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래로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의 위기가 극단적으로 치달은 적이 있었다바로 1968년의 한반도 위기가 그러했다. 1953 7 27일 휴전협정이 발효된 이후에도 남북한의 긴장관계는 한반도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해왔다아이러니 하게도 한국전쟁은 남북한의 지도자의 정치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렀다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입지가 예전보다 더 강해졌고남한에서는 이승만이 그러했다그러던 1960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 정부가 들어섰지만, 1961 5 16일 박정희 중심의 군부 쿠데타로 제3공화국이 탄생했다.


이와 더불어 북한의 김일성은 남로당과 연안파 그리고 소련파 사이에서의 권력투쟁에서 승리를 얻음과 동시에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나라를 재건하는 사업에 착수했다소위 전후복구와 천리마 운동은 북한을 빠르게 발전시켰다북한의 경제는 빠르게 발전했다당시 한국은 박정희 정부가 산업화를 가동하기 전까지 부정부패와 정치적 혼란 그리고 빈곤이 도사리고 있었지만이와 대조적으로 북한의 체제는 안정적이었다. 1960년 기준으로 북한의 세계 경제력 규모가 49위였던 반면 남한의 경제규모는 101위였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얼마나 현저했는지 알 수 있다사실 남한이 북한을 경제적으로 앞지른 것은 1980년대 중후반에 가서야 있던 일이었다.

(1968년 청와대 기습 공격 사건)

 

1960년대 당시 북한은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등 사회주의 체제가 갖춘 기본적인 복지체계가 확고히 잡혀 있었으며적어도 이웃나라였던 사회주의 중국보다 더 경제사정이 좋았다이후 칠레의 대통령이 되는 살바도르 아옌데는 1960년대 당시 북한을 방문했었는데북한의 무상의료 체제와 무상교육 체제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놀랍게도 당시 칠레의 실질적 소득 수준은 북한의 몇 배에 달하는 수준이었다즉 이러한 점에서 보았을 때당시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가 얼만큼 발전했는지 알 수 있다이런 사정이었기에 실제로 북한은 냉전이라는 흐름에서 제3세계나 사회주의 진영의 투쟁을 돕고자 했다당시 북한이 쿠바베트남이집트인도네시아 등을 도왔던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그러던 1968년 한반도에서는 놀라운 일이 터졌다바로 청와대 기습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김신조를 포함하여 31명으로 편성된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 부대가 청와대 기습을 목표로 휴전선을 넘어 수도 서울에 침투한 것이었다이들이 공격 목표로 삼은 장소는 청와대와 주한 미대사관육군본부 등이었다이들의 침투는 결국 들통이 나서 김신조 1명을 생포하고 29명을 사살했다나머지 1명은 북한으로 도망친 걸로 추정된다생포된 김신조는 공개 인터뷰에서 자신의 목적이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하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힌 푸에블로호 선원들)

 

청와대 기습 사건이 있은 지 2일 뒤인 1월 23일 북한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북한 영해에서 해군기지항만시설해안가 지형 등을 정탐하던 미 해군 정찰함 USS 푸에블로(USS Pueblo AGER-2)호가 해상 순찰 중이던 인민군 해군에게 나포된 것이었다당시 배를 포위한 인민군들은 푸에블로호에 사격을 가해 배에 탑승 중이던 미군 수 명을 사살하고 선언 80여 명을 포로로 붙잡았다또한 배에 있던 각종 무기와 탄약최신예 정탐장비(전파탐지기도청장치암호해독 장치 등)를 노획하기도 했다이렇게 되면서 미국의 존슨 행정부도 한반도 문제로 발칵 뒤집히게 됐다.

 

청와대 기습 사건과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으로 한반도는 다시 전쟁 위기가 고조됐다이 사건 이후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반공관변집회가 연이어 일어났고곳곳에 타도하자 김일성!”, “때려잡자 김일성!”등과 같은 구호가 걸렸었다그리고 미국의 존슨 정부는 핵추진항모 USS 엔터프라이즈 호 등 함선 4척으로 구성된 기동부대를 원산만 인근 해역에 급파해 해상 무력시위를 벌였으며미국 본토에선 해군과 공군 예비역 1만 4,600여 명에게 소집령을 내리고 전투기 372대에 출동 대비태세를 명령했으며오산 주한미군 공군기지엔 전략폭격기인 B-52 2대와 F-105 전투기 수십 대를 배치했다그리고 남한의 국군 병력도 비상동원령이 내려졌다남한에서는 이 시점으로 주민등록증 발급교내 교련수업 필수화 등 실시하게 됐다.

