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망뤂세이 - 데굴데굴 얼레벌레 어떻게든 굴러가는 잔망루피 이야기
정지음 지음 / 유영 / 2023년 8월
평점 :
절판



잔망뤂.


어쩌자고 널 알게 돼버렸을까. 나 역시 분홍색을 좋아해. 사실 노란색도 좋아해. 노란색과 분홍색이 있으면 둘 다 사고 싶어 심장이 벌렁거려. 책상과 방에는 노란색 반 분홍색 반. 반반 무 많이 같은 인테리어 즉 센스와 일관성 없는 혼종의 색채를 띠고 있지. 그래도 좋아. 좋아하는 것들로 꾸밀 수 있어서. 그러려면 너의 말처럼 열심히 일해야겠지. 


너 요즘 인기 많더라. 얼마 전에 마트에 갔는데 에너지 음료가 너였어. 네 얼굴만 병에 스티커로 있었으면 안 사려고 했는데 네 몸 자체를 병으로 형상화했더라고. 이 집 마케팅 잘하네. 그러면서 너를 사버렸지 뭐야. 사무실 냉장고에 채워 넣을 거라서 보고 있으면 너의 귀여움으로 힘이 나지 않을까 일하다가 힘들면 치트키로 사용하려고. 내일 월요일이니까 가자마자 널 꺼낼게. 조금만 기다려. 


내가 좋아하는 정지음 작가가 너를 주제로 에세이를 썼다고 하길래. 고민도 하지 않고 『잔망뤂세이』를 샀어. 나 이 정도는 벌어. 걱정 마. 잔망뤂아. 


곰돌이 푸와 카카오 친구들이 귀여움을 앞세워 먼저 이 시장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나는 잔망뤂 네가 곧 이 세계를 평정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어. 『잔망뤂세이』를 내 돈 내산 했거든. 그 좋아하는 라이언 에세이도 사지 않은 내가 말이야. 『잔망뤂세이』를 발견한 건 오후 네 시가 넘어갈 때였어. 잔망뤂 너는 알지? 그 시간이 어떤지. 시계를 봤는데 아직 네 시? 이거 실화임? 와 환장하겠네 하는 시간이잖아. 


난 좀 융통성이 없고 정석대로 해야 하는 타입이라 요령이 없어. 시키는 건 물론이고 시키지 않을 일까지 하지. 그래서 가끔 소리를 듣기도 해. 집에 갈 시간까지 두 시간이나 남았다니. 몰래 한숨을 쉬고 인터넷 서점 사이트로 들어갔어. 몰라 어쩌다 널 발견했는지. 정신없이 클릭클릭하다가 『잔망뤂세이』가 나온 걸 보고 바로 질렀어. 질러라 질러 소리 질러 예!


토요일인데도 왜 나는 일찍 일어났을까. 휴. 


괜찮아. 내 옆에는 어제 도착한 비닐만 뜯은 『잔망뤂세이』가 있잖아. 초판이라고 뤂BTI 포토카드도 넣어줬네. 역시 일찍 지른 새가 사은품도 먼저 받는다고. 고마워. 너의 둥둥 한 핑크빛 몸은 정말 사랑스럽구나. 그런 네가 알려주는 인생의 지혜까지는 아니고 인생의 잔망스러운 조언은 웃기고 공감 되고 귀엽다. 뽀로로가 유명해졌을 때 크게 축하해 주지는 못한 걸 후회하는 잔망뤂. 회사에서 무엇이라고 불리든 넵이라고 예의 있게 대답하는 잔망뤂. 다 덤비라고 허세 있게 말했지만 겁이 나서 한 명씩만 덤비라고 정정하는 잔망뤂. 


