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와 나 - 2012년 제3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영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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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이걸 소설이라고. 이상문학상 수상자라는 전화 받고 양심에 찔리지도 않았나. 다신 한국소설 안 읽으리. 짜고 치는 고스톱도 이보단 더 정교하겠다. 짜고 치는 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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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읽다가 포기했는데, 올해 천천히 다시 읽어보고 있다. 호킹의 글이 의외로 관념적이서 읽은데 여간 애를 먹는 게 아니다. 본인은 철학은 죽었다라고 썼지만, 그가 이 책에서 전달하는 물리학 역사에 대한 설명이 명확하고 명쾌하지 않다. 오히려 철학적이고 사유적 글쓰기라고 해야하나.

 

대대적으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광고한 것치고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조목조목 따지지는 않는다. 물리 자체가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이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전제가 깔려있을 뿐. 그러고보니, 칼 세이건의 <다양한 과학적 경험>도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광고했지만, 내가 읽어본 봐로는 핵무기에 대한 경고와 공포에 더 비중을 두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과학책을 읽은 방법중 무작위로 한 챕터씩 읽다가 나중에 다시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책의 내용을 통합하는 것인데, 이 책은 물리의 역사이므로 사실 한 챕터씩 읽기엔 무리가 있어 처음부터 순차적으로 읽고 있다. 문제는 제3장 양자역학에 가면 언제나 막힌다는 것. 거의 돌아버리겠다. 이해가 될듯 말듯 하면서도 무슨 말인지 통합적으로 정리하면 갈피를 본 잡겠다.

 

그래서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위대한 물리학자 4>라는 책을 들었는데, 이 책 첫챕터가 사고의 탐험가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양자역학이든 뭐든지 간에 현대 물리학은 아인슈타인에서 출발하니깐. 이제 상대성이론도 뉴튼처럼 고전물리학이 되었다하더라도.

 

이 책에서 아인슈타인을 사고의 탐험가라고 명명한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데, 물리학사를 통들어서 아인슈타인의 사고는 관념적이거나 추상에 그치는 사고가 아닌 상당히 실제적이고 실험적으로 접근 가능한 사유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아인슈타인에 관한 책을 읽은 것중에서 잊혀지지 않는 대목이 있는데, 그건 사이먼 싱이 16살의 아인슈타인을 묘사하는 한 대목이었다.

아인슈타인은 1896년 열여섯 살 때 거을을 앞에 들고 빛의 속도로 날아갈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사고실험을 했다. 그는 이 경우에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생각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이론으로는 우주는 움직이지 않는 에테르로 가득차 있다. 빛은 이 에테르의 으해 전달된다고 생각되었으므로 빛은 에테르이 대해서 빛의 속도(초속 30만 킬로미터)로 달리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사고 실험에서 그의 얼국과 그가 들고 있는 거울은 에테르이 대해서 빛의 속도로 달리고 있다.  빛은 아인슈타인의 얼굴을 떠나 손에 들고 있는 거울을 향해 달리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빛의 속도로 달리고 있기 때문에 이 빛은 얼굴을 떠날 수 없고 따라서 거울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빛이 거울에 도달할 없다면 거울에 반사될 수 없고 결국 아인슈타인도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서 볼 수 없을 것이다

 

한 천재 소년이 세상을 다 바꿀 사고 실험을 하는, 이 장면을 읽고 나서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겨우 16살에, 친구에 대한 고민, 학업성적에 대한 고민, 무엇보다도 한창 사춘기의 나이에 이런 사유를 하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전율을 느낄만큼 무섭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디까지가 인간 사유의 정점이고 끝일까,하고 말이다.

 

아인슈타인의 이 사유는 후에 그의 특수 상대서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을 낳는 원천이 되었고, 특수 상대성과 일반 상대성은 다른 실험과학자들에 의해 실험을 통해 증명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머리속에서 상상했던 것들이 실험으로 증명이 되고 세상을 과학적으로 진보시킬 수 있다는 것에, 한 인간의 능력에 전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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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동안 빨리 나오길 기대했던 신작이지만, 그렇게 인상적으로 읽지 않았다. 딱 그녀의 평균치 정도. 왠만큼 글을 쓰는 사람이라 후진 글을 쓴 것도 그렇다고 <모방범>이나 <이유>와 나란히 놓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라고 말하긴 어렵다(개인적인 관점에서 말한 것이다. 미미여사의 한국출판된 작품은 다 읽었기에 그녀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서 말한 것이다).

