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응급실 - 평화와 생명을 가꾸는 한 외과의사의 지구촌 방랑기
조너선 캐플런 지음, 홍은미 옮김 / 서해문집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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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이가 소외계층에 대한 진료에 관심이 많습니다. 저 역시 의과대학에서 의료봉사활동에 적극적이었고, 그와 같은 활동을 하는 동아리를 만들어 지금까지도 후배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아마 작은 아이의 책상에서 발견한 책입니다. ‘평화와 생명을 가꾸는 한 외과의사의 지구촌 방랑기’라는 부제가 안성맞춤인 <아름다운 응급실>입니다.

 

저자는 국경없는 의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외과의사 조너선 캐플런입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극성을 부리던 시절 남아프리카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복무를 피하기 위하여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철부지 학생이었지만, 우리는 국민 다수의 기본적인 자유를 부정하는 이 나라 정치제도의 부당함을 모르지 않았고, 무감각하지도 않았다.(15쪽)”라고 적은 것을 보면, 의과대학에 다닐 무렵부터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따듯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자의 집안 내력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형외과를 전공하는 아버지, 병리학을 전공하는 어머니, 세균학을 전공한 삼촌 그리고 비뇨기과를 전공하는 외삼촌 등 의료분야에서 활동하는 부모 친척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시작할 무렵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선배의사가 들려준 일선의 현실을 저자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비윤리적인 것이었습니다. 결국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으로 진로를 결정하였다는 것입니다. 영국에서의 수련과정 역시 영국의료계의 고질적인 관행, 관행이라 함은 수련이나 직장을 결정하는데 있어 인맥이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어, 일정한 범주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의사들은 변두리를 맴돌아야 하는 모양입니다. 저자가 외과의사로서 수련을 받는 과정도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지만, 취업에 필요한 학위를 받기 위하여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미국에 눌러앉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상업적 요소가 강한 분위기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영국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국경없는 의사회에 참여하여 최소한의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곳, 저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침공으로 사회기반시설이 무너진 나미비아의 빈트후크에서의 활동, 이라크 전쟁으로 사지로 몰린 쿠르드난민들을 위한 진료소를 구축하기 위하여 터키와 이라크 국경을 넘나들던 이야기, 모잠비크에서는 내란으로 수난을 당하고 있는 난민과 야생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활동, 골든트라이앵글을 장악하고 있는 쿤사와 정부군의 대치하고 있는 미얀마의 산악지대에서에 흩어져 사는 주민들을 위한 진료시설을 구축하려는 노력, 에티오피아와 군사적 충돌을 겪고 있는 에리트레아의 전시의료체계를 시찰하려는 노력 등을 읽으면서 과연 이 사람은 왜 이렇듯 위험한 곳에 자발적으로 뛰어들고 있는가 의문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의 뜨거운 인류애는, 타고난 특별한 유전자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가 하면 군사적 충돌 현장이나 쏟아지는 난민들을 위한 진료현장에서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한 순간을 넘나드는 활동 이외에도 불법폐기물을 쏟아내 주민들을 수은중독으로 죽어가게 만드는 거대기업을 고발하기 위한 활약도 볼 수 있는데, 때로는 다큐멘터리제작팀에서도 활약하는 등 다양한 저자의 활동범위는 의과대학을 졸업하면 꼭 진료실에 앉아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의 모습만을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젊은 의학도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저자의 직업 가운데 동남아시아를 도는 대형유람선의 선의나, 항공기로 이송되는 환자를 돌보는 항공의사와 같은 직종은 우리에게는 생소하게 비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저자가 경험한 것을 꾸밈없이 소개하고 있어 그런 직업의 음양을 모두 보여준다는 점에서 저자의 글에 신뢰가 가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제분쟁의 현장이 때로는 힘의 논리 때문에 윤리가 끼어들 틈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 그리고 힘 있는 사람들은 그저 보여주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장면이 있어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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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의 재발견 - 우리가 살고 있는 곳들에 숨겨진 비밀
앨러스테어 보네트 지음, 박중서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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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초등학교 6학년 때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큰 사고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마침 만우절인 4월 1일이라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거짓말이라고 알려진 사고였습니다. 학교 옆 작은 계곡에서 놀고 있었는데, 비탈 위에 있던 친구가 놓친 작은 돌덩이가 굴러 내려와 뒤통수를 맞춘 것입니다. 옆에서 놀던 친구가 놀라서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고개를 돌렸지만, 사태를 파악하고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나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돌이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의 테에 부딪힌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머리뼈에 구멍이 생겼기 때문에 출혈이 머리뼈 밖으로 흘러나올 수 있어서 뇌 안에 고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960년대만 해도 신경외과를 전공하시는 의사선생님이 손으로 꼽을 정도였으니 지방 소도시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요행수가 겹치는 바람에 이틀 밤 정도를 입원하여 경과를 관찰하다가 퇴원하여 학교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야트막한 산비탈을 따라 교실이 늘어서 있던 학교 주변에는 작은 계곡이 널려있어 천혜의 놀이터였습니다. 그 무렵 학교에서 존 웨인이 감독과 주연을 맡았던 영화 <알라모>를 단체로 관람했던 우리들은 영화에서처럼 요새를 구축하는 놀이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또래 아이들은 남들이 모르는 비밀스러운 장소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비밀스러운 장소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스라한 기억 속에 남아 있어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기억에 남아 있는 장소가 있는가 하면 기억해야 할 곳임에도 불구하고 잊혀져가고 있는 장소도 있습니다.

