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크면서 커다란 변화는 그림책을 덜 산다는 것이다. 설마 하겠지만,  진짜 아주 조금씩만 사 들인다. 언제부터인지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작가 혹은 주제별로 관심가는 그림책만 구입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꾸준히 관심가는 작가로는 윌리엄 스타이그, 크리스 알스버그와 알스버그를 통해, 그림책 역사에서  커다란 전환점 상에 모리스 센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센닥의 작품들은 닥치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수집하고 있고(아.마.도 나만큼 센닥의 작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언젠가 센닥이야기도 해야지), 주제별로는 신데렐라, 알파벳북, 고양이 그리고 크리스마스 전날 밤 정도이다. 이 외의 주제중에 <춤추는 열두명의 공주>,<호두까끼 인형>이나 <눈의 여왕>도 수집하다가 잠시 주춤거리고 있다. 일단 이런 주제들은 국내 인터넷 서점에서 구하기 힘들고, 이베이나 알리브리스에 들어가 검색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 돈부자가 아니라서....(아, 올해 서평도서단 신청하면서 행복했던 게 생애 처음으로 공짜책 실컷 받아보았다는. 한해에 공짜책 20권 넘게 받는다는 게 그리 행복한 일인지 몰랐다)  

지금 소개하는 그림 형제가 수집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인 <춤추는 열두명의 공주>는 수집한 책이 네권 밖에 되지 않아, 내세울 것은 없지만 어떤 한 주제를 가지고 책을 수집하면 일러스트 작가가 선호하는 이미지가 무엇인지, 그리고 글에서 뽑아 낸 이미지를 어떤 식으로 형상화 했는지를 알 수 있고, 일러스트 작가가 글 전체에서 통합해낸 이미지를 화면 분할을 통해 중점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일러스트 작가마다 비교해 보는 재미도 솔솔하다. 우리의 일러스트 작가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주제별로 그림을 모으다보면 책 전체에서 감지할 수 있는 이미지를 단 한장의 그림으로 이미지화 할 수 있는데, 솔직히 그런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 책일러스트 작가들중에서 시공사나 비룡소의 그림책 전권을 다 구비해놨는지, 그림책 작가들을 몇명이나 알고 있는지 반문하고 싶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싼티 나는 라인과 제대로 그려 놓지도 못하는 눈동자(제발, 스타이그의 한 두 작품이라도 습자지 대고 그려봤으면 좋겠다. 그의 작품이 보기에 우스워 보이지,  라인만으로도 그는 꽉 차고 풍부한 화면이 나온다, 그게 그리 쉬운 줄 아남) 허접한 배경 등등. 리뷰어들의 불만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 아 놔~    

<춤추는 열 두명의 공주> 이야기를 다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책이미지와 함께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Kay Nielsen/신서관 동화집/카이 닐센 춤추는 열두 공주  

개인적으로 아들애한테 우스개 소리(사실 진심이 담긴)로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민준아, 일어 배워서 엄마 이 책들 해석 좀 해줘! 너 일어 잘하면 세계문학 다 읽을 수 있다,라고 말이다. 흔히 출판대국이라는 미국에서조차 절판된 책을 일본 아마존에서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 만큼 일본인들의 책욕심이라고 해야하나. 없는 책이 없다. 어떤 쟝르를 가리지 않고 방대한 양의 책을 소유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헌책방을 돌아다니는 재미가 이 나라처럼 솔솔한 나라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일세기 가까운 시대에 살아 활동했던 카이 닐센같은 이런 책들은 우리나라에 나올 일도 없고 사실 관심 가져주는 출판인도 편집인도 없을 것이다. 카이 닐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  http://www.wendybook.co.kr/list.php?ac_id=114&ai_id=7476 로. 20세기 초의 카이 닐센의 일러스트한 세 편의 작품을 이 동화책에서 볼 수 있다. 이 작품집의 <춤추는 열두명의 공주> 삽화는 그렇게 많지 않다. 지금 보여준 일러스트만이 수록되어 있다. 비싼 돈 주고 카이 닐센의 작품을 한 장면 더 보고 싶다는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아르누보풍의 일러스트와 현재의 감각에도 뒤지지 않은 색감과 세련되면서 가는 라인 처리 그리고 우아한 이미지를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수 밖에. 

