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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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아침형 인간이 된 지 석 달.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보인다. 집을 나서면 횡단보도 앞에 깃발을 들고 서 있는 어른이 있다. 일명 녹색 어머니회. 어머니회라고 하지만 남자 어른도 있다. 깃발과 경광봉을 든 두 어른은 아이가 지나갈 때마다 에스코트하듯 아이를 학교 쪽으로 인도한다. 조그만 몸에 큰 가방을 멘 아이들은 마스크를 꼭꼭 쓰고 있다. 올해는 초등학교 1, 2학년은 매일 등교를 할 수 있다니 다행이다. 학교를 갈 수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쁜 일이 될 줄이야.


단지 공부만 하러 학교에 가는 것이 아님을 절실하게 느낀 2020년이었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고 함께 밥을 먹고 놀기도 한다. 체육시간에는 강당이나 운동장에서 모여 뛰어다닌다. 운동회와 소풍날에는 모여 앉아 김밥을 나눠 먹는다. 이런 일을 작년에는 하지 못했다. 모든 행사가 취소되고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해야 했다. 아동 센터도 문을 열지 않아 아이들은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학원에 갈 수 있는 아이들은 학원에 갔지만 그마저도 코로나가 심해지면 휴원을 해야 했다.


내내 안타깝고 서글픈 한 해였다. 2021년은 좀 다를까. 요즘 내가 아침에 보는 풍경은 어른이 아이를 지켜주는 따뜻함이 있었다. 어른과 함께 길을 걸어도 아이들은 손을 들고 걸었다. 배운 걸 실천하는 똑똑함. 엘리베이터에서 학교나 유치원에 가는 어린이를 만나곤 하는데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한다. 김소영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나서 오늘 나도 한 가지를 실천했다. 그전에도 인사를 받으면 고개를 숙이거나 안녕하세요라고 하기는 했다.


어린이에게도 본격적으로 존댓말로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어야겠다는 결심과 실천. '어린이가 있다'라는 진실을 『어린이라는 세계』는 깨우쳐 주었다. 어린이 책을 만드는 편집자로 일하다가 독서 교실을 열어 어린이와 수업을 하는 김소영의 에세이를 읽는 내내 부끄럽고 뭉클했다. 어린이라는 시간을 거쳐왔지만 그때의 기억을 다 잊은 듯 항상 어른이었던 것처럼 지내왔던 것이다. 왜 저렇게 뛰어다닐까.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하지. 나 역시도 어린이였을 때는 시끄럽고 떼를 쓰며 지냈는데, 홀랑 다 까먹고.


몸집이 작은 어린이가 보는 세계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어린이라는 세계』는 이야기한다. 책상 위에 있는 걸 책장에 꽂혀 있는 걸 보고 싶어 위험한데도 손을 댄다. 제대로 된 자기표현을 할 줄 몰라 크게 말하는 것이다. 김소영이 독서 교실에서 만난 어린이의 에피소드를 읽고 있으면 뭉클해지는데 그건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 어른들의 그것에 비해서 솔직하고 다정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여행을 가면 맛있는 걸 사와 독서 교실의 선생님에게 주고 자신이 읽은 책 중에서 좋았던 걸 선물하는 어린이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건 어린이가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한 김소영의 관점이었다. 예전에 보았던 다큐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쓰레기로 뒤덮인 집에서 한 어린이는 아빠와 아이들이 여행을 가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홀로 방치된 채 말이다. 자신의 상황과는 너무 다른 환상 속 세계를 보며 아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짐작하기조차 미안해졌다. 아이가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고 자신의 현실과 비교하는 게 아닌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환상을 파는 게 아닌.


아이들은 환상을 먹고 자라지 않는다. 누구보다 현실을 바로 직시하고 안정적인 세계로 나아가길 주저하지 않는다. 넌 몰라도 돼. 넌 어리니까 모를 거야 하는 말은 하지 말자. 우리 모두 알만큼 알았고 알았지만 모른 척하며 살았던 걸 잊지는 않았겠지. 어린이가 질주하는 차로부터 보호받으며 학교에 갈 수 있게 도와주는 어른으로서 '어린이라는 세계'에 안착하고 싶다. 그거면 된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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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사랑하는 직업 마음산책 직업 시리즈
요조 (Yozoh) 지음 / 마음산책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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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금요일입니다. 밤이고요. 왜일까요? 배가 고픕니다. 당연한 거라고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요. 오늘은 여섯시 일어나기에 성공했습니다. 다시 잠들까 봐 전기장판을 끄고 책을 읽었습니다. 화요일부터 읽기 시작한 책인데 부지런하지 못한 저는 금요일까지 잡고 있었어요. 오늘은 다 읽자 하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습니다. 요조의 산문집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입니다. 전작 『아무튼, 떡볶이』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떡볶이에 진심인 것 같더라고요.


