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겠다
김탁환 지음 / 북스피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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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틀 재난 문자가 왔다.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예방을 위해 손씻기, 기침예절, 마스크착용 등 수칙 준수와 발열호흡기 증상발생 시 1399 또는 보건소로 상담바랍니다.' 중국 우한에서 발병한 폐렴이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확진 환자가 발생했고 당국은 긴급 격리 조치를 취하고 강력 대응에 나섰다. 강력 대응으로 2015년에 일어난 메르스 사태가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김탁환의 소설 『살아야겠다』는 초기 대처에 실패해서 피해가 확산된 2015년에 발생한 메르스 사태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철저한 조사와 취재를 바탕으로 쓰인 소설은 숨 막히도록 답답한 현실을 그려냈다. 긴박한 순간을 따라가는 문장은 거침이 없다. 자신이 메르스에 걸린 줄도 모르고 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환자로 인해 생사의 기로에 놓인 3인의 시간을 통해 한국 사회가 가진 병폐를 드러낸다.

길동화, 이첫꽃송이, 김석주는 F병원 응급실에서 만난다. 서로의 얼굴과 이름도 모르는 남이었지만 응급실에 머물렀다는 이유로 메르스에 감염되어 격리된다. 메르스는 2미터 1시간 이내라는 기존의 상식을 깨고 같은 공간에 머무른 사람들을 감염시켰다. 그중에서 가장 상태가 좋지 않은 건 악성 림프종을 앓고 있는 김석주였다. 길동화는 후유증으로 폐섬유화가 진행되었다. 메르스 완치 판정을 받았음에도 전염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직장에서도 해고된다.

종합 병원 응급실로 이송해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드리고자 했던 이첫꽃송이 역시 메르스에 감염되었다. 결국 아버지는 손도 써보지 못하고 임종을 맞이했다. 아버지를 추도하기 위해 모여든 친척들 중 몇 명도 감염되었고 이모부가 세상을 떠났다. 확진 판정을 받고 치료를 받아 주위의 배려로 방송국 기자가 될 수 있었다. 김석주의 병세는 초기에는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음성 판정을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항암 치료는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김석주의 서사는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그대로 가지고 왔다. 국가가 부여한 번호인 80번 환자였던 그는 소설 『살아야겠다』에 나온 이야기대로 전염력이 없음에도 격리 당한 채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메르스 완치 판정을 받고 퇴원했다. 일주일이 지나 악성 림프종으로 인한 오한과 발열이 의심되어 다시 병원에 실려갔다. 병원은 그가 메르스 음성 판정을 받았음에도 격리 병동으로 이송했다.

질병관리본부는 WHO 권고 사항을 따라야 한다며 그를 끝까지 격리 해제 시키지 않았다. 김석주는 격리 병동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당한 채 쓸쓸히 죽었다. 메르스 환자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끝내 메르스 환자로서 죽어가게 만들었다. 이것은 소설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다. 국가가 숨기고 잘못을 회피하기 바쁜 80번 환자의 비밀이다. 김석주는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다. 방호복을 입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병실에 홀로 있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고 살아야겠다고 말했다.