 

앨러스테어 보네트의 <장소의 재발견>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 숨겨진 비밀을 다루고 있습니다. 뉴캐슬 대학의 사회지리학과 교수인 저자는 서양 세계의 사상, 향수와 기억의 지리학과 정치 문제, 반인종주의와 ‘백인성’의 국제역사, 유럽 아방가르드의 지리학적 이론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런던 근처에 있는 작고 오래된 마을 에핑(Epping)에서 태어난 저자는 어린 시절의 저처럼 어른들의 눈을 피해 언제라도 숨을 수 있는 비밀 장소 만들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과 J. G. 발라드의 <물에 잠긴 세계>를 즐겨 읽었던 그는 장소야 말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런던이 비대해지면서 자신의 고향을 삼켜버린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지리학의 다양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묘하게 끌리는 제목도 그렇지만, 이번에 여행한 터키에 있는 카파도키아의 지하도시를 목차에서 발견하고는 바로 주문해서 터키로 가는 여행짐에 집어넣었습니다. 기왕에 이야기를 꺼냈으니 카파도키아의 지하도시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방문한 곳은 터키 카파도키아 지방의 데린쿠유(Derinkuyu)에 있는 지하도시입니다. 터키어로 ‘깊은 우물’이라는 뜻을 가진 데린쿠유의 지하도시에 들어가기에 앞서 가이드는 닭을 치던 주민이 자꾸만 사라지는 닭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고, 이 지하도시의 규모는 3만 명이 생활하던 공간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지상을 점령한 적을 피해 지하에서 양까지 치면서 생활하고, 때로는 양을 지상으로 방목하기까지 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석연치 않았던 대목들은 이 책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데린쿠유의 지하도시는 8개의 층에 걸쳐 조성될 정도로 방대한 규모입니다. 위쪽으로 주거공간이 있고, 마구간과 식품창고들까지 있고 맨 아래층에는 지하교회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하교회의 규모는 작은 주거공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큰 편인데도 20여명이 들어서면 꽉 들어찰 정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상주하였다는 도시규모에 비하면 교회의 규모는 턱없이 작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데린쿠유의 지하도시는 적이 침략해왔을 때 임시로 대피하던 시설로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8세기 경 카파도키아의 데린쿠유 지역은 비잔틴 제국의 변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이교도들의 침략이 잦았기 때문에 이곳에 살던 기독교인들이 피난처로 삼기 위하여 만들었을 것으로 설명합니다. 카파도키아 지역은 응회암지대로 견고하면서도 깍아내기가 수월해서 일찍부터 돌집을 만들어 거주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원 1세기전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500년 전에 이곳에 살던 프리지아(Phrysia)인들은 목재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자연 상태 그대로의 언덕을 골라서, 자기한데 편리한 만큼 뚫고 파냈다.(94쪽)’라고 설명하였다고 합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프리지아인들보다도 1,000년이나 앞선 히타이트(Hittite)인들로부터 시작된 주거형태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데린쿠유의 지하도시가 방어용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특징적 구조를 보면, 출입구가 좁고 각층은 안에서만 작동이 가능한 커다란 돌문으로 봉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10여 킬로나 떨어져 있는 또 다른 대규모의 지하도시 카이마클리(Kaymakli)로 연결되는 인공터널이 예비되어 있어 위급한 상황에서 지하도시를 탈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권위자들은 데린쿠유의 지하도시는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다가 바깥이 위험해졌을 때만 사용하는 임시피난처로 예비해둔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저자는 세계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47개의 특별한 장소들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그곳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곳이기도 하며, 또는 우리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주인이 없는 장소이거나 고립된 곳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아주 먼 곳일 수도 있고, 바로 우리 주변에 있는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장소들입니다만, 한국에 있는 장소도 한 곳 등장합니다. 바로 죽은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 소개되는 기정동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조차 생소한 기정동(機井洞)은 1953년 남한과 북한이 맺은 평화협정의 산물입니다. 남북한 사이에 폭 4킬로미터의 비무장지대를 두면서 그 안에 각각 한 개씩의 정착촌을 두기로 한 것에 따라 남한에서는 대성동을, 북한에서는 기정동을 조성한 것입니다.

