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지음 / 레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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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된 김에 따로따로 널려 있는 책들을 정리해 볼까. 하다가도 오늘의 더위에 지치고 말아서 다시 드러눕는다. 분명 어제 자기 전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을 하겠노라고 다짐했는데. 나라는 인간은 왜 이 모양일까. 그래도 하루의 힘을 끌어모아 아직 읽지 않은 책을 찾아낸다. 읽은 책, 아직 읽지 않은 책, 보관해야 할 책을 기운 내서 분류해 보자. 


아직 읽지 않은 책으로 김연수의 『너무나 많은 여름이』를 찾아냈다. 신간이 나왔을 때 바로 주문해놓고 읽으려고 했다가 덮어둔 기억이 있다. 그때는 읽기가 힘들었고 지금은 읽기가 수월했다. 책과 나의 운명. 거창하게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책에도 다 때가 있는 법. 그때의 여름보다 지금의 여름이 책을 더 많이 읽을 수 있는 시간인가 보다. 


코로나로 사람들을 만나기가 힘들었던 시절(그때를 시절이라고 부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어찌 됐든 다 지나간 거니까.)에 책방과 도서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읽어주기 위해 쓰인 소설들이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 실려 있다. 마스크를 써서 서로의 표정을 알 수 없지만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눈을 빛내고 귀를 기울였을 그 밤의 시간들을 상상해 본다. 


책의 마지막 장에는 낭독회가 열린 서점과 도서관의 목록이 있다. 나의 시간이 가닿을 수 없는 곳에서 열렸을 낭독회. 그래도 책으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서 여름을 살아내는 중. 자전적인 이야기라 짐작되는 소설도 있어서 그간의 작가의 사정을 유추해 본다. 다들 아프지 마시고 과거를 후회하지 마시길. 


우리에게 남아 있는 여름이 얼마나 될까. 남아 있는 사랑은. 남아 있는 친절함과 다정함은. 오늘의 여름은 내일의 여름이 될 수 있을까. 『너무나 많은 여름이』에는 사랑과 그리움, 미안함과 회환의 정서가 주를 이룬다. 끝내 말하지 못하고 헤어진 밤과 망설이며 돌아섰을 한낮의 시간들. 짧은 소설은 짧은 인생의 순간을 그린다. 


이 여름에 한 권의 책을 천천히 읽고 내보내야겠다. 조금 더 가볍게. 지금보다 홀가분하게. 두 번 살고 있는 사람의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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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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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에 실린 단편 「빗방울처럼」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전세 사기를 당하고 남편을 잃고 안방 천장에 누수까지 생겨 새로 도배를 해야 하는 지수가 받은 질문이었다. 전세 보증금이 그들이 가진 전 재산이었다. 집주인은 그들이 이사를 하고 확정일자를 받은 날 고액의 대출을 받고 잠적을 했다. 


남은 날들은 어떡해야 할까. 청약에 당첨된 아파트를 포기하고 경매에 참여했다. 빚을 갚기 위해 일을 늘리고 몸이 힘들기에 마음도 지쳐 서로에게 화를 냈다. 모든 걸 잃었기에 잃을 것도 없었다. 지수는 남은 날들을 책임지지 않기로 했다. 천장에 누수가 생겨 얼룩이 진 벽지를 그대로 남기고 갈 수 없기에 도배사를 불렀다. 


도배사로 여자가, 외국인이 왔기에 당황했다. 집 안을 살펴보더니 그녀는 지수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지수는 그 물음에 답을 하고 싶었다. 그간에 일어난 일들을. 나의 삶이 어떻게 무너졌고 무너지고 있는지를. 나중에야 깨닫는다. 자신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고. 그 질문은. 답 또한 듣고 싶었다고. 


『안녕이라 그랬어』에 실린 소설은 집과 관련한 상실과 관계에서 오는 환멸을 다룬다. 매일 편의점에 가던 청년은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집을 사야 하는 현실에 처한다. 그 사이 함께 밤을 나눌 공간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책임져야 할 것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숙제와 의무처럼 감당해야 하는 일을 한 것뿐인데 불행해졌다. 


