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민족 2천년 사
쉴레이만 세이디 지음, 곽영완 옮김 / 애플미디어(곽영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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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터키의 서부지역을 도는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리스유적은 물론, 로마유적, 초기 기독교유적과 셀주크 투르크시절은 물론 오스만 투르크시절의 유적에 이르기까지 7박8일의 빡빡한 일정으로 소화하였습니다. 터키가 가지고 있는 관광자원의 극히 일부만 돌아보았을 뿐입니다. 터키의 전역에 흩어져 있는 유적들을 통하여 벌어들이는 관광수입은 GDP의 20%를 차지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투르크 족이 아나톨리아지방에 정주함으로써 차지한 선대의 유물들까지도 후손들의 먹거리가 되고 있는 셈이니 훌륭한 선조를 둔 덕을 톡톡히 보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에 1만년 이상의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수많은 문명이 명멸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터키에서는 13개 이상의 중요한 문명과 종교의흔적을 담은 171개의 고대유적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중요한 지역을 차지한 투르크 민족의 역사가 <터키 민족 2천년사>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터키와 우리나라가 형제의 나라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혹자는 6.25동란 때 터키기 1만 5천명이나 되는 병력을 파견하였고, 3천여명이 사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라고도 말하지만, 사실은 고구려가 대륙을 경영하던 시절 투르크족의 원류에 해당하는 돌궐족과 고구려가 형제의 관계를 맺고 중국에 맞서 싸웠다는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이처첨 투르크 민족의 뿌리는 기원전 1700~1200년 무렵 알타이산맥 북서쪽에서 시작하여 동진하여 중국의 서북쪽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면서 중국을 침략하던 흉노족으로 연결되는데, 흉노족은 동유럽에 크게 영향을 미친 훈제국과 같은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훈제국의 동진으로 유럽에서는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이 일어날 정도로 변혁을 겪기도 했습니다. 투르크라는 이름은 위구르 지역을 차지했던 돌궐족으로부터 유래하는데, 중국이 팽창하면서 돌궐족은 서쪽으로 밀려가 결국은 아나톨리아지역으로까지 이주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스만제국이 성립되기 이전에 대제국을 건설하였던 셀주크 투르크가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하였던 것은 왕위계승과정에서 형제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기전이 없었기 때문에 제국이 분할되었다가 다시 통합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국력이 낭비된 때문일 것 같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투르크 민족의 이러한 특성을 간파하고 왕위계승자를 위협하는 왕족들을 모두 살해하는 끔찍한 방식으로 왕권을 지키려는 노력을 통하여 600년에 걸쳐 대제국을 경영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전히 풀리지 않은 궁금증은 투르크 민족이 중동지역으로 진출하기 전까지는 마니교나, 조로아스터교, 혹은 불교를 믿었는데, 9세기경 압바스 왕조의 성립 이후 빠르게 이슬람화했다는 점입니다. 사실 오스만 제국이 600년에 걸쳐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하여 동으로는 인도의 북부, 남으로는 이집트, 서쪽으로는 모로코, 북쪽으로는 오스트리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통치하게 된 것을 보면 무함마드가 내세운 이슬람을 확산시킨데는 투르크민족의 역할이 지대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더욱 궁금해지는 것은 투르크족이 서진해오기 이전에 이 지역에 자리 잡고 살던 민족들은 누구였으며 지금은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시대에는 지금의 터기에 해당하는 소아시아출신들이 명성을 날리기도 했고, 페르시아제국이 소아시아를 거쳐 그리스와 충돌하였는데, 그렇다면 페르시아사람들도 아나톨리아 지방에 거주했을 것으로 보이고, 로마시대에는 가나안 지역에서 살던 유대인들이 아나톨리아지역으로 흩어져 살았던 유적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의 터키 땅에는 정말 수많은 민족들이 모여들었다가 흩어지기를 거듭했던 모양입니다. <터키 민족 2천년 사>가 투르크 민족의 역사라고 한다면 아나톨리아지방을 통치했던 사람들의 역사와 그들이 남긴 유물들을 정리해보는 것도 좋은 역사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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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원, 언니처럼 - 비행을 꿈꾸는 소녀들을 위한 스토리 가이드북 직업공감 시리즈 1
윤은숙 지음 / 이담북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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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게도 책읽기 역시 인연의 고리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국내외 여행을 하면서 비행기를 탈 기회가 많았는데, 마침 비행기 승무원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두바이를 거점으로 하는 에미레이트항공의 승무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윤은숙님께서 쓴 승무원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실용적인 안내서 <승무원, 언니처럼>을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국내외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항공사의 비행기를 타볼 기회가 많은 편입니다. 역시 항공여행의 꽃은 승무원인 것 같습니다. 오랜 비행시간에서 오는 지루함이거나, 비행기 탑승을 전후해서 겪는 불편한 심기도 승무원들의 서비스 여하에 따라서 풀어지거나 더 불편해지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아마도 서비스 분야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승무원들 역시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일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무원이라는 직업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다양한 나라와 다양한 사람들을 경험해볼 수 있다는 점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느새 취업전쟁이라는 단어가 친숙하게 느껴지는 상황이라서가 아니라도 승무원을 선망하는 젊은이들은 예전부터 많았던 것 같습니다. 요즈음에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쉽게 안내하는 길, 즉 학원이나 개인교습, 심지어는 인터넷 자료까지도 넘쳐나고 있기 때문에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선택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승무원, 언니처럼>은 저자 자신이 경험하거나, 그와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을 교육시켜오면서 쌓은 노하우를 잘 녹여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승무원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는 좋은 참고서가 될 것 같습니다.

