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고 좋아하고 있으며 어쩜 나이 들어 눈이 침침해 글자 한자 들여다 보는 것이 힘들어도 좋아할 것만 같다. 오랜 시절 나와 함께 있어 준 벗과 같은 책. 책만은 이상하게 바람둥이 기질을 타고 나서 그런지 내 인생의 독서 이력은 그 때 그 때 다르며 좋아하는 작가들도 유행에 따라 따르다. 물론 내 맘속의 영원한 작가들이 몇 몇 있기는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책이 없던 때라 책을 읽을 만한 곳을 찾아 다니며 세계문학이든 만화든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읽었었고 오로지 한국 작가들만 편애했던 스무살 시절도 있었고 현재는 아이들하고 부딪히면서 살아서 그런지 그림책이며 자연과학서적등 잡다한 분야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몇 년 후에는 또 어떻게 변할지 미래의 독서는 미지수로 남아있지만. 

 

며칠 전에 국내도서 칸에 들어가 흝어보다가 오정희 선생의 새책을 발견하였다. 물밀듯 밀려오는 오정희 선생의 문체에 대한, 묘사에 대한 그리움. 불현듯, 아 그렇지, 오정희 선생은 한 때 내 20대때의 여자였지,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언제였는지, 어떤 계기로 그녀의  <바람의 넋>을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중편소설에서 뿜어져 나오는분위기. 해질 녁 초겨울의 바람처럼 차가운 듯한,  텅 빈 쓸쓸한 분위기가 내 몸을 휘감아  미친듯이 그녀의 작품들을 사서 읽은 적이 있었다. 여주인공과 같은 분위기를 타고 느낄 정도로 강한 문장을 가졌으며 그 강인함은 기시감이 형성될 정도(강하다고 해서 남성적 문장이라는 말은 아님!). 이상하게 <바람의 넋>의 줄거리는 십년이 휠씬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만큼 그 소설 속  여주인공의  처절한 트라우마를 강렬하게 묘사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글을 쓰던 분인데, 몇 년전에 선생은 수필집<내 마음의 무늬>에서 글이 더 이상 잘 써지 않는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랬던가. 나는 그 이후로 오정희 선생의 작품은 검색하지 않었고 우리 소설에는 더더욱 관심 가지지 않게 되었다. 공지영씨가 오정희 선생의 작품이 너무 좋아 무작정 춘천으로 기차 타고 떠났을 정도라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나 또한 선생의 젊은 시절의 글은 내 20대 시절에 바람의 넋처럼 귓가에 맴돈다.   

 

고등학교 시절, 소설가 양귀자을 알게 된 계기가 <학원>이라는 잡지에 실린 <유황불>이라는 단편이었다. 그 단편소설속의 여주인공 소녀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던 터라, 애정이 많이 가는 소설이었고 그 애정은 스물 살이 넘어도 식지 않았다.  

양귀자 선생의 <지구를 색칠한 페인트공>은 정확하게 내가 스무살의 겨울 무렵에 나왔던 연작 소설집이었다. 스무 살의 겨울 어느 날, 교보문고에 가서 <지구를 색칠한 페인트공>의 표지를 들취보았다가 내용이 너무 따스하고 훈훈해 사 가지고 왔던 책인데, 연작내용은 동네골목에서 일어날만한 아주 작은 소재의 따스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 책은 양귀자 선생이 문지에서 계속 책을 내다가 남편이 따로 독립해서 차린 살림이라는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해 대박을 터트린 소설로 아는데,  양귀자 선생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가이다. 내가 아는 한 그녀만큼 글을 따스하게 쓰는 작가는 없다고 생각한다. 선생의 작품 초기 시절만 해도 가식적으로 사람의 팍팍한 맘을 치유해주는 그런 따스함이나 보듬음이 아니고 문체 자체가 따스했었다. 그런 선생이 변한 것이 그녀의 단편 <곰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건축가가 어떤 집을 지을까 고민하다가 이제 내 손으로 지어야지 하고 결심한  결심한 <곰 이야기> 이후 선생은 좀 더 돈이 될 수 있는 작품을 연달아 내 놓았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돈이 될 수 있는 상품을 내 놓은 게 나쁘다거나 변절했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선생만이 가지고 있던 따스한 스토링 텔링이 사라지면서 점점 선생의 작품을 안 사다 읽게 되었다는 것.  