(현재 평양 대동강에 있는 미국의 정탐선 푸에블로호)

 

이에 따라 북한에서도 맞대응에 나섰다. 1968년 2월 8일 김일성은 보복에는 보복으로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를 강조하면서 미국과 한국의 침략에 결사항전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이에 따라 북한에서도 전국적으로 전투준비태세를 갖추었으며인민군과 로농적위대는 물론 일반민중들도 전투준비태세를 갖췄었다이처럼 한반도의 상황은 당장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무리가 아닌 상황이었다.

(김일성과 호치민)

 

다행히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당시 사회주의의 한축이던 중국과 소련은 갈등을 보이고 있었고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특히나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 전역에서 감행한 구정 공세(Tet Offensive)로 미국 내 베트남전 반전 여론은 급상승했다이에 따라 미국은 1968년 12월 판문점에서 푸에블로호의 영해 침범 사실과 정탐행위를 인정했고북한은 억류했던 80명의 선원들을 전부 석방했다. 1968년 당시 북한이 청와대를 기습하여 박정희를 죽이려 했던 사건에 미국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푸에블로호 사건에는 격렬히 반응했다여기서 박정희가 미국에게 배신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이것은 1970년대 박정희가 독자노선을 생각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와 응우옌반티에우)

 

반면 북한의 청와대 기습 공격 사건은 국제연대라는 관점에서도 해석이 가능하다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은 미국을 따라 친미정권인 남베트남에 지상병력을 파병했다그에 반해 국제주의 노선을 천명했던 북한은 북베트남에 공군 조종사를 보냈다즉 북한은 당시 호치민의 북베트남과 연대를 표명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북한에서 청와대 기습 공격을 감행할 때베트남에서는 북베트남 정규군이 미해병대 기지가 있는 케산을 포위 공격했다즉 1968년 1월 21일에 서울 인근 지역과 남베트남의 케산지역에서는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이런 사실을 비추어 양측의 국제연대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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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북한 정권은 박헌영이 경성콤그룹 명단을 일제에 제공해 모두 체포하게 만든 대가로 자기만 살아남아 광주로 달아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성콤그룹이 붕괴한 것은 1년에 걸친 끊임없는 체포의 결과였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었다. 일제하 국내의 공산주의 조직들이 끝내는 모두 대규모 체포로 와해되고 마는 것은 어느 한 사람의 밀고가 아니라 일경의 집요한 추적 때문이었다.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 재건의 최고 책임을 지고 들어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활동한 박헌영이 일제의 간첩으로 돌변해 산하 조직원 명단을 몽땅 넘겨주었다는 비방은 지나치게 악의적이다.

 

더구나 밀고의 대가라는 것이 광주에 내려가 3년 가까이 방직공장에서 인분을 져 나르고 벽돌공장에서 벽돌을 찍는 일이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 당시 전향자들은 반공 강연이나 학도병 모집 강연을 다니고 있었고, 그 대가로 편안히 살 수가 있었다. 가장 유명한 공산주의자의 한명인 박헌영이 전향했다면 다른 운동가들을 좌절시킬 수 있는 최고의 선전물로 이용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또 다른 주장대로라면 이 시기 박헌영은 이미 선교사 언더우드를 통해 미국의 간첩이 되어 있을 때였다. 아무런 금전적 대가도 명예도 없이 순수한 숭미 사상으로 미국을 위해 봉사했다는 그가 어느 순간 미국과 전쟁 중이던 일본의 간첩으로 돌변해 동료들을 몽땅 갖다 바쳤다는 주장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억지라고 볼 수밖에 없다.

 

출처: 박헌영 평전 p.21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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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간의 냉전시기 대규모의 열전이었던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북한과 베트남이 미국에 맞서 전쟁을 치른 사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 것이다그러나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를 단순히 자유민주주의라는 국한된 개념으로만 접근하는 한국사회에서 당시 북한과 베트남의 국제연대는 객관적인 평가를 하기 쉽지 않은 구조다그러나 역사적인 사실관계를 따지고 보면 이는 상당히 일리가 있으며반식민지투쟁이라는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전략은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막고 친미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고다른 한편 베트남에서 식민지 전쟁을 치르고 있던 프랑스를 지원하여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것이었다.

