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동시통역사, 기자처럼 뛰고 아나운서처럼 말한다 - 15년 경력 동시통역사가 전하는 생생한 방송통역이야기
이지연 지음 / 이담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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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동시통역은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국제학회는 말할 것도 없고, 중요한 외국연자를 초청하게 되는 경우에는 그분들의 말씀을 하나라도 놓치게 될까봐 동시통역을 하게 되는 경향이 생긴 탓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방송, 특히 생방송에서도 외국에서 들어오는 자료화면이나 인터뷰를 동시통역으로 진행하는 경우도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전공으로 하고 있는 분야의 경우는 발표하시는 분이 말씀하시는 원래의 의미를 느끼려다보니 때로는 동시통역을 이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보니 동시통역에 관한 제 경험도 꽤나 선구적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정부기관에서 일하던 2000년대 초반에 외국에서 초청한 연자의 발표를 당시만 해도 드물게 동시통역으로 참석하신 분들께서 이해하실 수 있게 해드렸던 경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열린 광우병관련 국제학회에 참석하여 발표했던 제 경험과는 다소 차이가 있어 이해되지 않았던 점을 지금까지 마음 한켠에 묻어두고 있었습니다만, 동시통역을 전문으로 하고 계신 이지연교수의 동시통역에 관한 에세이집 <방송동시통역사, 기자처럼 뛰고 아나운서처럼 말한다>를 읽고 어느 정도 궁금증이 풀리는 것 같습니다.

2003년 2월이던가 일본 동경에서 광우병관련 국제심포지엄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광우병과 관련된 한국정부의 대응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한 발표가 뒷날 PD수첩사건과 관련이 될 줄을 까맣게 몰랐습니다.) 관련된 정부기관들의 자료들을 모아서 정리해 발표자료를 만들어 보냈습니다만, 제가 발표할 시간보다 한 시간 전에 회의장에 도착해달라는 주최측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공식언어가 영어이고 동시통역이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시통역사와 미리 만나 발표할 내용을 체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동시통역사는 제가 준비한 발표원고 내용 뿐 아니라 발표원고에 포함되지 않은 애드립성 발표내용까지 꼼꼼치 체크를 하고 OK사인이 났습니다. 당연히 발표하는 동안 동시통역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우리 기관에서 동시통역을 진행할 때 동시통역사는 이런 절차를 요구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통역은 무난하게 진행되었습니다만(무난하다는 것은 완벽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전준비를 어떻게 하나에 대한 궁금증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다가 이지연교수의 에세이에서 해답을 얻었습니다. 동시통역사들은 통역의뢰를 받는 순간부터 관련분야에 대한 나름대로의 조사를 통하여 사전준비에 들어간다는 말씀인데, 사실은 발표하는 연자와 사전인터뷰를 통하여 사전준비과정에서 미흡했던 부분도 채울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일동 한국번역학회장님이 추천사에서도 짚었고 저자 역시 후기에서 “이 책은 방송동시통역의 실천 노하우와 체험담을 통역과 영어 공부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위해 비교적 쉽고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했다.(267쪽)”고 적은 것처럼, 이 책은 전문학술서라기 보다는 동시통역의 현장을 지켜온 베테랑 동시통역사의 현장경험을 진솔하게 전하고 있는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어 동시통역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특히 ‘9장 귀로듣고 글로 쓰는 번역’편에서 해외취재를 통하여 얻은 인터뷰자료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조심해야 할 것을 적고 있는데, 제 경험과 최근 마무리된 모방송제작자의 사례가 비교되는 것 같습니다. 오래 전입니다만, KBS의 목요리포트라는 프로그램에서 치매를 주제로 방영한 기획물을 자문한 적이 있습니다. 제작과정의 전반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국내 취재는 물론 미국의 4개 도시를 돌면서 정부기관 대학, 연구소 등을 방문하고 학자는 물론 정책입안자들까지도 만나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인터뷰내용의 번역을 전문번역사에게 의뢰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다가 프로그램에 참여해온 제가 하게 되었는데, 이지연교수의 말씀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영어권 사람들이라고 해도 귀에 익숙한 표준 발음이 아닌 지방색 짙은 사투리에 개인적인 언어습관까지 들어간 다양한 발음(168쪽)” 탓을 하면서 부족한 제 영어를 변명했습니다만, 들을 수 없어 끝까지 우리말로 옮기지 못한 부분이 있었는데 전후상황으로 보아 자료화면에 꼭 넣어야 하는 장면이었는데도 프로그램을 책임맡고 있던 기자는 방송은 팩트가 중요하기 때문에 명확하지 않은 부분은 잘라낼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자가 아닌 분들이 제작하는 프로그램에서는 전후사정을 감안한 의역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가진 것 같습니다.

