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근희의 행진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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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에는 유튜브 요약본으로 올라온 《나의 아저씨》를 봤다. 알 수 없는 유튜브 알고리즘. 추천해 주니까 클릭. 요약본이라고 해도 약 여섯 시간짜리였다. 전체를 다시 볼 에너지는 없어서 춘식이 소파에 누워서 압축된 지안과 동훈의 서사를 따라갔다. 집으로 올라오면서 계획했던 일, 씻고 일기와 몇 문단의 글을 쓰는 일, 은 하지 못했다. 


유튜브만 봐도 금요일 밤과 주말은 순간 삭제되어 어느새 월요일. 매일 아침마다 그렇지만 월요일은 일어나기 진짜 힘들다. 인간과 삶에 대한 고찰을 한다. 그 짧은 시간에. 왜 인간으로 태어났을까부터 돈이란 무엇인가까지. 다시 금요일 밤이 왔으면 좋겠다는 아메바적인 생각으로 귀결되는 고찰을 끝으로 일어난다. 내내 누워서 유튜브, 넷플릭스, 웨이브, 티빙, 디즈니 플러스를 봤으면 좋겠다. 한 일 년 정도 그렇게. 안 될까?


안 돼. 


이서수의 첫 소설집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젊은 근희의 행진』을 받아들고 표지를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표지에는 단발머리를 하고 가방을 멘 여자의 옆모습이 있다. 와 순간 나인 줄. 몇 년 동안 내가 이러고 다닌다. 한결같은 스타일. 단발머리, 책가방. 머리를 길러서 묶어볼까도 했지만 아침에 머리 말리는 시간을 끝내 확보하지 못했다. 보부상 재질이라 핸드백은 꿈도 꾸지 않는다. 갑자기 비가 와서 양말 젖으면 어떡해. 양말, 우산, 비상약, 물티슈, 마스크, 장바구니 등등 넣어야 하니 책가방 못 잃어. 


책 이야기하자 본격적으로. 


『젊은 근희의 행진』, 말해 뭐해. 전 국민 필독서로 지정해서 읽고 독후감 써서 국세청 홈페이지에 신고서 양식으로 제출하는 거 어떨까. 잘 쓴 순으로 세액공제 해주는 거지. 소설집에 실린 열 편의 소설을 아껴서 읽었다. 이미 읽은 소설이 꽤 있었지만 처음 읽는 것처럼. 첫 마음으로. 두 번 읽으면 그렇다. 처음엔 보이지 않고 느끼지 못한 부분을 만나서 마음이 찡해진다. 내가 《나의 아저씨》를 다시 보면서 훌쩍인 것처럼. (지안이 할머니에게 "내 할머니가 되어줘서 고마워." 했던 부분. 정말 고마워.)


시를 쓰는 엄마와 사는 일상을 그린 「미조의 시대」부터 등단작 「구제, 빈티지 혹은 구원」까지. 찡하고 울컥한데 웃긴다. 근로소득으로는 집을 사지 못함을 예감하는 부부의 이야기 「나의 방광 나의 지구」를 읽는 토요일 오전이었다. 집을 찾다가 지친 아내가 남편에게 땅을 사서 거기에 천막을 짓고 살자는 말에 남편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장면에서 토요일 오전이 유머로 가득해졌다. 헛웃음이 났지만 유머가 우리의 슬픔을 구원해주리라 믿음이 생겼다. 


「현서의 그림자」는 또 어떤가. 자신을 외계인이라고 믿는 현서, 숙모의 딸이기도 한 현서와 이야기를 하기로 한 이유는 숙모가 '나'에게 가끔 용돈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외계인이라고 믿는 현서의 처지가 '나'보다 더 낫다는걸 깨닫는다. 이서수 소설의 인물들은 가난하고 힘이 없지만 긍정만은 넘친다. 열정, 열정, 열정 대신 긍정, 긍정, 긍정을 수시로 외친다. 소리 내는게 아니라 속으로 속으로. 집을 구하지 못한다 해도 긍정, 압박 면접 끝에 연락이 오지 않아도 긍정, 손님이 없어도 긍정. 