 

푸하! 배수하하면 사과부터 떠오른다. 그녀의 첫 작품집 문지에서 나온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를 동네 시장의 서점에서 사고 나오면서 옆 과일가게에서 파는 빨간 홍옥을 까만 비닐에 한아름 사 들고 온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난 사과를 그것도 푸른 사과도 부사도 아닌 새빨간 홍옥을 무지 좋아한다. 9월 말쯤 나오기 시작하는 빨간 홍옥을 껍질채 한입 한입 배어 먹은 그 맛이란. 친정엄마는 시다고 질색팔색을 하지만 난 그 짜릿한 신맛이 입안 가득 채울 수 있어 홍옥을 좋아한다. 이 작품을 읽고 그녀의 신끼 있는 작가 사진을 보고 애사롭지 않는 모습에 작품보다 배수아라는 인물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한동안 그녀의 작품을 사 다 읽다가 한동안 그녀가 유학인가 뭔가 가 있는 바람에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요즘 검색해보면 번역도 하고, 소설도 쓰고 하는 것 같던데. 요즘은 구입하기가 망설여진다.    

 

오히려 우리 시대에 직접적으로 5.18을 말하기란 쉽지 않았다. 알고 있지만 모두가 암묵적으로 침묵을 지키며 쉬쉬 거렸다. 왜곡된 모습으로. 십년 정도가 흘러서야 그리고 정치적으로 묶인 매듭이 느슨해지면서 5.18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조금씩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5.18과 마주 선 작품이 바로 최윤 선생의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였다. 상처난 역사의 아픔을 여린 감수성으로 풀어내어 더 감정적으로 다가온 작품. 최규석의 100도시 보다 더 먼저 청소년들에게 권장하고 싶은 소설이다. 불문학 전공자가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고 우리의 비어 있는 역사를 채우기 위해 애쓴 흔적이 남아 있다. 사실 그 때는 그런 생각 못했다. 그냥 이 소설에서 최 윤 선생이 바라 본 5.18의 비극성에 호감(?)이 갔을 뿐이었다. 최윤 선생이 썼던가. 자신의 방의 네 면은 책을 위한 공간이라고. 지금은 뭐하시는지 모르겠다. 이상문학상도 탔던 것으로 아는데, 활동의 폭을  점점 줄어들어 활동을 안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 내 경력은 이 소설 하나면 됐다, 싶어 주춤거리고 있는지. 

언제부터인지 점점 우리 소설과는 거리감을 두고 지낸다. 일년에 한 두권 읽으면 많이 읽는 정도. 소설이 짊어진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혹은 너무 가벼워서 일 수도 있고. 소재나 주제가 매 그 밥에 그 나물이서 질려서 물린 상태일 수도 있겠다. 아니 어쩜 내 나이가 젊은 처자들의 심오한 세계를 이해 못 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난 좀 새로운 스탈의 글쓰기나 주제를 원하는데 그들이 젊은 혈기임에도 밀리는 것 일수도 있고. 여하튼 내가 물고 늘어질 만한 우리 소설가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한 때 내가 좋아했던 소설가들이 참신한 기법으로 글을 쓸 일은 만무하고..그리고 그들도 젊은 날처럼 글을 쓰지 않는다(그리고보면,  하루키옹 참 대단하네!). 이제는 우리 소설을 꼭 읽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읽을 책이 산더미 같은데, 이 나이에도 우리 것을 애용하자는 표어는 좀 무리 아니겠는가. 그래도 마음 한 켠에는 내 맘에 쏘옥 드는 작가 한 명쯤 발견하고 싶은 맘은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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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10-04-27 20:24   좋아요 0 | URL
한국소설이 읽었던게 까마득한 옛날이에요. 언제부터인가 한번 읽어버리면 내용도 잘기억이 나지 않는 일본소설들만 잔뜩 읽고 있어요.