 



   

이 장면, 12명의 공주가 자신들의 방에 있는 비밀통로를 통해 빠져나가 지하세계의 궁전으로 가는 실버, 골드, 다이아몬드 숲을 통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4명의 작가들 모두 이 장면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눈여겨 보시길. 







The Twelve Dancing Princesses (Picture Puffins)  작가 : Eroll le cain  

아마존에서 작품이미지를 가져왔지만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것은 일본판. 에롤 르 케인에 대한 작가 소개가 일어로 써 있어서 어떤 작가인지 상세하게는 모르지만, 41년생으로 작가연본에 나온 것으로 봐서는 60,70년대 그림책이 아닐까 싶다. 생존해 있는지조차 잘 모르며 이름만으로 추측해보건데,  프랑스 국적의 작가가 아닐까나(일어 잘 아시는 분, 나중에 저 해석 좀 해주세요). 작가는 일본에서는 인지도가 높은지 이 작품 말고도 꽤 많이 다른 작품들이 출간되어 나오는데, 주로 전래동화나 흔히 명작 동화 혹은 안데르센 작품에 그림을 그렸다. 개인적으로 이 사람의 신데렐라도 함께 가지고 있는데, 이 <춤추는 열두명의 공주>는 미국이나 일본에서조차 절판인 상태(미국 아마존에서 헌책으로 구할 수 있긴함). 일러스트 작가 자신이 독특하고 이쁜 그림체이지만 작가 네임이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거 같다. 일러스트가 아무리 독특하다해도 자기만의 독창적인 이야기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하 대칭으로 사실적인 그림을 기하학적인 느낌이 나도록 그리는 것이 작가의 특색중 하나



 



 

 

에롤 르 케인은 다른 작가들과 달리 세개의 숲길 중 실버 숲과 골드 숲의 이미지를 형성화 했다.  이 사람의 그림은 화려함과 동시에 장식적이긴 하지만 장면처리는 롱과 미디움 숏으로 잡았으며 등장인물들의 감정표현은 직접적이지 않다.   



The Twelve Dancing Princesses (Mulberry books) 

일본태생의 작가지만 미국내에서도 이런 명작 동화 작가로 잘 알려진 크레프트(저 그림 눌러주세요. 아마존으로 직행합니다). 더 할 나위 없이 인물적인 그림책 작가이다. 위의 르 케인이 주로 배경과 행위가 주라면 크레프트는 롱과 클로즈업(인물샷)에 중점을 둔다. 등장 인물들의 감정이 표현되어 있고 특히나 남주인공 피터의 놀래는 표정은 압권인데, 공주 그림책에서 그림형제의 원전을 재해석한 Marianna Mayer의 이야기 변형, 일반적인 남자주인공이 신데렐라처럼 신분상승의 이야기도 놀랍다. 그림책의 첫씬은 여느 그림책과 달리 밑의 그림에서 보듯이, 남자 주인공이 장식한다. 고전의 현대적 해석은 우리가 놓친 부분을 다시 해석함으로써 이야기의 재미를 더 한다는.  


  

전래동화다보니 이야기마다 주인공의 이름이 다 다른데, 이 책의 여주인공 이름은 엘리제, 여주인공의 화사한 초상화를 그린 것은 크레프트가 이 네권 중에서 유일

 

크레프트의 숲 통과 장면은 사진을 잘 못 찍어서.. 사실 골드 숲을 지나가는 장면인데, 금빛이 반짝이는 느낌이 날 정도. 

