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이어령, 80년 생각 - ‘창조적 생각’의 탄생을 묻는 100시간의 인터뷰
김민희 지음, 이어령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이어령 교수의 마지막 제자인 저자와 ‘80년 창조적 생각에 대한 생생한 대화의 기록이다. 인문, 예술, 철학, 역사는 모든 수업에서 한데 융합되었고, 어느 수업에든 그만의 시각과 해석이 녹아 있었다. ‘어떻게 저런 발상을 해낼까?’ 그를 볼 때마다 든 생각이라고 했다.

 

코로나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데 모든 타자와의 거리를 발견한다. 그동안의 삶의 방식, 그동안의 삶의 속도와 다른 삶을 살면서 잊고 있던 가치를 일깨워주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혼자 있는 시간을 침잠하다 보면 진짜 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내면성이 강하고 시선이 안으로 향한 사람들은 방에 혼자 갇혀도 고독하지 않지만 평생 타인지향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방에 갇히면 못 견뎌한다.

 

눈물 한 방울이 말을 마지막므로 이 시대에 남기고 싶다고 하신다. 눈물로 치면 우리가 그리스보다 선진국이라고 했다. 코로나가 아니라도 벌써 그런 상황은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었고 이 눈물 없이는 황무지의 삶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가. 무엇을 위해 아껴두었던 한 방울의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인가.

 

80여 년 평생 이 시대 최고의 지성’‘말의 천재라는 꼬리표가 붙어 다니는 것을 거부했다. 내 인생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고 가는 삶이었어. 누가 나더러 유식하다, 박식하다고 할 때마다 거부감이 들지. 궁금한 게 많았을 뿐이라고 했다. 50년 만에 풀린 제비의 비밀은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인데, 벌레를 먹은 새끼는 입을 덜 벌리고 배고픈 새끼는 더 많이 벌리니까 어미는 입 크키만 보면 누가 배고픈 새끼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령식 독서론을 부연하면 어려운 독서를 통해 추리력이 길러지고 뇌세포도 활성화된다. 아이들한테 수준 높은 책을 읽힐 필요가 있다. 아이마다 성향과 기질이 다 다르겠지만, 너무 단순한 내용의 책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아이들의 두뇌개발을 오히려 제한할 수도 있어 적절한 자극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교수는 22세에 <우상의 파괴>로 문단에 파문을 던짐 같은 식이다. 젊은 세대 기수론을 담은 일종의 선언문으로, 인습의 벽에 갇혀 시대의식을 담지 못하고 권위주의에 매몰된 기성 문단을 싸잡아 비판한 글이었다.

 

80여 년에 걸쳐 이어령 교수가 쌓아온 창조물은 유무형을 망라하지만 그 최고봉은 역시 이다. 도시의 자투리땅에 세운 작은 공원을 쌈지공원이라 이름 붙인 것이 대표적인 예다. 정보사회의 키워드로 제시한 학술용어 디지로그새천년 밀레니엄 베이비를 즈믄둥이도 그가 낳은 표현이었다.

 

이어령하면 굴렁쇠 소년을 먼저 떠올린다. 88서울올림픽의 굴렁쇠 소년은 그가 의도했든 안 했든 대표적 창조물로 꼽히고, 전 세계 다양한 분야의 명사들로부터 칭찬과 감동의 피드백을 차고 넘치게 받았다.

 

노태우 정부는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를 연다라는 기치 아래 문화 정책을 폈고 이어령 교수는 초대 문화부 장관을 맡았다. 장관 취임 직후 문화행정에 딱딱한 관료주의의 벽을 허무는 일에 역점을 두었다. ‘33운동을 제안했는데 3불은 문턱 없이 말하기, 생색내지 않고 말하기, 사심 없이 말하기였고, 3가는 문화의 우물가에 두레박 놓기, 부뚜막의 부지깽이 되기, 바위의 이끼 되기였다. 계산 없이 솔직하게 터놓고 말해야 조직에 활기가 돌고 창조적 아이디어가 샘솟는다는 것이 3불 운동의 취지였다.