 

기정동이 저자의 관심을 끈 이유는 첫머리에서 감지할 수 있습니다. “기정동(機井洞)은 창문에 유리조차 끼우지 않은 고층건물 안에 조명등만 켜놓은 가짜 장소이다. 이곳에는 주민도 없고, 방문객도 들어갈 수 없다. (…) 북한의 기정동, 일명 ‘평화마을’은 남한의 잠재적 망명자를 유혹하기 위해서,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의 발전과 현대성을 과시하기 위해서 지어졌다.(180쪽)” 남한의 평화마을 대성동이 벼농사를 짓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것과는 대조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죽은 도시’로 분류된 것 같습니다.

 

서울역 고가도로 공원화사업에 관하여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의 경관>이라는 제목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오래 전에 건설되어 노후화된 고가도로가 도심의 경관을 해치면서도 교통의 흐름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는 이유로 대부분 철거되고 있는 상황에서 유독 서울역 고가차도를 공원화하여 남겨두겠다는 서울시장의 발상은 뉴욕의 하이라인파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고가차도에 나무를 심은 커다란 화분을 늘어세우고 고가도로 하단에는 줄기나무를 늘어뜨리는 방식의 설계가 1등으로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흉물스러운 고가차도를 도심의 스카이라인과 조화를 시키기 위해서는 웬만큼 단장하지 않고서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만큼 도시와 자연이 공존하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점을 저자는 <시간의 경관>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경관>에 등장하는 장소는 역시 뉴욕의 라과디아 플레이스와 웨스트 휴스턴 스트리트가 만나는 길모퉁이에 있는 1,000제곱미터의 공간입니다. 울타리를 쳐서 사람들의 출입을 금한 이 공간은 일종의 생태공원입니다. 1978년 미술가 앨런 손피스트가 17세기 이전에 뉴욕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붉은 삼나무, 흑벚나무, 풍년화, 미국담쟁이덩굴, 미국자리공, 아스클레피아스 같은 토착종 식물을 심어 조성하였습니다. 이른바 상실된 자연에 헌정된 <시간의 공간>이라는 제목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이 도시가 한때는 숲이었음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강과 샘과 자연적 노두(露頭) 같은 자연현상의 삶과 죽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반성의 장소로 활용하자는 주장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월이 흐르면서 <시간의 공간>은 나팔꽃이나 방가지똥 같은 외래종 잡초들의 침입으로 오염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곳은 폐쇄된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개방된 실험실’로 여러 종의 식물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라고 손피스트는 해명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작가의 주장에 대하여 저자는 “그것이 사실이라면 <시간의 공간>은 공허한 기념물일 뿐이다. 이 장소가 이 도시의 다른 녹색 공간들과 차별화되는 요소는, 바로 이곳이 과거를 엄밀하게 환기시킨다는 점이다.(60쪽)”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저자는 여러 도시에서 자주 조성되는 환경 미술, 또는 대지 미술의 상당수가 넓은 자연경관 안에다가 방향상실한 듯한 인간의 장소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하기도 합니다.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서울역 고가차도 공원화사업도 큰 고민 없는 전시행정의 일환이 아닐까하는 우려가 생깁니다. 자동차 전용도로가 공원화되면서 사람의 통행이 자유롭게 되면 마포대교의 대안으로 활용하려는 사람들도 나타날 수 있을 것이며, 도로공원에 늘어놓은 시설들이 공원 아래로 떨어지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내던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 공원 아래로 지나는 사람이나 차량이 크게 피해를 입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997년 요트를 타고 북태평양을 항해하던 찰스 무어가 발견한 북태평양의 거대한 쓰레기 구역(GPGP, Great Pacific Garbage Patch)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경고합니다. 