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리커버 특별판, 양장)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8년 8월
평점 :
품절


"그래요. 가장 슬픈 책들보다도 더 슬픈 인생이 있는 법이니까요."


"그렇죠. 책이야 아무리 슬프다고 해도, 인생만큼 슬플 수는 없지요." (p.430)


이 작품은 헝가리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1935~2011)의 3부작 소설이다. 

1부 <비밀노트>, 2부 <타인의 증거>, 3부 <50년간의 고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986, 1988,1991년, 2~3년의 시차를 두고 발표된 각기 독립된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세 작품이 동시에 번역되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제목으로 묶어서 나오게 되었는데, 1부와 2, 3부는 문체나 분위기가 많이 다르나 세 작품이 내용면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1부 2차 세계대전부터 2부 구 소련 사회주의 체제를 거쳐 3부는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현재이다.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1부는 대도시에 살던 쌍둥이 소년이 전쟁을 피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 근처 K라는 소도시(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쾨세그)의 외할머니 집에 맡겨지면서 시작한다. 

처음 보는 손자들을 '개자식들'이라고 부르는 포악한 할머니와 생활하며, 전쟁이 가져다 준 처참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쌍둥이 형제는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단련한다. 

폭력에 무감각해지기 위해 서로를 주먹으로 때리고 급기야 혁대로 서로의 알몸을 갈기며, 할머니가 소리 지르면 차라리 때려달라고 할 정도로 폭력에 익숙해진다. 또한 모욕적인 말들에 익숙해지기 위해 서로를 향해 욕을 하고, 굶주림에 익숙해지기 위해 단식연습, 구걸, 장님과 귀머거리 연습 등, 더 나아가 생명을 죽이는 잔혹연습까지 하며 모진 세상을 살아나간다. 


"죽일 게 있으면 저희를 불러주세요. 이제부터 죽이는 일은 저희 몫이에요." 

할머니가 말했다. "그 짓이 그렇게 좋단 말이냐, 엉?"

"아니에요, 할머니, 그런 걸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만 저희는 그 일에 익숙해져야 하기 때문이에요." (p.62)


소년들은 자신들이 정한 규칙으로 세상을 살아나간다.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면 폭력으로 응징하기에 동네 아이들에게도 '미친놈들'로 통한다. 누군가가 죽여달라고 부탁하면 한치 망설임없이 죽여주기까지 하는데, 쌍둥이에겐 그것이 살인이 아니라 누군가 원하는 일을 해줬을 뿐이다. 


1부는 쌍둥이들의 이런 여러 에피소드들로 구성, 전개되는데, 감정을 배제한 냉정한 문체와 충격적인 내용이 굉장히 강렬하게 다가온다. 짧은 장으로 이어지는 각각의 에피소드는 잔혹 동화를 연상케 하는데, 이런 과장되고 자극적인 우화는 참담한 전쟁 상황 속에서 이 어린 것들이 무엇을 경험하고 얼마나 고통 속에서 살았을지를 알게 해주기에, 나는 이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에서 묘한 슬픔을 느꼈다. 


살인, 강간, 약탈, 폭력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옳고 그름의 잣대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인간성과 개인의 정체성을 상실한 시대에 도덕과 윤리라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이런 광기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음을 작가는 1부에서 강렬하게 보여준다. 


1부 <비밀 노트>에서는 그 어떤 고유명사도 나오지 않는 반면, 2, 3부에서는 쌍둥이를 비롯해 모든 등장 인물들의 이름이 나온다. 1부가 단순한 우화 형식인데 반해 2, 3부는 1부와 마찬가지로 인물의 감정은 묘사되지 않지만 내용은 보통 소설의 형식으로 훨씬 복잡한 구성을 갖는다.


이 책은 이야기가 서로 얽혀 있고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개인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기에 더 이상 이야기하기가 굉장히 조심스럽고 말을 아껴야 할 듯 하다. 

책을 펼치자마자 5분도 안되서 몸 속으로 강렬하게 흡수되었던 1부의 이야기만 살짝 해 보았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의 생각은 '삶은 결코 쉽지 않아.' 였다. 그렇다. 그 어떤 슬픈 소설도 인생이 간직하고 있는 본질적인 슬픔과 고통을 능가할 수는 없다. 다만 '사실만 가지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허구의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음을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보여준다. 


'모든 것을 미화시키고, 있었던 일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있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얘기를 쓴다' (p.430)고...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아 2021-03-20 10: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표지를 보고 ‘어디서 많이 본것 같은데..‘하다가 제목보고 ‘에그머니나!‘했습니다ㅋㅋㅋ잔혹동화며 그로테스크한 것도 더없이 적절한 표현입니다. 덕분에 정리가 잘되었어요!😊

coolcat329 2021-03-20 11:51   좋아요 3 | URL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ㅎ그냥 읽어보세요~~이 말만 맴돌았어요. 빈약한 글인데 쬐금이나마 정리가 되셨다니 감사합니다 😁

새파랑 2021-03-20 12: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표지는 이게 더 좋네요 (게다가 양장~!)
아직 읽기시작 안했는데 기대됩니다^^

coolcat329 2021-03-20 13:59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은 에곤 쉴레 표지로 사셨죠? 기대하셔도 좋을 작품입니다~😊

얄라알라 2021-03-20 14: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고유명사를 배제한 글쓰기의 이유는, 저런 고통과 폭력이 누구나의 이야기이자 경험일 수 있다는 작가의 생각이 반영된 것일까...coolcat님의 멋진 리뷰 읽으며 혼자 궁금해해봅니다

coolcat329 2021-03-20 16:39   좋아요 1 | URL
네~저도 얄라님 의견에 동감이에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읽히길 바라는 마음에 작가가 고유명사없이 우화 스타일로 쓴거같아요. 리뷰 읽어주시고 댓글까지~감사합니다.😊
 
야간비행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6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텍쥐페리를 생각하면 두 가지가 생각난다.


'어린 왕자'와 '비행기'.


그는 21세에 공군에 입대해 조종사 훈련을 받으나 2년 후 사고를 당해 두개골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고 제대한다. 그래도 비행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가족과 갈등을 겪다 결국 항공우편회사에 취직해 우편기를 몰게 된다. 1931년에 발표해 큰 성공과 함께 '페미나 상'을 수상한 <야간비행>은 그의 이런 비행사였던 경험을 토대로 쓰여진 소설이다.  


<야간비행>의 배경은 1930년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밤에 우편기를 조종하는 비행사들과 그 뒤에서 항공우편 업무와 조종사들을 관리하는 책임자 리비에르의 이야기이다.

