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가드
마윤제 지음 / 특별한서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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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개들의 왕],[바람을 만드는 사람]의 저자 마윤제의 첫 번째 소설집이다. 여덟 작품의 단편들은 바다가 많이 나오고 묵직한 내용들이다. 우리가 모르고 있던, 혹은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어 했던 내면의 적나라한 감정까지도 낱낱이 들여다보게 만든다.

 

아버지 장례식 날, 서른다섯 해 만에 집을 떠난 형이 나타났다가 난 여전히 네가 부럽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사라졌다. 어느 봄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새엄마와 함께 온 형이었다. 늘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공부하다 식사 시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새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형이 사라졌었다. 어디선가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강물이 마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오래전 내 몸을 휘감은 그 강물이었다. 영원히 잡히지 않을 불빛을 바라보는 형의 눈빛이 강물처럼 깊었다.[()]

 

이따금 제자리가 아닌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이 있었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사서의 단순한 실수였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도서 목록에 없는 책을 발견할 때가 종종 있었다. 바코드가 붙어 있지 않은 책을 그는 유령 책이라고 이름 붙였다. 유령 책은 출생신고서를 받지 못한 것이다. 세상에는 자리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카테고리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떠날 수밖에 없었다.[도서관의 유령들]

 

유지는 엄마를 따라 낯선 도시로 자주 이사를 한다. 어느 해변 마을에서 중년 남자와 진희와 함께 살게 된다. 노트에 가지고 싶은 물건을 적었다. ‘바다가 보이는 넓은 방이었다. 어릴 때부터 수영을 배운 유지는 진희에게 수영을 가르쳐준다. 여름이 끝나 갈 무렵 진희의 죽음을 맞이한다. 유지는 자신이 진희에게 가장 중요한 걸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다를 유영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라이프가드]

 

오래전 한 청년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는 매일 산을 올랐고 최는 엽총을 사서 수렵을 다녔고 박은 바다낚시에 빠져들었다. 권이 농장을 사들여서 멧돼지를 방목했다. 식당을 열었다. 그날 이후 그의 당선을 위해 밤낮으로 쫓아다녔다. 그가 당선되어야만 우리가 원하는 자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화사한 날씨가 우리의 새로운 앞날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어느 봄날에]

 

북쪽 해안에 도착한 여자는 캔을 열었다. 순간 제주 해안 절벽의 바에서 마신 버진 블루 라군칵테일이 떠올랐다. 섬을 돌아다니는 건 뱃길이 끊어지면서 섬에 갇혀버린 여자와 바다가 제 색으로 돌아올 때 들어간다는 남자, 중국집에서 키우는 개들밖에 없었다. 뱃길이 열린다는 소식은 여전히 없었다.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가 스쿠버중에 잃어버린 펜던트를 찾으러 들어간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이 몇 명이 모여서 그사람 아직도 바다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해녀 할머니는 바다를 가리키며 속았어라고 소리를 내질렀다.[버진 블루 라군]

 

사내아이 두 명이 황무지로 들어간 뒤에 실종되었다. 까마귀가 떠난 황무지에 옥수수 싹 서너 개가 얼굴을 내밀더니 옥수수가 열리기 시작했다.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더니 사금파리 조각이 나왔다. 그날 기분 내키는 대로 판다고 하였다. 계속 팠는데도 그것이 나타날 조짐이 없었다. 쇠붙이가 강한 자기에 끌리는 것과 비슷해서 계속 파는 것이다. 황무지에 까마귀 떼가 날아온 것과 옥수수가 황무지를 뒤덮은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건 진실이오. 진실하지 못하면 서로 연결될 수 없소.[옥수수밭의 구덩이]

 

현기는 토피, 셰리, 스파이시, 몰트, 스모키향이 어우러진 조니워커 블루를 향유하는 삶을 향해 폭주기관차처럼 질주했다. 부산에서는 바다를 등지고 치열하게 싸워야 했지만, 제주에서는 욕망의 실타래가 올올이 풀어졌다. 광치기해변의 검은 모래에 누운 현기는 어부가 되어 고기잡이를 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바닷속으로 가라앉으면서도 술의 맛을 떠올린다.[조니워커 블루]