기억의집 2010-04-28 14:53   좋아요 0 | URL
저도요. 한국 소설은 가뭄에 콩 나듯이 사서 읽어요. 전 이상문학상같은 상에 더 열받아서 한국문학은 애시당초 가망이 없다고 접었어요. 지네들끼리 돌려가면서 타 먹는 이상문학상, 자멸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scott 2010-04-28 20:1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자기네들 끼리 읽고 수상작 결정하나봐요. 대중성이 아닌 문학적 가치 '비문'에 가치를 둔다는데 흠 재미없는건 사실이죠. 기억의 집님 말처럼 자기네들끼리 돌려가며 타고 노벨문학상 후보작 운운하는것 같아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웃음과 망치와 열정의 책 책 읽는 고래 : 고전 5
진은영 글, 김정진 그림 / 웅진주니어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고등학교 때 무턱대고 읽었던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철학책들이 생각이 났다. 하지만 멋모르고 읽었던 니체의 책들은 그의 전체적인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려 놓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실 니체의 철학책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차도 읽기가 버거운 것은 사실이다. 철학이라는 게 달랑 그 사람의 사상만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가 살았던 시대를 알아야 하고(사실 난 세계사를 좋아하긴 했지만 세세한 부분까지 몰랐고) 그 시대의 생활상이나 사상 시스템이 니체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한 것같은 기본적인 지식이 있어야하는데, 그 땐 어떻게 책을 읽어야하는지, 처음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하는지 그리고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잘 몰랐다. 주변에 독서 가이드를 지도할 만한 선생님도 없었고 독서 가이드라고 할 만한 책도 없었기 때문이다. 몇 십년 전의 출판 시장을 현재의 출판물과 비교한다는 자체가 무리인 것은 알지만, 과거의 출판물들과 비교할 때 요즘은 어린이들을 위해 만든 책들의 범위가 다양하다는 데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다양한 어린이 책들이 쏟아지는 요즘에 발견한 이 책은 어린 논술 세대를 위해 만든 책이다. 워낙 니체의 사상이 심오하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런 니체의 사상을  논술 때문인지 초등학교 고학년들도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풀이해서 내 놓은 책이 바로 <니체의 차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이다. 성인이나 중고등학생들은 쉽게 전체적으로 이해가능하며 초등 고학년은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좀 무리일 수 있겠다. 니체 사상의 중요한 근간을 이루는 인물인 위버맨쉬(얘전 우리가 읽었을 때는 초인)에 대한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면 니체에게 위버맨쉬는 어떤 존재인지 쉽게 설명하고 있다. 니체의 위버맨시는 권력자, 부자같은 계층적으로 상단에 위치에 있는 인물이 아니고 내적으로 외적으로 강한 인간을 의미하는데, 지은이가 니체의 민주적인 위버맨쉬를 설명하기 위한 과정에서 예를 든 범위가 넓어져 조금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니체가 살았던 시대의 가장 큰 과학적 충격인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언급이 있었더라면,그가 말하는 신은 죽었다라는 의미의 백그라운드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그가 왜 신을 버리고 위버맨쉬 사상을 들고 나왔는가 하는 역사적,과학적 배경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래도 이 책의 대상이 누구인지 명확한 상태에서 대상이 대상인만큼 복잡한 배경을 커트시킨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없지는 않지만. 여하튼 논술 세대를 위한 책답게 이해도는 높은 책인 것만은 확실하다. 처음엔 과연 아이들을 위해 이런 책이 꼭 나와야했을까하는 의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읽고나서 이 책의 수준이 어느 정도 대상을 명확하게 짚어내고 출발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더할 나위없이 권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의 이해도를 바탕으로 그의 원전을 이 참에 읽어치우는 것도 니체의 사상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기회를 마련 할 수 있다는 것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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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크면서 커다란 변화는 그림책을 덜 산다는 것이다. 설마 하겠지만,  진짜 아주 조금씩만 사 들인다. 언제부터인지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작가 혹은 주제별로 관심가는 그림책만 구입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꾸준히 관심가는 작가로는 윌리엄 스타이그, 크리스 알스버그와 알스버그를 통해, 그림책 역사에서  커다란 전환점 상에 모리스 센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센닥의 작품들은 닥치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수집하고 있고(아.마.도 나만큼 센닥의 작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언젠가 센닥이야기도 해야지), 주제별로는 신데렐라, 알파벳북, 고양이 그리고 크리스마스 전날 밤 정도이다. 이 외의 주제중에 <춤추는 열두명의 공주>,<호두까끼 인형>이나 <눈의 여왕>도 수집하다가 잠시 주춤거리고 있다. 일단 이런 주제들은 국내 인터넷 서점에서 구하기 힘들고, 이베이나 알리브리스에 들어가 검색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돈부자가 아니라서....(아, 올해 서평도서단 신청하면서 행복했던 게 생애 처음으로 공짜책 실컷 받아보았다는. 한해에 공짜책 20권 넘게 받는다는 게 그리 행복한 일인지 몰랐다)  

