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까지 희미하게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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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왼손을 들어 윤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짧은 머리카락은 몇 가닥만 남기고 다시 흘러내린다. 네온의 명멸처럼 짧지만 환한 어떤 것이 가슴속에서 반짝 빛났다. 지나온 삶에서, 우연히 다가온 따뜻하고 빛나는 시간들은 언제나 너무 짧았고 그 뒤에 스미는 한기는 한층 견디기 어려웠다. 그랬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의 따뜻함을 하찮게 여기고 싶지 않다. 

(정미경 소설 장마 中에서)


  정미경의 소설집 『새벽까지 희미하게』를 받아들고 오래 망설였다. 빨리 읽고 싶은 마음과 조금 천천히 읽고 싶은 마음들이 부딪혔다. 마음과 마음이 닿아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바람을 몰고 왔다. 어긋난 틈으로 들어오는 이 겨울의 냉기 때문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2017년 1월 18일. 겨울 속으로 소설가가 떠나갔다. 소설가는 떠나고 그가 남긴 작품들이 꼭 일 년 후에 나왔다. 2018년 1월 18일. 초판 발행한 책은 겨울의 바람 속을 뚫고 와 내 손바닥 안에 있었다.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을 살고 있지만 그 패턴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소설가 정미경이 남긴 마지막 소설집을 읽는 동안 새벽에서 아침으로 그 미명의 어둠 속에서 번져가는 그리움 때문에 책장이 쉬이 넘어가지 않았다. 

   『새벽까지 희미하게』에서 그려내는 인물들은 오래 망설인다. 이 생을 치열하게 살고 싶은 그들은 만남과 이별의 선택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만남의 시작은 서툴고 우연적이다. 「못」에서 그들은 대형마트 전자제품에 코너에서 만난다. 성능만을 묻고 정작 물건을 사지 않는 사람들의 질문에도 성실하게 대답하는 그녀. 회사에서 밀려나 충동적으로 물건을 사들이고 환불을 반복하는 그에게 그녀는 욕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길고양이 한 마리가 그들이 사는 반 지하방으로 들어오지만 그들의 연결은 허술하다. 벽에 툭 불거져 나온 보기 싫은 못처럼 그들의 만남은 자국만을 남긴다. 

  「엄마, 나는 바보예요」의 조는 성공한 정신과 의사이다. 자신만의 규칙이 있고 그것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다. 일상의 위태로움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에게 환자들은 의료쇼핑족이고 정해진 시간 동안 비용을 내고 상담을 들어주는 존재로밖에 인식이 되지 않는다. 아내와는 묘하게 대화의 초점이 어긋나고 아들은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다. 형식적인 의사모임에 가서 지적 허영심을 충족하는 그에게 삶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가야 한다. 

  표제작 「새벽까지 희미하게」의 두 인물 송이와 유석은 손바닥 공원의 모과나무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정수기를 설치하러 유석의 사무실에 온 송이를 유석은 즉흥적으로 직원으로 채용한다. 이미 세 명의 직원이 있음에도 유석은 송이의 눈물을 보는 순간 자신과 일을 하자고 이야기한다. 송이는 그들과 겉돌면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사무실의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송이. 정작 사무실에서 그들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어 보질 못한다. 어느 밤에 공원 안에서 나무를 끌어안고 있는 송이를 보면서 그들은 터놓지 않아도 될 이야기들을 새벽까지 나눈다. 

  「목 놓아 우네」의 두 심들은 한 번도 만나지 못한다. 교량 설계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심은 화장실에 앉아 스팸 김밥을 먹는다. 매일 맛이 달라지는 김밥을 먹으며 있지도 않은 역류성 식도염을 생각한다. 야식을 먹으러 가지 않은 이유를 그것으로 대고 나니 진짜로 병에 걸린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잘못 들어온 문자에 답을 보내면서 심은 성이 같은 심과 연결된다. 트럭을 몰고 운반 일을 하는 심은 같이 살고 있는 룸메이트의 직업을 빌려와 그 자신을 대학 병원 간호사라고 심에게 소개한다. 심과 심 사이에는 문자 수신음과 전파만이 존재한다. 얼굴도 모르는 그 여자, 심을 위해 심은 화장실에 앉아 운다. 