당시 밤에 비행을 한다는 것은 '시속 이백 킬로미터로 뇌우와 안개 그리고 밤이 감추고 있는 여러 물리적인 난관 속'에서 싸우는 것을 의미했다. 낮에는 비행기가 속도 경쟁에서 배나 기차를 월등히 앞섰지만 밤만 되면 기차나 선박에 뒤쳐졌기 때문에 항공산업은 위험한 야간비행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야간비행>은 '전 항공 노선을 총관하는 책임자' 리비에르와 조종사 파비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파타고니아, 칠레, 파라과이를 출발한 세 대의 우편기가 각각 남쪽, 서쪽, 북쪽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향해 돌아오고'(p.21) 있고, 책임자 리비에르는 이 우편기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이 세 대의 비행기가 실어 온 우편물들을 모아 유럽행 우편기에 실어 자정에 유럽으로 출발시키는 임무를 맡고 있다. 


리비에르는 '사람이란 빚기 전의 밀랍덩이에 불과'하기에, '이 재료에 영혼을 불어 넣고 의지를 창출'하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직원들을 엄격하게 다스려 자기 자신을 극복하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의무이자 책임이며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의지의 약화는 곧 실수를 유발'하기에 비행 정비사부터 감독관, 조종사에 이르기까지 그는 엄격하게 통제하고 관리한다.


나는 정당한가 부당한가나는 알 수 없다내가 엄격하게 굴면 사고는 줄어든다책임이란 개인에게 있지 않다그것은 모든 이에게 적용되지 않으면 아무에게도 적용되지 못하는 막연한 힘과 같다내가 정말 정당하게 군다면야간비행은 매번 죽음의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p.57)


그러나 리비에르도 인간이기에 20년간 비행 정비에 몸담아 온 로블레의 실수 앞에서 갈등한다. 자식들을 생각해서 한 번만 봐달라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이 한 번더 기회를 준다면 그가 얼마나 기뻐할지를 그려보기도 한다. 자신의 혹독함에 지쳐가기는 리비에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가 몸담고 있는 곳은 일반적인 회사가 아니다. 작은 실수는 생명을 위협하고 비행 산업을 쇠퇴시킬수도 있다. 그는 '우연이라 할지라도 잘못의 매개자를 발견했을 때 눈감아주는 것은 범죄'라고 생각한다. 그는 결국 로블레를 정비 업무에서 해고시키고 잡역부로 보낸다.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를 달랜다.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한다. 내가 맞서는 것은 그들이 아니다. 그들로 인해 생겨난 것들과 맞서는 것이다......' (p.61)


한편 파타고니아에서 우편물을 싣고 오는 조종사 파비앵은 뇌우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 소용돌이, 격렬한 요동, '시커먼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어둠 속에 포위된 파비앵은 "여기가 어디죠?"라는 무선사의 물음에 답을 할 수가 없다. 사방이 캄캄한데 어딘지 어떻게 알겠는가...

한 시간 사십 분 후면 기름도 떨어지는 절박한 상황에서 그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어쨌든 이 짙은 어둠 속에서 모든 게 해결될'거라는 사실 뿐이다. 죽거나 살거나...


나는 비인간적일 정도로 확고한 신념의 리비에르도 인상적이었지만, 남아메리카 대륙 상공의 어둠 속에 갇혀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파비앵의 모습이 굉장히 강렬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읽었던거 같다. 

통신도 두절된 상태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사방이 다 막혀 자신이 조종하는 비행기가 육지 위를 날고 있는지, 바다 위를 날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 막막한 상황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암흑과 돌풍을 오직 홀로 상대해야 하는 파비앵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얼마나 두렵고 외로울까...땅 위에서 앞이 안보여도 두려운데, 태풍이 집어삼키는 캄캄한 밤하늘에서 하늘과 땅이 분간이 안가는 상황이라니...너무나 끔찍했다.

파비앵은 사력을 다 하지만 핸들을 잡은 손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생각은 점점 어둠 속으로 자신을 놓아버리려고 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보고 싶다. 


'외적인 숙명이란 없다. 그러나 내적인 숙명은 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의 나약함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 여러 실수들이 현기증처럼 우리를 엄습한다.' (p.93)


외적인 것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파비앵의 이 비장한 다짐은 곧 행동으로 이어진다.

빛...빛에 너무나 굶주린 나머지, 그는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빛을 향해 올라간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남편의 연착이 걱정된 파비앵 부인도 왔다가고, 기다리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동요가 일어난다. 

리비에르는 파비앵 부인이 다녀간 후 생각한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그토록 가슴 아파하는건 죽음 그 자체보다는 그들이 남기고 간 사소한 물건들과 그들의 일상 행동들이 점점 그 의미를 잃어가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행위나 사물들이 소용없어지면서 사랑하는 사람도 그렇게 떠나가는 것임을...리비에르는 파비앵 부인에게 깊은 연민의 정을 느낀다. 


그는 파비앵의 실종으로 일처리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직원들을 보며 '산 자의 업무가 지연'되는 이런 현실이야 말로 '죽음, 이런 게 바로 죽음이다!' 라고 생각한다.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것은 '바다 위에 떠 있는 고장난 돛배'와 같으며, 사람이 죽으면 그와 관련된 행동과 물건들도 그 의미를 잃듯이 우리 삶의 죽음이란 아무 것도 안함으로써 의미를 잃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섬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배를 만들었던 옛날 소도시들을 생각했다. 거기에 희망을 싣기 위해, 자신들의 희망이 바다 위에서 돛을 활짝 펼치는 것을 보기 위해, 그들은 배를 만들었을 것이다. (...) 어쩌면 목적은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행동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만든 배를 통해 계속 살아가게 되리라.' (p.107,108)


리비에르는 평상시처럼 전보를 하나하나 살펴보며 여기저기 지시를 내린다. 야간비행은 중단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 일을 다시 해야하고, 이렇게 하는 것만이 '자신의 신념에 대한 복수이자 증명'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에 자신이 겪은 패배가 '어쩌면 진정한 승리에 한발 다가서는 출발점'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리비에르는 우리의 삶을 나아가게 하는 것은 어떤 목표가 아니라 '행동'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이보게, 로비노, 인생에 해결책이란 없어. 앞으로 나아가는 힘뿐. 그 힘을 만들어내면 해결책은 뒤따라온다네." (p.103)


그는 인간은 목숨보다 값진 무언가를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개인의 희생은 값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목적이 모든 것에 우선하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규칙을 지킬 것을 조종사와 정비사들에게 강조하며, 그 규칙을 지키지 못했을 시에는 가차없이 책임을 묻는다.