 

죽은 고래의 몸을 파고들어 가던 여자의 하얀 몸이 떠올랐다. 전망 좋은 방, 필요하지 않소? 그 방에선 잠들 수 있습니까? 오로지 무거운 다리를 끌고 힘겹게 한 걸음씩 계단을 올라갔다.[전망 좋은 방]

나는 이 단편이 어둡고 어렵게 읽혔다. 단편을 읽는다는 건 우리 자신의 뒷모습을 훔쳐보는 것과 같다. 우리 삶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누군가의 삶을 진실하고 온전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단편소설을 읽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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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느리게 나이 들 수 있습니다 - 나이가 들어도 몸의 시간은 젊게
정희원 지음 / 더퀘스트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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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서울 아산병원 노년내과 전문의로 가속노화, 피할 수 없지만 늦출 수는 있다고 말한다. 노화의 속도를 정상화해줄 네 가지 기둥과 습관들을 담아 책으로 펴냈다. 가장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우면서 결정적인 것이 4M 건강법이다. 이동성, 건강과 질병, 마음건강, 나에게 중요한 것으로 4가지 분야의 내재역량을 높이는 것이다.

 

인간의 골격계는 노동으로서의 운동을 그만두고 이동성을 기계에 맡긴 결과, 역설적이게도 운동 역시 노동화되었다. 편리하게 이동하기 위해 자동차나 엘리베이터 같은 이동 수단을 이용하면서 탄소발자국을 늘리고서는 모자란 운동량을 채우겠다고 전력을 많이 사용하는 트레드밀을 가동한다.

 

저자는 오랜 경험으로 등산은 전신근육의 기능과 관절의 유연성이 적절하다고 한다. 등산을 제대로 하면 발생하는 부하가 관절 주변의 근육과 결합조직을 강화하는 데 유익한 자극으로 작용한다. 이동성 도메인의 내재역량을 전체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돈과 시간, 노력을 들여 운동을 제대로 배워놓는 것은 매우 수익률이 좋은 투자다.

 

노년층이 6주에 걸쳐 거의 매일 코어운동을 하면 위식도역류, 식욕조절 이상, 우울감, 인지기능, 온몸의 통증도 개선된다. 자세와 체형, 체성분이 눈에 띄게 변화하기 시작하는 데도 3개월이면 충분하다. 90대의 노인도 개선된 사례가 있으니 늦었다는 생각으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1980년대 이전에 태어난 세대가 그 이후에 태어난 세대에 비해 축복을 받은 점이 있다. 청소년기와 성인기에 스마트폰과 태블릿PC가 일상을 장악하기 전까지 근골격계질환은 운동선수나 특정 작업환경에 노출된 질병이었는데 2010년대를 지나면서 전 국민이 경험하는 주요 질병으로 자리 잡았다.

 

마음건강 도메인의 핵심은 인지와 정서다. 노인의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사람의 기능을 이루는 도메인 간의 연결성과 그 파급효과를 생각해보자. 이동성을 강화하면 마음건강을 개선할 수 있고, 마음건강을 개선하면 다시 이동성이나 전반적인 건강상태가 개선된다.

 

젊은 성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마음챙김이 집중력, 작업기억력, 문제해결력을 개선하며 기말고사 같은 심리적 스트레스 상황에서 긍정적 자세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몸의 염증물질을 감소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도 있다. 수면부족은 초강력 가속노화 인자다. 수많은 연구를 통해 충분한 수면이 정상적인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수라고 밝혀졌다.

