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데이가 내한 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들 존재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들의 메카 히트 Basket case는 종종 길거리에 들어 귀에 익은 음악이었지만 길거리에 숱하게 울려퍼졌던 그 음악은 개인적으로 그렇게 좋아하는 스탈이 아니여서 한 쪽 귀로 듣고 또 다른 귀로 흘려 보냈다.
그러다 올해 몇몇 지인 블로거들의 그린데이의 내한공연 포스팅을 읽다가 어떤 구룹이길래 그렇게 열광하는가 싶어 몇 곡을 찾아 듣게 되었고, 저 Boulevard of broken dream을 듣는 순간 와우~~~ 무자비하게 시원시원하게 내리치는 드럼 소리와 이펙트 효과 이빠이 집어 넣어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기타 소리에 뻑가 감전 될 줄 알았다. 당장 MP3에 저 음악과 그들의 21 guns를 번갈아 무한반복 리플레이. 뻥 좀 치자면 무한반복 리플레이 수를 따지자면 지구 한바퀴는 거뜬히 돌았을 것.
언젠가 내가 남동생에게 그린데이의 Boulevard of broken dream의 기타 플레이에 대해, 야, 나는 Boulevard of broken dream의 기타 플레이가 미칠 듯이 좋아, 그 음악의 기타 소리 들으면 스트레스가 다 날라가는 것 같은데, 그거 치기 어렵지? 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아냐, 누나, 생각보다 쉬워! 명곡이라고 해서 다 어려운 거 아냐. 명곡일수록 기타코드가 쉬워. 오히려 귀에 익숙한 곡이 되기 위해서는 코드가 단순해야 하거든. 그래야 우리 귀에 낯익은 곡이 되서 좋게 들리는 거야,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동생의 그 말은 듣는 순간, 좀 의외다 싶었다. 워낙 기타플레이가 화려하고 힘차서 어렵게 들렸는데... 아니라는 것이다.
문득 장하준의 신간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다 읽고 나서 나는 남동생이 말한 명곡일수록 기타코드가 단순하다는 말이 떠올렸다. 지금까지 자본주의에 대한 글들은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알쏭달쏭한 알듯 모를 듯한, 나름 저자의 통찰력 가득하다는 외계어로 쓰여진 느낌의 글(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함)이었는데, 장하준의 더 나은 자본주의에 대한 글은 저자의 전체적인 주장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비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납득당할 정도로 접근하기 쉬운 미래를 위한 자본주의 글이었다.
그는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에 대해 공격한다. 그의 글을 읽으며서 자유시장경제학자들이 수십년동안 전 세계를 지배하면서 미디어를 통해 전파한 것이 부의 탐욕과 1%만이 세상을 이끌 수 있다라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가난한 자들에게 끊임없이 주입시키는, 쇄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청소년 시절 동안, 레이건과 대처가 세상을 구한 사람들이라는 글만 읽어온 사람이다. 조중동에서부터 리더스 다이제스트 심지어 타임지까지 레이건의 유머와 신경제주의 그리고 불굴의 이미지를 가진 대처의 노조활동 와해와 그로 인한 생상성 향상같은. 신경제주의를 전파한 그들의 지배 이후, 현재 세상은 오히려 더 이분법의 세계로 변했다. 가진자와 가난한 자. 가진자의 능력으로 노동자들의 몇 십배에 달하는 임금을 받는 것을 정당화하고 노동자의 능력은 그 것밖에 안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논리. 수십년동안 우리는 1%만이 세상을 이끌 수 있다는 지배자본 이데올로기를 숱하게 들어왔고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장하준은 우리의 그런 쇄뇌를 모조리 박살내고 있다. 왜 자유경제이론이 위험한지, 자유경제 이론의 나사가 왜 풀려가고 있는지, 국가견제가 산업분야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복지가 왜 필요한지 말이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아니 레이건- 대처식 자본주의가 결국 부자들의 탐욕을 더 극대화한 이론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이라도 세계는 1%만이 이끌 수 있다는 조작된 경구의 신화를 믿는 사람이라면 장하준 교수의 이 더 나은 자본주의를 위해 쓴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꼭 읽어볼 만 할 것이다.
사사키 조의 <경관의 피>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때 사사키 조의 문체에 대한 느낌은 군더더기 없는, 건조하면서 긴박하다는 것이었다. 쓰잘 데 없는 감정의 찌꺼기들의 감상적인 넋두리같은 것은 없었다. 등장인물들이 사건과 연결되어 감정을 몰아가기 때문에 작품의 흐름상 긴박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의 <경관의 피>을 읽으면서 딱 내 스탈이었군, 싶었으며 삼대 경찰에 대한 이야기는 일본의 전후사의 공안정국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있어 인상적이었는데 다만, 아쉬웠던 것은 삼대에 걸친 이야기치곤 분량이 적었다,라는. 좀 더 긴 장편으로 세팅했으면... 할 말을 더 했어도 좋았을 작품이었다,라는 것이었다. 삼대에 걸쳐 할 말은 많은데 축약한 느낌.