  「장마」의 윤과 남자는 일본에서 처음 만난다. 비행기에서 만난 그들은 비싼 택시비를 지불하기 위해 합승한다. 남자는 일본 출장이 잦은 탓에 싸고 저렴한 숙박 시설을 알고 있다. 말이 많은 그 남자는 윤에게 자꾸만 말을 건다. 숙박 계획이 없는 윤이지만 방을 잡고 그가 먹자는 밥을 함께 먹는다. 부또오를 보러 가고 윤이 가야 할 곳에 남자는 따라간다. 윤을 두고 간 어머니의 죽음을 확인하러 가는 그 길에서 그들은 사소하게 지나갈 만남과 헤어짐, 어둠과 빛을 확인한다. 

  이 소설집의 끝은 정지아와 정이현, 김병종의 산문, 백지연의 해설이 실려 있다. 이것을 보고 소설의 끝에 문인이 아니어도 소설가의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면 어떨까를 생각했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과정을 알고 평소 그의 인간 됨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읽으며 독자는 소설가의 책상을 작업실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그려내는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설렘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별로 돌아간 작가가 남긴 작품을 읽고 추모하는 글이 아닌 이 별에서 살아가는 작가의 어제와 오늘을 확인할 수 있는 글. 작가의 말을 같이 읽으며 책장을 덮고 온기를 느낄 수 있도록 눈을 감아 보는 책. 소설가 故 정미경의 마지막 소설집이라고 쓰인 띠지를 벗기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띠지가 없으면 정미경·소설집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오랜 서성거림을 느끼면서 창문을 열었다.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그들은 해가 뜨는 걸 보고 돌아갔나 보다. 어둠 속에서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을 그들. 환한 빛 속에서는 차마 건네지 못하는 말들을 그들은 새벽의 공원에서 나무를 끌어안고 낯선 언어를 해독하는 외국인들처럼 소곤거렸다. 작가의 말이 실려 있지 않은 책이 슬프다는 걸  『새벽까지 희미하게』를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어떤 작가는 작품으로써 충분한 이야기를 전달했다고 생각하여 일부러 작가의 말을 쓰지 않기도 한다. 일부러 쓰지 않는 것과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것의 차이에서 나는 작가가 잃어버린 마지막 문장을 생각한다. 아니 마지막 문장이 아닌 첫 문장을 생각하기로 한다. 소설가 정미경이 쓰고 있을 첫 문장을 상상하며 겨울을 건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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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포토스의 배 - 제140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쓰무라 기쿠코 지음, 김선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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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가세는 스물아홉 살로 로션 공장 라인에서 일한다. 어느 날 휴식 시간에 본 세계 일주 크루즈 여행 포스터에 마음을 뺏긴다. 163만 엔. 세계 일주에 드는 비용이다. 그날부터 나가세는 공장에서 받는 월급을 모두 모으기로 결심한다. 생활은 친구 가게에서 일해서 받는 돈과 컴퓨터 강사 일에서 받는 비용으로 충당하기로 한다. 전에 일하던 곳에서 힘든 일을 당해 겨우 공장에서 다정한 오카다 씨 덕분에 적응 중이다. 세계 일주 포스터를 보기 전에 그녀는 낡은 집을 수리하려고 돈을 모으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살지만 각자의 수입으로 생활을 유지한다. 친구들과 어색한 만남에서 돌아오는 길에 썼던 돈들을 정리하면서 하루치의 일당이 날아간 것에 속상해하기도 한다. 


