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8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칠레의 굴곡진 현대사를 배경으로 그 고통의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극복해 나가는 여성들의 삶을 현실과 환상을 절묘하게 버무려 진솔하게 보여준 소설. <백 년의 고독>이 남성을 중심으로 한 가족사라면 <영혼의 집>은 여성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사 대에 걸친 가족사이다. 100% 재미 보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37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의 의무는 그들을 강제로 행복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p.7)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1884~1937)의 <우리들>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와 함께 3대 디스토피아 소설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20세기 디스토피아 소설의 효시로서, 또 <멋진 신세계>와 <1984>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우리들>이 가지는 위상은 높다. 

<우리들>은 1920년에 완성되었는데, 당시 볼셰비키 혁명 후 내전이 한창이던 러시아에서 이 소설은 발표될 수 없었고, 1924년 영역본에 이어 1927년 해외에서 러시아어로 번역되었다. 


<우리들>의 배경은 과학 기술이 정점에 달한 29세기 미래 세계이다. 200년 전쟁으로 인류의 80프로가 죽고, 남은 인간들은 인류가 그토록 염원하던 지상 낙원인 '단일 제국'을 건설했다. 

'녹색의 벽'으로 자연과 분리된 공간인 단일 제국은 비이성적인 것, 개인적인 것은 모두 억압하는 전체주의 국가로서, '나'는 없고 오직 '우리'만이 존재하는 사회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의 독립된 존재가 아닌 '......중의 한 개인'(p.15)으로 생각한다. 

단일 제국에서 자유는 범죄이자 '미개한 상태'(p.7)를 뜻하기에, '수학적 오류가 없는 행복'을 추구하는 단일 제국에서 개인의 자유는 비밀 경찰인 '보안국'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다. 이들은 모두가 번호로 불리고,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유리 건물에 살며 절대 권력자인 '은혜로운 분'의 통치를 받는다. 

수백 만의 구성원은 '시간 율법표'에 따라 마치 한 사람처럼 기상하고 식사하고 산책을 한다. 또한 국가는 모든 번호들(단일 제국에서는 사람을 '번호'라고 부른다)의 성 호르몬을 분석하여 '각자에게 맞는 섹스 일정표를 산출'(p.33)해 준다. 성관계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이는 국가가 정한 신체 기준에 맞는 여자만 낳을 수 있다.


주인공 D-503은 우주선 '인쩨그랄'호의 조선 담당 기사이자 수학자로서 이성을 신봉하는 단일 제국의 충실한 '우리' 중 하나이다. 그는 단일 제국을 예찬하기 위해 자신이 보고 생각한 것을 기록하려고 하는데, 이 소설은 바로 그가 쓴 40개의 기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설은 이런 단일 제국의 모범 시민인 D-503이 I-330이라는 한 여성을 만나면서 사랑과 성에 눈을 뜨고 내적으로 혼란을 겪으며 자신이 몰랐던 진정한 자아를 만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 단일 제국에서 한낱 '번호'에 불과했던 D-503이 '인간'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주제로 하는 작품이다. 


내가 <우리들>을 읽으면서 놀란 점은 자먀찐이 이 소설을 쓴 1920년은 아직 스탈린 체제가 등장하기 전으로 '어떻게 작가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이렇게 비슷하게 예측할 수 있었는가'이다. 

'은혜로운 분'에 버금가는 스탈린, 비밀 경찰 엔카베데의 감시, 공개 투표, 대숙청, 개인의 자유 억압 등이 훗날 소련에서 일어났던 일과 너무나 비슷해서, 또 사람을 번호로 부르는 것은 나치 강제 수용소를 떠오르게 해서 놀랐다. 오늘날에 적용해도 맞는데, 현대인은 겉으로 보기엔 자유로워 보이나 자본주의의 감시 속에서 나도 모르게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틀 안에서 선택함으로써 인간의 결정권, 주체성을 침해받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예언한 작품이 100년 전에 쓰여졌다니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문장이 매우 상징적이라 이해하기 힘들었던 점은 조금 아쉽다. <멋진 신세계>와 <1984>에 지대한 영향을 준 소설이라 당연히 비슷한 수준으로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문장이 모호하고 상징과 은유가 많아 가독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소설이었다. 각각의 단어가 무엇을 상징하며 그 숨겨진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하며 읽느라 힘들었다. 