 

사실 모든 분야의 안내서를 보면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키거나 심지어는 부정적인 면은 감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는 승무원 세계의 이면에 숨겨있는 어려움까지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어 자신이 꿈꾸는 길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까지고 고려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은 저자 자신이 승무원이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 과정과 승무원으로 근무하면서 겪은 일들을 정리하면서, 각각의 단계에서 책읽는 이들이 가장 궁금할 수 있는 점들을 긍정적 시각과 부정적 시간으로 각각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현재의 직업을 타고났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어떤 사람은 천직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 같습니다. 승무원 역시 타고난 승무원이 있는가 하면 잠시 스쳐가는 과정으로 일하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천직이라고 생각되는 직업을 쉽게 얻게 되면 별문제가 없겠습니다만, 그 직업을 얻기 위하여 수없이 많은 고난을 경험한 끝에 결국은 실패하고 좌절하는 경우도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잠시 겪어보기 위하여 그 일을 선택한 사람들이 곱게 보이지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떻든 사람마다의 생각이 다르고 삶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삶을 사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개인에 달린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외국어의 비중이 다소 많다는 느낌이 듭니다만, 항공이라는 분야의 특성과 여성들이 많인 직종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제가 다소 보수적인 편이라서 가급적이면 글을 쓰면서 외래어를 줄이려고 노력하는 편이라서 눈에 띈 것일 수 있습니다.

 

이 분야의 관련서적을 읽어본 경험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만, 승무원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는 좋은 참고서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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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처럼 여행하기
전규태 지음 / 열림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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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는 것이 단테처럼 여행하는 것인가 궁금해서 읽게 된 책입니다. 책을 열면 맨 먼저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찾아 떠나듯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를 긴 여행길에 나섰다.”라고 적은 글이 눈에 들어오는데 더욱 알쏭달쏭할 따름입니다. 단테의 여행이라 함은 지옥과 연옥을 거쳐 천국으로 이어지는 여행을 담은 신곡을 이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천국편에서 베아트리체를 만났으니 베아트리체를 찾아 떠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곡>의 지옥편에서 여행을 떠나는 단테를 안내하기 위하여 등장한 베르길리우스가 “내 너의 길잡이 노릇을 하여 여기에서부터 영원한 곳으로 너를 이끌 것이다.(단테 베르길리우스, 신곡-지옥편, 14쪽, 민음사; http://blog.joins.com/yang412/13309691)”라고 했고, <신곡>의 천국편에는 “너의 글로 네가 본 모든 것을 드러나게 하고 가려워하는 사람들이 시원하게 긁도록 해 주어라(단테 베르길리우스, 신곡-천국편, 150쪽, 민음사; http://blog.joins.com/yang412/13324787)”라고 적은 글은 어떻게 하면 천국에 이를 수 있는가를 세상 사람에게 가르치기 위한 여정이었음을 암시합니다.