  집에서 기르는 라임포토스는 물만 잘 갈아주면 별 탈 없이 잘 자란다. 세계 일주를 하기 위해 빠듯하게 돈을 모으면서 식비를 해결하기 위해 라임포토스를 먹어볼까도 생각한다. 친구 중에 리쓰코가 남편과의 불화 때문에 그녀의 낡은데 크기만 한 집으로 딸과 함께 들어온다. 에나라는 딸아이는 도감 보는 것을 좋아한다. 나가세는 친구 리쓰코가 신혼 초에 남편에게 맡겼던 저금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친구의 독립을 지지해주고 쉬는 날 없이 쉬는 날이어도 쉬어도 될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하지 않은 그녀에게 세계 일주에 가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이 생긴다. 그녀는 세계 일주를 떠나 파푸아뉴기니에 도착해 아우트리거 카누를 탈 수 있을까.


  나가세라는 이름에 나의 이름을 넣어도 무방하지 않을 이야기들.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다가도 나가세의 세계 일주를 응원한다. 쓰무라 기쿠코의 『라임포토스의 배』에 등장하는 주인공 나가세는 나의 이야기다. 월급 통장을 비우고 앞으로 일 년, 그 일 년 동안 다른 것들은 포기하고 오로지 돈만을 보고 시간을 버틴다. 다가올 일 년을 위해. 독립한 친구의 집에 찾아갈 때 차비가 걱정되어 자전거를 타고 갈까 생각하고 오로지 자신의 걱정은 생활에 관한 것일 뿐이라는 것에 한심해 한다. 


  비가 오면 비를 바라보고 휴일이 하루쯤은 생겨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편히 누워 천장을 바라볼 수 있는 일들을 꿈꾸는 것이다. 지금 벌지 않으면 어제는 관리비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매일 밥을 먹어야 하고 어두울 때는 불을 밝히고 더울 때는 에어컨을 틀고 겨울에는 가습기 정도 틀 수 있으려면 일해야 한다. 눈치도 보지 않고 책상 위에 엎드려 자는 동료를 보고 그 동료가 곧 결혼한다는 소식과 함께 일을 그만두는 걸 보는 걸 계속 지켜봐야 하는 것도 생활을 위해서다. 지난달에 연말이라 들뜬 마음에 생각 없이 긁은 카드 이용 내역을 훑어보다가 많이 썼다고 주는 포인트를 발견해서 왕 깍두기 2kg을 주문했다, 오예! 돈을 더 보태긴 했지만 왕 깍두기를 사서 신이 난다. 


  쓰무라 기쿠코의 소설을 읽으면 힘이 난다. 주인공들의 삶은 힘들고 희망은 전혀 보이지도 않는데 소설을 읽는 나는 힘이 난다. 세계 일주까지는 아니지만 일 년을 열심히 살 목표가 생기는 것이다. 작년에 얻어온 다이어리에 좋아하는 캐릭터 스티커를 붙이고 고정 지출들을 적었다. 보험료와 핸드폰비, 교통비, 가스비들을 적고 나자 숫자들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어제 그 사람이 했던 말은 잊어버려, 마음에 담아 두지 말고 다음 달 월급 날짜를 생각해. 고마압다.


  『라임포토스의 배』에는 다른 소설도 한 편 더 있다. 쓰무라 기쿠코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 있는 「12월의 창가」는 회사에서 무차별적인 폭언과 스트레스를 겪는 쓰가와가 있다. 그녀는 인쇄 회사의 지사에서 일하고 있다. 본사가 아닌 지사라 회사 안에는 인근 고졸 출신의 여직원들이 대부분이다. 파견 근무까지 다녀온 그녀는 이미 관계가 형성돼 그 안으로 들어갈 자리는 없다. 상사도 그녀보다 나이가 어린 여성들이라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다. 혼자 점심을 먹고 휴식 시간에는 맞은편 도가노 타워 안을 바라보는 것으로 회사 생활을 보낸다. 일을 주지 않고 V 계장의 폭언에도 나서 주지 않는 선배와 동료들. 


