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가가, 처음 봤을 때, 내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가 안돼... 얘, 뭐니? 왠 사이코니? 이랬다. 왠만한 일로는 눈껌벅 하지 않는 나도 가가의 기괴하고 도를 넘는 퍼포먼스는 노출증환자의 시선끌기처럼 보였고(이게 다 나이 들어 보수화되었다는 증거지 싶다!), 작년에 레이디 가가 방한했을 때만 해도 왔구나, 왔어~~ 노래도 시덥지 않더구만, 쟤 콘서트에 몇 사람이나 올랑가 싶었는데, 다음 메인에 올라오는 기사나 특히 가가팬들이 가가를 위해 대형버스에 가가 사진 붙여 홍보한 사진보면서 울 나라에도 가가팬들이 적잖게 많아 좀 놀랬던, 거참 특이한 애들 많네, 기억이 난다.   





 

이런 사진들만 봐서는 웃길뿐, 사랑스러운 가가는 아니라는(이 사진들은 그나마 애들은 가라버젼은 아닌 것들만 올린 것임).

그러다가 며칠 전에 우연히 다음에서 레이디 가가의 <Bad Romance>를 패로디했는데, 이런 걸 어떻게 패로디했는지 모르겠다는 말에  

 

B급 뮤비가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보고 나서, 한번 웃어주었다. 푸 하하핫^^  

그러다 가가의 오리지널이 궁금해 뒤적여보니,

   

뭐, 가가의 오리지널도 보고나서 웃고 넘어갔다. 특히나 마지막 장면보고 웃겨 죽는 줄 알았다는.

워낙, 이 뮤비가 볼거리(가가의 의상이나 분장)도 많고 웃기는 것도 많아 몇 번 보았을 뿐인데, 어느 날 애들 학교 보내놓고 느긋하게 커피 탈 때 마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것도 가가,,,,,,,라~ 

  

한 며칠을 커피 타면서 나도 모르게 은근 중독되어 가가,,,울랄라를 흥얼거렸더니, 알라딘에서 공짜쿠폰 준 몽키3에 가서 이 노래를 다운받아 요즘 무한반복 중(아, 이제 앨범시대는 간거야, 음원이 세상을 지배하다니 털푸덕!), 지인을 만나러 갈때도, 어제 영화 <밀크>보러 갈때도, 지하철에서 함께한 노래, 울랄라~~~ 이 노래 들으면서 몸도 흔들뻔 했다는.

굵은 허스키한 가창력,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다보면 가슴 속에 답답증이 노래를 듣는 순간에는 사라지는 느낌. 노래가 좋다보니, 가가의 모든 퍼포먼스가 갑자기 사랑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진짜로~   


솔직히 본인도 저렇게하고 나디면 좀 버겁기는 할 듯(여하튼 예전엔 미친x였는데, 지금은 용감한 우리 시대의 행위예술가로 인식이 변화하고 있는 !) 

난 정말 가가에 대해 너무 몰랐다. 퍼포먼스 이미지로 먹고 사는 줄 알았더니 이렇게 멋진 노래도 부르고 게다가 라이브에서의 휘어잡은 능력은 또 어떻고. 이러니 가가 울랄라, 소리가 저절로 나올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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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가 울랄라(2)~
    from ^^ 2012-05-15 16:57 
    레이디 가가가 트윗(그녀의 트윗 팔로워는 현재까지 2300만명정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팔로워수를 가지고 있다)으로 2012년 월드투어"The Born This Way Ball"를 4월 27일 한국부터 시작한다는 말에 눈이 번쩍, 귀가 쫑긋. 가가의 열혈팬인 나로서는 그녀의 라이브를 한번쯤은 보고 싶다,라는 소망(?)은 가지고 있었던 터라, 가가의 월드투어 티켓 예매일날만을 기다렸다. 가가의 인터넷 티켕팅 당일, 까막게 잊고 다음 날 부랴부랴 들어

