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추천도서를 보다가 나보코프의 자서전<말하라, 기억이여>라는 작품을 보고 든 생각  

<말하라, 기억이여>라는 자서전을 쓴 나보코프의 대표작은 <롤리타>이다. 그외에도 <창백한 불꽃>이나 <어둠속의 웃음소리>같은 작품도 그의 대표작으로 거론되기는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나보코프하면 <롤리타>아니겠는가.  

 <롤리타>를 대표작으로 내세우는 것은, 대체로 <롤리타>는 미국문학사를 새로이 새기게 된 문제작(이건 말하라, 기억이여라는 작품에서 번역가가 한말)이라는 평을 받고 있고 우리 나라에서도 그 평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분위기이다.  

러시아인인 나보코프가 두 번째로 영어로 쓴 작품인데다 어린 소녀를 사랑하는 파격적인 내용이 담겨져 있어서 그런지 이 작품은 출간때부터 미국내에서 반향을 읽으키며 나보코프가 글만 쓸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뒷받침 되어 준 책이다.  

이 책이 처음으로 출간되었을 때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다. 뭐 여하튼 그를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에게 세계적인 작가의 명성를 가져다 주었다는 점에서 <롤리타>의 문학적 위치는 정점에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요즘 나는 나보코프의 대표작이 정말 <롤리타>일까, 라는 의문을 자꾸 가지게 된다. 미국의 크라임 미드를 많이 봐서 세뇌 당해서 그런지 나보코프의 대표작이 <롤리타>라고 말하는 것을 꺼리게 되는 것이다.    

현재 미국내의 나보코프의 평가 그리고 <롤리타>에 대한 평가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미드만 봐서 <롤리타>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좀 우습지만, 미국내에서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라고 말했다가는 100이면 100, 소아애자로 변태 취급 당할 것이라는데 99.9% 장담한다.  

미드는 워낙 소재나 주제가 다양해서 여러 스탈의 미드가 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크리미널 미드쪽을 좋아하고 즐겨보는데(그래서 왠만한 크리미널 쪽 미드는 전 시리즈 거의 다 봤을 정도), 크리미널 미드에서 소아애자 범죄자를 다룰 때마다 형사가 비아냥거리며 들먹거리는 소설이 바로 나보코프의 <롤리타>이다.   

첨에는 그런 가 보다 했다. 수십 년전에 성인 남자가 어린 소녀에 대한 성적인 욕망을 그대로 표현한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센세이셔널을 일으켰고 유명한 작품이 되었고 많은 사람이 읽었기에, 그런 표현을 하나보다, 했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롤리타>와 소아애자는 한 쌍으로 묶이고 <롤리타>는 소아애자의 바이블쯤 여기는 책으로 전락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미국 범죄드라마의 작가들이 정말 후진 의식의 작가들이냐? 절대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본 범죄 드라마들의 작가들은 사회를 보는 눈이 냉혹하며 냉정하다.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사회 구조상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짚어내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그리고 <롤리타>의 문학적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쓰고 있다는 것은 나보코프의 <롤리타>가 이젠 미국주류 문학사에서 문학적 정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시간은 문화를 변화시킨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기준과 가치는 없다고 본다. <롤리타>가 21세기에 변태들의 바이블쯤으로 여기는 것은 아마도 소아애자에 대한 엄격한 시선과 법적용에 대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법이란  국가에 우리에게 요구하는 최소한의 질서 단위 아닌가.  

나는 <롤리타>라는 작품을 20대에 첨 알았고 그 때의 평가는 나보코프의 아름다운 문장력이었다. 어린 소녀를 좋아해서 그 소녀의 엄마와 결혼한 이야기는 무시한 채. 그리고 그 명성을 20여년 동안 지켜보고 있었고 하지만 세월이 한 작품을 어떻게 전락 시키지는지도 지금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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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1-05 13:47   좋아요 0 | URL
롤리타를 읽는다 읽는다 해 놓도 아직도 못 읽었네요.
롤리타를 바라보는 그런 시선이 있었군요.
그 작가들 롤리타를 지그시 밟아주면서 스스로 잘난 척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이건 그냥 저의 생각일뿐입니다.ㅋ
작년에 박범신의 <은교> 읽고 어느님께선 롤리타를 생각한다고 했는데
그때 내친김에 봤어야 하는 건데 그랬어요.ㅎ

기억의집 2011-01-10 23:08   좋아요 0 | URL
흐흐 저도 스텔라님의 은교사랑 잘 알지요^^
근데 스텔라님 저는 이상하게 <은교>나 <롤리타>같은 주제의 책이 불쾌하고 불편해요. 아무리 아름다운 문체와 건전한 결말로 끝을 맺었다하더라도요. 나이가 들수록 그럴 수도 있고 제가 아이가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죠.

