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시 NCIS의 깁스   

재롱둥이 마이클 요원과 선망의 대상 티모시 요원 또한 좋아하지만 아니 난 NCIS  요원들 다 좋아한다만 역시나 제일 좋아하는 수사관은 깁스! 실생활에서 이런 상사 만나면 하루 하루가 똥 밟은 기분이겠지만 언제나 깁스의 활짝 웃는 모습에 냉한 가슴 주르륵 혹한다는. 게다가 그의 은근한 따스함은 어떻고. 아, 그렇지만 1시즌에선 그나마 젊은 꽃미남이더니만 시즌이 갈수록 할아버지가 되어가는 느낌, 어쩔까나 싶지만 그래도 우리의 깁스 머리 염색 안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 보여주는데, 더 신뢰가 간다. 지난 6시즌의 4 에피소드에선 다 큰 깁스의 아들이 나와 깁스의 젊은 시절역을 했는데, 아들이 아버지의 미모를 못 따라가더라. 혹 궁금하신 분들은 4 에피소들 찾아보시라. 올해 그 에피소드 난 한 열번 넘게 본 거 같다.

2. Coldcase의 캐서린   

콜케의 캐서린은 <로앤오더>의 올리비아보다 강인한 느낌은 덜하다. 하지만 튀지 않는(콜케의 수사반 멤버들의 특징이 그렇게 뚜렷한 캐릭터적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팀웍 하나는 끝내준다), 저 갸날픈 몸매로 과연 수사나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여성적이면서도 강인하려고 노력하는 캐서린이 극을 잘 소화해내고 있다. 콜케의 매력은 역시나 오픈과 엔딩 음악들. 언뜻 보기에 느와르적 분위기가 흘러 냉소적이고 어두울 것 같지만 역사적 사실을 범죄와 교묘히 어우르며 묘한 감동을 준다. 무슨 시즌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초기 여성참정권 문제를 다룬 범죄를 보고 난 후, 투표에 절대로 기권하지 않기고 마음 먹음. 불끈!   

3. Law & order 먼치

이 드라마는 애국주의자 엘리옷이 하도 재수 없어서 안 보려도 했다가 먼치와 올리비아 때문에 보고 있다. 글구 닐 울프의 범죄물이 은근 중독성을 가지고 있고, 시즌 4였던가. 먼치가 그나마 좀 활발하게 나오던 때인데, 어린 시절의 유아폭행에 대한 에피소드였을 것이다. 그 에피소드의 엔딩 씬에서 보여준 먼치의 후회하는 낯빛이 정녕 잊혀지지 않아서 로앤 오더 보기 시작했다. 가면 갈수록 엘리옷 재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드보면서 재수 없다고 생각한 배우는 엘리옷이 처음이다. 이 드라마는 콜케와는 달리 팀 위주보다는 캐릭터 위주다. 1시즌에서 촘스키 강연에 가야한다고 했다가 사건 때문에 발걸음을 멈춘 먼치가 뚜렷한 좌파 수사관이라면 엘리옷은 정의감 넘치는 우파. 갸 보기 싫어도 먼치와 올리비아 땜시 9시즌까지 끝까지 죽치고 앉아서 본다. 10시즌 다운만 받아놓고 아직까지 못 보고 있는데... 10시즌에는 엘리옷 어떻게 나왔을까. 역시 좌충우돌의 주인공. 이 수사반이 오래 해 먹어도 팀웍은 젤 후져!  

 4. Law & order : CI/ 고렌

이 드라마에서 혼자 장구치고 북치고 다 하는 고렌형사가 빠지면 CI는 과연 어떻게 될까나. 개인적인 애칭으로 고랑형사로 부르고 있는 우리의 고렌형사. 여기에서도 위장술의 대가였지만 <맨인블랙>에서 바퀴벌레 인간으로 대 연기변신을 해서 깜놀. 당신의 번뜩이는 수사 해결 능력은 늙어가도 녹슬지 않는구려. 진지한 모습으로 사람의 헛점을 갑자기 집어내는, 냉소적인 듯하면서 잘난 체 하지만 전혀 밉지 않는. 프로듀서 닉 울프가 썩 괜찮은 형사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기는 하지. 엘리옷 빼고. 아, 왜 나는 그 사람이 받는 거 없이 밉지! 