올 2010년 안데르센상 후보 작가 중에는 미국의 일러스트 작가 후보로 에릭 칼옹이 올라와 있다. 개인적인 바램으로는 부디, 제발 옹이 수상했으면 하는데, 과연 안데르센위원회에서 그의 40년, 그림책작가로서의 경력을 인정해 줄지는 미지수다. 에릭 칼이 우리 시대의 위대한 그림책작가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의 그림책이 뛰어난 상품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수십년간의 그림책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차례의 칼데콧 수상도, 그리고 그보다 휠씬 인지도가 낮은 동화책 작가들에게도 상을 수여한 안데르센상을 받지 못한 이유로, 그의 여러 그림책에서 보여지는 화면 클리셰와 단순한 이야기를 꼽을 수 있겠다. 그렇다. 그의 그림책에서는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똑같은 형태의 그림이 널려 있으며, 그러한 단점을 커버할 만한 능수능란한 이야기꾼이 아니다.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지기 보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림책을 놀이감으로 가지고 놀 수 있게금 만든, 아이디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게 왜 단점이냐고? 아이디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보니, 그의 그림책의 대상연령은 한계가 있다. 아무리 높게 잡아도 7,8세 수준정도. 그러다 보니 그의 그림책 이야기 수준은 유아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칼데콧이나 안데르센에서 그에게 상을 주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물론 우리는 이럴 때 흔히 이런 말을 하곤 한다. 상복이 없다고!).  

아이들 그림책 세계에도 놀랄만한 이야기꾼들은 많다. 특히나 기무라 유이치나 신시아 라일이런트의 경우가 그렇다. 둘다 그림은 그리지 않는, 일러스트 작가들와 함께 공동작업을 하면서 자신들의 상상력을 펼쳐 나가지만 그들이 수 놓은 이야기의 그 감동은 잔잔한 가슴에 파문이 인다고 할까나. 기무라 유이치의 경우 내가 그림책계의 세헤라자데라고 말하고 싶은 작가이다. 어린이 책치고는 긴 분량(총6권)이긴 하지만 (흥, 제발 부탁이야, 영화따윈 잊어줘!), 이건만은 장담한다.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어주는 순간, 하루하루 이 책 읽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결말 무렵에는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시울이 붉어진다는 사실 말이다. 어린이 그림책의 이야기 분량은 적지만 그 깊이만은 다른 쟝르 못지 않은 감동을 주며, 어린이책을 위해 뛰어들어 열심히 활동하는 이야기꾼들이 수 없이 많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 이야기꾼이 대거 활보하는 그림책 세계에서 에릭 칼이 우리 시대에 뛰어난 작가로 남을 수 있는 것은 다른 그림책에서 볼 수 없는 뛰어난 색채감각이 살아있다는 것일 것이다. 그의 그림책 속에 나타난 색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비비드한 경쾌함이 살아 있다. 그의 색채에서 톡톡 튀기는 듯한 스타가토의 느낌과 상쾌하고 경쾌한 왈츠같은 느낌을 상기할 수 있었던 것은 밝은 색채가 주는 유쾌함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의 이러한 색채감각이 그만의 색채가 되었고(어떻게 보면 이러한 색채가 자신의 그림책 세계에서 확립된 뒤에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점에서 클리셰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 놀라울만한 전체적인 색감은 그의 전용색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림책 역사에서 꼭 그의 이러한 색채감만은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며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이렇게 여러가지 색을 쓰고도 부조화스러운 느낌이 안 난다는 것은 그의 색채감이 경지에 올랐다는 것일 수도(아, 그러면에서 볼때 팀 버튼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알록달고하던데, 영화에서 전체적으로 어떤 색을 썼는지 너무나 궁금함).

   

 
(실물은 더 매력적!)그의 그림책에서 배경의 색은 대체로 없다. 콜라쥬와 색을 같이 사용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내 생각에는 화려한 면의 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과감하게 배경색을 제거한 것일 것이다. 저 화려한 색 뒤로 배경색을 칠한다면 죽도 밥도 되지 않았을 것.
 

에릭 칼이 43년동안  그림책 작가 활동을 하면서 자신만의  색을 확립했다면, 다른 작가들은 어떨까? 최근에 오픈 키드 갔다가 눈에 확 띄어 구입한 중국 그림책 작가의 <모모의 동전>, 전체적으로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짠한 이야기이지만 독자의 감정을 들었다 났다할 정도로 확 잡아버리는 여운이 강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야기가 여리고 섬세한  반면에 이 그림책속의 색은 둔탁하고 색의 농도가 짙다. 개인적으로  색채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온 그림책이었다. 대체로 일본의 그림책이 밝고 튀지 않는 반면에, 내가 접한 중국 그림책들은 전체적으로 배경이나 화면이 어둡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중국 그림책 작가들의 그림책에서 사용하는 색의 농도가 어둡다는 말이다. 처음엔 수묵화의 영향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촌스럽지는 않지만 에릭 칼의 그림책에서 느낄 수 있는 색의 세련미는 없다. 오히려 색채가 솔직하다고 해야하나. 어린 아이같은 진솔함과 솔직함이 느껴졌다. 어찌나 이야기와 색이 어울리던지.   