잘난 척이라기 보다는 문학적 절대성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말 그대로 요즘은 다원주의 세상이니깐요. 미국같이 미성년자 강간에 대해 엄격한 나라는 아마 롤리타를 잘 포장된 포로노 소설로 보는 시각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stella.K 2011-01-11 10:17   좋아요 0 | URL
ㅎㅎ 기억님 말씀이 뭔지 알겠어요.
그런 선입견 없을 수 없죠. 저도 그랬으니까요.
문체도 문체지만 그런 것을 통해 인간 내면을 들여다보는
그게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낱 꺼풀뿐인 인간의 육체를 어찌하냔 말이어요. 흐~^^

2011-01-05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의집 2011-01-10 23:24   좋아요 0 | URL
님^^
저는 책을 읽을수록 작가나 작품의 절대성이나 우상화를 믿지 않고 독자는 그 절대성을 깨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저 또한 나보코프의 문학적인 위상이나 업적, 그의 시적이면서 깊은 사고에서 우러나오는 절제된 문장이나 문체는 인정해요. 저도 아마존 리뷰 참조하니깐 롤리타의 평가 또한 잘 알고 있고요.
아마 제가 <롤리타>에 대해 알게 된 것이 91년인가 92년도일거에요. 그 때 미국문학사 강의 들으면서 알게 되었고 그 때 때마침 책이 출간되서 읽게 되었는데..그 때도 저는 내용은 솔직히 깊숙히 와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워낙 막강한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라 감히 제가 이러쿵저러쿵하지 못하는 작품이었고 그 때만해도 <롤리타>를 비판하는 글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전락이라는 표현은 아마 제가 좀 오버한 것은 맞아요. 그렇지만 이 작품이 문학외적인 평가는 절대적일 수 있지만 내용만은 많은 담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어 한 남자의 순애보를 진실되게 그리기 위해 롤리타가 비행적인 행위들(저는 언제나 왜 그녀를 이렇게까지 묘사했어야하나,라는 생각이 들어요)이 험프리의 그녀에 대한 사랑을 정당화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런 정당화가 결국에는 미성년자와의 사랑과도 정당화 할 수 있지 않는가? 정말 그녀를 애뜻하게 바라보기만하는 험프리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스토커가 아닌가?하는 등등. 만약에 우리 아들에게 이 작품을 읽어라고 준다면 울 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떤 이야기를 해 주어야하나? 저는 이 작품은 그 명성만큼 단순히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읽힐 수 있는 작품이 아니고 많은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햐하는 작품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마녀고양이 2011-01-06 09:38   좋아요 0 | URL
20년 동안.. 책에 대한 평가가 그렇게 변할 수도 있군요.
미처 생각해보지 못 한 부분이예요.
하기사.. 요즘처럼 미성년자 성추행에 대해 격분하는 사회라면
탐미적이고 아름다운 시각으로 쓰인 책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다 생각합니다.
문득... 영화 연인이 생각나네요.

기억의집 2011-01-10 23:49   좋아요 0 | URL
여전히 그래도 이 작품은 절대적인 평가를 받는 작품이여요.
하지만 미성년자와의 사랑에 대해서는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주인공이 험프리였던가요? 남자 주인공에 대한 심리와 행동들에 대한.
저는 미성년자를 성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보는 작품을 읽은 것이 점점 불편해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요.
개인적으로 성인들간의 성은 그 어떤 형태를 취하든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미성년자와의 관계는 좀 그래요. 이 작품은 예나 지금이나 사실 절대적인 평가를 가지고 있고 난공불락인 작품인데 몇 년전부터 미드보면 까더라구요. 몇 년전에는 콜케인가 크마에서 그러더니 이번에 로앤오더에서 리브가 까면서 이야기 하더라구요. 저는 이런 작품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봐요. 근데 문제는 이걸 미화하는 저 편에는 그걸 비판해야하는데 그게 없어서 좀 그래요. 전 연인도 솔직히 별로~~~였어요.

2011-01-06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0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1 22:22   좋아요 0 | URL
음.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그 작품이 어떤 면에서든 우수해도 그냥 잘 포장된 포르노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건 그냥 개인의 느낌에 불과할 수 있지만 전 '1Q84'가 그랬어요. 그래서 1권 읽고 말았지요. (근데 항간의 말을 듣자 하면 3권까지 읽어야 그 책의 진가를 안다고도..) '해변의 카프카'도 좀 그런 불편함이 있었지요. 그게 '남성의, 여성을 향한' 시각 구도라 더 불편할 수도 있었구요.

기억님의 '롤리타' 등에 대한 불편함도 비슷한 것이지요? 저도 '소아 성애'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려 놔도 불편할 거 같군요. 하지만 그런 작품을 쳐 주는 이유는 아무래도 위의 스텔라님 말대로 '현실 그대로의 일'로 보기 보단 '인간 내면을 보는' 의미로 그럴 것 같네요.^^

기억의집 2011-01-13 19:36   좋아요 0 | URL
일큐팔사 저는 이권까지만 읽고 3권은 읽을까말까 생각중이에요. 재작년에 읽어서 거의 내용을 까먹어서 1,2권 다시 읽자니 그 정도의 책 같지는 않고. 해변의 카프카,도 불편하지요. 꼭 그런 어린나이로 설정했어야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보코프가 글은 잘 써요. 오랜전에 읽었지만 롤리타가 소아애자를 주제로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니깐요. 요즘 이런 저런 생각하면서 과연 내가 울 아들한테 롤리타를 권장도서로 권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전 아니요,에요. 만약 아이가 읽더라도 많은 이야기를 할 작품이지요. 성정체성이 확고하지 않는 나이에 읽는다면 분명 독서 지도를 꼭 해줘야할 작품인 것 같아요.

