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 셸터 - 2023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작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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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함께 나는 기억한다, 과거를 과거에 묶어두기 위해라는 광고 문안에 끌려 읽게 된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의 <타임 셸터>입니다. 불가리아 작가 책으로는 처음인 듯합니다. 작가의 세 번째 장편소설인 <타임 셸터>2023년 인터네셔널 부문의 부커상을 수상했다고 합니다.


제목이기도 한 타임 셸터(time shelter)에 대한 조작적 정의가 분명한 것은 아닙니다만 이야기에 등장하는 가우스틴의 말에 따르면 오늘날 기억을 잃은 사람들의 대다수가 자발적으로 과거로 돌아가 숨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과거를 시간대피소라고 할 수 있을 거란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억을 잃는 사람들은 알츠하이머병을 비롯한 치매 등 어떤 이유에서든 기억 쇠퇴를 겪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시간대피소를 마련해주는 요법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자들의 내면의 시간과 일치하는 공간을 창조해내는 것입니다. 단순히 작은 공간일 수도 있고 그 공간을 확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우스틴은 과거요법이라고 하는 진료소를 열게 되었습니다. 처음 마련한 과거요법은 1965년의 소환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가우스틴의 첫 번째 진료소는 스위스에서 문을 열었는데, 이는 토마스만의 <마의 산>을 기리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치매환자를 위한 비약물요법 가운데 회상요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환자의 지나온 삶과 관련된 것(과거 사진을 대표적으로 사용합니다)을 이용하여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훈련을 반복하면서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치료법입니다.


가우스틴의 과거요법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됨에 따라 다양한 시기의 공간을 마련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도 같은 성격의 진료소들이 설치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덴마크의 항구도시 오르후스에는 옛날식 주택으로 이루어진 민속마을을 조성하여 여행객들에게 과거의 삶을 구경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특정 시간대에는 기억상실 환자들이 입장하여 과거를 회상할 수 있게 합니다.


시간대피소에서 주목하는 감각은 후각입니다. “나는 기억의 텅 빈 굴에서 마지막으로 떠나가는 것은 향기의 기억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후각이 일찍 형성되는 감각이기 때문일 테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것은 맨 마지막에, 머리를 땅에 처박고 냄새를 킁킁거리는 작은 동물처럼 떠나간다.(121)”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작가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대한 색다른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오디세이아>는 트로이전쟁의 영웅 오디세이아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을 이야기합니다. 포세이돈과 엮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험난해지는데, 신들의 도움으로 위험에서 빠져나오기도 하고 요정 칼립소에 붙들려 행복하게 보내는 시절도 있습니다. 자신과 함께 하면 불멸의 삶을 주겠다는 칼립소의 제안을 뿌리치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로 한 결정은 일종의 시간대피소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고향에 돌아간 오디세우스는 칼립소와 보낸 시간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를 생산하고 있다.(172)’는 명제를 내놓으면서 유럽사회에서는 과거로의 회귀하기 위한 국민투표가 진행됩니다. 나라마서 국민들이 선호하는 과거의 시점을 결정하는 국민투표가 실시된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나라마다 국민들의 성향이 다른 탓에 그 시기가 제각각이라는 점입니다.


화자가 불가리아 국민인 까닭에 불가리에 대한 이야기들이 등장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불가리아 항공은 공항에 도착하면 파샤 흐리스토비가 부르는 <불가리아 장미 한 송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는 이야기와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한 다음 승객들이 박수를 친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리고 불가리아 전통의 축제의 현장도 묘사하고 있어 지난해 다녀온 불가리아 여행에 관한 추억이 소환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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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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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펀트래블의 일본근대문학기행에서 와세다 대학의 무라키미 하루키 도서관을 찾아가는 일정에서 누군가 추천을 해주셨던 것 같습니다. 무려 768쪽이나 되는 이 책은 43년만에 완성된 책이라고 합니다. 하루키는 등단 이후 다양한 매체에 글을 발표했는데 대부분 책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1980년 문예지 문학계에 중편소설로 발표되었지만 유일하게 책으로 발표되지 않은 채였습니다. 하루키는 2020년 코로나19로 인하여 사람들 사이에 벽이 세워질 무렵 이 작품을 새로 다듬기 시작하여 2024년에 책으로 내놓게 되었습니다. 출판사에서는 하루키가 43년간 견고히 구축해온 세계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한 권에 고스란히 담겼다.’라고 했습니다.