  

 
실제 화면은 어둡지만 상당히 매력적인, 오밀조밀하다는 느낌이 드는 그림책이다. 우리의 60년대가 연상되지 않는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제 그림책 작가들도 서양미술사의 연대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서양 미술사가 수 백년간 쌓아올린 문화적인 업적이라면 업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영향속에 배우고 모사하고 숭배되기 때문에, 그림책 작가들이 서양미술사에서 보여지는 색채를 많이 사용하고 있고 자신의 영역속으로 그 색채를 많이 집어 넣으려고 한다. 위의 <모모의 동전>은 어쩜 그 중간 세대의 그림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중국 미술사와 서양 미술사 사이(그러니깐 동서양의 미술사 중간쯤)에서 정체적인 혼란을 겪고 있는.  이 그림책의 일러스트 작가 주청량이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그림책 속의 색채는 매력적인, 상당히 매력적인 것만은 틀림 없다. 그가 어떤 영향 속에 있던 간에 당분간은 이 색채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게 클리셰가  돼도 그림책 속에서 자신의 색을 확립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야기뿐만 아니라 색도 작가의 세계관을 표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모의 동전>에서 분명한 것은 일러스트 작가가  이야기 작가의 글을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그리고 자기만의 색으로 표현할 정도로 농익은 작가라는 것이다. 좀 더 일찍 그림책의 일러스트 작가로 데뷔했다면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가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48년생. 우리 나이로 60이 넘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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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2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6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품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작품이다. 읽어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품도 아니고 이야기도 뭐 그렇게 특별한 것은 없다. 하지만 단편들마다 재미는 있다. 시간떼우기용으로는 그만이라는 말.

<팔월의 눈>,  이 단편소설은 눈여겨볼 만하다. 일본의 2.26사태를 다룬 장편소설<가모우 저택 사건>의 워밍업 작품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모우 저택사건>을 읽고 그 사태가 뭘 의미하는지 그리고 일본역사에서 어떤식의 대우를 받고 있는지 잘 몰랐는데, 이 단편을 통해 미야베 미유키가 2.26사태를 다른 시각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깐 일본의 정통주의 역사에서 본 것이 아니고 비주류역사에서, 반란군의 눈으로  2.26사태를 다시 해석했다는 말이다.  

할아버지들이 한 행동은 옳은 일이었나요?  

수화기너머에서 웃음 소리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웃고 있는 것이리라. 

"교과서에는 옳지 않다고 씌어 있을텐데."  

"........" 

"중대장님은 사형을 당했고 우리도 헌병에 끌려갔다.쫒겨날까봐 얼마나 떨었는지.그거 말고는 먹고 살 것이 없었거든."  

"그럼..무서우셨어요?" 

"그럼 무서웠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무서웠어. 가쓰이치는 아닌 것 같았지만.그 친구는 머리가 나쁜 게 슬프다고 했어. 누구 말이 진실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건 자기 머리가 나쁘기 때문일 것라더군. 네 할아버지는 성실한 사람이었거든(154p)."

<지나간 일> 

나는 게으른 독서가였지만 책을 구입하는 건 좋아했다. 그래서 내가 찾는 책들 가운데에는 열심히 읽어봤자 일반들인들은 이래도 저래도 이해하지 못할 전문서적이거나, 그 정반대인 아이들 동화책이 섞여 있기도 했다. 아니, 나는 오히려 그런 종류의 책들을 즐겨 모은다(163p)

나는 미미여사의 이런 문장이 좋다. 솔직하면서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문장 말이다. 개인적으로 그림책과 동화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문장에서 미야베 미유키의 독서이력의 광범위한 진정성을 어느 정도 보았다면 좀 오버인가. 나에게 그림책과 동화책은 경계를 허물고 쟝르를 뛰어 넘는 카테고리에 속한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다 큰 지금도, 여전히 좋은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보면 눈이 뒤집히고 숨이 팔딱거려 수집하게 된다. 멋진 그림책을 만났을 때의 그 기쁨이란, 정말이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예전에 아이들이 핑계였는데, 요즘은 단지 내가 좋아한다는 구실하에서 즐겨 모은다. 나에게 그림책과 동화책은 말 그대로 전체연령가이다.

