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크게 2부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1부에서는 '조선의 서울, 한양'으로
도시의 구조, 경제 명소, 위기와 같은 큰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2부에서는 '한양의 사람, 삶의 이야기'로
역사책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노비, 무당, 군인, 상인, 여성 등의 시선을 따라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2부의 이야기가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가난하고 궁핍했던 조선시대.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조선 사람들은 소고기 마니아였고
조선은 한 해 40만 마리의 소를 도축하는
'소고기 왕국'
이었다는 것을 아셨나요?!
그 이유는 솟값이 너무 저렴해서 소고기를 자주, 그리고 많이 먹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숯불에 굽거나 국을 끓여 먹는 게 보편적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설하멱적(현대 숯불구이와 흡사함), 수육, 육면(고기를 가늘게 썰어 밀가루·메밀가루를 입힌 뒤 삶아 국수처럼 먹는 요리), 분탕(밀가루를 풀어 끓인 맑은 소고기 장국), 서여탕, 삼하탕, 황탕, 양숙 등 다양한 요리법이 있다고 합니다.
내심 부러웠던......
서울의 인구 과밀화는 현재의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조선 후기에도 심각한 국가적 문제로 대두되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관료가 아닌 일반 백성들도 생계를 위해 서울에 올라와 살기 시작해, 경강과 도성 주위에 사람들이 집중되었습니다.
여기에 양란 이후, 서울을 방어하는 군영인 삼군문이 창설되고 병사들을 지방민에서 충원하면서 서울의 인구확장을 부채질하게 되면서
면적은 한정돼 있고 인구밀도는 높아져 땅값이 폭등하는 등 부작용이 속출,
임차 제도인 '세입'이 탄생하게 되니...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릴 적 비디오를 보면 '호환마마' 얘기가 나오곤 했었는데
여기서의 '호환'이 조선 시대에는 호랑이가 사람들을 위협하는 일이 잦아, 호환이 큰 근심거리였다고 하였습니다.
한양이 지형적으로 내사산과 외사산에 둘러싸여 있어 야생의 호랑이가 서식하기 아주 좋은 환경이었고,
특히 조선 후기에 한양의 호환은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17세기 소빙하기가 도래하면서 전대미문의 대기근이 덮치고 전염병마저 유행해 대량의 아사자와 병사자가 생기고
식물이 자라지 못하고 우역이 야생동물에게로 퍼지면서 호랑이 먹이가 급감해 호랑이가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하는데...
조선 조정은 군·민은 물론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백성을 대상으로 악호 한 마리 포획하면
벼슬이 없는 무과 급제자는 지방의 군관에 임명하고
천민을 포함한 일반인들에게는 면포 20필을 하사하였습니다.
포상 강화와 중앙군영의 지속적 착호활동 등으로 그 많던 호랑이도 줄어들기 시작했고
일제감정기 해수 구제 명분으로 진행된 대규모 남획과 3년간 한반도를 초토화한 한국전쟁으로
이제 한반도에서 호랑이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우리의 야생 호랑이...
그의 포효가 그립기만 하였습니다.
모두 가난했지만 다산을 미덕으로 여겼던 조선시대.
영아 사망률이 높기도 했지만 조상의 생명이 후손의 몸을 통해 대대로 이어진다는 유교적 인식에 따라 자녀는 많이 가져야 복이 있다는 다산관념이 지배하였었습니다.
자식, 그중에서도 아들이 다행히 살아남았다면 양반가에서는 아들이 문과에 급제해 입신양명하기를 소원했었고
다산 정약용도 자식을 위해 헌신하였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유사 이래 가장 잘살게 되었는데 그와 동시에 인구가 가장 빨리 감소하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아이가 가족의 미래이자 국가의 미래이기에...
안타깝고도 씁쓸한 현실이었습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도 10년을 못 넘기고, 3대 가는 천석꾼 부자 없다'
정자(태화정)와 연못까지 갖춘 대저택의 능성 구씨 종가는 '북촌갑제(북촌에서 제일가는 집)'로 불렸지만 조선말 구씨들이 권력에서 멀어지고 가세가 기울면서 정든 터전을 처분해야 했고
남촌의 명문가 동래 정씨들은 회현동(우리은행 본점)에 터를 잡았지만 현재는 서편 도로 중앙에 수령 500년 이상의 은행나무 2그루와 우리은행 본점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