 5. Criminal mind /기디언

기디온이 3시즌에서는 빠진다고 했을 때 과연 빈자리를 잘 메꿀 수 있을까 싶었는데, 워낙 연기들을 잘 해서 그런지 빈 자리를 잘 메꾸더라는, 기디언 후속 주자로 조 만테냐의 출연은 의외였는데, 예전에 본 데이빗 마멧 감독의 <호미사이드>에서 조 만테냐가 형사로 나온 적이 있어서 그렇게 낯설지는 않었다. 조 만테냐는 자리 관리를 잘해서 그런가, 그렇게 늙어보이지도 않더구만. 그래도 기디언의 그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는 그립다. 매서운 눈빛과  전지전능한 확신한 찬 목소리. 그립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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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알스버그의 <압둘가사지의 정원>을 처음 본 순간, 그림의 장면마다 독자를 압도하는 정적과 흑백의 표현력, 그리고 그 속에나타난 감정의 응축 (예를 들어, 아이가 마법사 압둘 가사지의 정원에 들어서기 위해 막 문을 들어서는 장면에서 소년의 불안한 심리를 암시하는 듯한 긴 나무터널과 터널 끝에 보여주는 빛)은 그림책의 단순한 독자였던 나를 단숨에 그림책의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해 주었다.  

난 아직도 <압둘가사지의 정원>을 처음 본 순간에 느꼈던 충격과 소용돌이 치는 감정의 흥분을 잊지 못한다. 아마 그를 통해 예술적인 그림책이 무엇인지 혹은 그림책의 지적 유희가 무엇인지 처음 인지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미친듯이 여기저기 들쑤서 가면서 알스버그의 작품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은 다른 분야의 책을 읽느냐고 혹은 아이들이 크면서 상대적으로 그림책 분야에 대한 관심이 덜하긴 하지만, 어떤 경우의 그림책 작가는 작품 활동을 영구히 접을 때까지 관심을 갖고 수집하는 작가들이 있다. 내 경우는 알스버그가 평생 관심 작가군에 속하는데, 그가 그림책을 예술적 경지에 끌어올렸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가 짧은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는 퍼즐과 같은 지적 유희의 결말 때문이다. 적어도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의 그림책 작가에 대한 수집은 일상적인 지루함 대신 짜릿한 흥분을 선사한다.  



올초에 문지에서 크리스 알스버그의 신작 <해리스버딕의 미스터리>가 출간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림이 14장박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은 몰랐다. 마노아님의 리뷰 보고 그제서야 문지판에는 14장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미 <해리스 버딕의 미스터리>를 포트폴리오 편집판으로 가지고 있던 탓에,  문지에서 알스버그의 <해리스 버딕> 나왔다고 할 때 그런가보다하고 시큰둥했다.   

이 책은 책소개에서도 잘 나와 있듯이 알스버그가 서문에서 피터 웬더스(한때 어린이책 퍼블리셔었지만 1984년경에는 은퇴한) 네 집에 초대를 받아 갔다가 피터 웬더스의 집에서 해리스 버딕이 그린 14장의 드로잉들을 보고 웬더스와 함께 해리스 버딕의 드로잉을 알스버그가 다시 그려, 제목과 제목에 대한 약간의 설명을 곁들어 독자가 다층적인 이야기를 다시 쓸 수 있도록 재출간한 것이다. 이 책이 출간되고 알스버그 앞으로 버딕의 이야기를 새롭게 쓴 수 백통의 글들이 날아 들어오던 어느 날, 알스버그 앞을 편지가 배달된다. 그리고 알스버그는 <해리스 버딕의 미스터리>를 포트폴리오 편집판으로 새롭게 내 놓는다. 그가 <해리스 버딕의 미스터리>를 포트폴리오 판으로 출간한 이유를 서문에 쓰는데.....