 

한국 사람은 무엇이든 잘 버린다. 내버려에서부터 먹어버려, 쓸어버려, 잡아버려, 잊어벼려. 그런데 한국인은 절대로 버리지 않는 민족이다. 김치가 쉬면 버려야지 하지만 두어묵은지로 만들어 삼겹살을 싸 먹으면 기막히게 어울리고 화려한 변신을 하는 것이다.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은 이어령 교수의 대표 타이틀 중 하나다. 새천년의 첫 순간은 전례 없는 대규모의 글로벌 방송으로 기획됐다. 영국은 우주장비를 이용해 불꽃놀이를, 미국 뉴욕은 타임스퀘어에서 4톤에 달하는 색종이 조각을 흩뿌렸고, 요르단 베들레헴에서는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2000마리를 날려 보냈다. 한국은 새천년이 되자마자 태어난 새 생명의 우렁찬 울음소리. 이른바 즈믄둥이의 탄생장면을 실시간 중계로 세계를 향해 쏘자는 것이 이 교수의 계획이었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어령 책 두 권을 대출했고 [읽고 싶은 이어령]을 읽고 리뷰를 올리고 난 다음 날 이어령 선생님은 돌아가셨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믿을 수 있는 건 우주에 살아 있다는 것, 생명력이라는 말에 힘을 얻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대출도서로 읽었던 [소년이 온다]를 다시 꺼내 읽는다. 1980년 그때 서울에 있었던 나는 그날의 일을 세월이 한참 지나 한강 소설과 다른 에세이와 소설, 영화를 보면서 조금은 알게 되었다. 광주는 한 번씩 다녔지만 도청에 가보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친정 부모님께 그때 어땠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보성읍에 군인들이 진을 치고 사람들 못 지나가게 했제. 무서웠다고 했다. 어디서든 이런 이야기는 허심탄하게 나누지 못한다.

 

소설은 1980년 광주, 518일부터 열흘간 있었던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상황과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당시 중3, 열여섯 살 동호는 친구 정대를 찾아서 상무관으로 왔다. 군인들이 정대를 실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정대 남매는 동호네 집 문간채에서 자취를 하였다. 정대 누나를 찾으러 나갔다 정대가 계엄군 총에 맞아 쓰러져 죽게 되었다. 고등학생 은숙, 노동자 선주, 대학생 진수는 상무관에서 한조가 되어 시민군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동호는 엄마가 찾으로 왔을 때 여섯시에 문 닫을 때 집으로 간다고 했는데 그게 마지막이 되었다. 두루마기 차림의 노인은 화순서 경운기 얻어타고 왔고 경운기가 시내로는 못 들어온다고 해서 산길을 겨우겨우 넘어 갖고 왔다. 아들과 손녀를 찾으러 온 노인은 숨을 몰아쉰다. 정대의 혼이 나와서 넋두리를 하고 있다. 누가 나를 죽였을까, 누가 누나를 죽였을까, 왜 죽였을까, 생각할수록 그 낯선 힘은 단단해졌어.

 

김은숙, 지난 오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이다. 그해 겨울, 입시에 실패하고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그녀에게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지원했다. 살인마 전두환을 타도하라고 외치며 데모하는 대학을 휴학하고,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를 돌보고,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다 복학하자 다시 학비를 벌기 위해 휴학했다. 교수의 추천으로 작은 출판사에 입사했다. 편집자로 일하면서 담당 원고의 검열 문제로 경찰서로 끌려가 일곱 대의 뺨을 맞는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면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것이다.

 