  

이 책의 독특함은 피터(역시 남자주인공 이름이 다름)을 첫씬에 과감하게 집어 넣더니 남자 주인공의 놀래는 얼굴의 클로즈업 화면도 그려 놓았다는 것.(찍었는 줄 알았더니 안 찍혀있어서 이미지를 못 올렸다)



The Twelve Dancing Princesses루스 샌더스의 <열 두명의 춤추는 공주> 

역시 위의 세 명의 일러스트와 마찬가지로 전래나 명작동화에 일러스트 매진하고 있는 작가인데, 전형적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느낌이 드는 작가이다. 이 작가는 드레스를 정말이지 매력적으로 그리는 작가라고 할 수 있는데, 솔직히 그림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묘한 이질감도 드는 작가이기도 하다. 작년에 절판으로 떠서 알리브리스에서 비싼 돈 주고 구입했건만, 흑 지금 다시 발행하고 있다. 어쩐지 왜 이런 좋은 그림책이 절판일까 했다. 워낙 이 작가는 그림이 화려하고 장식적인, 이런 류의 그림에 전형적인 작가여서 이쁘다, 이외에는 할 말이 없다. 글에 다른 해석도 없고 원전에 너무나 충실하고 충실한 그림책 작가중의 한 명인데, 루스 샌더스를 보면 그림에 아무리 재능있는 작가라도 글을 휘어잡을 수 없다면 그림책 작가로서 명성은 드 넓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위의 작가들은 이 글을 수십번도 수백번도 더 읽고 되내이고 머리 속에 그렸을 것이다. 이야기의 극적인 부분에서 일러스트 작가들이 형상화한 이미지들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일러스트 작가들마다 한 작품을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려내는 이미지들이 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들마다 자신의 선호에 따라 중점적으로 다뤄지는 이미지들이 있고, 그 이미지들은 통합적으로 독자들에게 기억되어진다라고 생각한다. 글에서 이미지를 뽑아내 글과 대등한 관계로 형상화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재능의 결과이다. 이러한 생각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 일러스트 작가가 바로 모리스 센닥이다.

한때 나는 센닥을 아주 우습게 본 적이 있다. 그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을 아이들에게 선택해 읽어줄때만 해도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 다른 판타지 그림책들과 뭐가 다르다는 거야,라며. 하지만 지금 내가 그를 그림책계의 거장이라고 인정하게 된 것은 그의 작품을 수집하게 되면서 그가 무수히 많이 그려낸 일러스트 때문이다. 그는 유명 작가의 밑에서 많은 일러스트 작업을 군소리 없이 해 냈으며 그러한 작업의 결과로 탄생된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가 전작의 결과가 없었다면, 다른 작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글의 이해가 없었다면 결코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편집자 중요성이 강조되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그의 무수한 노력이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작품이란 말이다. 그는 글에서 적절한 이미지를 뽑아내는 방법을 오랜 기간 동안 터득했으며 자신의 그림체까지 획득하게 되었다.  

많은 일러스트 작가들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 바로 저 긴 길이 아닐까 싶다. 매번 같은 주제의 그림책을 다른 작가들이 그림책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바로 글을 장악한 그림에 투영된 작가들의 노력이다. 많은 글을 읽고 많은 그림을 보는 거 그리고 느끼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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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어른이 된다는 것

실제 <기억의 빈자리>라는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원제인 <Jumping the scratch>와 비교할 때 고개를 꺄우뚱거리게 만들었다. 순간적으로 <기억의 빈자리>라는 제목은 치매를 연상시키며 청소년의 알츠하이머질환에 관한 책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소년의 끔직한 체험과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삶을 동화작가와 친구의 도움으로 치유해 나간다는 이야기인데, 소년이 당한 그 끔찍한 기억이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극복되어 결과적으로는 긍정적인 빈자리로 남을 수 있다는 함축적인 의미의 제목인 것 같다.    

과연 한 개인의 고통스럽고 끔찍한 기억이 극복된다 한들 텅비어 버린 공간으로 남겨질 수 있을까.