뇌우가 심할 듯 하니 기항지에서 자고 가는게 어떻겠냐는 무선사의 제안에 파비앵은 "계속 갑시다."라며 일축한다. 시간엄수는 리비에르의 원칙 중 하나이다. '어떤 이유로든 출발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무조건 벌을' 받는 시스템은 모든 기항지에서 비행기들이 정시 출발을 하도록 긴장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고 실제로 성공하기도 한다. 

파비앵은 리비에르 입장에서 보면 매우 모범적인 조종사로 원칙을 지켰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땠는가...

만약 리비에르가 시간엄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조종사의 안전이라고, 인간의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조종사들을 가르쳤다면, 파비앵도 무선사의 제안을 한번 더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또한 리비에르는 날씨가 좋았는데도 되돌아온 조종사를 추궁한다. 조종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엔진도 심하게 진동, 설상가상으로 소용돌이를 만나 두려웠다고 고백한다. 

리비에르는 그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그를 단련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리비에르의 생각대로라면 그 조종사는 앞이 안보이고 소용돌이를 만나도 두려움을 극복하고 계속 비행을 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리비에르가 추구하는 자기초월이며 인간은 그런 극복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리비에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내 안에서 여러가지 의문과 생각들이 떠올랐다.

규칙은 어느 한 집단을 통제하고 잘 유지되게 할 수도 있지만 그 규칙이 인간의 목숨까지 걸고 지켜져야 하는 상황에 나는 동감할 수 없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어느 정도 남을 위해 희생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그 책임감이 절대적으로 강요되어 개인이 전체가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한 하나의 부속품으로 전락한다면 그것은 비극일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파비앵의 마지막은 숭고하고 아름답게 그려졌지만 그것은 작가의 생각일 것이다. 파비앵은 살고 싶어했다. 파비앵 부인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리비에르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갔다. 비행 우편산업이 이런 개인들의 삶에 고통을 주면서까지 유지되어야 하는지...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이런 수많은 희생을 통해 지금 비행산업은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 이런 희생이 비행산업 뿐이겠는가...다수의 행복과 개인의 행복 사이에서 어디 쯤이 모두를 위해 좋은 지점일까...

이런 생각은 늘 답이 없이 머리만 복잡한 상태에서 끝난다. 


비록 리비에르라는 인물에 내가 깊이 공감은 못했지만, 그가 자신이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책임자로서 감정을 배제하고 냉철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끊임없이 묻고 갈등하며 행동으로 나아가는 모습 속에는 자신의 일과 동료들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없는 그는 외로운 인간이다. 오직 밤하늘만이 그의 친구이며, 그는 죽어서도 밤하늘에서 계속 살아가게 되리라...


생텍쥐페리는 '야간비행'이라는 낯설면서도 낭만적인 이야기를 서정적인 문장으로 아름답게 묘사했다. 특히 섬뜩한 신비를 품고 있는 밤하늘과 그 까마득한 밤하늘을 홀로 비행하는 조종사의 모습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한 순간도 내 머리 속을 떠나질 않았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03-17 13: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도까지 그리시다니 ㅋ 저는 읽어본게 어린왕자랑 야간비행 밖에 없는데~ 글보니까 야간비행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기억이 가물가물^^

coolcat329 2021-03-18 10:44   좋아요 2 | URL
이 책 읽어보셨군요. 저도 어린 왕자랑 이 책만 읽어봤는데, 내용보다도 밤하늘 비행 묘사가 참 아름답고 신비로워 인상깊었어요. 마치 제가 비행하는 것처럼요~
오늘도 책 읽는 좋은 하루 되셔요~

scott 2021-03-18 16: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어린 왕자보다 이책 야간 비행 정말 정말 좋아해요 프랑스에 생텍쥐베리 에게 편지나 엽서 보내는 그런것도 있어요 마치 산타 할배에게 편지 쓰듯 ㅋㅋㅋ 지금은 유로화 되어 사라졌지만 프랑스 종이돈50프랑에 생텍쥐베리가 탔던 비행기와 지도 그려진 돈 소중히 간직하고 있음 ^.^

coolcat329 2021-03-18 16:31   좋아요 2 | URL
우와~ 50프랑 찾아보니 진짜 생텍쥐페리네요~또 하나 알게되었습니다.😊 정말 소중한 돈이네요.

레삭매냐 2021-03-19 13: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살면서 파타고니아에 언젠가
한 번은 가보고 싶다 뭐 그런 생각
을 해봤습니다.

아옌데 대통령 묘를 찾아 헌화하
고 싶구요.

coolcat329 2021-03-21 09:33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군요. 저는 파타고니아 옷 상표만 알았지 어딘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

scott 2021-04-09 15: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쿨캣님 야간비행으로
이달의 당선작이 되심
축하 합니다. ^ㅎ^

coolcat329 2021-04-09 16:54   좋아요 1 | URL
아니 어떻게 이렇게 저보다 먼저 아시죠? 저는 알림이 왔는데 뭐가 당선된건지도 모르겠는데요.

감사합니다. 스콧님은 참 세심하셔요🤭
 
대위의 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위의 딸>은 푸시킨이 죽기 1년 전 발표한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며 러시아 산문의 출발을 알리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시대 배경은 예까쩨리나 2세 통치 시절로 그녀는 남편 표뜨르 3세를 폐위시키고 1762년 스스로 제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녀는 독일계의 가난한 귀족 출신으로 유럽의 계몽사상을 러시아에 전파시키겠다는 의지를 갖고 제위에 오르지만, 실제로 그녀의 정치는 자신과 귀족들을 위한 것이었다. 귀족들의 특권은 늘어나는 반면, 농노들은 귀족에 예속, 농노제는 나날이 확대되어 농노들의 삶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따라서 예까쩨리나 2세 통시 기간 동안 농민들의 크고 작은 봉기가 끊이지 않았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반란이 '뿌가쵸프의 반란'(1773~1775)이다.


뿌가쵸프란 인물은 무식한 농부 출신으로 '본의 아니게 탈옥범이 되어 전국을 떠돌아 다니던 중' 민중들의 봉기를 목격하고 스스로 봉기를 일으킨 인물로 자신을 표트르3세로 칭하며 수많은 추종자들을 끌어 모은다. 러시아 군의 요새를 점령, 위세를 떨치며 예까쩨리나 정부를 위협하나 1774년 수보로프 장군에게 크게 패하여 결국 1775년 처형된다. 