맞아.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늦었어.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좋으니 부자가 되기만 해도 좋지. 당당하게 놀자고 말해줘서 감동이야. 귀여운 내가 참는다는 말은 거지 같은 일을 당할 때마다 생각할겡. 『잔망뤂세이』를 마구마구 추천할게. 친구가 많지 않아서 많지 않다기보다 아예 없어서 『잔망뤂세이』 영업에 차질이 있겠지만 누군갈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잔망뤂세이』 재미있다고 꼭 사서 보시라고 잔망뤂무새처럼 떠벌리고 다닐게.


잔망뤂. 


자꾸 불러서 미안. 


주말에 나는 방바닥과 물아일체로 지냈어. 그래도 괜찮은 건 『잔망뤂세이』에서 네가 말해준 이야기들 덕분이야. 항상 건강하고 너의 귀여움으로 세상을 구해줘. 나는 네가 구해준 귀여운 세상에서 춤을 추며 날로 귀여워지고 있을게. 단 절망이랑은 싸우지 않을게. 그냥 요리조리 잘 피하면서. 잔망뤂 행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냥, 사람
홍은전 지음 / 봄날의책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을 아는 가장 안전한 방식은 독서라고 했다. 그렇다면 가장 위험한 방식은 현장으로 들어가는 일. 박종필은 그것을 고집하는 사람이었다. 전자의 앎이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욕망이라면 박종필의 앎은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일 것이다. 전자의 앎이 폭넓음을 지향한다면 박종필의 앎은 정확함을 지향할 것이다. 

(홍은전, 『그냥, 사람』中에서)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앎'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다시 앎은 '앎음'이라고. 홍은전의 산문집 『그냥, 사람』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알고 앓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다. 거꾸로 말하면 알지 못하고 아프지 않으면 아름답지 않은 일이 된다. 아름다운 일이 되려면 알아야 할 것도 그로 인해 아플 일도 많아야 하는데 모르는 채로 건강하게 살고 싶기만 하다. 이기적인 생각이다.


내가 책을 왜 읽을까에 대한 답을 『그냥, 사람』을 통해 구할 수 있었다. 안전한 방식으로 세상을 알고 싶어서. 독서는 그게 된다. 현장의 일로 사람의 일로 뛰어들지 않아도 책을 펼치면 세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비겁하다고 하지 않는다. 이해하고 싶고 폭넓음을 지향하고 싶은 거라고 말해준다. 노들야학에서 오랜 시간 교사로 일한 홍은전은 자신이 겪은 세계를 섬세하고 정확한 언어로 세상에 내보인다. 


『그냥, 사람』을 읽으면서 여러 번 마음이 먹먹해졌다. 내가 아는 것이란 얼마나 빈약하고 허약한 것이었던가. 반성과 슬픔이 몰려왔다. 대체 내가 무얼 알고 있었단 말인가. 아는 것은 모르는 것이 되어버렸다. 우물 안 개구리. 홍은전은 노들야학 교사를 그만두고 도서관에서 특강을 듣는다. 그동안 자신이 알던 세계의 지식과는 다른 현실의 이야기와 마주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우물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개구리라는 걸 받아들인다. 따듯하고 건강한 시선이었다. 


다름에 분노하지 않는다. 홍은전은. 『그냥, 사람』에 쓰인 글들은 그래서 아프고 활기찼다. 언뜻 앞뒤가 안 맞는 말이지만 읽어보면 안다. 아프지만 왜 활기찰 수밖에 없는지. 모르고 있었던 현실에 그렇지만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분명 한국 사회는 이상하다. 잘못되었다. 바로잡아야 함에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외면한다. 


시설에서 나와 자립하며 한 달에 이십만 원을 모아 이천만 원을 만들어 노들야학에 기부한 사람. 활동보조인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장애 등급을 받지 못해 홀로 죽어간 사람. 노숙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 시설에 들어갔지만 이내 술 냄새가 난다고 쫓겨난 사람. 그런 그이가 걱정 되어 기다린 사람. 추모 공원을 짓기 위해 이웃집 사람들에게 떡을 돌리는 사람. 살아 있는 어머니에게 임대 아파트를 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떠난 사람. 