(호치민과 김일성, 1950년대 호치민과 김일성은 직접만나 반제국주의 투쟁의 기치를 다졌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이 개입한 이 전쟁(한국전쟁중국-대만 분쟁1차 인도차이나 전쟁)들은 엄밀히 따지자면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주의적 모순에서 비롯된 전쟁이었으며미국의 적대세력들은 엄밀히 따지자면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것이었다이러한 사실은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이라는 이름으로 남한의 이승만 정부를 지원했던 미국과 프랑스가 베트남에서는 호치민의 독립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하기 위한 식민지 전쟁을 치렀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한국전쟁이 한참이던 1951년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은 국제여성동맹 조직을 통해 북에 조사단을 파견했었다또한 북한은 프랑스 식민주의에 맞선 호치민의 투쟁에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연대를 표명했으며베트남의 방북조사단 활동에 감사를 보냈었다. 1952년에는 베트남은 조선전쟁(한국전쟁기념대회를 열어 북의 입장을 지지했으며한반도에서의 미제국주의 군대 철수를 주장했었다또한 호치민은 1950년대 당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한국전쟁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었다.

 

조선반도에서의 경험이 이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지요미국과 미국을 추종하는 40개국이 모두 힘을 합쳤지만정작 그들이 침략한 국가에 눌려 패전을 면치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중략한마디로 반동 제국주의 진영이 패배하고 평화와 민주주의 진영이 기필코 승리할 것입니다베트남은 민주 진영에 속해 있으며현재 미국이 이끄는 반민주진영에 대항하는 반제국주의의 요새입니다.”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 평전에서도 이러한 맥락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쇼트에 따르면 중국의 마오쩌둥은 동료들에게 만약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승리하면 침략 욕구가 더 커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으며어쩌면 미 공군이 만주와 중국의 동부 해안 도시를 폭격할 수도 있고타이완의 국민당 군대가 중국 본토로 상륙작전을 시행할 가능성도 있으며심지어 호찌민과 싸우고 있는 프랑스군이 미군과 합동으로 중국 남부와 베트남 국경 지역에서 침공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라고 책에서 언급했다마오쩌둥의 이러한 우려는 당시 국제적 정세에서 중국이 만주 국경일대에서는 북한을 돕고 운남성이 있는 남부에서는 베트민을 도왔다는 사실에서 전혀 틀리지 않은 우려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에 파병됐던 북한의 공군 조종사들)

 

1954년 호치민의 혁명군대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 최정예 부대 11,000명을 포로로 붙잡으면서 100년간의 식민통치를 종결시키는 위대한 혁명사적 업적을 남겼다그러나 이 위대한 승리 이후 제국주의적 패권과 망상에 휩싸여 있던 미국이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단시키며남베트남에 응오딘지엠이라는 자신들의 꼭두각시를 세웠다이것을 결국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우리가 흔히 아는 베트남 전쟁으로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이에 따라 북한은 북베트남의 호치민 정부 편에 섰으며, 1957년 7월에는 호치민 주석이 북한의 수도 평양을 방문했고, 1958년 11월에는 김일성 주석이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방문하며 양국의 회담을 가졌었다그리고 이런 친선관계를 통해 두 국가는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과제를 통해 인민의 단결과 우애를 강조했다고 할 수 있었다.

 

1964년 미국의 통킹만 사건 공작으로 베트남을 침략하자 북한은 반미 반제국주의 투쟁에 지지와 연대를 보냈으며소수의 공군병력과 군수물자를 보냈다북한은 베트남에 무기 10만 정과 군복 100만 벌 등의 군수물자를 호치민 정부에게 제공했고, 1973년까지 대략 4,180만 루블의 경제원조까지 했다그리고 대략 200명 정도의 병력을 보냈는데이 중 87명은 공군 조종사였다고 한다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북한 조종사들 중 14명이 전사했고, 26대의 미군 전투기를 격추시켰다당시 전사한 북한 공군 조종사의 묘지는 현재 삼성과 같은 한국 대기업공장들이 들어가 있는 박장성에 있다.