<대위의 딸>은 바로 이 '뿌가쵸프 반란'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그리뇨프는 지방 귀족의 아들로 변방 요새로 부임되어 가는 도중 눈보라를 만나 길을 잃는다. 그때 우연히 한 농부를 만나고 그의 도움으로 길을 찾게 된다. 다음날 그리뇨프는 하인 사벨리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길을 안내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그에게 토끼가죽 외투를 준다. 농부는 "나리의 은혜는 길이길이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인사하는데, 이 우연한 만남과 농부의 이 말은 나중에 그리뇨프의 운명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요새에 도착한 그리뇨프는 사령관 미노로프 대위의 가족과 만나고 대위의 딸 마리야와 사랑하게 된다. 이들의 사랑을 질투하는 선임 장교 쉬바브린의 중상모략과 이어지는 결투로 인해 그리뇨프는 부상을 입게 되나 마리야와의 사랑은 더욱 깊어진다. 그러나 아버지의 결혼 반대, 부모가 축복하지 않는 결혼은 할 수 없다는 마리야, 쉬바브린의 적의 등으로 인해 그는 점점 의욕과 사기를 잃는다. 이런 음울한 시기에 정신이 번쩍들게 하는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뿌가쵸프의 난'이다.


사실 그리뇨프가 요새로 오기 전에도 근처 현에서 폭동이 일어나 소장이 무참히 학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폭동의 무리는 나날이 그 세력이 커져, 가는 곳마다 약탈과 살인을 저지르고 몇몇 요새는 점령당하는 상황에서 그리뇨프가 있는 벨로고르스끄 요새도 뿌가쵸프의 습격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비장한 각오로 폭도들의 습격을 기다리고 있던 수비군들은 막상 사령관의 "돌격, 나를 따르라!" 라는 외침이 들리자 겁에 질려 꿈쩍도 하지 못한다. 

폭도들에 의해 사령관 부부는 처형되고 영악한 쉬바브린은 반란군 편으로 넘어가고 그리뇨프는 생포되어 처형 직전까지 가게 된다. 

그 긴박하면서도 중요한 전투 장면이 한 페이지도 안되서 끝나버리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그 어떤 것도 기약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지만 푸시킨은 이 무시무시한 순간을 짧고 간결하게 묘사, 시종일관 유쾌하면서도 가벼운 어조를 유지한다. 


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일어난 뿌가쵸프의 반란은 실제로 매우 잔악하여 그 정당성에 흠집을 내지만 그래도 푸시킨은 러시아 정부의 폭압적인 정치에 반발한 뿌가쵸프를 나쁘게만 그리지 않는다.


이목구비가 번듯한 것이 꽤나 서글서글해 보였고 흉악한 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 모두들 전우처럼 격의 없이 어울렸고 대장이라고 해서 특별히 공대하는 눈치는 없었다. (...)저마다 자기 자랑을 해대며 의견을 개진했고 또 자유롭게 뿌가쵸프를 반박했다. (p.107,108)


뿌가쵸프의 호감가는 외모와 반란군들이 서로 격의 없이 편하게 대하는 모습은 위계질서가 분명한, 그러나 안일한 러시아 군관료들과 비교되는 부분으로 푸시킨의 상상으로 새롭게 탄생한 뿌가쵸프의 모습이 흥미롭다. 그와 헤어지는 순간에는 연민의 감정에 사로잡혀 '그가 지휘하는 폭도의 무리에서 그를 떼어 내어 더 늦기 전에 그의 목숨을 구해 주고 싶다는'(p.158) 생각을 하고, 나중에 그의 체포 소식을 듣고는 전쟁이 끝났다는 기쁨과 함께 어떤 알 수 없는 분노도 느낀다.


예멜랴, 예멜랴! 당신은 어째서 칼 아래 쓰러지지 않았소? 왜 포탄 앞에 몸을 던지지 않았소? 차라리 그랬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p.169)


러시아 정부 입장에서 뿌가쵸프는 나라를 뒤흔든 포악한 폭도에 불과하지만 그리뇨프에게는 자신과 마리야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고, 고마움에 보답할 줄 아는 하나의 인간인 것이다. 역사 속에서는 한낱 폭도에 지나지 않는 뿌가쵸프가 푸시킨의 문학 속에서는 의리를 지키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점은 흥미롭다.


푸시킨은 러시아 정부에 반기를 든 뿌가쵸프를 칭송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나쁜 악인으로 그릴 수도 없었던 듯 하다. 가혹한 전제정치에 고통받는 농노들의 삶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잘못되었음을 알았지만, 본인 또한 귀족 출신으로 직접 나서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은 그가 황실의 감시와 검열을 받는 작가였음을 상기시킨다. 


작품의 뒤로 가면 예까쩨리나 여제가 나오는데, 그녀의 등장은 마치 어려움에 처한 주인공을 도와주는 동화 속 요정을 연상케 한다. 뿌가쵸프가 흉악함이라고는 없는 서글서글한 모습으로 그려졌듯이 그녀 또한 '통통하고 혈색 좋은 얼굴'에 '푸른 눈과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는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뿌가쵸프와 예까쩨리나 2세 두 사람 다 자신의 권력을 무섭게 휘두르지만 한편으로는 자비를 베푸는 인간적인 선함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푸시킨은 예까쩨리나 여제와 비천한 폭도 두목 뿌가쵸프에게 동등한 위치를 부여함으로써 그 시대가 감추고 있는 어떤 진실을 보여주고자 했는데, 역자 석영중 교수의 설명대로 그것은 바로 권력이 지니는 어떤 '허망'함이 아닌가 싶다.  


푸시킨은 정부군과 반란군을 다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그들이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폭력, 살인은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누가 됐든지 간에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무자비한 폭력, 고문, 살인은 옳지 않음을 이 가벼운 어조의 소설에서 간간히 드러낸다. 


이것이 한때 우리 시대에 일어났음을 돌이켜볼 때, 그리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는 알렉산드르 황제의 온화한 통치하에 있음을 상기해 볼 때 나는 문명의 급속한 발달과 박애주의적 법규의 확산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청년들이여! 만일 나의 이 수기를 읽게 된다면 기억해 주기 바란다. 보다 훌륭하고 항구적인 개혁은 일체의 폭력적 강요를 배제한 풍속의 개선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p.85)


강도의 무리가 도처에서 만행을 일삼았다.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제멋대로 사람들을 처형하기도 하고 사면해 주기도 했다. 전란의 화염이 휩쓸고 지나간 저 광활한 지역의 상황은 처참했다......신이여 다시는 이렇게 무의미하고 무자비한 폭동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소서! (p.168)


뿌가쵸프만이 폭력을 휘두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진압하는 러시아 군대도 '제멋대로 사람들을 처형'한 점을 지적한다.