그들은 그냥, 사람이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나누는 건 뭉특한 셈법이다. 정교하지도 분석적이지도 않다. 빈자와 부자. 임차인과 임대인. 정상과 비정상. 생존자와 희생자. 철거민과 용역 깡패. 서로를 반대편에 세워 놓고 싸워야 하는 이곳에서 『그냥, 사람』은 깨닫게 해준다. 우리 모두는 그냥, 사람이라는 것을. 일을 하다가 힘이 들면 이런 생각을 했다. 너나 나나 그냥, 사람, 똑같은 인간 아니냐. 


나로서 살아가게 하는 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러브 몬스터
이두온 지음 / 창비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번엔 사랑이다. 그리고 괴물. 이두온의 장편소설 『러브 몬스터』는 그야말로 사랑에 미친 괴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은은하게 돌아 있는 광인이 아닌 제대로 돌아버린 광인들이 한 무더기로 등장한다. 영화 《드림》에서소민은 홍대의 "정상이 아니야."라는 말에 이렇게 받아친다. "이 미친 세상에서 미친년으로 살면 그게 정상 아닌가." 그 말에 홍대는 그대로 설득되고 만다. 


지금으로선 근로소득만이 유일한 소득원이라 정상인인 척 연기하면서 일을 한다. 그러다 가끔씩 정체가 드러나고야 만다. 한여름인데도 긴팔 못 잃어 정신으로 출근한다든지, 경조사 안 챙기기, 사회가 정해 놓은 규범 무시하면서 나이 먹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그럴 때 속으로는 돌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대놓고 말하지는 않아서 다행인 건가. 하지만 그대의 생각을 간파하고 말았는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이런 상투적인 비유 쓰기 싫지만 갈수록 줄어드는 에너지가 창의력이라 그냥 갖다 쓴다.) 사랑의 서사는 끝이 없다. 사랑의 사랑에 의한 사랑을 위한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의 사람은 사랑 없이 살수 있나요에 대한 질문의 답은 놉이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무조건 필요하고 원하는 것이다. 


파괴, 혼돈, 불안, 광기의 무드로 소설을 물들이는 이두온이 빚어내는 사랑의 형태와 빛깔은 어떠할까. 아니나 다를까 제목마저도 이두온스럽다. 『러브 몬스터』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라고 부르는 사랑의 형식을 거부한다. 이것마저도 사랑일까. 소설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할 거야. 소설은 쉬지 않고 강조한다. 


엄지민, 염보라, 구인회, 주우경, 오진홍, 고미선. 이들의 환장할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어어 하는 순간에 발을 잘못 디뎌 지뢰를 밟고야 만다. 터진 지뢰에서는 네가 정의하는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폭발한다. 도시의 작은 수영장을 배경으로 엄마의 실종이라는 사건으로 직업도 나이도 다양한 인물이 펼치는 『러브 몬스터』는 전부 미쳐 있음의 세계이다. 


미친 세상에서 미친 건 정상이니까. 


그들 모두는 정상인이다. 사랑을 위해서는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있다의 선언을 몸소 실천한다. 파괴의 끝은 시작이다는 낙관을 주지 않는다. 그저 모든 것이 끝나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에 단 하나의 바람이 있다면. 여기가 아닌 그곳에서 끝을 맞이하는 것. 이두온의 소설은 작가의 말까지 읽어야 완성된다. 긴 소설을 읽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닌데 읽어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한다. 


긴 소설을 쓰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닌데 써주어서 이 세계의 독자는 고마움을 표합니다. 괴물들. 부디 안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돈내혼이라는 말이 있다. 내 돈 내고 내가 혼나는 곳이라는 뜻의. 어디 보자. 헬스장, 미용실, 병원, 운전면허 학원, 수련회장. 총 다섯 군데이다. 헬스장은 가보질 않아서 모르겠고(정말 이해 안 간다. 돈 주고 굳이 헬스장을? 게으름뱅이는 끝까지 가지 않을 듯싶습니다만. 또 몰라. 인생 모르는 거니까.) 미용실, 병원, 수련회장 쌉인정. 마지막 운전면허 학원이 남았는데. 그곳은 운전대 잡자마자 냅다 혼난다고 한다. 