대체 얼마나 떡볶이를 좋아하길래 떡볶이에 대해 쓸 수 있는 건지, 무언갈 열렬히 좋아하는 자의 열정을 본받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여겼던 학창 시절이 떠올라 애틋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미로 같은 시장 골목을 걸어가 먹었던 떡볶이. 고추장의 맛을 빌려 그나마 맛을 내서 해 먹는 떡볶이. 배달 앱을 보지만 이 돈 주고는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시켜 먹지 않는 떡볶이. 아침이 밝아오는 걸 보면서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을 읽어나갔습니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제주도에서 가서 책방을 새로 연 요조의 일상이 들어 있습니다. 『아무튼, 비건』을 읽고 채식을 시작한 이야기까지. 완전한 채식이 아닌 간헐적 채식을 권하는 글이 좋았습니다. 자신이 실천하고 있는 일상의 습관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하세요가 아닌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라고 말해주어서요. (약간 친절해 보이는 청유형의 말투를 좋아합니다. 별 차이 없는 것 같다고요? 전 좀 다르게 느껴지던데.) 사고로 죽은 동생 이야기를 애써 감추지 않기도 해요.


죽음에 대해서. 이겨내거나 극복하라고 하지 않아요. 슬픔이란 옅어지는 게 아닌 우리 인생의 배경이라는 걸 아는 자의 담담함이 엿보였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글을 쓰며 살게 되었을까요, 요조는. 답을 알 수 있거나 최종 목표를 정할 수 없는 게 글쓰기인데. 글을 쓰지 않아도 잘만 살아갑니다. 책을 읽지 않아도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어쩌다 성취도를 평가하기에 애매한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자로 살아가는지.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을 읽다 보니 알겠더라고요.


예전에는 일을 못한다면 불안하고 막막해서 미치지 않을까 해서 꾹 참고 일을 했습니다. 막상 일을 쉬게 되자 막막함 대신 편안함이 찾아왔습니다. 안도감도 듭니다. 왜 이런 마음이지, 내내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일찍 일어나기. 한 달에 책 10권 이상 읽기. 자격증 시험에 합격하기. 해야 하는 일이 아닌 해보고 싶은 일이라고 여기며 도전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내 나이 또래의 누군가들의 성공기를 보면서 하지 않아도 될 나 자신과의 비교를 간간이 하기도 합니다만. 결코 실패라는 얄팍한 단어로 지금의 나를 설명하지 않기 위해 책을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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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1
정소현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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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소설을 읽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미쳐가고 있었다. 정소현의 소설 『가해자들』은 '나는 계속 견디는 중이었다'로 시작한다. 무엇을 견디는 것인지는 바로 밝혀진다. 아래층에 사는 인물은 위층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거실과 부엌, 방으로 이어지는 발걸음 소리. 콩콩, 쿵쿵거리는 소리들을. 아파트에 사는 이들이라면 한 번씩 경험해봤을 층간 소음을 『가해자들』은 다룬다. 소제목은 아파트 호수를 의미하는 숫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1111호. 가장 문제적인 집이다. 이 집으로 인하여 윗집, 아랫집은 모두 이사를 나간다. 여덟 살 아이가 있는 남자와 결혼한 주인공은 처음에는 밝고 순하고 긍정적이었다. 좁은 집에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아이도 낳았다. 시어머니는 그런 며느리를 못마땅해했다. 언제든지 첫 번째 며느리처럼 배신을 하고 집을 나가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너를 믿지 않는다는 말을 수시로 했다. 여자는 서서히 병들어갔다. 좁은 집에 살면서 들리는 위층의 소음도 한몫했다.