영어를 그렇게 잘 하는 편이 아니라서 뭐라 왈가왈부할 형편은 아니지만, 번역자가 아무래도 제목을 뽑을 때 스크래치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에 멋 모르고 당한 끔찍한 기억에서 해방된다 하더라도 실제 일어난 일은 분명 과거의 한 시점에 분명 존재했던 일이며, 그 사건이 한 아이의 삶을 흔들 정도로 무기력하게 변화시켰다면 그 사건은 결코 기억의 빈자리로 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잊고 싶은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박박 긁어(스크래치)낸다하더라도 긁힌 자국만 있을 뿐이지 오리지널 기억은 남아있으며, 오히려 오리지널 기억 위에 긁힌 자국만 너덜너덜하게 남아있기 마련이다. 스크래치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극복과 상처라는 두 단어의 모순의 의미가 상충하면서도 한 소년의 고통스러운 체험의 기억을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스크래치된 기억을 뛰어넘는다(극복된) 하더라도 아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이런 박박 긁어내고 싶은 기억이 있다. 국민학교 2학년 요맘때 쯤 가을소풍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어찌하다가 난 담임선생님과 아이들에게 뒤쳐져 다른 반 선생님과 아이들의 뒤따라가게 되었다. 다른 반 아이들의 뒤를 따라 가다가 집으로 갈 수 있는 아는 길이 나와, 나는 곧장 집으로 갔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라 세세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선생님이 걱정할 것이라는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게 여느 때처럼 등교를 했다. 수업 시간이 시작되기 전인지 아니면 내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일어난 일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담임 선생님이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렀고, 불려나가 교단 앞에서 아이들을 등 지고 서 있는데, 선생님이 소풍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가 옆으로 샜다고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고 다그쳐 물었던 거 같다. 담임은 화를 내면서도 어제의 노여움이 안 풀렸는지 순간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얼굴에 따귀를 때리는 것이었다. 그것도 한 두대가 아니고 수 차례나.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그 때 얼굴이 심하게 붓고 한쪽은 멍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때 선생이 얼굴에 따귀를 때릴 때의 아픔보다 아이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따귀를 맞았다는 것에 더 굴욕적이었고 수치스러웠다. 아픔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 맞고 나서 내 자리로  돌아갈 때 내 얼굴을 쳐다 볼 아이들을 생각하면 아픔따윈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개를 들지 못한채 자리로 돌아와 앉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시절엔 왕따라는 것은 없었지만, 선생인 이렇게 나를 미워하는데 아이들이 전처럼 나랑 놀아줄까, 하는 걱정을 제일 먼저 했었다.

더 이상 앞뒤의 장면은 기억나지 않지만, 3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아이들 앞에서 수 차례의 따귀를 맞고 있는 모습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 땐 유치원같은 아이를 맡을만한 기관이 흔하지 않았던 시대여서 10월생인 7살 밖에 되지 않은 나를 우격다짐으로 언니와 함께 학교 들여보내,  2학년이라고 해봤자 겨우 8살밖에 되지 않았던 터라 그 시절에 나는 아주 어리버리하고 맹한 아이였다. 뭐하나 똑바로 해내지 못했고 교과과목도 제대로 인지 하지 못했었던 아주 맹한 아이. 선생의 입장에서도 나는 그리 사랑스러운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도 자존심은 있었다. 담임한테 수 차례의 따귀를 맞아 얼굴이 부었음에도 엄마한테는 말하지 않았다. (아마 같은 학년의 언니도 내가 따귀 맞았다는 것을 소문으로 알았을텐데, 언니도 엄마한테 말하지 않았다) 그냥 어디 부딪혔다고 둘러대었던 것 같다. 일이 커질까봐 엄마한테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정말 어린 나에게 뭐가 지키고 싶은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사다 지로의 <철도원>의 츠노하즈에서라는 단편중에 나온, 자신의 아버지가 젊은 여자를 선택하고 자식을 버리는 대목에서 그 소년이 한 말, 어린 나에게도 자존심은 있었다라는 문구에서 어린 시절 따귀 받은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세상 물정 모르고 선생님이라면 절대 복종했던 8살 밖에 안된 어린 나에게도 쓸데없는 자존심은 있었다.  

