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견하는 즐거움
리처드 파인만 지음, 승영조 외 옮김 / 승산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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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가 신제품 아이패드를 들고 런칭한 날, 그의 뒤 스크린 속에는 인문학(Liberal art) 과 기술(Technology)라고 씌여진 두개의 표지판이 있었다. 그는 그 두개의 표지판을 가르키며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로입니다. 애플사는 언제나 이 둘이 만나는 지점에 존재했습니다".  라는 말로 애플사의 정체성을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 나라 주류매체 기사에서 흥분해서 아이폰이나 아이패드같은 기기가 나오기 위해서는 우리도 미국처럼 인문학을 밀어주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요란하게 떠들어 댄 적이 있었다.

 

사실 나는 몇 몇의 그런 기사들을 찾아 읽었고, 읽으면서도 띨띨해서 그런지 왜 그런 테크놀로지의 바탕에 인문학이 필요한지 정확하게 캐치해 내지 못했다. 다만, 미국이란 나라가 전 세계의 인재를 다 끌어모을 정도의 학문적 패권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므로 인문학과 기술이 어느 한 분야에 치우지지 않고 고루 발전했기 때문에 그런 통합적인 의미로 애플사의 정체성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하고 추측했다.

 

그렇다고 잡스의 그 통합적인 접목에 감동 받아 우리도 인문학을 지금보다 더 발전시켜야 한다고 한다는 것은 어폐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학문적 상황이 인문학도 빌빌거리지만, 기초과학 분야도 인문학 못지 않게 빌빌거리는 상황(척박하기 이를 데 없다. 난 우리나라 과학자가 지은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흔히 과학적 maker가 아닌 거의 다 과학지식의 giver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처지의 나라에서 인문학 발전을 운운하는 것은 과학을 잘 모르는 나도 한심해 보이기 그지 없다. 

 

오히려 현재의 척박한 기초과학 교육에 더 확실한 기초과학과정을 집어 넣어야한다고 주장하는 글이 올라오고,그런 기사에 대해 현재의 우리 상황이 기초과학과목보다 인문학을 우선시 할 수 없는 처지에 대한 반박의 글이 몇개 정도는 올라와야 하는 것 아닌가. 정말 우리 나라 과학기술자들은 그 말을 전적으로 수긍하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아무런 반박의 글이 올라오지 않는 것은 우리 나라 현재의 과학 교육이 정말 세계가 놀랄정도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단 말인가.

 

인문학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엔 이런 글 저런 글을 읽어보면, 잡스의 생각과 달리 테크놀로지와 인문학은 별개의 학문인 것 같기 때문이다. 공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이 인문학을 더 잘 알아야 테크놀로지가 발전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오늘날처럼 놀라울 정도의 인문학적 사유의 시대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인문학을 전혀 몰라도 테크놀로지는 발전할 수 있다. 그 예로 저 멋진 웃음의 남자 파인만을 들 수 있다. 그는 평생을 인문학을, 추상적인 언어를 혐오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 한 듯 하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그가 반대했던 철학을 전공했다. 그의 평전 <천재>를 읽어보면 그의 아들이 철학을 전공한다고 할 때 무척이나 실망했지만 나중엔 어쩔 수 없이 아들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러고 보면 제 아무리 똑똑한 부모라도 자식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심지어 그의 <파인만씨 농담도 잘 하시네>같은 몇 권의 책은 그 대신 랠프 네이튼이 쓸 정도로 뛰어난 작문 실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를 평생 물리학으로 이끈 바탕은 오히려 인문학이 아니고 천재적인 수학적 재능과, 끊임없는 호기심 그리고 열정이었다. 그의 호기심과 열정을 보여주는 한 대목이 있다.

 

파인만의 화가친구가 과학자들이 꽃을 연구함으로써 아름다움을 놓친다는 비판을 듣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꽃의 아름다움에 취할 줄 압니다. 뿐만 아니라 꽃에 대해 그 친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꽃 세포를 상상할 수 있고, 세포들의 복잡한 움직임을 상상할 수 있는데, 세포와 그 움직임도 여간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겉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만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의 세계에서도, 내부 구조에도, 그 작용에도 아름다움이 있지요. 꽃 색깔이 곤충을 끌어들여 가루받이를 하려고 진화한 거라는 사실은 참 흥미롭지요. 그렇다면 곤충도 색깔을 알아 볼 수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과학은 거기에 의문을 덧붙입니다. 하등 생물도 미적 감각이라는 것을 지니고 있을까? 아름 다운 것은 왜 아름다울까? 그것은 참 흥미로운 의문입니다. 알고 보면 과학 지식은 꽃에 대한 흥미와 신비로움과 경이감을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덜하게 하지는 않습니다"라고.