  필름 한 장이 없어진 사실로 쓰가와를 몰아세우고 사무실 곳곳을 뒤지게 하는 V 계장. 쓰가와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녹아버리는 경험을 한다. 그녀가 12월의 창가에서 본 장면으로 이야기의 전개는 다른 방향으로 바뀐다. 마음까지는 아니지만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업무의 피로를 날려버릴 수도 없고 동료들의 이야기에 끼지도 못한다. 무언가를 얘기해도 표정 변화가 없는 선배. 자신의 잘못은 감추고 후배에게 떠넘기는 파렴치함까지. 생활을 위해서 매일 빠져나가는 숫자들을 위해 숨을 죽이고 죄송합니다를 주문처럼 말해야 한다. 


  나가세와 쓰가와의 내일을 조심스럽게 지지한다. 그녀들의 내일은 곧 나의 내일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만난 그녀들은 현실에서 만난 어떤 사람들보다 열심히 살면서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라임포토스의 배 위에 올라 세계를 여행하고 꾸깃꾸깃 접은 사직서를 부장에게 건넨다. 최선이 아니라도 묵묵히. 오늘 쓴 돈을 적으면서 오늘의 이야기를 쓰고. 이 생에서 아쿠타가와상은 받을 수 없지만 캐릭터 스티커로 꾸민 노트북으로 책 이야기를 마음껏 쓸 수 있는 오늘이 있어서 알람이 울리기 전에 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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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78호 - 2017.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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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마음을 대체 무엇이라고 말하면 좋을까. 2017년은 미친 사람처럼 감정이 고조되었다가 가라앉기도 해서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상태로 지냈다고 떠올려 본다. 기쁜 일에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날뛰었다.화가 나는 일에도 벌컥벌컥 분노를 드러내서 주변인을 힘들게 만들었다. 사소한 일에도 마음은 숨겨지지 않았다. 마음이 문제였다. 동물이나 식물처럼 마음을 볼 수 없는 존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에 실린 김금희의 소설 『경애(敬愛)의 마음』을 보는 순간 제목만으로 사람을 울릴 수 있구나, 아직 읽지 않은 소설인데도 위로를 받았다. 「조중균의 세계」를 읽을 무렵, 한국 단편 소설을 거의 읽지 않고 보냈던 시절이었다. 가 닿을 수 없는 그 세계를 원망과 미움으로 외면하고 있었다. 문학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문학을 버린 것이라고 자위했다. 매몰차게 이별을 고했지만 한밤중 자니라는 문자를 하는 옛 애인처럼 나는 문학에게 자꾸만 찌질하게 굴었다. 읽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해의 우수 단편들을 모아놓은 책에서 나는 김금희의 소설 「조중균의 세계」를 발견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으로 이 세계의 책무를 다하는 인물이 건네는 공손한 화해의 악수를 그 소설을 통해 받았다. 

  2017년의 봄은 많은 일들이 있었다고 쓴다. 그 일들을 겪으며 나는 당신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는 다짐을 받았다. 우리는 신호를 기다렸다. 지구별에서 쏘아 올린 신호는 미약했지만 곧 답을 받을 수 있었다. 축제의 봄을 맞이했고 우리는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봄에서 시작한 소설 『경애(敬愛)의 마음』을 읽으며 여름과 가을, 겨울을 마주했다. 반도미싱에서 팀장 대리로 이상한 직함을 달고 일하는 상수와 상수가 회사에 요구해서 그 밑에서 일하게 된 경애는 폐기되어야 할 마음들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대화는 묘하게 핀트가 어긋났고 친해질 수 없는 공간인 회사에서 그들의 마음은 한 점으로 모이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려간다. 누군가의 마음을 만나는 일,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채는 일들. 경애는 그 마음의 무늬를 헤아리다가 시간을 놓치고 현재의 시간에서 발목을 잡힌 채 살아가고 있다. 돈 내고 나가라,라는 말에 갇힌 경애의 과거. 김금희의 소설에서 내가 발견한 건 조각으로 부서진 누군가의 마음들이었다. 경애의 마음과 상수의 마음.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자 아픈 가슴 때문에 페이지를 넘길 수 없는 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 들. 소설은 일상을 사는 우리의 흩뿌려진 마음을 이어 붙이려는 김금희 작가의 위로와 격려로 가득하다. 