2011-01-13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7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5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7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02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꽃핑키 2011-06-04 23:26   좋아요 0 | URL
앗! 롤리타 ㅠ 벌써 몇년전에 사놓고 아직 첫 페이지도 못열어본 책이예요 ㅋㅋ
우후 기억님 글을 읽고 있으니 정말 ㅋㅋ 그렇네요 ㅋㅋ 이 유명한 책이 21세기에 변태들의 바이블쯤으로 해석될수 있겠군요!! 아. 그래도 아름다운 문장력이라니! 저도 어서 꺼내 읽어보고, 직접 느껴보고 싶어지네요! ㅋㅋ
(기억님 잘 지내셨죠?? 너무 오랫만에 놀러왔어요!!! ㅋㅋ)

강QT 2013-12-27 01:12   좋아요 0 | URL
음, 전 블로그 주인장님이 조금 잘못 생각하시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볼 때는 소아성애를 아름답게 묘사하는데 그치는게 아니라 동시에 곳곳에 그 폭력성에 대한 암시를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롤리타가 다니는 학교 교장이 롤리타의 성격 문제를 지적한다거나(이 부분을 읽어보면 그게 성적 학대 탓이라는 강한 암시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험버트가 자는 척을 하면서 롤리타가 날마다 흐느끼는 소리를 듣는다거나 하는 장면이 있지요.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탐미성뿐만 아니라 거기에 가려진 폭력성을 찾아가며 읽어야 하는 소설 같습니다.

기억의집 2013-12-31 09:14   좋아요 0 | URL
잘 못 생각한 것이 아니고 저는 님과 다른 관점에서 다르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요??
제가 롤리타를 처음 접한 게 1990년대 초반이었어요. 제가 대학교 다닐 때. 그 때 롤리타가 우리나라에 발행되었을 때의 출판 분위기 기억합니다. 굉장했거든요. 나보코프가 건드린 주제나 언어적 요소때문에... 그래서 단박에 구입해 읽었었는데 저 그 때 롤리타한테 짜증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흔히 싸가지 없었다고 할까나. 그리고 아 이게 그 유명한 나보코프의 영어 문장이었구나 했습니다. 흔히 평론가들이 말하는 거 그대로 받아 들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 제가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다시 롤리타를 들여다보니 혐오스러웠습니다. 물론 제가 시대적 상황을 이해 못 한 건 아니예요. 나보코프가 살았던 시대는 사실 소아애자란 개념이 없었다는 것도 이해하고요. 소녀가 결혼하던 시대에 어느 정도 발 담궜던 그였으니깐요.

저는 그의 자서전도 읽어보았는데 사실 그가 어린 여자를 좋아한다는 그런 기미는 없었어요. 그가 사랑한 것은 나비였으니깐요. 자서전이나 그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셔서 알겠지만 그의 언어는 철학적이고 탐미적인 사람입니다. 탐미라 해서 성적인 탐미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언어를 대하는,,사물을 대하는 것이 탐미적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그가 롤리타에서 무엇을 말하는 알고 있어요.
그런데 시대가 변하다 보니 혹 그의 작품적 시선이 부담스럽습니다. 문학적 언어적 으로 읽어야할 작품이 다른 불온한 생각이 들더군요.

혹 미드 보셨나요? 미드보시면 롤리타가 지금 어떻게 변질되었는지 아실겁니다. 롤리타의 험프리는 소아애자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더군요. 저도 그런 변질이 부당하다고 인정은 합니다만,,,, 제가 나이가 들어 삶의 경험치가 늘어나면서 작품을 보는 눈이 하나가 아닌 다른 면도 보인다고 말하고 싶네요. 바르트도 주장하잖아요. 작품의 다중적 의미에 대해서. 그런 면에서 이해해 주세요. 단지 이 글의 주인은 다른 면을 보고 있다고....

그리고 나보코프에 대해 읽으면서 안 사실인데 나보코프의 부인이 마케팅의 천재였어요. 이 작품도 사실 나보코프의 작품적 순수함 대신 부인이 어린 소녀를 사랑했다는 마케팅으로 띄운 작품입니다.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이 재출간되었는지 아니면 재고 방출인지 지금 알라딘에서만 팔고 있다. 예스하고 교보에도 가 봤더니 절판으로 뜨고 있으니깐.  

뭐 어째든간에 오홋, 이게 왠 떡이냐 싶다. 덩실덩실 춤까지 추고 싶을 정도다.