그로서는 드물다고 할 작가후기에서 하루키는 앞뒤 사정이 있었지만, 덜 익은 채로 세상에 내놓고 ㅁㄹ았다는 느낌이 들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등단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는데 매우 중요한 무엇을 담아내려 했지만 필력이 충분하지 못했었다고도 했습니다. 1982년 무렵 처음의 중편소설의 줄거리에 전혀 다른 이야기를 덧붙여 동시에 진행하는 발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 가지 이야기를 교대로 진행하다가 마지막에 하나로 합친다는 구상이었습니다.


이야기는 1, 2,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를 완성해서 묵혀두는 사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2부와 3부를 이어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1부에서 화자는 열입곱 살이 되던 해에 그 도시(뒤에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라고 나옵니다)에서 온 열여섯 살 소녀와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 도시에 살고 있는 몸통에서 떨어져 나온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그 도시에 가려면 그냥 원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녀와 긴밀한 관계를 맺을 시간적 여유와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해 안타까워하다가 결국은 그녀가 살고 있는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가게 됩니다. 도시의 성문에 서자 문지기는 그림자를 떼어내야 도시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그림자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도시는 그와 그녀가 만들어낸 상상의 장소일 수도 있습니다.


도시에 들어가게 된 그는 도서관에서 일하게 됩니다. 그가 하는 일은 오래된 꿈을 읽는 일이다. 그렇게 일을 시작하고서 도서관에서 일하는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되지만, 그녀는 그와 만났던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림자가 한 일을 몸통이 알 수가 없다는 것이겠지요. 그녀와 함께 일하는 사이 그가 성문 앞에서 떼어놓은 그림자를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고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그는 그림자와 함께 성을 탈출할 계획을 세웁니다. 남쪽 언덕 너머에 있는 웅덩이가 도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웅덩이로 가늘 길에 벽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너희는 벽을 통과하지 못한다. 설령 하나를 통과하더라고 그 너머에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다. 무슨 짓을 하든 결과는 똑같아.(206)”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벽은 그들을 막지 못합니다. 그림자와 함께 웅덩이까지 오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는 그림자를 탈출시키고 자신은 도시에 남겠다고 합니다.


2부에서는 어떤 영문인지 성에서 현실세계로 나온 화자가 시골에 있는 도서관의 관장으로 일하기 시작하는데, 전임관장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와 죽은 전임관장이 등장하여 화자와 도서관 직원 소에다씨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M**라는 초능력을 가진 소년이 등장하여 결국은 그림자 없는 성으로 들어가 화자의 역할을 대신하게 됩니다. 3부는 그림자 없는 성에 들어갔던 화자가 현실세계로 돌아오는 순간에서 마무리가 됩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것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 벽이야. 누구도 이 벽을 넘을 수 없어. 누구도 이 벽을 부술 수 없고.(45)”라고 문지기가 이야기했던 것과는 달리 화자나 M**가 벽을 통과할 수 있었던 점도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는 듯합니다.


이 소설에서 특이했던 점은 그림자 없는 성에서 에도 성의 분위기가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림자 없는 성의 벽은 잉카문명이 남긴 성벽의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이야기에 등장했던 인물들과의 관계가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은 채 마무리된 탓인지, ‘그래서?’라는 의문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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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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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일본근대문학기행에서는 나쓰메 소세키의 산방을 둘러보는 일정도 있었습니다. 도쿄대학의 교정에서 산시로 연못을 돌아보는 일정이 있어 소세키의 <산시로(1908)>를 미리 읽었는데, <그 후(1909)><(1910)> 등 세 작품이 소세키 초기의 3부작이라고 했습니다. 3부작이라고 해서 산시로의 주인공의 삶을 시기별로 조명한 것인가 보다 싶었는데, 먼저 읽은 <>의 주인공은 물론 이야기의 줄거리도 전혀 달랐습니다. 세 작품을 모두 읽고 보니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주인공 세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유별났다는 생각입니다.