 

결국 저자는 췌장암으로 진단받고 수술을 해준 주치의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하여 가까운 사람을 피해 스스로를 기쁘게 하도록 애써보라는 권고를 듣고서는 해외여행을 선택했다고 했습니다. 사실 지난주에 일주일이 조금 넘는 여행을 하고 돌아왔습니다만, 해외여행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기도 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저자의 설명이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췌장암은 지금도 완치가 어려운 질병인데 저자는 수술을 받고 종말기 치료를 받을 정도면 중증이었을 것으로 짐작됨에도 불구하고 암을 극복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환자로서는 축복을 받을 일이고, 같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치료의 묘법을 널리 알려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저자와 같은 췌장암으로 진단받았던 스티브 잡스에 관한 일화 역시 ‘병을 잊고 하던 일에 최선을 다해 골몰해보라’는 충고를 받고서는 엄청난 발명을 해서 세상의 돈을 모았지만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는 인용 역시 정확한 것은 아닌 듯 싶습니다. 그의 일대기를 정리한 월터 아이작슨의 <스티브 잡스; http://blog.joins.com/yang412/12443528>에서 보면 잡스가 췌장암으로 진단받은 것은 이미 부를 이룬 다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주치의가 항암치료를 위하여 3S, 즉 스트레스, 섹스, 스크린(영화, TV, 인터넷 등)을 금하라고 권고했다는 것도 미심쩍은 대목입니다. 그러면서도 <플레이보이>나 <펜트하우스>와 같은 책들을 뒤적이라고 했다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읽어내야 할 부분은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를’ 여행에 방점을 둔다면 분명 울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여행은 시야를 넓혀주고 마음의 가장 내밀한 면을 회복시켜주면서 하늘 높이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도록 우리를 쏘아 올리는 발사대다(131쪽)”라고 적고 있는 것처럼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마음을 비우는 훈련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행은 죽음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과정이었고, 저자는 그 과정을 충실하게 살아냈을 뿐 아니라 소중한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저자의 췌장암에 대한 진단이 제대로 된 것이었나 하는 생각을 버릴 수 없습니다. 만약에 제가 불치의 병으로 진단받았다면 저자처럼 객지로 떠돌다가 객사하는 운명을 맞기보다는 우리 땅에서 주위를 물릴 수 있는 여유로운 곳을 찾아서 제가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는 편을 택할 것 같습니다. 굳이 집을 나서는 여행이 아니더라도 삶의 의미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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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평가 - 잃어버린 20세기에 대한 성찰
토니 주트 지음, 조행복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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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근대역사를 전공한 뉴욕대학의 토니 주트 교수는 최근 [북소리]에서 소개한 <기억의 집; http://blog.joins.com/yang412/13652730>과 <20세기를 생각한다; http://blog.joins.com/yang412/13704215>를 통하여 만나본 바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4년 전에 출간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http://blog.joins.com/yang412/12125440>를 통하여 처음 만났는데, 자유시장주의를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나 마르크스주의를 토대로 한 공산주의에 대하여 공히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는 점이 신선했습니다. 이념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반대의 이념에는 비판적이지만 자신이 믿는 이념을 바라볼 때는 너그러운 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사회현상에 대한 논평이 없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만, 저자와 같이 냉정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본다면 해결방안이 도출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의 집필의도에 관하여 “나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특히 그러한 젊은이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라고 전제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의무가 있다. 하지만 비판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그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다들 아시다시피, 철학자들은 이 세상을 오직 이리저리 해석하기에만 바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토니 주트 지음,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237쪽, 플래닛 펴냄, 2011년)”라고 변화를 위한 적극적 행동을 주문하였습니다. 저자가 “이 책은 대서양 양안에 사는 젊은이들을 위해 쓴 것이다.”라고 밝힌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사상이 싹을 틔워 성장하고 소멸한 유럽대륙과 자본주의가 꽃을 피운 중심이 북미지역이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재평가>는 1994년부터 2006년까지 저자가 다양한 잡지에 서평형식으로 발표한 글을 모아 엮은 것입니다. 통상적인 서평에 비하여 호흡이 긴 글인데, 비평의 핵심이 되는 저서 뿐 아니라 관련된 책은 물론 연관이 있는 다양한 자료들을 인용하여 비평이 비판에 머물지 않도록 안배를 하고 있는 점이 특징입니다. “우리가 과거를 너무 쉽게 잊어 과거로부터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과거를 배워야 할 흥미로운 무엇이 없는 하찮은 것으로 치부한다”라는 것이 저자가 이 책을 통하여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잃어버린 20세기에 대한 성찰’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재평가(再評價; Reappraisals)”의 사전적 의미는 ‘이미 평가된 것을 다시 평가’하는 일입니다. 누군가의 평가에 잘못은 없는지 다시 곱씹어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냉정하고 객관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데 비판의 수위를 고려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책을 읽고 나면 “책의 핵심은 잔인하지만, 부당하지 않다. 특히 정치적 우둔으로 치장한 20세기 문단의 신사 숙녀들에 대해 상기시킨다.”라고 쓴 뉴욕 타임스의 평이 충분히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서평이 발표된 다음에 특히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맨 끝에 짧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서평에 이은 논쟁을 별도로 소개하기도 하였고, 격렬한 반응을 요약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 글은 마이클 오런이 6일 전쟁을 새롭게 쓴 책의 서평으로 2002년 7월 <뉴 리퍼블릭>에 내가 기고한 마지막 글이다. 이듬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단일국가해법에 관한 글 때문에 이 잡지의 발행인 란에서 내 이름은 사라졌다. 서평의 논조는 대체로 우호적이었는데도, 마이클 오런은 (아마도 이견이나 비판에 익숙하지 않은 듯하다) 이상하게도 욕설이 섞인 인신공격적 반응을 보였다. 그 글은 <뉴 리퍼블릭> 2002년 9월 30일 판에 실렸다.(367쪽)”