대학생 김진수는 연행되어 왼손에 모나미 볼펜을 끼우게 했다. 처음엔 견딜만 했는데 날마다 같은 곳에 하니까 상처가 깊어졌다. 성기 고문을 하고 석방된 뒤 거의 매일 밤 벌레와 관련된 악몽을 꾸었다. 체포 당시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아 단순 가담자로 분류된 사람들이 차례로 석방되고, 이른바 극렬분자, 총기 소지자들만 상무대에 남았다. 고문의 양상이 달라졌다. 진수는 출소 후 힘들어하다 자살을 하고 만다. 나는 날마다 싸운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임선주는 중학교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일을 시작했다. 교도소에서 보낸 일년여의 시간을 제외하면 노동을 멈춘 적이 없다. 성희 언니에게 노동법 강의를 듣고 한자 공부를 해서 신문을 읽을 수 있었다. 수십명의 노조원들을 곤봉과 각목으로 때려 닭장차에 집어넣었다. 사복형사가 배를 밟고 옆구리를 걷어 차여 장 파열 진단을 받고 입원했고 해고 통보를 들었다. 방직 공장 경력을 포기하고, 광주 충장로의 양장점에 미싱사 시다로 일하다 상무관에 합류하게 된다. 경찰에 연행되어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키고 그 후 이년 동안 하혈이 계속 되었다. 이름 대신 빨갱이년으로 불렸다. 과거 여공이었고 노조 활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년 동안 지방 도시의 양장점에서 숨어지내며 간첩 지령을 받아왔다는 각본을 완성하기 위해 날마다 조사실 탁자에 눕혔다. 무엇보다 사투리로 하는 동호 엄마의 울음의 소리는 눈물이 안 날수가 없다.

 

동호는 실제 인물이다. 작가의 아버님이 중학교 교사로 있을 때 제자였다. 이 책을 쓰기 위해 모든 자료만 읽다가 어느 꿈 때문에 중단하고 동호 형님을 만나러 갔다. 어머니라면 당연히 만났을 텐데 자신은 만나면 뭐하나 할말도 없는데라며 대신 잘 써주셔야 한다고만 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야 합니다. [소년이 온다]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듯이 작가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썼는지 알 수 있다. 더 이상 억울한 영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다시 오월이 오고, 꽃 핀 쪽으로 소년이 오고 있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한 번 더 읽어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툴지만, 결국엔 위로 - 다큐 작가 정화영의 사람, 책, 영화 이야기 좋은 습관 시리즈 17
정화영 지음 / 좋은습관연구소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재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들에게 위로가 필요하다. 서로 다독여 주든 혼자 위로를 하든 불안한 시대인 것은 맞다. 책 제목에 끌렸고 읽고 싶었다. 저자는 다큐멘터리 방송 작가로 2018<엄마의 봄날>, 2021<백 투 더 북스>로 휴스턴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백금상을 수상했다. 그녀의 주변을 스쳐 갔던 수많은 인연 사이에서 그들의 감정을 읽고 공감하며 때로는 위로를 보내며 이 책을 썼다. 저자의 경험이 바탕이 된 20개의 이야기는 위로에 관한 꼭 봐야할 책과 영화도 소개되어 있다.

 

남편과의 불화로 혼자 외롭게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다른 남자와 불륜을 고백하고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알기에 늦은 밤 전화를 걸었던 친구는 도와달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같이 일하던 동생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었는데 일이 바빠 대충 말하고 나중에 만나자고 한 후로는 연락이 되지 않은 일에 성급한 조언과 위로가 독이 되었을까 고민을 하게 된다. 직장 내 성희롱이나 성추행은 역사를 서술하자면 처음은 어디이고 끝은 왜 없는지 장황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경험이 여성에게는 평생을 함께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소안도에서 촬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던 길 혼자 운전을 하다 터널에 진입한 순간, 몸이 이상하고. 발작이 시작된 것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나고, 팔과 다리가 경직됐다. 공황 장애가 오면 어떡하면 되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다시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기를’‘두근거리는 가슴이 진정되기를’‘손이 그만 떨리기를’‘이 공포가 지나가기를기다리는 일뿐이었다. 글만 읽어도 많이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열일곱살 때 집이 가난해졌다. 아버지의 과감한 투자가 빗나갔고 엄마가 포장마차를 시작했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포장마차를 부끄러워하는 남편을 향해 분노했다. 엄마의 서러움과 슬픔,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감정을 고스란히 전해지고 공감하기 고통스러웠다. 저자가 엄마가 되어 보니 엄마라는 인생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

 

가까운 사람의 자살로 인해 살아 남은 자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할까. 친구 언니가 손목에 피를 흘리고 있어 병원으로 갔다. 사람을 살렸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었지만 가족들은 칭찬도 고맙다는 말도 안 했다. 입원 수속을 할 때 환자 상태에 대해 자살 시도라고 정직하게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의료보험이 되지 않는다는 친구의 어색한 변명을 듣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저자의 친구가 된 오빠 친구, 그 오빠가 간암으로 간 이식이 필요한데 장성한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고민도 하지 않고 간 이식을 결정했고 아들이 후유증을 겪지 않을까 울기 시작했다. 어떤 위로도 힘이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어 저자도 함께 울고 있었다. 늘 바쁜 엄마에게 공중전화로 걸려온 아들의 한 마디 엄마는 나를 믿나요?’ 오늘만 그런 게 아니라, 늘 그랬고, 어제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다고 대답했다.