방역망에 구멍이 훨씬 많이 뚫린 셈이지. 그들에게 강력하게 경고할 필요가 있어. 잘못된 제도와 복지부동하는 관료와 무책임한 정치가로 인해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처참하게 망가질 수 있는지. ……전염병이 김석주 씨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게 아냐. 메르스란 병에 걸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하는, 세월호란 배에 타고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하는, 우리의 안일하고 허약한 자기합리화가 그를 죽음으로 내모는 중이지.
(김탁환, 『살아야겠다』中에서)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며 책임을 모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며 타인의 불행에 눈 감는 우리가 있었다. 간절히 살고 싶어 했던 한 사람의 외침을 듣지 않은 잘못이 『살아야겠다』를 쓰게 만들었다. 『살아야겠다』는 소설인가 논픽션인가. 따져 묻는 건 의미가 없다. 관료주의와 행정, 무사안일주의가 한 아이의 아버지이자 남편, 아들이었던 꿈 많은 청춘을 외면했다. 그 책임을 묻고 다시는 이토록 슬프고 처절한 서사가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거듭 말하기 위해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야겠다』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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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솜에게 반하면 - 제10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46
허진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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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살. 이제부터 우리들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미숙하고 표현할 줄 몰라 본심과는 반대로 말하며 남에게 상처를 주었던 어린 날의 그 이야기를. 허진희의 소설 『독고솜에게 반하면』은 그렇게 시작된다. 낯선 세계를 동경하면서도 경계하느라 한없이 움츠렸던 기억이 찾아온다. 중학교라는 이상한 공간에 발을 디딘 아이들이 모이면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간단히 무너뜨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독고솜에게 반하면』은 재미있는 소설이다. 한 번 읽으면 멈출 수 없는 전개를 가지고 있다. 윤성희의 추천대로 장점을 구구절절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일단 읽어보기를 바란다.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마녀라고 불리는 독고솜. 독고솜과 엄마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릴 수 있다. 불행한 기운이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 명함을 내민다. 저주를 내리를 작업은 인터넷과 컴퓨터만 있으면 된다. 의뢰는 주로 이메일로 받는다.

의뢰는 자주 들어온다. 사람들은 누군가에 받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기보다 미워하는 방식을 택하기도 하니까. 새 학기에 전학 온 독고솜에게 서율무는 호기심이 인다. 자칭 명탐정이라고 부르는 율무는 혼자 지내지만 결코 외로워하지 않는 독고솜에게 말을 건다. 자기소개란에 실린 솜이의 사진에 누군가 구멍을 내놓았고 교과서도 찢어진 걸 본 이후 말이다.

평범한 열네 살 중학생들의 이야기 같지만 『독고솜에게 반하면』은 마법, 마녀, 사건, 힘, 견제, 여왕 등 흥미 가득한 소재와 이야기로 우리를 그 시절, 유치했지만 진지한 사춘기로 끌고 간다. 다르다고 배척하지 않는 것. 먼저 다가가 이름을 불러주는 것. 소설은 이런 사소한 삶의 규칙을 말한다. 우리는 언제 이렇게 자라버렸을까. 마음이 없이 미움만 간직한 채 자라버린 건 아닐까. 소설을 읽는 내내 든 생각이다.

『독고솜에게 반하면』은 인물을 만들고 성격을 부여하는 능력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서율무, 독고솜, 단태희, 박선희, 은영미. 누구 하나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 없다. 아이는 어른을 보고 자란다. 어른이 하는 행동을 놀랠 정도로 그대로 습득한다. 단태희. 여왕이라고 부르며 자신이 가진 능력을 타인을 조종하는 힘으로 바꿔버리는 아이. 태희의 엄마도 그렇게 행동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남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 이 같은 뻔한 주제를 말하지 않는다.

아이의 세계는 복잡하고 미묘하다. 사소한 오해와 다툼으로 다른 색깔의 세계를 형성해 버릴 수 있다. 저 애는 이상해라고 말하지 않았는지. 이상하지 않은 것도 이상하다고 말하는 순간 이상해져 버린다. 함부로 규정하고 벽을 만들지 말자. 단 한 사람. 누군가 내게 다가와 이름을 불러주고 손을 내밀어 준다면 열네 살의 시간은 막막하지 않다. 서율무와 독고솜이 활약하는 사건을 따라가다 보면 과거의 나와 만난다. 용기를 내! 하고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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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가지 당부 - 십 대부터 알아야 할 노동 인권 이야기 창비청소년문고 36
하종강 외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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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보기가 겁난다. 끔찍한 사건, 사고 소식이 연일 날아온다. 아침에 본 뉴스 하나가 잊히질 않는다. 수능을 본 학생들이 대형 음식점에서 일을 했다. 바쁜 연말 동안 쉬지도 못하고 일을 했다. 새해가 되자 가게를 폐업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사정이 좋지 않으니 임금은 나중에 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돈을 받기 위해 찾아가 보니 가게는 성업 중이었다. 임금을 달라고 하자 대뜸 화부터 냈다. 내가 그 돈 떼어먹지 않는다. 어련히 알아서 줄 텐데, 왜 난리냐. 적반하장이었다. 노동청에 신고를 했지만 밀린 임금은 언제 받을지 모를 일이라고 했다.