 

삼독의 악순환은 세 가지 방법으로 제어할 수 있다. 첫째, 고정된 실체로서 자아가 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둘째, 마음챙김을 통해 번뇌, 즉 탐욕과 분노에서 벗어나야 한다. 100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가 건강한 노년의 특징을 욕심 없고 화를 안 내는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마음챙김을 늘 신경 쓰면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셋째, 가속노화 사이클을 구성하는 요소를 삶에서 덜어내야 한다. 삼학을 통해 자아라는 검은 점이 흐릿해지면 그동안 먹고 마시고 싶던 것들, 갖고 싶던 것들, 이루고 싶던 것들, 화나게 하던 것들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의 노화와 질병, 장애는 거대한 욕조에 비유할 수 있다. 세 개의 수도꼭지로 쏟아져 나온 물이 일정한 높이에 도달하면 유의미한 내재역량 부족(노쇠) 현상이 나타나고 독립적인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p198

 

후생유전학적 지형, 생활습관, 환경, 질병, 약 등 모든 후천적 경험을 포함한다. 근거가 불명확한 건강정보를 바탕으로 구매나 행동을 결정하는 수많은 단계마다 주의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인간의 심리적 특성을 이해하고 건강정보 이면에 어떤 기전이 있는지를 공부해야 한다. 항산화효과가 있는 수액을 맞는 것보다 오히려 운동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활성산소를 만들어주면 체내 세포는 이 활성산소를 소모하면서 고장 난 미토콘드리아나 세포 내에 쌓여 있는 노폐물을 제거한다.

 

수십 년 동안 내재역량을 꾸준히 관리하면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보통의 젊은 사람에 비해서 상당히 좋은 4M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마음챙김이 잘된 상태의 건강한 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책이 스스로의 삶을 바라보고 생활을 개선해가면서 4M에 폭넓게 나타나는 즐거운 변화를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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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발명된 신화 - 기독교 세계가 만들고, 시오니즘이 완성한 차별과 배제의 역사
정의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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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주간지 <한겨레21>에서 유대인·이스라엘, 그 발명된 신화들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연재물을 바탕으로 내용을 크게 보강해 출간하게 됐다. 저자는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고 대중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전반적으로 해결하는 작업이 없는 가운데, 소수자 차별과 배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역효과를 낼 위험이 있다는 것이 유대인 문제가 보여준 교훈이다.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라고 밝힌다.

 

유대인은 우수한 능력을 타고난 민족이고 이스라엘은 유대인의 능력과 단결로 꾸려 나가는 우리가 배워야 할 모범국가다. 유대인 추방 신화는 구원을 약속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유대교와 유대인 처지에서 더 중요했던 것은 유배라는 개념이 단순히 고국을 떠나는 데서 더 나아가 유대인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형이상학적 함의를 띠게 됐다는 것이다.

 

유대인=고리대금업이라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은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차별과 배제를 당한 결과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기독교의 반유대교 입장은 중세 유럽의 기독교 세계에서 유대교를 억압받으나 보존해야 할소수자로 제도화했다. 고리대금업이 유대인의 전유물이 된 것은 첫째, 중세에서는 기독교가 이자 수익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해 이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둘째, 유대인 공동체의 진화 과정에서 선택된 측면도 크다는 주장이다. 유대인들은 중세 기독교 세계 초기부터 농업이 아닌 상업, 행정, 금융 등에 종사했다.

 

유덴가세 게토를 둘러싼 담장에 그려진 벽화는 이곳에 사는 주민들이 감옥의 죄수만도 못한 존재임을 말해준다. 벽화에는 암퇘지를 둘러싼 유대인 세 명이 그려져 있다. 벽화와 조각은 당시 유덴가세의 유대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말하는 표지이다. 독일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지옥 같은 빈민촌이라고 탄식했다.

 

독일에서 1차 대전 뒤 반유대주의가 격화한 직접 원인은 두 가지이다. 1차 대전 패전은 전장에서의 패배가 아니라 국내에서의 배신 때문이라는 배후중상설과 전후 좌파 봉기 때 유대인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다. 패전 직후 독일 전역에서 일어난 좌파 봉기에서 유대인이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이 반유대주의를 더욱 격화했다. 반대유주의의 격화는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 고토로 돌아가 유대인 국가를 세우자는 시오니즘을 촉발했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로 귀결됐다. 홀로코스트는 시오니즘 운동을 더욱 자극해 현대 이스라엘 건국으로 이어졌다.

