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 전 며칠동안 우리집은 난리쇼였다. 큰 애는 초등4학년인지라 제법 지가 알아서 일기나 숙제를 해 놓았건만, 둘째가 요주의 문제아였다. 숙제와 일기를 써 놓지 않아, 개학날 당장 가져갈 과제물이 한 건도 없었다. 선생님한테 혼내도록 내버려두어야지 했다가, 보기 안스러워 아들애하고 내가 두손 두발 다 걷어부치고 도와주었다. 일기도 내가 일학년 수준으로 대충 써 주면 딸애가 받아 베껴쓰고(한페이지 쓰는데 한시간 정도 걸리는 것 같다. 무슨 참견을 그리 많이 하는지...), 아들애가 딸애 1학년 수학문제집 풀어주고 그림 그려주고 색칠해주고..그래도 지 동생 혼날까봐 제법 많이 손을 빌려주는데 듬직했다는.  

그저께 화요일 저녁때까지도 난리블루스를 치니깐 애아빠가 보기에도 한심스러운지 몇 마디 했다. 자기는 하나도 도와주지 않으면서......얄미웠다(어떤 그림책 말마따나 아빠는 나쁜 녀석이야!). 여하튼 손하나 까딱하지 않았던 애아빠가 어제 늦게 술 한잔 걸치고 들어와서는 어제는 직장동료들이 우리집처럼 다들 밀린 숙제 하느냐고 난리였다는데, 두시까지 했다고 하더라고, 한다. 개학 전날 모습이 어느 집에서나 늘상 있는 같은 풍경이군, 싶었다. 어쨌거나 나만 한심한 엄마는 아니었구나, 위안이 되었다는. 

애들이 방학이면 더 여유로울 것 같지만 사실 삼시세끼 해결하는 것만 해도 벅차다. 아침 먹으면 점심 걱정하고 점식 먹으면 저녁엔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하루가 다 가버린다.  

오늘 드뎌 아이들의 수업이 정식으로 시작되어 몸과 마음이 한결 자유로워진 아침!  음하하핫!!!! 아이들의 조잘거리는 소리도 안 들리고 밥 차리는 시간도 제낄 수 있어 무슨 책 읽을까 한참 고민하다가 미미의 <외딴집>이 보여 외딴집 표지 그림 제목 찾느냐고 오전시간을 꽉 채웠다.  두 작품 모두 에도시대에 살았던 우키요에의 대가인 안도 히로시게의 작품. 당시 히로시게는 후쿠사이와 함께 유럽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오하시와 아타케의 천둥(1857년, 브루클린 뮤지엄소장) 



고흐가 히로시게의 저 윗 그림을 보고 반해 그린 <일본다리> 



히로시게의 연작 도카이도 고쥬산지 중 <쇼노>  

 

안도 히로시게에 대하여

작가명 : 안도 히로시게(Hiroshige Ando)
활동년도 : 1797~1858
작가소개 : 일본 우키요에[浮世繪] 판화의 대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도쿠가와[德川] 막부시대의 하급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나 소방조(消防組)의 자리를 세습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사무라이가 부업을 가졌듯이 소방조이던 히로시게도 화가를 부업으로 삼았다. 17년 동안 우타가와 도요히로[歌川豊廣]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도요히로가 사망한 1828년까지는 배우와 미인을 주제로 한 판화만을 제작하였다.

도요히로가 사망한 뒤 풍경화로 눈을 돌린 히로시게는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풍경판화 시리즈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1831년에는 10점의 판화로 구성된 에도(지금의 도쿄) 풍경화 시리즈 《도토메이쇼[東都名所]》를 출판하였는데, 섬세한 필치와 색상의 조화, 서정적이고 시적인 분위기가 뛰어나다. 이같은 특징은 1834년에 완성한 《도카이도 고주산쓰기[東海道 五十三次]》 시리즈를 통해 한껏 무르익고 작품의 전형으로 자리잡았다.

