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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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김지혜. 태어난 해, 1988년. 그 해에 일어난 특별한 사건은, 서울 올림픽. 손원평의 소설 <서른의 반격>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간단 프로필이다. 한 반에 두 명 심지어는 다섯 명까지 있을 정도로 흔한 이름을 가진 주인공 지혜 씨는 올해(소설이 출간된 시점으로) 서른이다. 이북에서 훈장을 하던 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지어 놓은 이름은 추봉(秋峰)이다. 가을의 정점, 화려함의 극치 따위라는 뜻인데 어머니는 끝까지 그 이름을 반대하셨다. 뱃속에 있는 아이가 딸인데다가 배말숙이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산 터라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자 한 소망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위로랍시고 성이 고씨가 아닌 걸 다행으로 여기라고 했다. 고씨였으면 고추봉.


  칼 루이스와 벤 존슨의 백 미터 경기가 시작될 때 진통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이틀 동안 진통을 겪었다.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의사의 말에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각서를 쓰라고 최후통첩을 날렸다. 딸아이의 이름으로 추봉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각서를 썼고 어머니는 밤을 새워 옥편을 뒤져'88올림픽을 즈음해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여자아이들 중 가장 흔한 이름인 김지혜'로 '나'의 이름을 지었다. 그 후에 지혜 씨는 이름보다 이름 앞에 붙는 형용사로 더 많이 불리게 되었다. 


  국내 굴지의 그룹 DM에서 문화 사업의 하나로 만든 곳이 다이망 아카데미이다. 지혜 씨는 DM 그룹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채용에선 떨어졌지만 다이망 아카데미에서 일하다 보면 경력을 인정받아 본사로 올라갈 수 있으리라는 꿍꿍이로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문화센터와는 달리 수준 높은 강좌를 들으러 사람들은 아카데미로 온다. 인문학과 철학, 초급 라틴어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그곳에서 지혜 씨는 종일 구식 복사기와 싸운다. 


  복사기와 싸우는 것도 모자라 강사가 두고 간 휴대폰까지도 가져다주는 심부름도 한다. (나중에 지혜 씨는 철천지원수 고등학교 동창의 커피 셔틀도 한다. 종이컵은 안되고 동창이 먹는 텀블러에 담아서 특정 브랜드의 커피를 갖다 바쳐야 한다.) 강사는 예전엔 교수였지만 성 추문으로 잘리고 지금은 성과 철학으로 포장된 인문학 강의를 하며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사람이었다. 핸드폰을 주려던 찰나 그에게 향하는 날선 비판의 말을 듣는다. 거인 같은 남자가 외친 그 말은 강사가 남자가 쓴 책으로 출판을 하고 알바비까지 떼어먹었다는 것이다. 


  핸드폰을 주고 돌아온 지하철에서 다시 만난 그 남자는 십자말풀이를 하고 구인란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혜 씨는 몰랐다. 그후에 그 남자와 다시 만날 줄을. 지혜 씨는 인턴으로 근무한지 9개월이 되었고 정직원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인턴을 한 명 더 뽑는 걸로 결론이 났다. 인턴으로 들어온 사람은 강사에게 소리를 친 그 남자였다. 이규옥. 


  인턴에게 주는 혜택이란 아카데미에서 하는 강좌 하나를 무료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료라고 하지만 월급에서 그만큼의 돈을 제하는 이상한 시스템이다. 지혜 씨는 규옥 씨의 제안으로 우쿨렐레 강좌를 수강한다. 서른 살, 인턴, 반지하 방. 지혜 씨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며 서서히 반격을 시도한다. 인상 좋고 착하고 성실한 규옥 씨와 함께. 우쿨렐레 강좌를 들으면서 알게 된 무인과 남은 아저씨와도 함께. 


  노력하면 된다. 쥐구멍에도 해 뜰 날 있다, 이런 식의 말로 위로하려고 하지 말자. 지혜 씨는 이름만큼이나 평범하고 소소한 꿈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다. 평범한 꿈을 이루기엔 우리 사회가 여전히 어둡고 막막함으로 버티고 서 있을 뿐이다. 지하와 지상에 걸친 어중간한 방이 아닌 햇빛이 드는 방. 오드리 헵번이 창가에 앉아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듯 지혜 씨도 창가에 앉아 우쿨렐레를 켜고 싶다. 핀잔과 일을 몰아주는 까탈스러운 상사와 점심을 먹으며 수저를 챙기는 게 아니라 목에 사원증을 걸고 카페에 앉아 마음 맞는 동료들과 휴일 계획을 이야기하고 싶다. 


