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경제연구소 곽수종 박사의 경제독법 - 대한민국 경제를 보는 눈
곽수종 지음 / 원앤원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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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곽수종 박사님의 <경제독법>을 이렇게 풀어쓰고 싶다. 

 '경제를 독립적인(혹은 자주적인) 시각으로 읽어보자'라고 표현하고 싶다. 

결말로 치달을수록 곽수종 박사님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시각을 유지하려 애쓰면서, 강대국(미국,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대처해 나가야 할 우리 현실이 안타깝고 버겁지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는 모습에서 '삼성경제연구소' 소속이 불러온 편견이 단지 기우였음에 안도한다. 

이 책 결말 부분에서 김훈의 <남한산성>이 자꾸 떠오른다. 병자호란의 위기 속에서 남한 산성에 가두어진 우리 선조의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다가올 강대국의 경제전쟁에서 우리가 처할 미래가 과거이고, 과거가 곧 미래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가올 기회 또는 위기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 가? 

곽수종 박사님은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중용을 제시한다.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경제전쟁에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외교적 실리와 경제적 실리를 모두 취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과거 우리 선조가 남한산성에서 우리에게 전혀 가치가 없는 이념의 노예가 되어 우리가 나가야 될 방향을 찾지 못한 채 구멍에 갖힌 쥐새끼 신세가 되버린 꼴은 면해보자는 뜻이 아닐까?...  

그래서 이념은 우리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나침반이 되고, 상상과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보호장치가 될 때만이 유효하지 않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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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아이들 (반양장)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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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1986년 구.소련 체르노빌원자력발전소 사고로 인한 뉴스가 아주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때 방사능 분진이 바람을 타고 주변 국가로 퍼진다고 호들갑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 원자력발전소는 안전하다는 대대적인 광고가 tv를 통해 흘러 나온 적이 있다. 원전 수로에서 배출되는 물도 안전하다며 물고기가 헤엄치는 장면과 어린 소년, 소녀의 해맑은 모습이 오버랩되는 장면...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반전, 평화운동가인 작가는 원자력 피폭으로 인한 참상이 얼마나 끔직한 지를 소년 이반과 여동생, 엄마 타나의 시각을 통해 담담하게 그려낸다. 

지금 석유 고갈과 지구온난화로 대체에너지 개발이 시급하다고 난리부르스다. 향후 '세계는 자원전쟁이 시대다"며 자원 확보에 혈안이다. 그런 와중에 접하는 '체르노빌의 아이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책은 중,고등학생이 읽을 수 있는 내용으로 대강의 줄거리는 체르노빌원전이 이유도 모른 채 폭발하면서 원전책임자인 안드레이  세로프 가족의 고통을 겪는 여정이다. 그 여정은 죽음을 향하고, 불특정다수의 삶이다.

 세로프는 책임 의식과 가족 보호라는 사명으로 불나방처럼 원전의 불구덩이에 몸을 내던지고, 아들 이반은 원전 폭발을 처음 목격함으로써 눈을 잃게 되고, 그 딸은 다리를 잃고, 타냐는 사랑하는 자식을 잃는 마음의 고통을 겪는다. 그것은 곧 이반의 눈, 딸의 다리, 타냐의 마음이 합쳐진 세로프의 몸뚱아리와 다름 없다.  

대안은 없는가? 원전 폐기만이 유일한 대안이다. 인류가 탐욕 때문에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서는 안된다. 

제러미 리프킨은 <엔트로피>에서 말한다. 우리가 필요로 해서 만드는 핵발전소가, 그렇게 안전하다는 핵발전소가 인류에게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경고한다.  또한 방사능폐기물 처리를 위해선 상당한 긴 시간이 필요함으로 핵발전소는 건설은 중지되어야 하고 폐기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제 우리의 탐욕이 우리에게 비수를 찌르기 전에 우리 스스로 탐욕을 폐기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내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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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투기의 역사 - 튤립투기에서 인터넷 버블까지
에드워드 챈슬러 지음, 강남규 옮김 / 국일증권경제연구소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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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애드워드 챈슬러는 1630년대 네덜란드의 튤립투기부터 일본의 잃어버린 10년까지 이르는 광대한 버블의 역사를 정리했다.  

17세기 경제대국은 네델란드(튤립 버블)이고, 18세기는 영국(south sea 버블), 19~20세기는 미국(철도공황, 대공황, 대부조합 파산 등)이다. 버블은 그 시대의 경제대국에서 가장 강력하게 발생하고 그 파장은 주변 국가로 스며든다. 버블은 그 시대 경제대국에서 가장 강력하게 발생하고 그 파장은 주변으로 스며든다.

그리고, 명멸해간 버블의 주인공과 그 추종자들의 비극적인 종말을 얘기하며 버블에 대한 경고를 한다. 

저자는 중립적 관점에서 버블을 얘기하다가, 결론 부분에서 자유주의경제학자들이 투기를 조장한다고 일침한다. (그 역시 케인스학파의 일원인 듯 싶다. 본색 드러내는 게 크루그먼 교수와 똑같네요.)

버블에 관한 책이 다 여기저기서 차용할 수밖에 없어서 그런지 버블을 주제로 한 책도 대동소이하다.  다만 다른 점은 세계경제가 이끌려가는 큰 두 줄기(신자유주의학파, 케인스학파) 중 케인스 학파의 시각으로 버블을 역사적으로 정리한 점이다. 그래서인지,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하다"와 유사한 내용이 다수 보인다.  

폴 크루그먼 교수의 "미래를 말하다"와 이 책을 병행 독서해도 무난할 듯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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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모험
이진경 지음 / 푸른숲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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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와 현대철학을 햄버거로 후다닥 해치우려는자 철학의 모험에 동참하라.  

