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T - 내가 사랑한 티셔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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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일했던 곳이 좋았던 게 옷에 대한 지적이나 규칙이 없었다. 처음에는 몸집에 비해 왜 옷을 크게 입고 다니느냐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크게 입고 다니니 그런가 보다 했다. 신기하게도 대부분 자신이 입는 옷에 만족하며 지냈다. 이게 무얼 의미하냐면. 옷에 심미적인 기능을 부여하지 않고 오로지 활동하기 편한 옷을 찾아 입는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옷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계절마다 신상 옷을 사서 입고 왔고 보기 좋다고 근사하다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름이 좋았다. 미니멀리즘의 유행에 동참하며 입지 않는 옷, 입지만 불편한 옷, 언젠가 입을 거라고 모아 놓은 옷을 정리했다. 남는 건 땀 흡수 잘 되고 빨면 금방 마르는 옷이 남았다. 카카오 프렌즈의 라이언을 좋아해 라이언이 프린트된 반팔 티를 많이 샀다. 그걸 입고 가도 괜찮았다. 알만하죠? 분위기. 깃과 프릴이 달린 옷은 거의 입지 않았다. 여름 내내 반팔 티와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하여 지금 내 옷장에는 격식을 갖추어야 할 자리에 입고 나갈 옷이 거의 없다.


봄, 가을, 겨울에는 셔츠를 입고 다녀 그나마 괜찮은데 여름은 이도 저도 안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옷이 없는 것도 아니다. 센스가 있다면 있는 옷으로도 그럭저럭 인상을 좋게 봐줄 만하게 코디해 볼 수도 있을 텐데. 그놈의 센스가 내게 없다는 게 문제. 무라카미 하루키의 『무라카미 T 』를 읽으며 반팔 티만을 입고 다녔던 작년 여름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때는 몰랐겠지. 지겹다고 생각하던 그 시간을 그리워하고 있을 줄은. 어쩌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티셔츠를 모으기 시작했을까.


어쩌다는 어쩌다. 그냥 마음에 들어 하나둘씩 모으다 보니 책으로 쓸 만큼 양이 상당했던 거지. 역시 소설가답게 티셔츠에 담긴 사연도 알차게 썼다. 대부분 어디에서 샀고 왜 샀는지 나름 티셔츠의 역사를 한낮 공원 벤치에 앉아 무심하게 들려주듯 나른한 감성으로. 소설가는 다르다. 그러니까 무라카미 하루키니까 다르다는 거다. 자신이 모은 티셔츠 컬렉션으로 글을 쓰고 책을 낸다. 책에 나오는 어떤 티셔츠는 당장 입어 보고 싶을 정도다. 보관 상태가 좋고 색감이 예쁘다.


정작 본인은 이건 이래서 못 입는다는 썰을 풀어 놓고 있지만. 프린트된 그림이 귀여워서. 자신이 이름이 있어서. 대학 로고라서. 그런데 사람들이 남의 티셔츠를 유심히 보긴 하나. 의외로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무라카미 하루키다. 상대가 좀 특이한 티를 입었다면 와 귀엽네, 예쁘다 정도의 감상으로 끝나지 않나. 그런 티를 입은 사람이 이상하다고 생각은 들지 않을 텐데 말이다. 아무튼 『무라카미 T 』에는 수집에 일가견이 있는 무라카미 씨의 남다른 티셔츠 사랑이 감각적인 티셔츠 사진과 함께 들어 있다.


남이 입고 먹는 건 좋아 보이는 게 인지상정. 책에 실린 티셔츠가 매장에 있다면 당장 살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입으라고 준다면 입고 다닐 정도. 왜 이런 마음이냐면 아니다. 아직은 그런 마음을 글로 쓸 정도는 아니다. 어제 시험 보고 진이 빠져서 내내 누워 있었다. 정신 차리고 책상 정리하고. 그렇답니다. 공부보다 책상 정리를 좋아하는. 공부왕 찐천재 채널의 홍진경 씨가 개척한 공부 준비라는 장르를 오래전부터 제가 하고 있었답니다. 그동안 풀었던 시험지 정리하고 다른 공부 할 거라고 마음먹고 책 새로 꽂아두고. 반팔 티를 입고 가도 힐난을 받을 일 없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일상복으로 티셔츠를 즐겨 입는다고. 뭐라구요. 그건 무라카미 하루키니까 가능하다고요? 쳇. 뼈 때리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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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적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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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정신과 의사 오은영이 공부에 대해 말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대화의 희열 3》에서 MC들에게 고등학교 때 점수를 물었다. 아무도 점수를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공부를 열심히 했던 기억은 있느냐고. 다들 그 기억은 있다고 했다. 점수를 기억하진 못해도 그때 열심히 했던 기억으로 우리는 살아가는 거라고 오은영은 말했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하지만 얼마 전에 떨어진 시험 점수는 기억합니다. 1점 차로 떨어졌거든요. 아깝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 받고 열심히 책을 읽었던 기억으로 나는 살아간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 나는 종일 집에 누워서 책을 읽고 일기인지 시인지 분간이 안 되는 글을 쓰며 지냈다. 의지와 상관없이 백수가 된 지금. 자격증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다.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잘 되진 않는다. 그럼에도 미래에 내가 좌절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근육을 기르고 있는 것이리라. 공부 근육으로 열패감과 우울을 무찌르겠어요. 가수 성시경이 그랬다. 공부하는 사람은 건강한 것이라고.


