책에 실린 만시 가운데 허난설헌과 남씨 부인이라는 두 사람의 만시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조선의 사대부라는 남성들의 작품입니다. <옛사람들의 눈물>에는 아내를 위해 지은 도망시(悼亡詩), 친구를 위한 도붕시(悼朋詩), 먼저 간 자식을 위한 곡자시(哭子詩) 외에 스승과 제자, 선배, 심지어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종을 위해서 지은 만시, 나아가 자기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기린 자만시(自輓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만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감정을 억누르며 살았다고 배워온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추사 김정희선생이 제주에 유배 가있는 사이에 세상을 하직한 아내를 위하여 지은 만시입니다. “那將月姥訟冥司 來世夫妻易地爲 我死君生千里外 使君知我此心悲(나장월모송명사 내세부처역지위 아사군생천리외 사군지아차심비; 뉘라서 월모에게 하소연하여 / 서로가 내세에 바꿔 태어나 / 천 리에 나 죽고 그대 살아서 / 이 마음 이 설움 알게 했으면”(전송열 지음, 옛사람들의 눈물 105쪽, 글항아리, 2008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안타까움, 미안함 그리고 원망 등 복잡했을 심사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전송렬교수님은 시는 때로 긴 호흡으로 설명하는 산문보다도 더 애절하게 우리의 감성을 흔들어놓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슬픔을 설명하지 않는 만시에서 오히려 깊이 농축된 한없는 슬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만시(輓詩)를 통하여 죽음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이 다른 형식으로는 슬픔을 표현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문화사학자 신정일님의 <눈물편지>에서 그 의문이 풀렸습니다. 선인들은 특히 사람이 죽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피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의학수준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었던 옛날에는 명대로 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서 특히 슬퍼할 일도 많았을 것입니다. 저자는 ‘지극한 슬픔 뒤에 찾아오는 눈물이 나를 서럽게도 했지만 살게 했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라고 서문에 밝히고 있습니다. 나아가 ‘슬픔으로 흐르는 자연스러운 눈물을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하지만 정작 슬픔이 아름답다고 깨닫게 되는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뒷일지도 모른다.’라고 했습니다. 슬픔에 굴복하여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애도하는 과정에서 슬픔을 승화시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슬픔의 감정을 가슴에 담아 억누르기보다는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눈물편지>의 저자는 어린 자식, 배우자, 형제자매, 그리고 벗과 스승을 잃은 슬픔을 담은 시, 제문 혹은 서한문 등 산문을 통하여 그 슬픔을 느껴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어린 자식을 잃은 슬픔을 담은 글들은 윤선도가 막내아들의 죽음을 전해 듣고 지은 시의 한 대목 ‘눈물은 수저에 흘러내리고’를 제목으로 하여 모았습니다.

 

첫 번째 글은 다산 정약용이 네 살 된 막내아들 농(農)이 죽었다는 소식을 유배지에서 듣고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다산은 남양 홍씨와 결혼한 뒤 19년 동안 10여명의 아이를 두었지만, 큰 아들과 작은 아들 외에는 모두 요절했다고 합니다. 편지에 쓴 농은 여덟 번째 아이였던 모양입니다. 농의 죽음을 전해 듣게 된 다산은 ‘오호라, 내가 하늘에서 죄를 얻어 이처럼 잔혹한 일이 벌어지니 이를 어찌할거나’라면서 울부짖었다고 합니다. 자식을 앞세우는 일이 얼마나 참혹한 일이었으면 참척(慘慽)이라고 하겠습니까? 전염병에 속수무책이었을 조선시대에는 지금보다도 자식을 앞세우는 일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다산은 자신의 애달픔도 가누기 어려운 지경이었을 터임에도 아내가 겪고 있을 고통에까지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생사고락의 이치를 조금은 깨달았다는 나의 애달픔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네 어머니야 뱃속에서 직접 낳은 애를 흙구덩이 속에 집어넣었으니 그 애가 살았을 때 어리광부리던 말 한마디, 귀엽던 행동 하나하나가 기특하고 어여쁘게만 생각되어 귓가에 쟁쟁하고 눈앞에 삼삼할 것이다. 더구나 여자들이란 정이 많아 이성에 의지하지 못하는 것이 십상인데 얼마나 애통하겠느냐?(19쪽)”라며 두 아들에게 어머니를 잘 모시도록 당부한 것입니다.