지금 소개하는 그림 형제가 수집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인 <춤추는 열두명의 공주>는 수집한 책이 네권 밖에 되지 않아, 내세울 것은 없지만 어떤 한 주제를 가지고 책을 수집하면 일러스트 작가가 선호하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그리고 글에서 뽑아 낸 이미지를 어떤 식으로 형상화 했는지를 알 수 있고, 일러스트 작가가 글 전체에서 통합해낸 이미지를 화면 분할을 통해 중점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일러스트 작가마다 비교해 보는 재미도 솔솔하다. 우리의 일러스트 작가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주제별로 그림을 모으다보면 책 전체에서 감지할 수 있는 이미지를 단 한장의 그림으로 이미지화 할 수 있는데, 솔직히 그런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 책일러스트 작가들중에서 시공사나 비룡소의 그림책 전권을 다 구비해놨는지, 그림책 작가들을 몇명이나 알고 있는지 반문하고 싶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싼티 나는 라인과 제대로 그려 놓지도 못하는 눈동자(제발, 스타이그의 한 두 작품이라도 습자지 대고 그려봤으면 좋겠다. 그의 작품이 보기에 우스워 보이지,  라인만으로도 그는 꽉 차고 풍부한 화면이 나온다, 그게 그리 쉬운 줄 아남) 허접한 배경 등등. 리뷰어들의 불만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아 놔~    

<춤추는 열 두명의 공주> 이야기를 다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책이미지와 함께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Kay Nielsen/신서관 동화집/카이 닐센 춤추는 열두 공주  

개인적으로 아들애한테 우스개 소리(사실 진심이 담긴)로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민준아, 일어 배워서 엄마 이 책들 해석 좀 해줘! 너 일어 잘하면 세계문학 다 읽을 수 있다,라고 말이다. 흔히 출판대국이라는 미국에서조차 절판된 책을 일본 아마존에서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 만큼 일본인들의 책욕심이라고 해야하나. 없는 책이 없다. 어떤 쟝르를 가리지 않고 방대한 양의 책을 소유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헌책방을 돌아다니는 재미가 이 나라처럼 솔솔한 나라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일세기 가까운 시대에 살아 활동했던 카이 닐센같은 이런 책들은 우리나라에 나올 일도 없고 사실 관심 가져주는 출판인도 편집인도 없을 것이다. 카이 닐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  http://www.wendybook.co.kr/list.php?ac_id=114&ai_id=7476 로. 20세기 초의 카이 닐센의 일러스트한 세 편의 작품을 이 동화책에서 볼 수 있다. 이 작품집의 <춤추는 열두명의 공주> 삽화는 그렇게 많지 않다. 지금 보여준 일러스트만이 수록되어 있다. 비싼 돈 주고 카이 닐센의 작품을 한 장면 더 보고 싶다는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아르누보풍의 일러스트와 현재의 감각에도 뒤지지 않은 색감과 세련되면서 가는 라인 처리 그리고 우아한 이미지를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수 밖에. 