남녀 사이의 사랑이야기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어 왔으므로 일본의 근대문학에서도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나 봅니다. <산시로>의 경우는 대학에 갓 입학한 젊은이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다루었습니다. 마음에 두었던 여인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 <그 후>에서는 주인공 다이스케와 친구 히라오카는 또 다른 친구 스가누마의 여동생 미치요를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라오카가 먼저 다이스케에게 고백을 하면서 미치요는 히라오카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다이스케가 두 사람의 결혼을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혼했던 히라오카는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신문사로 이직을 하게 되면서 미치요에게 소홀하게 됩니다. 미치요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게 된 다이스케는 미치요와 결혼을 하기로 합니다. 친구인 히라오카에게 상황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집에서 강요하는 결혼 상대를 거절해야 했습니다.


다이스케는 미치요와의 관계를 되돌리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의 뜻에 따르려면 인간의 법도를 어겨야 하는 상황입니다. 다이스케가 히라오카에게 미치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고백하였고, 결국 히라오카가 물러나기로 합니다. 다만 병중에 있는 미치요가 건강을 회복한 뒤에 정리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다이스케의 아버지에게 상황을 알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주선한 결혼을 거절한데가가 친구의 아내와 결혼하겠다고 나선 다이스케에게 절연하고 말았습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자 다이스케는 일자리 구하기에 나섰습니다.


다이스케의 노동관은 독특합니다. 교토-오사카 지역에 있는 은행의 지점에서 근무하던 히라오카가 도쿄로 전근하면서 다이스케를 찾아왔을 때, 부유한 아버지 덕에 직업도 없이 유유자적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 히라오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일하는 것도 좋지만, 만일 이을 한다면 단지 생활만을 위한 일이어서야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모든 신성한 일이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빵과는 무관한 법(107)”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먹고사는 것이 목적이고 일하는 것이 방편이라면, 먹고살기 쉽게 일하는 방법을 맞추어갈 것이 뻔하므로 성실하게 일에 매달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미치요와 함께 하려면 일을 해야 하는 다이스케는 앞으로 어떤 일을 어떻게 해나가게 될까요? <그 후>라는 이야기의 제목은 연모하던 미치요가 어려운 지경에 빠지자 미치요의 삶을 되돌려 놓아야 하겠다고 나서는 다이스케의 모습을 그렸다고 할까요? 그보다는 지금부터 다이스케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이야기할 속편에 붙여야 할 제목이 아닐까요?