언젠가 이 책들을 읽었다가 참, 답답하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자기가 속한 세계에서 보고 재고 자르고 그래서 고급스러운 재단의 글이긴 하지만, 이상하게 공감할 수 없었다. 자신의 세계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공감스펙트럼이 넓다가 보다는 오히려 지식인의 자폐성을 보는 것처럼 씁쓸한의  감정에 휘말렸었다. 물론 내가 사는 처지가 그들에 비하면 형편 없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팍팍한 생활비, 월급을 쪼개도 쪼개서 사는 책과 음반들, 카피엽서에 만족하는 명화그림들 같은. 지지리 궁상에 가까운 생활자로서는 그들의 부유로운 세계는 멀게 만 느껴졌고, 그래서 그들의 세계가 로망이기보다는 그들만의 고급스러운 세계에서 멀찍감치 떨어져서 보게 되었다. 토해내고 싶은 글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미유베 미유키나 온다리쿠 같은 일본 작가들의 다작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미야베 미유키의 저 단편집을 읽으면서 어쩌면 저런 무작위로 쏟아내는 소품같은 단편집들이 캐릭터를 형상화할 때 필요한 공감스펙트럼을 넓히긴 위한 글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일본 작가들의 캐릭터에 대한 공감 스펙트럼이 넓긴 하다.  

카쿠다 미쯔오의 <대안의 그녀>를 읽었을 때가 새삼 떠 오른다. 그녀가 묘사한 가정주부의 정체성, 시모와의 갈등이나 애한테서 자유롭고 싶어지는 이중적인 심리를 너무나 잘 묘사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어쩜 내 얘기하고 똑같잖아, 혹 작가가 체험한 이야기를 쓴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해 봤는데, 작가의 경험이야기라기보다는 작가가 부단히 캐릭터와 자신과의 거리감을 줄이려고 노력했고 그 노력은 여러 단편들에서 등장 인물의 감정적인 접근을 많이 함으로써 캐릭터에 대한 공감스펙트럼을 넓힌 결과라고 보고 싶다. 대체로 다작의 일본 작가들은 단편들을 통해 장편의 캐릭터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계속해서 되든말든 이야기를 써 냄으로써 자신의 이야기感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어떤 경우에는 장편에서 훌륭하게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그리고 캐릭터는 캐릭터대로 단편보다 월등히 더 나은 것으로 소화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시야를 넓히면 제대로된 글이나 캐릭터가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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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0-03-03 13:06   좋아요 0 | URL
미미여사의 책은 제겐 편차가 커서 늘 읽을까말까 고민을 하게되요.
이 녀석은 건너뛸 예정이지만 저 마지막 문장만은 좋아보이네요 ㅎㅎ
(백과사전식 책과 동화책을 동시에 사랑하는 1人)

기억의집 2010-03-03 15:46   좋아요 0 | URL
아까 아이들이 와서 고구마맛탕 해주고 글 더 마무리 지었네요.^^
미미나 다른 일본작가들의 글 편차가 크지요. 신문 연재도 있고 여기저기 글을 써서 그런가봐요. 이 작품도 사실 그렇게 멋진 작품은 아니지만,
그녀의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장편의 실마리를 캐치할 수 있는 작품인 거 같아요^^

다락방 2010-03-03 13:52   좋아요 0 | URL
저는 미미여사의 책을 모두 다 읽지는 않았지만, 재미가 있든 없든(재미없는것도 있었어요. 마술은 속삭인다 같은것)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주 조곤조곤 얘기하는게 무척 좋았어요. 모방범에서도 그 잔혹한 살인마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위로가 될 만한 문장을 발견할 수 있었죠. 저는 그 문장이 너무 좋았는데요, 이거였어요.

"세상을 얕보지 마. 만만하게 보면 안돼. 네놈에게는 이런 사실을 가르쳐 줄 어른이 주위에 없었겠지. 어렸을 때 그걸 확실히 머릿속에 심어줄 어른이 없었던 거야. 그래서 이렇게 돼버리고 말았지."

이 책 속에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 문장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했어요. 냉정한 살인마를 어떤말로도 도발할 수도 자극할 수도 없지만, 이런 말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을까도 생각했구요. 살인마라도 어쩐지 눈물이 핑 돌지 않을까 생각했구요.