 



   

이 장면, 12명의 공주가 자신들의 방에 있는 비밀통로를 통해 빠져나가 지하세계의 궁전으로 가는 실버, 골드, 다이아몬드 숲을 통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4명의 작가들 모두 이 장면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눈여겨 보시길. 







The Twelve Dancing Princesses (Picture Puffins)  작가 : Eroll le cain  

아마존에서 작품이미지를 가져왔지만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것은 일본판. 에롤 르 케인에 대한 작가 소개가 일어로 써 있어서 어떤 작가인지 상세하게는 모르지만, 41년생으로 작가연본에 나온 것으로 봐서는 60,70년대 그림책이 아닐까 싶다. 생존해 있는지조차 잘 모르며 이름만으로 추측해보건데,  프랑스 국적의 작가가 아닐까나(일어 잘 아시는 분, 나중에 저 해석 좀 해주세요). 작가는 일본에서는 인지도가 높은지 이 작품 말고도 꽤 많이 다른 작품들이 출간되어 나오는데, 주로 전래동화나 흔히 명작 동화 혹은 안데르센 작품에 그림을 그렸다. 개인적으로 이 사람의 신데렐라도 함께 가지고 있는데, 이 <춤추는 열두명의 공주>는 미국이나 일본에서조차 절판인 상태(미국 아마존에서 헌책으로 구할 수 있긴함). 일러스트 작가 자신이 독특하고 이쁜 그림체이지만 작가 네임이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거 같다. 일러스트가 아무리 독특하다해도 자기만의 독창적인 이야기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하 대칭으로 사실적인 그림을 기하학적인 느낌이 나도록 그리는 것이 작가의 특색중 하나



 



 

 

에롤 르 케인은 다른 작가들과 달리 세개의 숲길 중 실버 숲과 골드 숲의 이미지를 형성화 했다.  이 사람의 그림은 화려함과 동시에 장식적이긴 하지만 장면처리는 롱과 미디움 숏으로 잡았으며 등장인물들의 감정표현은 직접적이지 않다.   



The Twelve Dancing Princesses (Mulberry books) 

일본태생의 작가지만 미국내에서도 이런 명작 동화 작가로 잘 알려진 크레프트(저 그림 눌러주세요. 아마존으로 직행합니다). 더 할 나위 없이 인물적인 그림책 작가이다. 위의 르 케인이 주로 배경과 행위가 주라면 크레프트는 롱과 클로즈업(인물샷)에 중점을 둔다. 등장 인물들의 감정이 표현되어 있고 특히나 남주인공 피터의 놀래는 표정은 압권인데, 공주 그림책에서 그림형제의 원전을 재해석한 Marianna Mayer의 이야기 변형, 일반적인 남자주인공이 신데렐라처럼 신분상승의 이야기도 놀랍다. 그림책의 첫씬은 여느 그림책과 달리 밑의 그림에서 보듯이, 남자 주인공이 장식한다. 고전의 현대적 해석은 우리가 놓친 부분을 다시 해석함으로써 이야기의 재미를 더 한다는.  


  

전래동화다보니 이야기마다 주인공의 이름이 다 다른데, 이 책의 여주인공 이름은 엘리제, 여주인공의 화사한 초상화를 그린 것은 크레프트가 이 네권 중에서 유일

 

크레프트의 숲 통과 장면은 사진을 잘 못 찍어서.. 사실 골드 숲을 지나가는 장면인데, 금빛이 반짝이는 느낌이 날 정도. 