전화통화를 동시통역하는 상황에 대한 저자의 설명, “상대를 마주하고 대화할 때는 표정이나 손짓, 시선 드의 일명 ‘바디랭귀지’가 추가되지만, 전화통화에서는 순전히 청각언어 외에는 추가정보가 제공되지않아 어려움이 많다.(96쪽)”는 말씀에는, 미국에 공부하러 간 초반에는 사무실에 놓인 전화벨이 울리면 외면했던 기억이 떠올라 다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습니다.

책에 대한 전체적인 소감은 동시통역의 현장분위기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씀과 함께 동시통역과 방송에서 사용하는 전문용어라고 할만한 것들에 대한 사전지식이 부족한 탓인지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겉도는 장면이 있었다는 점을 사족으로 붙여둡니다. 그리고 에필로그는 부록보다 앞에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작성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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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기독교 예술사
남성현 지음 / 이담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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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담북스에서 보내주신 남성현교수님의 <고대 기독교 예술사>를 받아들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의 학자의 손으로 고대 기독교 예술사를 정리한 결과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소개된 기독교예술은 중세 서양예술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다고 합니다. 남성현교수님은 고대 기독교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을 위하여 이 책을 기획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책에 담긴 도판의 대부분을 자신이 찍은 자료를 이용하였다고 하니 도판을 준비하기 위하여 쏟은 노력과 정성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기독교 예술이라는 제목을 보고서는 미국 시카고 미술관을 찾았을 적에 보았던 중세유럽의 기독교 미술작품들 기억이 났습니다. 거친 붓질에 검정색과 원색을 주로 사용한 작품들은 미술에 문외한인 제가 보더라도 르네상스 시대 이후의 미술품들과는 비교가 되어 보였습니다.

남교수님은 석관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는 고대 기독교 예술이 그리스-로마 문명으로 연결하여 발전하게 되는 과정도 추구하였고, 문학작품과 연계하여 해석하고자 하였다고 합니다. 모두 427쪽에 달하는 자료들을 시기별로 9개의 장으로 나누어 다루고 있습니다. 제1장에서는 고대 기독교 예술을 개관하면서 부딪히는 기본적인 문제들, 예를 들면, 제작 연대측정의 문제라던가, 복원의 문제, 기독교 예술을 구분하는 방법들을 개괄적으로 다루었습니다. 2장에서는 그리스-로마 문명에 나타나고 있는 기독교 예술의 흔적을 뒤쫓고, 3장에서 5장까지는 2-3세기에 걸쳐서 그리스-로마 문명을 어떻게 차용하여 기독교적인 발전을 해왔는지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6장부터 9장까지는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후의 로마문명의 변화가 기독교예술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고대 기독교 예술의 중요한 소재는 석관이라고 합니다. 석관에 부조형태로 새긴 조각작품을 통하여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아를르 고대 박물관에 남아 있는 석관응 4세기경에 제작되었는데, 출애굽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초기 기독교예술은 장례의식을 모티브로 시작하여 교회예술과 생활예술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는데 2세기 경에 되어서야 회화나 조각작품을 남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상현교수님은 생활용품을 비롯하여 조각작품, 회화, 모자이크 등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는 고대기독교 예술품들을 꼼꼼하게 챙겨 그 미학적 요소들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특히 그리스-로마의 문화와 기독교 예술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어, 고대 기독교예술 뿐 아니라 그리스-로마 문화의 예술품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4장과 5장에서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나오는 말씀들을 소재로 하여 구성된 작품들을 소개하고 해설하고 있어 성서에 관심을 가진 분들께도 도움이 될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초기 기독교예술이 교회예술이 아니라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장례공간이었다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생각합니다. 육체적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향한 갈망이 기독교예술의 근원적인 동기였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만, 기독교예술만의 특징만은 아닐 듯 합니다. 남교수님께서 그리스-로마 문화와의 관계를 천착한 것은 초기 기독교예술이 이교문화와도 교류가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로마문화로부터 다양한 요소들을 흡수하면서 발전하였다고 보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작성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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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개와 함께한 행복한 나의 인생
테드 게라소티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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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에 관한 책을 또 읽게 되었습니다. 묘한 인연이다 싶습니다만 최근에 아는 분들이 개에 관한 책을 준비한다고 해서 저도 관심이 가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떠돌이 개와 함께한 행복한 나의 인생>이라는 기다란 제목의 책은 저자가 묘한 인연으로 만나 함께 지낸 떠돌이 개와 함께 지내면서 그 개가 보여주는 다양한 행동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관련된 학술자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514쪽이나 되는 긴 이야기가 되고 만 것 같습니다.