정지아의 소설집 『자본주의의 적』을 읽기 전 나는 예전에 나온 『행복』을 읽었던 때가 떠올라서 마음이 두근두근했다. 책 한 권을 사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서. 너무나 소중해서. 투명 비닐로 책을 감싸 주었다. 때 묻지 말라고. 그때는 잘 몰랐다. 정지아의 소설이 좋은지. 그냥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남았을 뿐이다. 『자본주의의 적』을 읽으며 면접 탈락의 씁쓸함과 내일에 대한 두려움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웃으면 안 되는데 웃기는 부분이 있어서. 나만 웃긴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소설집에는 소설가 정지아가 아닌 일상인 정지아의 삶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단서들이 등장한다. 제목부터 정지아를 떠올리게 만들게 하는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에서는 페북으로 졸지에 시골에서 인기 스타가 된 정지아의 어쩔 수 없이 신나는 일상을 보여준다. 어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간 정지아는 말만 시골 생활이지 주변인들에게 도움을 받아 텃밭을 일구고 반찬거리를 해결한다. 그 모습이 푸근하고 보기 좋다. 입이 무거운 아주머니와 친해진 시골 생활이 부럽다.


잘 팔리지 않는 소설을 쓰는 작가가 주인공으로 때론 주변인으로 등장한다. 그러면 안 되지만 『자본주의의 적』을 읽으며 현실 속 정지아의 삶이 어느 정도 예상된다. 좋아질 날이 올까. 구질구질한 내 인생. 소설은 요즘 세태를 완벽하게 그려낸다. 가장 나다운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감독 봉준호가 말했듯이 나의 하루, 나의 신념을 보여주는 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카페에서 커피 잘 마시다가 기억을 잃어버리고 자폐 가족이라 불리는 가족의 과거와 현재를 애정으로 이야기한다.


이렇게나 이야기를 잘 쓰는 작가였다니. 책은 계속 읽고 볼 일이다. 내 맘대로 2021년 올해의 소설집을 꼽으라면 『자본주의의 적』이 1위이다. 아흔이 넘은 어머니의 슬픔을 감히 엿볼 수 있고 유통기한 지난 냉동 갈비를 들고 집에 가는 처연함을 통해 고통의 크기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오늘 있었던 일이다. 버스가 병원 앞 정류장에 멈춰 섰다. 뒤에서 다급한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버스 기사는 앰뷸런스가 지나가기 쉽게 차선을 바꿨다. 왜 그 순간 울컥했을까. 우리는 살아간다. 이름도 모르는 이의 선의로. 『자본주의의 적』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선의로 가득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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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2022-09-10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 덕에 이책이 더욱 읽고 싶어졌어요 님도 언젠가 작가가 되실듯^^ 님의 글쓰기를 응원합니다!

돼쥐보스 2022-09-12 11:36   좋아요 0 | URL
응원 감사합니다! 행복한 독서 시간 되시길!!^^*
 
혼자여서 좋은 직업 - 두 언어로 살아가는 번역가의 삶 마음산책 직업 시리즈
권남희 지음 / 마음산책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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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누구의 지시나 간섭도 받지 않고 혼자 일하면서 돈까지 벌고 싶다. 자주자주 생각하는 요즘이다. 며칠 전에 면접 하나 보고 왔는데 멘탈 털려서 내내 누워 있었다. 지나간 것에 후회나 자책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 순간 나는 근무 시간, 급여 같은 기본적인 조건에 대해 묻지 못한 것이 죽도록 후회스럽다. 백수 되고 나름 여러 가지 일에 도전하고 있지만 진정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문학과 관련된 것이라는 걸 깨닫고 있는 중이다.


