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1~8 세트 - 전8권 - 김일성 항일 회고록, 계승본
김일성 지음 / 민족사랑방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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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국내 출간에 대한 단상

블라디미르 레닌의 생일인 어제 어용언론 조선일보가 쓴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국내 서점에서 판매 시작˝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2011년 당시 한국에서 국가 보안법 위반에 해당한 이적표현물을 출간했다는 이야기였다. 쉽게말해 처벌 혹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늬양스의 기사였다.

세기와 더불어는 김일성이 태어난 시점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던 1945년까지를 다룬 회고록이다. 총 8부작으로 되어 있으며, 주로 김일성 본인의 항일무장투쟁에 초점을 두었다. 페이지는 8권까지 합치면 3,500페이지가 넘는다. 참으로 방대한 분량의 책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북한 측 저작을 읽는 건 국립중앙도서관에 북한 자료실 열람을 제외하면 국가보안법에 적용되는 행위이다. 그 이유는 북한 출판물 자체가 이적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 보안법이 희대의 악법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한민국 헌법에 나온 것과 같이, 소위 민주국가에 사는 우리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사상의 자유‘를 추구할 권리가 있다.

이러한 기준에서 보았을때, 당연히 북한에서 출판된 저작이 국내에 출판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을 준수하려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많지 않다. 오히려 ‘국보법 처벌‘을 운운하고 있으며, 인터넷 서점 페이지에 들어가 악플봐 비방을 일삼고 있다. 그들이 이와같은 행위를 하는 것은 북한이라는 대상을 단순히 적대시 하는 생각과 세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 사회가 생각하는 김일성의 이미지는 단순히 독재자나 폭군같은 이미지다. 미국이나 서방에서 스탈린을 2천만 명 학살했다는 거짓말을 믿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북한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도, 한반도의 미래라는 차원에서도 좋은 일이 아니고 오히려 해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김일성의 또 다른 이면을 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 북한의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 즉 독립운동을 했다는데 있다. 김일성은 1931년 만주사변 시점부터 1942년 미드웨이 해전까지 항일투쟁을 만주에서 했었다. 김일성 또한 수 차례의 전투에 참가했고, 1940년 홍기하 전투의 경우엔 일본군 100여 명 이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쉽게 말해 김일성은 전설적인 항일투사였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김일성이라는 인물을 단순히 편향된 한 가지 측면으로만 해석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또한 그것은 서방 제국주의자들이 20세기 역사에서 현실 사회주의권과 제3세계의 인물들을 대하던 태도와 똑같다. 그 결과가 한국에는 이승만 남베트남에는 응오딘지엠, 칠레에는 피노체트, 필리핀에는 마르코스와 같은 악랄한 학살자 혹은 독재자들을 지원한 동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세기와 더불어>는 김일성의 입장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읽어볼 가치가 있다. 또한 북한 사회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떠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도 볼 필요가 있다. 북한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읽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세기와 더불어>가 과장과 뻥튀기 그리고 각색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히 이 책에도 신뢰가 매우 떨어지는 구절들과 사료적으로 빈약한 근거빈약의 내용들도 분명 존재한다. 또한 항일전과 기록이나 몇몇 서술들은 기존의 북한 서술이 보여주듯이 숫자의 과장도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의 서술이 학술적인 의미에서의 신빙성이 있다고 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학술적인 측면과 사료적 빈약성 그리고 부풀려진 과장 문제와는 별개로, 단순히 책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한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또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1948년 여순항쟁 이후 이승만과 친미친일 세력들이 일제의 치안 유지법을 모태로 제작한 국가 보안법의 야만성과 악랄함을 보여주는 예시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기와 더불어>에 대한 개인적인 입장은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감정이 앞선다. 김일성의 회고록이 문제적 시리즈라는 점과는 별개로 항일투쟁 당시의 김일성이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그 체취를 많이 느낄 수 있을거라 생각이 든다. 마치 <호치민 평전>의 저자 찰스 펜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본인이 OSS에 있으면서 만났던 호치민에게 느꼈던 감정을 저작에 잘 담아냈듯이 말이다. 이런 점에서의 가치는 이 <세기와 더불어>가 충분히 있을거라 생각한다.