 

저자는 자신이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 작가들의 입장이나 이스라엘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폭탄주를 제조하는 사람이 먼저 마셔서 동참하는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부 어둠의 심장’에서 다룬 아서 케스틀러, 프리모 레비, 마네스 슈페르버 그리고 해나 아렌트는 모두 유대인입니다. 아서 케스틀러의 경우는 데이비드 시저러스의 <아서 케스틀러; 정처 없는 영혼>에 대한 서평으로, 프리모 레비의 경우는 <프리모 레비; 어느 낙관주의자의 비극>에 대한 서평으로 쓴 글이며, 마네스 슈페르버와 해나 아렌트의 경우는 회고록 혹은 글모음에 대한 서평입니다. 비판의 대상에 대하여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면서도 비판할 부분은 직설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돌직구를 날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토니 주트는 케스틀러의 사생활이 타인이 보기에는 문제가 많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스스로 공산주의에 빠져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체제의 범죄와 과오를 그대로 보여주었다고 해석합니다. “(아서 케스틀러의 <한낮의 암흑>)은 대중 독자층에게는 공산주의를 가혹한 독재정권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실과 논거, 재판을 조작하는 거짓말이자 사기로 제시했으나, 식별력을 더 갖춘 지식인 독자층에게는 공산주의를 가혹하게 묘사하는 동시에 기묘하게도 인간의 얼굴을 가진 것으로 제시한다.(84쪽)”

 