단, 햄버거는 햄거일 뿐 제대로 된 식사보다 못하다는 건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이진경 교수님은 근대철학과 현대철학을 우화를 통해 쉽게 풀어서 얘기한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사르트르를 통해 장자가 내미는 화두를 풀어내며 철학이라는 거대한 배의 닻을 올린다. 

경험주의자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과, 독일철학에서는 로봇을 만드려는 어느 꼴통(?)의 이야기를 통해 칸트, 헤겔, 포이어바흐, 마르크스에 이르는 실로 방대한 철학의 바다를 경험할 수 있다.

아직 머나먼 종착점이지만, 처음 기착점인 현대철학에서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이야기를 통해 후설의 현상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니체를 만날 수 있다. 

이진경 선장님이 이끄는데로 두려움에 떨며(?) 주마간산하듯 철학의 모험을 떠났지만 너무 두렵지 않고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상쾌한 여행이었다. 

다음 모험에는 이진경 선장님이 주시는 햄버거로 때우지 않고 정식을 먹으며 곱씹을 것이며, 올레길을 것 듯 사색하며 여행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모험의 진수를 느낄 수 있으리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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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폴 크루그먼 지음, 예상환 외 옮김 / 현대경제연구원BOOKS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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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이 맞다면, 폴 크루그먼 교수가 200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을 것이다?  

어떤 이는 노벨상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보면 미래의 세계 경제 흐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전,후자 모두 동의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노벨경제학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계경제 패권을 쥐고 있는 자본주의자들의 몫이고, 그들에 의해 세계경제가 끌려가기(?) 때문이다.(근데 최근에는 양상이 다르게 중국이 미국의 목덜미를 꽉 쥐고 있다. 오야붕의 후원을 입은 넘버쓰리가 넘버투를 제끼고 이젠 오야붕의 목까지 노리고 있는 형국이다.)

미국은 바퀴의 양축처럼, 정치는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제로, 경제는 시카고학파(신자유주의자)와 케인스학파로 대변된다. 크루그먼 교수는 레이거노믹스, 부시 부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하며, 밀턴 프리드먼을 꼴통 취급하고, 그들의 추악한 과거를 들춰낸다. (kkk 등) 

왜 크루그먼 교수가 그렇게 공화당과 신자유주의자를 씹어대나 했더니 책 말미에 자기는 케인스주의자며 골수 민주당원이라고 밝힌다. 그럼 그렇지, 역시나 였다.

크루그먼 교수는 결국 작금의 경제위기가 꼴통 신자유주의파와 공화당 때문에 발생했다며 침을 튀기며 얘기한다. 그래서 다음번 세계대통령(?)은 흑인 오바마가 될 테니까 까불지 말라고 으름장까지 놓는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그놈이 그놈이다.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들의 본질은 같다. 세계를 경제적으로 지배하려는 미국의 대가리를 차지하려는 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란 말이다.  

이 책의 역자는 이 책 원전의 'liberalism'을 진보주의로 해석할 지, 자유주의로 해석해야 옳을 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역자는 문맥상 신자유주의에 대비되므로 진보주의로 해석을 해버린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진보주의자 보다 자유주의란 원래 의미대로의 해석이 옳을 듯 싶다.   

루즈벨트가 추진한 뉴딜정책을 공화당 보수 꼴통들(신자유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경제학자들이 뒤집어 놓았다고 분개하는 것에서 크루그먼은 스스로 진보주의자가 아닌 자유주의자란 표현이 더 어울린다. 다시말해 보수에서 왼쪽으로 치우친 정도이다. 만약 그가 진보주의자였다면 루즈벨트에게도 메스를 들이대 신랄하게 비판했을 것이다.(반면 공화당 꼴통들은 보수에서 너무나 오른쪽으로 가버린...)

하지만, 오른쪽으로 너무 멀리간 보수 꼴통이나 왼쪽으로 조금 치우친 보수가 뭐가 다를까? 크루그먼 교수가 주장하는 경제정의도, 본질을 들여다보면 결과적으로 약소국의 경제침탈을 통한 자본주의 미국의 번영을 위한 것이고, 오바마가 부르짖는 공정성도 보수 꼴통 부시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의 자본주의자가(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부르짖는 어떠한 정의도 공정성도 다른 약소국을 밟고 일어서려는 그들의 사악한(?) 본성을 감추기 위한 가면에 불과하다. 

과거 플라자합의를 통해 전쟁패전국인 일본과 독일을 협박해서 엔, 마르크화를 평가절상하여 미국이 자국 빚을 탕감한 것처럼, 금번 금융위기 때 발생한 땡빚을 털어내려는 미국이 중국을 협박해 대는 꼬라지를 보며, 공정성이란 이름이 가당하기나 한 것인지...   

그래서 역자가 고심한 liberalism은 '진보주의'란 해석보다 '자유주의란' 해석이 옳으며, 크루그먼 교수는 자유주의(좌향 보수주의) 사상을 가진 케인스학파 경제학자 정도로 불러야 옳을 듯 싶다.

세상에서 재미있는 게 불구경과 싸움구경이 아니던가?  그래서 이 책은 상당히 재미나다. 미국 집안 싸움을 구경하니 이 어찌 재미나지 않겠는가?   "다음 번에는 꼴통 공화당원이면서 신자유주의자인 미국의 어느 경제학자가 나와서 민주당의 과거를 들춰내고 꼴통 짓을 할 것 같다"는 미래를 말해 본다. 하지만 그때는 우리 삶이 약간은 더 퍽퍽하지 않을 까 우려스럽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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