뭐 어쩔 수 없잖아 그냥 받아들여라는 무책임한 긍정을 강제로 주는 게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주고받으며 진지하게 긍정을 손에 쥐여주며 웃는다. 표제작 「젊은 근희의 행진」은 동생 근희가 회사를 그만두고 유튜브 방송을 하는 걸 지켜보는 언니 문희의 이야기이다. 모두가 유명해지는 시대에 나 역시도 유명해지면 안 되겠느냐고 책 유튜버를 하더니 똑똑해진 근희의 주장에 나는 힘을 실어주고 싶다. 유명해져서 종합소득세 내자, 근희야. 동생을 아메바라고 하지만 문희는 근희를 사랑하고 걱정한다. 


미조, 근희, 문희, 가진, 사영, 경희, 언니, 나 그리고 서수, 많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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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리터 - 사라지게 해드립니다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김중혁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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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보지 않아서.


인간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럴 수만 있다면 죽고 나서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남은 이들에게 알려주었으면 좋겠다. 죽으면 이렇게 된다, 다들. 혹시 모르겠다. 죽은 이들이 자신의 상태를 끊임없이 말해주고 있는데도 듣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귀가 가려운 건 그 이유일까. 


계속 살아보고 싶어서.


치과를 예약하고 한 달 예산을 짠다. 처음으로 카드 이용내역을 다운로드해 보았다. 5월 한 달 우아한 형제들에게 갖다 받친 돈이 어찌나 많은지. 한심. 주말에 요리를 해보겠다는 의욕으로 금요일에 식재료를 사지만 힘이 없어 누운 채 배민을 켠다. 이런 나의 게으름을 지워주세요. 


김중혁의 장편 소설 『딜리터』에는 사물, 사람을 이 세계에서 지워주는 사람들이 나온다. 어렸을 때부터 마이너스의 손이라고 부르는 손만 대면 물건을 고장 내던 기동과 치우는 그것이 딜리터의 능력이라는 걸 깨닫는다. 눈을 감고 물건을 생각하면 자신이 가질 수 있다. 이건 기동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능력. 눈을 감고 물건과 사람을 만지면 사라진다. 이건 놀라운 치우의 능력. 


사라진 물건과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치우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딘가로 이동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짐작을 할 뿐이다. 조이수가 나타나기 전까지. 이수는 다른 세계 즉 레이어를 볼 수 있는 픽토르이다. 치우의 옛 여자친구 하윤은 지금 실종 상태이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경찰은 치우를 의심하고 실종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단체 M&F에서도 그를 주목한다. 


요즘 유행하는 세계관 멀티버스 즉 이곳이 아닌 세계에서 나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딜리터』는 레이어 즉 다른 막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고 있다는 가정을 한다.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들은 딜리터에 의해서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계에서 과거의 기억을 지운 채 살고 있다, 자발적으로. 이런 상상으로 소설은 나아간다. 각각의 레이어 안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 레이어를 볼 수 있는 이수가 그걸 증명해 준다. 


죽는다는 건 다른 세계로 건너가 편히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춘다는 의미라고 『딜리터』는 이야기한다. 그러니 슬프지도 아프지도 말라는 조언을 해주는 셈이다. 하나씩 지우다 보면 결국엔 남지 않겠지만 괜찮다. 지워진 건 레이어 안으로 들어가 있으니. 이삿짐센터를 부르는 대신 시간 날 때마다 하나씩 물건을 옮기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최종은 나 자신. 