프리모 레비에 대한 글에서 우리는 홀로코스트의 비극의 이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자신이 생존자였던 빅터 프랭클박사는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노력을 <죽음의 수용소에서; http://blog.joins.com/yang412/5396723>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생존자들은 ‘살아남았고, 다른 이들이 겪은 절망적인 고초를 전달하지 못했으며, 깨어있는 매순간 증언과 회상에 전념하지 못했다’라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았다는 것입니다. 즉, 생존자들은 ‘마음속에서는 수용소를 결코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라고 생각하면서 살았고, 때로는 비극적으로 삶을 마무리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레비가 말년에 남긴 ‘생존자’라는 제목의 시를 보면 살아가면서 겪어야 했던 내면의 고통이 읽힙니다. “물러서라. 나를 내버려두어라. 어둠에 빠진 자들이여 / 사라져라. 나는 누구에게서도 무엇을 빼앗지 않았다. / 누구의 빵도 강탈하지 않았다. / 아무도 내 대신 죽지 않았다. 아무도.(…)(103쪽)” 살아 돌아온 사람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이 만들어내는 심리적 압박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레비 역시 68세 되던 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의 회고록에 대한 서평에서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를 해석함에 있어서 편의성을 취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비판합니다. 스탈린주의라고 하는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되었다는 것과 마르크스가 예언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실패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신뢰성에 대한 공격을 방어하려는 알튀세르의 노력은 차라리 애처로울 지경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에릭 홉스봄의 자서전에 대한 서평에서는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그의 후계자들이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재앙과 같은 잘못에 눈을 감고 공산주의를 낭만적으로 묘사하였다고 비판하였습니다. 홉스봄이 악을 직시하기를 거부했고, 악을 악이라 부르기를 거부했으며, 스탈린 등이 한 정치적 유산은 물론이고 도덕적 유산에 대하여 언급을 피함으로써 미래의 진보주의자들이 오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좌파는 오랫동안 자신들의 안에 있는 악마 공산주의자들과 대면하기를 회피했을 뿐 아니라, 반공주의에 대한 무작정의 반대는 노동운동과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정치적 사고를 무력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좌파가 자신감을 회복하고 일어서려면, 과거에 관하여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얘기는 그만 두어야 할 것이라고 권고합니다. 저자의 이와 같은 논지는 우리의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대목이라서 실감이 더하는 것 같습니다.

 

3부에서는 20세기를 지나오면서 잘못된 정책을 선택한 프랑스, 영국, 벨기에, 루마니아 그리고 이스라엘 등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전개됩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프랑스와 같이 두 꼭지를 할애하여 깊이 다루었습니다. 자전적인 내용을 담은 <기억의 집>에는 젊은 시절 방학을 이용하여 방문한 키부츠에서 얻은 신생 독립국 이스라엘의 문제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집단 자치 정부를 꾸렸다거나 소비재를 평등하게 배급한다고 우리가 더 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타인에게 더 관용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실은, 자부심이 극단에 이를수록 가장 악질적인 인종적 유아론만 강해질 따름이다.(토니 주트 지음, 기억의 집, 103쪽, 열린책들, 2015년)”

 

사방이 이슬람국가들로 둘러싸인 조국을 지켜야 했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풍전등화 신세의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민족에 대하여 배타적이고, 국민 각자의 몫을 줄여 미래를 대비하는 정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1967년 벌어진 ‘6일 전쟁’이 세계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난 뒤 이스라엘 내각은 영구 평화를 대가로 점령지를 반환한다는 원칙을 수용하기로 결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정은 이행되지 않았고, 점령한 땅을 계속 점유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랍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추방되거나 도피하여 이스라엘로 유입되고 있고, 이스라엘이 점령한 땅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에 대한 처지가 애매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같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저항하기 시작했고, 이스라엘은 이들에 대하여 통행금지, 가옥파괴, 토지 강탈, 총격, 표적 암살, 장벽설치 등, 탄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이스라엘과 아랍제국들 모두에게 좋은 중동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결국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이 건설했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주의자들이 정착한 초현대적 사회라는, 어렵사리 쌓아올린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이 바뀌어 식민점령국에 인종차별을 일삼는 나라라는 정도의 비유는 진부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유대인을 대신하여 박해받는 소수민족이며 희생자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심지어 미국청년들에게 이스라엘은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과 비교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스라엘이 주요 정착촌을 해체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조건없이 협상을 재개하고 팔레스타인과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맥락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글모음집에 대한 서평에서도 언급되어 있는데,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민족일국가주의(二民族一國家主義)를 내세웠습니다.

