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오십에 청소노동자 - 중년의 불안을 쓸고 닦는 법
송은주 지음 / 시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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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쇼츠의 세계에서 본 영상 하나. 나이 지극한 할머니에게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 할머니는 40대라고 말한다. 뜻밖에 대답에 당황해서 왜 그때로 돌아가고 싶냐고 다시 묻는다. 마흔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나이라면서 그때로 돌아가면 공부든 뭐든 다 할 수 있다면서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셨다.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나이는 스무 살도 서른도 아닌 마흔이다. 


우문에 현답으로 말하는 재치를 가질 수 있는 건 할머니 나이여서 가능하다. 마흔이 지나고 오십에 청소노동자로 제2의 인생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었다. 직관적인 제목의 『나이 오십에 청소노동자』는 직장인으로서 살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경력이 단절된 채 겪은 우울과 불안을 이야기한다. 


단순히 우울했고 불안했다가 아닌 자신이 읽은 책에 빗대어 상황을 그려낸다. 전직 인터넷 서점의 직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말이다. 맞벌이에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면서 겪는 경제적 불안에 함몰되지 않는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다는 작가로서의 갈망은 삶의 끈을 놓치지 않게 만든다. 죽음이 쉽지 삶은 어렵다. 


『나이 오십에 청소노동자』는 어려운 삶을 살아내는 엄마, 아내의 자리를 거쳐 한 인간의 삶의 분투기가 담겨 있다. 우연히(삶은 인과 관계가 없다. 핍진성 있는 앞과 뒤를 구현하는 건 말조차 되지 않는다.) 병원 청소 일이 나왔고 대학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아들 덕분에 돈을 모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사라진다. 나 하나 정도는 이제 하고 싶은 대로 살아봐도 되지 않겠냐는 각성이 들었다. 


그래서 병원 청소 일을 한다. 그전에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한 게 전부였다. 전혀 다른 인생의 노선이 펼쳐진 것이다. 새벽에 서 너 시간 일을 하면 150~160만 원을 벌 수 있다. 내가 움직여 돈을 벌수 있다는 감각을 잊은지 오래였다. 남들에게는 푼돈으로 보이겠지만 나에게는 큰돈이었다. 친구와 함께 병원 청소 일을 하기 시작했고 곧 그 일이 자신에게 맞다는 걸 깨닫는다. 


청소 일을 하면서 많은 게 달라진다. 돈을 벌어서 내가 필요한 걸 산다. 외벌이로 살 때와는 다른 경험이다. 저금을 하고 읽고 싶은 책을 살 수 있다. 그리고 생의 반환점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살았지만 책을 읽고 책을 놓지 않으려 오랫동안 독서모임을 한 저력 덕분인지 『나이 오십에 청소노동자』의 문장과 사유의 내공은 깊다. 


그가 읽어서 들려주는 책의 목록을 보기만 했는데도 내가 뿌듯하다. 알아주지 않아도 모르면 모를수록 더욱 읽고 써야 한다는 그래야 삶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나의 쓸모를 내가 재단하지 않을 것. 나이가 들어도 경력이 없어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한 군데 정도는 있다. 이력서에 쓸 때나 나이 때문에 주눅이 들지 막상 면접 보고 합격해서 일할 때에는 나이의 감각이 필요 없다. 나이가 많아도 적어도 그곳에서 나는 신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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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우리 집도 아니잖아
김의경 외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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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맞닿아 있는 소설을 읽는 일은 즐겁다. 고된 업무로 온몸이 절여진 듯한 기분에도 현실에 충실한 소설이라면 읽을 수 있다. 소설의 상황이 내가 겪은 상황 같고 소설의 인물이 나와 비슷한 처지의 인물 같아서 이입이 잘 된다.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소설 모음집을 좋아한다, 이러한 점에서. 집을 주제로 한 세 번째 기획 소설 『어차피 우리 집도 아니잖아』가 나왔을 때 망설이지 않고 구매했다. 


제목만 보고 샀는데 사고 나서야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소설 모음집이라는 걸 알았다. 제목을 잘 뽑았다, 그러한 점에서. 다섯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모두 집에 대해 말한다. 캣맘 자매의 집 구하기 이야기(「애완동물 사육 불가」부터 빌라 전세 사기를 당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마빈 히메이어 씨의 이상한 가게」로 넘어가면서 소설 속에서 펼쳐 놓는 가혹한 현실 때문에 압도 당한다. 어쩔 땐 많이 불안하고 어쩔 땐 조금 불안한, 늘 불안이 기본값인 상황에서 말이다. 