드디어 문제적 시리즈가 국내에 출간됐다. 참으로 기쁘고 놀라운 일이다. 국가 보안법이라는 홍콩 보안법이 새발의 피로 보일 정도로 악랄한 악법이 살아있는 이 땅에서 이런 문제적 시리즈를 출간한 출판사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참으로 환영할 일이다. 앞으로 <세기와 더불어>외에도 보다 많은 북한의 서적들이 출간되어, 다양한 입장과 시각에서 평가가 나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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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가제일쉬워요 2021-04-26 07: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시각으로 이 책을 읽어보셨군요.. 솔직히 말하면 저같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생소합니다. 북한 관련 저작물은 당연히 불법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으니까요. 출판한 데에 큰 의의가 있는거군요.. 사서 읽어볼거 같진 않지만 마냥 이 책이 출간된 것에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은 사라진거 같습니다.

NamGiKim 2021-04-26 08: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주목 2021-04-26 1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내용에 동의합니다. 다만 이번에 출간된 <세기와 더불어>는 정식으로 저작권 협의를 거치지 않은 ‘해적판‘인 것 같습니다. 엄연히 북한도 베른 협약에 가입되어 있어 북한의 저작물도 저작권 보호 대상인데, 관련한 뉴스를 보면 정식 계약은 당연히 하지 않은 것 같고, 저작권료 공탁 등 절차도 밟지 않은 것 같거든요. 아무리 대북 제재 때문에 정식 출판계약은 어려운 상황이라고 하지만...

어니언 2021-04-26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할게 없어서 대한민국국민에게 폭격하고 공격하고 죽이는 심지어 지네국민도 무차별하게 살해하고 굶기고 인권유린도 가차없이 이뤄지는 적국에 대해 궁금할거도 많고 이적행위라는거에 의문 갖는거 자체가 아예 다른나라 사람이고 북한사람인가봐요 한국사람이면 당연히 분노하는 입장이 되어야 정상 아닌가요 직접경험하지않은 사람도 같은 교육받고 자라도 이렇게 다를수잇구나

NamGiKim 2021-04-26 19:28   좋아요 0 | URL
정확히 얘기하자면 북한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폭격한 적 없어요.(한국전쟁 초기에 전투기 기총소사를 빼면) 정확히는 연평도 포격이 있었죠. 서울 불바다와 같은 호전적인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그건 하나의 미국과의 대립에서 내부결속을 위한 움직임일 뿐이고요. 긴장속에서 양측 다 여러 사건이 있었는데, 단순히 북한의 사례밀 예를 드는건 한반도 문제에서 지극히 한 측면만 본 것이라 봅니다. 실제로 미국이 북한을 타겟으로 핵폭격 훈련등을 대놓고 진행했고, 그 북한의 경제문제도 따지고 보면 미국의 살인적인 경제제재 때문인데 그것을 북한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지엽적입니다.

아니 근데 책 출판이 뭐 어때서요. 히틀러같은 파시스트적 반인륜범죄자의 자서전은 출간이 되는데 김일성은 왜 안되는지....

북네im 2021-04-27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 유럽에서는 공개적으로 나치독일 표현물을 패용하거나 표현하면 처벌하는 법이 있는데 이것도 악법이냐 일제보다 넘사벽으로 동족을 죽여댄 악마집단에게 그렇게 좋으면 가서 살아라 뭐 여기도 공산화통일되면 공개총살 될 새끼가

NamGiKim 2021-04-27 23:00   좋아요 0 | URL
내가 당신같은 수꼴이라면 오히려 문화전쟁의 승리로 얘기했을거다. 북한은 이승만 저작 출판 못하는데 자유주의 한국은 세기와 더불어 출판 하잖아. 이런식으로 말이다. 이 정도의 융통성도 사상의 다양성도 없는 당신들은 진짜 자유주의하는건지 참. 남이 뭘 출판하든 무슨상관.ㅉㅉ
 


