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뿐만 아니라 영적인 존재를 믿지 않아, 미야베 미유키의 이전 괴담소설을 읽으면서도 무서움을 타지 않았는데, 이번 미야베 미유키의 이 소설은 제법 무서움을 탔다. 지금이야 시간이 지나 무서움이 흐릿해졌긴 하지만, 한동안 새벽에 화장실에 가는게 무서워 이불 속에서 갈까말까 망설이다 볼일 보러가거나 잠자는 남편 옆에 착 달라붙어 잤을 정도였다.

 

1,2,3 에피소드는 그런대로 괜찮다. 무섭다기 보다는 상당히 표현이 은유적(얽히고 얽힌 인간관계의 복합적인 마음같은 것)이어서, 그렇지 그럴 수 밖에 없겠지 나같아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대할 수 밖에 없었을거야, 이러면서 캐릭터에 수긍하면서 읽었는데, 네번째 이야기인 <마경>은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이미지화 되면서 소름이 짜악 끼쳤다. 단순히 생각하면, 별 것 아닐 수도 있는데, 내 무의식 속에 거울과 관련하여 안 좋았던 무엇인가가 있었는지, 거울 속에 어떤 대상이 숨어 있다고 상상하니, 우리집 목욕탕 거울속에서도 소리가 들리는 듯 하여 무서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한동안 소설을 읽고 내가 만들어 낸 알 수 없는 정체의 이미지에 무서움을 느끼다보니, 퍼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왜 무서움을 느끼는 것일까? 무서움을 느낀다는 것은 죽기 싫다는 강력한 감정적 반응의 즉각적인 표현이 아닐까, 만약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공포감이라는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공포를 느껴야할 만한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포감을 갖는다면, 무엇때문에 우리는 공포감을, 무서움을 느끼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제는 친정엄마가 시골(시골이라고 해봤자 경기도 근처지만 어릴 때부터 붙어버린 이 말이 영 떼어지지 않아)땅에 뭐라도 심겠다며 같이 내려가 땅 좀 일구자고 해서, 아침 일찍 경기도 근교로 차를 몰고 내려 갔다. 

 

친정엄마와 나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고무장화로 갈아 신고 호미로 땅을 일구는데, 정말 죽어 나는 줄 알았다. 한동안 추웠던 날씨는 우라질 왜 이리 더운지, 추울 줄 알고 입고 간 패딩은 로봇옷처럼 답답하고 땡볕에 땀은 줄줄 흐르고, 자갈 많은 땅이라 기계가 일굴 수가 없어 호미로 땅을 파고 흙을 가운데로 모으는데, 허리 한번 제대로 못 펴고 쭈구린 채 땅을 일구다가, 두시간도 안 돼  더 할 엄두가 나지 않아, 나는 더 이상 못하겠다고 나가 떨어졌다. 우리 옆의 땅에서 작업하시는 할아버지는 기계로 땅을 일구시는데, 그것도 쉬워보이지는 않는 것은 매한가지.

 

내가 나가 떨어지니깐 엄마도 할 맘이 더 이상 안 생기는지 이 정도면 됐지 뭐, 다음에 와서 씨나 뿌리자면서 자리를 떨고 일어나셨다. 그래도 이왕 온 거 냉이라도 캐자고 하시는데, 솔직히 내 눈엔 냉인지 민들레인지 좀처럼 구분이 가지 않아, 주머니속에 넣어 두었던 쿠키 먹으면서 건성건성 따라다녔다. 엄마는 열심히 냉이 캐고 나는 빈둥거리며 쿠기와 싸 가져온 커피 홀짝 거리는데, 날씨는 화창해서 더할 나위 없이 좋긴 좋았다.

 

허나~ 나보고 농사 지으라고 하면 그 화창한 날씨와 공기 좋은 땅에서, 바람만으로도 배부를 것 같은 곳에서 나는 도망갈 것이다. 허허.

 

그렇게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엄마가 캔 냉이. 가져가서 먹으라고 해서 고추장에 무쳐 봤다. 된장으로 무칠까하다가 새콤달콤하게 해서 먹는 게 낫겠다 싶어 고추장, 조청,설탕,식초, 들기름을 넣고 조물조물(울딸은 내가 나물을 무칠 때 조물조물이라는 말을 쓴다고 놀리곤 한다)넣고 무쳐봤다. 빨가니 봄날의 식욕을 돋구는, 村스러운 입맛을 가진 나.

 

 

 

 

 

역시 나는 내 손으로 흙을 일구고 씨를 뿌려 열매 맺어 수확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할 종자라는 것을 뼈져리게 깨닫고 왔다.  평생 시골에서 농사로 세자식 키워내고 장에 나가 땅에서 그때그때 거둬들인 농산물을 파시는, 90도로 굽어진 고모의 허리를 보면서, 삶의 고된 흔적을 보는 것같아 언제나 안쓰럽다.

 

나는 고모와 같이 흙과 함께 하는 노동으로 우직하게 살아가지 못할 것 같다. 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장담하지도 못할 것이니 말이다. 그게 경제적이든, 정신적이든간에 말이다.

 

아니, 농사의 댓가가 무서워 자신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4-09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10 1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애들 방학이 끝나면 좀 더 편할 줄 알았더니, 더 바쁘다. 애들 데려다 주고 데려오고, 엄마네 집에 들러 잠깐이나마 말벗 좀 해 주고 집에 와 아이들 간식이나 밥 차려주고 공부 좀 봐주면, 벌써 하루 해가 다 간다. 내 집에서 엉덩이 바닥에 붙어 있을 시간이 없다보니, 삼월 들어 몸이 무겁게 느껴진다. 그나마 요 며칠 감기가 걸려 방바닥이 날 불러, 눌러 붙어 있기는 한데, 그것도 잠시 애들의 요구 사항이 많아 드러누워 있는 게 쉽지가 않다.