기대를 저 버리는 작가가 아니기에 구입해 읽었는데, 이 작가가 이런 문체를 쓸 수도 있구나 싶다. 읽고 나서 무진장 제목처럼 감정의 폐허,쓸쓸함을 느꼈으니. 그가 바라보는 사회는 날카로운 칼이 아닌 무딘 칼로 썰어 도려 낼 수 없는 사회 깊숙한 어둠의 그늘이다. 돈이 되는 부동산을 때문에 살인자로 내 몰리는 외인, 어린 시절도 성인이 되어서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다 친모마저 버림받는 살인자. 살인 사건을 전면에 내 세우긴 하지만 사회의 깊고 어두운 폐부를 찌르는 그의 글은 쓸쓸하다 못해 텅 빈 감정의 여운을 남겨 놓는다.
헐, 게이고가 이제 막 가는구나.
이런 미스터리를 탐정급 레벨이라고 할 수 있나. 내가 보기엔 딱 심부름센터 직원급이구만. <명탐정의 규칙> 어쩌고 저쩌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이건 뭐 탐정의 규칙만 번드르르하고(속빈 강정) 정작 미스터리의 세부적인 이유는 후졌으니. 이걸 어찌할거야.
기이한 억지 설정에 억지 살인에 억지 해결에. 독자로 하여금 단편 한편 한편 해 치울때마다 무릎을 치며 아, 그렇구나가 하는 감탄과 놀람 그리고 경외감이 쏟아져 나와야 하지 않는감. 이건 뭐 작가가 심심풀이 땅콩으로 땅콩껍질 까 먹으면서 맥주 한잔 한 음주 소설쯤 되어 보인다. 그래도 투잡 뛰는 유가와급의 탐정레벨급은 되어야 탐정클럽이라는 이름이라도 붙지. 에이 씽~~~ 겉표지만 잘 빠졌다.

두번째 헐,헐~~~~ 진짜 우습다. 트릭만 너무 내세우다 보니, 기본적인 인간 소양을 가진 독자의 감정을 걍 너무 무시한다.
이 양반도 오츠이치科네. 오로지 미스터리만이 그것도 트릭만이 목적인 작가들. 이런 서술방식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 관계보다 트릭만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나 첫번째 단편은 읽고 나서 뜻밖의 결과에 불쾌하기 이룰 데 없다는. 그런 감정적 설정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자꾸 들면서 다른 단편들도 색안경을 끼고 읽게 되었다.
등장인물의 사건이 벌어지는 매 순간마다의 심리묘사를 잘하지 못한 것에 대해 트릭이 주가 되어 연막작전을 펼치는 것인지. 잘 만들어진 트릭 소설이긴 하지만 냉정하다 못해 등장인물들이 인간같지 않다. 증말!
이 작가를 내가 편애한다는 보다는...음 아냐아냐, 편애하긴 하지. 스티븐 킹에 대한 작가로서의 그를 평가한다면 우리 시대의 살아있는 대중적인 고전 작가라는 것. 특히나 여전히 세계적으로 잘 팔리는. 그의 데뷔작 <캐리>가 아직도 출간되고 있고 꾸준히 팔리고 있다는 것.
뭐 여하튼, 그의 30년이 넘는 소설들이 2010년에도 꾸준히 여전히 팔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책이 미래에 고전이 될 확률은 거의 100% 가 아닐까. 30년이 넘는 근 40년이 다 되어 가는 책이 아직까지는 고전에 들기는 무리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소설의 시작 역사를 뒤짚어 보면, 40년이 되어가는 그의 초기작의 생존율은 대단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노인네가 근데 소설뿐만 아니라 에세이도 잘 쓴다. 일단 아는 게 많다. 진짜 킹이 책 많이 읽기는 했다 보다. 유식한 티가 팍팍 난다. 어려운 말은 평론가들의 전용인 줄 알았더니, 소설가 킹도 에세이형식으로 글을 쓸 때는 어렵긴 매 한가지구나 싶다. 좀 만 더 쉽게 이해하기 쉽게 쓰지.
요즘 이 책 읽기 시작했는데 미국식 에세이 형식이 그대로 드러난,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전형적인 에세이 기법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깐 처음 도입부에 대강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를 드러내다가 중간에는 앞 내용에 대한 보충 설명하고 거의 끝부분에 가서 다시 앞 이야기를 끌어 내어 결론 내리는 방식, 말이다. 아, 어려워. 분명한 것은 이 책은 절대 대중적으로 잘 팔릴 일이 없을 것 같다. 12월 한달 내내 이 책만 읽게 생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