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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탐미주의 단편소설선집
무로우 사이세이 외 지음, 박현석 옮김 / 현인 / 2022년 8월
평점 :
금년 1월에 여행사 펀트래블에서 기획한 일본근대문학기행을 다녀와서 일본근대문학작품을 읽고 있습니다. 일본 근대문학의 시작과 흐름을 정리해보았는데, 일본의 근대문학은 메이지유신에서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실주의로 시작한 일본의 근대문학은 의고전주의와 자연주의 문학으로 발전하였고, 자연주의문학사조에 반발한 젊은 작가들은 예술지상적인 분위기를 문단에 조성하여 탐미파(眈美派), 여유파(余裕派), 고답파(高踏派), 백화파(白樺派), 신현실주의(新現實主義) 등으로 다채롭게 발전해갔다는 것입니다.
유미주의 혹은 심미주의와 같은 맥락의 탐미주의는 에피쿠로스에서 유래하는 철학적 개념입니다. 미적 향수 및 형성에 최고의 가치를 둔 세계관 혹은 인생관을 추구합니다. 문학에서의 탐미주의는 19세기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 즉 예술지상주의를 따른 문학에서의 탐미주의는 교훈적·공리적 의미를 배제한 순수화 경향을 존중하는 문예사조를 이릅니다.
일본의 탐미주의 문학은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에서 시작한 자연주의가 정점에 달했던 1909년 무렵 시작했습니다. 일본 탐미주의문학에 이론적 기초를 다진 것은 우에다 빈과 나가이 가후였다고 합니다. 탐미파의 대두를 두드러지게 한 것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였으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가와바타 야스나리, 다자이 오사무, 미시마 유키오 등이 그 흐름을 이어받았다는 것입니다.
<일본 탐미주의 단편소설선집>에서는 일본 탐미주의 소설가들의 작품을 하나씩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로우 사이세이의 「꿀의 정취」, 오카모토 가노코의 「봄-2개의 연작」, 나가이 가후의 「오솔길」,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게사와 모리토오」, 에도가와 란포의 「인간의자」, 호리 다쓰오의 「밀짚모자」, 가지이 모토지로의 「K의 승천-혹은 K의 익사」 등입니다.
첫 작품인 무로우 사이세이의 「꿀의 정취」는 붉은 금붕어를 의인화한 작품으로 작가를 제외하고는 등장인물이 실체가 분명치 않습니다. 문체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노년의 성에 관한 이야기도 있어 쾌락주의적인 면도 있어 탐미주의적이라 하겠습니다. 이 책에 실려있는 작품들 가운데가 가장 긴 중편소설입니다.
나가이 가후(永井 荷風)의 「오솔길」 역시 문체와 이야기 흐름이 탐미주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가이 가후는 15살이 되던해 질병으로 학업을 중단하면서 통속소설을 탐독하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8살에 히로쓰 류로(津 柳浪)의 문하생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이와야 사자나미(巖谷小波)의 가르침을 받으며 에밀 졸라에 심취했다고 합니다. 프랑스어를 공부했고, 24살에서 28살까지는 미국에서 살았으며 이어서 프랑스로 건너가 10개월 정도 머물렀습니다. 귀국하고서 2년 뒤에 모리 오가이와 우에다 사토시의 추천으로 기주쿠 대학 문학부의 주임교수가 되었습니다.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게이샤와의 불륜, 주변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사생활은 복잡했습니다. 대학을 그만두고 신주쿠의 요초마치(余丁町)로 이사한 그는 자기 집을 단초테이(断腸亭)라고 했습니다. 1917년 9월부터 ‘단초테이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1959년까지 40년 이상 이어가, 가후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고 합니다.
「오솔길」은 치바현 이치카와(市川) 시의 한적한 오솔길과 관련된 이야기인데, 화자의 친구가 겪을 일을 빌어오는 형식입니다. ‘솔숲에 덮힌 한 줄기 언덕이 이어져 있다. 언덕을 따라서는 널따란 평야가 혹은 높게, 혹은 낮게, 완만한 기복을 이루어 단조로운 조망 곳곳에 화폭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209쪽)라고 적은 것을 보면 명소라 할 것도 없다고 했다지만 평화로운 오솔길 풍경을 잘 그려낸 느낌입니다. 화자가 이 오솔길을 산책하는 맛을 지인에게 알리자, 그도 이 오솔길을 잘 알고 있다면서 오솔길 부근에 있는 경마장에서 겪을 일을 알려왔습니다. 경마를 좋아하고 도쿄를 좋아하는 아내와 함께 경마장에 갔던 지인은 아내가 다른 이와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경마장을 빠져나왔는데, 그와 같은 사정으로 경마장을 빠져나온 젊은 여성과 하룻밤을 보낸 것이 인연이 되어 아내와 헤어지고 그녀와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년」은 일종의 성장소설이라고 하겠습니다. 화자인 하기하라 에이(萩原栄)가 동급생인 하나와 신이치(塙信一)와 그의누나 미쓰코(光子), 그리고 센키치(仙吉) 등, 넷이서 부자인 신이치의 집에서 놀이를 즐기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하녀의 돌봄을 받는 학교에서는 소극적인 신이치는 자기 집에서는 만사를 마음대로 정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학교에서는 골목대장 노릇을 하는 센키치도 신이치에게는 꼼짝을 못합니다. 네 사람은 도둑놈 놀이나, 늑대와 나그네 놀이 등 소년들이 흔히 생각해낼 수 있는 역할극을 즐기는데 처음에는 신이치가 주인공 노릇을 하다가 어느새 주도권이 미쓰코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 부분에 대하여 작가는 “미쓰코는 점차 거만해져서 세 사람을 노예처럼 부렸는데,목욕을 마치고 나와서 손발톱을 깍게 하기도 하고, 콧구멍 청소를 시키기도 하고, 오줌을 마시게 하기도 하는 등 우리를 늘 옆에 두고 오래도록 그 나라의 여왕이 되었다.