지난 12년 동안 나는 아이들과 어른이 쓴 해리스 버딕 이야기를 수 백통을 받았다. 이러한 성과는 미스터 버딕의 글과 그림이 얼마나 영감적인지 보여주고 있다. 학과 선생님들과 영감이 가득한 작가들은 미스터 버딕의 그림을 보면서 더 많은 상상력을 표출했다. 마지막으로 이 포트폴리오 판 편집을 낸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피터 웬더스와 나는 <해리 버딕의 미스터리>가 출간되면, 미스터 버딕의 정보를 발켜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어떠한 실마리도 없이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며, 1994년 나는 북캘리포니아에서 사는 Mr. Daniel Hirsch라는 사람의 편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을 고서적 거래인이라고 소개하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1963년에 그는 메인주 Banor지역에서 개인이 수집한 책을 팔겠다는 오퍼를 받았다. 그가 거래 받은 책은 황폐한 빅토리아식 대저택에 있었다. 그 집의 노부인은 죽으며 자신의 대저택과 집안에 있는 것들을 동물해방단체에 기부를 했던 것이다.  

그는 그녀가 모은 책들의 라이브러리에 깊은 인상을 받아 전부를 구입했으면 Through the looking glass라는 캐릭터의 초상이 새겨 장식된 나무틀의 거울도 포함되어 있었다.   

2년전에 여전히 Mr. Hirsch의 소유인 이 거울을 자신의 서점 벽에 걸어두었다가 떨어져 깨졌다. 유리 조각들을 치우는 과정에서 그는 주목할 만한 것을 발견했는데, 거울과 거울 사이의 나무판대기 사이에서 숨겨졌던, 여기 포트폴리오 판에 수록된 "Young mgician"의 드로잉이었다. 

이 드로잉은 버딕의 다른 그림들과 크기면에서, 테그닉면에서 동일작이었다.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사인은 없었으며 하단에 타이틀과 설명이 있었다. 이 드로잉의 제목은 또 다른 이야기인 Missing In Venice"와 같았다. 나는 이 드로잉이 버딕의 작품임을 확신한다. 


  

포트폴리오 표지

 

문지에 실리지 않는 그림, 고서적상에 의해 발견된 그림을 알스벅가 포트폴리오판으로 내면서 다시 그렸다.

 
 

표현력이 기 막힐 정도로 멋지다. 알스버그가 빛을 묘사한 장면을 볼 때마다 느낄 수 있는 숨 막힐 듯한 정적과 고요함은 더 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저 소녀가 받는 자연광과 밑의 인공적인 조명의 빛 중 어느 것이 더 그의 묘사력이나 표현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진이 아니고 실제로 보면 정말이지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그의 빛의 표현력은 놀랍다. 특히나 인공적인 조명의 빛의 표현은 이 작가를 따라갈 그림책 작가가 있을까? 저 빛에 빨려들어갈 듯 압도된 느낌이다. 

사실 이 작가는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없다. 거의 팔리지 않는 작가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그림책이 아이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수준의 작품도 아닌데다,  상당히 난해하고 정적인 이미지는 동적이며 귀엽고 앙증맞은 유아 수준의 다른 그림책들에 비해 아이들에게 딱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의 그림책이 고학년(심지어 고등학생들도) 수준에 맞지만, 그림책은 아이들 것이라는 속 좁은 편견이 사회에 전반적으로 퍼져 있기 때문에 그의 수준 높은 그림책을 접할 수 있는 아이들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일게다. 

알스버그만큼 아이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가가 몇 이나 될까? 그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나 <압둘가사지의 정원>을  읽고 반전의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면 그 아이가 가질 수 있는 독서체험은 고속도로스타일의 독서 일 수 밖에 없다. 빠르고 급히 서두르는 읽기의 의무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그리고 호기심을 가지고 그의 작품을 읽어나가면, 그가 제시한 반전에 빙그레 웃지 않을 수 없고 반전의 결말에 대한 호기심으로 며칠을 고민할 것이다.   

그의 예술적 경지의 그림과 지적 유희에 한번 도전해 보시라. 당신이 성인일지라도.  