(베트남 박장성에 있는 북한 공군 조종사 묘비, 이는 현재도 베트남에 있으며 2019년 북미 정상회담때 국내에서도 여러 채널이나 뉴스를 통해 보도된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전쟁에서의 북한과 베트남의 국제연대에 대해 이야기 했다냉전이라는 흐름에서 반식민지 투쟁과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양국이 연대와 지지를 표명했다는 사실에서이들의 투쟁은 식민지 해방 투쟁사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이런 점에서 북한의 북베트남 지원은 미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맞선 국제연대의 일환이었으며역사적 맥락에서 보았을 때분명히 부정할 수 없는 일련의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호치민 평전윌리엄J.듀이커정영목(), 푸른숲, 2003

 

식민주의를 타도하라호치민윌든벨로(옮김), 배기현(서문), 프레시안북, 2009

 

마오쩌둥 2필립 쇼트양현수(), 교양인, 2019

 

냉전의 마녀들김태우창비, 202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현대사 1김동원 안광획 이정훈(공저), 4.27시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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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이후 이른바 미국과 소련이 경쟁하는 이른바 냉전(Cold War)가 시작됐다. 냉전은 19463월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의 철의장막(Iron Curtain) 발언과 더불어, 19473월 미국의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포하면서 시작됐다. 미국의 트루먼 독트린 선언은 사실상 미국의 신제국주의의 길로 가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행위였다.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해방 이후 한반도 이남에서는 친일세력과 결탁했던 친미제국주의자 이승만에게 천재일우의 기회로 작용했고, 여운형 암살과 김구의 남북협상 이후 한반도 남부에 자본주의적인 분단정부가 수립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면서 미국은 이른바 그리스 내전에 군사고문단을 투입하는 형식으로 개입하여 그리스의 좌익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학살했다. 또한 1948년에 일어난 제주 4.3 항쟁에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신제국주의 앞잡이들을 이용하여, 무수히 많은 민간인을 도륙했다. 이들의 학살극은 말 그대로 광란의 학살극이었으며,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물자 지원을 받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또한 내부의 부정부패와 더불어 온갖 학살극을 국공내전 시기에 자행했다. 이처럼 트루먼의 신제국주의 정책은 친제국주의적 세력을 지원함과 동시에, 그 지역에서 무차별 광란의 학살극을 동반했다.

 

1950625일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북한이 침략했다는 이유를 들어, UN군의 형태로 한국전쟁에 아주 신속히 개입했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켰고, 1950101일에는 한국군과 같이 북진하여, 북한지역 대다수를 접수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하나의 변수가 생겼는데, 그것이 바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이었다.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으로 한국전쟁은 다시 38선을 중심으로 원점이 됐고, 1951년 여름부터는 휴전회담이 진행되게 됐다.

 

한국전쟁에 대해 단순히 자유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지켰다는 식으로만 배우는 우리사회가 항상 외면하거나 언급을 꺼리려 하는 역사적 진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시 사회주의 국가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국(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베트남(베트남민주공화국)은 전쟁을 통해 사회주의적인 국제연대를 실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946년 장제스의 선제공격으로 일어난 제2차 국공내전은 1949년 중국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면서 종결됐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 과정에서 유엔군 총 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만주지역의 핵공격 계획과 더불어 대만으로 피신한 장제스의 군대를 중국 본토에 상륙시키고자 했다.

 

당시 북한에 지원군을 파병한 마오쩌둥은 1950년 스탈린과 더불어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을 공식국가로 승인했으며, 수교와 더불어 중월국경지역을 중심으로 베트민에게 물자를 지원했다. 반면 한국전쟁에 신속히 참전했던 미국은 1950년 시점부터 식민주의 전쟁을 벌이고 있던 프랑스를 위해 소수의 군사고문단을 사이공에 파병했으며, 프랑스의 전쟁비용을 대신 지불해줬다. 그 결과 1951년 보 응우옌 잡 장군이 홍강 삼각주를 목표로 프랑스군에게 총공세를 가했을 때, 미국이 지원한 네이팜 폭탄이 베트민군을 향해 투하됐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보았을 때, 1949년부터 1954년까지 중국과 북한 그리고 베트남에서 치러진 전쟁은 말 그대로 미제국주의와 그 위시한 제국주의 국가들에 맞선 반제국주의 투쟁이자 반식민주의 투쟁이었다. 거기다 당시 호치민이 치르고 있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식민주의 프랑스를 몰아내기 위한 민족해방전쟁이었으며, 그런 전쟁에서 미국은 제국주의의 본성을 드러내며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에게 무기와 전쟁자금을 지원했다. 거기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프랑스군 일부는 19537월 휴전협정이 성사되고 난 이후 베트남으로 가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히기 까지 했다. 또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는 장제스의 반동적이고 친제국주의적인 군대를 한반도 전선에 투입하여 중국 본토를 자본주의화 시키려는 야심찬 계획까지 진행했다. 그리고 이런 계획은 미제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하는 것과 비슷한 시점에 진행됐다.