의절하겠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러 온 형이 돌아가자 다이스케는 일자리를 알아보고 오겠다.(349)”며 집을 나와 폭염으로 들끓는 거리로 나선 다이스케가 타들어 간다. 타들어 가.”라고 중얼거리며 전차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이 움직이는 느낌으로 머리도 어지럽게 돌기 시작합니다. 온통 새빨개진 세상이 그의 머릿속을 중심으로 뱅글뱅글 불길을 내뿜으며 회전합니다. 그리고 다이스케는 머릿속에 다 타버릴 때까지 계속 전차를 타고 가겠노라고 결심했다.(350)’라고 이야기의 끝을 맺었습니다. 이번에 읽고 있는 일본근대문학 작품들의 특징은 끝이 분명치 않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열려있는 마무리인 것이지요. 후속편이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속편을 예고한 것이라기보다는 열린 결말로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는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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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싱한 밀 이삭처럼 - 고흐, 살다 그리다 쓰다 열다
빈센트 반 고흐 지음, 황종민 옮김 / 열림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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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살다 그리다 쓰다라는 부제가 달린 제목이 눈길을 끌어 읽게 된 책입니다. 그런데 막상 읽기 시작하자 고흐가 쓴 편지 가운데 골라낸 글들을 짜깁기 한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글들을 묶고 있는 제목들, ‘1. 열정과 희망의 밀알을 품다, 2. 미술과 자연의 밀 이삭을 틔우다, 3. 사랑과 죽음의 밀밭에 서다를 보면 그림에 대한 열정을 가지게 된 계기에서부터 실행에 옮기는 과정 그리고 그림을 그리면서 느끼는 감정을 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그림그리기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그림을 어떻게 팔아야 할 것인가 등 현실적인 고민도 다루고 있어서 그와 같은 대목이 주제와 어떻게 부합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고흐의 편지들을 묶어낸 <반 고흐, 영혼의 편지;  https://blog.naver.com/neuro412/221891524633><반 고흐, 영혼의 편지2;  https://blog.naver.com/neuro412/221893112125>를 이미 읽었기 때문에 <싱싱한 밀 이삭처럼>에 나오는 글들이 익숙할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옮긴이가 <고흐의 편지를 우리말로 옮길 기회를 마련해주어 출판사대표에게 감사하다고 언급하였기 때문에 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만, 어떠한 원전을 우리말로 옮겼는지도 궁금해졌습니다. 옮긴이가 독일어를 전공했다고 해서입니다. 누리망의 자료를 찾아보면, 반 고흐는 1886년까지 거의 모든 편지를 네덜란드어로 썼고, 그 이후부터는 거의 항상 프랑스어로 썼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의 비율은 대략 2:1이었습니다.


편지 역시 쓴 이의 주관에 따라 쓰여지기 때문에 편지의 내용이 사실일 것이라는 믿음도 편견일 수 있습니다. 옮긴이에 따르면 고흐를 치료한 가셰 박사에 관해서도 고흐 역시 초기에는 가셰 박사는 절대 믿어서는 안될 것 같다. 첫눈에 박사는 나보다 더 아파 보인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곧 준비된 친구이자 새 형제 같은 존재라고 호의를 나타냈다고 합니다. 심지어 가셰 박사는 고흐이 병을 잘못 진단하고 그림을 선물로 달라고 부탁하여 고흐를 착취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죽음으로 이끈 위선자라는 연구결과도 소개합니다.


옮긴이가 뽑은 대목 가운데 인상적인 대목을 꼽아보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나는 그림을 배운 적이 없어서 다행이다.(109)”이라는 글에 이어 화판을 놓고 풍경을 바라보면 자연이 나에게 말을 걸었고, 자연이 내게 이야기한 내용을 내가 속기로 받아썼음을 깨닫는다고 했습니다. 자연을 보고 느낀 바를 붓가는대로 그려냈다는 설명입니다. 고흐가 기존의 화법에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표현방식을 창조해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림이었기 때문에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세월이 흐른 뒤에 새로운 사조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연을 오랫동안 열심히 관찰한 뒤에야 비로서 확신이 생긴다. 위대한 거장이 더없이 감동적으로 그린 걸작은 삶과 현실 자체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신념이다. 삶과 현실을 깊이 파고들어 탐색해야만 영원히 사실로 존재하는 확실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112)”는 설명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평온하고 규칙적인 삶이 반드시 필요하다.(126)’라는 대목이 있고, ‘화가는 색뿐만 아니라, 희생과 극기와 비애로 그림을 그린다.(137)’라는 대목도 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인기를 끌던 일본 화가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일본 화가들에게서 부러운 점은 이들의 작품에서는 모든 것이 매우 선명하다는 것이다. 칙칙하거나 서둘러 그린 듯한 작품이 전혀 없다. 이들의 작업은 호흡처럼 단순하다. 조끼의 단추를 끼우듯 손쉽게 몇 번 쓱쓱 붓을 놀려 인물을 그린다.(178)’라고 했는데, 처음 보는 사조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마도 죽는 것은 사는 것만큼 어렵지 않을 것이다.(254)’라는 대목은 그의 말년에 정신적 혼란 속에서 적은 글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고 느꼈는지 공감이 가면서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우리네 속담을 기억했어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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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기 창비세계문학 41
하야시 후미코 지음, 이애숙 옮김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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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다녀온 일본근대문학기행에서 도쿄에 있는 하야시 후미코 기념관을 찾았습니다. 기념관에 가는 길에 로쟈 이현우 선생님이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삶과 작품에 대하여 설명하는 가운데 <방랑기(放浪記)>가 그녀의 대표작이라고 소개하였기에 읽게 되었습니다.