주로 플라스틱과 어망이 해류를 따라 흐르다 모여들어 만들어낸 GPGP는 그 규모가 한반도면적(22만㎢)의 7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버린 플라스틱 병이 강물에 흘러들고, 강물을 따라 바다로 나간 플라스틱 병이 해류를 타고 흘러가다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이 이곳이니 쓰레기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쓰레기 섬이 결국은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환경에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가 인간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 가까이 있는 도심하천 가에는 오래 전에 들어온 너구리 한 쌍이 퍼뜨린 새끼들이 이제는 영역을 다툴 정도로 개체 수가 늘어났을 뿐 아니라 처음 들어온 너구리들이 사람들 눈에 거의 띄지 않게 숨어 다니던 것과는 달리 요즘 너구리들은 대낮에 산책길을 어슬렁거리기도 합니다. 생태학자들은 자연과 사람들 사이의 간격이 좁혀진 것을 반기는 것 같습니다만, 수의학자들은 이들 야생동물을 통하여 광견병과 같은 치명적인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당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자가 살고 있는 영국의 뉴캐슬은 물론 호주의 멜버른, 노르웨이의 오슬로,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캐나다의 토론토, 가까운 일본의 삿포로 같은 대도시에서는 작은 여우들이 도심에 출몰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토종 여유가 멸종단계에 있기 때문에 도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날을 기대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멧돼지가 도심이 출몰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보면, 멀지 않은 앞날에 우리나라의 도심에서 여우를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저자는 이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 토포필리아(Topophilia), 즉 ‘장소에 대한 사랑’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수의 지도에서만 발견되거나 심지어는 어떤 지도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장소들을 찾아가는 여행을 통하여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심리적 욕망을 채우고, 장소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나가며, 우리를 자연으로 연결시켜 나가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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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2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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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스페인을 여행하기에 앞서 <돈키호테1; http://blog.joins.com/yang412/13716932>을 미리 읽었지만, 돈키호테가 숭모하는 여인 알돈사 로렌조, 즉 둘시네아 공주가 등장하는 장면이 없어 묘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행 중에 가이드가 소개하는 뮤지컬 <돈키호테>에는 둘시네아 공주가 등장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돈키호테2>를 읽어 확인해볼 필요가 생겼습니다.

 

1605년 세르반테스가 발표한 「돈키호테(1편)」는 같은 해에 6판까지 나올 정도로 인기를 끌었지만 정작 세르반테스는 판권을 출판사에 양도하는 바람에 경제적인 이득은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세르반테스가 바로 2편을 내놓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1614년에 타라고나에서 누군가 ‘알론소 페르난데스 아베야네다’라는 필명으로 <돈키호테> 2편를 출판하자 이를 참지 못한 세르반테스가 67세의 고령을 무릅쓰고 2편을 써냈다고 합니다.

 