 

쿠바위기에 관한 서평을 읽다보면 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 정책에서 미국이 갈팡질팡한 속내가 가늠되기도 합니다.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D. G. 애치슨은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하여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沖繩]-필리핀을 잇는 선으로 정하며, 타이완, 한국, 인도차이나 반도와 인도네시아 등은 이 방위선에 포함되지 않고 그들 지역들은 국제연합(UN)의 보호에 의존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극동에서의 미국방위선 구상을 발표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북한이 남침을 꾀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북한의 남침이 현실이 되고, 국군이 일방적으로 밀리게 되자 미국은 곧바로 국제연합의 합의를 이끌어내고 연합군을 투입하였습니다. 트루먼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은 소련이 독일의 분할된 국경선을 넘기 위하여 한국전선을 전략적 시금석으로 시험해보는 것으로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모두 23개나 되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거침없는 비평을 쏟아내고 있어 깔끔하게 요약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쉽게 읽히고 이해가 된다는 점에서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특히 보수와 진보가 양보 없는 대치국면을 보이고 있는 우리나라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재평가

토니 주트 지음

조행복 옮김

616쪽

2014년 7월 20일

열린책들 펴냄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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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의 어제와 오늘 중남미지역원 학술총서 5
임상래 외 지음 / 이담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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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경제가 회복될 기미 없이 총체적으로 난국에 빠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 투자자들의 손실이 눈덩이처럼 늘고 있다고 합니다. 브라질에 투자하고 있는 국내자본이 10조원에 이르고 있어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들 가운데 브라질의 경제현황에 대하여, 혹은 브라질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투자를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도 먼 곳이기 때문입니다. 정은선의 영상소설 <찾거나 혹은 버리거나 in 부에노스아이레스; http://blog.joins.com/yang412/13685980>에 등장하는 방송작가는 고단한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서울에서 가장 먼 곳을 찍었는데, 바로 아르헨티나였습니다. 이처럼 브라질, 아르헨티나와 같은 남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멀리 있는 탓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남미가 점차 우리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처음 자유무역협정(FTA)를 체결한 나라는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 혹은 무역량이 많은 미국이 아니라 남미의 칠레였습니다. 케이블방송의 유명한 배낭여행프로그램을 통하여 남미의 관광지가 소개된 이후로 남미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저 역시 남미여행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는 우리네 옛 속담대로, 지난해 아내와 함께 해외여행을 처음 다녀온 뒤로는 다음 여행지를 어디로 할까 고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기운이 팔팔할 때 먼 곳을 다녀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남미여행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일단은 여행사 상품으로 이용할 계획입니다. 여행사를 통한 여행은 교통, 숙소, 식사 등의 문제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고, 여행지에 대한 다양한 정보 역시 인솔자나 가이드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입니다. 하지만 여행은 아는 만큼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름대로는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준비하면 여행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기회가 되는대로 남미를 포함한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문화는 물론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가고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자료들은 많지 않습니다만, 부산외대가 1997년에 설립한 중남미지역원에서 좋은 자료들을 꾸준하게 내놓고 있습니다. 중남미지역원에서 내놓은 <라틴 아메리카의 어제와 오늘>은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다양한 주제들을 잘 정리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북소리]에서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들은 이 책을 전문학술서로 준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교양서로 읽을 수 있도록 전문용어와 주석을 줄이고 내용 역시 평이하게 다듬었다고 합니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들의 이런 노력이 저절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다섯 명의 필진이 열다섯 개의 장을 나누어 맡은 <라틴 아메리카의 어제와 오늘>은 오늘날의 라틴아메리카를 있게 한 식민역사를 먼저 다루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필두로 한 유럽세의 정복에 따른 식민지배와 식민통치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근대국가를 형성하기까지의 과정을 제일 먼저 정리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라틴 아메리카의 지리, 자연 그리고 인간에 대하여 정리하고, 이어서 라틴 아메리카 고대문명의 기원과 시대구분에 이어 마야문명과 아즈텍문명으로 대표되는 메소아메리카의 문명과 잉카문명으로 대표되는 안데스문명을 정리하였습니다. 다음으로는 식민통치의 잔재로 인한 인종문제, 빈곤과 불평등, 종교와 언어, 도시화와 이주문제, 정치적 전통과 경제의 변천과정 등을 요약하고, 마지막으로 라틴아메리카와 한국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사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처음 발견했다는 역사는 유럽의 시각에서 쓰인 것이라고 알게 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아메리카대륙에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면 처음 발견한 것이 옳겠지만, 이미 선주민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에르난 코르테스가 110명의 선원으로 구성된 11척의 배에 나누어 탄 508명에 불과한 군인으로 유카탄반도에 상륙하여 아즈텍제국(저자들은 스페인사람들이 들어오기 이전에 라틴아메리카에 자리하고 있던 마야문명, 아즈텍문명 그리고 잉카문명은 제국이라고 부를 정도로 국가기반이 탄탄하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을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도 궁금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볼 수 없던 총과 말이라는 신무기가 결정적인 이유였을까요? 6.25동란에 뒤늦게 참여한 중공군은 무장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무기체계를 병사의 숫자로 채운 인해전술이 당시만 해도 첨단무기로 무장한 연합군을 압박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이런 설명으로 충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즈텍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가 그 배경에 있었던 것입니다. 신무기 이외에도 정복자이 얻은 결정적인 도움 가운데 하나는 원주민들이 선물로 제공한 귀족처녀 말린체였습니다. 그녀는 아즈텍사람들 사이에 전해오는 케찰코아틀 신화를 전해주었던 것입니다.