옮긴이는 서민의 서민에 의한, 서민을 위한 문학이라는 제목의 작품해설에서 <방랑기>가 하야시 후미코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이라고 했습니다. 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이주할 무렵부터 약 5년간에 걸쳐 쓴 공책 6권 분량의 <노래일기(歌日記)>에서 발췌한 이야기를 192810월부터 20회에 걸쳐 <뇨인게이주츠(女人藝術)>에 연재하면서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1930년에는 카이조오샤(改造社)에서 속방랑기(続放浪記), 그리고 1949년에는 루조쇼텐(留女書店)에서 방랑기3부를 출간하였다. 5년간에 걸친 <노래일기(歌日記)>를 기계적으로 3등분한 형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노래일기(歌日記)>는 발표되지 않은 부분을 남기고 후미코 자신이 파기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서 <방랑기(放浪記)>의 내용이 어느 정도 <노래일기(歌日記)>와 부합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방랑기>의 모두에 나는 숙명적인 방랑자다. 내게는 고향이 없다라는 대목이 나오지만 자신의 고향이 큐슈의 사쿠라지마가 고향이라고 밝혔습니다. 2부에서는 나는 사는 게 힘들어지면 고향을 생각한다.(276)”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기타큐슈의 초등학교에서 배웠다는 <그리운 내 고향>이라는 노래의 일부를 수록했는데, “깊어가는 가을밤 낯선 타향에서 / 외로운 마음에 나 홀로 서러워 / 그립다 고향 산천 보고픈 내 부모님이라는 내용입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 노래는 미국의 존 오드웨이가 작사 작곡한 노래 <Dreaming of Home and Mother>라는 가곡을 인도규케이(犬童球溪)가 개사한 <료슈(旅愁)>라는 노래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의 번안곡을 다시 번안하여 여수(旅愁)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는데, “깊어가는 가을밤에 낯설은 타향에 / 외로운 맘 그지없이 나 홀로 외로워 / 그리워라 나 살던 곳 사랑하는 부모형제 / 꿈길에도 방황하는 내 정든 옛 고향이라는 익숙한 가사는 누가 지었는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하야시 후미코는 <방랑기>에서 외지인과 결혼하여 고향에서 떠나야 했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행상을 하며 성장하다가 도쿄에 올라와서도 소설가의 하녀로 시작하여 목욕탕, 출판사, 재고점 등의 점원을 하거나 노점상을 하다가 식당과 찻집의 종업원을 거치는 등 먹고살기에도 급급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책을 사거나 빌려 열심히 읽으면서 시, 동화, 수필 등 다양한 글을 써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여 받는 몇 푼의 고료를 벌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만 해도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조차 잘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후미코는 생전에 자신의 소설은 쌀을 됫박으로밖에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양식이 되는 소설이다.”라고 했다는데, <방랑기>에 나오는 그녀의 삶은 봉지쌀을 사서 하루를 연명하는 그런 삶이었고 생활비가 부족하여 지인에게 돈을 빌리러 간 적도 있고, 그조차도 여의치 않을 때는 몸을 팔 생각까지도 했다고 적었습니다. 방랑기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그렇게 바닥을 헤매는 삶을 살면서도 글쓰기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은 그녀의 악착같은 삶을 응원하는 마음이 하나로 모인 탓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작가 조선작의 소설을 영화화한 <영자의 전성시대>가 시골에서 올라와 여급으로 일하다가 윤락녀가 된 영자의 삶을 다루면서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응원으로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방랑기>를 어렵게 읽은 이유는 이야기가 맥락이 분명치 않게 전개되는 점인데, 아마도 <노래일기(歌日記)>에서 발췌하여 연재하는 과정에서 정리가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또한 삶이 어려우면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시기, 동거하는 남성이 있으면서도 헤어진 옛 연인을 찾아가는 등 오락가락 하는 모습 등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사실 확인이 제대로 이루어졌나 싶은 대목도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전어 굽는 냄새에 집나갔던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옛말이 있는데, 일본에서는 꽁치 굽는 냄새가 계절을 알리는 신호(100)라고 합니다. 그런데 유곽에서는 기생들에게 매일 꽁치만 먹여 몸에 비늘이 떠다닐 것만 같다.’고 했습니다. 흔히 알기로는 꽁치는 비늘이 없다고 알려져 있는데 말입니다. 사실은 잔비늘이 촘촘하게 덮여있지만 어획과정에서 그물코에 걸린 꽁치가 몸부림치면서 많이 떨어져 나간 것이라고 합니다. ‘클로로포름 냄새가 식초 같다는 대목도 있는데(139), 평생 포르말린 냄새를 맡으며 일을 해온 제 경험에는 식초 냄새보다는 매큼한 냄새가 강하다는 생각입니다. ‘시클라멘 냄새가 불쾌하다는 대목 역시 공기정화식물인 시클라멘의 꽃에서는 상큼한 향기가 난다고 하니 그 향이 불쾌하다는 작가의 친구 토끼가 예민한 탓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문학가들과의 교류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이 결국은 질곡에서 벗어나는 힘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작가가 <방랑기>에서 읽었다고 하는 책들 가운데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것이 많은데, 일본사람들이 독서열이 대단하여 그 옛날부터 다양한 외국서적들이 번역되어 일본에 소개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방랑기>의 여러 곳에서 조선인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습니다만, 그 조선인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간토 대지진 직후에 조선 사람이 우물에 독을 탓다는 유언비어를 들은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 있었음에도 이에 대하여 교외에서는 조선인들이 큰일이라고 하던데요.(175)”라는 정도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조선인에 대한 아무런 차별의식 없는 평온한 시각이라고 설명합니다.