1856년에는 총 118점에 이르는 판화 시리즈 《메이쇼에도햑케이[名所江戶百景]》 제작에 착수하였다. 이 판화 시리즈는 2년에 걸쳐 완성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제작시기에 따라 순서를 매기는 방식과 달리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에 따라 순서가 매겨졌다. 시리즈에는 에도의 계절별 풍광뿐만 아니라 당시의 풍속과 생활상이 특유의 과감한 구성과 섬세한 필치로 잘 담겨 있다. 시리즈 제작 중 사망하여 총 118점 중 그가 만든 작품은 115점이고 나머지 3점은 제자들이 제작하였다 

--출처 : http://art-is.net
  

 

히로시게의 눈 내리는 밤 

 

히로시게의 벚꽃   

<외딴집> 표지그림에 대해 누가 그렸을까? 궁금했었다. 집에 <외딴집> 상권만 있어 하권에는 표지그림에 대한 참고자료가 있을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지난 번에 상권만 덥석 사다 놓고 가격이 좀 더 떨어지면 사야지 하다가 아직 못 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호젓한 아침 시간에 <외딴집>에 눈길을 보내며 표지그림에 대해 한번 찾아보자라고 맘 먹고 검색을 시작했다 우키요에에 대해 잘 모르는지라 일단 우키요에에 대한 단어 검색을 하고 작년에 <샤라쿠 살인사건> 살때 받은 우키요에 엽서그림의 화가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작년에 이 책 나왔을 때 이벤트로 우키요에엽서를 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준 엽서에 도요쿠니, 시게마사, 호이츠, 우타마로, 후쿠사이, 히로시게의 우키요에 그림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난 책보다 그 엽서가 탐나 주문했었는데, 이 화가들이 미미의 <외딴집> 표지 찾는데  많은 추리의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일단 여러명의 우키요에 화가를 쳐 보았고 그 중에서 후쿠사이와 히로시게가 유럽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한번 그들을 먼저 집중적으로 검색해 보았다. 후쿠사이를 먼저 쳐서 그에 대한 작품을 검색해 보았고 그 다음이 히로시게였다. 빙고! 히로시게가 미미의 표지그림을 장식한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세상 참 편하면서 좁아졌다라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다.   

아주 시간이 널널해 행복해 죽겠다! 시간이 이렇게 꿀맛일 줄이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70년대 말 버글스가 부른 Video killed the radio star는 2M의 등장을 예견한 음악일지도 모른다. 1980년대 초반 마이클 잭슨의 Thriller 와 마돈나의Like a virgin은 막 스타트를 끊은 MTV 문화의 도화선이었다. 기존의 뮤비와는 다른 그들의 이야기가 꽉 찬 혁신적인 영상과 스피디한 볼거리(주로 댄스)는 뮤직 비디오가 단순히 음악만을 홍보하는 것이 아닌 유행을 주도하는 매체 그 이상일 수 있으음을 보여주었다. 2M의 등장은 단순히 듣고 즐기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의 전환을 예견했으며 그 중에서 마돈나는 영상의 속성을 가장 잘 알고 이용한 위대한 팝아티스트이다. 그녀를 단순한 20세기의 팝뮤지션으로 단정짓기에 그녀의 아이콘은 너무 크다. 그녀는 우리 시대에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비틀즈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팝 역사 60 여년의 중에서 반(27년)을 그녀가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돈나, 그녀는 비틀즈보다 더 위대하다. 

 

 

 

 

 

마돈나라는 데뷔 앨범이 나왔을 때만 해도 그저 반항기 있는 그런 여가수중의 한명이라고 생각했다. 뭐 화끈하게 사로 잡은 음악은 없지만 싱어 송 라이터로서 듣을 만 음악을 하는 가수 정도. 첫 앨범의 성공 이후 두 번째 앨범 like a virgin에서 그녀는, 흔한 말로 싼티 나는 날라리같은 모습을 보여 주며 기존의 여가수들과는 남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첫 타이틀 곡 like a virgin은 통통 튀기는 듯하면서 도발적인 뮤비로 대중을 그것도 어린 대중을 단번에 사로 잡았다. 나 같은 사람도 그녀의 뮤비를 보기 위해 AFKN을 새벽 2~3시까지 잠도 안 자고 시청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의 뮤비를 틀어주던 종로의 맥도널드까지 원정갈 정도. 그녀의 뮤비는 충격적이었지만 재밌었다. 그녀의 음악은 철저히 대중적이며 그녀의 퍼포먼스는 철저히 저항적이었다. 80년대 관습과 인습 그리고 보수성을 깨트리며 그녀의 대중적 음악은 대중에게 깊히 파고 들었다.  이 시절의 그녀에 대한 평가는 신디로퍼보다 음악성으로는 조금 못한 라이벌로, 인기면에서는 강력한 라이벌이라고 평론가들은 떠들었댔지만,  그들은 금발의 야망을 몰랐던 것. 그녀가  25여년 넘게 팝계를 장기 집권 할 것 이라는 것을.  