 

태초에 열세 번째 하늘에서 창조자들은 네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첫째는 붉은 테스카틀리포카, 둘째는 검은 테스카틀리포카, 셋째는 케찰코아틀, 그리고 넷째는 우이칠로포츠틀리입니다. 검은 테스카틀리포카가 지배한 최초의 세계인 대지의 세계로부터 케찰코아들이 지배한 바람의 세계, 비의 신 틀랄록이 지배한 비의 세계, 그리고 틀랄록의 아내이자 강과 호수의 여신 찰치우쿠틀리쿠에가 지배하던 물의 세계를 거쳐 지금의 다섯 번째 세계는 테스카틀리포카와 케찰코아틀이 힘을 합쳐 창조하였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바다의 괴물 틀랄테쿠틀리를 죽여 하늘과 대지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불사의 존재인 괴물이 울부짖는 것을 달래기 위하여 인간의 육신과 피를 제물로 바쳐야만 했던 것입니다.(박종욱 지음, 라틴아메리카의 종교와 문화 75-89쪽, 이담북스, 2013년; http://blog.joins.com/yang412/13723866)

 

하지만 케찰코아틀은 결국 테스카틀리포카의 계략에 빠져 아즈텍에서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케찰코아틀은 메조아메리카의 고산지대에 서식하는 희귀종 새 케찰과 뱀을 뜻하는 코아틀이 합쳐진 이름으로 날개달린 뱀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케찰코아틀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하얀 피부에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긴 수염을 기르고 있습니다. 아즈텍에서 추방당한 케찰코아틀은 다시 돌아올 것임을 예언하였고, 아즈텍사람들은 케찰코아틀의 전설을 굳게 믿어왔다는 것입니다. 말린체로부터 케찰코아틀의 전설을 듣게 된 코르테스는 자신이 돌아온 케찰코아틀이라고 속여 목테수마왕의 환심을 살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험한 지형 때문에 거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아즈텍문명은 도시국가들이 느슨한 연합체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도시국가들 사이에 맺은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인하여 이들 간에 갈등요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아즈텍으로부터 독립을 원한 뜰락스깔떼가족이 코르테스 원정대에 5,000명의 후원군을 제공하였다고 합니다. 때마침 유럽으로부터 원정대에 묻어온 천연두가 원주민 사이에 창궐한 것도 코르테스가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띠틀란을 공략하는데 일조를 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코르테스의 아즈텍 점령으로 시작한 스페인은 황금을 찾아 점령지를 넓혀나갔는데, 삐사로와 알마그로가 이끄는 군대는 안데스의 꾸스꼬까지 함락하게 됩니다. 중남미지역을 정복한 스페인이 특히 관심을 보인 곳은 아즈텍문명이 있던 멕시코와 잉카문명이 있던 페루였습니다. 두 곳에는 금과 은광산이 있고 원주민이 많아 노동력이 풍부했기 때문입니다. 남미지역의 식민통치 초기에는 정복에 공을 세운 사람을 총독으로 임명하였던 스페인왕은 자신의 대리인을 부왕으로 임명하여 통치하도록 하는 부왕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중남미의 식민지가 너무 광대하여 본국에서 직접 다스리는 것이 용이하지 않은 것도 이유였습니다. 1534년에 멕시코에 누에바 에스빠냐 부왕청을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1543년 리마에 페루 부왕청을, 1717년에는 지금의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를 관장하는 누에바 그라나다 부왕청을 설치하였고, 1776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리오 델라 플라타 부왕청을 설치하였습니다.