위의 책의 번역제목처럼 어린 시절의 그 기억이 빈 자리로 남아 있었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을, 하지만 수치스러운 그 기억은 다른 학창시절의 기억들이 다 휘발되어 사라져도 고통스럽게 남아 순간순간 떠 올릴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리고 그거 아는가. 어린 시절에 당한 폭력은 성인이 되어 객관적으로 분석한다고 해도 제대로 잘 꿰뚫어 볼 수 없다는 것을. 몸과 정신이 성인이 되었다하더라도 그 기억의 고통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언제나 어린 시절의 나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어린 나에겐 아무 잘못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수 십년이 지난 후에도 내가 선생님 허락 없이 집으로 돌아온 것이 잘 못 해서 따귀를 맞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어린 나는 잘 못 한 것이 하나도 없다, 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우연찮게 남편에게 용기를 내서 나도 따귀를 많이 많은 적이 있다고 말했을 때 남편이 보인 반응때문이었다. 선생에 대한 분노와 경멸 섞인 말이 그렇게 위로가 되어 줄 수 없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숨기기에 급급했던 그 응어리가 풀린 것은 그저 맞고 아무 대응조차 하지 못했던 나에게 있던 것이 아니고 오히려 수차례 따귀를 때려가면서 감정의 분풀이를 한 그 선생이야말로 빌어먹을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자신조차 추스리지 못하면서 타인의 고통을 껴안고 보듬어준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괜찮은, 썩 괜찮은 어른이라면 아니 빌어먹을 어른이라도 세상의 시야도 좁고, 삶의 폭도 좁고, 사고의 깊이도 웅덩이밖에 안되는 순진한 아이들에게 스크래치를 낼 권리는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무리 스크래치 가득한 세상이라고 해도 말이다. 기껏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관계를 맺고 인연을 맺으며 만나는 어른이 몇이나 된다고, 어린 가슴에 스크래치를 박박 내는지. 그리고 설사 순간적인 스크래치를 되었다 하더라도 긁힌 자국을 문질러 주기만 하더라도 그 상처는 좀 더 얕아질 것이다.  

그 가늘고 이쁜 손으로 어린 나를  때리고도 한번도 따스한 눈빛을 준 적도 없었고 보듬어 준 적이 없이 2학년을 끝냈던 것 같다. 내가 더 그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선생이 지금도 원망스러운 것은 내가 애를 키우면서 폭력이 사랑의 매가 아닌 얼마나 감정의 분풀이인지를 알았기 때문이고 그 일이 있고 나서 투명인간으로 보냈던 내 학창시절의 무기력한 나날때문이다.

긍정적인 변화는 금세 오지 않지만 부정적인 변환는 억센 말 한마디에도, 한 대의 폭력에도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채 바꿔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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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의 새책이 나왔다. <지상최대의쇼> 2년 동안 그의 작품들을 읽고 또 읽고 있지만 그의 진화론을 완전히 이해하기엔 내 사고 시스템이 많이 모자라다. 단지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것, 학문 이론이라는게 아이디어 게임이다라는 것을 그의 책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의 진화론이 정설인지 아닌지 그건 아직 아무도 모른다. 하기사 빅뱅이론도 완전히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던가. 그의 유전자 이론은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소름끼친다. 그리고 인생 뭐 별거 아니네, 하는 자조를 일게 만든다.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그는 우리의  유전자야말로 영원불면한 존재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유전자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잠깐 빌리고 있는 것일뿐, 껍데기인 우리들은 헛것에 불과하다고. 순간적으로 이상하게 그의 <이기적인 유전자>를 읽으면서 영화<에이리언>의 속성이 떠올랐다. 인간을 숙주로 끊임없이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는. 우리의 유전자란 바로 그런 존재란 말인가,하고 말이다. 그의 거대하면서 번뜩이는 이런 학문적 아이디어는 실로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다.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존재는 신이 아니고 우리의 유전자란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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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앤오더의 프로듀서 딕울프를 주목하게 된 것은 그가 프로듀서하고 있는 로앤 오더라는 성범죄드라마 특유의 자극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연히도 테레비에서 처음 로앤오더 성범죄전담반을 봤을때만해도, 소재의 선정성과 자극성때문에 적잖은 반발심을 불러 일으켰다. 뭐 사람들의 성적 호기심이나 만족시킬만한 저질 소재를 다루면서까지 시청률을 올리며 돈 벌고 싶을까하는, 소재의 한계를 모르는 미드라마의 소재 자유에 대해 한탄과 함께 다소 경멸감을 드러냈었다.  