비단 집이 없어서 일 수도 있지만 삶은 매일이 어렵고 불편하다. 가만히 있는데도 물벼락을 맞아 온몸이 축축해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일 수도 있다. 괜찮아요? 말을 건네주는 사람이 없다. 『어차피 우리 집도 아니잖아』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비참한 기분이 드는 한 주에 월, 화, 수, 목, 금(소설이 다섯 편이니까)에 한 편씩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소설 속 인물들의 공통점은 집을 원한다는 거다. 펜트하우스나 큰 평수의 집 말고 나와 내 반려동물과 내 짐을 들일 수 있는 나만의 공간. 요즘 시대에 그건 특별함을 바라는 거라는 소리는 하지 말자. 입고 먹고 사는 것은 기본이란다. 이 기본이 이제는 특별해졌겠지만 그래도 우리 기본은 지키면서 지켜주면서 살아가자.


정명섭은 작가노트에서 전세사기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잘못이나 욕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말로 위로를 건넨다. 그가 쓴 『평수의 그림자』는 어느 날 사람의 그림자가 그 사람이 사는 집의 그림자로 보이는 이야기를 그린다. 발상의 기발함 뒤에 피해를 당한 사람을 위로하는 마음까지 시간을 들여 소설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라는 끝도 없이 자기 자신을 구렁텅이로 밀어내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암담함을 그린 정진영의 『밀어내기』 역시 읽고 나면 마음이 스산해진다. 최선의 선택이었음에도 지금의 상황 때문에 잘못된 선택이라고 자책하게 만든다. 후회가 남지만 삶은 끝나지 않았기에 끌고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섯 편의 소설이 실렸다고 하는데 이 리뷰에서는 네 편의 이야기만을 다뤘다. 마지막 한 편 최유안의 「베이트 볼」의 정보는 아껴 두겠다. 이 또한 집 한 채에 담긴 서글픈 시절을 다뤘다. 우리 집은 진정 우리 집이 될 수 있을까. 『어차피 우리 집도 아니잖아』는 우리 집이란 무엇일까를 묻는다. 각자의 대답은 다르겠지만 공통된 마음은 어찌 됐든 우리 집 한 채 있으면 좋겠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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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올리브에게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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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필요했다. 피곤하고 어두운 지금을 잊을 수 있는. 


여백이 필요했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글자들이 아닌 여백이. 


몇 주 전에 사 둔 책이 떠올랐다. 읽으려는 의욕이 앞선 시기에 산 책. 지금은 읽고 싶어도 그저 눈으로만 책이 거기 있다는 걸 아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이야기와 여백이 필요하므로 그 책을 읽으면 되겠다 싶었다. 잠이 쏟아졌지만 책장을 펼치면 손 글씨와 우표가 붙어 있는 책을 소중하게 꼬옥 안았다. 옆으로 휘어진 나무와 그 아래 의자가 있는 장을 넘기면 개 한 마리가 따라오라는 듯한 그림이 나온다. 


녀석의 바람대로 그림과 이야기 속으로 따라 걸어간다. 루리의 『나나 올리브에게』는 이렇게 시작한다. 손 글씨와 우표, 알록달록한 그림은 나만을 위해 준비한 유일무이한 책인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착각이어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나에게 와서. 지친 내가 시간을 얻어서 『나나 올리브에게』를 읽을 수 있어서. 이런 경험은 다정하다. 


그 집에 가면 휘어진 올리브 나무가 있고 나무 이름을 딴 나나 올리브가 살고 있다고 한다. 정확한 위치나 주소도 알지 못하지만 사람들은 그곳에 가보았고 나나 올리브와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죽음의 문턱에 있던 사람에게는 눈 주변이 까만 개 한 마리가 올리브 나무 집으로 이끌고 갔다. 그렇게 사람들은 지쳐 있거나 죽음의 순간에서 올리브 나무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배경을 생각해 보았다. 공간적, 시간적 배경 말이다. 어느 때일까 어느 장소일까. 책을 읽어갈수록 그런 걸 생각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나 올리브에게』의 배경은 지금 여기를 말하고 있다. 전쟁으로 사람들은 여전히 죽거나 다치고 고통받고 있으니까. 배경을 굳이 따지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기억 속 올리브 집을 떠올리며 잊고 있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리스는 여행을 시작한다. 어린 시절 그곳에서 잠시 머무르며 상처와 아픔을 치유한 적이 있었기에 지금이라는 놀라운 시간을 살 수 있었다. 올리브 나무 집에서 만난 군인 월터에게 연락을 취한다. 그는 암이 발병해 항암 치료 시작 전이다. 기억 만으로 그 집을 찾을 수 있을까. 