1950625일 새벽 440,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마오는 전쟁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6주 전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일성이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으로 와서, 모스크바가 한반도를 통일하기 위한, 군사 공격을 승인했다고 말했던 것이다. 항상 책략이 비상했던 스탈린은 북한의 군사 작전에 한 가지 전제를 달았다. 먼저 마오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이렇게 다짐했다. “만일 당신이 혼쭐이 나더라도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고.” 이는 북한이 난관에 봉착할 경우 구원해줄 사람은 바로 마오쩌둥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스탈린의 이 말을 중국에 알리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전혀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미국의 대응을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당시 중국 정부는 타이완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이야기를 의심한 마오는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내 북한의 공격 개시를 정말로 승인했는지 확인했다. 스탈린은 마오에게 사실을 확인해주면서도 마오가 최종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점을 암시했다. 스탈린의 답신은 다음과 같았다. 최종 결정은 중국과 조선의 동지들이 함께내려야 함이 마땅하다. 만일 중국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결정은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마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과거 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10만 명이 중극 병사와 함께 일본군을 상대로 싸웠다. 그런데 어떻게 김일성이 자신의 땅을 해방하겠다고 하는 것을 말릴 수 있겠는가? 북한은 중국의 동의를 받아냈다.

 

출처 : 마오쩌둥 2 p.137~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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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의 만주는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이었다. 1931 9 18일 일본이 시작한 만주사변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만주에 들어왔고, 1932년이 되었을 당시 일본은 만주 전역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1920년대부터 만주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했던 중국 공산당은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적극 항전을 주장했다그리고 여기에는 조선인 출신들도 결코 적진 않았다이들의 저항이 결코 작지 않았기에 일본군은 1932년 간도에서 대유격전을 시작했었고일본군의 무자비한 학살이 벌어졌었다.

(민생단 사건 당시 민생단 관련 문서를 불태워 없애는 김일성, 북한에서 만든 상상화인 것 같다.)

 

일단 북한 측 자료에 따르면 이 기간에 일본군에 의해 죽은 이들은 대다수가 농민이었고대략 2만 5,000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이 수치는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분명한건 일본군에 의한 무자비한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만주에서의 이러한 경험은 이후 북한에서 <피바다>라는 가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간도에서 대유격전을 전개했던 일본군은 당시 만주에서 창설한 친일단체인 민생단을 이용했었다민생단은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조선인을 앞세워 만든 친일단체였다한마디로 일제의 어용단체였던 것이다.

 

1932년 10월 공산 유격대에 있던 송영감이라는 자가 민생단의 일원인 것이 밝혀졌다간첩행위가 들통나 유격대로부터 심문을 받게 된 그는 일본이 부여했던 임무까지 다 털어놓았다이에 따라 동만특위 서기 동장잉은 즉시 송영감 사건의 전말을 옌지·허룽·왕청·훈춘 등 젠다오 4현에 알리고 민생단 색출을 지시했다이것이 바로 민생단 사건의 시작이었다이에 따라 젠다오 전역에는 반민생단투쟁이라는 광풍이 불어 닥쳤다수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희생자가 되었다.

(민생단 사건 당시 중국 공산당 지부의 명령)

 

반민생단투쟁이 가속화되면서 숙청의 범위는 유격대 근거지 내의 일반 조선인들도 확대되었다민생단으로 지목되는 이유는 다양했다그 중에는 너무 터무니 없는 것들도 많았다심지어 일본군이 공산당 유격대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민생단 숙청 사업은 멈추지 않았다일제의 토벌과 동만특위의 민생단 학살로 근거지의 군중 수는 1933년 2만여 명에서 1934년 봄에는 4,000명에서 5,000명 수준으로 급갑하기에 이르렀다반민생단투쟁 당시 중국 공산당에 의해 감옥에 갔었던 한 조선인 유격대 지휘관이 있었다그가 바로 북한의 김일성이다.

 

1912년에 태어난 김일성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던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20살의 나이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던 김일성은 10대 시절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탐독했었던 열혈 사회주의 청년이기도 했었다만주사변 이후 만주에 있던 중국공산당은 구국군으로서 항전했는데당시 조선인 당원들도 거기서 활동했다. 1932년 봄 김일성은 안투(安图)에서 구국군 사령부대에 속하는 별동대로서의 조선인 무장대를 조직했다이것이 김일성이 최초로 조직한 항일 유격대였다.