도와준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비천한 농부에게 건네 준 토끼가죽 코트가 그리뇨프의 목숨을 구했듯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억압과 폭력이 아닌 인간이 품고 있는 선량함이라는 것을 푸시킨은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이로써 푸시킨의 소설은 <벨킨 이야기>, <예브게니 오네긴>과 함께 총 3권을 읽었다. 푸시킨을 읽으며 한 가지 분명히 드는 생각은 그는 천재라는 것이다.

작품해설에서 역자는 뿌쉬낀이 '러시아 산문 발전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전통의 확립에는 실패'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의 산문은 너무도 시대를 앞서간 나머지 당대 및 후대 작가들의 모방을 불허했기 때문'(p.226)이다. 

만약 그가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뜨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늘 이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03-14 20: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 1권 읽어봤는데 리뷰 보니 너무 읽고 싶어지네요 ㅎ

coolcat329 2021-03-15 07:38   좋아요 1 | URL
책이 그렇게 두껍지 않아서 금방 읽으실 거에요. 부족한 글인데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1-03-19 13: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오래 전에 푸시킨의 소설을
읽고도, 푸시킨이 소설도 썼나?
했다니 고저 무식의 소치입니다.

coolcat329 2021-03-19 15:00   좋아요 1 | URL
그쵸? 레삭님 대위의 딸 리뷰 2010년에 쓰셨더라고요. ㅎ 잊어버리실만도 한 세월입니다😆
 
니클의 소년들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은 끊이지 않는 이슈이다. 미국의 흑인들은 80년 넘게 시행된 짐 크로법(Jim Crow Law,1876~1965)에 의해 모든 공공장소에서 백인과 분리되어 차별을 받았다. 버스를 타도 백인 전용좌석에는 앉을 수 없었고, 식당이나 극장, 화장실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없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차별은 사회,경제적으로 흑인들이 뒤처질 수밖에 없는 극심한 불평등을 야기했다.

 

이 소설은 이런 차별과 그에 대한 저항이 극에 달하던 시기인 1960년대 미국의 인종차별을 다룬 소설로 작가 콜슨 화이트헤드는 2017년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에 이어 이 작품으로 2020년 두 번째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연이어 발표한 작품이 퓰리처 수상작이라니 이번에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는 "그 녀석들은 죽어서도 골칫덩이였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미국 플로리다 주 탤러해시의 폐쇄된 니클 캠퍼스에서 수 십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던 시체들이 고고학과 학생들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다. 

'금이 가거나 구멍이 뚫린 두개골, 대형 산탄이 잔뜩 박힌 갈비뼈 등' 심상치 않은 유해들이 언론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지고, 그곳에서 학대를 받은 피해자들의 아픈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 감화원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었던 폭력의 실체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동안 아무도 믿지 않았던 그들의 말에 이제야 세상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2014년 현재 뉴욕 시에 사는 엘우드 커티스도 당시 니클 감화원에 있던 피해자로서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이제는 자신도 나서야 할 때가 되었음을, 과거 자신과 자신의 친구가 겪어야 했던 그 잊을 수 없고 잊혀져서도 안 되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플로리다로 향한다. 


총 3부로 구성된 이야기는 엘우드의 어린 시절에서 시작한다. 

우선 이 엘우드라는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엘우드는 할머니가 청소부로 일하는 호텔 주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식당 문이 열릴 때마다 흑인 손님이 있을지를 두고 혼자만의 게임을 하는 소년은 1962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마틴 루터 킹의 연설 앨범을 들으며 자신의 가능성과 꿈을 키워나간다.


"반드시 우리의 영혼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중요한 사람입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이므로, 매일 삶의 여로를 걸을 때 이런 품위와 자부심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p.39)


킹 목사의 말은 어린 엘우드에게 깊이 각인되어 그에게 하나의 신념으로 다가온다. 

나의 자존감을 빼앗고 나를 억누르는 크고 작은 힘 앞에서 나 자신을 잃으면 안된다는, '너는 자신이 누구인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신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바로 인간으로서 품위를 잃는 것이기에 세상이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사실을 원칙으로 삼는다.  


엘우드는 이런 믿음으로 할머니 몰래 극장 앞 시위에도 참가하고, 이런 경험은 그가 좀 더 자신의 꿈을 구체적으로 설계하게 만든다. 엘우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 들어가 어떤 공부를 할지 고민하며, 한편으로는 '흑인의 지위 향상에 헌신' 을 하겠다는 꿈을 갖는다. 

엘우드는 이런 아이였다. 킹 목사의 연설을 마음 속에 새기며 바르게 생활하고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하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을 하다보면 이 세상은 좀 더 바른 길로 갈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그런 선량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엘우드는 학교 선생님의 추천으로 우수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대학에서 하는 강의를 들으러 가던 날, 너무나 어이 없게도 자동차 도둑으로 몰려 니클(Nickel)이라는 소년 감화원에 가게 된다. 재수 없게도 히치하이킹을 했던 차가 훔친 차량이었고, 그 차에 타고 있었다는 이유로 차 도둑으로 몰린 것이다. 대학에 진학할 만큼 똑똑하고 성실하며 정직한 아이가 어떻게 한 순간에 소년원으로 갈 수 있는가...

1부 마지막 경찰의 말은 엘우드가 왜 아무 의심없이 소년원으로 가야하는지 보여준다. 

"그런 걸 훔치는 사람은 검둥이뿐이라고."


니클은 1899년, 어린 범법자들이 새로운 교육을 받고 '새 사람이 되어 훌륭한 시민의 품성과 목적의식을 지니고 사회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감화원' 이라는 취지로 문을 연 학교이다. 범죄를 저지른 소년은 물론, 갈 곳 없는 아이들도 온다. 

니클에는 백인 소년과 흑인 소년이 있지만, 그들의 공간은 피부색에 따라 완전히 분리, 인종차별이 그 어디보다 철저하게 이뤄진다. 제이미라는 소년은 어머니가 멕시코인이라 흑백의 구분이 모호하여 처음엔 백인 기숙사에 있었으나 라임밭에서 일하고 피부가 탄 뒤에는 유색인종 반으로 옮겨지는데, 나중에 피부가 다시 제 색깔로 돌아오자 다시 백인 진영으로 보내지고, 또 다시 그게 못 마땅한 선생에 의해 다시 흑인 쪽으로 보내지는 웃지 못할 상황도 일어난다. 