가뭄에 콩 나듯 그런 자리가 하나 나서 당장 이력서를 보냈다. 구체적인 걸 말하고 싶지만 구체적인 걸 말하는 게 약간의 위험이 따른다는 걸 알기에 생략하고. 그날 나는 영혼이 털리고 멘탈이 깨져서 돌아왔다. 하라는 대로 하면 기본 사항에 대해 알려 줄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냥 잘 가시라는 말. 연락드린다는 말. 검색창에 '면접, 다음에, 연락'이라고 쳐 보니 대부분 다음에 연락 같은 건 없다는 지식인들의 답변을 볼 수 있었다.


눈치는 있으니까. 망했구나. 연락 같은 건 오지 않겠구나 직감했지만 꼭 하고 싶은 일이기에 혹시나 하고 있지만 그날 나는 정말 바보 멍청이 같았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렸다. 희망 도서가 왔으니 찾아가라는 문자. 일본 문학 번역가 권남희의 『혼자여서 좋은 직업』을 신청했더랬지. 밀리지 않고 세금 내니 이 정도 요구는 할 수는 있는 거겠지. 하면서 매달 도서관에 희망 도서를 신청한다. 그전에 권남희의 산문집을 읽고 아 좋다, 쉽게 써서, 잘 읽힌다, 다음에 나오면 또 읽어야지 했다.


책에는 일본 문학을 번역하는 번역가의 자아와 딸을 키우는 엄마로서의 자아, 집을 사랑하는 집순이의 자아가 충돌하지 않고 모여 있다. 학연, 지연 같은 거 없이 번역해서 알리고 싶은 책이 있으면 발췌 번역을 하고 책 소개서를 써서 출판사에 돌렸다고 한다. 일본에 살 때는 서점에 서서 책의 뒷장을 보고 출판사의 전화번호를 적어 전화 기피증이 있는데도 전화를 걸어 판권이 팔렸냐고 물었다. 좀처럼 오르지 않는 번역료와 부드럽게 싸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노력과 운이 더해지면 원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걸 『혼자여서 좋은 직업』을 읽으면 느낄 수 있다.


도움이 됐던 글은 「자기소개」였다. 매일 밤공부 마치고 한글 창에 자기소개서 양식을 띄워 놓고 있는 게 일과다. 그래서 썼냐고? 단 한 편의 자기소개서도 쓰지 못했다. 어제는 이력서의 반까지만 썼다가 창을 꺼버렸다. 지원하려는 직무와 관련된 경험을 쓰라는 양식에서 막혀 버렸다. 없어요. 없어서 새롭게 도전해보려고요. 이따위로 썼다가는 서류에서 걸러지기에. 그전에 저는 내내 한 가지 일만 했어요. 라고 쓰면 성의가 없어 보이는 게 아니라 아예 성의 자체가 없기에.


잘나가는 일본 문학 번역가도 자기소개를 쓰는 게 힘들구나. 틈틈이 다른 이들이 쓴 자기소개를 보면서 고친다. 딸에게 한 번 보이고 고치고. 글을 읽고 대충 어떻게 써야겠다고 감을 잡은 건 아니지만 나 말고도 자기소개 쓰는 게 힘든 사람이 있구나,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 신춘문예 수필 심사 경험썰도 풀어준다. 혼자여서 좋은 직업인 번역가이지만 간간이 대외 활동을 하면서 쌓은 사람들과 쌓은 딱 책으로 쓰면 가슴 따뜻해질 사연이 곳곳에 있다. 문학은 사람 사는 이야기이니까.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건 일단 나를 돌보기 위함이라는 걸 그래야 다른 누군가들에게도 미움을 갖지 않을 수 있다는 걸 『혼자여서 좋은 직업』은 보여 준다. 혼자 일한다고 해서 사회성이 떨어진다거나 꽉 막힌 사람이 되진 않는다. 시답잖은 농담하고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내리고 고압적인 자세로 상대를 보는 태도를 가진 자들과 멀어질 수 있기에 정신 건강은 물론 육체 건강까지 챙길 수 있다. 그래서 정말 혼자 일하고 싶지만 그럴 능력이 되지 않으니 지금 가장 쓰기 힘든 자기소개서를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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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고 더운 우리 집
공선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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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때부터 10년 넘게 산 그 집은 춥고 더웠다. 하필이면 봄에 그것도 낮에 집을 보러 갔다. 따뜻하고 밝았다. 방 한 칸에 부엌 하나가 전부였는데 햇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전봇대에 붙은 '방 있음'이라는 낡은 종이를 보고 간 것치고는 괜찮았다. 집 구하러 다니기도 힘들어서 보증금 50만 원에 다달이 월세와 공과금을 함께 내는 걸로 합의를 했다. 오래 살아서 나중에는 월세를 깎아 주기도 했다.