시공사가 작년인지 재작년엔가도 전설의 SF작품 어슐러 르권의 <어둠의 왼손>을 재출간 해주더니, 이번에는 <유년기의 끝>을. 절판 된지 오래되서 이제 우리나라 출판시장에서 이 책은 못 보겠구나 싶었는데, 오랜 기다림 끝에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생각에 손이 빨리 움직인다. 재빠른 손돌림으로 장바구니 집어 넣고 주문 버튼 확실하게 누르니 책이 도착할 시간만 기다리면 된다.  

왠간해서는 당일배송 신청하지 않는 내가 오늘은 당일배송 신청을 다 하고. 

예전에,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 나귀님이 절판된 책도 10년만 기다리면 진짜 좋은책은 재출간 된다고 쓴 적이 있었는데, 요 몇 달 사이 그 문구을 완전 실감 중이다.  

작년에 가오루 여사의 <마크스의 산, 고려원>이 거의 20년만에 손안의책에서 재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 책은 이미 읽은 터라 가오루의 다른 미스터리, 고다형사 삼부작인 <조시, 석양에 빛나는 감>이나 <레이디 조커>나 출간되었으면 좋겠다,라고 간절히 바랬었는데, <마크스의 산>과 함께 <조시>가 10년 마지막해를 장식하며 20여년 만에 재출간 되었다.  

당근 신간에 관심 없었던 나도 부랴부랴 구입해서 읽고 있는 중, 가오루의 미스터리는 본인 자신이 자신의 소설은 미스터리하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언급했듯이, 트릭이나 반전과 같은 뒤틀림이 없다. 그의 소설은 우직하게 왜 살인자가 살인의 목적에 도달했는가에 대한 탐구 기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 탓에 그의 2000년 이후의 소설은 인간 본성에 역점을 두고 소설을 쓰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재밌는 미스터리 소설인 줄 알고 그의 소설들을 골랐다가 낭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손안의 책 홈피 가면, 편집부 직원 한분이 가오루의 소설이라고 하면 괴로워, 괴로워를 연발했다는 기록도 볼 수 있으니깐 말이다. 과연 이런 묘사가 필요했을까? 구태여 이런 설명이 독자들에게 살인자를 이해하는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하는 글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오히려 나는 그런 대목들, 예를 들어 노다 가쓰오의 공장에서 베어링에 대한 기술적인 묘사 부분을 읽었을 때 작가의 쓰잘데 없는 지식 자랑이라기 보다는 그 기술적인 공정을 설명하기 위해 무덤덤하게 애쓰는 작가의 진심이 읽혀졌다. 일본 소설가들에게 볼 수 없는 강한 묘사의 힘이 그의 소설 속에는 강직하게 그리고 옹골스럽게 그려지고 있으며 그러한 강직하면서도 무덤덤함이 그를 하드보일드의 여왕이라고 칭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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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1-04 11:32   좋아요 0 | URL
기억님 페이퍼 보면 제가 몰랐던 걸 새롭게 알게되는 경우가 많아요.
사실 위에서 언급하신 책들 많이 회자가돼서 유명한 줄은 알겠는데
저에겐 별로 관심 밖이라 그냥 그러려니 하거든요.
알라딘만 유년의 끝을 팔다니...sf 좋아했으면 저도 후다닥 샀을 것 같아요.^^
새해 복은 많이 받고 계신 거죠?ㅎ

기억의집 2011-01-05 09:09   좋아요 0 | URL
전 이상하게 Sf쪽은 재밌게보다는 억지로 억지로 읽기는 해요. 발상은 독특하고 아이디어는 신선하지만 재미면에서는 그닥이잖아요. 그래도 읽으면서 뭔가 뿌듯한 그 느낌이 있어서 사서 읽기는 하나봐요.

스텔라님 컴백 페이퍼도 보고 김훈 페이퍼도 읽었는데(저는 김훈은 예나지금이나 매력을 못 느끼겠더라구요. 하긴 한국작가들중에서 매력을 느껴 읽은 작가는 단 한명도 없다는 이 사실) 인사 못 드렸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날씨가 추워서 감기몸살이 더 심하더라구요. 조심하셔요.

마녀고양이 2011-01-04 12:07   좋아요 0 | URL
헙, 판타지와 미스터리 좋아하시는군요?
아우........ 동지 만난 느낌이랄까요. ^^
아서 클라크의 라마 시리즈(일곱권짜리) 읽어보셨어요? 저는 절판 되기 직전에
서점 돌면서 저 책들을 구했는데, 제 애지중지 목록 중 하나랍니다.

기억의집 2011-01-05 09:16   좋아요 0 | URL
저는 편식이 무진장 심해서 그림책, 쟝르문학하고 자연과학책밖에 안 읽어요. 자연과학책 읽다가 너무 힘들면 쟝르문학 읽으면서 기분전환하고 그러거든요. 그러면 어느 정도 충전이 되서 자연과학책을 읽게 되더라구요.