유토피아를 추구하면 할수록 디스토피아에 가까워지는 아이러니를 <우리들>은 보여준다. 자먀찐은 이성 만능주의와 과학 기술을 맹신하며 역사는 늘 진보한다는 신념을 가진 당대 소비에트 이상주의자들과 대립했다고 한다. 그런 이념들이 극단적으로 치달을 때 어떤 사회가 출현하는지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보여준다. 


이탈노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건강한 도시는 선과 악, 행복과 불행, 질서와 무질서가 공존하는 곳이다. 유토피아와 가장 가까운 사회는 모두의 행복을 위해 자유를 희생하는 곳이 아닌, 이성과 비이성, 투명과 불투명, 동질과 다양성, 문명과 야만, 미지수와 기지수, 엔트로피와 에너지가 공존하는 곳이다. 

인간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망하고 질문하는 존재이기에 이 세상은 혼란스럽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하여 배워나가는 그 과정이 진정한 유토피아에 다가가는 길이 아닐까?


<우리들>은 당시에 소비에트 체제를 비판하고 풍자한 작품으로만 인식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현대에 와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의미가 풍부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로써 3대 디스토피아 소설을 다 읽었다. 뭔가 뿌듯하다.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3-05-03 0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쿨캣님은 3대 디스토피아 소설 완독자시군요 ㅋ 좀 어렵다고 하시니 겁이 납니다 ㅎㅎ 전 1984만 읽어봤습니다 ㅋ

coolcat329 2023-05-03 07:52   좋아요 1 | URL
세 소설 중 가장 강렬했습니다.

물감 2023-05-07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디스토피아 좋아해서 읽어보고 싶은데 음 이해가 쉽진 않다니 망설여지네요. 저도 새파랑님처럼 1984만 읽었어요. 멋진신세계도 읽어야겠네요. 요즘 처음 보는 작가들만 도전하시는 쿨캣님, 계속 화이링 입니다 ㅎㅎ

coolcat329 2023-05-08 07:36   좋아요 1 | URL
물감님 디스토피아 좋아하시는군요~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같은 건 어떠신지요?
이 책 재미는 없습니다.🥱
다만 <멋진 신세계>와 <1984>에 큰 영향을 준 책이고, 집에 있어서 읽었네요.
새로운 한 주 활기차게 시작하세요~! 쉬시니까 월요일 너무 좋지요? 😆
 
한 톨의 밀알
응구기 와 시옹오 지음, 왕은철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한 톨의 밀알>은 응구기 와 티옹오(1938~)가 1967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케냐 독립 투쟁의 역사와 그 과정에서 민중이 겪어야 했던 삶의 고통과 슬픔을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는데, 서정적인 문체와 인물의 심리묘사, 소설의 서사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3-04-26 0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 넷이네요? 하나는 왜 어디로?! (제가 이 책을 읽을까말까 늘 고민 중이라)

coolcat329 2023-04-26 08:55   좋아요 1 | URL
아 이 책 참 좋습니다. 잠자냥님 안 읽으셨다니 놀랍네요.🫨
다만 한 군데 개연성이 좀 떨어지는 곳이 있어서 별 하나 뺐습니다. 그럴 수도 있긴 한데 묘사가 좀 모호해서인지 선뜻 수긍하기가 힘든 부분이 있거든요. 스토리와는 다르게 문체가 서정적이고 심리묘사가 훌륭한 작품입니다.

잠자냥 2023-04-26 09:02   좋아요 1 | URL
저 안 읽은 책 많아요! 특히 흑인문학 많이 안 읽었습니다. 조만간 읽기로 결심! ㅎㅎ

coolcat329 2023-04-26 09:04   좋아요 0 | URL
네 이야기성이 뛰어나 잠자냥님은 하루면 다 읽으실 거 같아요~좋은 하루 되세요!

레삭매냐 2023-04-29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인데...

격이 가물가물하네요.

케냐라는 낯선 나라에 대한
서사가 흥미로웠던 것으로 기억
합니다.