왜 이럴까. 학생은 인터뷰 끝에 어른이 무섭다고 했다. 더 이상 어른을 믿을 수 없다고도 울먹였다. 어린 학생이라서 그랬다면 더더욱 나쁜 짓을 저지른 어른은 뻔뻔했다. 부모님이 찾아가도 화를 냈다. 우리 사회의 쓸쓸한 민낯을 본 기분이라서 어두운 아침이었다. 창비 교육에서 나온 『열 가지 당부』는 학생들이 알아야 할 노동의 정의, 노동권, 노동법, 일과 생활의 균형을 각계각층의 노동과 관련한 전문가들이 쉽게 풀어서 설명해준다.

근로자와 노동자의 차이점을 시작으로 다른 나라에서 행해지는 노동 교육의 다양함을 알려준다. 우리나라는 학교에서 노동, 인권 교육을 자세히 가르쳐주지 않는다.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노동 과목이 있고 노동자와 사용자의 모의 협상 상황을 주고 수업을 진행한다. 부러운 일이다. 생활은 노동으로 이루어진다. 노동을 빼놓고는 사회가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데 왜 노동이라는 영역을 따로 떨어뜨려고 할까. 파업은 정당한 노동자의 권리임에도 파업이 시행되면 나라가 곧 망할 것처럼 군다.

『열 가지 당부』에서는 노동이 주는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때 꼭 알아야 할 수칙도 알려준다. 근로계약서를 쓰고 주휴수당을 받아야 한다는 것. 휴게 시간과 최저 시급은 법으로 정한 것이므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괜찮은 일자리에서 일하고 있는 게 아니라서 권리를 존중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노동권은 바탕화면 같은 것이어서 누구에게나 갖춰져야 한다고 말한다.

일하고 생활하면서 반드시 지켜줘야 할 권리인 인권과 노동권은 성취로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노력하지 않아서 비정규직이 된 게 아니다. 그런 조건인지 알고 일을 하면서 왜 불평불만을 하냐. 이런 질문은 없어져야 한다. 사회 구조의 부조리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돌리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없다. 네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불평들을 견뎌야 한다고 말한다면 세상은 점점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변할 것이다.

국영수도 중요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인권, 노동권 교육이 더 필요하다.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열 가지 당부』는 어른들이 더 나은 사회를 물려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으로 쓰였다. 부당한 차별을 당하지 말라고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 지르라고 말한다. 공부를 잘해서 복지와 혜택이 좋은 직장을 가지라고 말하는 어른들이 있었다. 그건 잘못된 말이다. 누구라도 복지와 혜택이 좋은 곳에서 재미와 의미를 추구하며 일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권이란 특정한 누군가만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보편적인 권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학생들에게. 사회의 첫 발을 내딛는 사회 초년생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으려고 헛소리를 늘어놓는 사장들에게. 배달 음식이 늦었다고 음식값을 주지 않는 고객들에게. 『열 가지 당부』를 보낸다. 반드시 읽어보시기를. 우리에게는 노력하라는 말보다는 노조가 필요함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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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이후부터 테이크아웃 8
황현진 지음, 신모래 그림 / 미메시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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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란 무엇일까. 선택할 수없이 선택 당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임시 울타리라고 생각하면 될까. 아니면 어떤 이의 말대로 누가 보지만 않으면 갖다 버리고 싶은 것으로. 굴레가 되지 않기 위해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 사랑과 증오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황현진의 소설 『부산 이후부터』는 가족에게 드리운 가난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가난은 한 사람을 규정지을 수 없다. 군대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며 어디가 살기 좋은지를 묻는 아버지 때문에 가족은 여러 곳을 이사 다녀야 했다. 아버지의 고향은 부산. 어머니의 고향은 포항. 전국을 떠돌아다니다가 포항에서 6개월을 살고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부산이었다. 아버지는 더 큰 바다가 있는 제주도로 가기를 희망했지만 소설 속 태식은 탐탁지 않아 했다.