(271쪽)”라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나이도 많고 여자 아이라서 남자 아이들이 당해내기가 어려웠을 것 같기도 합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니혼바시(日本橋) 인근에서 상점을 하는 집안에서 출생한 소위 도쿄 토박이입니다. 중학교에 다닐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어 서생을 하면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도쿄제국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였지만 학비를 댈 길이 없어 중퇴하고 말았습니다. 나가이 가후의 작풍을 이어 심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가후의 작품에서 볼 수 있던 인격적인 면을 줄이고, 전적으로 예술 중심의 탐미적 요소를 천착한 점이 특징입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 龍之介)의 「게사와 모리토오(袈裟と盛遠)」는 한때 사랑했다가 헤어진 게사와 모리토오가 다시 만나 정을 통한 뒤에 생기는 상황을 각자의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진정한 것이었는지 의문입니다. 어떻든 다시 만났을 때 게사를 유혹하여 정을 통한 모리토오는 분명치 않은 이유로 게사의 남편 와타루 사에몬노조(渡左衛門尉)를 살해하기로 정하고 게사의 승낙까지 받아냅니다. 게다는 자신에게 헌신적인 남편을 살해하겠다는 모리토오의 생각에 동조를 했지만, 한편으로는 모리토오와 정을 통한 자신이 부정하다는 생각으로 남편 대신 자신이 죽기로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를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각각의 심리상태를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느낌이 남습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도쿄에서 우유판매업을 하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손위 누이의 죽음으로 정신병을 앓고 있어 양육이 어려워 외가에 맡겨졌다가 11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죽으면서 외삼촌 아쿠카타와 미치아키(芥川道章)에게 양자로 입양되었습니다. 에도시대의 사족이었던 외가 덕에 학업을 이어 도쿄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에 취직하여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왕조 시대, 근대 초기의 기독교 문학, 에도시대의 인물과 사건, 메이지 시대의 개화기 등 여러 시대의 문헌에서 소재를 얻었고, 양식과 문체를 달리하여 재기 넘치는 단편소설로 구성하였습니다. 만년에는 자전적 소재가 많아지면서 작품의 분위기가 무거워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에도가와 란포의 「인간의자」입니다. 여류작가 요시코(佳子)가 우편으로 받은 이야기입니다. 용모가 추하고 가난한 의자 장인이 외국인 호텔에서 주문을 받은 커다란 안락의자를 만들게 되었는데, 의자에 사람이 들어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잘 만든 의자를 남에게 보내는 것이 안타까워 함께 가고 싶다는 생각에서 벌인 일입니다. 밖에서는 전혀 눈치챌 수 없는 공간에는 몸을 감출 수 있을 뿐 아니라 조그만 선반을 넣어 무언가를 보관할 수도 있게 하였습니다. 바닥에 만들어 놓은 출입구의 뚜껑을 열고 의자 안으로 몸을 감추면, 숨막힐 정도로 새카만 어둠이 마치 무덤 속에 들어앉은 느낌이 든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투명망토라도 두른 것처럼 인간 셋ㅇ에서 모습을 감춰버린 셈이라고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안락의자에서 나와 호텔 안에서 도둑질이나 할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의자에 앉는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특히 여성들이 앉는 경우 가죽 너머로 안는 시늉을 한다거나, 날카로운 칼로 심장을 찌르는 상상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시간이 지나면서 호텔이 타인에게 양도되면서 안락의자도 경매를 통하여 개인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새 주인이 바로 관리의 아내이자 여류소설가인 요시코였던 것입니다. 화자는 요시코를 연모하게 되었고, 한번 만나달라는 청과 함께 그동안의 긴 사연을 보내온 것입니다. 물론 개연성이 있을까 싶으면서도 착상은 대단히 기발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연 요시코는 화자를 만나게 될까요?
에도가와 란포는 1894년 미에(三重)현의 군청 서기 히라이 시게오(平井 繁男)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히라이 가문은 사무라이 가문으로 조상은 이토(伊東) 이즈(伊豆)의 사무라이였습니다. 초등학생 때 어머니가 읽어준 기쿠치 유요시(地市子市) 번역의 『히츄노히(秘中の秘)』가 처음 접한 탐정소설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기자로 활동한 윌리엄 르 큐(William Le Queux)가 1903년에 발표한 『티켄코트의 보물: 침묵의 남자, 봉인된 스크립트 및 단 하나의 비밀 이야기(The Tickencote Treasure: Being the Story of A Silent Man, A Sealed Script and A Singular Secret)』가 원전입니다.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상사, 중고 서점, 소바 가게, 도바 조선소 등을 전전하다가 29살이 되던 해 『니센도우카(二銭銅貨, 2전짜리 동전)』으로 등단하게 되었습니다. 필명을 에드거 앨런 포의 이름을 차용할 정도로 추리 탐정소설에 매몰되었던 그는 기발한 속임수를 적용하여 사건을 구성하거나 대물애욕증(fetishism), 기괴하고 잔인한 이야기의 전개 등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일본탐정작가클럽(일본추리작가협회로 변경)을 창설해 초대이사장을 지냈습니다. 추리 작가의 등용문으로 자신의 이름을 붙인 에도가와 란포상을 제정하는 등 탐정, 추리소설의 발전과 대중화에 힘써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