게으름 먼저 옮겨주세요. 딜리터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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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 유품정리
가키야 미우 지음, 강성욱 옮김 / 문예춘추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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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집안에 들여놓은 물건 중에 부피가 가장 큰 건 원형 테이블 세트이다. 가로 지름이 무려 1000mm나 된다. 의자 두 개도 같이 왔다. 생각은 이런 거였다. 아침에 빵이나 소시지, 두유를 서서 먹고 가지 않고 앉아서 음악을 들으면서 혹은 뉴스를 보면서 먹어보자. 교양 있는 아침이 되어보자.  테이블이 오고 조립을 하고 처음 며칠은 그렇게 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서서 먹고 갔다. 아침에 그것도 겨우 일어나는 내게 교양을 챙길 시간이 없다는 걸 구매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원형 테이블은 창가 자리로 쫓겨났다. 춘식이 소파에 누워 있기 전에 잠시 앉아 있는 용도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기. 한동안 집에 물건을 들이는 것에 신중했었다. 당장 필요하지도 않는데 사고 싶다는 기분에 충실한 나머지 집이 물건들로 가득 차 있는 걸 보고서 각성했기 때문이다. 정말 필요한 것만 사자. 그러면서 집안을 정리해 나갔다. 책을 팔고 입지 않은 옷을 정리했다. 비싼 신발도 신지 않으면 삭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키야미우의 소설 『시어머니 유품정리』는 며느리 모토코가 죽은 시어머니 집을 정리하는 이야기이다. 책을 읽어가다 보니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옷만으로 가득 찬 방, 냉장고 두 대에 들어 있던 음식들, 각종 플라스틱 반찬통과 비닐봉지들. 소설에 나오는 대사처럼 차라리 업체를 불러서 정리를 했었어야 했던 시간들. 정말 물건을 함부로 사지 말아야겠다. 아무리 싸다고 해도 옷을 사 모으지 말아야겠다. 비싼 옷이어도 먼지만 쌓인 옷은 입을 기분이 나지 않는다. 깨달음과 반성의 나날들. 


마트에 갔다가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신 모토코의 시어머니 집은 물건들의 천국이었다. 혼자 산다고 해서 물건이 없는 게 아니었다. 싱크대에는 그릇, 서랍장에는 옷, 심지어 인형 장식장에도 추억의 물건이 가득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사층의 집. 모토코는 혼자서 물건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한다. 주위의 조언대로 업체에 맡길까 했지만 알뜰한 모토코는 자신이 해보겠다고 의지를 다진다. 


정리는 쉽지 않았다. 대형 폐기물 버리는 날은 지정되어 있고 종량제 봉투에 물건을 담고 계단을 왔다 갔다 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냉장고에 든 음식은 상하기 시작했고 베란다에는 화분과 커다란 돌도 있었다. 젊지 않은 나이의 모토코. 일을 하고 있어 온전히 정리에 시간을 보내기도 힘들다. 긍정적인 성격의 모토코는 대체 왜 이런 걸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을까 죽은 시어머니에게 푸념을 해가면서 씩씩하게 정리를 한다. 그러다가 시어머니의 진짜 모습도 알게 된다. 


모토코의 친정어머니는 시어머니와는 다르게 깔끔한 성격이었다. 병이 들었다는 걸 알고부터는 남은 이들이 자신의 물건 때문에 힘이 들까 봐 정리를 했다. 자신이 가진 물건 목록을 주면서 필요한 걸 고르라고도 했다. 시어머니를 단순히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도시에 살면서도 시어머니는 마음을 터놓고 이웃과 왕래를 했다. 모토코의 친정어머니는 남편에게 피해를 줄까 봐 인간관계를 철저하게 거부했다. 


두 어머니들의 상반된 모습을 떠올리면서 모토코는 무얼 남기며 살아야 할지 고민한다. 『시어머니 유품정리』를 다 읽고 나면 세상에 이런 며느리가 어디 있을까 놀랍기만 하다. 왕복 세 시간, 대중교통을 이용해 시어머니 집에 가서 물건을 정리하는 며느리라니. 어머 이건 꼭 사야 해라는 대사를 날리며 오는 지름신을 무찌를 수 있는 소설이다. 지름신에게 빙의 되어 구매하기 버튼을 누르는 나의 따귀를 철썩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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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회사 3부작
임성순 지음 / 실천문학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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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들어서 한 각오가 있다면 각오라고 했지만 대단한 건 아니고 그저 한 달에 한 번은 꼭 쉬자는 것이다. 작년에 쓰지 못한 연차가 쌓여 있고 2년 차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또 연차가 생기더라는. 이제 나도 4대보험 들고 1년이 지나도 계속 일을 다닐 수 있으니까. 한 달에 한 번은 쉬자. 연차 수당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쓰지 못하면 아깝다. 


이런 착각을 했다. 내가 안 나가면 일은 어떻게 되지? 내가 없으면 일이 안 되는 거 아니야? 거대한 착각. 내가 없어도 세상은 회사는 잘 굴러간다. 그리하여 나는 5월이 가기 전에 연차 하나를 쓰기에 이른다. 이 뭐 대단한 일이라고. 소심과 예민 빼면 시체인 나의 성격으로는 대단한 결심이다. 저 이때 쉬겠어요를 말하지 못하고 돌아온 날. 등신 중에 상등신이라고 나를 자책했다. 