제1편은 라만차 지방의 시골양반인 알론시 키하노가 기사소설을 지나치게 탐독한 나머지, 스스로 악을 물리치며 약한 자를 보호하는 편력기사로 활약해 보겠다며 위해 마을을 떠나 좌충우돌하는 이야기입니다. 1편을 읽고 돈키호테는 정신 나간 괴짜가 맞다고 했더니 속에 담긴 의미를 다시 새겨보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사실 <돈키호테>가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에도 꾸준하게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주요 등장인물인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각각이면서도 하나가 되어야 하는, 즉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 성격이 조화를 이루는 삶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할 최종의 가치라는 점을 설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소설을 분석적으로 읽는 고수들이 내놓은 개념일 것이고, 저와 같은 속물들은 그저 읽히는 대로 느끼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제2편은 돈키호테의 세 번째 출정으로 시작되어 되는데, 기사대회에 나가서 이름을 날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돈키호테는 전편을 통하여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 가는 곳마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넘칩니다. 그들은 돈키호테를 놀려보려 즐거움을 얻으려는 세속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를 걱정하는 마을 사람들은 돈키호테의 출정을 방해하는데, 특히 같은 마을의 학사 삼손 카라스코는 ‘거울의 기사’로 변장하고 돈키호테와 대결을 펼칩니다. 처음에는 돈키호테에게 패하지만 결국 바르셀로나에서는 돈키호테를 굴복시키고 마을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집으로 돌아온 돈키호테는 평범한 목부로 살려고 결심하지만 병이 들고, 결국 제정신을 회복하여 기사소설을 전부 태워버리라는 말을 남기고는 숨을 거둡니다. 주인공이 죽는다는 것은 3부의 가능성을 없애는 셈입니다.

 

제2편에서는 산초 판사가 영주가 되어 뛰어난 관리능력을 보여주는 장면도 나옵니다. 결국 앞서 말씀드린 현실과 이상주의가 대립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합일점을 찾아낸다는 의미를 감추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편보다 나은 속편이 없다는 것처럼 삽입된 액자소설들이 탄탄하게 구성된 1편과는 달리, 2편은 마치 쪽대본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의 드라마에서 것처럼 사건이 연속적으로 나열되는 단순한 구성이라는 점이 실망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2편의 주인공은 돈키호테가 아니라 산초 판사가 주인공인 듯하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돈키호테>에서 궁금했던 둘시네아공주는 공식적으로는 등장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돈키호테가 산초와 같이 둘시네아공주를 만나러 가지만 산초의 농간 때문에 엘 토소보의 시골아낙네를 둘시네아공주라고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돈키호테와 둘시네아공주의 달달한 사랑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읽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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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길을 걷다 - 펜 끝 타고 떠난 해피로드 산티아고
김수연 지음 / 큰나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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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잘 다니던 직장을 걷어치우고 해외여행에 나서는 것이 그리 낯선 일이 아닌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결정이 쉽지 않은 것은 다양한 것에 대한 불안감이 제일 큰 요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정은길님은 <나는 더 이상 여행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http://blog.joins.com/yang412/13743679>라고 단호하게 결심을 하였던 모양입니다. 제 경우는 장기간 해외를 돌면서 구경을 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 가능한 여유를 모아서 여행을 다니는 쪽으로 선택을 하였습니다. 다만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만큼은 언젠가는 꼭 걸어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한 달 이상의 여유를 낼 수 없는 형편이라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김수연님의 <마음 [길을] 걷다>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같이 걷는 느낌으로 읽은 책입니다. 제 경우는 특별하게 종교적인 이유가 있거나, 혹은 마음을 다스려야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걷는 것이 좋아서... 걷기에 좋은 길이라고 해서 걸어보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김수연님은 마음에 쌓여가는 무언가로 인하여 불편해진 마음을 다스려볼 요량으로 떠났던 모양입니다.

 

지금까지 만난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분들은 대부분 혼자만의 생각을 다듬기 위한 순례길이었던 것 같습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와 말을 붙이고 정서적으로 교감을 즐기는 일반적인 여행과는 색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즉, <마음 [길을] 걷다>의 저자는 색다른 방식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시선을 스스로의 내면으로 향하기보다는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교감하고, 또 누군가를 찾아서 주변을 살피는 모습입니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사람들이 워낙이 많아지다 보니 다양한 모습도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습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얻은 느낌을 사진을 곁들여 적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고,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는 경우도 특이했습니다.(정진홍,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 http://blog.joins.com/yang412/13050186), 그런데 김수연님은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만난 사람이나 건물 등을 펜으로 그린 그림을 곁들인 점이 특이하였습니다.

 

예전에 일을 쉬는 기간 동안에 매일 하루에 20킬로미터 씩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대체로 5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습니다. 저자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하루 20~25킬로미터씩 꾸준하게 걸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산티아고 순례길이 800킬로미터에다가 대서양을 만나는 피니스테라까지 다녀오려면 92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주파하려면 매일 꾸준하게 걸어서 40여일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오게 됩니다. 우선 건강이 가장 중요할 것 같습니다. <마음 [길을] 걷다>에서도 잠깐 언급이 되었습니다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가 숨을 거두는 여행자도 있는 모양입니다. 특히 연세가 있는 분들이 고위험군이 된다고 합니다.