그나저나 작가 양반 노벨문학상
시즌 되면 항상 나오는 분 아니
신가요...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7
에드워드 올비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Viginia Woolf?)는 1963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어 664회의 공연 기록을 달성, 에드워드 올비(Edward Albee 1928~2016)를 미국의 주요 극작가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기여를 한 작품이다. 또한 토니 상 수상과 함께 1966년 엘리자베스 테일러, 리처드 버튼 주연의 동명 영화로도 만들어져 올비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현실과 환상 속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두 쌍의 부부, 그들이 벌이는 술과 욕설이 난무하는 한 밤의 추잡한 난장극이다.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고 이상만을 추구하며 거짓된 삶을 사는 이들이 서로를 향해 던지는 폭력적인 말과 행동, 그 이면에 감추어진 병든 마음들과 복잡하게 얽힌 심리가 독자의 마음 또한 불편하게 만든다. 


역자는 작품 해설에서 제목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라는 제목이 극의 마지막에 가서는 '누가 거짓 환상 없는 삶을 두려워하랴?'(p.200)라는 묵직한 질문으로 독자와 관객에게 다가온다고 말한다. 

즉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면서 삶은 원래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인간은 삶의 본질에 다가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의 과정에 도달하기 위해 욕과 조롱, 폭력도 불사해야 한다고, 욕설로 인한 마음의 상처보다 더 나쁜 건 현실을 외면하고 환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삶이라고 작가 올비는 생각한 거 같다. 


총 3막의 구성 중 마지막 3막의 제목이 'The Exorcism'(귀신 쫓기)인 것만 봐도 그 의도를 알 수 있다. 그동안 조지와 마사 부부를 지배하고 있던 거짓된 환상(귀신)을 쫓는 행위를 함으로써 삶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응해야 진정한 인간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음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나는 이 희곡을 읽으면서 당연히 결말이 비극적으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지와 마사가 주고 받는 언어 폭력이 도저히 회복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시끄러운 현관문과 마사의 웃음소리로 시작하여 그 모든 욕설과 폭력, 비방을 거쳐 엑소시즘의 단계에서 터질 것 같던 극은 조지가 마사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얹고 '누가 두려워하랴, 버지니아 울프...'(p.193)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마사의 '두려워'라는 고백과 함께 '침묵'으로 끝난다. 

술과 환상에 의지해 살았던 지난 거짓된 삶을 벗어 버리고 진짜 삶을 대면한 두 사람, 앞으로는 이상한 게임과 말장난, 거짓으로 점철된 삶이 아닌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그런 부부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허상의 노예가 되지 말고 각자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진심으로 소통해야 함을 욕설과 폭력이라는 불편한 수단을 사용하여 보여주는 '역설적인 드라마'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3-04-14 0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희곡 읽었는데 기억이 잘안나네요 ㅡㅡ 그런데 작품속에 버지니아 울프가 안나왔던게 인상적이었던것 같습니다~!!

쿨캣님 요즘 희곡 읽으시는군요 ^^

Falstaff 2023-04-14 06:47   좋아요 2 | URL
에드워드 올비가 처음 이 작품에 붙였던 제목은 ˝Who‘s afraid of Big Bad Wolf?˝
크고 나쁜 늑대를 누가 무서워하랴? 였습니다만 이 제목은 디즈니의 만화영화 아기돼지 삼형제 주제곡이라서 디즈니 쪽이 저작권을 주장해 사용하지 못하게 했답니다.
그리하여 올비가 언어유희 개념으로 간단하게 Big Bad Wolf를 Virginia Wolff로 바꿨다는군요.
본문의 영화, 저거 보고도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명배우에 오른 배우라고 조잘대는 작자들은 전부 똥멍청이들일 겁니다. 정말 필생의 열연을 펼쳐 관람객으로 하여금 숭배를 하게 만드는 명 연기 중의 명 연기입니다.

coolcat329 2023-04-14 07:48   좋아요 2 | URL
정말 오랜만에 희곡 읽었어요. 위 골드문트님 말씀대로 일종의 말장난으로 노래에 버지니아 울프를 갖다 붙여서 버지니아는 전혀 안 나오지만 그녀를 더 유명하게 만들었으니 만약 알았다면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ㅎ
올비가 버지니아 울프 이름 써도 되는지 남편 레너드 울프에게 허락을 구했다네요.

coolcat329 2023-04-14 07:48   좋아요 2 | URL
골드문트님/저 유툽에 full movie가 있길래 봤는데 정말 엘리자베스 테일러 연기가 엄청났습니다. 당시 36살인가 그랬는데 오십 대의 덩치 큰 마사 역을 위해 10kg를 살찌우고 은발이 섞인 가발을 썼다네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명연기 맞습니다.