  창작과비평 2017년 겨울호로 『경애(敬愛)의 마음』은 끝이 났다. 소설의 매력은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이다. 봄에서 시작한 소설은 겨울에 끝이 났다. 12월의 마지막 날 해가 바뀔 때 100개들이 지퍼를 주문하는 인물의 마음을 상상하며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소설 속도 현실 안도 외로운 마음들이 떠다니고 있음을 확인했다. 괄호를 치고 (연재 끝)이라는 글자를 마지막으로 썼을 소설가의 마음을 어두운 방에 누워서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같은 한자와 한글을 하나씩 나누어 쓴다는 것으로 이 세계에서의 인연을 강조하고 싶은 이곳의 나와 그곳의 소설가가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꿈꾼다. 그럴 수 있다면 서로의 고독한 마음을 주고 받고 소설로서 공손하게 내민 그 악수를 돌려주고 싶다. 우리의 마음은 폐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경애의 마음으로 무참한 이 세계를 살아갈 수 있는 기억으로 쓰일 수 있었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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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지키려는 고양이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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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면서도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물건이 있었다. 책이다. 책. 상자에 넣으면 무게 때문에 찢어질 수도 있다는 이삿짐센터 아저씨의 조언에 따라 노끈을 사서 묶었다. 묶고 또 묶었다. 책은 마당을 점령했다. 압도적이었다. 큰 가구는 없었지만 트럭을 두 대나 불러야 했다. 책 때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다시는 책을 사지 않아야지 마음먹었다. 소설가 김연수는 책이란 꽂혀 있을 때는 모르지만 바닥으로 부려두면 그 양에 놀랄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맞다. 방바닥으로 마당으로 나온 책들은 주인도 모르게 자가 증식을 한 것처럼 불어나 있었다. 주인도 모르게라지만 주인이 전부 사다 나른 책들이다. 한심한 주인은 읽을 거라는 마음가짐으로 책들을 사서 모았지만 다음날이면 신간을 기웃거리기나 하면서 전에 사둔 책들을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방의 개수가 늘어나면서 책장도 같이 늘어났다. 어느 날, 사람이 먼저다, 책 때문에 공간 활용이 안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책들을 정리했다. 

  나쓰카와 소스케의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를 읽으면서 내가 정리한 책들의 운명을 생각했다. 그 책들은 어느 미궁에서 길을 헤매고 있을까, 주인을 만나 좋은 자리에 꽂혀 있기나 할까 걱정이 되었다. 책에도 운명과 길이 있다. 작가들을 사랑해 자신의 필명에 나쓰메 소세키, 가와바타 야스나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쓰메 소세키의 단편 「풀베개」 에서 각각의 이름을 따온 작가 나쓰카와 소스케는 책이 가지는 무한한 힘을 믿은 작가임에 틀림없다. 의사이면서 소설도 쓰는 작가는 책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읽히는지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 통해 드러내고 있다. 이름이 얼룩인 고양이는 책을 지키기 위해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는 린타로를 불쑥 찾아온다.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나쓰키 서점'에서 함께 살고 있는 린타로는 책을 좋아하는 고등학생이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할아버지와 살고 있다. 고서점을 운영하는 할아버지는 린타로에게 문학적 스승이다. 잘 팔리는 책이 아니라 선별하고 오래되어도 가치가 있는 책들을 취급하는 서점에서 그들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간들을 보낸다. 린타로의 일상이 흔들리게 되는 건 할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잠을 자면서 죽음을 맞이했다. 한동안 학교를 가지 않고 고서점을 정리하면서 보내는 그에게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말을 걸어온다. 자신을 얼룩이라고 밝힌 그 고양이는 갇혀 있는 책을 구해 달라고 말하면서 린타로를 미궁으로 데려간다. 