그래서 운전면허가 없다고 하면 웃기려나. 혼나는 게 무서워서 면허를 아직도 안 땄다고 이러면서 비웃으려나. 나 진지해. 정말. 혼나는 거 무섭고 소름 끼치도록 싫어. 두부, 쿠크다스(이 와중에도 예시를 먹는 걸로 드는 나는 찐돼지.) 멘탈이라 누가 조금만 싫은 소리하고 화를 내면 쉽게 회복이 되지 않는다. 무너진 마음이여. 어찌어찌 차가 없어도 일을 다녔고(이건 노력이다. 엄청난. 직주근접. 그거 아무나 못이루지.) 차가 있어야 갈 수 있는 곳은 아예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운전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도록 살아온 철저한 나 칭찬해. 해볼 수 있다면 끝까지 하지 않을 거야. 운전. 장류진의 소설집 『연수』의 표제작 「연수」는 이런 나의 의지를 조금 흔들어 놓았다. 주인공 주연은 잘나가는 회계사. 시험이든 취업이든 실패라는 게 없는 인생이다. 그런 그녀가 딱 하나 하지 못하는 게 있었으니 바로 운전이었다. 신규 프로젝트 때문에 집에서 회사까지 자차로 운전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운전 연수를 위해 맘 카페에 가입해 등업 글을 올리고 준서맘에게 강사 연락처를 받았다. 강사는 단발머리 아주머니. 주연은 그녀와 운전 연수를 시작한다. 그녀는 무사히 연수를 받아 집에서 회사까지 출퇴근을 할 수 있을까. 『연수』에 실린 여섯 편의 소설은 눈치는 없지만 농담을 잘하고 싶고 소심하지만 대범한 척하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한 응원의 말을 산뜻하게 해준다. 


혼자서도 운전을 잘할 수 있도록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고 해주고(그 단순한 말을 사람들은 왜 하지 않는 걸까.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대체 왜.) 누가 뭐라고 하든 내 쪼대로 노래를 부르도록 독려한다. 상대를 오래도록 오해했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지만 일단 승부를 겨뤄본다. 처음 만난 이가 준 새하얀 잠바에 목이 메고 소설 그까이꺼 대충 하는 마음으로 다시 써보라고 말해준다. 


심각한 일임에도 심각하지 않은 일이라고 현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심각하지만 이 또한 지나간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인물들을 그린다. 일의 잘못됨을 전부 바로잡고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해결사가 아니니까. 잘못의 크기를 재어보고 해결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해결해 나간다. 『연수』는 큰 실수든 작은 실수든 뭐 어때 실수할 수 있지 가벼운 마음을 먹을 수 있도록 유도한다. 


『연수』 속 웃음의 문장들. 『연수』의 표지에는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어."라는 문장이 쓰여 있었다. 최근의 몇 년 동안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 말이 소설에 있다면 꼭 읽어야지. 듣지 못했다면 읽어야지. 그리고 나에게 해줘야지. 뒤끝 없고 화통한 아줌마 운전강사를 만날 수 있다면 운전대를 잡아 버려야지. 잡기만 해. 흔들고 돌리고 돌리고. 후진할 때 뒤쪽 보며 한 손으로 가보자고(꼴에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넌 겁이 없다. 어제보다 오늘 네가 더 낫다. 잘하는데. 충분히 혼자 할 수 있어. 마지막 결정타. 한 번도 아닌 두 번의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어. 이런 말들이라면 운전 아닌 운전 할아버지라도 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빙빙 돌리지 않고 진심을 숨기지도 않는 있는 그대로의 칭찬의 말이 간절하다면  『연수』를 읽으면 된다. 너라서 울보지만 끝까지 해내고 싶어 하는 너라서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연수』에 한가득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76세 기리코의 범죄일기
하라다 히카 지음, 김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상한 일이다. 특정 검색어를 넣지도 않았는데 유튜브는 내게 고시원이나 혼자 사는 사람들의 일상 이야기를 담은 영상을 보여준다. 오래전에 방영된 듯한 다큐 영상도 끌어올려준다. 화면 속 그들은 얼굴을 보여주진 않는다. 밥을 차려 먹고 일을 간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얼마의 소비를 하였는지도 알려준다. 대개 음식을 잘한다. 콩나물 하나로도 여러 가지 요리를 뚝딱 해낸다. 