피부색에 따라 기숙사 환경과 음식, 대우도 당연히 다르다. 


엘우드는 킹 목사의 연설을 생각하며, '난 여기 붙잡혀 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할 거야. 여기서 보내는 시간을 짧게 줄일 거야.' 라며 마음을 다잡지만 현실은 그의 이런 순진함을 뭉개버린다. 

어느 날 괴롭힘을 당하는 어린 소년을 도와주려다가 선생에게 걸려 잔혹한 체벌로 악명 높은 '화이트하우스'로 끌려 가게 되고 그곳에서 채찍질을 당해 기절을 하게 된다. 

열심히 하면 니클도 자신의 노력을 알아 줄 것이라는 엘우드의 믿음은 이런 폭력과 모욕으로 되돌아 오고 그는 자신이 와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그 실체를 알게 된다.


니클에는 폭력과 차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학교 관리자들은 주 정부가 지급한 물품을 빼돌려 시내 상점에 팔아 이익을 챙긴다. 엘우드는 친구 잭 터너의 추천으로 '지역봉사활동'을 나가게 되는데, 그들이 하는 일은 시내에 나가 상점마다 다니며 빼돌린 보급품을 전달하는 것이다. 각종 통조림, 공책, 연필, 의약품 등이 이렇게 사라지고 그제서야 엘우드는 왜 학생들에게 치약이 공급되지 않았는지 알게된다. 또한 학생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얻은 수익금으로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우기 바쁜, 니클은 그야말로 부정부패의 온상이다. 

엘우드는 어떤 본능에 이끌려 이런 니클의 부정을 매일매일 적어둔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기록이 이런 일들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가지고.


현실에 체념, '침묵의 미덕'을 받아들이며 터너와 '지역봉사활동'을 하며 조용히 지내던 엘우드는 어느 날 자신의 실체를 보게된다.

'오랫동안 억압당한 끝에 그냥 현실에 안주하며 멍해져서 그 현실을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침대로 여기고 잠드는 법을 터득한 검둥이'에 불과한 자신을...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음에 안도하며 고개 숙이는 자신의 모습...그건 바로 니클이 원하는 모습임을 깨닫게 된다.

그는 생각한다. 니클을 나가는 방법은 탈출, 죽음 이외에 한 가지가 더 있다는 것을...

'니클을 없애는 것'


주 정부에서 감사가 나오는 날, 엘우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한다. 그동안 니클에서 일어난 비리와 폭력을 낱낱이 적은 편지를 감사관에게 전하는 것이다. 이를 말리는 터너에게 엘우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건 장애물 경주가 아니야. 장애물을 피해서 돌아갈 수가 없다고. 반드시 장애물을 통과해서 가야 돼. 놈들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든 고개를 꼿꼿이 들고 걸어가야 돼."(p.218)


엘우드는 킹 목사가 말한 '긍지와 자부심'을 생각한다.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궁극의 선의'에 기대를 걸 수 밖에 없음을 알지만, 그래도 세상은 '버스에서 앉으면 안 되는 자리에 앉은 여자, 금지된 식당에 들어가 호밀빵에 햄을 얹은 샌드위치를 주문한 남자 덕분'에 조금이라도 바뀌었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의 이 편지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작가는 플로리다 주에 실제로 있었던 도지어 남학교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 책의 일부 내용은 실제로 이 학교를 경험했던 사람의 이야기에서 가져왔으며, 무자비하게 채찍질을 가했던 '화이트 하우스'도 실제로 있었음을 '작가의 말'에서알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형제복지원'이 생각났다. 암매장, 폭력, 감금, 노동착취, 횡령 등 그 모습이 얼마나 닮았는지, 약자들을 상대로 잔인하게 가해지는 폭력과 인권유린은 너무나 많고 어디나 그 모습은 비슷하다. 

또한 작년 미국에서 일어났던 조지 플로이드 사건도 떠올랐다. 경찰의 무릎에 목이 깔려 "숨을 쉴 수 없어요. 온 몸이 아파요. 난 죽을거 같아요" 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찍힌 동영상은 많은 이들의 분노를 자아냈고 미국에서는 전국적인 시위로 확산되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은 너무나 자주 이야기되는 이슈이고 미국의 뿌리깊은 사회 구조적 문제라 진부하게 생각되기도 하지만 지금 현재 21세기에도 보란듯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작가 콜슨 화이트헤드는 4년 전 한국의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하버드대 출신에 유명 소설가인 당신도 인종차별을 겪나?"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차별을 겪었다. 성공하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흑인이다. 이건 돈과 명예 여부와 관련이 없다."  


이 소설은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엘우드라는 소년을 통해, 지금도 여기저기서 자행되고 있는 차별과 폭력에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시위를 하고 백인들을 설득해서 법을 바꾸면 평등한 세상이 올거라고 믿는 순진한 엘우드에게 잭 터너는 세상의 민낯을 보여주고자 쇠고리가 박혀 있는 떡갈나무 두 그루를 보여준다. 흑인 아이를 데려와 쇠고리에 묶어놓고 채찍으로 후려쳐 걸레로 만드는 곳. 


아무리 법을 바꾼다해도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지 못한다면 세상을 지배하는 악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작가는 터너를 통해 보여준다. 

'사악함의 뿌리는 단순히 피부색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이런 곳에 오게 만든 그 모든 부모들, 사람들이 문제' 인 것이다.

차별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만이 아닌 인간 본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생각해보게 한다.

이 소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한 본성이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음을 새삼 일깨워준다. 


구성과 문장, 메시지 모든 것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잘 짜여진 작품이다. '위대한 문학의 힘'을 보여주는 소설이라는 천명관 작가의 말에 동감한다. 

특히 마지막 에필로그에서의 그 전율은...많은 사람들이 느껴봤으면 좋겠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5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1-03-05 15: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 잘못된 것을 바꾸려는 행동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움직임이 당장의 효과는 가져오지 않더라도 의미는 있을거라는~! 결말부분은 저도 놀랐었습니다. ㅎ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coolcat329 2021-03-05 15:44   좋아요 2 | URL
읽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읽고 난 후에 뒤늦게 감동이 밀려오는게 작가가 치밀하게 잘 썼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파랑새님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셨군요. 행동의 중요함~~댓글 감사합니다 ~~

레삭매냐 2021-03-05 15: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진심이 담긴 리뷰 잘 보고 갑니다.