크크 저는 아서 클라크쪽은 그렇게 매력을 못 느꼈다가, 저는 하인리히, 르귄, 젤라즈니쪽에 열을 올렸는데, 자연과학책을 읽으면서 아서 클라크가 무진장 많이 인용되는 것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라마 4권모았는데 그거 다 모은 다음에 읽어야지 않게 벌써 몇년째인지 몰라요.
나중에 읽을 맘이 굳혀지면 마고님께 부탁드려야겠는데요^^

2011-01-04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5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1 22:25   좋아요 0 | URL
흙. 저도 후닥닥 장바구니에, '유년기의 끝'을 담았어요. -결재는 아직 안 했지만.
좋은 정보 감사혀요..^^

근데 정말 좋은 책은 10년만 기다리면 재출간된다는 말이 맞아요.. 제가 기다리는 책은 최근에 빌려 읽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딴 건 또 뭐 있을지? 기억이 잘 안 나네요.

만화책도 그렇더군요. 결국은 다시 나오더라구요. -보노보노도 십년 만에 근래 재출간되었지요. 전 아직 2권만 구입했지만요.

기억의집 2011-01-13 19:39   좋아요 0 | URL
방금 세상에서 검색해 봤어요. 책내용이 정확하지 않아서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 모르겠지만 tv에 방영된 것을 모은 책인가봐요.

보노보노, 저는 애니로 거의 다 봤어요. 아들애가 어렸을 때 보노보노 방영해주었거든요. 보노보노 보고 있으면 행복한 느낌이 들어요.

2011-01-14 21:56   좋아요 0 | URL
세상에서...는 지금 반정도 읽었는데, 부탄여행기예요. (티비에서 방영된 거 모은 건 아니구요.) 다 읽고 리뷰를 쓰겠어요. (불끈!)^^

앗 그리고 유년기의 끝은 어제 왔어요. 책이 생각보다 고급스럽네요. 이제 읽기만 하면 됩니다...ㅎㅎ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딱 한가지다. 나는 오펜하이머의 정치적 그리고 과학 행정가로서의 명성 그러니깐 그게 맨하탄프로젝트의 수장으로서의 명성만 알고 있을뿐이었지, 그가 물리학에서 어떤 이론을 만들어내고 확립했는지, 선뜻 알 수 없었고, 물리학史에서의 그의 업적이 확연하게 노출되어 있지 않음에도 그가 어떻게 맨하탄 프로젝트의 수장이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이 책은 도서관에서 신청해서 받았다. 도저히 36,000원이라는 가격이 살림하는 아줌마의 주머니에서 나오기엔 버거운 금액이었기에. 아주 두툼한 900페이지 정도의 평전(참고자료 포함한 전체 페이지는 천페이지가 넘는다)중에서 200페이지 가량 읽었는데, 지금까지어려운 것은 없었다. 아마 작가가 이 평전을 쓸 때 일반인까지도 염두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문장은 평이하고 과학 이론과 관련하여 까다롭지 않다. 

 200페이지 정도만 해도 오펜하이머의 물리학적 업적이 서서히 드러나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그는 미래 물리학의 가이드라인 역활을 했다는 것이다. 무척이나 진지하고 어떤 주제에 대해 불같은 열정과 정열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한 주제에 대해 깊이 파고 들 만한 인내력은 없었다. 그의 끊임 없이 샘 쏟는 물리학적 아이디어는 수 많은 논문 발표로 이어졌고 그의 그 논문을 바탕으로 다른 물리학자들이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 진득하게 접근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블랙홀 같은 논문. 현재 블랙홀이라고 알려진 것에 대해 그가 발표한 논문에 블랙홀이라는 명칭만 없었다뿐이지 현재 블랙홀 이론과 비슷한 이론을 발표했고 그 논문을 발판으로 다른 천체 물리학자들이 더 진지하게 접근하여 연구를 더 확장하는 그런 물리학자였다.  

예전의 파인만의 평전을 읽었을 때와 사뭇 비교가 되었다, 파인만과 함께 유태인이긴 했지만 오펜하이머의 집안은 부유(단순히 부유가 아니고 억만장자)해서 그 당시 일반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는 천지 차이였다. 파인만의 어린 시절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반면에 오펜하이머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 그리고 삶 전체를 통틀어서 타인이 부러워 할 만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둘다 천재성을 보였으며 다른 것이 있다면 오펜하이머가 문학과 철학을 두루 섭렵한 반면에 파인만은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은 무시했다는 점일 것이다. 아니 싫어했다.

단지 오펜하이머의 저 평전에서 아쉬운 것은 역자의 보충설명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영어번역은 잘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물론 저런 과학책을 번역하는 것이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므로 충분히 그 자연과학과 관련된 분야의 책을 두루두루 섭렵해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방대한 과학책을 섭렵했을 것이고 다른 그 누구보다 많은 지식을 쌓고 있을 것임에도, 번역자가 이 책에서 자신의 과학적 지식을 드러내는 것에는 인색하다. 