위에 인용하신 문장이 무척 좋아요. 그 앞뒤 정황을 알고 싶을 정도로. 이번에 1일날 책을 사면서 이 책을 넣었다 뺐다가 했는데, 그냥 넣어버릴걸 그랬나봐요. 저라면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내용일 것 같아요. 소품이든 그게 뭐든 말입니다.

기억의집 2010-03-03 15:50   좋아요 0 | URL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뭐랄까, 저 양반이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도
캐릭터의 속마음을 속속들히 잘 아는 것 같아서
놀라울때가 있어요. 주부, 어린 아이, 중년 남자, 젊은 총각등등
어떻게 그렇게 캐릭터를 잘 훑는지 모르겠어요.
이건 우리나라 작가들이 배울 점이 아닐까 싶어요.
<모방범>은 그녀 최고의 작품 같아요. 근데 다락방님,
저 문장을 외운 거예요?

다락방 2010-03-03 16:44   좋아요 0 | URL
헉! 외우다니요! 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아이큐가 낮은데요. 어떻게 외우겠어요. ㅎㅎ 적어놨던거에요, 기억의집님!

이럴때 외웠다고 말했으면 어쩐지 뒤로 후광이 비쳤을것 같은데 말입니다. 흐흐
 
마크스의 산 I
다카무라 카오루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일본 작가인 미야베 미유키를 최고로 손꼽는 이유는 탈여성적인 이야기와 이야기를 끌어 올리는 강한 문체에 있다. 자신을 둘러싼 일상의 틀에 매몰된 세련된 감상적인 글이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보다 보다 좀 더 넓은 복잡다단한 세계를 이야기 속으로 끌고와, 작가 자신이 이야기를 휘두를 줄 아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원고기 천매가 넘는다는 큰 스케일의 <모방범>에서 미야베 미유키는 독자의 긴장감과 느슨함을 쥐락펴락하며 사건의 움직임에서 한번도 주눅 든 적이 없다. 사건을 다루는 솜씨는 르포형식의 글처럼 끈질기면서 대담해서 도저히 여성작가가 썼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일단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기존이 내가 알고 있는 여성작가들(그게 외국이든 한국작가이든지 간에)중 누구도 미야베 미유키처럼 어느 사회에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암적 덩어리를 세세하게 쪼개 차곡차곡 이야기의 담을 쌓아올린 적이 없었기에, 실로 <모방범>을 읽고 난 후의 충격은 무엇보다도 컸다.   

새롭고 신선한 발견이에는 틀림 없다. 결코 남성작가한테 뒤지지 않는, 여성작가가 쓴 남성적인 상상력과 필력은 같은 여자 입장에서 충분히 매력을 느낄 만한 요소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난 미야베 미유키를 필적할만한 여성 작가를 만나지 못했고 미야베 미유키를 능가할 만한 여성작가는 아직 요원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러한 오만한 생각은 다카무라 가오루의 <마크스의 산>을 읽고 산산히 부서졌다. 오히려 지금은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은 어느 정도 <마크스의 산>의 영향하에 쓴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크스의 산>은 가녀린 여성작가에게서 나올 만한 작품이 아니다. 이 작품을 읽고 난 후, 나는 멋지다, 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내게 이런 정도의 글을 쓸 수 있다면, 막말로 악마에게 내 영혼을 팔아버려도 괜찮겠다, 싶었다. 황금을 안고 튀어라의 역자 권일영씨가 가오루 여사를 세 손가락안에 들 정도로 손꼽았다면 말 다하지 않았는가. 강건하고 힘찬 문체와 단순하지 않는 거대한 이야기 구조. 거대함 속에서 보여지는 세세한 등장 인물간의 갈등과 이해 그리고 이념과 비루한 세속적 욕망등등. 그녀가 최대한 건드릴 수 있는 소재가 이야기 속에 다 녹아있다.  여하튼 그 어떤 남성작가도 당분간은 다카무라 가오루의 이 작품을 뛰어넘을 만한 작품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카무라 가오루의 <마크스의 산>은 아마 고다 유이치로(황금을 안고 튀어라의 고다와 다른 인물이다)시리즈, 흔히 고다경부 시리즈라고 불리우는 첫번째 소설이다. 그 후의 고다경부는 <석양에 빛나는 감, '94>, <레이디 조커, '98>에 차례로 나왔으며, 다카무라 가오루는는 90년대를 고다 시리즈로 마무리하게 되는데, 그 후 그녀는 더 이상 미스터리 소설에서는 손을 떼게 된다. 여전히 드문드문 작품활동을 하긴 하지만 더 이상 쟝르소설에 미련은 없어 보인다.  