 

숙소나 식사 등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담은 것은 아닙니다만, 여정을 꼼꼼하게 정리하고 있는 것도 특징입니다. 특히 만남에 무게를 두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나서는 사람들은 개인마다 특성이 다르니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게 된다고 합니다. 동행이라면 같이 가는 사람의 사정을 감안하여 일정을 맞추어야 하겠지만,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과 일정을 맞추어 동행하다시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어떻거나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 지금 삶에 대한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고 하니 여행을 통하여 스스로를 성찰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대로 잡게 되신 것 같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저자는 그리고도 두 개의 다른 카미노 길을 더 걸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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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이상 여행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 이제 복잡함과의 결별이 필요할 때
정은길 지음 / 다산3.0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이번에 터키를 여행하면서 들고 갔던 책입니다. ‘더 이상 여행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는 제목에 끌려서입니다. 하지만 읽은 뒤에는 무언가 남는 것보다는 의문이 더 많이 남은 것 같습니다. 우선 저자와 남편은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1년간의 세계여행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왜?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미국 횡단을 시작으로 남미와 아프리카, 중동, 유럽 등 335일 동안 35개국의 130개가 넘는 도시에서 잠을 잤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한 도시에서 평균적으로 3박을 한 셈입니다. 이동하는데 시간이 들었을 테니 그 도시에 2일을 머물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틀 동안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궁금합니다. 여행 이전에 복잡하기만 했던 삶이 본질에 집중한 심플한 여행을 통하여 거짓말처럼 쉬워졌다고 합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행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인 것 같습니다. 훌쩍 여행을 떠나듯 복잡한 일상과 결별해야 한다는 내용을 1부에 담았습니다. 굳이 여자의 삶을 복잡하게 만드는 3 가지 두려움으로 자유를 택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혼자라는 두려움, 휴식에 대한 두려움을 들었고, 여쟈의 삶이 쉬워지는 다섯 가지 일상의 공식으로 익숙한 것들과 멀어진다(분리), 제2의 시선을 갖는다(관점), 내 자신을 재정의 한다(이름), 글쓰기 근력을 키운다(기록), 그리고 미모보다 건강을 택한다(건강)을 들었습니다. 일상을 여행하듯 살아보라는 제안을 하는 2부에서는 일상의 여행을 방해하는 열 가지 족쇄와 여행자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열 가지 힘을 두 개의 장으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여행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에 담은 저자의 생각은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혹은 여행을 하면서 생각한 것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자가 말하는 것들은 굳이 해외여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양한 책들을 읽어서 얻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자 역시 책에서 읽은 구절들을 인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을 보면 저의 생각이 크게 틀린 것은 아니지 싶습니다. 어쩌면 저자는 전자책에 다양한 책들을 담아갔을지도 모릅니다. 여행에서 책이 빠지면 숙소에서 쉬는 동안 혹은 비행기 등으로 이동하는 동안을 사유의 시간으로 삼거나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버려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제 경우는 아직 전자책을 읽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지금도 종이책을 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해부터 아내와 함께 해외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저야 말로 아내와 함께 하는 해외여행을 더 이상 미루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세상 살아가는 방법보다는 방문하는 곳에서 만나는 다양한 것들을 통하여 그곳의 역사,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하여 공부하여 앎을 넓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같은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실감한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굳이 1년이라는 긴 시간을 투자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지 않아도, 열심히 일하면서 때로는 여행을 통하여 쉬는 것으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들이라는 생각입니다.

 

저자가 이 책에 담은 내용들은 지난 1년 동안의 여행에서 얻은 경험보다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것들이 더 많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보니 일상에서 벗어나 1년을 해외에서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담아낸 마이케 빈네무트의 <나는 떠났다 그리고 자유를 배웠다; http://blog.joins.com/yang412/13732197>나, 린 마틴의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 http://blog.joins.com/yang412/13581650>와는 달리 여행기가 아니라 자기계발서의 범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더 이상 여행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정은길 지음

304쪽

2015년 7월 27일

다산3.0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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