 

어제는 몸이 너무 무겁고 힘들어서 전기 장판에 드러누워 미야베 미유키의 신작 <흑백>을 읽다가 어느 새 잠이 들었다. 그리곤 열두시 무렵에 다시 깨서 물 한잔 먹고 안방에 들어가 편히 잠이 들었다.

 

오늘 아침 청소 끝나고 어제 마저 읽던 <흑백>을 읽으려던 찰나에 책에서 발견한 접힌 부분. 슬며시 입가에 웃음이 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접어놓은~

 

난 책을 접는 사람이 아니다. 책을 깨끗이 읽고 싶어서 그렇기 보다는 읽고 팔아 치우는데 목적이 있어, 읽던 페이지를 접는 일이 좀처럼 없다.

 

그.러.나 미야에 미유키는 내가 수집하는 작가라 책장을 접을 수 있긴 하지만, 한 번 벤 습관은 도통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수집하는 두 명의 작가 킹이나 미야베 미유키의 책들은 대부분 깨끗하다. 그러기에 어제 내가 스르륵 눈이 감길 때 아무리 읽기 찾기 쉽게 한다고 책을 접는 사람은 절대 아닐터.

 

책 읽다가 졸려 읽은 부분 그대로 책을 마루 바닥에 엎어둔 것을 접어서 다음 날 내가 찾아 읽기 편하도록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미스터리의 해답을 방금 학교가 파한 딸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풀었다. 아이들하고 놀고 싶다는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네가 어제 책 접었냐고 ? 그랬더니 자기가 어제 엄마가 자길래, 접어 두었단다.

 

이러니 내가 우리 딸을 이뻐할 수 밖에.. 어떨 땐 내가 너무 큰애와 확연하게 차이를 두나 싶어 두 아이들 다 무뚝뚝하게 대하기도 하지만, 이런 이쁜 행동을 하는 딸애한테 솔직히 맘은 더 간다. 아직도 그림책을 열심히 읽은 우리딸. 설빔을 보니 연초에 찍은 사진 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화성연대기>만 읽으면 우리 나라에 나온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들은 거진 다 읽은 셈이다. 근래들어 레이 브래드버리와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들과 번갈아 읽으면서, 어쩜 책은 영원불멸한 존재가 아니고 언젠가는 소멸되는, 생물체와 같은 생명체같은 존재이구나 싶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가 탄생, 삶 그리고 죽음의 세가지 단계를 거치는 듯, 책 또한 탄생과 동시에 수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살아 남으려고 바둥거리다가 서서히 소멸되는 그런 생명력 말이다.

 

레이 브래드버리나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이 수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칭송되어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러 나라에 출간되며 영원불멸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읽으면서 그들의 소설이 주제나 소재면에서 번뜩이고 예리한 미래적 아이디어와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만, 시대의 뒤틀림은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의 내가 수십년 전의 사실성과 감성을 이해하고 감지할 듯하면서도 선뜻 완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현재와 비교하여 시간적 배경적 공간적 차이가 너무 심해 그들의 미래적 아이디어는 좁은 세계관과 상상력의 한계를 보는 듯해, 당대의 시공간을 초월했을 듯한 소설적 상상력이 초라해 보였다.

 

그래도 여전히 그들의 소설은 살아남을 것이다. 고전이라는 이름하에, 하지만 모든 고전이 영원불멸의 삶을 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죽지 않는 삶이 저주인 것처럼 영원불멸의 책 또한 자신의 무한한 생명이 저주라고 느낄 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독자들에 의해 이어져 내려오는 삶이 아닌 평론가들의 입에 의해 살아 남는 책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모든 생명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비록 세대에 세대를 거쳐 잊혀진다할지라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쓰모토 세이초의 총 판매부수가 1억부라는 알라딘의 광고를 보는 동시에, 우리나라 베스트셀러 작가 공지영씨가 판매부수 천만부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는 글을 떠올리며, 와우! 1억부라니, 그렇게 잘 팔린다는 공지영씨도 천만부가 아직이라는데, 일억부면 우리 나라 인구 두배잖아~라며 세이초의 소설이 많이 팔리긴 팔리는구나, 라며 감탄했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이마트에 장보다가 우유가 싸길래 덥석 집어 온 매일 우유의 스티커보면서 책판매 일억부가 정말 많은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했다. 십년도 안 되는 기간동안, 저 큼직한 우유가 오억개가 팔렸단다. 오억개~ 먹는 것과 책 판매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책 안 읽고도 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유 없이도 살 수 있지 않나. 지난 이십년동안 우유보다 책을 많이 산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물론 나는 책을 꼭 읽어야한다는 생각하진 않는다. 까 놓고 말하지만 책 안 읽어도, 기본적인 에티켓만 지키고 살면 세상 살이는 어렵지 않다. 세상을 무식하게 살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어차피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 없고 모든 지식을 다 습득할 수는 없다. 오히려 거짓된 프레임과 오류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책일 수 있다.

 

고전이나 인문학을 많이 읽어야 주장하면서도 과학책을 꼭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어떤 한 분야의 책을 읽고 지식을 습득한다는 것 자체가 지식의 균형을 유지한다고 할 수 없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래나 저래나 지식의 전체가 아니고 부분일 뿐이다. 우리는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지식 전체를 얻는 것이라고 거들먹 거리지만, 사실 지식의 일부분만 얻는 것이다. 그것도 지극히 일부분만. 지극히 일부분의 지식의 얻고 살아가는 것이나 아예 없이 살아가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또한 그 차이가 얼마나 되겠냔 말이다. 오십보 백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