전 작년에 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이
그야말로 맨발로 달려가 사서 읽었
던 기억이 납니다.

하버드 출신도 인종주의 차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니... 슬프네요.

coolcat329 2021-03-05 15:46   좋아요 2 | URL
그쵸~~하버드출신에 유명작가인데 차별은 같으니까요.
레삭님 책 사러 달려 나가시는건 뭐~~이젠 놀라지 않습니다 ㅎㅎ 댓글 감사합니다 ☺

막시무스 2021-03-05 2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을 대하는 태도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말씀은 정말 공감하고 감동적입니다!ㅎ

coolcat329 2021-03-05 21:19   좋아요 1 | URL
네~아무리 법과 규칙이 바뀌어도 인본주의가 바탕에 깔려있지 않으면 악의 뿌리는 그대로 남는다는 메세지가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감사합니다 ☺

메모습관 2022-06-25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서야 읽어보았답니다. 리뷰에 너무 너무 공감하며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coolcat329 2022-06-25 21:44   좋아요 0 | URL
아~ 글을 잘 못쓰는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예브게니 오네긴 열린책들 세계문학 79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국의 셰익스피어, 독일의 괴테가 있다면 러시아에는 푸시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러시아인들은 어릴 적엔 푸시킨의 동화를 듣고 청년기에는 그의 시를 읽고 자란다고 할 정도로 푸시킨은 러시아에서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는 국민작가이다. 또한 문학적으로 성취한 그의 업적은 방대하고 모든 장르에 걸쳐있어 훗날 많은 러시아의 문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예브게니 오네긴>은 푸시킨과 동시대를 살았던 평론가 벨린스끼가 "러시아 생활의 백과사전"이라고 칭송한 운문소설, 즉 시의 형식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그냥 소설을 쓰기도 힘들텐데 소설의 서사를 시적 형식으로 표현한 점, 무엇보다 이 작품을 완성하는데 거의 8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린 점을 볼 때 푸시킨은 이 작품에 많은 열정과 자부심을 가졌던 듯 싶다.

 

총 8장으로 구성, 각 장에는 40~60개의 연이 포함되어 있다. 또 각 연은 14행으로 이루어져 있어 책을 펼쳐 보면 소설이 아니라 긴 시처럼 보인다.  

이 운문 소설은 귀족 청년 오네긴과 러시아 시골 귀족의 딸 따찌야나의 엇갈린 사랑을 기본으로 한다. 사랑 이야기를 기본 골격으로 그 위에 푸시킨의 러시아 사회와 문화에 대한 생각, 문학에 대한 평, 그 외 사적인 이야기들이 덧붙여 전개 되는데, 나오는 작가, 예술가만도 수십여 명에 여러 책과 그와 관련된 인용문들 등, 기본 스토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이런 이야기들이 불쑥불쑥 나와 러시아의 정서와 문화에 낯선 나에게는 어렵고 지루하게 다가왔다.

 

예를 들면 1장에서 화자인  '나'(푸시킨)는 무도회에 간 오네긴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자신의 방탕한 과거 이야기를 하는데, 자신은 러시아 귀부인의 '앙증맞은 발을 사랑한다' 며 30연에서 34연까지 발에 대한 찬양을 한다. 또한 2장에서 따지야나의 부모가 나오는데, 러시아 전통문화를 지키며 소박하게 사는 노부부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그려진다.

 

그들은 평화로운 삶 속에

그리운 옛 풍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기름진 버터 주간에는

러시아 식 블린을 구웠고

일년에 두 차례씩 단식제를 지켰고

둥그런 그네 타기와

접시의 노래와 윤무를 즐겼다.

사람이 하품을 하며 기도문을 듣는

성 삼위일체 축일에는

땅두릅의 작은 다발에

자못 경건하게 세 방울쯤 눈물을 흘렸다.

끄바스는 공기 같은 필수품

손님을 대접할 때는

관등순으로 요리를 돌렸다.

 

-2장 35연(p.74)

 

버터 주간, 블린, 단식제, 접시의 노래, 세 방울 눈물, 끄바스같은 말들은 주석이 없이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다 러시아의 풍습과 관련이 있는 단어들이며 이 노부부가 러시아의 전통 속에서 소박하게 산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구체적으로 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매번 주석을 읽어야 하니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러시아 문화와 풍습을 공부하는 기분이 들었다.

'러시아 사람이 우리나라 판소리 소설을 읽으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싶다.

 

오네긴은 페테르부르그 출신, 귀족 계습으로 유창한 프랑스어, '최신 유행의 모범적인 추종자', '댄디 같은 런던 식 의상'으로 사교계에서 멋진 청년으로 통한다. 여자들을 다루는 데도 능숙, '하루에 세 시간은 거울 앞에서' 보낼 정도로 멋쟁이, 그야말로 돈많고 시간 많은 전형적인 바람둥이이다. 그의 사고방식과 옷차림은 유럽 스타일로 그의 몸치장을 위한 내실을 묘사한 부분을 보면 그가 얼마나 사치스럽고 외모에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있다.

 

이스탄불에서 들여온 호박 파이프,

탁자 위의 도자기와 청동상,

섬세한 감정에 기쁨을 더해 주기 위해

크리스털 병에 담겨진 향구,

머리빗과 손톱 다듬는 철제 줄칼,

쭉 뻗은 가위, 구부러진 가위,

손톱을 소제하거나 이를 닦는 데 쓰는

서른 가지나 되는 각종 솔들.

 

1장 24연 중 (p.26)

 

그는 매일같이 이렇게 몸치장을 하고 새벽까지 오페라 극장, 무도회를 옮겨 다니며 화려하지만 무의미한 삶을 산다. 그러다 이런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급기야 우울증에 걸리는데 푸시킨은 그것을 '영어식으로 말해 스플린, 혹은 간단히 러시아 식의 우울증' (1장 38연) 이라고 말한다.

이런 우울한 모습으로 살롱을 드나드는 오네긴을 푸시킨은 바이런의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에 등장하는 '차일드 해럴드'에 빗대서 묘사하는데, 차일드 해럴드는 세상에 대해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는 오만하고 자유분방한 인물로 푸시킨은 이런 낭만주의 작품 속 인물을 오네긴으로 패러디 함으로써 당시 귀족 청년들을 풍자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나중에 7장에서 동생 올가가 결혼해서 떠나고 홀로 남아 외로운 따찌야나는 떠나고 비어있는 오네긴의 집에 가게 된다. 바이런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그의 서재에서 오네긴의 책들을 보면서 따찌야나는 그가 '무슨 생각과 사상에 매료되어 있었는지' 느끼며, 오네긴의 실체를 알아보게 된다.