덧; 예전에 글 잘 쓰는 나귀님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에 대한 리뷰를 쓴 적이 있다. 그게 아마 2005년 5월경으로 기억되는데, 사실 그 때만 해도 나는 알라딘 서재가 있는 줄, 까막게 모르고 있었다. 그림책 카테고리에 들어와 관심가는 책의 리뷰 읽고 구입하던 시기였지만, 그 때 이 책의 리뷰를 어찌나 재밌게 읽었는지 지금도 확실하게 기억한다. 분명 나귀라고 써 있고 그의 리뷰에는 처가댁에서 얻어 못지 못한 무화과에 대한 글이 장문으로 실려있었고, 그때 그 장문의 리뷰를 읽으면서 얼마나 키득거렸는지, 난 아직도 이 무화과의 리뷰중에서 나귀님의 리뷰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실 무화과하면 나귀님이 먼저 떠 오른다. 그것도 얻어 먹지 못한 무화과를. 나귀님의 리뷰에 따르면 하루키가 알스버그를 좋아해서 알스버그 일본판은 하루키가 다 번역했다는 일화가 있다는.  밑의 책은 하루키가 번역한 알스버그의 일본책들. 더 찾으려다가 귀찮아서.... 하루키가 르귄, 카버, 팀 오브라이언, 챈들러등등 번역한 게 창작품보다 더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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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진화 - 최초의 언어를 찾아서
크리스틴 케닐리 지음, 전소영 옮김 / 알마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언어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한 사람은 갈릴레오였다. 그는 24개의 자음과 모음으로 한정된 알파벳만으로 무한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챘던 것이다(촘스키 사상의 향연 p167) 실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자음과 모음, 기껏해봐야 24개의 조각들이 단어를 만들고 문장을 만들어 표현하는 것이다. 그 조각 모음은 실로 놀라운 무한 표현력을 발휘하면서 우리를 동물과 다른 개체로 구분지어졌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늘상 우리가 말하고 쓰는 언어에 대한 중요성을 자각하지 못한다. 만약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우리의 표현 수단은 몸짓 언어와 그림 언어로 대체될 것이고 아무래도 표현 능력은 한정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인류 발전은 꿈도 못 꾼 채, 어느 숲 속 나무줄기에서 늘어지게 낮잠자는 삶에 만족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그런 일상도 나쁜 것도 아니지! 하지만 그 재미난 책을 못 읽어!). 그렇다면 언어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이 책은 그 언어의 기원을 말하고 있다.  

현재 우리의 언어학은 촘스키의 생성문법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언어학에서는 대세이다. 그런데 지금 촘스키의 생성문법론을 반격하는 또 다른 언어론이 등장하며 서로 언어학의 새 지형 판도를 짜려고 시도하고 있다. 촘스키의 생성문법론은 인간은 누구나 언어문법을 타고 났다고 생각 한다. 그래서 우리가 만 두돌이 지나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생성문법론에 반격을 가하는 사람이 스티븐 핑커와 폴 블롬 그리고 촘스키의 한 때 제자였던 필립 리버만이다. 새로 등장한 핑커와 블롬, 그리고 리버만의 언어학도 진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촘스키의 진화론적 언어와 다른 점은 촘스키의 생성문법론은 굴드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서 있다는 것이다. 언어를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갑작스레 생긴 부산물로 본 것이다. 반면에 핑커와 블룸은 언어가 순차적으로 진화했다고 보는 도킨스의 적응주의 관점에서 보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언어는 본질적으로 순차적이라고 생각한다. 순차적 의사 소통의 기초 단위는 명사와 동사, 그리고 이들을 하나로 엮을 때 사용하는 구조와 소리의 규칙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리버만은 우리의 뇌 속에 언어를 담당하는 기관이 따로 존재한다고 보는데, 퍼그슨씨병이나 뇌를 다친 사람들의 임상실험에서 그는 우리의 뇌 속의 기저핵이 언어를 담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촘스키의 생성문법론이나 핑커의 순차적인 언어론에 대해 어떤 이론이 맞다, 안 맞다 할 능력은 없지만 아이들을 키우면서 관찰한 결과 촘스키의 생성문법론도 그리고 순차적인 언어론도 다 일리는 있다고 본다. 아이를 기관에 맡기느니 그 돈으로 책 사자! 주의여서 아이들과 있는 시간이 다른 엄마들과 많았던 나로서는 아이들의 언어를 자세히 관찰 해 볼 기회가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은 태어나면 목을 가누고, 뒤집고, 기고, 앉고,서고, 걷고 순차적으로 누구한테 배우지도 않는데 본능적으로 한다(아, 그럴때마다 그 환희란...)  