 

독립이 선포되던 18세기 후반 미국의 유대인은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유대인이었다. 금융, 도소매, 백화점, 의류, 가구 등의 산업을 주도했고 직물과 의류도 유대인의 사업이었다. 미국은 유대인에게 새로운 조국이 됐고, 유대인은 미국을 더욱 발전시키는 효소 같은 역할을 했다. 시오니즘이 현대 이스라엘 건국이라는 성공을 거둔 것은 몇 가지 요인에 기인한다. 무엇보다도 큰 원인은 전쟁이다. 전쟁을 야기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이다. 기독교 시오니즘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가 건설되는 것을 지지하는 여론을 영국 등 서방 국가에서 만들어냈다.

 

정동파 유대교 교단에서 시오니즘을 반대했다. 시오니즘을 반대한 최대 세력은 진보적인 사회운동을 펼치는 유대인들이었다. 블랙스톤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한이 실현되면, 기독교도들이 하늘로 승천하는 황홀경이 일어나고, 불신자와 유대인들은 남겨지게 된다고 하였다.

 

네타냐후는 15년간, 이스라엘의 최장수 총리로 재직했다. 그의 집권 기간은 대외적으로 팔레스타인 평화협상의 파탄, 대내적으로 우경화로 요약된다. 이스라엘은 다비드 벤구리온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적 성향의 노동 시오니스트들에 의해 주도됐다. 오슬로평화협정 반대를 내걸어 정치인으로 성장하고 집권한 네타냐후는 이스라엘은 유대인 국가라는 새로운 조건을 내걸고 나왔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로 남고, 팔레스타인은 군대를 보유하지 않고, 난민 귀환의 권리도 포기한다면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홀로코스트를 몰고 온 근대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에 대한 혐오와 질시라는 양가감정에 바탕했다. 희생양은 미국에 사는 평범한 유대인이 될 수도 있다. 유대인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새로운 형태로 더욱 악화될 위기에 처했다. 한국에도 다양한 소수자 차별과 혐오가 존재한다. 저자의 질문처럼 지금 우리저들의 구분이 없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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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 유품정리
가키야 미우 지음, 강성욱 옮김 / 문예춘추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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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 유품정리]의 저자는 소가족과 고령화 사회에서 결혼과 이혼, 여성과 노인 문제, 주택 문제 등 현대사회가 직면한 일상의 문제를 날카로우면서도 섬세한 여성의 시선에서 정면으로 다룬 작품들로 공감을 얻고 있다. 저자의 [후회병동]을 시작으로 여섯 번째로 읽어보게 되었다.

 

주인공 모토코는 시어머니 유품정리를 시작하면서 방대한 양의 물건을 대하며 시어머니를 원망한다. 칠십 대 후반인 시어머니 다키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단지에 살고 있었다. 오십 중반인 며느리는 체력이 쇠퇴하는 걸 느낀다. 외동인 남편은 추억이 담겼다며 못 버리게 하는 갈등까지 빚는다. 십오 년전에 돌아가신 친어머니는 센스 있는 여성이었고 돌아가실 때 반지 하나 남기고 돌아가셔서 버리는 걸 후회하게 만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후유미의 조언대로 유품정리 회사를 부르려니 천만원이나 들어서 두 달 동안 정리를 하기로 한다. 시어머니는 오십 평방미터, 우리 집 반도 안 되는 크기라 정리하는데 그다지 큰일이라고 여기지 않았지만 물건은 우리들 몇 배나 됐다. 쉬는 날만 이곳에 오면 반년은 걸릴테고 집세 팔십만원을 계속 내야 하는 일이 생긴다. 공책에 적으면서 에어컨,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를 제외하고 대충 헤아려도 팔십 개 가까이 된다.