(동북항일연군, 1936년 당시 찍은 동북항일연군 사진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중국인과 조선인을 민생단 사건 이후 1935년 코민테른 지령에 따라 연합시켰다는 사실이다.)

 

1933년 2월은 김일성은 왕칭(왕청)현의 유격근거지 마춘으로 나아가 부대와 함께 이른바 왕칭유격대에 합류했는데그는 여기서 왕칭유격대대의 정치위원이 되었다여기에는 김일성이 중국인 중학교에 다닌 경력이 힘을 발휘했던 것도 있었던 것 같고실제로도 그러했다그가 왕칭유격대의 정치위원으로 발탁된 것은 1933년 6월이었다또한 3개월 뒤 김일성은 둥닝 전투(둥닝현성 전투라고도 불림)에서 구국군의 스중헝과 스중헝의 부대를 구출하는 전공을 만들었다그 이후 김일성은 중국 최고의 지도자들의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김일성 또한 반민생단투쟁의 광풍을 피해가지는 못했다김일성 또한 민생단원으로 몰려 정치위원직에서 해임되고 투옥되었었다물론 감옥생활은 길지 않았고단기간에 풀려날 수 있었다김일성이 단기간에 풀려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구국군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었다따라서 반민생단투쟁 과정에서 김일성은 억울한 숙청의 희생자가 되지 않았다거기다 사령관 스중헝은 김일성 같은 위대한 인물이 일본의 주구일 리가 없다고 단언했고김일성이 유죄선고를 받으면 자신의 유격대를 이끌고 중국 공산당을 떠나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둥닝전투에서 스중헝을 구출해줬던 김일성은 당연하게도 살아남았고박탈당했던 정치위원직을 회복했다.

 

반민생단투쟁사건으로 조선인 431명이 밀정 혐의를 받고 억울하게 처형됐다반민생단투쟁으로 동만주 한인들의 유격투쟁은 크게 위축되었고그런 가운데 남만주에서는 1933년 기존의 유격대들을 모아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가 건립되었다이 부대의 규모는 최소 300명 정도였고사장은 중국인 양정우참모장은 조선인인 이홍광이었으며부대의 1/3은 조선인들이었다또 동만주에서도 1934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가 성립되었으며사장은 조선인인 주진이 맡았으며병력의 2/3는 조선인이었다또한 북만주의 밀산에서도 1934년 밀산유격대와 중국의용군이 통합되어 동북인민혁명군 제4이 편성되었다.

 

1934년 6월 김일성은 동만의 유격대를 통합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저우바오중의 수녕반일동맹군 그리고 구국군과 함께 나자구 전투에 참가할 때 지휘부의 일원으로 복귀했으며그해 9월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3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그리고 이 시기는 그가 민생단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게 된 시점이었다이후 김일성은 1935년 2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독립사 제3단으로 편성되어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다그리고 1935년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7차 대회 보고 이후 공산당의 정치노선이 이른바 반파시즘인민전선전술로 바뀌면서 이에 영향을 받았고민생단 사건도 최종적으로 종결되기에 이른다또한 여기서 김일성은 동만주 당의 지도자 웨이정민이 코민테른 중공당 대표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라 개성적이고 역량있는 공산당 간부로서 주목받고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참고문헌

 

한국의 레지스탕스조한성생각정원, 2013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와다 하루끼남기정(), 창비, 2014

 

한국독립운동사박찬승역사비평사, 2014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브루스 커밍스조행복(), 현실문화,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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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때 중소논쟁이 격렬해지고 있었다. 북한은 처음에는 중국 측으로 기울었다. 1962년 10월의 중인(중국과 인도)분쟁에서는 네루정부를 ‘침략자’로 비난했다. 소련이 쿠바에 핵무기를 배치하려 했다가 이를 알게 된 미국이 최후통첩을 던졌던 쿠바 미사일 위기 때에는 북한은 흐루쇼프의 미사일 철거 결정에 불만을 표시했다. 1962년 12월 북한은 전인민의 무장화, 전국토의 요새화, 전군대의 현대화, 전군인의 간부화 등 4대군사노선을 채택했다.