여름이 문제였다. 서향 집인 걸 그제야 알았다. 해가 지는 늦은 오후 동안 열기가 식지 않아 방이 절절 끓었다. 부엌 문을 열어 놓으면 모기가 들어와서 문을 열지도 못했다. 밤새 뒤척였다. 잠깐 평온의 가을을 보내고 겨울. 해는 뜨는 줄도 모르게 떴고 정신 차려 보면 해가 졌다. 극지방의 극야가 계속되고 있는 느낌이랄까. 너무 추워 주인집 몰래 난로를 켜기도 했다. 왜 몰래 켰냐면 전기세를 주인집과 함께 냈기 때문이다. 문밖으로 비치는 빨간 불을 보고 뭐라고 할까 봐 가장 낮은 온도로 켜두었다. 그래도 추웠다. 힝.


공선옥의 산문집 『춥고 더운 집』의 제목을 보고 과거 우리 집 이야긴가, 해서 읽었다. 다시 문을 연(코로나 상황에 따라 문을 열고 닫는 도서관, 다행히 이번에는 빨리 열었다.) 도서관의 신간 코너에 꽂힌 공선옥의 산문집을 어찌 지나칠 수 있을까. 내 최애 작가 중 한 명인데. 공선옥은 전라도 말을 소설 속에서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작가이다. 문자로 표현하기 힘들고 애매한 전라도 사투리를 어쩜 그리 맛깔나게 표현하는지.


『춥고 더운 집』은 공선옥이 태어나서 자란 집의 기억으로 시작한다. 사방이 시커멓고 구렁이가 달걀을 훔쳐 먹는 집. 북향이고 산에서 때때로 고라니가 출몰하기도 한다. 구렁이 때문에 화난 아버지가 초가집을 버리고 블록 집이라고 하는 '부로꾸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은 초가집 보다 더 험한 곳이었다. 외양은 그럴싸했지만 부엌이 없는 집이었다. 대문이 따로 없고 겨울에는 바람이 그대로 들어왔다. 객지를 떠돌던 아버지가 돌아와 집을 지어 다시 이사를 나갔다.


곡성에서 광주로 경기도로 다시 광주로 그리고 지금은 담양에서 공선옥은 살고 있다. 그 사이에 작가는 험난한 객지 생활을 했다. 사촌 동생의 소개로 기숙사에서 살아보고(몇 달 다니다 도망치듯 나왔다. 울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는 기숙사 방에서 견딜 수 없었다.) 작은 빌라에서도 살아봤다. 어쩌다 땅을 사서 그 땅을 담보 잡혀 집을 지었다. 집을 지으면서도 애로 사항이 많았다. 괜찮은 시공자 찾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는 걸 실감했다.


새로 지은 집에서도 시행착오는 계속되었다. 지붕을 잘못 올려 여름엔 더웠다. 잔디를 잘못 깔기도 하고. 그래도 공선옥은 처음 지은 내 집에서 살아간다. 시골에서 살려면 차가 있어야 한다는 말에 차를 끌고 다녔지만 사고가 나서 폐차를 하고 버스를 타고 읍내에 간다. 차가 없어서 물건을 많이 살 수도 없다. 대신 버스에서 동네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는 재미를 알았다. 장날이 되면 힘들게 기른 야채를 이고 지고 버스에 오른다. 버스 기사는 할머니가 다칠까 짐을 싣고 찻삯을 낼 때까지 출발하지 않고 기다린다.