 

 

 

 

 

몬로로 변신한 Material girl의 뮤비 시절만 해도 그녀는 나쁜 여자가 아니었다.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던 뻔한 결말의 material girl이었으니깐. 가만 생각해보면 그녀가 Like a prayer를 발표하기 이전만 해도 신인이어서 그런지 엔터테이먼트계에서 그녀는 파워는 그렇게 세지 않은 듯. 자, 이제 돈도 좀 벌었겠다, 숀펜과의 결혼과 이혼, 웨렌 비티와의 스캔들과 같은 사생활로 가십난을 오르락 내리며 그녀의 명성은 전세계적으로 예수의 어머니 마돈나만큼이나 유명해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녀는 그녀의 이름, 마돈나라는 롱런 브랜드를 확고하게 다지기 시작한다. like a prayer 앨범과 에로티카 앨범중에서 justify my love는 종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특히나 justify my love는 미국에서조차 학부모의 항의와 반발이 거세 학생들에게는 금지곡이 된 음악. 당근 우리나라에서 저 노래는 한 때 금지곡. 그래도 종교계와 학부모의 거센 반발에도 그녀는 살아 남았다. 더 막강한 대중적 파워을 움켜쥐며...거침없이 하이킥. 이 시절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그녀의 뮤비와 투어이다. 이제 그녀는 돈과 권력을 쥔 엔터테이먼트내에서 파워맨 중의 파워맨. 순진함이 조금은 남았던 20대 시절의 순진한 모습은 볼 수 없다. 이제 그녀의 뮤비엔 인종 가리지 않고 흑백이 섞이고  섹스 표현은 좀 더 자유로웠으며  무엇보다도 근육질을 몸매를 선보이며 댄스가 파워풀해졌다. 그녀는 에일리언의 시고니 웨버가 영화 밖에서 못 해냈던 여전사가 된 것이다. 아, 금발의 야망 투어에서의 그녀의 근육질 몸매와 장 폴 고티에의 옷을 입고 보여 준 퍼포먼스는 사람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퍼포먼스는 기성의 남성 세계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수십년 동안 페미스니스트들이 바라마지 않았던 여성 해방이었다(여성해방이니 뭐니 쑥쓰럽긴 하지만 사실 마돈나 이전의 이런 모습을 보여준 캐릭터가 없어서.. 여배우든 가수든 사랑스럽고 귀여움 받는 캐릭터라고 할까. 여하튼 그녀가 무대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는 너무나 시원스러워 해방되었다는 느낌이라고 할까나.)   

 

 

 

 

 

2000년대 들어와서 그녀의 음악은 멈추지 않았다. 21세기에도 그녀는 앨범과 투어(최근엔 S & S 투어)로 전세계를 누비며 그녀만의 라이브에서 보여 줄 수 있는 화려하고 파워풀해, 카리스마 작렬한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개인적으로 유투브에 올린 스타키앤스윗 투어는 거의 다 봤다는, 그 짜릿한 흥분감이란!) 솔직히 그녀가 Music 들고 나왔을 때 그 음악에 부적응해 한동안 애 먹었다. 뭐 저런 곡이 다 있지, 내가 뒤 쳐진거냐 아니면 그녀가 앞서는 거냐, 싶었다. 부시에게 한방 먹일 정도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숨기지 않고 자유로운 관계(맘에 드는 남자는 다 내 것!)를 영위하며 한편으론 아이들을 위해 그림책도 써서 출판한, 그녀의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한 두곡의 히트곡으로 팝역사에서 사라지는 다른 뮤지션에 비해 그녀의 27년간의 팝의 장악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고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녀의 집권은 어디까지 일까? 올 9월의 그녀의 히트곡 모음집 celebration이 전세계 동시에 발매된다고 한다.  이제 그녀의 나이 52이다(생각해보니 한비야하고 같구나!) 어쩌면 현역 활동은 10년이 그녀의 뮤지션으로서의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맘으로 Forever~  마돈나. 