  책의 힘을 믿는가. 아니, 당신은 책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린타로와 얼룩이 갇힌 책을 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이 책은 인간의 말을 하는 고양이가 나온다는 판타지적 요소가 들어가 있을 뿐 우리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상황 설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많은 책을 읽는 게 목적인 남자, 읽은 책의 권수로 유명해지고 읽지 않은 책마저 과시용으로 장식장에 넣어두는 남자는 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그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린타로의 말을 들으며 가둔 책들을 해방 시킨다. 

  매일 쏟아져 나오는 신간들과 누구나 다 알만한 고전을 읽기에 사람들은 바쁘다. 그들을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아닌 책의 줄거리를 요약하고 속독하는 방법만을 연구하는 학자. 책을 자르며 한 권의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내는 학자. 책의 처음과 중간, 끝이라는 과정을 알지 못하는 그는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책의 해체를 하는 사람이다. 린타로는 그가 듣는 베토벤의 음악을 빨리 감기한다. 음악을 빨리 감아서 들을 수 있는가. 그렇게 들은 음악을 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학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책이 무엇인지 깨닫자 책 자르기를 멈춘다. 

  책과 책 읽기에 관한 우화 같은 이 책의 인물들은 모두 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책을 좋아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도 사실은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책을 이용한다. 책이 살아남기를 바라며 인기 있는 책들만 골라 출판하는 출판사 사장. 이천년이 지나도 책의 효용만을 따져 본질을 외면당하며 괴로워하는 책 자신도 사람들이 자신을 읽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고양이 얼룩과 린타로가 감행하는 모험의 이유는 책이다. 일그러진 마음들 때문에 갇혀 있거나 잘리거나 버림을 받는 책들의 해방을 도와주는 그들은 책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들의 의무를 알고 있는 자들이다. 

  린타로는 책에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는 말로 마지막 미궁을 빠져나온다. 이천년이 흐르고 다시 이천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책이 남아야 할 사명을 제시한다. 어리석은 주인을 만나 정리당하고 폐기된 책들에게 그동안 고마웠다는 감사 인사를 담아 보낸다. 책을 읽었기 때문에 책들이 가진 마음에 위로받았고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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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아무래도 아이는 괜찮습니다
사카이 준코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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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윗집 아이들은 뛴다. 뛰다가 넘어졌는지 울고 문을 쾅쾅 닫는다. 음악도 텔레비전 소음도 없는 우리 집에서 그 소리들은 선명하게 들린다. 소리를 지르기도 하는데 목이 쉴까 봐 걱정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웃으면서 인사해 주고 싶은데 얼굴 근육이 망가졌는지 웃질 못한다. 가깝거나 먼 사람들의 프로필 사진들에는 어김없이 아이들이 등장한다. 특별한 날을 기념하는지 놀이동산에 가 있거나 꽃밭에서 활짝 웃고 있다. 아이들은 금방 자라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갔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그렇구나, 초등학교에 들어가 소풍을 가고 운동회를 할 나이들이 된 것이구나.

  아는 분이 가끔 일하는 곳에 아이를 데려온다. 처음에는 웃으며 놀아주고 안아준다. 방긋방긋 웃는 모습이 귀여워 질문을 한다. 웅얼웅얼 말하지만 신기하다. 오분 정도 지나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위험한 물건을 만지는 것을 막아야 하고 내 얼굴이 무서운지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감당할 수 없어서이다. 사카이 준코의 산문집 『아무래도 아이는 괜찮습니다』에서 그녀는 자신의 조카를 '와도 좋고 가도 좋은' 존재로 표현한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 남의 아이는 오면 좋지만 가면 더 좋은 것이겠구나, 아이를 귀여워하는 척하는 나는 그런 공감을 한다. 