 

대학 때 친구와 사소한 일로 거리가 멀어진 경우는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친구가 힘들 때 어떤 위로도 전하지 못하니 더욱 그럴 것이다. 저자는 친구 관계가 위태로울 수도 있어 대답하지 않는 편을 선택한다. 듣기를 바라는 말과 진심이 다를 때, 조심스러우니까. 나의 진심을 꺼내 놓았을 때 그녀와 그들에게 미움받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메멘토를 떠올린 것은 61년생 신영숙 씨 때문이라고 했다. 어머니 권유로 중학교 중퇴 서울의 한 방제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벌어 들인 돈으로 엄마와 외삼촌이 진 빚을 대신 갚고 두 동생의 학비를 충당한 사람이다. 그런데 신영숙 씨 어머니는 치매에 걸려 딸 집으로 와서 같이 산다. 저자가 왜 나만 공장에 보냈느냐고 물어보셨냐고 하니 엄마의 기억을 놓아버려서 기억이나 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아픈 과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결국, 새로운 기억을, 그것도 행복한 기억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에피소드의 주인공이 되었다가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며 위로라는 선물을 받을 것이다. 책에 나오는 수많은 책과 영화는 우리의 내면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씨앗이 될 것이다. 저자는 특별한 위로자는 아니지만, 당신이 어떤 위로라도 해달라고 내 팔을 두 번 친다면. 함께 대화하자고 손 내밀 수 있다고 했다. 서툰 위로였지만 결국은 나를 향한 위로 였다고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읽고 싶은 이어령 - 이 땅의 모든 지성에게
이어령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읽고 싶은 이어령] 제목이 의아했는데 머리말을 읽어 보고 알았다. 한 작가의 소망이 된 책이라는 것을. 최인호 작가가 세상을 떠나기 서너 달 전 병중의 몸으로 인쇄물을 하나 건넸다. 바로 [읽고 싶은 이어령]이라는 저자의 글모음이었다. 그동안 많은 책을 냈지만 그것은 모두 내 의지로 낸 것인데 이 책만은 그렇지 않다.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이 책은 아마도 이 세상에 영영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순환하는 것들은 직선운동과는 다르다. 역사는 직선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계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셀리의 시구처럼 겨울의 추위가 거꾸로 봄의 다스함을 불러들이는 역할을 한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비합리적인 속담이 아니라, 역사의 순환성을 정확히 짚어낸 슬기다.

 

엄살은 측은의 정을 전제로 한 전략이니만큼 상대방이 짐승이나 목석 같은 사람일 때는 아무 소용도 없는 전술이다. 엄살을 부리고 엄살을 받아주는 것은 서로가 상대를 정이 있는 인간으로 믿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부끄러운 이야기를 좀 쓸까 한다. 오십 년 가까이 매일같이, 그것도 하루에 세 번씩 식사를 해왔는데 젓가락질이 서툴다고 했다. 요즘 초등학교 아이들 가운데에는 젓가락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수가 8할이 넘는다고 한다. 별로 흉이 안 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저자가 그랬던 것처럼 모두가 막내둥이로 자라나고 있는 까닭이다. 부모들은 그 응석을 그대로 받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의 전통은 부모에 의해서 아이들에게 전수되는 법이다. 태어나 어머니의 젖을 빠는 것은 본능이지만 젓가락질은 배우는 문화요, 교육이다.

 

모든 길의 끝에는 바다가 있듯이, 모든 시간의 끝에는 죽음의 종말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시작을 원인으로 생각하고 끝을 그 결과로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그것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은 언제나 시작하는 그 순간 속에 있다는 주장이다.