방 두 개짜리 집에 살면서 더 넓고 좋은 곳으로 가지는 못했다. 안경테를 바꾸지 못해 안경알만 바꿔 쓰던 태식은 결국 시력이 나빠져 버렸다. 렌즈만 바꾸면 초점을 바꾸기 어렵다는 안경사의 말을 무시했다. 그럴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계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했지만 태식은 기계를 만질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스무 살이 되어 서울로 올라와 비정규직으로 일했다.

월급 80만 원을 받아 방세 20만 원을 내고 생활하고 그러면 20만 원이 남았다. 신발 한 켤레로 일 년을 보냈다. 같이 사는 동창은 태식의 신발을 밖에 두었다. 6년을 일했고 다니던 회사에 정규직으로 취업했다. 부산에 남은 동생이 전화를 걸어왔다. 결혼을 한다고 했다. 부산으로 내려가 동생의 축의금을 걷고 처음엔 10만 원을 넣었다가 5만 원을 보태서 15만 원을 봉투에 넣었다, 오빠 구태식이라고 써서.

가난은 한 사람을 규정지을 수 없는데 자꾸 규정지으려고 한다. 가난이 태도가 되게 한다. 『부산 이후부터』는 돌연한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모인 남은 가족의 하루를 그린다. 장례는 간단하게 치렀다. 빈소도 차리지 않았다. 2만 원을 주고 유골함을 사서 아버지의 뼛가루를 담아 산에 가서 뿌린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빚이 있다고 서울로 올라가면 상속 포기를 하라고 한다. 자신은 이미 이혼을 해두었으니 걱정 없다며.

더 이상 가난해질 수 없을 때까지 가난해지고 아버지는 죽는다. 남겨줄 것이라곤 빚뿐이다. 상속 포기를 하면 괜찮아진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서울로 올라가려는 태식에게 걸려온 동생의 전화에서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족쇄로 작용할 것을 암시한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결국엔 다시 돌아오고 아버지 대신 생계를 책임져야 할 것이다. 아들과 오빠로서의 역할을 무시하려는 게 아니었다. 우선 내가 살고 볼 일이었다. 울어, 울어. 마지막 말은 동생 태선이 오빠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었으리라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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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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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진주』가 소설이 될 수 있을까. 책 표지에는 '진주, 장혜령, 소설'이라고 쓰여 있다. 작가의 말에서 이 원고를 한강에게 보냈더니 전화를 걸어와 에세이보다는 소설로 이름 붙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힌다. 그래서 『진주』는 에세이가 아닌 '소설'이 될 수 있었다. 책에는 실제 장혜령이 썼던 일기, 글짓기 원고가 실려 있다. 과거를 과거이게 두고 싶지 않았던 힘으로 글은 쓰였다.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아버지를 둔 딸의 시선으로 과거를 현재로 가지고 온다. 양심수라는 이름으로 진주교도소에 갇혀 있던 아버지. 처음 비행기를 탔던 날은 아버지를 면회하러 간 날이었다. 진주. 긴 여름 방학 동안 무더위를 잊기 위해 생각난 듯이 가본적 있었다. 한때 살았던 서향의 그 집은 해가 늦도록 머물렀다. 여름이 가장 힘들고 겨울은 더욱 힘들었다.