 

다산은 여자들이 감성에만 의지한다고 보았지만, 심의당 김씨를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열여덟 살에 죽은 큰딸을 위해 심의당 김씨가 지은 제문에서 그녀는 슬픈 심사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아, 슬프다! 사람이 일찍 죽는 것을 누군들 원망스럽고 한스럽게 여기지 않을까마는 어찌 너처럼 장성하여 요절함만 같음이 있겠느냐. 사람의 부모라면 누군들 비통하지 않을까마는 어찌 나처럼 후회하면서 슬퍼함과 같겠느냐.(82쪽)” 슬픔이 지극함에도 불구하고 심의당 김씨는 “어쩔 수 없구나! 세월은 지나가고 이승과 저승의 길은 다르니(…) 아아, 슬프다. 운명이 아닌 것이 없으니, 오직 편안하게 거처하기를….”이라고 마음을 추스르고 있습니다. 슬픈 감정을 이성적으로 잘 다스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과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이 드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 같습니다만, 조선시대의 가사문학을 꽃피우게 했던 송강 정철은 남다른 면모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기축옥사에서 많은 동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송강 역시 정쟁에서 밀려 유배를 가야했습니다. 유배 중에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적은 제문에서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네 배필을 가릴 때 애혹(愛惑)에 빠짐을 면치 못하여 병이 든 사람에게 출가시키어 두어 달 만에 네 남편이 죽으니 나이가 겨우 스물 둘이었다. 유약한 네가 이런 참혹한 변을 당하여 곡벽을 절차 없이 하며 죽기로 작정하고 먹지를 않아 하루에도 몇 번씩 기절을 하니 이 소식을 들은 나는 차마 가까이 할 수조차 없었다.(55쪽)” 송강이 애달파한 것은 사위가 될 사람의 건강을 미리 챙겨보지 못해 딸이 청상에 과부가 된 것이었고, 남편을 앞세운 딸이 먹는 것을 조심스러워하면서 천식을 얻어 병이 깊어져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 모두 자신의 잘 못이라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혹(愛惑)이라 함은 여자와 사랑에 빠져 눈이 멀었다는 의미인 바, 딸의 결혼을 앞두고 젊은 여인과 사랑에 빠져 집안을 제대로 챙기지 않았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또한 후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남편들은 아내가 죽으면 울다가도 화장실에 가서 웃는다는 우스갯말이 있습니다. 이런 우스갯말을 주고받을 정도의 세태가 되었나 싶으면서도 옛날에는 어떠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눈물편지>에 수록되어 있는 조선의 사대부들을 보면 대체로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담긴 글을 남기고 있습니다. 순조시절 지방관을 역임한 심노숭이 “아내를 잃고 너무 슬퍼하는 자는 세상에서 비웃는 까닭에 아내를 잃은 자는 풍속을 두려워하여 그 슬픔을 숨긴다.(심노숭 지음, 눈물이란 무엇인가 17쪽, 태학사, 2002년; http://blog.joins.com/yang412/12280442)”라고 적은 것을 보면 조선 말기 이르러서야 남자의 눈물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모양입니다.

 

명종 때 사간을 지낸 권문해는 마흔아홉이 되던 해 후사도 없이 아내가 죽었습니다. 30년을 같이 산 부인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칭송했습니다. “엄전한 모습과 아름다운 덕을 지녀 집안을 화평하게 하고, 부녀의 도리를 다하여, 짜증을 부리거나 시샘하는 것을 우리가 부부로 맺어진 이래 30년 간 나는 한 번도 보고 듣지 못하였소.(95쪽)” 며느리의 수의를 시어머니가 직접 지었다니 고부간의 사이도 아름다웠던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여든 노모가 생존해계서서 봉양은 물론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어떻게 모실 것인가 하는 권문해의 걱정은 오히려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에둘러 말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그대는 상여에 실려 저승으로 떠나니 나는 남아 어찌 살리. 상여소리 한 가락에 구곡간장 미어져서 슬퍼할 말마저 잊었다오’라고 애달픈 심사를 마무리하는 것을 보면 그의 슬픔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권문해는 아내의 죽음 이후에 슬픔에 빠져 울면서 지내느라 일기마저도 쓸 겨를이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 앞서 아내가 죽으면 화장실에 가서 웃는다는 남편이 있었기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혼자 된 남자의 허리춤에 이가 서 말이라는 옛말처럼 혼자된 남편의 모습은 아무리 잘 보아주려해도 그럴 수가 없다는 이야기가 오히려 더 실감이 날 것 같습니다.

 

심노숭의 아내는 죽음을 앞두고 ‘공연히 지아비 잠깨우지 마세요. (…) 가군께 인사를 못 드리니 죽어가면서도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115쪽)’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내가 아프면서 멀리 나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는 심노숭이 아내 완산 이씨의 영전에 바친 제문도 인용되어 있습니다. 슬픔과 눈물에 대하여 천착한 심노숭은 무려 26제의 시와 23편의 문을 남겨 아내를 애도한 것도 공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심노숭은 파주에 새로 집을 지어 이사를 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사도 하기 전에 아내가 죽음을 맞았던 모양입니다. 덩그렇게 큰 집을 홀로 지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길가는 나그네 같은 느낌이 들었던 심노숭은 “불교에 원업이란 말이 있다. 말하자면 인과라는 말인데, 당신은 낙토(樂土)로 갔는데, 나는 악도(惡道)에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네(113쪽)”라고 스스로의 신세를 한탄합니다.