제목이 꽤 길다 싶습니다만, 원제목 <Merle's door; Lesson from a freethinking dog>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저자는 여는 글을 통해서 책에 담은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개들을 변화시키려는 마음만 앞세우지 않고 우리 자신의 태도를 바꾼다면, 개들이 얼마나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백이다. (…) 개와 함께 사는 삶이란 개에게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 정신적이고 감성적으로 세상의 문을 열어 줌으로써 개가 가진 잠재력을 꽃피워 주는 일일 것이다.(5쪽)”

책을 모두 읽고 난 느낌은 여행작가 테드 케라소티가 만난 떠돌이 개 멀은 아주 특별한 개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제목처럼 생각이 자유로운 개, 즉 다른 개와는 생각과 행동이 다른 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개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도회지역에서도 그리고 일반적인 개에게 적용하는 것이 옳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삶의 모든 측면에서 개의 목줄을 풀어주어 개가 자기 코가 이끄는대로 마음껏 달리며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6쪽)”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에 온전히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자가 멀과 같이 생활한 장소가 와이오밍주의 그랜드 티턴 국립공원 지역이었다는 것입니다. 잭슨호수에 눈덮힌 산이 그림처럼 비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웃집에 가려면 차를 타고서도 한참을 가야하기 때문에 개 목줄을 채울 이유가 별로 없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저자가 멀을 만난 유타주 모압(Moab)에서 하루를 묵었던 생각이 납니다. 아치스 국립공원 근처에 있는 한적한 소읍입니다만, 콜로라도 강으로 이어지는 래프팅의 성지이기도 합니다. 멀은 인디언보호구역에서 나타난 떠돌이개입니다. “떠돌이개는 인간과 사회적인 유대감을 유지하며 확실한 주인이 없을 때는 주인을 찾는다. 반면에 야생의 개는 인간과 접촉하지 않고도 잘 살아가며 사회적인 유대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다른 개들과 맺는다.(35쪽)”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멀과의 만남을 통하여 늑대가 사람의 삶에 끼어들게 된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개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개에 대하여; http://blog.joinsmsn.com/yang41212325418>를 쓴 스티븐 부디안스키보다는 개에게 보다 우호적인 편이나, <개가 주는 위안: http://blog.joinsmsn.com/yang412/12329783>을 쓴 피에르 슐츠의 감성적 접근보다는 이성적 접근을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부디안스키는 개가 위험한 동물이라는 점을 경고한 바 있는데, 캐라소티는 미국에서 응급실로 이송된 환자 가운데 1.3퍼센트만이 개에 물려 치료를 받았을 뿐, 추락사고를 당하거나 자기 집에서 부엌칼에 베이거나, 자동차나 자전거에 치이거나, 과로로 쓰러지거나, 저녁을 짓다가 화상을 입거나, 잔디깍이 기계에 발가락이 절단되는 경우보다 낮은 확률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개에 물려 응급실을 찾는 환자가 1.3퍼센트 된다는 것은 문제가 크다고 보여지는 데이터란 생각이 듭니다.  