지금으로부터 277개월을 더 납부하면 한 달에 오십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을 받을 수 있다는 국민연금 통지서가 왔다. 그 돈으로 살 수 있나. 물가는 계속 오르니까 그 돈으로는 살 수 없지 싶다. 이런 걱정을 하는 건 의미 없다. 늙으면 어떻게 사나. 부양해 줄 누군가도 없이 살아갈 수 있나.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 모르는 일이라 그때 가서 고민해 본다. 


하라다 히카의 소설 『76세 기리코의 범죄일기』는 나이가 든 채 혼자 살아가는 독거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 결혼은 하지 않았고 평생 모신 부모가 돌아가시자 혼자가 된 기리코가 주인공이다. 비슷한 시기에 친구 도모도 남편이 죽고 혼자가 되었다. 아들들이 있었지만 도모는 기리코에게 같이 살자고 말한다. 기리코는 기다렸다는 듯이 화답한다. 집을 얻고 월세는 반반씩 부담한다. 도모는 마트 일을 기리코는 청소 일을 한다. 


마트에서 남은 반찬을 도모가 가져오고 요리는 기리코가 한다. 한 달에 한 번은 옷을 차려 입고 호텔의 디저트 뷔페나 런치 뷔페에 간다. 좋은 날들이었다. 도모가 죽기 전까지는. 도모가 죽자 기리코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도모와 함께 빌린 집에서 나와야 했다. 기리코는 생각한다. 과연 이대로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다 뉴스를 본다. 생활 능력이 없는 이들이 일부러 교도소에 간다는 것을. 


도모는 심각하게 고민한다. 범죄를 저지르면 교도소에 간다. 그곳에 가면 말 그대로 먹여주고 재워준다.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날 일도 쌀이 없어 밥을 먹지 못할 일도 없을 것이다. 평범하게 살아온 기리코는 범죄를 저지르기로 한다. 시작은 마트에서 딸기 찹쌀떡을 훔치는 일로. 『76세 기리코의 범죄일기』는 고령화 사회에 노인 빈곤 문제를 일상의 언어로 다룬다. 기리코가 고민하는 일들. 주거와 생활의 문제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마트에만 가도 한숨이 나온다. 요리 능력이 제로인지라 식자재는 거의 사지 않지만 과자 코너에는 오래 머무른다. 과일 코너도 기웃거린다. 집에 와서 생각한다. 뭘 샀다고 이 금액인지. 기리코가 마트에서 고민하던 장면. 딸기 찹쌀떡을 살까 말까. 이 돈으로 다른 식재료를 사서 밥을 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딸기 찹쌀떡은 지금 내 처지에 사치 아닌가. 한 번쯤은 고민해 본 모습이다. 


76세 기리코는 범죄를 저질러 그토록 원하는 교도소에 갈 수 있을까. 277개월을 끊기지 않고 국민연금을 낼 수 있을지 가망이 없다. 미래의 집에 교도소는 가혹하다. 소박과 평범을 이루기 어려운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남들 하는 것처럼이라는 말은 너는 열심히 살고 있지 않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이기도 하다. 답답한 현실이지만 소설의 현실은 미약한 희망을 던져주며 끝이 난다. 그래도 먹어요. 딸기 찹쌀떡.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