거물 다카무라 가오루여사의 젊은 시절 모습(황금을 안고 튀어라의 책 날개에 소개된 중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마크스의 산>의 소설 구성은 6단계로, 1976년 미니알프스산에서 시작된 첫번째 장인 파종은 발아,성장,개화,결실 그리고 수확으로 나누어져 사건의 움직임을 식물의 성장 단계와 일치시키고 있다. 1976년은 사건의 시발점이지만, 본격적인 연쇄살인은 1991년부터 시작된다.  

1991년 10월 5일, 도립대학 뒤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강력 3반 7계에 속한 고다 유이치로는 현장에 출동한다. 피해자는 이제 한물간 야쿠자인 하타케야마 히로시이후 사건은 연쇄 살인사건으로 확장된다. 작가는 초반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그가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 남김없이 까발린다. 범인이 누구인가,라는 트릭따윈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독자는 범인이 누구일까,의 긴장감에서 해방되는 대신에 가오루여사는 고다가 범인을 어떻게 찾내는지 그리고 범인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조직원들과의 갈등과 화해 그리고  범인은 왜 살인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심리적인 요인과 묘사에 많은 부분과 맞부닥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게 상당히 지루할만 한데 힘에 넘친다. 강한 문체에서나 볼 수 있는 끌어당기는 힘이 상당하다는 말이다. 서로 연결 될 것 같으면서 중간에 끊어져버리는 등장인물간의 상화연관성이나 지나치게 작위적인 관계의 우연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유기적으로 촘촘히 짜여진 작품은 아니다. 그런데 그러한 구멍난 곳곳을 떼울 수 있을만큼 범죄적 상상력은 거대하고(고다의 수사 움직임이 주를 이루지만 그 짝패격으로 마크스의 연쇄살인의 움직임도 도사리고 있다) 그 거대한 상상력을 뒷받침할 만한 건장한 문체가 버티고 있어, 그녀의 작품을 더 굳건하게 다져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문체만이 그녀의 이야기를 끌어올리는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언뜻 보면 연쇄살인 사건의 수사 과정과 마크스의 범죄 행위가 주를 이뤄 많은 독자들은 가오루 여사가 다루고자하는 묵직한 이념전쟁에 대해서는 스쳐지나갈 수도 있다. 이 작품의 묵직함은 바로 범죄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이념에 있다고 생각한다. 가오루여사가 이 책을 발간한 당시만해도  사회분위기상 그녀의 이러한 이념 투영은 상당한 용기와 진보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고,  고다의 전처나 처남인 가노가 자유로운 자파색깔의 소유자라는 설정은 일본 전공투의 유산이 아닐까.    

예전에 사사키 조의 <경관의 피>를 읽을 때만해도 나는 그 책이 미스터리 1위를 받을 만한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경관 삼대의 이야기를 단 두권으로 끝내기에는 부족한 뭔가가 확실히 있다고 느꼈고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 책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찰이 된 2대 안조 다미오에서 묘사한 일본내에서의 좌우의 이념 대결은 이 책의 가치를 되짚게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일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공포스러울 정도의 레드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으며 격렬한 좌우이념의 대결이라기보다는 숫자상 일방적인 우파의 점령이라고 할 만한 70,80년대를 보냈다. 몇 몇의 일본 소설에서 얻은 결과이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본내 공직사회나 언론은 우파가 점령해 있고 공안 사회였다. 하지만 우파점령국에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 분열의 틈을 서서히 가른 곳은 자유기고가나 다카무라 가오루 같은 소설가라는 것이다. 글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속에서 이념은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개인적으로 가오루 여사의 황금을 안고 튀어라를 단순한 이야기구조로 보지 않는다. 그 소설에서도 그녀는 비열한 우파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는가!). 



다카무라 가오루의 <마크스의 산>을 구입한 것이 아마 4년전인가 5년전 무렵이었을 것이다. 명성만 믿고 구입한 책이었지만, 첫장부터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저위의 그림을 그대로 묘사한,  미니 알프스의 지리적 묘사는 난감할 정도로 읽혀지지 않았다(킹이 마이클 코넬리의 <시인>에서도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은 소설의 첫문장을 수집한다고. 그만큼 첫문장은 독자를 휘어잡을 수 있는 임팩트가 있어야한다). 일본 소설이 잘 읽히는 이유는 세밀한 묘사나 지루한 심리묘사보다는 많은 부분 대화로 연결되어 있어 읽히기 쉬운데, 가오루 여사의 <마크스의 산>은 세부적인 묘사로 인해 읽기 곤혹스럽기는 하다. 어느 정도 분량을 넘기면, 사건에 집중할 수 있다..  