  독신이고 아이도 낳지 않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생활상을 글로 써내는 사카이 준코의 『아무래도 아이는 괜찮습니다』를 다 읽고 나면 제목을 잘 지었구나 생각한다. 아무래도이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독신 혹은 아이가 없는 사람들) 아이는 괜찮은 것이다 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사카이 준코는 오랜만에 만난 모임에서 연하장을 두 가지로 만든다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이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가족사진을, 없는 이에게는 사진이 빠진 글만 적어서 보낸다는 것이다. 아이가 없는 이를 배려한다는 취지이지만 정작 옆에 앉은 아이가 없는 사카이 준코는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있다. 아이가 없는 이를 불쌍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들은 그녀는 가족사진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여긴다. 

  일본 사회는 심각한 저출산에 시달리고 있다. 정부가 나서서 출산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이 만만치 않음을 절감한 젊은이들은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으로 하고 있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재력과 친정의 조력이 필요한 일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는데 정부만 모르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유교 사회의 뿌리를 가진 일본은 출산과 양육을 둘러싼 의견들이 점점 우경화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소노 아야코 작가는 출산하면 일을 그만두라고 여성은 아이가 태어나면 퇴직해 몇 년 동안은 양육에만 전념해야 한다, 출산휴가 제도를 두고 회사 입장에서는 손해를 너무 많이 본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여성 지식인들의 이런 오른쪽으로 치우친 발언들이 출산과 양육의 길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아베 내각에서 장관으로 임명된 여성들을 소개한 신문 기사에서는 그녀들의 자녀의 수를 명시했다. 일하는 여성으로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본 사회의 모습을 지적한다. 페이스북과 블로그에는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모습들을 공개하는 것이 출산율을 올리는 것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진지한 분석도 한다.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들이 그 모습들을 보면서 나도 낳아서 훌륭하게 키워 볼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성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상실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과거에는 결혼한다 아이를 낳는다 아이를 훌륭하게 키운다가 공식처럼 되어 있지만 현재는 그것들이 선택 사항으로 변해 있다. 결혼을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이를 낳는 것도 키우는 것도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국가가 강제할 수 없는 사항이 된 것이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에 대해 걱정과 안쓰러움을 받아야 하는 피로를 사카이 준코는 이 책에서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직장에서 아이를 가진 여성들을 차별했지만 앞으로는 아이가 없는 여성들을 차별하는 날이 올지' 도 모른다는 문장에서 경악했다. 아이를 키워 본 경험이 없는 여성에게는 경험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미래 사회. 미래가 아닌 오늘의 사회에서 제도권 안으로 들어갈 시도조차 하지 않는 누군가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질문 세례를 받고 안타까움의 시선을 느끼고 있다. 

  자식이 없어 죽으면 장례를 치러줄 사람이 없어 하나밖에 없는 조카에게 그 일을 맡겨야 한다는 걱정에 시달리고 독신 여성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를 알고 싶어 오키나와에 가서 장례 풍습을 공부한다. 사나 죽으나 혼자라는 것을 터득하고 아이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를 실천하는 사카이 준코. 동물을 키워 볼까도 생각하지만 살아 있는 것에 책임을 질 수 없는 자신을 떠올리며 그만둔다. 선인장도 죽였다는 고백과 함께. 아이들은 귀여운 아이와 귀여워해 줄 수 없는 아이가 있다는 것을 가감 없이 말하고 사촌이 갖고 싶다는 조카에게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견디라고 말하는 그녀는 아무래도 아이는 괜찮다고 결혼과 출산을 강요하는 사회에게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다. 

  오늘도 윗집 아이들은 뛰지만 새 나라의 어린이들인 듯 일찍 잠자리에 들었나 보다, 조용하다. 자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귀엽다는데 볼 빵빵 그 모습을 상상해본다.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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