 

지금까지 국공내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의 미국의 정책을 언급했다. 이러한 사실을 들어 생각해 보았을 때, 당시 미국이 치르고 있던 전쟁은 식민주의적이었으며 신제국주의적인 전쟁이었다. 특히나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프랑스군이 식민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향했다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패하여 포로로 잡혔다는 점에서 이 세 가지 전쟁의 성격이 어떠한 성격을 가진 전쟁인지 아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당시 사회주의 진영이 치렀던 이 세 가지 전쟁은 반제국주의 반식민지주의적 민족해방투쟁이자 계급해방전쟁이었으며, 미국과 그 위성국들의 전쟁은 말 그대로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이에 따라 당연히 한국전쟁 또한 제2차 국공내전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더불어 민족해방전쟁이라고 국제적인 관점에서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의 해석은 앞으로의 학계가 발전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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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1-07-11 14: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부 수립부터 53년까지 한국은 자본주의 정부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당장 제헌헌법 경제조항만 읽어봐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초기 한국 정부는 국가사회주의와 더 유사점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리고 초기 이승만 정부의 정치 이데올로기였던 일민주의 그리고 그 일민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이범석 양우정 안호상 등 족청계는 기본적으로 반 자본주의적 성향을 보였습니다. 반자본주의 반공산주의 강력한 민족주의 이 세 가지가 족청계 그리고 초기 한국 정부를 특징짓는 중요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적이라고 말하려면 적어도 1953년 이후 헌법을 언급하는 것이 그나마 더 적당할 것입니다. 지나치게 단순화된 비판은 피해야 합니다
자세한 것은 후지이 다케시 <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를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NamGiKim 2021-07-11 14:24   좋아요 2 | URL
족청계.... 김두한류의 청년단....

이 사람들은 정말 연구 대상이긴 합니다. 민우님이 표현했듯이, 하긴 그들의 성향은 파시즘(비스마르크로부터 시작된, 자본주의적 사유재산재 복지 보장)으로 상징되는 성향도 분명 있었죠. 하긴 김두한은 뉴딜도 칭찬하고 히틀러도 칭찬하고, ˝아 우리가 빨갱이 때려잡으려면 무상복쥐 해야지˝라는 소리도 했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이승만이 그런 족청계를 포함하여 숙청했으니. 안호상도 대표적인 예시고.

이 글을 읽어보았다면 알겠지만, 냉전사적 그리고 식민지 해방전쟁적 측면에서 바라본 관점이죠.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이런 책도 있군요. 한번 찾아봐야겠다.

Redman 2021-07-11 17:30   좋아요 1 | URL
정말 권력마귀 이승만...ㅋㅋ 후지이 다케시는 워낙 주목받았던 연구자고 관점도 참신해서 읽어볼만 합니다

아 그리고 글 잘 읽었습니다!
 

1990년대 동구권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는 냉전의 종식을 의미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이래로 미국과 소련의 대립체제였던 냉전은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거나 자본주의적 대안을 받아들이면서 사라졌는데, 이는 현실 사회주의권 중 하나였던 북한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북한은 온갖 자연재해와 UN의 경제제재 그리고 김일성의 사망을 거치면서 경제가 매우 열악해졌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그것이 바로 고난의 행군이다.

 