  지혜 씨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지. 있지도 않은 친구를 만들어 아파트 단지 공터에 앉아 편의점 음식을 먹는 지혜 씨가 바라는 건 평범함이다. 과일 농사를 하는 부모님은 지혜 씨가 반 지하방에 사는 걸 모른다. 자신을 보통 사람이라고 칭하며 대통령이 된 그 사람이 부르짖었던 보통 사람은 2018년에 가장되기 힘든 사람이 되었다. 민주주의도 꽃이 피었는데 직접 선거를 할 수도 있게 되었는데 청춘들의 살아가기는 한 발 나아가는데 더디고 출구조차 찾기 힘들다. 


  지혜 씨는 말한다. 치열하게 살라는 말이 제일 지겹다고. 서른이 되도록 치열하게 살았는데 그만 좀 치열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런 말로 청춘들을 환자로 내 모는 시대. 아프면 환자지 왜 청춘이냐는 말을 듣고 웃는 우리. 지혜 씨와 규옥, 무인과 남은이 세상에 대한 반격을 시도하며 보통 사람이 되어 살고 싶다는 외침을 모른 척할 수 있을까. 계란으로 바위 치기. 바위를 칠 수 없으면 바위를 더럽히는 계란이라도 되자는 소설에서 보통 사람 지혜 씨의 내일을 응원한다. 바보 같기만 했던 나의 오늘에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내일을 위한 반격의 날이었다고 위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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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례 시간 - 수업이 모두 끝난 오후, 삶을 위한 진짜 수업
김권섭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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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업이 끝나는 시간, 청소를 마치고 담임 선생님을 초조하게 기다린다. 선생님이 오셔서 전달사항을 들려주실 때도 있었지만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았다. 대개 반장이 와서 선생님의 말씀을 전했다. 가방을 들고 문을 나서면서 해방감을 느낀다. 집에 간다, 집으로 갈 수 있다. 기억 속 종례 시간은 집에 빨리 가고 싶어 초조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시간이었다. 

  

  "제발, 선생님 이야기 하나만 더 들려주세요."


  현직 국어 선생님으로 재직하고 있는 김권섭의 『종례 시간』을 감싸고 있는 띠지에 적힌 말이다. 아이들은 하루 중 제일 기다리는 종례 시간에 이야기 하나를 더 들려달라고 말한다. 어떤 이야기일까. 궁금해졌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에 아이들은 선생님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는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들려주었을 이야기를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바람이 불어온다.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해주실까. 아이들의 눈은 반짝인다.


  『종례 시간』을 읽다 보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보다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했을 아이들의 진지한 모습이 상상된다. 그만큼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의미 있고 마음이 찡해지는 것들로 가득하다. 책은 '일상의 발견', '배움의 자세', '삶의 방법', '우리 앞의 사람들'로 나뉜다. 차례만 보고도 벌써 가슴이 뜨거워진다. 오늘은 반복이 아니라 여생의 첫날이라는 글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학교, 학원, 집. 다시 학교, 학원, 집으로 굴러가는 하루를 가지고 있을 아이들은 매일이라는 일상에 대해 지겨워하고 힘들어할 것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즐거움과 삶을 살아가야 할 자세들을 일러준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통해서 습관들을 고쳐 나갔다는 고백과 함께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들을 제시한다. 누워서 책을 읽다가 책상에 앉았다. 자세를 바꿔가면서 읽을 정도로 몰입감이 대단했다. 한 챕터를 읽는 데에 많은 시간이 들진 않았지만 책을 읽으며 나의 생활들을 떠올리며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오래 했다. 국어 선생님의 글답게 정확하고 간결하게 표현된 문장들은 읽는 재미를 선사했다. 옛 성현들의 고사와 일화를 예로 들어 누구라도 쉽게 이해를 할 수 있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김권섭 선생님의 종례 시간에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잘 듣는 것과 보는 것의 가치를 알려주고 책 읽기와 타인을 위한 마음가짐을 잃지 않는 것을 강조한다. 경쟁하고 남을 이기기 위한 방법만을 가르치는 곳이 학교라고 생각했다면 이 책  『종례 시간』을 읽어보자. 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와 남과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 실패하고 좌절했을 때 내일을 준비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선생님은 차분하게 알려준다. 


