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빛
강화길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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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 맛이야라는 광고 카피가 유명한 다시다의 효과는 대단했다. 김치찌개에게 새 생명을 부여하셨다. 앞다리살과 두부와 파와 청양고추를 넣었지만 약간 밍밍한 맛이었다. 냉장고에 하나 남은 다시다 한 포를 넣었다. 지금까지 집에서 끓인 김치찌개 중 최고의 맛이었다. MSG 만세! 깊은 밤이었지만 이대로 자야 하지만 두부와 밥과 김치를 얹어서 먹었다.


강화길의 소설 『치유의 빛』을 읽었기에 먹었다는 것에 죄책감도 후회도 하지 않기로 했다. 세상은 넓고 맛있는 건 많다. 배달 앱만 켜도 온갖 산해진미가 가득하다. 여름 바다의 빛을 닮은 표지 색깔의 『치유의 빛』이 다루고 있는 묵직한 주제는 고통으로 슬픔으로 다가오지만 결말에 다가가면 삶은 모종의 기쁨을 숨겨 놨다는 것에 안도하게 된다.


주인공 박지수는 우리에게 자신의 교복 이야기부터 하고 싶다고 한다. 열다섯 가을부터 키가 20센티 넘게 크고 살이 쪘다. 초등학교 동창의 언니에게 물려받은 교복이 맞지 않았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의 부모는 딸의 갑작스러운 성장의 기쁨보다 돈이 나간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부모의 불화를 곁에서 지켜보며 자란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짐작이 가기에 지수의 교복을 대신 사주고 싶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감이 없던 지수는 키가 크고 살이 찌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더욱더 노력해야 했다. 노력했지만 노력일 뿐이었다. 체육복을 사지 못해서 체육 교사에게 남는 체육복이 있는지를 물어야 했고 친구들을 사귀는 것도 어려웠다. 살이 찌기 전 부모는 지수의 성장판이 열릴 수 있도록 수영 강습에 보냈다. 그때 배운 수영이 지수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자신의 거대한 몸을 감추기에만 급급했던 지수에게 학교에서 가장 인기 많은 애 해리아가 말을 건다. 열정 과다의 체육 교사 김이영이 아이들에게 수영을 가르쳤다. 시험을 봐야 했기에 해리아는 지수에게 도움을 청한다. 자신에게 수영을 가르쳐 달라는. 지수는 해리아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고 도움을 청했다는 사실에 황홀해한다. 인기 많은 애 옆에 인기 많고 싶은 애가 있다. 해리아 옆에 신아.


셋은 방과 후 수영 연습을 하며 아슬아슬한 친분 관계를 유지한다. 『치유의 빛』은 여성의 몸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고통 없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우쳐 준다. 날씬하지 않은 몸, 식탐이 가득한 나, 예쁘지 않은 얼굴의 나. 능력, 내면, 성실함, 성격의 안정성이 아닌 외모로써 평가하며 나다움을 강탈 당하는 현실을 밀도 있는 문장과 서사로 꼬집는다.


예쁘지 않은 몸의 자각이 아닌 아프지 않은 몸이라는 걸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강렬한 응원이 『치유의 빛』에 있다. 배가 고프다. 그리고 먹는다의 행위는 정상이다. 배가 고프다. 그러나 참는다의 행위가 잘못이다. 전부를 잃었다고 했을 때 아프지 않은 내가 남아 있음을 그것만은 지켜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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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메모의 묘미 - 시작은 언제나 메모였다
김중혁 지음 / 유유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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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아이유 버전의 〈네모의 꿈〉이 새로 나왔다. '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 보면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으로 시작되는 그 시절의 노래. 다만 달라진 건 네모난 조간신문이 네모난 스마트폰으로 바뀌었다. 달라진 시대상을 반영했다. 우리말의 자음 중에 네모는 'ㅁ'이다. 편안해질 수 있도록 'ㅁ'이 들어간 말을 떠올려 볼까. 마음, 미역, 모형, 만남, 머리. 내 이름에도 'ㅁ'이 두 개나 들어가 있다. 내 이름을 부르고 떠올리면 마음이 편안해질까. 


소설가 김중혁의 신간 에세이의 제목은 온통 'ㅁ' 천지다. 『미묘한 메모의 묘미』 줄이면 미메묘. 메모 역시 'ㅁ'이 두 개나 들어 있다. 오늘부터 메모를 생각하자. 마음이 편안해지도록. 책날개에 김중혁 자신을 소설가, 메모 전문가로 적어 놓았다. 책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메모에 진심인지 알 수 있다. 다양한 메모 앱을 쓰고 종이와 수첩에도 메모를 했다. 