산후풍이라는 병명을 얻고 집에 들어앉아 버렸다. 바람이 몸에 스치기만 해도 아팠다. 결국 시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몸에 한기가 든다는 며느리 때문에 냉장고 문도 제대로 열지 못하는 갑갑함 때문이었다. 여자는 그 후로도 소음에 시달렸다. 위층에서 들리는 사소한 소음에도 반응했다. 여러 번 관리실에 항의 전화를 걸었다. 나중에는 천장을 찍기까지 했다. 아파트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에 집착했고 화장실에 우퍼를 설치해 놓고 음악을 반복적으로 틀었다.


1111호 아랫집에 사는 갓난 아기 엄마는 음악 소리에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이가 조금만 울어대도 위층의 보복이 시작됐다. 급기야 1111호 옆집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여섯 살 아이를 키우는 1112호 여자는 1111호에서 항의를 하면 죄송하다고 자신이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노라고 했다. 주의를 하겠다고. 그럼에도 받는 문자와 보복 소음에 미쳐버린다.


다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20년 된 아파트에 살아서 어느 정도 소음을 껴안고 살았다. 아니 소음이라는 게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1111호에서 소음 항의가 시작되자 그제야 아파트에서 들리는 소리에 반응했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가해자들』에서 자신들은 모두 피해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위치를 역전시킨다. 소음 관련 항의를 받으면 처음에는 나 역시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가해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미안해한다. 그 사실에 경악하기도 한다.


늘 참고 견디고 살았던 나인데 누군가를 힘들게 했었음에. 조심하고 또 조심하지만 일상 소음이 나지 않을 수는 없다. 여러 번 항의를 받고 나면 인식이 달라진다. 그때부터 문제는 시작한다. 1111호는 소음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바뀐다. 아파트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이해를 바라는 일은 어려운 일처럼 되어 버렸다. 피상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박에 없는 구조상(어쩌면 피상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아파트에 사는 것인지도) 내 처지를 모두 이해시킬 수는 없다.


『가해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피해자의 위치에서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아무도 자신이 가해자라고 말하지 않는 세상에서 피해자는 존재할 수 없다. 모두 피해를 주장하지만 가해를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서 피해는 인정되지 않는다. 『가해자들』에서 소음에 시달리는 이들은 여성이었다.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이 무서웠다. 공포는 낯선 것이 아닌 익숙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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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이 찌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
김안젤라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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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면 몸무게부터 잰다. 경건한 마음으로 체중계에 올라간다. 오늘은 몇 킬로그램일까. 얼마나 불어 있을까. 어젯밤 컴퓨터 앞에 앉아서 두유 넣은 커피랑 대왕 초코칩 쿠키 먹은 나를 떠올리며. 아니나 다를까. 지난주 같은 날에 비해 몸무게가 400그램이 불어 있다. 안다. 몸무게 강박인 거. 3년째 달력에 몸무게를 기록하고 있다. 어제 보다 찌면 우울. 빠져 있으면 안심. 이런 나날이 3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음식을 먹기 전 이걸 다 먹으면 살이 찔 것 같다는 걱정스러운 소리부터 낸다. 다행히도 같이 먹어주는 사람은 그런 나에게 잔소리나 힐난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괜찮다고 다정하게 말해준다. 많이 먹으라며. 그래도 조금씩 천천히 먹기로 한다. 한때 나는 몸무게를 생각하지 않고 지냈다. 꾸미기에 열이 오른다는 이십 대 시절에는 통통한 체형으로 살아갔다.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면서. 많이도 먹어댔다. 나는 식탐이 많다. 나는 내가 뭐든 잘 먹는 사람인 줄 알았다.


먹다 보니 알겠더라. 뭐든 잘 먹는 사람인 게 아니라 먹는 행위에 열을 올리고 있음을. 천천히 소화를 해가면서 먹어야 하는데 일단 먹고 보자는 식이었다. 그래서 소화제는 필수. 그렇게 잘 먹는 척을 하다가 인생 최고의 몸무게를 찍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채식을 하고 현미밥을 먹고 한창 유행하는 1일 1식에 도전했다. 몸무게는 빠졌다. 앞자리가 두 번 바뀌고 일 년을 유지했다. 다이어트를 해본 사람들은 안다. 살을 빼는 것보다 유지하는 게 힘든 일임을.