 

이런 그의 과학적 사유체계가 인문학적인 사고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축척된 과학 이론과 실험과 실증이 그의 과학적 사고 체계를 만들어 가고 자신의 학문적 업적(양자역학 특히나 그의 파인만의 디아그램)을 이룩한 것으로 보여진다. 모든 학문이 다 그렇겠지만, 과학(기술)의 바탕은 외골수적인 열정과 과학적 지식의 축적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풀조차 나지 않는 과학의 터전위에서 인문학을 육성시키자가 아니고 좀 더 많은 아이들에게 과학의 모험을 하기 위해서는 탄탄한 기초과학의 육성과 함께 현대 과학의 이슈, 진행 정도와 호기심 유발이 먼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과학은 내가 가진 가치관을, 그리고 세계관을 아주 작은 곳에서 무한대의 우주로 옮겨 주었다.  진화나 우주론에 알면 알수록 점점 확장되는 세계관은 그 어느 때보다 과학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인문학을 읽었던 때보다 더 넓고 깊은 세계로 말이다. 과학기술을 위해서 인문학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과학(기술)은 그 나름의 독립된 분야임을, 충분히 인문학의 도움 없이도 자신의 길을 나아갈 수 있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현대 사회에서 과학의 가치에 대한 파인만의 강연글과 TV 인터뷰 글등을 모아서 낸 책이다. 추상성이나 애매모호함은 그가 인문학을 싫어하는 이유이기에, 이 책에 실린 그의 강연은 그가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이 실용적이며 실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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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녀의 위트

 

부부연말모임에서 자신의 아내에게 한 친구가 왜 명품을 가지고 있지 않냐는 질문에 내가 브랜드니깐요, 라고 말한 아내를 존경하기로 했다는 트윗을 읽고, 약간 연말 분위기로 들뜬 그 자리에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사람들 표정이 어땠을까? 사뭇 궁금하다.

 

그런 답이 나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을텐데. 상대의 질문에 꿋꿋하게 순간적으로 맞받아 칠줄 아는 그녀의 위트가 부러울 따름이다. 명품백이나 비싼 옷을 치장하는 것보다는 그런 위트를 가진 사람은 확실히 다시 보이지 않을까나.

 

2. 알라딘에서 책은 안 사도 양배추즙은,

 

알라딘서재에 배너보고 열명의 농부와 알라딘이 제휴 맺은 것을 알았다. 난 열명의 농부의 양배추즙 열혈팬이라 지금도 그 곳에서 주문한 양배추즙 2박스가 있긴 하지만 5% 할인권 준다길래 설전에 한번 더 주문하기로 했다. 다른 것은 주문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이 곳 양배추즙이야말로 속쓰림의 최고 명약이라는 것. 하루종일 커피를 물처럼 마시는, 그래서 속쓰림을 달고 살았던 내가 이 곳 양배추즙 먹고 속쓰림이 쏴악 없어졌다는. 한 이주일 아침저녁으로 먹으면 병원에서 약처방 받는 것보다 효과가 휠씬 좋다는 이 믿기지 않는 양배추즙의 효능. 

 

3,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그렇게 힘든 것만은 아니라는 것은 철조망에 핀 꽃을 보면 알 수 있다.

 

 

 

4. 알라딘 일반회원이 된지 꽤 오래되었는데,

 

사도 한두권 사고 만다. 애들 참고서 정도. 집에 넘쳐나는 책을 먼저 다 읽고 신간을 사기로 했는데, 레너드 서스킨드의 이 작품은 구입하고 싶기는 하다. 가격이 쎄서 좀 망설여지긴 하는데, 도서관에 신청하고 빌리자니 한달은 걸릴 것 같고. 하긴 사서 곧바로 읽으란 보장도 없으면서.

 

어찌할거나.

 

추천글을 보면 흥미로워서 이 책을 꼭 사서 읽어야할 것 같은 자기장이 형성되는 것 같다. 가격이 쎈 만큼 두께도 만만치 않을 거고 이것저것 벌여놓은 책도 있는데, 오늘 잠깐 서점에 나가 한번 둘러보고 올까.

 

 

 

5. 며칠째 갓잖은 고민

 

족히 한달째 살까말까로 고민중인 옷. 6만9천원주고 사자니 실용성이 없고 입고 다니 일이 없는 옷이라 안 사고 있긴 하지만 딱 보기에도 내가 좋아하는 스탈을 옷이라서. 살까?말까?  고민하다 겨울 다 지나갈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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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검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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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 소설 중에서 오하쓰 시리즈(우리나라에 나온 작품중에서 흔들리는 바위, 미인)를 가장 재미없게 읽은 나는 이 작품도 역시 그렇겠지 하면서, 순전히 북스피어 출판사에 대한 애정으로 구입했는데, 오홋 이거 생각보다 상당히 재밌게 읽었다.