솔직히 로앤오더 성범죄전담반의 성격을 깊히 파악하지 못하고 그 드라마를 처음 접했을 때는 그 드라마는 단순히 눈요기, 일반 시청자들의 몰래 들여다보기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그런 얄팍한 상술의 드라마일지도 모른다는 선입관을 깨기가 쉽지 않다. 나 또한 그랬다. 어째든 자극적인 범죄에 대한 호기심이 선정적인 소재를 재미로 선택했다는 도덕적인 반발심을 누르고 시청하게 되었으니깐.  

하지만 이 드라마는 결코 호기심의 욕망을 충족시키며 즐거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유희의 드라마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 일어날 수 있는 혹은 일어난 성범죄 사건을 재구성하여 형사드라마답게 사건을 해결함과 동시에 더 나아가 그 사건이 법정에서 어떻게 다루어 지는가를 심도있게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드라마의 성격상 시청자들에게 순간적이며 자극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시작된 범죄는 그 범죄가 미국의 사법 체계에게 어떤 형벌을 받을지까지 보여주고 있지만, 이 드라마의 핵심은 바로 지금부터이다. 미국의 주마다 다른 사법체계에서 그 법이 어떻게 다루어 지는지, 그리고 범인이 어떻게 그 법망을 피해 자신의 형벌을 줄이고 교묘히 피해 나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친할아버지에게 지속적인 성폭력을 당하고 있음데도 불구하고 뉴욕법에 따라 성폭행을 당한 소녀는 친할아버지에게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주법이나 연쇄 살인을 저질러 사형이나 무기징역이냐의 기로에서 변호사들의 농간에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날지도 모르는 개떡같은 사법체계를 드라마하고 있고 그것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을 분노케 만든다. 

이 드라마가 일사천리로 사건발생, 해결 그리고 범인에 대한 응징이라는 도식 속에 묶여 있다면 이 드라마는 보통의 범죄 드라마나 소설과 다를바가 없었을 것이며, 내가 프로듀서가 딕 울프인지 늑대인지조차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다가 시즌 1기부터 9기까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즌 10기 초반 에피소드까지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과 사건 해결 그리고 해결을 위한 미국의 사법 체계를 지켜 보면서, 뒷끝이 개운치 않는 엔딩때문에 후유증에 시달리면서까지 이 드라마를 9시즌까지 본 이유가 드라마 중독이라기 보다는 바로 딕 울프가 범죄를 이야기로 형상화하면서 보여준 미 사법체계에 대한 모순, 부조리함 그리고 대응방식 때문이었고 한없이 천박할만한 소재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그의 법체계에 대한 집요한 집념때문이다. 그는 강력 범죄에 대한 솜방망이처벌은 분명 잘 못 되었다고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심지어 그는 연쇄 살인범에 대한 사형 판결이 뭐 어때서 ? 라는 판결을 시청자들에게 유도해내기까지 한다. 연쇄 살인법이라는 혹은 미성년자 강간범이라는 캐릭터의 과장이 있을 수 있지만 잔인한 범행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사형제도에 대한 찬성까지도 이끌어 내고 있는 그의 드라마의 힘은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물론 이 드라마를 보면 잔혹한 범행때문이라도 사법과 형벌에 대해 보수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은 남는다. 하지만 딕 울프의 행보는 무시하고 싶지 않다. 딕 울프가 강력범죄에 대해 미국의 부조리한 사법과 형벌제도에 대해 끊임없이 드라마를 통해 시청자들을 각인시킨 것이 십년이 넘는다. 그 말은 사람들에게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과 환기시키는 작업을 꾸준히 해 왔다는 것이다. 난 오히려 급작스런 여론몰이의 사법개혁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딕 울프같은 사람들의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의 성범죄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는 성폭행,미성년자 강간과 같은 민감한 성범죄에 대해 타협이란 없다는 인식을 일반화하였으며 로만 폴란스키같은 감독이 미국내에서는 미성년자 강간범이라는 딱지가 떨어지는 않는 이유이기도 하지 않을까. 