다시 통통이로 돌아갔고 그동안 먹지 못한 음식을 먹었다. 하루 종일 먹는 것만 생각했다. 의지가 강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기에 다시 다이어트를 하고 싶지 않았다. 사는 게 마음처럼 되는가. 극단적인 절식보다는 먹고 싶은 걸 먹되 조금씩 먹는 방식으로 몸무게를 조절하고 있다. 다이어트를 해서 날씬해지면 예뻐질 줄 알았는데. 그냥 나였다. 그냥 내가 됐다.


『살이 찌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는 날씬한 몸매를 위해 무리한 다이어트를 하다가 폭식증을 앓게 된 김안젤라의 생생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어렸을 때는 날씬이었단다. 많은 음식을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았다. 중학교에 올라가 호르몬의 변화가 생기면서 살이 급격하게 쪘다는 저자는 그 후 다이어트를 결심한다. 그 결심에는 끊임없이 다른 이와 비교하는 자신이 한몫했다. 안부 인사처럼 하는(그게 안부 인사가 되는가는 여전히 의문이 든다.) 살쪘네, 쌍수만 하면 이쁠 거야, 같은 되지도 않는 외모 평가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 생각 없이 한 어떤 말에 누군가는 평생의 상처가 된다. 일하러 직장에 갔는데 쌍수를 해라, 왜 그런 옷을 입냐, 이런 말을 들으면 한동안 멍해진다. 김안젤라의 다이어트는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심해진다. 초절식으로 음식의 양을 줄이자 몸무게는 빠졌지만 음식에 대한 집착이 심해진다. 집착은 폭식증으로 변했고 한 번 음식을 먹기 시작하면 절제가 안된다. 먹고 살이 찐다는 공포 때문에 토하는 이른바 폭토를 한다. 토하고 나서는 자기혐오라는 감정이 찾아왔다.


내가 왜 이럴까.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마음에 스스로 섭식장애를 다루는 병원에 찾아간다. 이는 드문 일이라고 한다. 폭식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주변의 권유에 의해 간다. 스스로 병원에 간다는 건 치료 의지가 강한 것이라고. 병원에 가서 상담을 하면서 저자는 과거의 자신과 마주한다. '내면의 어린아이'가 겪은 고통의 기억을 찾아내 마주하는 것이다.


결코 말하기 힘들었던 경험을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가족과의 관계부터 꺼내기 어려웠을 유학에서의 경험까지. 폭식증을 다룬 영화와 드라마를 소개해 주기도 한다. 무조건 마른 게 예쁘다는 인식에서 찾아온 폭식증이 어떻게 삶을 망치는지까지. 『살이 찌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는 우여곡절 끝에 폭식증을 이겨냈다는 희망기가 아니다. 폭식증을 앓고 있는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천천히 자신이 세운 미의 기준을 바꿔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책이다.


통통해도 나. 날씬해도 나. 나는 어디 가지 않고 여기 있다. 단지 타인의 잣대로 내가 나를 바라보며 힘들게 한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말에 동의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남을 의식하지 말고 본인의 삶에 충실하게 살아가세요,라고 말하는 책을 읽었다고 해서 당장 오늘부터 나를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대신 나와 같은 처지에 있던 이가 들려주는 솔직한 이야기에서 나만이 고통스러웠던 게 아니었음을 발견한다.


요즘은 나로 살아간다는 게 가장 어려운 일처럼 느껴진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하고 싶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 강요된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나는 점점 네가 되어 간다. 누구처럼 되고 싶다가 아닌 나처럼 살아가고 싶다는 사고가 내면에 정착될 때까지 살아가기로 한다. 일단 살아보라고 『살이 찌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는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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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인생 2 - 세계가 아무리 변해도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이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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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읽게 된 마스다 미리의 『오늘의 인생 2: 세계가 아무리 변해도』. 찾아보니 『오늘의 인생』1권은 2017년 12월 이맘때에 읽었다. 그때 쓴 리뷰를 보니 지금과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오늘의 인생』1권을 가지고 스타벅스에 갔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그곳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컵을 사 왔던 오늘의 인생이었다. 백화점에 들러서 화장품도 샀었네. 『오늘의 인생 2: 세계가 아무리 변해도』를 읽는 2020년의 12월은 집 안에서만 지내는 오늘의 인생이다. 이것도 나쁘지 않지만 문구 덕후로서 부산 서면에 있는 교보 문고를 가지 못하는 건 아쉽다.


