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진실이 제 갈 길을 가는침묵의 소리가 들린다
빈곤은 미래에도 이어질 오래된 유물이다. 과거의 빈곤과 오늘은 빈곤은 같고도 다르다. 이웃이 없고 집이 없으며, 목소리가 없기에 그들은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아이는 어른이 돼서도 거리를 전전했다. 빈곤의 덫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녀에게 손을 내민 이가 거의 없었고, 자신조차 이해할수 없는 불행의 근원을 따질 곳도 없었다. 그녀는 피해자였으나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 그녀는 내게 형제복지원의 기억을 이야기한 뒤로 악몽을 꾼다고했다. 그 이후로는 만나지 않았다. 아니, 만날 수 없었다.
채찍을 맞으면서 교회를 지었어. 교회가 완공될 때까지 벽돌을날랐지. 교회로 가는 산길이 400미터쯤 되는데 부대 하나씩 등에 지고 가면 채찍을 얼마나 때리는지 몰라. 버드나무 가지로 흑벽도 1
2014년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의 집에서 인터뷰를 했다. 세월호침몰 사고 이후의 만남이어서 그는 박인근 원장을 구원파 유병언에 비유했다. 복수를 위해 칼을 배웠다는 그의 이야기를 당시 기사로 쓰진 못했다. 어떤 기억은 대다수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과 다른것도 있어서, 공통적으로 증언되어지는 내용을 책에 옮겼다.
정부가 수용을 계획하고 집행하면 수용소를 구체적으로 설계하고 운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설 원장들이다. 이들은 국가보조금을 받으며 자신을 위법시설 운영자가 아닌 국가협력•자로 인식했다. 수용시설에서 일어나는 죽음, 인권유린, 강제노동은 ‘운용상의 수단으로만 여겼다. 내가 생각한 나는 다른 사람과 달랐습니다. 저는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 남달랐습니다"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은 2010년 발간한 자서전에서 자신을 애국자로 인식한다. 시설 원장, 국가 그리고 이들의 위법을 눈감아준 공무원이 얽혀 감금의 시대를 공고히 했다. 박인근은 1987년 각종 혐의로 구속 수감됐지만 그와중에도 부산 시내를 활보했다. 32회에 걸쳐 외출하고 간수장의 집에서 목욕을 했다. 구치소에 찾아오는 고위 공무원에게 호통을 쳤다. 그를 수사한 김용원 검사에게 수사를 종결하고 횡령 혐의를 축소하라는 검찰 상부의 압박이이어졌다. 특수감금에 대해 무죄를, 다른 각종 협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은 박인근은 2년 6개월의 형기를 채우고 1989년 7월 20일 출소했다. 형제복지원은 이후 서민들을 파탄에 빠지게 한 부산상호저축은행 사태의 중심에 선다. 그는여든일곱의 나이로 2016년 6월 27일 전남의 한 요양병원에서 사망했다. 사망 전까지 치매를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인근은 마지막까지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죄의식이 없다. 인간을 학대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는 죄이나 국가가 그의 죄를 사하였으므로, 죽음 이전까지 그가 가진 것은 죄책감이 아니라 억울함이었다. 죄의식은 감정의 본능에 기반한 것이지만 사회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박인근이라는 인물을 통해 감금의 설계자들이 어떻게 탄생하고 몰락했는지를살펴본다.
홀로코스트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 Primo Levi가 말한 것처럼, 억압이 거셀수록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는 권력에 기꺼이 협력하려는 의지가 확산된다.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사람들은 이곳의 가해자가 됐다. 박인근은 형제복지원을 군대처럼 운영하면서 중대장, 소대장, 조장동차등적 계급을 뒀다. 계급의 자리에 오른 수용자들은 다른 수용자를 감시하고 폭력을 저지르며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2014년 4월부터 8월까지 당시 마흔세 살이던 박태길 씨를 인터뷰했다. 1984~1987년 형제복자원에 수용된 그는 피해자였고 어느 지점에서는 박인근이 만든 체제의 협력자였다. 그는 과거를 미화하지 않았다. 자신이 겪은 고통과 타인들에 준 고통을 기억했다. 그곳에서 다른 수용자를 감시하는 협력자였으며, 탈출하려는 소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피해자였다. 1987년 원장이 구속되면서 박태길씨는 복지원을 나왔으나 섬의 노예로 또 다시 팔려간다. 그곳에서 생을 빼앗기고 협력자가 될 수밖에 없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구성했다. 앞서 소개한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의 증언을 소설에 실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빈곤의 시대를 볼 수 있다면, 빈곤 정책을 들여다봄으로써 빈곤의 역사는 구체화된다. 정책과 증언을 오감으로써 개인의 삶이 국가로 인해 어떻게붕괴하는지 실증된다. 일제강점기 당시 세워진 선감원부터 형제복지원까지 무산자들을 청소하는 정책은 일관적이었다. 아름답고 부요한 것을 선망하고 가난을 치우는 시대적 분위기는인간의 욕망인걸까, 아니면 정책의 산물일까
형제복지원 이전과 이후‘를 찾아갔다. 형제복지원 이전에 깡패와 부랑자 등 사회의 주변인들을 가둔 서산개척단이 있었다. 형제복지원 당시에 존재했던 대구시립희망원은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정부에서 수여하는 각종 표창을 받으며 영예의 역사를 써온 대구시립망원은 마침내 인권유린의 장소로 규탄되었다. 이들 사건을 2기 진화위는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로 보고 조사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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