 

소설을 구성하는 큰 흐름의 임팩트한 사건은 없지만, 미야베 미유키가 말하는 결혼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해 볼 만 하다. 시부모와의 종교갈등으로 이혼한 첫번째 에피소드 고구레 사진관, 아버지와 친가에서 무시당하는 엄마의 자신감을 되찾아 주기 위해 5학년에 초등학교를 자퇴하고 대안학교에 다니는 세번째 에피소드 갈매기의 이름, 그리고 시어머니에게 손녀의 죽음으로 온갖 폭언을 들어야했던 하나짱의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는 철로의 봄 에피소드에서 공통점은 고부간의 갈등이다.

 

우리나라도 아닌 일본에서 소설의 소재로 고부갈등이라니. 의아했지만 사람사는 곳(혹은 문화)은 어디든 비슷한지, 서양인들도 장모와 사위의 우리 고부 갈등 못지 않게 서로 으르렁 댄다고  하지 않던가. 사람들 관계에서 갈등은 언제나 어디서든지 존재하게 마련인가 보다.

 

그렇담, 고부간의 갈등의 원인은 무엇일까?  겉보기엔 고부간의 二人 갈등처럼 보이지만 실상 남편이자 아들이 낀 삼각관계의 갈등이라고 보며, 고부간의 갈등의 주된 원인은 독립된 결혼생활을 꾸려내지 못하는 남자(혹은 남편)에게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혼 당시, 부모의 사종교문제에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가 시부모가 며느리에게 자신들의 종교를 믿을 것을 강요하면서 시부모와  아내가 종교로 갈등을 일으키자 자신의 부모와 합심해서 부인을 가족내 따 시키는 첫번째 에피소든의 남편과,  엄마가 조부모에게 여러모로 못마땅한 며느리라며 무시당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어머니 대신 반기를 드는 아들보다 못한 남편의 예에서처럼, 남편이 자신의 부모에게 정신적, 심리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하지 못한다면 그 가정은 흔들리게 되어 있다.

 

반면에 소설의 주인공 하나짱의 경우 아버지경우, 본가 어머니가 자신의 아내를 흔들자 가차 없이 본가와 인연을 끊고 자신이 독립된 가정을 이끌어 간다. 혹 어떻게 아들로써 본가의 인연을 끊을 수 있을까, 자식된 도리로 못 할 짓이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다 큰 아들 가정에 무모한 간섭을 일삼는 부모 또한 합리적인 사람들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부모라 할지라도.

 

동물은 새끼를 낳고 양육 기간을 거치면서 새끼가 독립할 수 있겠다 싶으면 새끼를 가차없이 내친다. 반면에 인간은 부모와 자식간에 평생동안 분리할 수 없는 자기장을 형성한다. 그 과정에서 결혼을 할 경우 부모와 자식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각각 부모가정과 자식 가정간의 독립을 원칙(경제적으로 심리적이든)으로, 자신의 가정을 제일순위로 정해야 하는 것이 가정을 지키는 길이다. 세월을 더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자식의 결정에 네가 뭘 아냐 식으로 자식은 부모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따라야한다는 사고 방식은 자식을 한 명의 다 큰 성인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

 

성인이란 자신이 하는 일에 책임과 의무를 다 할 수 있는 인격체이며 어떤 경우 혹은 상황에 이성적으로 사리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다하는 사람을 말한다. 자신의 자식을 성인으로, 독립적으로 대할 때 비로소 그 자식들은 자신의 가정을 꾸려나가고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가 묘사하는 가정은 부모와 자식간의 정에 연연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부모와 자식간의 애틋한 정은 아이가 어릴 때 그 순간에만 가능한 것이다. 아이가 청소년으로 그리고 성인으로 갈수록 그들의 삶을 독립적으로 이끌어 주어야하는 것이 부모로써의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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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더 선 시스터 문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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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온다리쿠 소설 즐겨 읽었는데, 이 책 나온 줄도 몰랐다. 지난 토요일 반디문고에 갔더니 가판에 놓여져 있길래 잠시 훑어보았다.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해와 달이 된 오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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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내내 새끼들하고 있는 것이 지겨워 그저께 애들은 애아빠한테 잠깐 보라고, 물론 점심도 알아서 주라고 하고 시내에 나갔다왔다.