여행 가기와 카페에 앉아 차 마시며 책 읽기를 즐겨 하는 마스다 미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일본은 한국보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많이 나와서 특히 그녀가 사는 도쿄는 더더욱, 책을 보니 2월 14일에 미팅을 하러 간 것 빼고는 5개월 동안 집에만 머물렀다. 2017년부터 2020년의 일상 이야기가 실린 『오늘의 인생 2: 세계가 아무리 변해도』. 전반부에는 마스다 미리의 보통이 삶이 있다. 여행을 가고 외식을 하고 서점 카페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다니며 의미 있는 대화를 듣고 일상의 풍경을 기억에 담아 그림으로 그려 넣는, 오늘의 인생이. 묘하게 바뀐 기분을 전환하려고 디저트를 먹고 빨간색 지갑을 사러 다닌다. 영어 회화 학원과 헬스장을 다니기도 하면서. 알록달록한 종이 위에 반짝반짝 빛나는 하루가 있다. 표지가 빨간색이어서 연말에 소중하게 생각되는 사람에게 선물하면 센스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책이다.


원래 책 선물은 취향이 타는 선물이라 조심스러운데 마스다 미리의 책은 누구나가 좋아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는 책이다. 보고 있으면 눈이 편안해지고 마음마저도 말랑말랑하게 풀어진다. 마스다 미리가 대단한 건 빠르게 지나칠 수 있는 일상의 단상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많은 시리즈 중에 '오늘의 인생'이 사랑받는 건 오늘 하루도 괜찮았어, 미운 감정이 들었지만 표현하지는 않았어, 나 어른이 됐는 걸이라는 나를 향한 위안을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책은 산책을 하다가 '코로나가 끝나면'으로 시작되는 대화를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다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보고 싶다는 마음을 품는다. 전 세계인 모두가 그럴 것이다. 카페에 가고 쇼핑을 하고 전시회에 구경 가고 적금을 깨서 비행기 티켓을 끊고 집에 초대해 음식을 나눠 먹는 과거의 일상을 누리고 싶다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선언이 믿기지 않았다. 마스크가 일상이 되어 버리고 이동하는 것에 공포를 느끼게 된 오늘의 인생.


두렵고 불안한 오늘이지만 『오늘의 인생 2: 세계가 아무리 변해도』속 오늘은 그런 하루마저도 여전히 고양이는 낮잠을 자고 바람은 그대로 불어와서 변하지 않는 게 있다고 이야기한다. 집 정리를 하다가 살아 있음에 감사함을 느끼고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에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았던 자신이 있었기에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제빵기를 사서 식빵을 만들어 먹고 마스크를 쓰고 산책을 한 끝에는 편의점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는 코로나 시대의 오늘의 인생.


모두 어떻게 슬픔을 이겨내고 있을까. 다들 괜찮은 걸까. 아니 이겨내거나 괜찮지 않다. 다만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뉴스에서 겨울철에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더 극성이니 자주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하라고 해서 매일 그렇게 하고 있다. 지인 모임은 자제하고(지인이라고 내세울 만한 사람이 없다. 원래 만남 자체를 거의 하지 않아서 이건 지키고 말 것도 없다) 마스크를 꼭꼭 쓰고 버스를 타고 학원 수업을 듣는다. 커피는 테이크 아웃으로. 배달 음식 시키는 횟수는 좀 늘었고.


마스크를 쓰고 모르는 사람과 웃음을 나누고. 온라인으로 친구들과 다과 모임을 하는 바다 건너 사는 마스다 미리 언니의 오늘의 인생을 엿보는 오늘의 인생. 어디에 취직을 해야 하나. 누가 날 써 줄까. 줄곧 고민하다가도 다정한 이가 사다 주는 커피와 마카롱을 먹으며 헤헤 웃는 오늘의 인생. 마트에서 골라 나온 스탠드가 마음에 들어 하나 더 살까 갈등하는 2020년 12월 26일 오늘의 인생.


오늘 읽고 쓴 『오늘의 인생 2: 세계가 아무리 변해도』의 리뷰를 다시 읽어보니 '오늘의 인생'이 딥다 많이 나와 좋은 글은 아니겠구나 생각한 오늘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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