간이 정류소에서 표를 사고 버스에 올랐다. 진교에 들렀다가 진주에 도착했다. 도시 한가운데를 흘러가는 기나긴 강을 보며 땀을 식혔다. 기차를 타고 수목원에 가기도 했다. 심심한 맛의 비빔밥과 사골 국물로 끓인 만둣국을 먹었다. 강변 근처에 있는 헌책방에 들러 신중한 얼굴이 되어 책을 골랐다. 다시 가보면 헌책방은 사라져 있었다.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시 여당 대표의 도지사가 의료원을 폐쇄했고 근처 가게들은 영업이 힘들어졌다.

그런 도시. 무언가 생겨났다가 이내 사라지는 도시. 예감도 없이 떠난 허수경의 도시. 진주.

장혜령

장혜령은 『진주』를 쓰려 했으나 진주에 다시 가기 전에는 쓸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때처럼 비행기를 타고 진주에 갔다. 낡아가는 도시를 일별하고 돌아와 카페와 작업실을 전전하며 『진주』를 쓸 수 있었다. 도저히 아버지, 어머니가 있는 곳에서는 쓸 수 없었다. 세상이 독재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노동자들은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인간다운 생활이 가능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외쳤던 당신에게 어린 딸은 소실되었으나 기억이라는 힘으로 붙들어 맨 편지 한 통을 기어이 써 보낸다.

아버지가 민주화운동을 하며 경찰에게 쫓기는 동안 어머니는 옷 수선집에서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일을 했다. 딸은 부재한 아버지의 안위를 일기장에 표현한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직접적인 위로는 피하고 어린 학생에게 필요 하리라 예상되는 무심한 내일의 다짐을 적어 놓는다. 지금까지 후일담 문학은 당사자의 시선과 묘사에 의해 쓰였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임무. 손에 든 계란이 남아 있지 않을 때의 참담함. 실패한 혁명의 기록으로 말이다.

정의를 정의 내릴 수 없다고 자책하는 이야기는 1인칭인 '나'에 의한 개인의 서사였다. 『진주』는 다르다. 세상의 변화를 갈망했고 민주주의 실현에 투사했던 고투기가 아니다. '나'를 '당신'이라는 2인칭으로 바꿔 부름으로써 가능해질 수 있었던 서사였다. 경험의 당사자인 '나'를 '당신'의 자리에 옮겨 놓아야 말해질 수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아버지를 '당신'이라고 부르는 '나'는 동네에서 버림받은 개를 돌보고 경시대회 준비를 하고 학급임원으로 수학 문제 풀이를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성실한 아이 장혜령이다.

광주에서 무고한 사람이 죽어가고 다시 군인이 대통령이 되고 학생들이 거리에서 쓰러질 때, '당신'은 노동을 연구하고 '나'는 생활을 산다. 아버지의 직업, 학력, 나이를 묻는 가정 환경 조사서를 반 아이들 앞에 낭독할 때, 너희 아버지는 무엇에 봉사하니 질문을 받을 때 '나'는 쓰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가장 가까운 이야기부터 쓰는 것이 문학의 본질이라는 작고 느린 목소리로 말하는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오래 방치해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소설

소설이라는 갈래로 묶어 둘 수 없는 『진주』는 읽는 당신이 누구이냐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결코 끝나지 않는 산문시로. 부정할 수 없는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한 에세이로. 색다른 구성을 시도한 실험적 소설로.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지만 미래는 봉인해 놓은 어린 소녀의 일기장으로. 사랑을 말하기 위해 사랑이 아닌 것들을 쓰면서 사랑을 찾아가는 기행문으로, 나는 읽었다.

