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유난히 소설이 안 읽혀 왠만한 집에 있는 소설들은 다 정리했다. 알라딘 헌책방에 팔 건 팔고 버릴 건 다 버렸다. 첨으로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이 나이에도 명품백보다 책을 더 좋은 사람이라 책을 내가 사는 동안 끝까지 고수한다는 방침이었는데, 어느 날 먼지만 쌓여 있는 책들을 보니, 우리집 책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존재란 무릇 이곳 저곳 이사람 저사람한테 읽혀야하는 도리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다시는 책을 모으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작정했다.
그래도 예외는 있는 법, 스티븐 킹하고 미야베 미유키 소설만은 버리기 아까워 책장칸까지 마련해서 안방책장에 고히 모셔두었다. 그냥 그 두 작가는 놔두고 싶었다. 필력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두 양반 모두 작품이 질적 편차가 심해서 다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지만, 워낙 다작의 작가이고 몇 십년을 꾸준히 작품을 써 오는 사람들이기에 그 두사람에게는 존경심 비스무리한 감정이 생긴 것도 사실이고 무엇보다도,
내 인생에 한두 작가의 작품 성향정도는 빠삭할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이 나 자신이 분석할 수 있는 그런 그런 작가들을 가지고 있는 것도 좋지 않는가하는, 욕심이 좀 남아있었다.
뭐, 여하튼 요즘은 왠간해서는 소설은 사들이지 않는데, 킹옹과 미미여사의 신간이 나오면 즉시 구매하는 습관은 버려지지 않는다. 언제나 나는 그들의 신간에 레이저 빔.
미미여사의 저 작품은 나온지 몇 달 되었는데, 나오자 마자 사서 읽었다. 물론 요즘 나온 <고구레사진관>도.


R.P.G.는 <크로스 파이어>에 나왔던 치카코가 나온다길래 그녀의 활약을 기대하면서 읽었는데, 솔직히 활약 제로였다. 페이지수로도 몇 페이지 나오지 않았고. 2000년대 초반에 나온 작품의 한계, 그러니깐 여형사의 능력을 그 시대에 딱 맞게 보여주었다고나 할까.
치카코가 처한 남성위주의 경찰 관료주의 모습 그대로 드러냈고 그 한계 속에서 여형사는 옴짝달짝 못하는 모습, 여전하다. 좀 더 치카코의 캐릭터를 강하게 밀어부쳤으면 좋았을 것을. 어차피 작가의 상상력인데 좀 더 멋지고 그럴싸한 미래의 모습쯤으로 그려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이 든 작품이었다.
물론 지금도 여형사의 존재는 현실적으로 그렇게 크게 변하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경찰이나 형사하면 우락부락한 남성이미지를 떠 올리지 강인해보이는 여성을 연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허나,현실세계가 그렇다고 쳐도 소설이나 영화 그리고 드라마의 여형사의 이미지는 20세기 초반에 비해 많이 발전(?) 되었다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 여형사가 중심이 되어 드라마(콜드케이스나 로앤오더 시리즈)가 나오고, 특히나 이번 13시즌을 끝으로 로앤오더를 끝내는 올리비아(애칭 리브)의 지난 10년간 드라마에서의 여형사로서의 활약은 대단했다고 말하고 싶다.
로앤오더 SUV 12시즌까지 다 본 나로서는 시즌 초반 남성 위주의 강력계 형사의 홍일점으로서 앨리엇을 따라 사건을 쫒아다니며 끌려다녔던 시절부터 (물론 두 사람이 주인공이므로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리브가 독립적으로 사건을 쫒으며 강인해지는 변천사를 목격할 수 있는데, 그러니깐 리브가 강인해지고 독립적으로 변하기까지의 시간의 흐름은 사회가 그것을 요구하고 허용된 시스템으로 변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 도 있겠다. 리브가 강인해 져가는 모습의 캐릭터를 잡은 방송작가들에게 경의를.
미야베 미유키는 50대의 치카코에게 미래의 여형사의 비젼보다 푸근한 아줌마 형사 이미지를 선사했다는 것은 그녀의 폭 좁은 여성관일까. R.P.G은 무대 연극처럼 한정된 장소에서 일어난다. 바로 취조실. 20세기 초반의 아줌마 형사 치카코가 그 취조실안에서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사건 해결의 도움을 주는 수준도 안된다. 내가 로앤오더 12시즌의 24회를 보지 않았다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지,

리브가 굳은 표정으로 취조자를 몰아부치는 장면. 이 장면은 정말 리브의 진가 - 남형사에게 뒤지지않는 키와 체격의 육체적 강인함뿐만 아니라 심리적 강인함과 매서움을 보여준 -를 이 클로즈 샷에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느낄 수 있다.

취조실에서 리브는 남형사둘과 대등한 위치에서 심문한다. 이 장면 인상적인 게 저 세 사람들이 취조하면서 빙글빙글 도는데, 카메라 앵글이 여형사로서의 리브의 위치가 남형사들에게 전혀 꿀리지 않게 잡아준다. 지금까지 본 크리미널 미드중에서 최고의 장면.

21세기에 이런 비젼을 보고 다시 21세기로 돌아가 미야베미유키의 치카코의 활약상을 보니 그녀의 수사력에 불만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지사. 치카코의 위치가 보잘 것 없는 것도 아닌데, 그녀의 능력을 박하게 그려진 것은 그녀의 에도소설의 여주인공 오하쓰에 견주어 볼 때 불공평하다.
그 시대의 여자야말로 인간 이하의 존재인데,
결론은 하나. 미야베 미유키가 에도 시절을 그린 오하쓰 시리즈의 오하쓰가 20세기에 등장하는 미미여사 소설들의 여자 캐릭터보다 휠씬 대담하고 강인하다는 것을. 이제 미야베 미유키 여사가 쓸 소설은 치카코 이상의, 오하쓰 이상의, 리브 이상의 여형사 정도 내 주어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