 

이 책의 오하쓰에 관련된 단편은 두 편이며, 이 두편의 단편에 <흔들리는 바위>와 <미인>에서조차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둘째 오빠 나오지가 나온다. 근데 이 오빠의 등장과 활약이 신선하다고 하기엔 뭣하지만 은근 소설을 재밌게 꾸며주고 있다. 인물 하나가 이렇게 작품을 살릴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이 단편집이 미야베 미유키의 데뷔초기작이라는데, 나중에 나온 오하쓰 시리즈보다 이야기에 힘이 있고 탄탄하며 상징적이다. 그러고 보면 나이가 들수록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젊었을 때의 무모하고 열정적인 힘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 큰 역활을 하지 않나 싶다. 나이가 들수록 세계를 바라보는 가치관이 달라질 수 있고(좁아질 수 있다고 해야하나) 무기력 해 질 수 있으니깐. 이 작품을 통해 그녀의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에 쓴 활기 찬, 내부에 쏟아져 나오는 신기어린 이야기를 접하는 것만도 그 시절의 그녀를 보는 것 같아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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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1 -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김대중 옮김 / 새만화책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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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엔가 KBS에서 프랑스 부르카착용반대 법안이 통과된 것을 계기로 프랑스내 이슬람 여성의 부르카 착용 문제를 다큐로 다룬 적이 있었는데, 그 때 KBS의 논조가 어땠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슬람을 공부한다는 여교수가 나와 프랑스의 저 법에 대해 문화적 상대주의와 종교의 자유를 거론하며 프랑스를 비난했던 장면이 있었다. 부르카 금지는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히잡이야말로 이슬람 여성의 정체를 상징하는 것인데, 어떻게 국가가 종교의 자유를 억압 있느냐면서, 뭐 그런 요지의 말을 했는데,

 

나는 그 장면에서 완전 열폭했다. 이슬람을 공부한다는 교수까지 문화적 상대주의를 들먹이며 종교의 자유를 외치다니.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은 종교의 자유보다 우선한다. 히잡이나 부르카는 이슬람 여성의 정체성이 아니고 이슬람 세계에서 종교를 앞 세워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여성의 자유를 얼마나 억압하고 부정하고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물건이다.

 

페르세폴리스의 제 첫장은 이슬람혁명 때문에 모든 이슬람 여성들이 베일을 써야하는, 베일을 찬성하는 여성과 반대하는 여성의 투쟁이 잠깐 나온다. 이슬람 혁명(과연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반란을 혁명이라는 말로 지칭해야 하는지 의심스럽다) 이전 이슬람의 여성은 베일에서 자유로웠고 교육에서 남성과 비슷한 동등한 위치에 있었지만, 이슬람 혁명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겨우 미래로의 원스텝을 밟으려는 순간, 과거로의 회귀는 이슬람 여성에게 현재까지도 재앙이다. 이슬람 여성은 아직도 개개인의 독립적인 참정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심지어 사우디는 여성의 운전까지 제한하고 남편에게 폭행을 당해도 맞고 참아야 한다.

 

이슬람 세계에서 여성은 현재까지도 여성은 남성에 귀속되어있는데, 무슨 부르카가 종교의 자유를 상징하는 물건처럼 말하는지 모르겠다. 상대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포괄적 의미의 문화적 상대주의란 용어를 들먹이며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편에 서서 옹호하는 짓거리를 보면, 창피한 줄 알아야한다.  부르카를 입고 여성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어 있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부르카는 종교적 상징일 뿐이기에. 하지만 오늘 이슬람 여성의 부르카는 그들 자신조차 투쟁이 되어야하는 상징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마르잔 사트라피의 이 흑백의 굵직한 음영의 컷을 보면서, 한때 그녀들에게도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었음을 잊었다. 부르카는 이슬람 여성의 상징이 아니고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과거 이슬람으로 회귀하려고 애쓰는 남성 우월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시스템이고 그녀들의 표출할 수 있는 자유를, 재능을 덮을 수 있는 물건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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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트의 별 - 우주 크기의 실마리를 푼 여성 천문학자 헨리에타 리비트의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
조지 존슨 지음, 김희준 옮김, 이명균 감수 / 궁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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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정말 이 책은 구체적으로 뭘 말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리비트에 대한 평전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주에 관한, 분량이 얼마 안되는 작품치고는 초보자들이 접근하기에 만만치 않다. 차라리 이 책을 읽을 봐엔 사이먼 싱의 <빅뱅>중에서 3장 대논쟁편을 찾아 그 챕터만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과 사이먼 싱의 <빅뱅>의 대논쟁의 글이 일치하니깐. 게다가 쉽고 재밌기까지 하다.