 

그리하여 나의 따찌야나는

다행스럽게도

차츰차츰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전능한 운명의 신이

탄식의 대상으로 정해 준 사내의 정체를.

슬프고 위대한 기인,

천국, 혹은 지옥의 피조물,

천사, 아니면 오만한 악마,

그는 과연 누구인가? 모조품,

보잘것 없는 유령, 아니면

해럴드의 망토를 걸친 모스끄바 인,

아니면 타인의 변덕이 만들어 낸 해석,

유행어로 가득 찬 사전.....?

결국 그는 하나의 패러디 아닌가?

 

-7장 24연 (p.212)

 

소설을 좋아한 따찌야나는 공상 속에서 소설 속 인물들과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던 시골의 순박한 귀족 처녀였다. 그런 그녀가 처음 오네긴을 보고 사랑을 느끼고 소설 속 주인공들과 그를 동일시하는 모습은 시골에서 공상 속에서만 사랑을 꿈꿨던 그녀에겐 어찌보면 당연한 모습이다. 그러나 실연의 아픔을 겪고 성숙해진 그녀는 자신을 그토록 잠 못 이루게 했던 이 청년이 사실은 '하나의 패러디'이자 '보잘 것 없는 유령', '모조품'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따찌야나도 당시 귀족의 자녀처럼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자랐으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녀의 부모는 러시아의 풍습과 전통을 지키는 소박한 귀족이다. 따찌야나라는 이름도 세련된 이름이 아니라 촌스러운 러시아식 이름이며 그녀의 모습도 세련됨과는 거리가 먼 소박한 모습이다. 또한 그녀는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음에도 그녀의 내면은 '러시아적인 정서'로 가득 차 있다.

 

(자신도 왜인지는 모르지만

러시아적인 정서로 가득 찬) 따찌야나는

러시아의 겨울을

그 차가운 아름다움을 사랑하였다.

 

-5장 4연 중

 

차가운 러시아의 겨울을 사랑하는 따찌야나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민간 전설이며 꿈이며 카드 점이며 달님의 예언 같은 것'을 믿는다. 그녀는 오네긴이 나오는 무서운 꿈을 꾸고 나서 마르틴 자데카가 쓴 해몽책을 보면서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본다. 이 책은 서적 행상인에게 산 책으로 '슬플 때는 언제나 위안을 주고 잠자리에 들 때는 동반자'가 되는 애독서일 정도로 그녀는 러시아의 전통을 의지하고 믿는다. 이러한 미신을 믿는 그녀의 모습은 세련된 프랑스 교육을 받은 귀족이 아닌 순박한 시골 여인의 모습이다.

 

이렇게 러시아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 사이에서 균형잡힌 인간으로 성숙해가는 따찌야나의 모습은 마지막 8장에 가서 올바르고 정숙한 귀부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미숙한 '하나의 패러디'에 불과한 오네긴과 대조된다. 뒤늦게 사랑을 고백하는 오네긴에게 따찌야나는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그의 허영심을 지적한다.

 

저는 당신의 사랑을 얻지 못했습니다......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저를 쫓아다니시나요?

어찌하여 제가 당신의 눈에 들게 되었나요?

(중략)

당신은 사교계에서

유뷰녀를 정복했다고

자랑할 수 있기 때문 아닌가요?

 

-8장 44연 중

 

따찌야나는 위선으로 가득한 화려한 사교계를 벗어나 '책장과 황량한 정원이 있는 초라한 고향집'으로 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성실과 책임을 다 해야 하는 자신의 의무를 언급하며 마지막으로 오네긴에게 말한다.

 

아, 행복은 손에 잡힐 듯

그토록 가까이 있었건만......! 그러나 제 운명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중략)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감춰서 뭐 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한 몸,

영원히 그이에게 성실할 겁니다.

 

-8장 47연 중

 

소설에 심취해 비현실적인 공상 속에서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던 시골 소녀에서 기품있고 도도한 사교계의 공작부인으로 거듭난 따찌야나. 이런 외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자신의 본분과 의무를 저버리지 않은 강인함과 고결함을 지닌 여인으로 성숙하는데, 이는 겉만 번지르르한 오네긴과 분명히 대조된다.

 

푸시킨의 소설은 <벨킨 이야기>만 읽어봤는데, 이번에 만난 <예브게니 오네긴>은 처음엔 이해하기도 힘들고 큰 재미도 없었지만, 중간중간 반복해서 여러 번 읽어보니 푸시킨이 이 소설 속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쏙쏙 숨겨놓은 거 같아 작은 재미를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러시아 근대문학의 출발을 알리는 러시아 국민작가의 작품이니 그것만으로도 뜻깊은 독서였다고 하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1-03-01 16: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푸시킨의 시를 예전에 참으로
좋아했었는데...

소설도 쓴 줄은 몰랐네요.

coolcat329 2021-03-01 16:58   좋아요 2 | URL
레삭님이 푸시킨의 소설을 모르셨다니 정말 의외입니다. 분명 아실거 같은데요...🤔
근데 소설이 별로 많지가 않죠. ㅠ 장편은 이거랑 <대위의 딸>이 있고, 단편이 좀 있으니까요...
너무 예쁜 여자랑 결혼해서 ㅠㅠ 나탈리아 곤차로바! 이 여자만 안 만났어도...ㅠㅠ 여자 잘못 만나 천재의 인생이 허망하게 38살에 끝났으니 참 안타깝죠.

Falstaff 2021-03-01 17: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건 차이콥스키의 오페라가 더 좋던데요.
마지막에 따찌야나가 오네긴에게 뺀찌 놓는 장면도 노래로 들으면, 대개의 여성들이 속이 다 션~하다, 라고 반응하더라고요. ㅋㅋㅋㅋ
반면 저는 오네긴에게, 입장 바꿔 생각해봐라, 네가 따찌야나라도 미쳤냐, 백만장자 늙은 상이군인 남편이 언제 숟가락 놓을지 모르는데 너 따라 가게, 하지 않았을까...했다고 얘기했다가 여성분들한테 멍석말이 함 당했습니다. ㅋㅋ

coolcat329 2021-03-01 17:26   좋아요 0 | URL
ㅋㅋㅋ 역시 재밌으세요~~ 마지막 따찌야나 뺀찌 장면ㅋㅋ 오페라 찾아 들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