 

옆집은 기초생활수급을 받고 있는 사나에라는 싱글맘이 산다고 시어머니한테 들은 적이 있다. 사나에는 살찐 토끼를 내밀면서 시어머니가 온천여행 갈 때 잠시 맡겨두었다며 집 정리 할때까지만 맡아 준다고 하였다. 친어머니는 꼼꼼하다고 절절히 느낀다. 집 안에 쓸모없는 물건 따윈 하나도 없었다. 위암 선고를 받았을 때 육십 대였는데 수술을 하지 않았다. 예순여덟에 세상을 떠났다. 시어머니는 일흔 여덟이셨고 사람은 누구나 언제 죽을지 모르니 정리를 시작하라는 책도 많이 출판되고 있는데 건강할 때 정리하는 건 상식 아닌가요 혼자 되뇌인다.

 

가재도구는 버릴 수 있지만 추억이 담긴 물건은 남편이 음미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친정 집에서 어머니방은 그대로지만 추억할 수 있는 물건이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자치회 부회장 단노라는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그들에게 시어머니와 얽힌 사연들을 들으면서 불신과 원망이 풀어진다. 모토코는 시어머니가 생전에 그날의 일들을 매일 적은 공책을 발견하게 된다.

 

인생의 남은 시간이 적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기보다 인간은 어차피 언젠가 죽는데 우울해 하는 일이 바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p91

 

살찐 토끼를 어떻게 데려가 키우나 고민하던 중 시어머니 토끼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토끼 주인인 아이의 엄마가 싫어해서 맡아서 기르면서 아이가 보고 싶을 때마다 시어머니 집으로 오라고 했단다. 시어머니는 구두쇠면서 돈을 쓸 줄 아는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친어머니는 항상 자신을 자제하고 타인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모토코 자신도 남에게 부탁한 적이 없었고 누가 사는지 모르는 도시 생활이 성격에 맞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친어머니 성격을 닮았다고 여긴다.

 

모토코 부부는 옆집 아이를 나몰라 무시하고 넘기면서도 웬지 찜찜했다. 유품정리를 하면서 토끼를 데려오게 되었다. 맞벌이 부부의 아들인 아오는 매일 복도에서 부모의 귀가만 기다린다. 어느 날 아오를 데려와 저녁을 같이 먹고 토끼와 놀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놀란다. 두달 반 동안 시어머니 집을 처리하면서 물건을 일일이 손으로 직접 확인한 일은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 남동생이 집을 정리하면서 어머니가 쓰시던 수첩을 보내왔다. 그날 있었던 일이 간략하게 문장은 짧았지만 가슴 깊이 와 닿았다. 사람은 제각각인데 어머니는 무슨 일이건 남들과 비교하는 걸 싫어했고 두 어머니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이 물건으로 대화를 나누게 되는 유품정리시간은 이별과 죽음에 대한 가장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소설은 어떤 삶이 더 좋은 삶일까를 말하는 것이 아닌 얼마나 인간적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말하는 듯 하다. 한 사람의 삶을 규정짓는 방법은 죽은 후 남겨진 물건일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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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필요한 시간 - 다시 시작하려는 이에게, 끝내 내 편이 되어주는 이야기들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한겨레출판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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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날을 예측하기 힘든 불안의 시대야말로 우리에게는 문학이 필요하다. 저자의 신작 에세이는 문학으로 회복하는 마음에 대하여다. 정여울 작가의 인문, 심리, 철학, 여행, 평론 등 장르의 글쓰기는 항상 문학에서 나왔다. 나에게 빛이 되어준 세상 모든 이야기의 힘도 문학이라고 하였다. 책은 문학작품과 영화, 음악이 말을 걸어오는 시간 속으로 안내한다.