 

유타주 모압에 래프팅을 갔다가 만난 떠돌이개로부터 받은 특별한 느낌을 저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 개의 반짝거리는 암갈색 눈동자가 내 마음을 알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겐 개가 필요해요. 나 어때요?’ 지난 1년 동안 마땅한 개를 찾고 있던 나는 내 마음을 꿰뚫어본 녀석의 불가사의한 능력에 마음이 끌려 녀석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착한 개구나.’”(13쪽) 멀은 던진 공이나 막대기를 주워오는 것을 거부하거나, 새사냥에 쓰는 엽총소리에는 기급을 하지만, 소총을 쏘는 엘크사냥에는 앞장서는 등 특별한 행동을 보이는데, 아마도 떠돌면서 만난 사람으로부터 치명적인 기억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어떤 개 행동학자들은 멀이 나를 훈련시켰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런 의견은 개와 인간이 한집에 거주함으로써 서로 얻는 이득을 놓친 것이다.(184쪽)”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책을 읽다보면 멀에게 끌려 다닌 점도 적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여자친구의 개 브라우어가 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지만 재발하여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안락사를 하도록 권하지만, 멀이 노쇠하여 삶에 고통을 받을 때는 안락사를 고려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을 때까지 헌신적으로 돌본 것도 다시 생각할 부분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혹시 기르고 있는 개의 건강에 문제가 생겨 안락사를 고려하고 계신분이라면 수의학자 버나드 허쉬혼이 제안한 안락사 시행의 여섯 가지 기준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① 병세가 장기적이거나, 재발하거나, 악화되는가? ② 더 이상 아무런 치료도 듣지 않는 상황인가? ③ 개가 고통스러워하는가? 다시 말해, 신체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가? ④ 그 고통을 완화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한가? ⑤ 회복된다면, 당신의 개는 지병에 시달리게 될까? 건강한 개로서 스스로를 돌볼 수 없을 가능성이 큰가? ⑥ 회복된다면, 당신의 개는 더 이상 삶을 즐길 수 없거나 급격한 성격의 변화를 겪게 될 가능성이 큰가?(478쪽)“입니다.

저자는 “멀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서론 다른 종을 구분하는 분류 개념은 인강과 개가 아니라, ‘우리’(개, 사람)와 ‘그들’(야생동물)인 것이 분명했다.(280쪽)”고 적은 것처럼 멀이 저자들 대한 것도 자신의 판단기준을 적용한 것처럼 저자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고 자신의 판단기준으로 멀의 생각을 읽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개에 대하여>에서도 개가 사람을 속이는 행동을 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만, 캐라소티 역시 멀이 자신으로부터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행동을 보였지만 상황이 변하면서 다른 행동을 보이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황금색 골든리트리버종 개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끌리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사람보다 사는 시간이 짧은 개를 키우다가 죽음을 맞게 되는 경우에 개주인이 가지는 상실감을 가족을 사별하는 상실감에 못지않더라는 이야기를 적지 않게 들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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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무게
애니타 슈리브 지음, 조한나 옮김 / 북캐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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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타 슈리브의 미스터리소설입니다. 1873년 3월 5일 밤. 뉴햄프셔 해안에서 10마일 정도 떨어진 쇼울 아일랜드군도의 한 섬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스토리의 한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노르웨이에서 이민온 세 명의 여자들 중 두 명이 도끼로 살해되는 참혹한 사건입니다. 바닷가는 아니었지만 사건이 일어난 메인주에는 한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아주 한적한 시골동네에 있는 대학에서 열린 심포지움이었는데, 메인주는 미국에서도 아주 시골 느낌이 강한 곳이라고 합니다. 이런 시골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이 의외라 생각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메인 주의 루이스 H.F. 와그너 재판’의 법정증언과 지방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사건관련 자료를 토대로 구성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의 중심은 해당사건을 취재하기 위하여 현지를 방문한 사진작가 진과 그녀의 남편 토머스, 딸 빌리, 그리고 남편의 동생 리치와 그의 아내 애덜린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묘한 갈등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100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나는 아내와 남편, 형제들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이 빚어낸 끔찍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스터리소설이라서 스토리를 자세하게 요약하면 책을 읽으실 분들의 재미가 없으실 것 같아 생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살인사건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진작가와 100년 전 사건의 주인공인 마렌이 결정적인 순간에 보여주는 자신에 대한 통제력의 상실이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그런 선택을 하게 되기까지 주인공들-여기서 주인공들이라고 한 것은 100년 전 사건의 주인공 마렌과, 그녀의 사건을 뒤쫓는 사진작가 진을 지칭하는 것입니다-의 불안한 심리에 대한 묘사를 조금 더 자세하게 했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말이라고 하더라도 사법경찰의 수사실력이 형편없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보이는데 현장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진이 취재해서 밝혀낸 자료만으로도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이 범행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판단을 쉽게 내리기 어렵다 싶습니다. 사건당시의 정황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결국은 살아남은 자의 증언을 중심으로 수사가 진행되고 재판이 이루어져 무고한 생명이 사형을 당하는 2차 범행의 피해자가 된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진의 취재과정에서 확인된 마렌의 고백록이 사건 후 60여년이 지나 대학도서관에서 노르웨이로 보내져 번역까지 되어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해당사건에 대한 재심을 통하여 무고한 누명을 쓰고 죽은 사람에 대한 신원(伸寃)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작가가 글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뒷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말았습니다만, 정말 궁금한 것은 죽은 사람들의 남은 가족들이 사건의 진실을 전혀 몰랐을까 하는 점입니다.