덧 :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마돈나 투어는 진짜 한번 가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창하게 소원이라고 할 것도 없다. 제발~~ 방학 좀 일찍 끝나다오~~ 

(원래 주말에는 늦잠을 푸짐하게 자는데, 주책이지 오늘따라 일찍 일어나 아침밥하면서 블록 친구들 마실 다니고 있다.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보이고 있는 중! 시간당 "엄마" 소리를 7,8번 하는 아이들 틈 속에서 더운 여름의 인내심 테스트 시험 당하는구나 싶다. 둘째는 8살 난 놈이 거의 앵겨서 사는데...이 생활 언제쯤 끝날까 싶구나. 어휴~ 지니는 왜 나한테는 안 나타는 거여~) 

아직도 우리집은 쿨쿨쿨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림의 습관 

아무리 더운 날에도 속옷이나 수건 빨래는 삶아 넌다. 지난 주에 빨래 삶아 세탁기에 붓다가 빨래 삶은 통을 놓치는 바람에 그 뜨거운 물을 뒤집어 썼다. 다행히 얼굴엔 물이 튀기지 않아 괜찮았지만(천만다행!) 목과 다리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황급히 차가운 물로 화상 입은 곳을 응급처지 하고  데인 곳이 쏴아한 느낌이 나면서 심하게 아파서 병원 치료를 며칠 했다. 약 먹으니깐 진통은 가라 앉았지만 화상 자국은 점점 검해지면서 심하게 표시가 난다. 아물면서 몹시 간지러웠는데, 오늘 목욕탕 거울 보니 지금은 목에난 화상은 허물이 벗겨지 듯 벗겨지려고 하고 있다. 다리에 난 화상은 허물 없이 그대로고. 

여러분, 소름 끼치죠? 동네 아줌마들 내 목 보고 다들 한마디 하신다. 우짜, 목이 그래? 빨래 삶다가 잘 못 해서 데었어요! 한 일주일 넘게 듣고 되풀이하는 말인 것 같다. 공통된 반응은 다들 한여름밤에 보는 공포영화 수준이라는 거.  

레벨 7     

 
오른손잡이 남자가 여자와 자려고 할때 여자를 자기 오른쪽에 재울리 가 없어. 확실해. 그러니까 당신들은 마음이 맞아서 침대에 올라간 게 아니야. 그런 것 따위를 생각할 수 없는 상태로 - 자고 있었는지 기절했는지 - 거기까지 세세한 일에는 개의치 않는 멍청이의 손에 의해 나란히 눕혀졌을 뿐이야( p143 )

 

미미의 글을 읽다보면 참 놀라운 구절을 종종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조런 거. 만약에 내가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저 문장은 죽었다 깨도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애아빠가 생활의 대부분은 오른손잡이지만, 본능적으로 왼손잡이임을 숨길 수 없을 때가 있는데, 잠잘 때가 그렇다. 난 오른손잡이고 어디에서 자도 상관 없는데, 애아빠는 내가 애아빠의 왼쪽에서 자려고 하면, 절대 안 된다고 한다. 별로 고집을 내세우는 사람도 아닌데, 잠잘 때만은 내가 자기의 오른쪽에서 자야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자면 모르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하고 물으면 자기는 왼손잡이라 내가 자기의 오른쪽에서 자면 불편하단다. 할 수 없지 뭐, 소녀시대도 소원을 말해봐라고 노래~ 부르는데 그런 생활 소원 하나 못 들어줄게 뭐 있겠어!  

근데 님들은 남편의 어느 쪽에서 주무시는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운명의 날>을 리뷰해주세요.
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니콜라스 시라디 지음, 강경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상상력은 소설이라는 허구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게 과학이든 역사든 소설이든 간에 모든 글쓰기의 시작은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중세를 암흑시대로 만든 종교도(신 자체가 상상력의 소산이므로), 코난 도일이 처음 등장한 추리소설도,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빅뱅이론과 같은 과학이론들의 시발점이었다. 한사람의 상상력이 수 많은 사람들의 사고를 사로 잡아 믿음이 되어 종교가 되기도 하고 이론적 정설로 자리 잡아 학문이 되기도 하며 발명품이 되어 문명의 이기를 생산해 되기도 하였다. 상상력이 없다면 세상에 변화란 것은 없었을 것이면 변화가 없다면 세상은 유인원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상상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최대의 힘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서술하는 역사서도 단순한 기록 작업 이상의 그 무엇가가 필요하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사라진 과거의 시간을 더듬는 작업에서 필요한 도구는 현재 남아 있는 문서와 유적 그리고 상상력이다. 과거의 플래쉬백을 터트리기 위해서 역사학자는 문서를 들척이면서 머릿 속에서는 당시의 사람이 되어 그 시대를 고찰하고 객관적이면서 자의적인 해석을 내린다. 시오노 나나미가 위대한 역사학자로 자리 매김한 것은 누구나 다 알듯히 그녀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보여준 놀라우리만큼 뛰어난 소설적 상상력이었다. 그녀의 책을 읽으면서 그 때 어쩜 나나미의 일상은 반은 20세기를 살고 있는 역사서술가요 반은 기원전 로마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더랬다. 세기를 뛰어넘어 전지적 시점으로 그 시대를 볼 수 있는 그녀의 뛰어난 상상력이 부러웠다.