나란 인간은 대체 어떤 인간인가? 나의 감정보다 상대방을 생각하느라 할 말도 못 하는 인간. 임성순의 회사 3부작의 마지막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신이란 존재하는가를 묻는다. 연차를 쓰겠다는 말을 못 하는 인간의 고뇌는 소설의 주제에 비하면 얼마나 사소하고 잡스러운가. 인간의 고통에 신은 응답을 하는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신부와 인간의 존재를 의심하는 의사의 이야기는 나의 하찮은 고민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래도 속상하다.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임성순의 전작들에 비하면 꽤나 묵직한 주제와 서사를 보여준다. 『문근영은 위험해』를 읽고 바로 읽어서인지 문체에 적응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전작은 꽤나 발랄하고 상큼까진 아니고 앙큼함. 사제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아프리카로 봉사활동을 간 박현석 신부. 수술 중에 실수로 사람이 죽고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고 해외로 의료 봉사를 떠난 최범준. 


그들이 아프리카에서 만난 15년 전과 이후의 시간을 번갈아 가면서 소설은 들려준다. 순전히 타인을 이롭게 한다는 마음으로 봉사활동을 하러 온 것이 아니기에 그들은 그곳에서 수많은 갈등과 번민을 한다. 학살의 현장에서 다정했던 이웃이 한순간에 폭도로 돌변해 살인을 저지르는 그곳에서 현석과 범준은 신과 인간 존재의 근원을 묻는다. 


어리석은 인간에게 신은 어떤 존재인가. 고통을 받고 있는 인간에게 신은 어떤 답을 줄 수 있는가. 『오히려 다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어리석고 고통받는 인간에게 신은 그저 침묵으로써 대답하고 존재한다고 말한다. 영화 《사바하》에서 박목사는 허공에 대고 묻는다. '어디 계시나이까.' 인간의 부르짖음에 신은 그 어떤 응답의 말도 해주지 않는다. 


다정한 이웃이 괴물로 변하는 현장에서 벗어난 그들은 다른 모습으로 재회한다. 범준은 아이의 죽음을 겪고 자살자들의 장기를 적출하는 회사를 차린다. 죽기를 원하는 자들의 죽음을 도와주고 버려질 장기를 꺼내 새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일. 그 일을 회사는 수확이라고 표현한다. 신의 존재를 부정한 채 사제 일을 하는 현석은 누군가의 오해를 뒤집어쓴 채 낯선 장소로 간다. 


나를 부수어 가는 일. 사는 게 벅차고 괴롭다 보니 신을 찾을 여유도 없다는 건 슬픈 건가 다행인 건가. 나의 나약함과 한심스러움을 지켜보는 일로 수양을 대신한다. 생각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오히려 다정했다. 그런 다정한 사람들도 때때로 야수의 얼굴이 된다. 그것이 신이 침묵하는 인간 사회의 참모습이다. 내가 어떤 괴물인지 알아야 신과 마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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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영은 위험해 회사 3부작
임성순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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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순의 장편소설 『문근영은 위험해』를 읽으며 든 생각이란 소설가가 신나서 썼구나였다. 쓰고 싶은 나머지 쓰는 걸 멈추지 못한 채 책상에 앉아 계속 계속 썼구나 그러니까 이야기가 끊기지 않는 거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쓰다가 막혔겠지. 막혀서 물 한 잔 마시고 걷기도 하고 누워 있기도 했겠지. 그러다가도 소설을 써야겠다는 열망에 차올라 다시 자판을 두들기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이다. 그만큼 소설은 거침이 없다. 이걸 전문 용어로 노빠꾸라 한다지. 


소설은 제목처럼 위험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세 친구. 세 친구는 상징일까. 왜 친구는 세 명일까. 두 명도 있고 네 명도 있을 텐데.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거슬러 올라가시는 건 알아서들 하시길) 세 명의 친구를 데리고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이 전통적으로 먹히는가 보다. 시트콤 《세 친구》가 떠오른다. 유명한 장면 있지 않는가. 운전 연수를 하던 문숙이 우회전을 못 해 부산까지 직진해 가던. 뻘하게 웃긴데 배를 잡고 웃었다. 또 전문용어로 포복절도.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맞다. 세 친구. 