제목인 ‘물의 무게’의 의미를 아직도 찾지 못했습니다. 물의 무게에 대한 설명은 두 번 볼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나는 물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것은 과학적인 영역이다. 물의 1입방피트는 62.4파운드이다. 바닷물은 민물보다 3.5퍼센트 더 무겁다. 그 말은 바닷물 1,000파운드에 35만큼의 소금이 있다는 뜻이다. 물의 무게는 깊이를 상승시키는 압력을 발생시킨다. 바다 아래의 1마일의 압력은 제곱인치당 2,300의 압력으로 내려가는 것이다.(277쪽)” 그리고 두 번째는 “나는 종종 물의 무게와 어른의 부주의함에 대해 생각한다.(335쪽)”입니다. 앞서 적은 물의 무게는 과학적 영역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만, 뒤에 적은 물의 무게와 어른의 부주의함은 어떤 관계일까 생각해봅니다. 특히 ‘종종’…

두 사건을 모자이크로 엮어내는 과정에서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집중하게 만드는 작가의 솜씨가 돋보입니다. 가족이란 이름만으로는 서로를 이해하는데 있어 충분하지 못하며, 가족들 사이에서도 원활한 소통이 이뤄져야만 서로를 이해하고 아픔을 다독이게 된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주인공이 딸의 죽음과 전혀 무관하지 않으며 남편과의 관계도 석연치 않은 애덜린과 사건 이후에 다시 만나 지난 일을 이야기한다는 설정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오히려 이야기를 마무리하는데 있어 시동생과 상황을 정리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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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시대의 의사 - 야스퍼스의 의철학과 심리치료 비판
카를 야스퍼스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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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의료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온 굵직한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 의과대학생들이 출교를 당하게 된 사건으로부터 최신의료시술의 보험급여화 과정에서 의사의 도덕성까지 들먹이고 있는데 의사가 엄격한 도덕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를 달리 생각해보면 그들이 받고 있는 사회적 대우가 걸맞도록 충분한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실존철학의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카를 야스퍼스의 <기술시대의 의사>는 옛날 의학계에 던졌던 화두를한 세기 가까이 되는 이 시점에서 끄집어내는 것이 적절하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만, 야스퍼스가 의학을 공부하던 시기는, 19세기로부터 20세기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의학이 철학적, 혹은 관념적 사고를 바탕으로 경험적 치료법에 의존하던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한 과학분야와 연계하여 과학적 사고의 틀이 도입되어 근거중심의 치료법을 적용하는 신의료의 틀이 갖추어지던 시기였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시대적 배경 때문에 <기술시대의 의사>라는 제목으로 야스퍼스의 저술 가운데 의철학을 비롯한 정신의학관련 저술을 되돌아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1986년에 편집된 원본은 모두 다섯 편의 글을 담고 있습니다. 의철학에 관한 전반의 세 편은 ‘의사의 이념(1953)’, ‘의사의 환자(1953)’, ‘기술시대의 의사(1958)’이며, 두 편의 정신의학관련 저술로는 ‘정신분석에 대한 비판(1950)’과 ‘심리치료의 본질과 비판(1954)’입니다. 정신분석과 심리치료의 영역은 저의 아는 바가 제한적이라 깊이 살펴보지는 못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다만 야스퍼스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정신분석과 심리치료가 한계가 있다는 점인데, 지금은 신경계통의 기질적 변화에 의하여 생기는 질환을 다루는 신경과와 신경계통의 유기적 기능의 변화에 의하여 생기는 질환을 다루는 정신과 영역이 당시만 해도 분리되지 않고 정신과영역에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금과는 분명 치료적 접근이 달라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야스퍼스는 <의사의 이념>에서 “원시 시대의 사제적 유형의 의사, 편협하지 않은 시각으로 인간 전체와 인간의 상황을 합리적으로 다룬 히포크라테스적 의사, 권위주의적이고 사변적 견해에 사로잡혀 있던 중세의 의사, 이 모든 유형의 의사가 몇 세기 만에 근대의 자연과학적 의사로 교체되었다.(9쪽)”고 글을 시작하면서 시대에 따른 의사의 모습을 나누었습니다. 만일 야스퍼스가 살아있다면 21세기의 의사는 어