『진주』는 소설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오랫동안 말하지 못한 과거를 품고 있는 소녀는 쓸 수 있는 일 이외에는 없었다. 말은 하지 못했지만 누가 보든 일기장에는 자신의 생활을 숨기지 않았다. 어떤 일기에는 선생님이 아무런 코멘트도 적어놓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하다는 글씨체로 아버지의 오늘을 불안한 시기를 지나는 한국이라는 현실을 꾹꾹 눌러 담았다.

일기를 쓰던 어린아이는 글을 쓰고 싶어 학교에 갔다. 그곳에서 만난 어둠보다 더 어두운 사람들. 가장 가까운 이야기부터 시작하라는 선생의 말을 잊지 않았다. 숨겨 두고 밀어두었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면회가 끝나고 혼자 남았을 차가운 감방에서의 아버지의 하루를 추측하며, 『진주』는 시작된다. '나'를 말하기 위해 '당신'이라는 객관적인 인칭이 필요했다. 비밀이 많던 '나'는 끊임없이 말하기 충동에 시달린다. 비로소 아버지를 '당신'으로 부르기로 결정하자 비밀의 상자가 열린다. 





그리고 시

『진주』는 장혜령의 등단 시들에 의해 발화된다. 출소한 아버지와 운동장에서 자전거를 탔던 기억으로 돌아간다. 문학은 회귀와 번복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다. 돌아가고 다시 돌아오는 과정. 자책과 후회를 하며 과거를 번복하려 애쓰다가도 진실을 마주 보게 한다.

빛은 잘 들어옵니까

이상하지,
세입자가 관리인에게, 그리고
우리가 죄수에게 묻는 질문이 동일하다는 것은

불 꺼진 독방의 내부는
누군가 두고 간
볼펜 잉크처럼 캄캄하다는 거,
의도 없이도 흐른다는 거

처음 타본 비행기와
어깨가 기울어진 한 남자의 뒷모습

그의 휘파람을
존경한다고 교도소장은 말했다
크고 두터운 손으로, 아버지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 바람은 불어옵니까

진주식당의 여자는 국수 대신
빨래를 솥에 넣었고
...

(장혜령, 2017년 문학동네신인상 시 「이방인」中에서)

역사는 개인의 개별 서사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후일담 문학 안에서는 당사자의 증언과 서술이 중요했고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와 그녀들에게는 가족이 있었을 텐데. 딸과 아들이 부인과 남편이. 누구도 당사자가 아닌 가족의 일상을 문학 안으로 끌어오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장혜령은 『진주』를 통해 후일담 안에서도 주인공이 아닌 조연의 서사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동료의 이름이 적힌 수첩을 작게 만들어 숨기고 여차하면 삼킬 준비를 하는 그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수학 문제를 잘 푸는 딸은 우습게도 공집합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빛은 잘 들어옵니까. 아버지를 만나 건넸던 질문은 우습게도 빛과 바람의 안부였다. 『진주』는 그러므로 시가 된다. 한때의 청춘과 신념을 배신한 채 사장과 정치인, 공무원이 된 동료들의 부정과 불의를 봐야 했던 아버지에게 딸이 보내는 시다. 용서와 화해라는 돼도 앉는 위로가 아니다. 투쟁했으나 이제는 손에 아무것도 쥘 수 없는 허약한 자신의 오늘을 감내해야 하는 한 인간의 시간을 관측한 기록이다.

세계가/ 조금 전진한 것 같았습니다(장혜령, 「폴림니아 성시」中에서)라고 장혜령은 시의 마지막 연을 마무리한다. 불안이 희망으로 부정이 낙관으로 바뀌는 장면을 연출하며 한 세계의 문을 닫고 탈출한다. 문을 열면 다른 문이 계속해서 나오던 끔찍한 과거를 가진 '당신'에게 문을 열면 빛과 바람, 흰 새가 존재하는 세계를 '딸'은 만들어준다. 폐인이 되지 않아서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동료 밑에서 일을 배우고 부정을 눈 감지 않을 수 있는 아버지여서 장혜령은 '문학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진주』는 모든 것의 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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