페크pek0501 2023-04-21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소설에 길들여져서 희곡을 읽기가 힘들던데요. 셰익스피어 4대 비극도 간신히 읽었죠.
그런데 희곡을 오디오북으로 들으니 꽤 재밌더라고요. 이건 소설과 다른 맛이었어요.

coolcat329 2023-04-21 15:58   좋아요 0 | URL
희곡은 오디오북이 실감나서 더 좋을 거 같아요. 특히 운전하면서요~

 
미국의 목가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7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의 목가>(1997)는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1998)와 <휴먼 스테인>(2000)으로 이어지는 '미국 삼부작(The American Trilogy)'의 출발을 알린 작품으로 작가, 필립 로스(Philip Roth 1933~2018)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필립 로스는 1933년 뉴저지 뉴어크(Newark)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로스는 초기 작품에서 주로 유대인의 정체성 문제를 다뤘는데, 90년대 후반 발표한 '미국 삼부작'에서는 작가의 또 다른 자아인 네이선 주커먼(Nathan Zuckerman)이라는 화자를 통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과 그로 인한 문제들을 다룬다. "유대인이 아니라 미국에 관해 쓴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주인공은 유대인이지만 소설 속 주인공의 비극을 유대인의 문제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미국 사회에서 찾음으로써 미국 사회가 가지고 있던 여러 문제점들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비판한다. 이 점이 필립 로스를 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만들었다고 역자는 말한다. 


<미국의 목가>는 미국 역사에서 혼란스러웠던 시기 중 하나인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은 총 3부 9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 '기억 속의 낙원', 2부 '몰락', 3부 '잃어버린 낙원'의 소설 속 소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목 '미국의 목가'는 반어적인 표현이다. 이 소설에 목가적인 평온함은 없다. 단지 목가적인 삶을 꿈꾸며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한 순수한 인물이 있을 뿐이다. 


그의 이름은 시모어 어빙 레보브(Seymour Irving Levov)로 일명 '스위드(Swede;스웨덴 사람)'라고 불린다.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파란 눈의 금발 머리, 건장한 체격의 그의 외모가 마치 '바이킹 가면'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만능 스포츠 맨으로 유대인 공동체의 자랑이자 희망으로 영웅 대접을 받는다. 

스위드는 해병대를 제대하고 제2차 대전 이후 미국의 경제적 번영 속에서 미스 뉴저지 출신의 아일랜드계 카톨릭 여성과 결혼하고 아버지의 장갑 공장도 물려받는다. 또한 집안 대대로 살던 유대인 공동체를 떠나 진짜 미국 주류들이 사는 외곽 지역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아메리칸 드림, '미국의 목가'를 실현하기 위한 단계를 하나씩 밟아 나간다.  


화자인 주커만은 스위드의 동생인 제리와 동기로 학생 시절 그 역시 스위드를 숭배했는데, 세월이 흘러 노년의 유명 작가가 된 그에게 어느 날 스위드의 편지가 도착한다. 스위드는 편지에서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를 기리는 글을 쓰고 싶다며 주커만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하고 두 사람은 몇 달 후 만난다. 그러나 정작 만났을 때 스위드는 세 아들과 가족에 대한 자랑만 늘어놓을 뿐, 편지 속에서 언급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난 충격적일 일들'(1권-p.35)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몇 달 후 주커만은 45주년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제리를 우연히 만나는데, 비극적인 사건으로 한 순간에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 스위드의 이야기와 함께 며칠 전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 시절 위퀘이크의 유명한 대표 선수였던 스위드가 우리가 상상했던 그 어떤 것과도 닮지 않은 운명을 맞이한 이유는 무엇인가' (1권-p.141) 

주커만은 제리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과거 모두의 영웅이 아니라 '얼마든지 괴롭힘을 당할 수 있는 평범한 남자'(1권-p.144) 로서 스위드의 삶을 들여다 보기로 한다. 작가의 시선으로 '비극적 추락이라는 당혹스러움 안으로'(1권-p.142) 들어가 스위드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역사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탄 내고 비극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를 한 편의 '사실주의적 연대기'(1권-p.144)로 보여주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작가로서 큰 가치가 있는 일이기에...