  

이 책의 독특함은 피터(역시 남자주인공 이름이 다름)을 첫씬에 과감하게 집어 넣더니 남자 주인공의 놀래는 얼굴의 클로즈업 화면도 그려 놓았다는 것.(찍었는 줄 알았더니 안 찍혀있어서 이미지를 못 올렸다)



The Twelve Dancing Princesses루스 샌더스의 <열 두명의 춤추는 공주> 

역시 위의 세 명의 일러스트와 마찬가지로 전래나 명작동화에 일러스트 매진하고 있는 작가인데, 전형적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느낌이 드는 작가이다. 이 작가는 드레스를 정말이지 매력적으로 그리는 작가라고 할 수 있는데, 솔직히 그림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묘한 이질감도 드는 작가이기도 하다. 작년에 절판으로 떠서 알리브리스에서 비싼 돈 주고 구입했건만, 흑 지금 다시 발행하고 있다. 어쩐지 왜 이런 좋은 그림책이 절판일까 했다. 워낙 이 작가는 그림이 화려하고 장식적인, 이런 류의 그림에 전형적인 작가여서 이쁘다, 이외에는 할 말이 없다. 글에 다른 해석도 없고 원전에 너무나 충실하고 충실한 그림책 작가중의 한 명인데, 루스 샌더스를 보면 그림에 아무리 재능있는 작가라도 글을 휘어잡을 수 없다면 그림책 작가로서 명성은 드 넓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위의 작가들은 이 글을 수십번도 수백번도 더 읽고 되내이고 머리 속에 그렸을 것이다. 이야기의 극적인 부분에서 일러스트 작가들이 형상화한 이미지들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일러스트 작가들마다 한 작품을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려내는 이미지들이 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들마다 자신의 선호에 따라 중점적으로 다뤄지는 이미지들이 있고, 그 이미지들은 통합적으로 독자들에게 기억되어진다라고 생각한다. 글에서 이미지를 뽑아내 글과 대등한 관계로 형상화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재능의 결과이다. 이러한 생각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 일러스트 작가가 바로 모리스 센닥이다.

한때 나는 센닥을 아주 우습게 본 적이 있다. 그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을 아이들에게 선택해 읽어줄때만 해도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 다른 판타지 그림책들과 뭐가 다르다는 거야,라며. 하지만 지금 내가 그를 그림책계의 거장이라고 인정하게 된 것은 그의 작품을 수집하게 되면서 그가 무수히 많이 그려낸 일러스트 때문이다. 그는 유명 작가의 밑에서 많은 일러스트 작업을 군소리 없이 해 냈으며 그러한 작업의 결과로 탄생된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가 전작의 결과가 없었다면, 다른 작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글의 이해가 없었다면 결코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편집자 중요성이 강조되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그의 무수한 노력이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작품이란 말이다. 그는 글에서 적절한 이미지를 뽑아내는 방법을 오랜 기간 동안 터득했으며 자신의 그림체까지 획득하게 되었다.  

많은 일러스트 작가들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 바로 저 긴 길이 아닐까 싶다. 매번 같은 주제의 그림책을 다른 작가들이 그림책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바로 글을 장악한 그림에 투영된 작가들의 노력이다. 많은 글을 읽고 많은 그림을 보는 거 그리고 느끼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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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yin0923 2024-08-05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스 샌더스의 춤추는 열두명의 공주 그림만 기억해서 찾고있었는데 드디어 작가분 이름을 알았네요...! 감사합니다!

기억의집 2024-08-05 22:48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셨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혹시 원본 그림책 찾아보고 있으면 보내드릴까요?
 
괜찮은 어른이 된다는 것

실제 <기억의 빈자리>라는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원제인 <Jumping the scratch>와 비교할 때 고개를 꺄우뚱거리게 만들었다. 순간적으로 <기억의 빈자리>라는 제목은 치매를 연상시키며 청소년의 알츠하이머질환에 관한 책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소년의 끔직한 체험과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삶을 동화작가와 친구의 도움으로 치유해 나간다는 이야기인데, 소년이 당한 그 끔찍한 기억이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극복되어 결과적으로는 긍정적인 빈자리로 남을 수 있다는 함축적인 의미의 제목인 것 같다.    

과연 한 개인의 고통스럽고 끔찍한 기억이 극복된다 한들 텅비어 버린 공간으로 남겨질 수 있을까.