1963년 6월 최용건은 베이징을 방문하여 류샤오치(유소기)와 함께 사회주의 국가의 외교정책을 평화공존정책에 가둬놓으려는 소련의 처사에 대해 비난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7월 25일에는 미영소 공동으로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에 조인했는데 북한은 중국과 함께 이에 반대했다. 가장 공공연한 소련 비판은 가을에 나왔다. 김석형 등 3인의 역사가가 소련 과학아카데미판 『세계사』의 조선사 기술에 대해 비난하는 소책자를 제작 발표한 것이다.


여기에는 ‘맑스-레닌주의 사학의 기본적 요구에 배치되는 중대한 오류’ ‘조선사에 대한 무지와 편견으로부터 오는 왜곡, 위조와 날조’ 등의 표현이 실렸다. 1964년이 되자 북한은 더욱 공공연히 소련을 비난했다. 『로동신문』의 1월 27일자 사설은 ‘현대 수정주의자’와 ‘모종의 사람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인민에게 반제투쟁을 그만두게 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6월에 평양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 경제 세미나는 소련을 비난하는 장이 되었고, 자력갱생의 자주경제 건설과 평등호혜, 주권존중의 경제협력 등을 주창하는 평양선언이 채택되었다. 7월 27일자 『로동신문』은 일본공산당의 내부분열을 기도하는 소련 당의 행위가 ‘대외배외주의’에서 나오는 것이라 비난했다.


그러나 소련과 대립함으로써 소련으로부터의 원조가 삭감 되었고 그 때문에 1961년부터 개시된 7개년 계획 수행이 난항을 겪었다. 1964년에 흐루쇼프를 대신해서 등장한 브레즈네프 정권이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자, 북한은 이에 즉각 응했다. 1965년 2월에는 코시긴과 셸레핀을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3월에는 북한 대표단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석유를 제공받기 위한 교섭을 벌였다.


출처: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p.15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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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비신서 114
와다 하루끼 / 창비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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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우리에게 있어서 이 이름을 공개적으로 꺼내는 건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6.25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과 북한 괴뢰 도당은 나쁜 놈”이라는 식으로 북조선과 김일성에 대해 가르쳐 왔던 우리 사회는 오랜 기간 동안 북조선과 김일성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았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시절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라는 인물에 관해 그저 악마화된 이미지만 부각했던 우리 사회는 일제시기 그가 만주에서 전개했던 항일무장투쟁을 인정하지 않았었고, 군사정권 시기 어용학자들은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은 북한 괴뢰 정권의 수괴 김일성이 아니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김일성 가짜설은 대중들에게 공공연하게 받아들여졌고, 이런 궤변은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탄생한 수구 세력인 뉴라이트가 이어받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뉴라이트와 수구 세력들의 주장과는 달리 북조선의 김일성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그 김일성이 맞다. 김일성 가짜설은 1945년 10월 그가 평양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 대회에서 모습을 비추면서 떠돌게 된 얘기였다. 당시 민중들은 1937년 보천보 전투를 전개했던 김일성의 얼굴을 알지 못했었기 때문에 생겼던 해프닝이었다. 그 과정에서 해방 후 우익들이 이를 이용 또는 악용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 부장을 지냈던 김형욱이 자신의 저서에서 밝혔듯이,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김일성은 북조선의 김일성이 맞았다. 1980년대부터 남한으로 탈북한 북측의 고위급 인사들도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북조선의 지도자 김일성은 일제시기 무장투쟁을 했던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였다. 그렇다면 왜 뉴라이트와 수구세력들은 김일성의 항일 경력을 부인하거나 축소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는 김일성의 항일 경력을 보면 알 수 있다. 1912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김일성은 1920년대 중후반부터 반일 활동을 했었다.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블라디미르 레닌의 저서 제국주의론을 읽었던 그는 만주로 갔고,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 일본군대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1932년에는 조선인 무장대를 조직했었다. 김동한을 비롯한 친일변절자들이 설립한 민생단 공작으로 인하여, 숙청의 피바람이 불 때 살아남은 김일성은 1933년 둥닌 전투에서 중국인 지휘관인 스중헝을 구하기도 했었다. 193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일성은 무송현성 전투와 대덕수 전투, 소덕수 전투 그리고 이도강 전투 등을 치르는 등 전투를 계속하면서 장백산지구에 근거지를 형성했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중일전쟁을 일으키기 1달 전인 1937년 6월 김일성은 만주 국경지대에 있는 식민지 조선의 보천보에 잠입하여 진공작전을 개시했었다. 그 과정에서 최소 14명 이상의 일본군 순사와 군인이 죽고 부상당했다. 보천보 전투 이후 김일성 휘하의 부대는 간삼봉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중일전쟁이 격해지면서 일제는 1938년부터 매우 조직적으로 만주에 있는 유격대를 진압하기 시작했고, 김일성 휘하의 부대들은 이른바 100일에 걸친 ‘고난의 행군’을 해야했다. 1939년 10월 일본의 관동군은 또 다른 토벌작전을 개시했는데, 1940년 3월 김일성 휘하의 부대는 홍기하에서 추격해오던 마에다 부대 120명을 매복공격하여 섬멸했다. 이후 김일성과 그의 부대는 만주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넘어갔고, 1942년 8월에는 소련의 붉은 군대 휘하의 제88특별여단에 배속되게 된다. 1940년 10월 소련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김일성이 속해있던 만주의 독립군들은 1942년까지 일제에 맞서 무장투쟁을 했었다. 비록 1945년 8월 소련군이 개시한 만주 진공 작전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김일성을 포함한 북조선의 만주 빨치산파 지도부들은 193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초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었고, 소련에서 대일전을 준비했었다.