조두순사건을 보면서 우리 나라도 이런 장기간 성범죄에 대한 끊임없는 경각심과 환기를 시켜 줄 수 있는 프로듀서가 있었으면, 조두순 같은 사건은 12년이 아니고 무기징형까지 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맨날 불륜같은 막장 드라마는 잘도 만들면서 이런 드라마 한 편 없는 우리나라 드라마 현실에 실망스럽다. 로앤오더가 미국내에서 큰 인기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로앤오더의 소재나 결말의 묵직성이 시청자들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딕 울프같은 프로듀서가 성범죄라는 주제하나 가지고 10년을 넘게 로앤오더라는 드라마를 끌고 갈 수 있는 환경이 한없이 부럽다. 우리나라에도 이제 딕 울프같은 집요한 프로듀서 한명쯤은 아니 소설가 한명쯤은 나와야만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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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에 미드 보고 집안일 하다 나영이소식을 접한 게 정오 무렵이어었다. 읽어나가면서 피가 거꾸로 솟아 나 자신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뛰는 가슴을 어떻게 진정시켜야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의 신체가 얼마나 부서질 듯 작고 연약한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가방이 자기 등짝보다 크고 자기 몸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작고 말랐다.  초1인 우리 딸이 키가 115에 몸무게 20도 나가지 않는다. 그런 연약하고 작은 아이의 몸에 성인의 발기된 성기를 집어 넣었다는 것 자체가 용서가 되지 않는다. 지나가다 초등학교 1학년의 여자아이를 눈여겨 보면 그 늙은이가 나영이한테 가한 성폭행이 얼마나 참혹하고 비참한지, 도저히 용서니 인권이니 하는 말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술 처먹고 그 지랄한 개새끼한테 정상참작이라는 게 말이 되냐. 누구를 위한 법인가. 미국은 범죄드라마를 보더라도 미성년자 강간범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의 여지도 남겨 놓지 않는다. 심지어 딕 울프같은 프로듀서는 노골적으로 그런 범죄에 대해서 사형제 찬성을 시청자들에게 부각시킨다. 범죄자의 인권이니 사형제 폐지 반대 운운하며 깝죽대는 인간들의 블로그를 보면서 멍석도 자리를 보고 깔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폭행을 당하고 고통 속에서 사는 딸에게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하고 그저 무기력하게 분노를 가슴에 안고 지켜 보면서 살아야하는 나영이 부모에게 그 어떤 위안을 주지 못한다. 심지어 같은 부모 입장으로서 가슴이 너무 찢어질 듯 아파서..그 늙은 개잡새끼, 내가 가서 칼로 죽여버리고 싶다. 정말 국가가 술 처먹었다고 정착참작으로 12년 구형밖에 내리지 않은 것을 받아들여야하는 나영이부모를 대신해서라도 내가 그 쌍놈의 새끼 죽여버리고 싶다. 죽여버리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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