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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만난 말들 - 프랑스어가 깨우는 생의 순간과 떨림
목수정 지음 / 생각정원 / 2023년 9월
평점 :
세상에 어떤 말들이 가슴 설레이게 할까 기대되는 책입니다. “그 모든 말이 아가의 웃음처럼 내 심장을 건드렸다 프랑스 사회가 오늘은 내게 또 무슨 말을 건넬까?” 20년 차 파리지앵 목수정 작가의 마음을 일렁이게 한 프랑스어 34개 이야기 프랑스어가 깨우는 생의 순간과 떨림 <파리에서 만난 말들>입니다.
L’amour est simple comme le bonjour.
사랑은 봉주르처럼 단순한 것.
-자크 프레베르 (시인, 시나리오 작가)
파리에서 400킬로 미터 떨어진 곳에 드넓게 펼쳐진 화산 분화구 기대에는 80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흩어져 시는데 그 산을 오르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봉주르, 봉주르, 봉주르 ... 끝없이 봉주르가 이어진다고 합니다. Bonjour 봉주는 안녕하세요 란 인사말입니다. 산행에는 약간의 위험이 따르기도 하고 산을 오르는 이들은 일상을 떠나 일제히 낯선 경험을 하게 됩니다. 당신의 고달픔과 설렘을 이해하며 우리 모두 무사히 산행을 마치자고 건네는 따뜻한 인사입니다. 프랑스 인들은 bong (좋은)과 jour (날)을 합성해 한 단어로 만들었는데 인생을 살면서 가장 어려운 프랑스어는 봉주르라고 작가는 이야기 합니다.
잠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행위가 사안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계기를 전하는 것처럼, 양심의 돌멩이가 움직일 때 머뭇거리는 심성은 사람들 사이에서 숨 쉴 공간을 제공한다. ---p.29
프랑스어에서 가장 ‘경이로운’ 단어를 고른다면, “에파누이스망”이라 읽는 épanouissement을 주저 없이 꼽을 수 있다. 이 단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한결같이 ‘경이로움’이 읽히기 때문이다. ---p.103
Doucement(두스망: 부드럽게)-아가의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 같은
Vivre(비브르: 살다), Survivre(쉬르비브르: 생존하다)-생을 누릴 권리를 위해
Scrupule(스크뤼퓔: 세심함)-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마음
Il faut oser(일 포 오제: 감히 시도해야 해)-거리의 부랑아를 구도자로 바꾼 힘
Apero(아페로: 식전주)-일상의 천국을 여는 세 음절
Il fait beau(일 페 보: 아름다운 날씨로군요)-아름다움을 포착하고 찬미하는 감각
Envie(앙비: 욕망)-사소하고 경이로운 프랑스식 사치
Pain(빵)-달콤한 것은 빵이 아니다
La terre(라 테흐: 지구)-모든 생명의 어머니
Homeostasie(오메오스타지: 항상성)-인간이 우주와 하나가 될 때
Bonjour(봉주르: 안녕하세요)-순간을 어루만지는 온기
Resilience(레질리앙스: 탄성, 복원력)-바퀴 아래 짓눌렸던 인생일지라도
Bouder(부데: 삐지다)-애정 결핍의 신호
개인주의에 단단히 뿌리 내렸지만, 1789년 시민혁명의 후손답게 모두의 권리를 위해 연대할 때는 너나없이 발 벗고 나섭니다. 풍요로운 공동체를 견인하는 말 3부 편에서는 ‘greve generale(그레브 제네랄: 총파업)’이란 말이 나오는데 1936년 첫 유급휴가 시대를 연 이래 프랑스 공동체를 굳건히 지켜왔던 말로 총파업이 시작되면, greve generale에서 g를 뺀 reve generale, 우리말로 ‘모두의 꿈’이란 말이 거리 곳곳에 포스터로 나부낀다고 합니다. ‘총파업’을 ‘모두의 꿈’으로 바꿔놓는 프랑스식 농담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끈끈한 사회적 유산이 됩니다. 이외에도 좌우파 상관없이 자주 쓰는 단어 solidarite(솔리다리테: 연대)에서는 공동체적 가치를 중시하는 프랑스 정신의 정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를 고수하면서도 필요할 때 함께 뭉치는 프랑스적 삶의 태도는 일견 서로 상충하는 듯하면서도, 개인과 공동체를 모두 존중하는 그들만의 지혜라는 저자의 생각입니다. 앞으로 우리 모두 연대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기를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바래봅니다.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타자가 지어내는 풍경 앞에 서면 내가 떠나온 곳의 풍경이 비춰진다라는 말이 책에서 인상깊었습니다. 34개의 단어를 징검다리 삼아 프랑스 사회의 심층을 여행하고 우리가 가진 풍요와 결핍이 겹쳐 보이게 됨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여행하는 일은 결국 우리 자신의 내면과 만나는 일이므로 언어는 다르지만 느끼는 감정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에세이입니다.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 독서와 여행만한 친구는 없습니다. 서른 네 단어가 들여주는 문명의 사연을 만나게 되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출판사 제공 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