 

무슨 고본이건 가만히 들여다보면 10페이지 이상 손때가 묻어 있는 책이 드물다. 즉 서문과 제1장 제1절만 붉은 연필로 언더라인을 쳐놓은 것이 많은데 제2장째만 접어들어도 소식이 없다. ‘앞장은 고본, 뒷장은 신간인 셈이다. 독서법도 이렇게 눈깔사탕 먹는 식이다. 진득하게 앉아 책 한 권을 독파해낼 만한 지구력이 모자란 탓이다. 어쩌다 끝까지 다 읽은 흔적이 있는 고본을 보면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등산가가 정상에 말뚝을 세워 놓은 것처럼 ‘0000일에 이 책을 완독하노라는 기념 사인이 적혀져 있다. 한국인에게 필요한 것은 지구력 기르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짐을 들어주는 학생을 날치기로 생각해서 마음이 편치 않아 고맙다는 인사도 못한 이야기는 참 씁쓸하다. 대가 없는 친절이란 의심과 경계를 살 뿐이다. 도리어 불안과 공포를 준다. 무상(無償)의 시대는 지나가고 만 것이다.

 

서양 사람은 나들이를 다닐 때면 활동하기 쉬운 간편한 옷을 입고 나간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피크닉이나 꽃구경을 가는데에도 으레 성장을 한다. 옷 중에서 최고의 것을 골라 걸친다. 패션쇼를 하는 기분이다. 어째서 꽃구경이나 야유회를 하는 데까지 남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것일까?

 

한국어는 아픔의 말이다. 단테도, 셰익스피어도 아픈 것에 관한 한 한국인만큼 속시원하게 표현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기껏해야 골치가 아프다, 배가 아프다 등이다. 삭신 쑤신다는 말은 외국어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병이 나기 전에 노곤하고, 녹작지근한 것이 다르고 사지가 나른한 것과 뻐근한 것이 모두 다르다. 다른 민족보다도 고통을 많이 겪어왔기 때문인가? 한국처럼 약방이 많고 약 광고가 많은 나라도 흔치 않은 걸 보면 그런 데 이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글을 쓸 때면 글의 근원적인 뜻대로만 쓰면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가 있다. 미끈미끈한 볼펜으로 글을 쓸망정 그것이 긁는 행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인들이 바가지를 긁듯이 문사(文士)도 문자로써 긁는다. 가려운 데를 긁어주어야 한다. 부정이나 불의를 박박 긁어야 글은 시원한 것이 된다.p194

 

우리가 남을 욕하는 것, 헐뜯는 것은 정말 미워서가 아니다. 욕으로써 감정을 푸는 게다. 욕은 더러워도 욕으로 풀고 나면 마음은 천사처럼 깨끗해진다. 한국의 욕은 비뚤어진 한국적 풀이 문화의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욕만큼 다양하고 푸짐하고 걸쭉한 것도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욕을 분석해보면 분야별로 고루고루 발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밥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식구 수만큼 손수 지어 먹는 것이며, 끼니때마다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정을 측정하는 구실을 한다. 빵은 식은 것도 먹을 수 있지만, 밥만은 온기를 지니도록 해야 한다. 식은 밥은 곧 식은 정을 의미한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것, 뜨거운 밥을 먹는다는 것, 아버지와 아들을, 아내와 남편을, 형과 아우를 묶어두는 핏줄의 확인이다.

 

빵의 문화는 개인주의 문화이며, 정복의 문화이며, 활동의 문화이며, 상업의 문화이다. 빵이 있는 곳에 전쟁과 개척이 있었다. 밥의 문화는 한솥의 문화다. 지붕 안에 고정되어 있고, 정적이며, 집을 떠나서는 살기 어려운 귀향자의 문화다. 정말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읽고 싶은 이어령]은 저자의 수많은 글들 가운데 가장 빛나는 글만을 가려 뽑은 에세이의 결정본이라고 하였다. 이 땅의 모든 지성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 - 불안과 고통에 대처하는 철학의 지혜
존 셀라스 지음, 신소희 옮김 / 복복서가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행복한 삶을 사는 데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인간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그 바람을 실현하기 위해 해야 할 일과 해선 안 될 일은 무엇인지 숙고했다. 에피쿠로스가 찾아낸 대답은 단순했다. '즐거움,' 인간이 진정으로 바라는 건 즐거움뿐이다.