 

우리 마음속에는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우리 자신보다 모든 것을 더 잘 해내는 누군가가 살고 있어”p14

저자가 힘들 때마다 늘 되뇌는 문장이다. 헤세의 <데미안>에서 가장 아끼는 문장이고 생각만 해도 저절로 힘이 나고, 떠올리기만 해도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는 문장이다.

 

잃어버린 것들을 하염없이 쓰다듬는 시간이 있다. 마음속에서 그야말로 무엇으로도 지휘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불협화음을 연주한다. 그럴 때 문학작품을 읽는다. 영화 <톨킨>을 보면서 기대하지 않은 수확을 얻었다. 톨킨의 친구 제프리는 사랑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는 톨킨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 그가 사랑을 찾고 글을 쓰기 시작할 힘을 주었다. 제프리는 불타는 연애를 경험하여 사랑을 아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의 작품은 운명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마저 온전히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한 인간의 눈부신 용기가 아닐까. 때로는 상처 입은 순간의 아픔보다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를 괴롭힐 때 문학은, 마침내 아름다운 타인의 이야기는 우리 곁에 있다.

 

문학은 내게 속삭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해야 한다고, 때로는 죽음보다 삶이 초라해 보일지라도 삶을 택해야 한다고 말이다. 문학은 나를 일깨운다. 첫 마음을 잊어버릴 때마다, 일상의 괴로움 속으로 숨고 싶을 때마다, 문학은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문장을 통해 내게 일깨워 준다.

 

내가 다른 사람이 무심코 던진 말로 인해 걸핏하면 상처받듯이.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무심코 상해를 입히고, 그것이 심각한 상처인지도 모른 채 스스로를 보살피지 않고, 타인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데도 여전히 수줍거나 소극적이다. 문학작품을 읽는 것은 이렇게 잘 모르고 저지르는 우리의 잘못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대보다 물질적으로 훨씬 풍요로워진 지금 집마다 넘쳐나는 물건만큼이나 무서운 것은 그칠 줄 모르는 타인과의 비교. 문학은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되어 가는 사회를 향해 간절한 물음을 던진다. 잃어버린 것들을 애도하는 문학의 힘을 통해 사람과 세계를 되찾는다. 그것은 제주 4.31980 광주를, 세월호, 이태원을 문학의 거울을 통해 되새겨야 하는 이유다.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지녔다는 점에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우리와 똑같다.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약하게 뛰고 있는 가녀린 존재의 심장 박동을 포착하는 것이 문학의 빛나는 힘이기도 하다. 책을 통해, 문학이라는 보이지 않는 날개를 통해 매 순간 힘찬 비상을 준비하며 오늘도 읽고 쓰고 고뇌하는 고통스러운 행복을 체험한다. 문학은 책이나 작품속만이 아니라 산소나 습기처럼 세상 모든 곳에 흩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를 들을 때면 가사 하나하나가 영롱한 시어가 된다. 이소라의 음악이 주는 감동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이나 실비아 플라스의 시를 읽을 때 느끼는 놀라움과 닮았다. 이소라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는 <오이디푸스><안티고네>같은 그리스 비극을 읽는 이유와 비슷하다고 한다.

 

문학은 운명적으로 이중 언어와 복화술을 구사한다. 사회화되고 표준화된 언어로는 결코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 아무리 민주적인 사회에서도 어딘가는 반드시 억압되어 있는 인간의 욕망, 가장 평등해 보이는 관계에서도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내밀한 권력관계를 표현하는 언어는 절대 단순할 수가 없다.

 

오디오북은 세상 누구보다 친밀한 벗이 되어버렸다. <월간 정여울>이라는 글쓰기 팟캐스트를 진행하면서 청취자에게 책을 낭독해 주고, <이다혜의 영화관, 정여울의 도서관>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도 낭독의 기쁨을 느낀다. 이 책은 문학으로 치유받은 작가의 경험으로 따스하게 내미는 다정한 손길이다. 저자의 헤세를 읽고 팬이 되었다. 우리에게 빛이 되어준 세상 모든 이야기의 힘이 되어주는 문학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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