집이란 무엇인가. 『춥고 더운 집』은 내내 질문한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내 소유의 집을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면 몇 백 채의 집을 가지고 집장사를 해서 잘 먹고 잘 사는 인간들도 있다. 집 때문에 웃고 우는 삶. 그깟 집이 뭐라고 그 설움을 다 견디고 사는 건지. 은행에서 대출을 받지 않는 이상 집을 살 수도 없는 시대. 평생 그 빚을 갚을 생각으로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집을 산다지. 『춥고 더운 집』은 집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집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난한 시절에 태어나 가난 밖에 알지 못하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회상하며 좋은 시절에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녹진한 전라도 말로 이야기한다. 그 시절 엄마가 해주던 밥상을 기억하는데 엄마는 없다. 자식 먹이려고 온갖 농사일을 하던 엄마는 고생만 하다 돌아가셨다. 공선옥은 엄마를 부르고 평생 객지를 떠돌던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춥고 더운 우리 집에는 우리가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먹을 것만 생각한다고 혼났던 수업 시간. 먹지 않고 살 수 있나. 『춥고 더운 집』은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이 머물러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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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7-08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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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지, 켄 리우의 『종이 동물원』. 좋다는 이야기는 어렴풋이 들었던 것 같은데 신경을 안 쓰고 있었던 거지. 딴 데 정신이 팔려서.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나의 근황을 들려줄 기회가 생겼다. 딱히 궁금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방언 터지듯 말이 나왔다. 요즘은. 그래. 그러니까. 계속 누워 있어. 누워서 고민만 하고 있지. 그러다가 책 읽고 그러다가 잠들고. 엄마도 그랬는데. 정작 실행은 하지 않고 누워서 걱정과 고민만 했었지.


상황을 타계하려면 일단 일어나서 행동해야 하는 데 그게 아닌 내내 누워서 말로만 걱정하고 불안해 하던, 엄마. 그걸 내가 하고 있지 뭐야. 하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엄마 생각이 나고 약간 서글퍼지고. 켄 리우의 소설집 『종이 동물원』을 읽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SF 소설 모음집이라서 사 놓고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이상하게 SF 소설에는 약간의 거부 반응이 내겐 있다. 이해력이 안 좋아서 그런 걸지도. 좀 어렵다, SF는.


그런 내가 전자책 기준으로 500페이지가 넘는 『종이 동물원』을 완독했다. 정말 좋아서 아껴 읽었다. 한 편 한 편이 소중하고 짜릿했다.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감동받았다. 특히 표제작 「종이 동물원」은 기가 막혔다. 주인공 '나'는 미국인 아버지와 그 아버지가 카탈로그에서 고른 홍콩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나'가 울 때마다 어머니는 크리스마스 선물 포장지로 동물을 접어 주었다. 그 동물에게 어머니는 숨을 불어 넣어 주었다. 종이로 만든 동물은 생명을 얻어 돌아다녔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미국적인 아이가 되어간다. 어머니가 영어를 잘 못하는 것에도 제대로 된 장난감이 없는 것에도 짜증을 낸다. 어머니는 '나'와 중국어로 대화를 하고 싶어 하지만 '나'는 대화를 거부하기에 이른다. 어느 날 어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소식을 듣는다.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는 청명절이 되면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말한다. 「종이 동물원」은 그렇고 그런 가족의 이야기를 놀라운 반전을 들이밀면서 특별한 이야기로 만들어 낸다. 소설의 마지막을 읽을 때면 내게 생명을 불어 넣어준 단 한 사람을 떠올리며 세상의 모든 슬픔이 밀려온다.


중국, 일본, 간간이 한국의 역사 이야기가 『종이 동물원』에 등장한다. SF 적인 옷을 입고서. 현실을 탈피하는 게 아닌 현실을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 켄 리우는 신화, 환상, 역사를 SF로 끌고 온다. 단 한 편도 거를 수 없다. 꼭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은 책이다. 추리 소설의 형식을 빌려온 「레귤러」는 중간에 끊을 수 없을 정도로 흡입력이 있다. 인종 차별, 역사 왜곡, 인간의 이기주의 같은 민감한 주제를 다루면서 가독성까지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딱딱하거나 어렵지 않았던 이유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능숙함 때문이었다.


망한 지구를 탈출해 우주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우주선을 고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 후대에게 역사를 알리기 위해 모진 고문을 당하는 사람. 『종이 동물원』에는 특별한데 자신들이 특별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잔뜩 나온다. 소설 속 그들이 했던 선택을 현실에서라면 주저 없이 할 수 있을까. 없다고 생각하기에 소설이 쓰인다. 이야기가 나온다. 꼭 그렇게 했으면 하는 바람에. 자신보다 남을 위한 선택을 우리가 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채우고 싶어서.


따뜻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리웠는데 『종이 동물원』은 그걸 충족해 준다. 고통스럽고 슬펐던 기억을 잊고자 했지만 마음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살아서 살아 있는 동안은 기억하고 추억하자. 위대하고 훌륭한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지구에서의 역할은 다 한 것이니까. 우주선에 못 타도 좋아. 꼭 알아야 할 역사가 있다면 공부를 해서 기억하도록 하자. 특별한 날이 아니라도 매 순간 떠난 그들을 기억한다면 미처 하지 못한 말을 하려고 찾아올지 모르니까. 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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