출간 당시 굉장한 대중적 인기를 누렸지만 문단에서는 그리 주목하지 않았던 <방랑기>였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여성주의(Feminism)에 입각한 분석이 이루어지면서 비로소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에 결박되는 를 거부한 채 오로지 예술에 의한 자아실현을 추구해나가는 삶은 한 여성 작가의 선 굵은 자기형성의 여정과 겹쳐진다. 여성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방랑의 삶과 파격적인 감성, 누구에게나 거리낌 없는 자유로운 창작이라는 장, 먹고살기 위해서 무엇이든 해내는 절박하고 튼특한 생활력, 여성은 가족안에 들어앉아 있는 존재라 여겨지던 1920년대의 사회를 향해 던지는 통렬한 자기주장이 <방랑기>.(449)”라는 해석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여성주의자들의 아전인수격 해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야시 후미코의 작품 활동 가운데 설명이 되지 않는 점이 더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발표된 <눈보라(吹雪)>, <()>, <목가(牧歌)> 등은 농촌을 무대로 전쟁의 참상을 다루어 반전이라는 개념이 들어간 작품들입니다. ‘천황폐하는 미치셨다면서 무정부주의를 선언했던 후미코였지만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내각정보부의 펜부대(部隊)의 장교로 참여하였고, 분게이주고운도(文藝銃後運動)의 강연회에도 참여하는 등, 군부의 전쟁 수행에 협력했던 것과는 다른 행보라 할 것입니다. 상황에 따른 변신이 그녀의 철학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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