다리스는 올리브 나무 집을 찾아낸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한 시절을 보낸 기억은 진짜였다. 집은 폐허가 되었지만 몇 군데는 놀랄 정도로 깨끗했다. 나나에게로 시작하는 편지가 담긴 노트 한 권을 발견한다. 『나나 올리브에게』는 나나 올리브에게로 보내는 편지가 대부분 주를 이룬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당신의 코흘리개'로만 자신을 밝히는 이가 그리운 마음을 담아 나나에게 편지를 쓴다. 


쏟아지는 잠을 이기면서까지 『나나 올리브에게』를 읽으며 지나가 버린 시절을 생각했다. 지나갔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시간에 대해서 말이다. 중요한 건 지금 여기의 마음이다. 그럼에도 지나가 버린 그 시간이 있어서 지금 여기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잊어버려도 되고 기억해도 된다. 살아가다 문득 그때를 떠올리는 건 힘을 얻기 위해서이다.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힘. 


언젠가는 끝이 날 편지를 써보려고 한다. 나나에게. 나나는 모든 이름이 될 수 있다. 마음이 아파 부르지 못할 이름에 나나를 대입해서 그리움을 마음껏 드러내면 상처받아도 곧 아물 수 있을 것 같다. 내일 보다 더 먼 날을 상상하는 것. 『나나 올리브에게』를 읽으며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조심스럽지만 일 년 후와 이년 후와 그 이후의 날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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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주인 각본집 - 초판 종료
윤가은 지음 / 안온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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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 감독의 신작 영화 『세계의 주인』을 꼭 보고 싶었다. 민음사 티비에 나와서 책을 추천해 주는 밝은 모습에 반하기도 했지만 그전 영화들이 기억에 오래 남았기 때문이다. 개봉관을 검색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근처 영화관에서는 상영하지 않았다. 영화가 좋다는 평이 많아서 꼭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하다가 각본집이 나왔다는 소식. 볼 수 없다면 읽어보자. 


영화의 각본집을 사는 일은 처음. 영화를 보지 않고 각본집을 읽는 일도 처음. 『세계의 주인』 속 주인공 주인이를 이렇게라도 만나서 다행이고 행복한 일이다. 나중에 OTT로 나오면 다시 보러 갈게, 주인아. 각본집이라고 불리는 『세계의 주인』 책은 예쁘고 근사하다. 첫 표지에는 '세계의 주인'이 표지를 넘기면 '주인의 세계'라는 반전이 숨겨져 있다. 


'세계의 주인'에는 주인이가 없지만 '주인의 세계'에는 주인이와 다른 주인이들이 있다. 영화에는 가벼운 반전이 있다고 해서 '무스포 챌린지'를 지향한다고 한다. 큰 스크린 안에서 주인이와 다른 주인이들을 볼 순 없지만 나만의 장소에서 주인이를 만나는 일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숨을 고르기도 하고 숨을 멈추기도 했다. 


윤가은 감독의 에세이 『호호호』를 읽어서 그가 글을 쉽고 솔직하게 잘 쓴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각본마저도 평이하고 간결하게 그러나 여운은 오래 남게 쓸 줄이야. 역시 재능은 대단하고 노력은 훌륭하다. 영화를 봐서 가슴이 뛰었다면 각본집 『세계의 주인』도 읽었으면 좋겠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세계의 주인』만 읽었을 때에도 영화가 얼마나 좋을지 짐작이 간다. 


밝고 활발한 주인이가 세계의 주인이었다가 솔직하고 사랑이 많은 주인은 세계와 하나가 된다. 세계 속에 내가 포함되었다면 비로소 할 말을 해야 하는 순간에 나는 세계를 끌어안을 수 있다. 상처를 극복하거나 이겨내야 한다는 주입식 위로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살아가기를 주인이는 실천한다. 이 세계의 주인공은 오로지 내가 될 수 있다고도 말해준다. 


좋아하는 영화의 각본집을 사는 이유를 알겠다. 활자가 영화로 바뀌는 놀라운 순간을 간직하고 싶어서 아닐까. 책 속에 주인이는 다정하고 당차고 잘 웃는다. 영화 속 주인이는 더 사랑스러울 것 같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 한다. 아픈데도 아프지 않다고 말하면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없을뿐더러 나의 세계를 이룩할 수도 없다. 