문득 다카무라 가오루 여사의 소설을 읽고, 나는 남성적//여성적 문장이라는 말이 얼마나 우습고 편가르기의 소산인지 알았다. 시몬느 보부아르가 그랬던가. 여자는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어쩜 애시당초 남성적 문장와 여성적 문장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수 천년간의 남성 지배사회에서 여성작가가 자신의 문학적 능력을 최대한 표출할 수 없었던 시대가 대부분이라서 우리는 남성과 여성를 가르고 구분하고 변별짓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여성 작가의 역사가 짧았던만큼, 여성작가가 충분이 자신의 기량을 쌓아올린 수 없었던 것은 기존의 편견, 여성은 남성처럼 쓸 수 없다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고 미야베 미유키나 다카무라 가오루의 작품이 남성적이라고 불리우는 것일 수도 있다.  

이제 편견의 벽을 넘어보자. 미야베 미유키나 가오루 여사가 탈여성화된 문장이니 가녀린 여성으로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다는, 밑바탕에는 부지불식간에 나 또한 여자는 남성적인 글을 쓸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고 남성적은 작가는 대하소설이나 쓸 수 있는 강직함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허나 많은 작품을 대할 수록 남성작가에서 나는 속살처럼 부드러운 감성 어린문장을 보았고 여성작가에서는 나는 메마르고 건조한 글을, 이야기를 만났다. 남성적/여성적이라고 구분짓기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다. 작가의 성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우리는 성보다 작가의 넓은 시야, 본질을 꿰뚫을 아는 예리함, 그리고 이야기를 한차원 높게 끌어당길 수 있는 진보적인 사고가 작가 자신의 문학적 본질을 정의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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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ardo 2010-04-07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결국 샀습니다. 언제 읽을지 알 수 없지만 무척 기대되어요. 될수있음 이벤트 당첨도 됐으면 하지만 조금밖에 안뽑으니 안뽑히리라 포기했지만요.;

기억의집 2010-04-07 16:45   좋아요 0 | URL
아카도님, 잘 하셨어요. 정말 후회하지 않을 실거에요^^
저는 일본의 작가군중 부러운 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여성작가에요. 우리 나라 작가들은 맨날 로맨스타령 아니면 이상한 말만 잔뜩 늘어 놓는데, 애네들은 이야기가 구체적이어서 그런지 대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오루 여사의 석양에 빛나는 감이나 재출간되었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이벤트 당첨 되길 바래요. 근데 선물이 뭐예요?

akardo 2010-04-08 01:15   좋아요 0 | URL
일본원서나 포스트잇 둘중 하나예요. ^^ 환율 일년전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높아 가격이 부담되는 지금 상황에서 무척 바라는 이벤튼데 워낙 이벤트운이 없어서;;;번역본과 원서 둘다 보면 일본어 공부도 되고 좋겠다란 생각이 들더라구요.

기억의집 2010-04-08 09:32   좋아요 0 | URL
저도 영어공부 대체로 원서로 번역본 놓고 읽는데..이 방법 상당히 도움 되죠?
 

일본의 급식현황  

제가 아주 좋아하는 애니중에서 투니버스에서 방영하는 <아따맘마>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월~목요일 저녁 9시에 방영하는데요. 한때는 거의 매일 빼 먹지 않고 봤을 정도로 전 그 프로의 빠입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어쩌면 그렇게 우리 상황도 똑같을 수가 있는지..비슷한 상황이 만들어내는 일상을 즐긴다고 봐야겠지요. 이 애니는 신문만화에서 만화책으로 발간되고 후에 애니로 만들어졌는데, 작년 9월로 끝났다고 하네요. 오호, 서운하여라. 투니버스에서는 6기 방영하고 계속 돌려 몇년을 우려먹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봤던 거 또 봐도 재밌긴 해요. 게다가 분위기에 맞춰 내보내는 백그라운드 뮤직도 괜찮습니다. 어떨 땐 그 음악 듣고 싶어질때도 있다는.애니조차도 음악에 신경쓰는 일본 엔터테이먼트가 부러워요. 애니가 재밌어서 저는 만화책으로도 몇권 사서 읽어봤는데, 솔직히 만화는 그림이 후져서 별로에요. 애니쪽이 휠씬 그림이 정겹고 복스럽습니다. 더 세련되었다고나 할까요. 여하튼 훈훈하고 감동적이고 따스하고 아기자기하고 생뚱맞기도 하고 맞짱구 싶어지는 아따맘마의 구성원은 아주 간단합니다. 엄마,아빠, 아리와 동동이.  

