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게도 나는 내가 제도권밖에 머물고 있다고, 주변인으로 자유롭게 잘 살아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외고나 특목고를 보내기 위해 아이의 공부를 닥달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너도 나도 빠져든 부동산 투기 광풍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관심사가 금전적인 것이 아닌 책이라는 사실만으로, 내가 우리 세대의 주변인으로 제도권을 비웃으며 비껴가며 살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내 맘을 솔직하게 들여다 보면, 나는 제도권에서 자유롭다기보다는 회피하는쪽에 가깝고 그 쪽에 신경을 덜 쓰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일 뿐이다. 나 역시 제도권 사람이라는 것. 뒤 늦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커다란 사회 시스템의 보수화에 물들었고 그 보수성은 좀처럼 깨기 힘든, 내가 안고 있는 유리공이나 마찬가지이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키우다보면, 아이들도 우리 부부의 삶처럼 평탄한 삶을 지향하기를 바란다. 때 되면 우리에게서 독립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반듯한 아이를 키웠으면 하는. 흔히 말하는 정상적인 사회시스템에서 편입해 들어가 잘 살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몇 주 전에 본 이 영화들을 보고 추위로 쌀쌀한 황량한 길을 걸으면서 집으로 오는 길에, 내가 지향하는 삶이, 그리고 우리 아이에게 바라는 삶이 사회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속에 갇혀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 아이가 <업 인 디 에어>의 조지 클루니처럼 허공(비행기)에서 보내며 섹스란 다시 만날리 없는 사람과의 원나잇 스탠드이며 가족이란 개념을 송두리채 휴지통에나 갖다 버리는 삶을 선택한다면, <밀크>의 하비처럼 어느 날 긴장한 채 들어와 엄마, 나 사실 여자보다 남자가 더 좋아! 그래서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쟁취할거야!라고 한다면, 나는 성인이 되어 선택한 그 아이의 삶의 방식을 존중할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분명 나는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수건으로 머리 싸매고 이불 속에서 끙끙 며칠을 앓을지도 모른다.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 그러한 삶은 분명 다른 색깔이며(휴, 이럴 땐 형제자매에게 우리 아이가 이렇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울 것이다), 같은 색깔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것에 치욕과 굴욕감에 부르르 떨지도 모르겠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렇게 될까봐 무섭다. 내 새끼만은 다른 사회색깔을 가지지 말기를. 악다구니처럼 강요하지 않지만 옆에서 바라보면서도 나는 내 새끼만은 동일한 사회적 색깔을 띄기를 바라고 있다. 메인 스트림의 물결에 휩싸여 편한 삶을 살아가길, 물결의 흐름속으로 같이 떠 내려가는 삶을 동경하는지도 모르겠다.
은연중에 아이들에게 그렇게 되도록 세뇌하지만 마음을 다 잡으면 그런 제안쯤 못 받아 들일 이유가 없다. 어찌 보면 사회시스템의 유지는 보수화이며 그 보수화는 종교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수 백년동안 통제되고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종교의 눈을 벗어나면 우리의 삶은 다양할 수 있다. 동성결혼을 죄악으로 보는 것도, 독신의 삶을 비난하는 것, 오로지 이성간의 결혼을 인정하고 아이를 낳고 잘 키우는 것은 종교적인 이데올로기이다. 그렇다고 종교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종교야말로 사회시스템의 토대이며 기둥이기 때문이다. 마이클 셔머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신이 없다는 것을 아는 진화 과학자중 종교를 믿는 이유로 사회와 가정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라고 쓴 적이 있다. 도둑질 하지 마라,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같은 십계명같은 도덕적 원리가 사회 시스템에 없어서는 안될 중심적인 지축이라는 믿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나 또한 진화관련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상상을 하곤 한다. 원시 시대, 아무 것도 갖춰지지도 않는, 무자비하면서 무질서한 서로 잡고 잡아 먹히는 동물적인 본능만이 활개치는 원시인들이 뭉쳐 있으면 다른 동물들의 위협에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무리 속에서 힘있는 자와 힘 없는 자의 위계질서가 생겨나면서 힘 있는 자의 권력투쟁과 그 권력을 유지하지 하기 위해 자연신이라는 이름하에 주술의 힘을 빌려 힘 없는 자들을 통치하면서 점점 세를 넓힌 것은 아닐까, 그래서 원시부족 사회가 탄생한 것이 아닐까하고 말이다. 종교야 말로 인간 사회의 탄생에 가장 큰 공로자가 아니였을까하는.
그래서 내가 개인적으로 무신론으로 전환했지만 종교를 부정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이미 나는 보수화되었고 종교적 보수화야말로 사회적 틀의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단지 억압만은 받아 들일 수 없다.
상당히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느낌이 드는 스타일이라는 단어가 있다. 스타일이라는 말은 어찌보면 통제화된 사회속에서 최대한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말이다. 저건 저 사람 스타일이니깐, 저 스타일은 원래 그래! 우리는 이러한 스타일이라는 말을 들으면 상대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심이 나오게 마련이다. 불과 백년 전만해도 해도 우리는 삶의 스타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성인이 되면 결혼해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 목적이 되었던 사회였으니깐. 하지만 우리 세기의 스타일은 다른 세기의 스타일과는 다르다.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타인의 다른 사고와 행동을 받아 들이고 인정하고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엄격한 사회적 기준에서, 시선에서 사람과 사물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우리 아이들세대가 어떻게 변할지 잘 모르지만, 우리가 지금보다는 더 열린 사회로 나아가는 것만은 확신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조지 클루니의 빈 배낭같은 삶도, 허비 밀크의 동성애자의 권리를 위해 바쳐진 삶은 한낱 헤프닝에 불과할 뿐이다. 스타일은 우리 모두의 삶의 다양성을 위해 싸웠던 단어이고 존재방식이다.
한 알라디너의 대문이미지의 사진처럼, 나 또한 발을 자유롭게 풀어 놓고 싶다. 수천년 동안 내려오는 관습과 제도, 모든 사상적 이데올로기와 종교적 이데올로기, 보수화된 신발속에서 잠시나마 발을 빼 맨 땅위에 서 있고 싶다. 발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다시 그 신발을 신을지 말지는 나중에 고민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