영어를 그렇게 잘 하는 편이 아니라서 뭐라 왈가왈부할 형편은 아니지만, 번역자가 아무래도 제목을 뽑을 때 스크래치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에 멋 모르고 당한 끔찍한 기억에서 해방된다 하더라도 실제 일어난 일은 분명 과거의 한 시점에 분명 존재했던 일이며, 그 사건이 한 아이의 삶을 흔들 정도로 무기력하게 변화시켰다면 그 사건은 결코 기억의 빈자리로 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잊고 싶은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박박 긁어(스크래치)낸다하더라도 긁힌 자국만 있을 뿐이지 오리지널 기억은 남아있으며, 오히려 오리지널 기억 위에 긁힌 자국만 너덜너덜하게 남아있기 마련이다. 스크래치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극복과 상처라는 두 단어의 모순의 의미가 상충하면서도 한 소년의 고통스러운 체험의 기억을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스크래치된 기억을 뛰어넘는다(극복된) 하더라도 아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이런 박박 긁어내고 싶은 기억이 있다. 국민학교 2학년 요맘때 쯤 가을소풍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어찌하다가 난 담임선생님과 아이들에게 뒤쳐져 다른 반 선생님과 아이들의 뒤따라가게 되었다. 다른 반 아이들의 뒤를 따라 가다가 집으로 갈 수 있는 아는 길이 나와, 나는 곧장 집으로 갔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라 세세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선생님이 걱정할 것이라는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게 여느 때처럼 등교를 했다. 수업 시간이 시작되기 전인지 아니면 내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일어난 일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담임 선생님이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렀고, 불려나가 교단 앞에서 아이들을 등 지고 서 있는데, 선생님이 소풍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가 옆으로 샜다고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고 다그쳐 물었던 거 같다. 담임은 화를 내면서도 어제의 노여움이 안 풀렸는지 순간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얼굴에 따귀를 때리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 두대가 아니고 수 차례나.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그 때 얼굴이 심하게 붓고 한쪽은 멍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때 선생이 얼굴에 따귀를 때릴 때의 아픔보다 아이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따귀를 맞았다는 것에 더 굴욕적이었고 수치스러웠다. 아픔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 맞고 나서 내 자리로  돌아갈 때 내 얼굴을 쳐다 볼 아이들을 생각하면 아픔따윈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개를 들지 못한채 자리로 돌아와 앉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시절엔 왕따라는 것은 없었지만, 선생인 이렇게 나를 미워하는데 아이들이 전처럼 나랑 놀아줄까, 하는 걱정을 제일 먼저 했었다.

더 이상 앞뒤의 장면은 기억나지 않지만, 3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아이들 앞에서 수 차례의 따귀를 맞고 있는 모습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 땐 유치원같은 아이를 맡을만한 기관이 흔하지 않았던 시대여서 10월생인 7살 밖에 되지 않은 나를 우격다짐으로 언니와 함께 학교 들여보내,  2학년이라고 해봤자 겨우 8살밖에 되지 않았던 터라 그 시절에 나는 아주 어리버리하고 맹한 아이였다. 뭐하나 똑바로 해내지 못했고 교과과목도 제대로 인지 하지 못했었던 아주 맹한 아이. 선생의 입장에서도 나는 그리 사랑스러운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도 자존심은 있었다. 담임한테 수 차례의 따귀를 맞아 얼굴이 부었음에도 엄마한테는 말하지 않았다. (아마 같은 학년의 언니도 내가 따귀 맞았다는 것을 소문으로 알았을텐데, 언니도 엄마한테 말하지 않았다) 그냥 어디 부딪혔다고 둘러대었던 것 같다. 일이 커질까봐 엄마한테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정말 어린 나에게 뭐가 지키고 싶은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사다 지로의 <철도원>의 츠노하즈에서라는 단편중에 나온, 자신의 아버지가 젊은 여자를 선택하고 자식을 버리는 대목에서 그 소년이 한 말, 어린 나에게도 자존심은 있었다라는 문구에서 어린 시절 따귀 받은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세상 물정 모르고 선생님이라면 절대 복종했던 8살 밖에 안된 어린 나에게도 쓸데없는 자존심은 있었다.  