잘못을 찾으라고 하면 열심히 산 것뿐인 인물들이 마주하는 불행을 읽어내야 한다. 노래를 듣다가 우리말로 안녕이라고 그랬다고 했지만 그날 걸려온 전화를 받고 삶은 사나운 얼굴을 한 채권자로 돌변한다. 불행보다는 불운이라고 말하고 싶다.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며 계속 나의 시간이 어둡지는 않을 것이라고. 아프고 잃어버리고 자꾸만 불어가는 빚을 갚아나가는 삶이어도. 


안녕은 아임 영을 잘못 들은 거였다. 안녕과 나는 어리다의 사이. 지금 가장 어린 상태로 아무 탈 없이 편안하게 사는 것으로 불운을 건너가면 어떨까. 집을 치우고 묵은 짐을 버린다. 지수는 남은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린다. 다짐의 말을 한다. 오늘을 살자. 드라마 《미지의 서울》에서 미지는 힘든 순간마다 할머니가 했던 말을 되뇐다.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


알 수 없는 오늘을 살아가는 나들에게 김애란은 오늘의 안녕을 빌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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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 인생 앤드 앤솔러지
권제훈 외 지음 / &(앤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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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 방기한 유튜브 알고리즘의 세계. 집을 보러 다니는 숏츠가 올라온다. 보증금 얼마에 월세 얼마. 엘리베이터가 있냐 없냐로 시작해 집안을 자세하게 보여준다. 신축과 구축, 옵션의 유무에서 보증금과 월세는 달라진다. 사람이 없는 빈집을 보기도 하고 현재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을 소개해 주는 영상을 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연예인이 살고 있는 화려한 집의 영상도 알고리즘에 의해서 올라온다. 


청소와 정리 정돈을 하는 영상을 보기도 한다. 좁은 집에 물건이 많기도 하다. 임신을 하고 아이를 키우느라 집을 정리하지 못했다는 사연이다. 재능기부로 채널주는 사연자와 함께 집을 치운다. 물건에 추억과 사연이 있어서 버릴 수 없다는 사연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둘씩 물건을 비운다. 깨끗해진 집을 구경하면서 일 년 넘게 쓰지 않은 물건을 비운다. 


앤드 앤솔러지 시리즈 중 하나인 『전세 인생』에는 집을 주제로 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집을 매매할 것이라 말하며 타인의 집을 보러 다니는 신혼부부, 공무원을 준비하는 이십 대 청년, 힘들게 전셋집을 구했는데 전세사기를 당한 가족, 죽은 집주인과 동거하는 청년, 헤어진 애인과 월세 때문에 할 수 없이 다시 사는 연인. 『전세 인생』에는 내 집이 없기에 겪는 수모와 슬픔이 있다. 


현실적인 주제의 소설들이라 빠르게 읽힌다. 지금, 여기의 일들을 말하고 있으므로. 회사 보유분으로 지금 이 가격으로 살수 있는 건 마지막이라고 아파트 분양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아무리 읽어도 전단지에 쓰여 있는 단어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몇 억이 넘는데. 대체 어떻게들 집을 살까. 대출이라는 걸 끼고 사겠지만 한 달에 이자와 원금을 갚아갈 일이 만만치 않을 텐데.


어떤 인생으로 살아갈지 모르겠다. 아니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 번만 살게 될 것이므로 사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면서 살라고 했지만 나의 인생에 붙일 수식어를 찾지 못했다. 『전세 인생』에서 웃기고도 슬펐던 소설은 죽은 집주인과 당분간 함께 살아야 한다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담은 「보금의 자리」였다. 


사람보다 유령과 살면서 의지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는 전세 인생. 우리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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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 앤드 엔솔러지
이서수 외 지음 / &(앤드)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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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에서 만난 그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일상적인 대화가 어려웠기에 아무와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제일 구석에서 고개를 숙인 채 세 시간의 수업을 듣고 차를 탔다. 차에는 나와 그 사람뿐이었는데 대번에 나를 아는 척했다. 아마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들었나 보다.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나에게 알은척을 해서 이 사람이 전부터 나를 알고 있나 나만 기억에서 잊고 있었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한국 사람들이 처음 만나면 의례적으로 그렇듯이 나이를 물어보기에 내 나이를 말해주고 질문이 왔으면 질문을 다시 해주는 게 인지상정.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호칭은 생략한 채 몇 살이냐고 물었다. 쉰 여덟이라고 하길래 없는 사회성을 찾아내어 와 보기보다 엄청 젊으시네요 했다.(잘한 거 맞겠지.)