 

저자는 리비트가 무명의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여성과학자라고 말하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공.정.하.게.도 우주의 역사에 관한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천문학사에서 애니 점프 캐넌과 함께 리비트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과학사가는 없다고 단언한다.

 

대체로 과학사가들은 리비트의 소논문 <소마젤란성운의 25개 변광성의 주기>라는 변광성의 표준척도 덕에 변관성과 변관성의 거리 측정이나 지구와의 별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대기가 공기가 아닌 에테르가 감싸고 있다고 믿었던 19세기 후반의 과학 지식과 기술로는 변광성의 밝기와 주기를 관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과의 싸움이며 엉덩이와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망원경을 통해 사진기으로 밤하늘의 별들을 촬영한 사진이 오면 리비트나 리비트와 같은 일을 하는 여성들(19세기 후반 하버드 천문대장 피커링이 사진을 분석하는 일이 남자보다는 여성이 더 적합할 것 같아 여성팀을 만들어 분석하게 하였다) 이 그 사진들의 별의 밝기와 위치를 체크를 한다. 

 

어디에서나 달인은 나오기 마련. 피커링의 여성분석팀 중에서 리비트는 두각을 나타낸다. 그녀는 다른 지역에서 촬영되어 몇 개월에 걸쳐 배달되어 온 별사진 건판을 통해 변광성 전체의 절반인 2,400개를 혼자 찾아낼 정도로 변광성의 달인(프린스턴의 찰스영 교수가 그녀를 지칭할 정도로) 되었다. 그녀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실제 우리가 보는 별의 밝기는 겉만 보는 것이다. 그 별이 우리가 보는 것만큼 실제로 밝은지 우리는 그 별 근처에 가까이 가지 않는 이상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별을 걸어서 갈 수 없는 법. 겉보기에 밝은 별과 실제 밝은 별 사이의 밝기 차이를 알아보기 위해 그녀는 별의 밝기와 주기 사이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측정했다. 그래서 얻어 낸 결론이 변광성의 주기와 밝기 사이에는 비례 관계가 있다는 것을. 하늘에서 두 케페이드형 변광성을 비교하면 지구에서의 상대적 거리를 알아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거리 측정은 그 때 논쟁적으로 불붓던 안드로메다의 성운이 과연 은하냐 성운이냐하는 논쟁을 간단히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물론 이 일은 허블이 한 것이지만 리비트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 논쟁은 이론전쟁으로 끝났을 것이다. 허블은 안드로메다 성운은 은하라는 결론을, 우리 지구와 그 은하와의 거리는 약 90만광년이라고 결론을 내었다. 대논쟁을 끝내기 위해 리비트의 관찰은 큰 역활을 한 셈인 것이다.

 

알고 보면 그렇게 어려운 공식을 설명하는 책도 아닌데 이 책은 참 어렵게도 설명해 놨다. 이런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의 이야기를 푸는 역량을 알 수 있다. 거의 비슷한 주제의 글을 쓴 사이먼 싱의 <빅뱅>을 다시 떠올려 보면, 싱이 얼마나 글을 낮은 관점에서 정확하게 썼는지 비교할 수 있다. 물론 나의 이해력이 딸리는 것도 한 몫 하겠지만, 좀 더 쉽게 좀 더 재밌게 설명했더라면, 이 책의 분량도 그렇고 좋은 책이 될 뻔했는데, 저자의 설명하는 방식이 좀 아쉬운 책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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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oo 2015-10-04 0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확한 지적입니다. 정말 이해하기가 까다롭더군요. 사이먼 싱이 정말 글을 재미있고 쉽게 잘 쓰죠 저도 빅뱅 읽으며 감탄했습니다

기억의집 2015-10-05 09:56   좋아요 1 | URL
쓴지 꽤 되서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렵게 읽었던 것 같아요. 그 때 사이먼 싱의 빅뱅을 읽었던 때라 더 비교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 생각하면, 다시 읽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같은 이야기를 쉽게 쓰는 사람이 있고 어렵게 설명하는 사람이 있긴 하죠. 이해하기 쉽게 풀어 설명하는 것도 재주긴 해요~

moss9207 2024-01-28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의 깊이를 모르는 리뷰 ~,,, 천문학 관련 교양 서적을 몇 권 읽은 자로서 쓸 수 있는 리뷰 ~,,, 천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가 필요한 리뷰 ~ 각성이 필요한 리~ 뷰 ~

기억의집 2024-01-28 22:3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지금은 반성 많이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저 때와 달리 많이 읽고 유튭도 많이 보면서 이 때의 이글이 얼마나 지적 허세로 쓴 글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지울까 하다가 과학책 읽으면서 한때 저의 오류의 역사이기에 남겨 놓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