위의 책의 번역제목처럼 어린 시절의 그 기억이 빈 자리로 남아 있었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을, 하지만 수치스러운 그 기억은 다른 학창시절의 기억들이 다 휘발되어 사라져도 고통스럽게 남아 순간순간 떠 올릴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그거 아는가. 어린 시절에 당한 폭력은 성인이 되어 객관적으로 분석한다고 해도 제대로 잘 꿰뚫어 볼 수 없다는 것을. 몸과 정신이 성인이 되었다하더라도 그 기억의 고통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언제나 어린 시절의 나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어린 나에겐 아무 잘못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수 십년이 지난 후에도 내가 선생님 허락 없이 집으로 돌아온 것이 잘 못 해서 따귀를 맞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어린 나는 잘 못 한 것이 하나도 없다, 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우연찮게 남편에게 용기를 내서 나도 따귀를 많이 많은 적이 있다고 말했을 때 남편이 보인 반응때문이었다. 선생에 대한 분노와 경멸 섞인 말이 그렇게 위로가 되어 줄 수 없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숨기기에 급급했던 그 응어리가 풀린 것은 그저 맞고 아무 대응조차 하지 못했던 나에게 있던 것이 아니고 오히려 수차례 따귀를 때려가면서 감정의 분풀이를 한 그 선생이야말로 빌어먹을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자신조차 추스리지 못하면서 타인의 고통을 껴안고 보듬어준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괜찮은, 썩 괜찮은 어른이라면 아니 빌어먹을 어른이라도 세상의 시야도 좁고, 삶의 폭도 좁고, 사고의 깊이도 웅덩이밖에 안되는 순진한 아이들에게 스크래치를 낼 권리는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무리 스크래치 가득한 세상이라고 해도 말이다. 기껏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관계를 맺고 인연을 맺으며 만나는 어른이 몇이나 된다고, 어린 가슴에 스크래치를 박박 내는지. 그리고 설사 순간적인 스크래치를 되었다 하더라도 긁힌 자국을 문질러 주기만 하더라도 그 상처는 좀 더 얕아질 것이다.  

그 가늘고 이쁜 손으로 어린 나를  때리고도 한번도 따스한 눈빛을 준 적도 없었고 보듬어 준 적이 없이 2학년을 끝냈던 것 같다. 내가 더 그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선생이 지금도 원망스러운 것은 내가 애를 키우면서 폭력이 사랑의 매가 아닌 얼마나 감정의 분풀이인지를 알았기 때문이고 그 일이 있고 나서 투명인간으로 보냈던 내 학창시절의 무기력한 나날때문이다.

긍정적인 변화는 금세 오지 않지만 부정적인 변환는 억센 말 한마디에도, 한 대의 폭력에도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채 바꿔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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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의 새책이 나왔다. <지상최대의쇼> 2년 동안 그의 작품들을 읽고 또 읽고 있지만 그의 진화론을 완전히 이해하기엔 내 사고 시스템이 많이 모자라다. 단지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것, 학문 이론이라는게 아이디어 게임이다라는 것을 그의 책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의 진화론이 정설인지 아닌지 그건 아직 아무도 모른다. 하기사 빅뱅이론도 완전히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던가. 그의 유전자 이론은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소름끼친다. 그리고 인생 뭐 별거 아니네, 하는 자조를 일게 만든다.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그는 우리의  유전자야말로 영원불면한 존재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유전자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잠깐 빌리고 있는 것일뿐, 껍데기인 우리들은 헛것에 불과하다고. 순간적으로 이상하게 그의 <이기적인 유전자>를 읽으면서 영화<에이리언>의 속성이 떠올랐다. 인간을 숙주로 끊임없이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는. 우리의 유전자란 바로 그런 존재란 말인가,하고 말이다. 그의 거대하면서 번뜩이는 이런 학문적 아이디어는 실로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다.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존재는 신이 아니고 우리의 유전자란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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