『문근영은 위험해』에는 문근영만큼 위험한 세 친구가 나온다. 고등학교에서 왕따로 만난 세 친구는 사회에 나와서도 왕따 친구의 면면을 이어간다. 머리 좋은 승희, 음모론자 성순, 왕따 유경험자 혜영. 고등학교 2학년 새학기 첫 시간에 담임이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들은 묶여서 왕따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름 유머를 구사한답시고 담임은 세 친구의 이름이 여학생 같다는 소리를 했다. 누군가 던져줄 먹잇감만 기다리고 있던 고2들은 만세를 불렀다.


샤방한 여학생의 이름을 가진 세 친구는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성순은 자퇴를 했고 승희는 퇴학을 당했다. 혜영만 남아 간신히 학교를 졸업했다. 성순은 유산을 물려받아 벼락부자가 되었고 승희는 천재적인 컴퓨터 실력으로 집에서 은둔하며 성인물 본좌로 이름을 떨쳤고 혜영은 재수 끝에 대학을 가서 사랑에 실패하고 현실 도피로 문근영을 숭배했다. 


어느 날 세 친구의 꿈속에 문근영이 등장했다. 같은 꿈을 꾼 그들은 음모론자 성순의 이야기에 압도 당해 일을 꾸미기 시작한다. 문근영을 납치해 사람들을 구하고 나아가 지구를 지키겠다는 계획이다. 『문근영은 위험해』에는 세 명의 친구 외에도 소설가 성순이 등장한다. 『문근영은 위험해』를 쓴 현실의 레알 소설가 임성순, 『문근영은 위험해』 안에서 소설을 쓰며 회사의 협박을 받는 임성순, 문근영을 납치한 음모론자 임성순. 세 명의 임성순들이 혼란의 환장을 더한 난장을 보여준다. 


『문근영은 위험해』는 임성순의 회사 3부작 시리즈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회사란 무엇인가. 그러니까 정말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어떻게 하면 무리 없이 그만둘 수 있을지 매 순간 고민하게 만드는 아침마다 눈을 뜨면 인간 존재와 더불어 세계의 근원이란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온갖 철학적인 고민을 하게 만드는 개똥 같은 곳이다. 성순, 승희, 혜영이 문근영을 납치하면서 알게 되는 회사의 실체는 더 가관이다. 여기서부터 스포. 지구는 외계인들이 만들어낸 게임의 배경일 뿐이었다.


인간들은 NPC였고 다양한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문근영들이 지구에 들어와 멸종한 생명체 샘플을 채취하고 있었다. 지구인들의 삶은 외계인들이 만들어낸 게임 속이었다. 아등바등 지구인들이 살아가는 건 외계인 게임 유저들의 현란한 플레이였던 것이었던 것이다. 이 허무할 수가. 내가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혹은 전화를 하면서 쩔쩔매던 건 실력 없는 게이머의 플레이라는 것인데. 그냥 버그로 종료되면 좋겠지 싶다.


노란색의 각주와 함께 『문근영은 위험해』는 신나게 질주한다. 이야기 속으로. 소설 안에서 소설 쓰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걸 또 또 전문용어로 메타픽션이라고 한다. 『문근영은 위험해』는 그러니까 메타 픽션을 표방하다. 참 가지가지한다. 임성순이 임성순과 임성순을 만들어내서 소설을 쓰게 한다. 세상은 이미 거대한 음모로 가득 차 있어 음모와 함께 삶이 굴러간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개 많은 음모로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는 멀더와 스컬리의 활약이 이 세계의 유일한 생산성 있는 활동이 아닐까 진지한 고민에 빠진다. 


광주 시민에게 발포 명령을 내리게 한 것도 미국과 소련의 합동 음모 작전이 뒷배경에 있었다는 성순의 그럴듯한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나는 메타 픽션의 세계 『문근영은 위험해』에 빠져 빠져 빠져 버렸다. 그나저나 책이 절판되었던 데 왜지? 이것도 회사가 성순을 이용만 하고 버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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