제가 왜 <아따맘마> 이야기를 하느냐하면요. 요 며칠 전에 무상급식에 대해 한나라당이 반대를 했는데, 그와 관련된 기사는 여기--------->  

진짜 개거품 물게 만드는 기사 아닌가요? 아니 저는 그 기사 읽고 진짜 개거품 물었어요. 그리고 열 받아서 이런 페이퍼도 쓰고 있고요. 자, 한나라당이 그렇게 반서민정책이라고 몰아부치는 무상급식 일본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시행되고 있을까요? 제가 뭐 일본통도 아니고 일본에 대해서 뭐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친숙한 만화를 통해 한번 말해보겠습니다.

아따맘마의 막내아들 동동이가 중학생입니다. 잘 보세요. 식판에 밥과 국 그리고 우유가 있지요.   

짜짠~~~~ 이 도시락은 뭘까요? 바로 이 집의 큰 딸 고등학생인 아리의 도시락입니다. 아니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동동이는 식판에서 밥을 먹고 아리는 도시락! <아따맘마>를 계속 시청하다 보니깐 학교에서의 에피소드도 많이 나오고 점심 먹는 장면도 많이 나옵니다. 중학생인 동동이는 학교급식을 먹고 고등학생인 아리는 친구들과 도시락을 싸 가지고 와서 먹거나 사 먹길래, 일본의 초중고 급식이 궁금하더라구요. 그래서 일본에 대해 잘 아는 분께 여쭈어 본 적이 있는데, 그 분이 말하길, 일본은 초중학교는 무료급식이고 고등학교부터는 도시락을 싸 와서 먹는다고 하네요. 그러니깐 고등학교부터는 급식을 제공하지 않고 각자 알아서 하라는 거죠.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조차 초중학교는 무료급식을 시행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초등학교는 한 학색당 우유대금까지 합하면 한 46,000원 가량의 급식비를 내고 있습니다. 일본은 초등학교만 무료급식이 아니고 중학교까지 무료급식을 시행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일본 정부는 한나라당이 주장하고 있는 반서민정책 운운하는 소리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합니다. 일본의 재활용봉투 정책까지 따라하는 나라에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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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2 0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의집 2010-02-26 08:34   좋아요 0 | URL
아영엄마님 , 우리나라 겨울방학 너무 길지요. 이래놓고는 무슨 공교육이 정상화되기를 바란답니다. 전 거의 폭발 직전이고 어제는 애들한테 뚱해있었어요. 지금둘째는 일찍 일어나 컴하면서 이거 재밌다,저거 재밌다면서 같이 봐달라고 하는데... 귀찮다고 싫다고 했어요. 근데 그날 언제까지 깨어있으셨어요. 거의 밤을 꼴딱 세우신 거 같은데..... ^^
아영엄마님,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2010-02-23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6 0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akardo 2010-04-07 13:06   좋아요 0 | URL
정말 왜 저런 건 안따라할까요? 다른 건 미국에서도 한다, 일본에서도 한다를 핑계로 막 하려들면서요. 웃기는 것들이란 생각이 듭니다. 무료급식 이야기에서 의료보험 이야기도 떠오릅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미국에서 이제 의료보험도 국가에서 하겠다니 걔들은 무슨 할말이 있을까요. 하하. 맨날 의료보험도 민영화해야한다 헛소리한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기억의집 2010-04-07 16:47   좋아요 0 | URL
한날당 말로는 부자들한테까지 밥값 안 받을 수 없다고 하잖아요. 진짜 웃기는 말 아닌가요. 근데 그 말에 넘어가는 인간들이 있더라구요. 휴~~ 그래서 제가 그럼 의무교육까지 없애야겠네, 이러면 아무 소리 안 하더라구요. 미국은 정부가 나서서 의보 바꾸겠다고 난리인데.. 뭘 알고나 저따고 소리 하는지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