언제든 어디에서든 나로 살아가기. 불행한 나도 행복한 나도 모두 나이므로. 그걸 다시 깨닫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 이주인. 이상 『세계의 주인』을 읽은 독후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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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명세서 - 자아에 가격 매기기
김나연 지음 / 글항아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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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인지 불행인지 신용카드가 없다. 카카오뱅크와 농협 체크카드 두 장으로 살고 있다. 신용카드의 좋은 점은 알고 있다. 잘 쓰고 잘 갚으면 신용점수가 올라가고 무이자 할부를 요리조리 활용하면 큰 금액대의 물건을 부담 없이 살 수 있다. 오늘의 나는 못 갚지만 다음 달의 나는 갚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점이 싫어서 신용카드를 만들지 않았다. 신용점수가 지금의 나와는 무슨 상황인데 하는 것과 큰 금액대의 물건은 어떻게 사든 부담이 된다. 할부는 빚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신간 목록에 올라와 있는 김나연의 에세이 『가난의 명세서』는 표지부터 직관적이었다. 표지에는 저자의 카드 승인 내역이 누적금액까지 그대로 올라와 있다. 제목도 그러했다. 최근 나의 화두는 가난이기에 이러한 제목을 보고서 책을 사지 않으면 번뇌를 계속 앓을 것 같았다. 책의 표현대로 '가난할 때는 이 궁핍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어서, 풍족해지니 이걸 잃을 날이 곧 올 것만 같아서, 매일이 불안했다'는 정확히 그간의 나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몸이 가난을 기억한다는 사람은 죽는다는 대전제에 버금가는 진리였다, 살아보니. 


일상을 살아가는 나의 모든 행동의 기저에는 가난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란 의심이 들 정도로 매사에 자신감과 의욕이 없다. 마트에 가서 식재료를 고르는 일에서조차 망설이고 주저한다. 가성비와 가심비 사이에서 고민하는 동안 결국 사지 않기로 한다.(책은 예외다. 한두 번 정도 고민하고 구매한다. 마음의 양식이라는 책의 비유에 긍정하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유일한 소비.) 계속 생각한다. 그렇게 아껴서 죽을 때 가져갈래?


아니. 안 가져가는 게 아니라 못 가져가. 그러니 궁상 좀 그만 떨어. 마음의 소리는 가차없다. 신용카드를 쓰지 않는 대신 체크카드를 쓰면서 합리적인 소비를 해보려고 하지만 한 번씩 마음의 고삐가 풀릴 때가 있지만 그마저도 체크카드 안에 돈이 있을 때나 가능해서 요즘엔 그런 일이 거의 없다. 김나연의 『가난의 명세서』를 읽는 동안 6개월 전에 나와 지금의 나를 심각하게 비교할 수 있었다. 


저자 김나연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다. 평범이란 가장 이루기 어려운 삶의 형태라는 점도 깨닫는다, 살면서. 평범은 도달할 수 없어서 김나연은 스스로를 평범의 범주 안에 넣기 위한 고군분투를 시작한다. 책은 두 가지의 챕터로 나눠져 있다. 할부로 결제한 10월 카드 명세서와 일시불 명세서로. 각각의 지출 내역에 그에 따라오는 이야기가 현실에 닿아 있어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추리와 스릴러 소설도 아닌 가난을 주제로 한 에세이를 이토록 긴장하면서 읽을 수 있다니. 『가난의 명세서』는 현실을 압도한다.


되지도 않는 희망과 낙관을 달콤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난과 빈곤이 주는 사회 경제적 영향을 심도 있게 분석해서 읽는 사람마저 심각해지게 만들지도 않는다.  『가난의 명세서』는 오늘 여기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들을 비춘다. 카드 영수증으로 말이다. 쿠팡에서 5만 원 이상 사면 무이자 할부가 되고 (그래서 저자는 꼭 5만 원을 채워서 산다.) 구매처마다 무이자 개월 수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거 이런 거 또 나만 모르고 있었지. 


가난한 집에서 공부를 잘해서 가난한 집에서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김나연은 최선과 열심을 다한다. 어른들이 하는 말이 있다. 살만해지면 병이 든다. 아등바등해서 겨우 돈을 모았지만 그 돈은 가족의 병원비로 쓰이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난할 때는 궁핍의 끝을 알 수 없어서 풍족해질 때는 다시 잃어버리지 않을까 (잃을 게 많지 않은데도 가지고 있는 이것마저 잃을까 싶어서.) 걱정을 하면서 살아간다. 


사회학을 공부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저자의 말이 위로가 되었다.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지만 책 읽는 걸 좋아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었다. 2025년이 아직 다 가지는 않았지만 올해 읽은 에세이 중 제일 좋았다, 『가난의 명세서』는. 저자의 다른 책은 종이책이 절판되어서 전자책으로 구매했다. 그 책도 후기가 좋아서 기대된다. 


가난한 자들이 행해야 할 수칙 같은 건 없다. 몸이 가난을 기억한다고 암울하게 생각하지만 죽을 때 가져갈 건 아무것도 없다고 나를 가스라이팅 하면 갖고 싶은 북 커버 정도는 살 수 있지 않을까. 아직 2025년이 끝나지 않았지만 올해 제일 잘한 소비는 다이소 북 커버이다. 자꾸 책을 넣어서 읽고 싶게 만든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나 책 좀 읽는다는 뿌듯함과 만족을 오천 원으로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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