 

죽은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만시에 함축적으로 담았던 김정희는 아내에 바치는 제문에도 절절한 마음을 담아냈습니다. “아아, 나는 강 앞에 있고 산과 바다가 뒤를 따랐으나 아직 내 마음을 흔들리게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한낱 아내의 죽음에 놀라 가슴이 무너지고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이 무슨 까닭인가. 아아, 대체로 사람마다 죽음이 있거늘 홀로 부인만 죽음이 없을 수 없으리오. 죽을 수 없는데 죽은 까닭에 죽어서 지극한 슬픔을 품게 되었을 것이고 기막힌 원한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장차 품어내면 무지개가 되고 맺히면 우박이 되어 족히 공부자(孔夫子)의 마음이라도 움직일 수 있었기에 지고보다도 더 심하고 산과 바다보다도 더 심함이 있는가 보다.(120-1221쪽)” 유배에 처해졌음에도 흔들림 없던 마음이 아내의 부음에는 황망해질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고,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마음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책읽기를 마치고서는 한 가지 의문이 남았습니다. 예로부터 아버지의 죽음을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인륜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이 천붕지통이라고 하는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지극한 슬픔을 담은 글은 없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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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미술 아트 라이브러리 17
로버트 어윈 지음, 황의갑 옮김 / 예경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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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여행에서 만난 이슬람 유물들과 이번에 준비하고 있는 터키에서 만날 이슬람 유물에 대한 미술사적 호기심을 풀어줄 것으로 기대하고 읽은 로버트 어윈의 <이슬람 미술>은 생각했던 것보다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본문 앞에 넣은 지도에서는 1250년부터 1800년경까지 이슬람세계를 표시하였는데, 서쪽으로는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이베리아반도 전체를, 지브롤터해협을 건너와 모로코의 마라케시가 위치한 위도을 유지하면서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의 북쪽을 포함하고, 아라비아반도는 물론 동쪽으로는 사마르칸트 동쪽까지 인도의 북부 지역을 아우르고 있고, 북으로는 카프카스산맥에 이르고, 터키반도는 물론 보스포루스해협을 건너 발칸반도의 북쪽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중해에서는 시칠리아 섬과 이탈리아반도의 남쪽 끝까지 영역에 포함되고 있습니다. 물론 시대적으로는 이슬람제국의 흥망성쇠가 있었으니 강역의 변화가 있었습니다만, 생각해보면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라 로마제국도 차지해보지 못한 광대한 영역이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자는 이슬람 미술을 시대적으로 구분하여 연대기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점을 미리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제별로 광범위한 접근 방식을 택하였고, 오늘날 이슬람의 영향이 미치고 있는 인도나 동남아시아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까지는 포함할 수 없어, 스페인과 모로코로부터 아프가니스탄까지 반건조기후대의 이슬람 미술을 시기적으로는 5세기로부터 17세기 후반까지로 국한하고 있다고 제한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전한 이슬람 미술이 남긴 다양한 유물들을 인용하여 그 미술사적 의미를 정리하고 있어, 시대적으로 이를 주도한 세력들에 대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어 이슬람예술을 큰 틀에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이슬람세계의 역사적 배경을 요약하고, 이슬람 건축물을 종교 건축물과 세속적 건축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고, 시대별로 들어선 이슬람제국의 예술적 취향을 설명합니다. 궁전에 대하여도 스페인을 비롯하여 이집트, 중동지역에 들어선 제국의 왕궁에 대하여 개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건축양식은 물론 내부 장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헌자료를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스페인 그라나다에 있는 알람브라 궁전의 벽에 새겨진 “이 가운데 있는 물동이의 물은 하나님의 기억을 믿는 신자의 영혼과 같다(61쪽)”라는 내용의 명각을 인용하였는데, 이어서 하나님을 제외하면 모든 형태가 소멸하여 세상만물이 덧없다는 것을 내포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슬람의 웅장한 무덤에 관한 글에서 저자는 이슬람 초기에는 수 세기에 걸쳐 화려한 무덤을 세우는 것이 용인되지 않았고,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르침에 따르면 무덤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조차 금지되었다고 하는데, 모로코의 라바트에 있는 하산왕의 거대한 무덤을 보면서 이렇듯 거대한 무덤이 왜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터키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성당의 예를 보면서 우리는 이슬람이 다른 문명을 파괴하지 않았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사산왕조의) 페르시아인들이나 이슬람 이전의 아랍사람들처럼 이슬람 초기에는 이전 왕조의 흔적을 철저하게 지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면 코르도바에 있는 메키스타 역시 그리스의 신전에서 뽑아온 기둥들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고트의 교회 위에 세웠다고 했던 것을 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건축물은 세밀화는 물론 직물, 그리고 도자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술품과 거기에 적힌 내용까지도 인용하여 그 배경을 설명하고 있어 이슬람 미술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책의 말미에 붙여둔 연대표에는 역사적 사건과 예술 및 건축 그리고 문학과 과학을 시대적으로 구분하여 비교가 가능하도록 한 것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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