오펜하이머의 삶을 읽어내려가는데 있어서 뒷면의 참고자료만으로 부족하다.  뒷면의 참고자료만 백페이지 정도 차지하고 있고 뒤의 참고자료를 참고 하지만, 평전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오펜하이머의 에피소드와 관련된 부분에서 이해 안되는 장면이 꽤 된다. 번역자는 영어 번역만 잘 해야되는 것이 아니다. 그 책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지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다 그 책에 쏟아 부어야 한다. 기껏 원저자가 참고한 참고자료만 참고하라고 하는 것은 번역자의 게으름이며 직무유기이다.  평전 읽으면서 이렇게까지 번역자주가 인색한 책은 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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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1-04 12:06   좋아요 0 | URL
갑자기 제일 처음으로 <시간의 역사>를 읽었을 때가 기억납니다. 틀림없이 서문에 호킹 박사님이 공식은 딱 하나만 사용해서 책을 저술했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너~~~무 어려운거예요! ㅠㅠ. 그 이후 아이슈타인 평전 읽을 때는 전혀 그런 부분이 없어서, 내심 안도했던 기억도 있어요.

기억의집 님께선 물리학 지식이 있으신가 봐요, 아우 넘 부러워요. 전 욕심이 나서 일반 과학 분야 책을 좀 사놨는데... 엘러건트 유니버스 250 페이지 읽고 손 든 이후, 3년째 방치 상태랍니다. 후아~

기억의집 2011-01-05 09:24   좋아요 0 | URL
시간의 역사 저도 어렵게 읽었어요. 무슨 말인지 잘 몰라서..과학전반에 지식이 있어야하는데 바탕이 없어서 그런지 나중에 포기했던 책이에요.

앗, 저는 일렉트릭 유니버스 읽고 자연과학책에 관심을 갖데 된 경우였어요. 너무 재밌게 읽어서 어, 이거 과학책이라고 해도 읽기 쉽잖아라는 생각이 들어서 데이빗 버스가 언급한 이야기와 관련된 자연과학책을 읽게 되고 그러면서 도킨스 읽게 되면서 점차 자연과학책의 범위가 넓어진 경우거든요. 전 그 시리즈 다 읽었어요. 너무 재밌어서.^^

마녀고양이 2011-01-05 09:47   좋아요 0 | URL
도킨스는 저두 좋아해요. 이론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흐름 자체가 너무 신기해서요... ^^

좋은 하루 되세요!

기억의집 2011-01-10 23:54   좋아요 0 | URL
근데 도킨스 책 읽으면 그 양반 성격이 꼭 도끼같아요. 어디서 읽어보니 촘스키가 굉장히 무섭대요. 쪽도 많이 주고. 도킨스도 그럴 것 같아요.

2011-01-11 22:27   좋아요 0 | URL
흐흐 시간의 역사는 저희 연배의 도서목록에 다 있군요. (두 분은 저보다 약간 더 선배님들이신듯 싶지만~) 저도 사서 꽂아 놓고 제목만 구경했어요. 펴보지 않고도 어렵다는 걸 느꼈나 봐요.ㅎㅎ

기억의집 2011-01-13 19:41   좋아요 0 | URL
자연과학책은 확 끄는 힘은 없더라구요. 꾸준히 노력해야 읽을 수 있는 책인 것같아요. 과학책 몇권 사다 놨는데 언제 읽을지. 그래도 요즘은 예전에 비하면 거의 책 안 사는 편이에요. 겨우 사도 일이만원 정도.
 

 

하이드님 페이퍼에 올라 온 크리스마스 트리 보고 3개 만들어줍사고 부탁했고 12월 중순 크리스마스 분위기 최절정일 때 받은 것 같다.  

받고 나서 크리스마스 트리가 앙증맞아 도착 인증샷하고 몇 장 찍어, 크리스마스쯤해서 이 노래 북유럽의 금발미녀가 재즈풍으로 부른 If I could wrap up a kiss와 함께 페이퍼로 올려야지 했다가 개인적으로 바뻐 여기 들어 올 시간도 없고 작성할 시간도 없어 차일피일 미뤘던 크리스마스 트리 인증샷.  

    

 

하이드님표 크리스마스 트리가 도착했어요.
실제 받아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작더라구요. 저 뒤의 외장하장보이시죠.
그 외장하드 키와 거의 비슷했는데, 첫 인상은 앙징맞다,였어요.
트리가 작고앙증맞고 귀엽다 보니 저의 집 두 아이들은 냅다 달려와 서로 차지.
각자 방에 자기가 좋아하는 위치에 갖다 놓은 것을  

  

저의 집 골목길에다 다시 배치.  

집에 있던 전구도 트리에 걸치고, 밤에 저 전구 켜면 집이 반짝반짝 

  

반짝반짝 빛나는 화려함에 울 딸이 가만 있을리가 있나요. 

계속 만지막 만지막 

 

울 둘째가 꾸민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 

엉망진창으론 꾸며 놓고는 이래야 더 반짝반짝거린다고 박박 우겨서. 

크리스마스 내내 이렇게 반짝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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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11-01-03 22:12   좋아요 0 | URL
트리를 불빛으로 덮었네요.
반짝반짝 빛나는 트리가 가장 아름답죠.
커다란것보다 작고 앙증맞아서 크리스마스가 아니여도 장식용으로도 예쁘네요.