그것들은 시가 에세이가 소설이 되기도 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의 현실 버전. 한 줄의 메모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책에는 메모에 진심인 소설가가 그동안 쓴 메모 앱과 메모 방법이 자세히 나와 있다. 내가 모르는 것도 일부 아는 것도 있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게으름과 귀차니즘을 신봉하는지라 꾸준히 메모를 한 적이 없다. 생각이 떠오르면 흘려보낸다. 


그게 조금 아깝다는 생각에 갤럭시 휴대전화 기본 앱인 노트 앱에 한두 줄씩 쓰기도 하는데 쓰고 나서 다시는 읽지 않는다는 게 함정이다. 부끄럽고 나 자신이 서먹해지는 기분이다. 한 우물을 파라는 어른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꾸준히 메모를 한 소설가는 메모를 주제로 에세이를 쓴다. 소개해 준 메모 앱 '데이원'을 한 번 써볼까 한다. 


그러고 또 안 쓸 게 뻔해서 앞뒤로 펼칠 수 있는 수첩을 꺼냈다. 그날그날 느끼는 감정을 한 단어로 쓰고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써보는 감정 수첩을 만들어 보고 싶어서. 책의 효용은 나에게 시도라는 걸 해보라고 권유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치의 시도나 이틀 치의 시도가 된다. 삼일이 되면 기쁘겠다. 오늘로써 감정 수첩 기록 삼일 차거든. 무엇이든 써볼까 하고 옆에 펼쳐 두었다. 


'메모를 시작하는 순간 우리 모두는 작가가 될 수 있다.' 무엇이든 쓰게 된다의 작가답게 희망을 주는 말을 해준다. 아무 말이라도 적어 보는 것. 생각을 흘려보내지 않는 것. 빈 방에 갇혀 있지 말라는 말로 들려서 메모장처럼 가벼운 책 『미묘한 메모의 묘미』 미메묘를 쓰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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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불꽃과 빨간 폭스바겐 - 낯선 경험으로 힘차게 향하는 지금 이 순간
조승리 지음 / 세미콜론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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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 없이 일어나는 아침, 차가운 커피 한 잔, 어제 사서 읽으려고 놓아둔 신간, 햇빛에 말라가는 하얀 티셔츠, 앙증맞은 표정의 카카오 프렌즈 공식 귀염둥이 춘식이, 장바구니에 담아둔 음료들, 매일 하나씩 물건 비우기, 해피아워라고 할인하는 빵. 하루를 살아낼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들의 목록. 이런 것들을 숙제하듯 계속 생각해낼 필요가 있다. 


지랄맞음이 쌓이면 축제가 된다는 작가 조승리는 새로운 에세이집 『검은 불꽃과 빨간 폭스바겐』을 들고 찾아왔다. 어떻게든 살고 살아갈 것이라는 응원의 말을 책을 통해 전한다. 빛과 어둠만이 구분되는 전맹이지만 그녀는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려고 한다. 친구들을 모으고 동행 보조인을 찾아서 여행을 계획한다. 그리고 실행에 옮긴다. 


어디든 갈 수 있음에도 어디든 가지 않은 나를 반성하게 한다. 돈을 모으면 시간이 되면 상황이 허락하면이라는 수많은 가정을 갖다 붙이는 게으른 나를 말이다. 청소하다가 책꽂이에 꽂힌 감사 일기장을 발견했다. 이런 건 또 언제 사두고 잊어버렸을까. 감사한 일/감사한 말/감사한 사람을 적을 수 있는데 아직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검은 불꽃과 빨간 폭스바겐』을 읽으면서 깨닫는다. 내가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한글을 안다는 것에. 고마워해야 함을.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배울 수 있도록 엄마는 나를 웅변학원에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글을 배우고 남 앞에 서서 떨지 않고 말을 할 수 있었다. 엄마 덕분이다. 엄마가 없었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다. 


열심히 살았던 건 잘못이 아니다. 삶은 잘못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서야 알았다.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건 후회를 하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다. 가장 쓸모없는 감정은 후회다. 『검은 불꽃과 빨간 폭스바겐』은 지난날의 후회를 미래를 살 수 있는 동력으로 바꾼다. 그때의 내가 한 말과 행동을 복기하고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을 때, 『검은 불꽃과 빨간 폭스바겐』의 씩씩한 사람이 보고 있을 검은 불꽃을 떠올리면 된다. 어떻게 보이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너의 방식대로 걸어가면 돼. 정답은 없어. 괜찮지 않음에 실의에 빠져 있기 보다 오늘을 생각하자. 배가 고프니 밥을 먹고 몸을 씻자. 잘못된 삶이어도 남아 있는 삶에 감사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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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지음 / 레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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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된 김에 따로따로 널려 있는 책들을 정리해 볼까. 하다가도 오늘의 더위에 지치고 말아서 다시 드러눕는다. 분명 어제 자기 전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을 하겠노라고 다짐했는데. 나라는 인간은 왜 이 모양일까. 그래도 하루의 힘을 끌어모아 아직 읽지 않은 책을 찾아낸다. 읽은 책, 아직 읽지 않은 책, 보관해야 할 책을 기운 내서 분류해 보자. 