집에 가는 방향이 맞아서 차에서 자주 만났다. 그 사람은 나를 자기 혹은 이름 뒤에 씨라고 붙여 부르기에 나는 어떻게 불러야 하나 고민했다. 여사님은 좀 그렇고 선생님? 이것도 아닌데 그럼 언니? 이제 나에게는 사회성이 아예 없나 보다. 마지막 헤어질 때까지 나는 그 사람을 그 어떤 호칭으로도 부르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만나지 않을 건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 이서수의 단편이 실린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를 그즈음에 읽고 있었는데 그럼 언니라고 한 번이라도 불러도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쉽다. 더 이상의 친교나 사교는 사절이라는 마음으로 지내다 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다.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에는 다섯 명의 작가의 단편이 실려 있다. '언니'라는 주제로 말이다. 


모두 시절 인연이라서 가슴이 아리기도 아프기도 하다. 인생에서 가장 멍청한 일이 후회하기라는데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에는 후회와 회환의 정서가 가득하다. 여성으로서 사는 거 힘들고 고달픈데 소설에는 그런 모습들이 있어서 읽는 동안 과거의 나를 미워했다.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것도 내가 언니라고 부르는 것도 낯설고 이상하다. 


이제는 내 이름 뒤에 씨를 붙여서 불리는 것도 거부감이 든다. 님도 그렇고. 그럼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해 따지겠지만 나를 부르지도 찾지도 말아 다오. 꼭꼭 숨어 있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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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조승리 지음 / 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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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을 샀다. 누가 뒤에서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계속 쫓기는 기분이 들었다. 자격증 책만 사서 나오기에는 나에게 미안해서 매대에 있는 책을 빠르게 훑었다. 빨리 사서 나가야 되는데. 왜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걸까. 조승리의 에세이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는 순전히 제목 때문에 산 책이었다. 


지랄. 지랄맞음이라니. 책 제목에 그런 불손한 단어를 넣은 패기에 박수를. 책과 저자에 관한 정보도 모른 채 자격증 책과 함께 구매했다. 오늘 나온 김에 모든 일을 다 처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종일 뛰고 걸었다. 그냥 집에 들어가기는 그러니까 이제 들어가면 언제 나올지 모르니까 카페에 들러서 책을 펼쳤다. 책을 사서 나올 때 언뜻 뒤표지에 적힌 문장을 읽었다. 


'열다섯, 앞이 잘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비유인 줄 알았다. 열다섯은 그런 나이니까. 눈을 뜨고 있어도 앞이 보이지 않는. 그래서 눈을 감았는데 어둡고 캄캄해서 빨리 다시 눈을 뜨고 싶은. 어떤 농담. 눈을 감아봐. 그게 네 인생이야. 웃기지도 않는 그런 농담이 이상하게 어울리는 나이는 열다섯이니까. 1부에 실린 첫 이야기 「불꽃축제가 있던 날 택시 안에서」를 읽으면서야 다시 뒤표지의 다음 문장을 읽었다. 


'앞으로도 앞을 볼 수 없을 거라는 진단을 받았다.'


제목의 발칙함과 발랄함 때문에 그저 사는 게 많이 어렵지만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해서 힘을 내는 에세이인 줄 알았는데.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지랄맞음이라는 용어로 가려주길 바라면서 고른 책이었는데.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는 잘 봐봐 지금 너 힘든 거 아는데 어쩌면 사는 거 괜찮을 수 있다 나 봐봐하는 책이었다. 


그저 책을 읽으며 나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고 싶었다. 뻔뻔하게 염치없게 살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를 읽으며 나 우럭. 왜 우럭. 광광 우럭. 앞을 보지 못할 거라는 의사의 말을 부정하고 싶은 엄마는 딸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늘 승리하라는 뜻으로 딸의 이름을 승리라고 지은 엄마. 


엄마가 떠나도 아이는 오늘 하루하루를 잘 지내고 있다. 한 권의 책을 사고 읽기 위해 다양한 정보들을 취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는 알려 주었다. 제목만 보고 고른 책인데 읽는 내내 울컥울컥 슬픔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조금 힘을 내었다. 축제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일의 기쁨으로 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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