기억의집 2011-01-04 08:21   좋아요 0 | URL
저는 저 반짝이를 트리에 맞에 조금 올려 장식했는데 그러면 덜 반짝인다고 둘째가 저렇게 했어요. 워낙 트리가 튼튼해서 애들한테 시달림을 많이 받았는데도 끄덕없더라구요^^

네~~ 그래서 크리스마스 지나서 치울려고 하다가 그냥 장식해놓고 있어요^^

희망으로 2011-01-03 23:07   좋아요 0 | URL
트리보다 뒤의 그림책에 더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나봅니다.^^
저도 작년에 울 딸이 만든 미니 트리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 아직까지 치우지 않고 있답니다.
이젠 크리스마스도 정말 분위기 안 납니다. 경제가 살아나지 않으면 계속 이렇겠지요.

기억의집 2011-01-04 08:2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런데 이명박이가 지지율50를 넘는다는 것이 이해가 안가요. 다들 거짓말 하나봐요.

너도 보이니는 사실 장식용이 아니여요. 딸애가 저 책을 너무 좋아해서 자기가 눈에 잘 띄는 곳에다 둔다고 한 곳이 바로 저기라서 두었는데 장식효과가 꽤 되더라구요.
물가나 좀 잡았으면 좋겠는데... 아주 장보고 나면 죽겠어요.

2011-01-11 22:29   좋아요 0 | URL
트리 정말 예뻐요!

트리를 포획한 색전등..ㅎㅎ

기억의집 2011-01-13 19:42   좋아요 0 | URL
ㅎㅎ 트리는 정말 귀엽고 앙증 맞더라구요.
계속 장식용으로 책장에 장식해두려고요. 딸아이가 하도 저렇게 해서 트리가 주가 아니고 반짝이가 주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알란파슨즈 프로젝트의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때가 중학교 다닐 때였다. 인트로 부분의 피아노가 어찌나 인상적인지 그 때 처음으로 피아노를 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의 우리집 살림으론 피아노 학원은 당치도 않았을 때여서 피아노 배우고 싶다는 말을 입 벙긋하지 못했지만, 뭔가를 배우고 싶다는 욕망의 기폭제가 된 것은 이 노래였다. 친정엄마는 툭하면 하는 소리가 본인이 직접 나를 피아노 학원까지 데려가 피아노 배우게 하려고 했다는데...내가 완강히 거부했다는 것이다. 난 정말 그런 기억 없다. 억울하다. 도대체 누구의 기억이 맞는 건지. 

수 십년이 지나 며칠 전에 다시 생각나 엠넷에서 다운 받아 다시 듣기 시작했다. 역시 이 노래의 압권은 인트로의 피아노 플레이 파트이다. 알란 파슨즈는 원맨밴드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자기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모든 악기 연주를 다 한다. 보컬 빼고.

 

6시반에 자명종이 울린다. 일어나 먼저 텔레비젼을 켜고 이를 닦고 아침밥을 만들고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7시 반에 아파트를 나온다. 이것이 나의 일상이며 매일 도장 찍듯 반복된다. 지겹다고 생각 될 때도 있지만 도장 찍는 듯한 일상이 사실 나는 좋다.    
 

커피를 내리는 것도 나의 '도장'같은 일이나, 오늘은 어째 어제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 커피를 내린 뒤 머그잔에 따라 마셨다. 무척이나 흐렸다.  

내일은 미사키상이 주선한 미팅날이다. 2개월이나 3개월에 한번씩 반드시 호출을 받는다. 미팅으로 애인을 사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것도 즐겁지 않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대체로 참석한다. 2,3개월만에 한번인 미팅, 이것 또한 나의'도장'에 포함 되어 있다.    

                                        - 우리의 도망 중에서   

집에서 쓸고 닦고 애들 키우고 삼시세끼 밥차리는, 특히나 5시 무렵에는 저녁밥은 뭘 해서 먹을까로 고민이라고 할 것도 없는 갓잖은 실존적 고민이 전부인 나 같은 아줌마에게도 몇년동안 열심히 찍은 도장이 있다. 풉. 알라딘과 예스.  

지난 몇 년동안 그 두 곳만은 출근도장과 퇴근도장을 열심히 찍고 돌아다니며 수다 떨고 좋은 글과 리뷰어를을 찾아 지적 자극을 받아 부지런히 책을 사 들이고 읽었으며, 그래서 어느 샌가 내가 정신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큰 폭으로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곳들이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질린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나의 도장 사이트에 무한한 매력을 느꼈고 해마다 식지 않는 애정을 보탰다. 정말 영원히 애정의 도장을 찍을 것만 같았다. 인간 관계 폭이 좁아서 그런 것일지 모르겠지만,난 살면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이렇게 많이 만나지 못했다. 절로 흥이 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더더군다나 온라인의 이런 공간에 더 매력을 느꼈던 것은 책을 좋아한다는 공통 분모이긴 하지만 관계는 직접적이지 않는다는 것. 직접 만나 서로의 감정을 탐색하고 눈치보고 서로의 흉허물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마침내 좋지 않은 감정으로 끝을 내는 직접적인 인간 관계대신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 간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도 알라딘과 예스에 열심히 도장을 찍었던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무한한 애정을 보냈던 나의 도장 사이트들과 나 사이에 금이 간 것은 지난 해 하반기부터인가보다. 일단 건강에 이상이 와 기운이 딸리다보니 오래 컴을 들여다볼 수 없었고 감정적 기복이 심해 앉아서 책을 읽기 힘들었다. 읽은 책이 없으니 이야기 밑천이 떨어지고 저절로 책 이야기로 가득 찬 이 곳에 들어오고 싶지도 않더라는. 아주 많은 날들을 도장 없이 보냈다.