  소인은 계급으로 구분되는 특수한 인간이 아니라, 군자가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군자가 되지 못한 인간일 뿐입니다. 되려 하다가 안 된 것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예 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면 정말 부끄럽지 않을까요?


   『종례 시간』은 학생이 아니어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읽어도 무리가 없는 책이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들려주는 형식이지만 각각의 이야기들은 바쁘고 지친 어른들이 읽기에 무리가 없다. 힘든 우리에게 바치는 따뜻한 위로로 가득하다. 하루가 끝나고 예를 다하여 오늘에게 인사를 보내는 시간에 읽는 『종례 시간』은 수고했어 그리고 내일도 힘내라고 격려해준다. 자상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내일은 더욱 힘내자, 응원하는 나를 보듬어 주는 시간,  『종례 시간』. 내일로 돌아가는 나를 선생님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신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가슴에 간직하고 나는 오늘이라는 선물을 받아든다. 


  선생님, 내일도 이야기 들려주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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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문학동네 시인선 101
문태준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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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이 돌아오니
-문태준

누군가 언덕에 올라 트럼펫을 길게 부네
사잇길은 달고 나른한 낮잠의 한군데로 들어갔다 나오네
멀리서 종소리가 바람에 실려오네
산속에서 신록이 수줍어하며 웃는 소리를 듣네
봄이 돌아오니 어디에고 산맥이 일어서네
흰 배의 제비는 처마에 날아들고
이웃의 목소리는 흥이 나고 커지네
사람들은 무엇이든 새로이 나려 하네
심지어 여러 갈래 진 나뭇가지도
양옥집 마당의 묵은 화분도

 이 따뜻하고 포근한 빛깔의 시집을 가지고 싶은 마음을 들켜버렸습니다. 문태준 시인의 신작 시집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가 있는 코너로 나를 이끄는 손을 잡았습니다. 연휴인데도 서점은 문을 열었고 몇몇 사람들은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봄이 온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데 시인의 시집은 도착해 있고 분홍빛은 나를 눈멀게 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사모하는 일은 사소합니다. 시의 몇 문장으로 시집에 어울리는 책갈피를 고르는 일로 사랑은 시작됩니다. 
다시 봄이 돌아온다는 일에는 끔찍하거나 슬프거나 그리운 기억도 함께 돌아온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아버렸습니다. 언덕에 올라 트럼펫을 불고 나른한 낮잠이 몰려오는 것으로 봄은 출발합니다. 웅크렸던 어깨를 펴고 다짐과 맹세로 봄은 피어납니다. 다시 봄을 맞이하려고 잎을 떨구고 동면에 들어갔던 식물들의 연한 눈이 풀리는 설 지난 오후만 남은 일요일입니다. 