1990년대 당시 고난의 행군으로 300만 명이 아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 통계 및 연구결과에 따르면 아사자의 수치는 43만 명이라고 한다. 고난의 행군은 김일성 사후 아들 김정일이 북한의 권력을 계승한 이후인 1999년에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 고난의 행군이라는 명칭은 그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명칭으로 북한의 초대 지도자인 김일성이 항일투쟁 과정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항일 유격대를 이끌었던 김일성은 1938년과 1939년 대략 1년간 온갖 역경과 고난을 겪으며 행진을 했는데, 그것이 바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현재 우리가 아는 북한의 김일성은 일본의 만주침략이 시작되던 시점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까지 항일투사의 삶을 걸었던 인물이다. 김일성은 1932년 봄에 자신의 첫 번째 유격대를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고 한다. 서대숙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시기 김일성은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는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수백 명의 한인 빨치산들이 1937년과 1940년 사이에 만주 및 북한에서 있었던 일본군과의 수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바 있다.”라고 서술했다. 또한 역사학자 한홍구도 김일성이 매우 명성이 높은 항일투사였으며, 1930년대 시기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이 국내에서 명성을 떨친 것은 중일전쟁이 시작되던 해인 1937년 이른바 보천보 전투를 감행하면서 부터였다. 물론 보천보 전투 그 자체는 김일성 본인이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 표현했듯이, 전투성과로서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그 어려운 시기에 국내로 진격하여 유격전을 전개한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던 전투였다. 이 소식은 당시 동아일보를 통해 크게 보도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김일성은 항일투사로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194510월 소련군정 사령관 치스차코프의 지원을 받아 평양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김일성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 이유는 전설적인 인물 김일성이 너무나도 젊었기 때문이었다. 즉 이 시점에서만 보더라도 김일성은 분명히 전설적인 항일영웅으로써 명성을 떨쳤던 것이다.

 

1937년 보천보 전투를 치른 이후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은 간삼봉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중일전쟁 개전 이후인 1938년 일본군이 이들에 대한 토벌을 강화하면서 김일성과 그의 항일 유격대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37~38년 동북항일연군은 동만주와 남만주 그리고 북만주 각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당시 동북항일연구의 규모는 1,850명이었는데,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이들 중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일제의 억압과 회유에 못 이겨 전향서를 쓰기도 했다. 이처럼 중일전쟁 개전 초기는 김일성과 항일 유격대에 있어 아주 힘든 시기였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보았을 때, 김일성 휘하의 항일 유격대가 얼마나 열심히 항일투쟁을 했는지 짐작을 해볼 만하다.

 

이와 더불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토벌작전도 날이 갈수록 혹독해졌다. 일제는 집단부락을 건설하여 유격대를 민중들로부터 격리시켰고, 끈질긴 추격 작전으로 유격대원을 고전하게 만들었다. 특히 영하 수십도로 내려가는 겨울이 되면서 투쟁은 더 힘들어졌다. 193812월부터 다음해인 19393월까지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은 일본군의 대규모 동계 토벌작전을 피해 힘겨운 행군을 계속해야 했는데, 이 과정이 바로 고난의 행군인 것이다. 대략 100여 일간 계속된 행군 속에서 김일성 부대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가기도 하는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추격을 피하며 전투를 치렀다. 적잖은 사상자가 속출했지만, 궁극적으로 김일성 부대는 창바이현 북대정자에 이르러 일본군의 추격을 완전히 뿌리쳤다.

 

와다 하루끼가 집필한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에 따르면, 이 고난의 행군에는 다수의 소년대원들도 참가했다고 한다. 즉 김일성의 경호대원 가운데는 소년대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들 소년대원과 김일성 사이에는 매우 굳건한 유대관계가 형성되었다고 전해지며, 부족한 식량을 서로 나눠먹었다는 회상이 많다고 한다. 이때의 경호대원이나 소년대원으로는 10대였던 리을설, 리두익, 김철만, 전문섭, 김익현, 조명선, 오재원, 리종산 그리고 리오송 등이 있다. 이들이 바로 북한 정치에서 만주빨치산파로 남은 사람들이다. 즉 북한 정권 초기 권력의 핵심에 있던 이들은 김일성이 항일투쟁 과정에서 이러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이들이었던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3910월부터 19413월까지 관동군과 만주군 그리고 경찰대로 구성된 75,000명의 병력을 동원한 토벌작전을 수행했는데, 여기에는 김일성의 부대를 토벌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북한의 김일성이 1930년대 만주에서 얼마나 가열차게 항일투쟁을 전개했는지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김일성이 전설적인 항일영웅일 수밖에 없는 역사적 근거가 마련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추격을 피해 김일성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1년 소련으로 넘어가 88특별여단에 배속되었지만, 당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김일성의 항일전력은 있는 그대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다.

 

참고문헌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 일월서각, 1986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와다 하루끼, 이종석(), 창비, 1992

 

한국의 레지스탕스, 조한성, 생각정원, 2013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와다 하루끼, 남기정(), 창비, 2014

 

한국독립운동사, 박찬승, 역사비평사, 2014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현실문화,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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