그리고 언어를 하는 데 있어서 정말이지 촘스키의 생성문법론을 지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이들은 한살 무렵부터 엄마라는 한단어를 시작해 불과 몇 달 사이에 신기하게도 문법적으로 체계를 갖춘 언어를 말한다. 빠른 아이들은 두 돌이 되기도 전에 어른을 능가하는 말들을 한다. 말이 늦는 아이들은 몇년동안 말을 하지 않다가 갑작스레 말문이 터지면 완벽하게 문법적으로 맞는 말들을 쏟아낸다. 그러다가 점차 자라면서 순차적으로 언어의 단순한 의미에서 추상적인 사고의 언어가 가능해 진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세심한 리스닝의 세계가 열려 있다고 보는데, 이 책의 저자에게서 그런 추론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기는 부모의 언어를 배우면서 자신이 노출된 언어에 맞게 소리의 레퍼토리를 조정한다. 그들은 모국어의 소리뿐만 아니라 전형적인 억양패턴도 구사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커가면서 다재다능한 발음능력을 확실히 잃어버리므로 결국 어떤 언어의 소리는 발음할 수 없게 된다(p217)"  

아이하고 영어 공부를 하면서 더욱더 촘스키의 생성문법을 실감하는 것이 아이에게 처음엔 파닉스 위주의 영어를 공부하게 하였는데,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영어그림책으로 통문장 위주로 영어공부를 함께 하는데 이게 명사 위주의 파닉스보다 휠씬 더 효과적이었다. 길어서 혹시 잘 따라오지 못할까 걱정스러웠는데, 문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듣는 것도 더 효과적으로 영어문장을 더 잘 이해한다. 리스닝도 그렇고 문장을 따라 읽는 것도 파닉스보다 더 세심하게 듣고 잘 읽는데, 얼핏 아이하고 영어공부를 하며서 아이들에게는 언어를 쉽게 받아 들일 수 있는 뭔가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짧은 문장에서 긴 문장으로 옮겨가는 데 있어서 아이가 받아들이는데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촘스키와 핑커 이론을 반반씩 이해가 되었다는. 

문제는 이 책이 촘스키의 생성문법론이 가지고 있는 오류, 즉 언어는 어쩌다 우연히 획득한 부산물이라는 관점을 촘스키 자신이 수정하도록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우리 촘스키의 거대한 벽을 함부로 하지 허물어 트리지는 못했다. 촘스키의 생성문법론이 미국 언어학의 막강한 지배 이데올로기인데다 영향력이 큰 좌파 정치학자라는 점을 무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책에서 단지 촘스키가 이제 그의 고집을 꺽고 언어의 진화를 말하자고 한다고 한다. 향후 그의 이론이 그가 스키너의 이론을 허물어뜨린 것처럼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의 이론을 뛰어넘지 않는 언어학이 나오지 않는 이상 그의 아성을 무너뜨리기는 쉬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굴드의 발생학 진화가 흔들리는 이상, 그의 언어학도 수정을 가할 때가 된 것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이 책 무지 재밌게 읽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아이들의 말문이 틔였을때의 그 신기함때문에 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알파벳 그림책에 관심을 가져 수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느 정도 호기심이나 의문을 해결해 준 책이었다. 만약 언어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그림도 그리고 음악 같은 문화를 심오하게 추상적으로 표현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 언어는 극궁적으로 소통이 목적이기도 하지만 무한한 표현 수단이기 때문이다. 언어세계의 생물학적 진화에 혹은 언어에 관심을 갖는 분이라면 강추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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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온난화에 속지 마라>를 리뷰해주세요.
지구온난화에 속지 마라 - 과학과 역사를 통해 파헤친 1,500년 기후 변동주기론
프레드 싱거.데니스 에이버리 지음, 김민정 옮김 / 동아시아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지배적인 이론에 대해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는 대안 이론은 언제나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수 십년 아니 수백년을 지배한 이론(예로 천동설 같은)이 굴러 오는 새 이론(예로 지동설)의 과학적인 증명을 통해 굴복함으로써 인류 역사는 거듭 비약적인 발전을 해 왔기 때문이다. 지배적인 이론에 대한 의심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어떠한 지배적인 이론에 대한 의심은 문제를 제기하고 검증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지배 이론을 낳았고, 그러한 사이클은 인류 역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 될 것이다.