샘가에서
-어머니에게

고서(古書) 같이
어두컴컴한 
어머니

샘가에 가요
푸른 모과 같은 
물이 있는 
샘가에 가요

작은 나뭇잎으로
물을 떠요

다시 
나를 입어요
당신에게 
차오르도록

시를 쓸 때 직유를 쓰는 일은 촌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웃기지요, 시 쓰기를 배우는 일은. 그 후로 직유는 쓰지 않았어요. 이상한 일이지요,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일은. '고서(古書) 같이/어두컴컴한/ 어머니' 의 행을 읽고는 단박에 좋아진 걸 어쩌겠어요. 좋은데 이유는 없잖아요. 직유든 은유든 비유는 단 한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안 보이는 눈으로 흐려진 글자를 읽어내려가는 일이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전기세 걱정에 텔레비전 불빛만으로 어두운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그 모습이 그리워질 것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자식이 자라는 대신 늙어갔던 어머니를 데리고 샘가로 가요. 이제 내가 늙어가요, 어머니가 이제 차올라요. 이건 명령입니다. 시로써 전하는 나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종이 책갈피에 대한 단상
책갈피를 쓰시나요. 서랍에 책갈피만 모아 놓은 구역이 있긴 한데 정작 책을 읽을 때는 쓰질 않아요. 띠지를 벗겨서 대충 꽂아두거나 영수증을 넣어두곤 하지요. '사랑이 있나. 어쩌면 사랑이라는 말이 있을 뿐이겠지.' (최갑수, 사랑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면)사진 속 종이 책갈피에 적힌 말입니다. 한 여자가 긴 복도 끝에 놓인 책상에 앉아 있네요. 통속이 마음을 멎게 하는 시절은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종이 책갈피에 쓰인 말이 시절을 되돌립니다. 책상과 빛, 책과 공책, 연필. 우리가 다만 필요한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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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눈송이 봄날의책 세계시인선 2
사이토 마리코 지음 / 봄날의책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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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한국어 공부를 하기 위해 사이토 마리코는 '입국'합니다. 시인이었던 그녀는 연세대와 이화여대에서 공부를 하면서 한국어로 시를 쓰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일본어로 쓰고 한국어로 번역. 그러다가 차츰 생각이 넓어져 한국어로 곧바로 시를 씁니다. 1987년으로부터 4년 밖에 지나지 않은 한국. 그녀의 눈에 이곳은 최루탄 가스가 퍼지고 보도블록과 유리가 깨지는 거리였습니다. 어학당에서 내려오는 길에 깨진 유리에 반사된 빛을 보다가 그 이미지를 가져옵니다. 말로 다하지 못했던 감정들을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토해냅니다. 한국으로 오기 위해 책을 처분한 그녀가 헌책방 할아버지와 나누는 대화가 시집에 실려있습니다. 


서시

-사이토 마리코


커다란 나무는

그대로 한 권의 역사책이다

잎사귀 하나하나가 한 페이지에

해마다 새로 쓰여

해마다 새로 태어나는 책.

하루 종일 바람이 읽고 있다

가끔 언더라인한다.


  한국 생활 1년 2개월에 걸쳐 쓰인 시들이 담긴 시집 <입국>은 한동안 절판되었습니다. 시인이 남긴 그 책들은 서점에서 헌책방으로 누군가의 책장으로 흘러들어갑니다. 시를 썼다기 보다 시가 쓰였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녀는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시들을 써 냅니다. 그녀 자신도 어떻게 그렇게 많은 시들을 썼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라고 했습니다. 

  책들의 무게는 나무의 무게입니다. 책이 무거운 이유는 나무 한 그루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판 그녀의 책들은 어디로 가닿아 있을까요. 내가 읽지 않아도 바람이 햇빛이 책장을 넘기면 책의 임무는 다하여지는 것입니다. 밑줄을 그어놓고 도망가는 구름과 새와 비. 색이 바란 그 책들 안에는 나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서울

-사이토 마리코


사람이 어깨만이 돼서 거리에 넘친다

버스 기사님이 어깨만이 돼서 우리를 싣고 달린다

연인들이 어깨만이 돼서 타박타박 걸어간다


이 거리는 어깨만으로 남아 서 있다


사람들이 어깨만이 돼서 부딪쳐 간다

버스 기사님이 어깨만이 돼서 우리를 버리려 달려간다

연인들이 어깨만이 돼서 넘어져 간다


이 거리는 어깨만 남아 짖는다

어깨너머 잊힌 달이 헐떡거린다


이 어깨에는 그림자가 없다


  외국인인 시인의 눈에 비친 서울은 어깨들이 부딪치는 곳이었습니다. 어깨와 어깨가 함께 걷는 이상한 나라의 서울. 민주화의 물결이 어깨로 이루어진 곳. 외국인이 아니어도 나는 그 거리에서 이방인이었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걷느라 발자국만을 따라갔습니다. 차라리 무표정을 지으면 어떨까, 힘들게 웃음 짓는 얼굴들에서 피로와 졸음을 보았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입을 다물고 오해를 할까 봐 실없이 웃기만 했습니다. 모두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밤에도 볼 수 없었습니다. 