아직 읽지 않은 책으로 김연수의 『너무나 많은 여름이』를 찾아냈다. 신간이 나왔을 때 바로 주문해놓고 읽으려고 했다가 덮어둔 기억이 있다. 그때는 읽기가 힘들었고 지금은 읽기가 수월했다. 책과 나의 운명. 거창하게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책에도 다 때가 있는 법. 그때의 여름보다 지금의 여름이 책을 더 많이 읽을 수 있는 시간인가 보다. 


코로나로 사람들을 만나기가 힘들었던 시절(그때를 시절이라고 부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어찌 됐든 다 지나간 거니까.)에 책방과 도서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읽어주기 위해 쓰인 소설들이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 실려 있다. 마스크를 써서 서로의 표정을 알 수 없지만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눈을 빛내고 귀를 기울였을 그 밤의 시간들을 상상해 본다. 


책의 마지막 장에는 낭독회가 열린 서점과 도서관의 목록이 있다. 나의 시간이 가닿을 수 없는 곳에서 열렸을 낭독회. 그래도 책으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서 여름을 살아내는 중. 자전적인 이야기라 짐작되는 소설도 있어서 그간의 작가의 사정을 유추해 본다. 다들 아프지 마시고 과거를 후회하지 마시길. 


우리에게 남아 있는 여름이 얼마나 될까. 남아 있는 사랑은. 남아 있는 친절함과 다정함은. 오늘의 여름은 내일의 여름이 될 수 있을까.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는 사랑과 그리움, 미안함과 회환의 정서가 주를 이룬다. 끝내 말하지 못하고 헤어진 밤과 망설이며 돌아섰을 한낮의 시간들. 짧은 소설은 짧은 인생의 순간을 그린다. 


이 여름에 한 권의 책을 천천히 읽고 내보내야겠다. 조금 더 가볍게. 지금보다 홀가분하게. 두 번 살고 있는 사람의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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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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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에 실린 단편 「빗방울처럼」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전세 사기를 당하고 남편을 잃고 안방 천장에 누수까지 생겨 새로 도배를 해야 하는 지수가 받은 질문이었다. 전세 보증금이 그들이 가진 전 재산이었다. 집주인은 그들이 이사를 하고 확정일자를 받은 날 고액의 대출을 받고 잠적을 했다. 


남은 날들은 어떡해야 할까. 청약에 당첨된 아파트를 포기하고 경매에 참여했다. 빚을 갚기 위해 일을 늘리고 몸이 힘들기에 마음도 지쳐 서로에게 화를 냈다. 모든 걸 잃었기에 잃을 것도 없었다. 지수는 남은 날들을 책임지지 않기로 했다. 천장에 누수가 생겨 얼룩이 진 벽지를 그대로 남기고 갈 수 없기에 도배사를 불렀다. 


도배사로 여자가, 외국인이 왔기에 당황했다. 집 안을 살펴보더니 그녀는 지수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지수는 그 물음에 답을 하고 싶었다. 그간에 일어난 일들을. 나의 삶이 어떻게 무너졌고 무너지고 있는지를. 나중에야 깨닫는다. 자신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고. 그 질문은. 답 또한 듣고 싶었다고. 


『안녕이라 그랬어』에 실린 소설은 집과 관련한 상실과 관계에서 오는 환멸을 다룬다. 매일 편의점에 가던 청년은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집을 사야 하는 현실에 처한다. 그 사이 함께 밤을 나눌 공간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책임져야 할 것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숙제와 의무처럼 감당해야 하는 일을 한 것뿐인데 불행해졌다. 


잘못을 찾으라고 하면 열심히 산 것뿐인 인물들이 마주하는 불행을 읽어내야 한다. 노래를 듣다가 우리말로 안녕이라고 그랬다고 했지만 그날 걸려온 전화를 받고 삶은 사나운 얼굴을 한 채권자로 돌변한다. 불행보다는 불운이라고 말하고 싶다.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며 계속 나의 시간이 어둡지는 않을 것이라고. 아프고 잃어버리고 자꾸만 불어가는 빚을 갚아나가는 삶이어도. 


안녕은 아임 영을 잘못 들은 거였다. 안녕과 나는 어리다의 사이. 지금 가장 어린 상태로 아무 탈 없이 편안하게 사는 것으로 불운을 건너가면 어떨까. 집을 치우고 묵은 짐을 버린다. 지수는 남은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린다. 다짐의 말을 한다. 오늘을 살자. 드라마 《미지의 서울》에서 미지는 힘든 순간마다 할머니가 했던 말을 되뇐다.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


알 수 없는 오늘을 살아가는 나들에게 김애란은 오늘의 안녕을 빌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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