우연히 들춰 본 <운명의 날>도 작가의 역사적 상상력에 반해 이틀 동안 단숨에 읽은 역사서이다. 이 책에 대해 상상력 운운해서 헷갈리지 모르겠지만 팩션은 아니다. 니콜라스 시라디기라는 건축비평가가 확대경을 꺼내들고 역사의 한 곳을 파헤친 지점은 1755년 11월 1일에 발생한 리스본 대지진이다. 작가는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며 리스본 대지진을 객관적으로 조명했는데, 스페인내에서의 개혁세력(카르발류 총리)과 카톨릭 세력과의 권력 투쟁,  지진의 파생이 유럽의 근대화의 불씨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해석은 기존의 역사와는 다른 독특하고 참신한 역사의 재구성이었다.    

리스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나자 망연자실하여 어쩔 줄 몰라했던 당시 왕이었던 주제 1세 앞에, 후세에는 폼발후작이라고 알려진 카르발류가 나타나 수도를 옮기는 대신 리스본을 재건하자고 강력 주장하자 그에게 왕은 그 자리에서 리스본을 재건하기 위한 전권을 주었다.  피달구(지방 유지)  출신인 카르발류가 총리의 신분으로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두 번의 가문 좋은 집안과의 결혼과 외교관으로서의 뛰어난 자질 덕에 한단계 한단계 권력의 요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개혁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오자 과감하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게 된다. 여하튼 기적적으로 리스본을 재건하기 위해 그가 총리직에 오르자 그를 괴롭힌 것은 지진이 하느님의 벌이라는 카톨릭 구교와의 권력싸움이었고 굶주림과 인구 부족 그리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도시 설계였다. 종교와의 권력 싸움은 그의 판정승으로 끝이 났고 유럽을 휩쓸었던 계몽주의적 낙관주의는 큰 타격을 입었다. 사람들이 절대적인 종교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 것이다.

이 책은 대 지진후, 카르발류의 등장과 리스본 대지진 전후 스페인의 대략적인 역사 배경을 소개하고 있고 우리가 몰랐던 스페인의 역사를 재밌게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스페인 항구의 융성과  노예 시장 그리고 브라질 정복과 왕조의 화려한 삶과 대조적인스페인 민중의 피폐한 삶등. 작가가 상당히 진보적인 시점에서 카르발류의 업적과 스페인 상업의 몰락등을 유대인의 종교 탄압과 연결하여 해석하는데, 그의 뛰어난 상상력이 없었다면 유추해 낼 수 없는 해석이다. 이 책의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카르발류의 묘사는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보여준 캐릭터의 묘사 못지 않다. 카르발류는 그 시대가 낳은 독재자이면서 시민계몽을 위한 학교 설립과 대학 개혁등, 상당히 자유로운 인물로 정의 하고 있다. 후대에 역사학자들에 의한 평가는 상반된다 하는데, 사실 민주적 개념조차 없는 시대에 태어나 왕의 권한 대리로 나라를 통치한 사람이기에 그를 독재적 성격이라고 단정짓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물론 작가는 그의 상반된 평가 모두 지적하고 있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그의 통치 능력이 오늘 날의 史가들에게 못 마땅 할지라도 저자에 따르면 스페인에서 카르발류를 능가할 만한 개혁자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후에 주제 1세가 죽자 총리직에서 물러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의 업적은 상반된 평가를 내릴 지언정 역사사가들에 의해 다시 조명되고 발굴될 것 같다. 

이 책의 분량은 다른 역사서에 비해 적다. 한 250페이지 정도. 개인적으로 이런 역사서를 좋아한다. 연대순으로 나열된 역사도 가치가 있지만, 어느 한 시점의 흥미로운 사건이 불러 일으켜 이 작가처럼 그 시대를 공부하고 그 시대를 사는 사람처럼 상상하고 그 시대를 해석하는. 이런 역사서는 독자인 우리들에게 역사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좀 더 넓은 시야와 역사적 안목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역사의 해석이 오독이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전체를 볼 수 있는 역사적 관점도 좋지만 부분의 역사 해석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음을 이 책은 몸소 실천하고 있다. 작가의 역사에 대한 열정과 독특한 역사적 해석이 부러운 책이다. 

덧 : 이 책은 번역이 무지 매끄럽다. 개인적으로 번역가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데, 또 한명의 좋은 번역가를 발굴한 느낌이 드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