 

에피쿠로스는 레스보스섬의 미틸레네에서 철학 강의를 시작했고 평생지기 헤르마르코스도 만났다. 현지 주민들이 아테네식의 철학 방식에 반감을 드러내자 몇 사람을 데리고 소아시아 본토로 떠나지만 철저한 은둔생활을 한다. 결국 아테네로 옮겨가기로 결정하면서 성벽 외곽에 땅 한 뙈기를 구입한다. 사십 년간 이 철학 공동체를 영위했다. 친구들끼리는 모든 재산을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도 있었지만, 에피쿠로스의 정원은 사유재산을 유지했다. 에피쿠로스가 세상을 떠나고 두 번째 수장이 된 오랜 벗 헤르마르코스가 물려받았다.

 

에피쿠로스의 분류에 따른 네 가지 쾌락의 유형은 먹는 행위와 같은 동적인 육체적 쾌락, 배고프지 않은 상태와 같은 정적인 육체적 쾌락, 친구들과의 즐거운 대화와 같은 동적인 정신적 쾌락,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상태와 같은 정적인 쾌락. 이 네 가지는 모두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유형, 즉 불안도 걱정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정적인 정신적 쾌락이다. 이 상태를 아타락시아라는 용어로 표현했는데, 직역하면 '근심 없음'이지만 대체로 '평정'이라고 번역한다.

 

(쾌락은) 오히려 맑은 정신으로 심사숙고한 결과라네. 모든 선택과 거부 행위의 동기를 분석하고, 정신적 동요의 주된 원인인 신과 죽음에 관한 거짓 관념을 버리는 것이지.p43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철학은 타인의 존재와 역할은 인생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깨어지기 쉬운 우정의 속성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우정을 그토록 중시하는 이유에 관한 흥미로운 이론을 남기기도 했다. 우리가 정말로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은 드물거나 아예 없을 수도 있지만, 위기에 처했을 때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인식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친구를 오로지 자신의 지원망 정도로 여기는 사람은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없으리라. 일단 도움은 쌍방향이어야 하며, 친구에게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은 즉시 도우러 나설 수 있어야 한다. 우리도 도움이 가장 절실한 순간에 도와주는 친구가 있기를 바랄 테니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균형이다. 끊임없이 도움을 요청하거나 기대한다면 합리적으로 친구에게 바랄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고 여겨질 수 있다.

 

필로데모스가 에피쿠로스 철학의 정수를 요약 정리한 [테트라파르마코스] '네 가지 처방'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글이다

신을 두려워마라.

죽음을 염려하지 마라.

좋은 것은 구하기 어렵지 않으며,

끔찍한 일은 견디기 어렵지 않다.

 

 죽음은 우리를 유한한 존재로 정의한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제한하여 우리의 계획과 과업에 절박함을 부여한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은 불안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라고 묻는 사람은 죽고 나면 ''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셈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만약 사후세계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는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는 죽음이 아니라 의식을 지닌 우리의 현존재가 다른 것으로 변형되는 순간임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는 단 한 번 태어난다. 두 번 태어날 수 없으며 영원히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는 내일을 통제할 수 없는데도 내일을 위해 오늘의 기쁨을 미룬다. 인생은 그런 유예 속에 낭비되며, 결국 모두가 그렇게 일만 하다 죽고 만다.p99

 

진정한 철학을 길잡이 삼아 살아가는 사람은 소박한 생활에서도 충만함을 발견할 것이며 평온한 마음으로 그런 생활을 즐길 것이다. 이 구절은 에피쿠로스 철학의 핵심 사상인 '단순한 생활과 마음의 평화'를 떠올리게 한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에서 세상의 작동 원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루크레티우스가 주는 교훈이다.

 

이 책은 부제목처럼 불안과 고통에 대처하는 철학의 지혜를 이해할 수 있다. 허구한 날 마음을 괴롭히는 비이상적인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지금 이 삶을 즐기는 데 집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책을 읽고 나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어울리는 책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