이 책은 우리의 시대에 지배적인 환경이데올로기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산화탄소에 의한 지구 온난화는 우리가 지구를 오염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고 지구 역사의 사이클상 그렇다는 것이다.     

지금의 따뜻한 온난화는 적어도 백만 년 전부터 1,500여년(+-500년) 주기를 가지고 나타나는 자연적 기후 변동 현상의 한 부분인 것으로 보인다(p11).

두 저자는  그 예로 1984년 덴마크의 윌리 단스고르와 스위스의 한스 외슈거가 그린란드에서 처음으로 채취한 빙하 코어에서 나온 산소 동위원소를 분석한 발표 - 이 25,000여년 동안의 지구 기후 역사는 뚜렷한 주기를 가지고 기후가 변해왔다는 것이다- 와 역사적 지역적 문헌을 통한 기후 사이클를 예로 들었다.  

그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가 1,500여년의 주기에 해당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우리 지구가 더워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온난화 덕에 우리는 질병에 걸린 위험이 줄어들고 환경을 지키기 위해 1500억 달러 이상의 비용이 드는 교토의정서를 파기하면 제 3세계 국가에게 보건, 교육, 수자원, 위생시설을 공급할 수 있고 테크놀로지에 의존하는 우리의 삶은 더욱 더 편리해지고 유기농을 고집하는 대신 화학비료를 쓴 덕에 우리는 더 많은 식량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들이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산업화 덕에 우리의 삶은 윤택해졌고 식량 걱정 없으며 테크롤노지적 삶은 편리함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편리한 삶을 포기할 만한 용기도 가지도 있지 않을 것이다. 어쩡쩡한 환경보호주의자들에게는 이들의 말은 솔깃한 주장일 수 있다.  

하지만 온난화가 1500여년 주기론의 한 부분일지라고 환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환경주의자들을 보조금이나 더 타내려고, 온난화를 뻥튀기 했다고 애쓰는 부류들로 분류하는 저자들의 시각엔 심한 반발을 일으킨다. 너무 근시안적이고 환경오염에 대해 낙관적이며 우파적 탐욕이 그래도 여과되지 않고 드러난 주장이다. 

저자들의 이론대로 지금의 온난화가 1500년 주기설이라고 치자. 지구가 탄생한 이후 18세기 전까지 지구의 환경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어떠한 변수도 존재하지 않았다. 올 초에 읽은 18세기에 최초로 미국 땅 원정에 올랐던 루이스와 클락의 <불굴의 용기>라는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 수 천년동안 변하지 않은 땅을 처음으로 밟고 간다고 한 대목이었다. 그 때 그 문장 읽으면서 든 생각이 아, 우리 인류가 이렇게 세계를 누비고 지형을 바꾸고 한 것이 일세기도 되지 않았구나, 였다. 사실 우리가 지구를 성형하기 시작한 것이 일세기 조금 넘어서이다. 산업화의 시작으로 지구와 인류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오염은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금까지 지구 수십억의 역사상 오염이라는 변수가 나타난 것은 일세기 남짓이다. 산업화가 가져온 오염이 지구의 환경을 변화시키지 않았을 것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1500년 주기설을 뒷바침한다 치더라도 지금 지구는 심한 오염이라는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이 책의 어느 부분에서 더운 여름에 에어콘을 켜지 않고 살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라는 뉘앙스의 글은 이 책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드러내주고 있다. 아프리카 여인의 비참한 삶을 이야기하면서 교토의정서를 파기하면 교토의정서를 지키는데 드는 비용 1500억달러를 보조할 수 있다라는 인도주의적 발언에 감흥하기 보다는 그들의 입 발린 립서비스에 짜증이 날 정도였다.  