수년동안 두 사이틀에 열심히 도장 찍었을 때는 알라딘과 예스가 전부였고 알라딘과 예스 없으면 소소한 일상이 재미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도장 사이트에 더 이상 관심과 집착이 가지 않으니 다른 것들도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젬병이었던 음식도 서서히 내 맛을 알아가고 재미없을 줄 알았던 가정 살림에 서서히 눈이 떠 가기 시작한다. 좀 더 일찍 책이 아닌 내 주변의 다른 것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았을 것을.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사람이 평생 한 곳에 집착하기 보다는 늦더라도 서서히 다른 것 무엇인가를 알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책만이 아닌 다른 무엇가의 다른 도장도 내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도장 없으니깐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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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3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4 0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망으로 2011-01-03 23:11   좋아요 0 | URL
여기에 안 들어온 이유가 살림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해서랍니까~~ㅎㅎ
방학이 한결 여유롭겠네요. 저야말로 이것저것 재미를 못 붙이고 있고 넘넘 무기력합니다.
친정엄니는 작년 말에 팔 부러지셨구요.
올핸 모두모두 건강하자구요. 날 따뜻해지면 운동이나 열심히 해볼까 생각하는데 될지 모르겠어요.

기억의집 2011-01-04 08:32   좋아요 0 | URL
희망님 그 먼 곳까지 갈려면 힘들겠다. 멀다고 안 가면 감정적 후푹풍이 장난 아닐텐데.... 나중에 친정엄마한테 두고두고 한 소리 듣지 않으려면 부지런 떨어야겠네요. 나이 드신 분이라 꽤 오래 걸리실텐데.

흐흐 예전에 애아빠 보내놓고 젤 먼저 알라딘과 예스에 들어왔는데 지금은 청소부터 하니깐요. 많이 변하긴했지요. 방학이라 귀찮긴해요. 참 낼 물만두님 리뷰발간집 모임에 가실 거에요?

다락방 2011-01-04 09:18   좋아요 0 | URL
저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암모니아 에비뉴 진짜 좋아해요, 기억의집님! (실예 네가드의 보이스도 좋아한다는 말씀을 잠시 드리고!) 근데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가 원맨밴드라는건 기억의집님 페이퍼 보고 처음 알았어요. 오와- 그랬군요! 제 엠피삼에도 암모니아 에비뉴가 있답니다. 음악이 뭐라고 해야 하나, 클래식한듯 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웅장하기도 하고, 저도 정말 좋아하는 노래에요. 어쩐지 감동 ㅠㅠ

저는 집에서는 알라딘에 들어오지 말자, 라는 생각을 갖고 지내고 있어요. 아니 그보다는 집에서는 컴퓨터 켜지 말자, 고 말이죠.

기억의집님, 기운이 딸리는 건 지금 어때요? 이제 좀 많이 회복되신 건가요?


기억의집 2011-01-04 10:27   좋아요 0 | URL
알란 파슨즈 음악 정말 좋죠. 알란 파슨즈는 오케스트라 같아요. 음이 웅장해서. 이 양반의 타임은 한때 라디오에서 시시때때로 틀어주던 시절이 있었는데..하도 들어서 저는 타임은 다시 들어도 감흥이 별로 없더라구요. 실예 네가드의 저 노래는 라이브보다는 스튜디오 음이 휠 좋아요.

요 며칠 하도 안 들어와서 저녁에 글 쓰긴 했지만 저 또한 저녁에는 가급적 안 들어와요. 밥 하는 시간에만 여유가 있어 들어오고.

휠 좋아지긴 했지만 오래 걷거나 힘든 일은 하지 못하겠더라구요. 일년 지나면 거뜬해 진다는데 헤헤 .. 고마워요^^

감은빛 2011-01-04 19:07   좋아요 0 | URL
직접적이지 않은 관계에 대한 말씀 공감이 갑니다.
이렇게 좋은 글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알라딘이 좋습니다.

기억의집 2011-01-05 09:26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렇죠. 저는 초창기땐 예스에서 만난 분들 아직도 이어지고 있어요. 직접 만나는 것은 일년에 한두번이긴 하지만 간접적으로 덧글 쓰면서 자신의 생각, 의견등을 이야기하다보니 상대방에 대해 어느정도 감지하게 되고 그 선을 넘지 않다보니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