필립 로스는 <미국의 목가>를 통하여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미국이 위태로운 행보를 이어가던 시기의 여러 사건들을 보여준다. 베트남 전쟁과 반전 운동, 1967년 뉴어크 폭동, 1972년 개봉 최초의 합법적 포르노 영화인 <Deep Throat>가 불러운 사회적 파장, 닉슨 대통령이 사임하는 계기가 된 희대의 정치 스캔들 워터게이트 사건(1972~1974) 등을 통해 미국 사회의 부패와 위선, 폭력과 집단 광기, 계급과 차별 등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이런 미국 사회의 위기는 주인공인 스위드에게도 위기로 다가온다. 그는 미국의 꿈을 내면화한 인물로 유대인 사회가 아닌 진정한 미국 사회에 들어가기 위해 유대인의 태도를 버리고 '한 명의 평등한 사람으로서 떳떳하게 살아가는 이상적인 인간'(1권-p.139)이 되고자 했다. 동생 제리는 이런 스위드에게 다음과 같이 소리를 지른다.


["미스 아메리카를 원했어? 그래, 형은 미스 아메리카를 얻었네.(...) 진짜 미국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고, 진짜 미국 해병대가 되고 싶었고, 아름다운 이방인 아가씨를 품에 안은 진짜 미국 거물이 되고 싶었어?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미합중국에 속하기를 갈망했어?"(2권-p.73)]


<미국의 목가>에서 역사는 한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폭력으로 다가온다. 미국이 베트남 전에 참전하면서 스위드의 딸 메리가 반전 운동에 나서게 되고, 그로 인해 스위드가 바라던 완벽한 가정은 그야말로 '박살'이 난다. 1967년 흑인 폭동으로 삼대째 내려오던 뉴어크의 장갑 공장은 '최악의 도시에 남은 마지막 공장'(2권-p.59)으로 전락한다. 주커만은 스위드의 몰락을 들여다보며 '사람들은 역사를 장기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는 사실 아주 갑작스러운 것이다.'(1권-p.141) 라고 생각한다.

필립 로스는 예측할 수 없는 역사의 공격 앞에서 인간의 꿈, 노력은 얼마나 무력하고 허망한지를 한 남자의 삶을 통해 강렬하게 보여준다. 스위드가 꿈꾼 '미국의 목가'는 '비극의 목가'였다. 마지막에 작가는 주커만의 목소리를 빌어 삶이 얼마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되묻는다. 


[그래, 그들의 요새는 금이 갔다. (...) 이렇게 한번 벌어진 이상, 다시는 아물지 않을 것이다. 절대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그들에게 맞서고 있었다. 그들의 삶을 좋아하지 않는 모든 사람, 모든 것이 맞서고 있었다. 외부에서 들려 오는 모든 목소리가 그들의 삶을 비난하고 거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이 뭐가 문제인가? 도대체 레보브 가족의 삶만큼 욕먹을 것 없는 삶이 어디 있단 말인가? (2권-p.288)]


<미국의 목가>는 삶과 죽음, 노년의 외로움과 상실에 대한 예리한 사유를 보여준 <에브리맨>(2006)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필립 로스의 작품이다. 짧은 소설인 <에브리맨>에서는 못 느꼈던 집요함과 끈기가 느껴지는 문장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주커만의 관찰과 묘사로 한 남자의 삶을 파헤치는 구성이기에 작가가 더욱 악착 같이 쓴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계속 이어지는 긴 문장이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는데, 그런 흐름에 일단 적응이 되니 문장의 강렬함에 나도 모르게 푹 빠지게 되었다.  


영화 'American Pastoral'(2016)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3-04-11 0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영화로도 있군요? ㅋ 저 필립로스 읽은지 오래되서 그런지 가물가물한데 쿨캣님 글 보니까 딱 기억이 나네요~!!

다음 작품으로 약간 결이 다른 <죽어가는 짐승> 추천합니다~!!

단편ㅡ장편ㅡ단편 흐름으로 읽으시면 좋을거 같아요~!!

coolcat329 2023-04-11 08:25   좋아요 1 | URL
네~영화가 있더라구요. 넷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짐승> 새파랑님 추천으로 사뒀는데 꼭 읽어보겠습니다. 필립 로스하면 새파랑님이 떠오릅니다. 😆

자목련 2023-04-14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책장에 <미국의 목가>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쿨캣 님의 리뷰.
언젠가 읽겠지요? ㅎ

coolcat329 2023-04-14 12:19   좋아요 0 | URL
저도 필립 로스 책들이 유난히 책장에 오래 있었답니다. ㅎㅎ
미국의 내밀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는 독서였어요. 자목련님 언젠가 당연히 읽으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