물론 나는 물리학자도 아니고 기후학자도 아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맞을 지도 모르는 이론에 너무 반발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설사 그들의 1500년 주기설이 맞다하더라도 지구 환경을 지키자는 환경주의자들을 비난할 생각도 없고 좀 불편하더라도 화학연료 덜 떼고 대중교통 이용하고 싶다. 이 책은 미국의 우파가 어떻게 그들의 정책을 정당화하고 인도주의적 운운, 립서비스 해 가며 탐욕스럽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물불 안 가리는 지 알 수 있는 책이다. 제발 이 이론이 해프닝으로 끝나길 바랄 뿐이다. 그들에게 북극 곰에 관한 다큐멘타리 영화나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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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톰슨에 대한 최초 관심은 서남희씨가 열린어린이에 연재한 것을 한권의 책으로 묶어 단행본으로 낸  <그림책과 작가이야기>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콜린 톰슨에 대해 짧지만 알찼던 그에 대한 설명과 그림은 그림책 매니아인 나에게 어떤 스파크같은 불꽃이 튀었다. 이 겹겹히 쌓인 그림과 비범한 내용의 그림책을 꼭 구해보리라. 어찌어찌하여 이베이까지 뒤져 그의 그림책을 몇 권 건졌고 , 처음으로 구했던 작품이 바로 위의 <Looking for atlantis>라는 작품이다. 처음 이 작품을 편지함에서 꺼낼 때의 기분을 아직도 잊지 못하겠다. 결제를 다 하고 한 십일을 기다리다 받았는데, 그 십일간 책이 혹 도착하지 않을까 싶어 노심초사 했었다. 구하고 싶은 책을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찾다가 손에 넣었을 때의 그 감격이란.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며 바다에서 모험을 하며 일생을 보냈다.

 

소년이 10살이었을 때 할아버지는 집에 돌아와 임종을 맞이하고 소년에게 아트란티스를 찾아보라며 자신의 체스트(chest)를 유품으로 준다.  

 

소년은 할아버지의 유언에 할아버지의 체스트를 열어 할아버지가 남기고 간 유품을 뒤적인다. 그 안에는 금화, 굴비, 다이아몬드 같은 귀중품이 있었지만 색소폰 아래, 천달러 지폐 밑에 문이 하나 있는 것을 소년은 발견하지 못한다.

 


 

할아버지가 말한 아틀란티스를 찾기 위해 다락방을 뒤지는 소년, 이 장면은 이 그림책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소년이 알 수 없는, 감지 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가 열려있는데. 

 여기저기 찾아보고... 







 

찾다가 못 찾고 실망해 계단아래 앉아 있는 소년의 모습.

 

낙담해 있는데 할아버지의 앵무새가 다치자 소년은 급히 지하실로 내려가 앵무새를 안고 있는다. 점차 더욱 더 어두워지고 소년은 눈을 뜨고, 눈을 감는다.  순간, 소년은 뭔가를 깨닫는다. 

 

집아래 서 있던 그 곳에 태양이 떠 오르며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여기가 바로 아틀란티스군요.   


작품마다 비슷비슷한 다층적인 그림을 보여주는 콜린 톰슨의 이 그림책은 1993년 작이다.  여타 다른 그림책 작가들의 친밀함이나 친근감 같은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컬트적인 분위기의 이 그림책은 현재 아마존에서는 절판으로 올라와 있다. 현재의 그림 스타일은 <플러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스푸키하면서 유머스럽고 익살스러운 친근한 모습으로 많이 변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현재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그가 왜 중년 시절에 그린 진지하면서도 내면적인 그림책을 다시 내지 않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의 그림책이 아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림책은 아니다. 귀엽고 애교 많은 캐릭터도 익살스럽거나 개그스러운 내용은 없다. 하지만 어찌 세상을 귀엽고 이쁘고 익살스럽게만 볼 수 있을 수 있겠는가.