 

시내에 나간 주된 이유는 오프 서점에 들려 <10대들의 사생활>이라는 책을 훑어보고 싶어서였는데, 이 책을 보려고 한 이유가 이번 주 시사인에서 문정우씨가 쓴 <10대들의 사생활>이라는 리뷰, 그건 그 아이 잘못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맨 마지막에 쓴 문장에 대한 반감때문이었다. 그는 이 책의 리뷰를 쓰면서, 이번 대구중학교 왕따학생의 가해자들에게 마치 피해자인 양, 새해를 유치장에서 맞는 두 소년이 가엾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가엾다라는 맨 마지막 문장 읽으면서 할 말을 잃었다. 대구왕따 학생 가해자들이 가엾다니... 그 아이들에게 단순한 폭력이상의 고문을 당해 자살을 선택한 아이는 깡그리 무시하고, 새해 첫날 유치장에 갇혀 있는 가해자들이 가엾다니. 이 책 한권으로 괴물이 되어버린 10대들의 행동을 다 이해하는 척하면서, 감옥에 갇힌 가해자들을 그런식으로 정당화할 수 있단 말인가.

 

좀 짜증이 났다. 옥상에 올라가 고개를 떨구었을 그 아이를 생각하면, 난 절대로 가해자들에게 일말의 동정심이 들지 않는다. 문정우 기자의 리뷰에 따르면, 청소년 시기에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데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는 대뇌의 전전두엽 피질이 미완성 상태이기에, 똑똑한 아이들이 종종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지른다는 말을 인용하며, 대구 가해 학생들을 동정한다. 가해학생들의 저지른 행동이 뇌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 학생들이 피해학생에게 가한 고문이 단순히 뇌의 문제라고 단정하고 그 아이들 잘못이 아니라고 일축할 수 있을까!  최소한 15살이면 자신이 한 행동이 무엇이 잘 못 되었는지 안다. 7,8살만 되도 아는 도덕적인 행동들, 거짓말 하지 말고 때리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행동들을 말이다. 아무리 뇌에 이상이 있다하더라도 폭력은 육체적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나이다.

 

그런데 가해학생들은 그런 기본적인 행동들을 넘어 피해학생에게 수치심을 주고 굴욕을 주고 고문에 가까운 폭력을 가했다. 단지 재미로. 이런 행동들을 10대들의 전전두엽의 미발달로 인한 것이라고 정당화 할 수 있을까. 그 나이에 과잉행동이 우선이긴 하지만, 제어력도 마찬가지로 조정되어 진다고 생각된다. 아닌가? 정말 아닌가?

 

법이 문제다. 그것도 소년법. 이제 슬슬 21세기에 맞춰 강력하게 개정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나라의 경우 청소년들이 어른처럼 책임질 행동을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강력하게  비행은 어느 정도 묵인되었다. 술을 마셨다고,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정상참작 되어진다면, 우리는 우리의 법을 다시 한번 돌아봐야 할지 않을까. 분명한 것은 대구왕따 가해학생들의 행동은 분명 정상적인 범위를 벗어났고, 비난 맞아야 마땅하고, 처벌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들애가 이번 해에 중학교를 들어가기 때문에, 왕따문제게 관심을 안 가질 수 없었다. 나는 더군다나 가해학생뿐만 아니라 부모까지도 연대책임을 져야한다는 입장이므로. 

 

한번 훑어보고 살 셈이었는데, 결국은 읽지 못했다. 지은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런 책을 썼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폭력을 뇌의 문제일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책임 회피이다. 반디앤 루니스도 영풍문고에서도 비치 서적없이 비닐로 꽁꽁 싸여 있었다. 나와 이 책의 인연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싶었다. 광화문 교보까지는, 영풍과 반디를 돌아다니는 것만해도 허리가 아파 거기까지는 가지 못하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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