 

이렇듯 김일성은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립운동을 해왔다. 따라서 반공주의에 심취한 수구 세력들에게는 이러한 김일성의 항일 경력이 당연히 부담스러울 테고, 국민들에게 숨기고 싶었을 테며, 이를 왜곡하거나 축소하고 싶었을 것이다. 일본의 양심적인 역사학자 와다 하루끼는 이 책을 통해서 수구세력들이 왜곡해오거나, 숨기고 싶어했던 김일성 항일투쟁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부분이야말로 와다 하루끼가 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와다 하루끼가 쓴 이 책을 읽다보면, 항일무장투쟁 당시 군사 지도자 김일성의 지도력이 잘 발휘되는 모습들이 무장투쟁에 같이 참여했던 후세대들의 증언을 통해서 드러난다. 북조선의 지도자 김일성 또한 자신이 지휘하던 병력을 잘 통솔했다. 그랬기에 보천보 전투를 통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질 수 있었고, 일본군의 끊임없는 추격을 피해 ‘고난의 행군’을 이겨낼 수 있었으며, 추격해오던 관동군 측 마에다 부대를 홍기하에서 전멸시킬 수 있었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1930년대 중반 김일성은 장백산에 근거지를 형성했었다. 여기서 말한 장백산은 우리가 아는 백두산이다. 즉 김일성은 1930년대 중반에 백두산을 근거지로 항일투쟁을 했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해봣을 때, 현재 북측에서 백두산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에선 김일성과 만주 빨치산파들이 1948년 북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뒤, 이후 북조선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나온다. 만주 빨치산파 대다수는 북조선에서 주요요직을 차지했고, 북조선 사회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북조선에서 주요 요직을 차지하게 된 인사들의 인적구성을 보면 대다수가 항일운동을 했다. 1949년 조선 인민군 창설 1주년에 수여된 48명의 군 간부 서훈을 보면 일본사관학교를 나온 자가 한 명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조선 인민군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와다 하루끼가 쓴 이 책은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난 지 1년 뒤인 1992년에 출간되었다. 김일성이 사망하기 2년 전에 출판한 이 책을 읽으며 필자는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을 다시 한번 공부할 수 있었고, 그 또한 항일 투사로서의 경력을 당연히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산 김원봉 선생마저 빨갱이로 모는 우리 사회에서 지금 당장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인정하는 것은 절차 및 조건이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지만, 언젠가는 꼭 해야 할 작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와다 하루끼나 브루스 커밍스 같은 양심적인 역사학자들이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튼 정말 좋은 책을 읽었다.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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