콜린 톰슨은 집에 집착하는 그림책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소년이 아틀란티스를 찾는장면마다 보여지는 것은 집안의 모습이다. 특히나 다락방에서 아틀란티스를 찾는 장면은 너무나 매혹적이다. 환상적이면서도 몽롱한. 그가 집을 집중적으로 그리는 이유는 뭘까? 그는 "집에는 끝없는 변화와 가능성이 열려 있고 ....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할수 있으니깐요(그림책과 작가이야기,p197)"라고 답한다.  

몇년전에 받아 보았을 때는 그저 멋진 그림에 감탄한 정도였는데, 요즘 다시 꺼내 읽으면서 다층적인 그림뿐만 아니라 이야기도 다층적일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딸만 둔 작가에게 소년은 어떤 존재일까?  자신의 어린 시절의 분신일까? 아니면 주변의 사내 아이들이 겪을 수 있는 내면적인 고통을 아틀란티스에 비유한 것일까?  

소년의 아틀란티스가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단지 이 그림책이 소년의 성장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긴 했다. 소년에서 어른으로 나아가는 과정,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 그가 성숙하고 완성된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곳.  내가 누구인지 내가 설 곳이 어디인지 몰라 방황하고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그런 사춘기의 한 과정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어린아이가 볼만한 책에 가깝다기 보다는 청소년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들에게 알맞은 책이 아닐까 싶다. 개인의 정체성 확립은 제대로 된 어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고 지나야 하는 과정이다. 다른 세계로(성인) 편입되어야 하는 통로이기도 하고. 아틀란티스는 소년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정신적, 심리적 고통을 내면화한 비유적 세계가 아닐까 싶다.     

사내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푸념일지 모르겠지만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갈수록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품 안의 자식이라고 아이가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조금씩 조금씩 변해간다. 우리 성장할 때와 달라서 요즘 아이들은 확실히 빠르다. 부모의 말에 되받아치기는 말할 것도 없고 순간적으로 반항적인 눈빛을 쏘대기도 한다. 아, 처음 애가 반항적인 눈빛을 보여줄 땐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무시하고 넘어가야지 했던 사항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그래, 네가 감히 나를 그런 식으로 쳐다봐. 한바탕 해볼테면 해보자라는 오기까지 발동했다. 아이와 한바탕 큰 싸움으로까지 번지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도 있었다. 우리 아이 나이 또래에 나나 남동생이나 엄마를 그런 식으로 몰아부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엄마를 그 어린 나이에도 연민의 눈으로 보았다. 월급도 제대로 갖다 주지 않은 아빠때문에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며 우리를 키운다는 것을 그 어린 나이에도 알고 있었기에. 반항은 커녕 절대적인 순종으로 그나마 맘 고생이 심한 엄마의 부침을 덜어주고 싶었다. 학교 다니면서 엄마에게 가장 미안했던 순간이 아침에 준비물 사야된다고 돈 달라고 해야할 때였으니 어린 나이에도 세상 물정 어느 정도는 알았던 셈. 하긴 뭐 우리 세대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한 일이 아니었는지.  물질적 풍요가  한 아이의 성장에 가능한 인자일지 모르지만 필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그림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도 한 아이의 고통적인 성장이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는 준비와  더 넓은 세상을 껴안기 위한 통과의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세상의 모든 사춘기 청소년들이 자신만의 아틀란티스를 꼭 찾기를. 세상 사는 게 뭐 그리 호락호락한 게 있겠니. 세상살이는 다 네 몫어치다.  

덧: 요즘 같아서는 능구렁이 10마리 데리고 사는 게 더 낫다 싶다. 도대체 말도 잘 안하고 입만 뽀루퉁하게 나와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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