 

북미로 이주한 이민자들이 가족단위로 구성되었던 것과는 달리 라틴아메리카지역으로 이주한 이민자들은 남성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과 원주민 사이에 혼혈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에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하여 아프리카에서 끌어온 흑인노예들까지 더해서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과 유럽의 백인 그리고 아프리카의 흑인 사이의 혼혈이 복잡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의 사회구성은 필연적으로 백인→혼혈인→원주민,흑인의 인종적 위계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백인도 스페인에서 건너온 뻬닌술라레스가 식민지의 고위직을 맡고, 끄리오요라고 부르는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 역시 차별적 대우를 받아 지배계층으로 부상할 수 없었습니다. 혼혈인이 식민지 사회의 주요 구성원이었는데, 이들은 주로 생산활동에 종사하면서 힘든 생활을 영위했다고 합니다.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을 메스티조, 백인과 흑인의 혼혈을 물라토, 원주민과 흑인의 혼혈은 삼보라고 했는데, 그밖에도 순혈과 혼혈 사이의 혼혈을 구분하여 달리 부르는 등 혈통에 관한 명칭이 십수 가지나 되고, 백인과의 거리에 따라서 차별이 심해지는 경향을 보여 오늘날의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의 불평등 구조의 뿌리가 혼혈에 따른 차별정책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스페인의 정복과정에서 수많은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 죽었고,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에도 농장이나 광산에서 고된 노동과 학대를 받는 동안 죽어갔으며, 유럽에서 건너온 신종 전염병 등에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콜럼버스가 도착했을 무렵 3,000~3,500만 명에 달하던 원주민은 불과 100년이 지나는 사이에 90%가 감소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에 거주하는 원주민은 전체 인구의 8% 정도로 추정되는데, 고산지대에 거주하는 아즈텍, 잉카 및 마야의 후손들로 2,200만명 정도이며, 아마존처럼 저지대이면서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지역에 사는 100만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근대국가가 출현하게 된 것은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에 패한 것을 시작으로 유럽에서의 스페인의 위상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식민지에 대한 본국의 통제가 점차 강화되어갔지만, 식민지 경제가 성장하면서 중산층 끄리오요를 중심으로 식민지배를 탈피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북소리]에서 소개한 바 있는 <아메리카노; http://blog.joins.com/yang412/13691658>에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독립과정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독립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기여한 중산층계급을 중심으로 근대국가가 형성되었지만, 군대와 정치세력간의 힘겨루기가 이어졌으며, 쿠바사태에 놀란 미국정부가 라틴아메리카의 공산화를 억제하기 위하여 우파세력이 정권을 잡거나 유지하도록 지원하였지만, 부패한 정권에 대한 좌파적 성향의 반대세력들의 반발로 라틴아메리카의 정치현황은 혼란을 거듭해왔습니다. 그런데 2000년 이후에 들어선 정권들은 국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투명한 정부운용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두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라틴 아메리카의 어제와 오늘>은 자연과 신화, 역사, 특히 스페인의 식민지배과정과 독립, 그리고 현재의 정치경제 상황에 이르기까지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다양한 주제들을 잘 정리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북소리]에서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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