떤 모습으로 그려낼지 궁금해집니다.

근세에 이르기까지 의사는 자신의 의료행위를 “자연과학적 인식과 기술력, 다른 한편으로는 휴머니티의 에토스라는 두 개의 기둥 위에 세우게 되는데, 스스로 결정하는 환자의 존엄성과 모든 개별적 인간의 대체할 수 없는 가치를 망각하지 않는다.(10쪽)”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가 광범위하게 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과거와는 달리 건강보험을 비롯하여 의료부조와 같은 다양한 사회적 장치들로 인하여 의료서비스의 문턱이 낮아지면서 누구나 같은 수준의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야스퍼스의 시대와 현재의 의료환경은 기본적으로 격변기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만, 사회적 환경은 분명 커다란 차이가 생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스퍼스가 인식하는 환자는 자신의 질병을 치료받기 위하여 의사를 만나게 되고 치유되기를 갈망하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에 대하여 알려하기보다는 의사의 권위에 의존하고 복종하는 경향을 나타낸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환자들은 자신의 상태를 속속들이 알려주지 않으면 의사를 신뢰하지 않으며, 의사를 만나러 가기 전에 사전 조사를 통하여 자신의 상태에 대한 진단을 이미 마친 상태이며 치료방향까지도 들고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환자일수록 환자가 생각한 치료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설명하는데 더 많은 힘이 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의사의 사명은 ‘고통받고 죽어가는 인간을 돕기 위해 자신의 직업에서 이성적으로 하는 행동이 의미있다는 점(21쪽)’입니다. 수요가 늘어나는 만큼 한해 배출되는 의사의 숫자도 늘고 있습니다. 또한 엄청나게 늘어난 의학지식을 전달하는 의학교육 역시 보다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전통적 방식은 이미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철학자가 되는 의사는 신에 가깝다"라는 의성 히포크라테스의 명제에 대하여 야스퍼스는 “단순히 배우는 의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의사를 의미하는데, 이러한 의사는 삶의 흐름 속에서도 영원한 규범 아래서 자신의 의술을 생각하는 철학자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의사가 되는 것은 역시 어렵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사실 생활을 걱정해야 하는 의사가 자신의 삶에 대하여 깊이 천착하여 철학적 의미를 부여할 여유를 내기가 어려운 시절입니다. 뿐만 아니라 질병의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감시당하는 의료환경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는 웬만한 의사라면 신경이 마를 지경이라고 하소연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의사와 환자>에서는 질병이 악령의 개입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상태가 깨져 생기는 자연과정이며, 경험적 치료방식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입증된 치료방식을 적용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20세기로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인식입니다만, 요즈음에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과학 이외의 영역까지도 끌어들인 통합의학으로 나가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접근방식에 대한 철학적 분석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야스퍼스 의철학의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는 <기술시대의 의사>에서 논한 것들을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철학을 버리는 의사들이 있는데, 철학이 없다면 사람들은 자연과학적 의학의 한계에서 잘못된 것을 지배할 수가 없다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과학적 기술의 진보를 토대로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의사는 이러한 실천을 자신의 철학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온전한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야스퍼스의 명제는 세기가 바뀌어도 여전히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의료 기술자를 양성하는 의학교육보다는 의사로서 갖추어야 할 철학을 같이 배우는 의학교육이 되어야 하겠고, 삶의 압박으로부터 여유로워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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