신촌 부근

-사이토 마리코


사람을 경멸하면

가슴에 금세 시큼한 꽃이 피고

하룻밤 자도 그것이 안 시들 때

햇님이 녹색으로 보인다


저 산 가서 이 꽃을 도려내

매장하고 싶다

악수 받으러 가는 사람들 따라

아침의 통근 시간 학교도 회사도 빠지고

저 산으로, 약수 받으러 가는 사람들 따라


하지만 이 좁은 길 하나를 건너갈 수 없다


  시인이 일본으로 돌아가고 그녀의 행방을 알 수 없어 판권 계약을 하지 못해 시집이 다시 나올 수 없었습니다. 어디서든 시를 쓰고 있지 않을까. 시가 아니어도 문학 안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짐작만 할 뿐이었습니다. '봄날의 책'이라는 출판사에서 그녀의 시집이 다시 나왔습니다. <입국>에서 <단 하나의 눈송이>로. 시인은 시를 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시를 다시 쓰게 된 계기는 2011년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 때문이었습니다. <단 하나의 눈송이>에는 그때 이후에 쓴 세 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입국>에 담긴 시를 쓸 때의 기분과 느낌들이 짤막하게 담겨 있습니다. 전부 기억나진 않다고 밝힙니다. 기억나는 시들의 느낌이 들어 있습니다. 시인이 건너려던 길은 일본어와 한국어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는 것부터 출발합니다. 

  시인은 일본에서 한국문학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번역한 작품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었습니다. 외국인의 눈에 비친 철거 지역의 쓸쓸함과 황량함이 시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때의 장면들을 잊지 않고 있으면서 난쏘공을 읽은 것일까요. 처절하게 아름답고 황폐한 슬픔이 담겨 있는 그 소설에서 시인은 자신의 유학 생활을 떠올렸겠지요. 다행입니다. 살아 있고 시를 쓰고 문학을 읽고 있어서. 

  시를 쓰는 일은 시를 읽는 일은 언어의 경계를 넘나듭니다. 언어는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이 가진 시집에 바람이 언더라인 하고 지나가는 걸 보기만 해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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펫숍 보이즈
다케요시 유스케 지음, 최윤영 옮김 / 놀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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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 개에게 물린 이후로 강아지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동네에 사나운 개가 있었는데 그 개는 자기를 보고 놀라 도망가면 꼭 따라와서 물었다. 생각 없이 뛰어가다 넘어졌고 날카로운 이빨이 엉덩이에 박혔다. 너무 놀라서 집으로 도망쳤다. 골목에 강아지라도 지나가면 멀리 돌아갔다. 문 앞에 죽은 쥐를 가져다 놓는 고양이가 무서워 옥상에도 못 올라갔다. 집 뒤편에는 기찻길이었다. 


  어느 날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를 낳았다. 기찻길과 옥상 근처를 왔다 갔다 하면서 노는 게 좋았다. 고양이 식구들이 옥상에 자리를 잡은 후 몇 번 올라가서 구경했다가 어미 눈 밖에 났나 보다. 아침에 자고 일어났더니 죽은 쥐가 문 앞에 놓여 있어서 소리를 빽 질렀다. 밤중에 화장실 갈 때마다 마주치던 번뜩이던 푸른 눈의 고양이에 질려 다시 집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애완동물이라 불렀다. 요즘은 반려동물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좋아해 주고 귀여워해 주는 것에서 벗어나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인 반려동물. 어린 시절의 무시무시했던 기억이 아니라면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다케요시 유스케의 소설 <펫숍 보이즈>에는 새를 무서워하면서 '유어 셀프'라는 대형 펫숍에서 일하는 가시와기 씨가 나온다. 그는 성실하고 성숙한 어른이다. 점장이 아니었을 때도 아르바이트생 교육을 시키고 일을 함께 할 때는 고마워, 미안해 같은 말들을 꼬박꼬박 하는 인물이다. 그는 새를 무서워하면서도 휴일이면 동물원에 가서 조류 탐사를 한다

  이 소설 <펫숍 보이즈>에는 동물을 사랑하고 동물과 함께 하는 삶을 꿈꾸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대학교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쿠토, 프리터를 자처하면서도 동물에 대한 지식을 쌓고 애정을 담아 일하는 고타와 성실하고 배려심 많아서 함께 일하고 싶게 만드는 가시와기. 그들이 대형 펫숍인 '유어 셀프'에서 겪는 일상의 작은 미스터리들을 해결해 가는 이야기가 담긴 <펫숍 보이지>를 읽고 나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개와 고양이에게 위협을 받았다고 생각해 무서워하고 멀리하던 나는 조금씩 그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마음을 열고나니 주변에 동물들이 보였다. 멀리 돌아서 갔는데 겨울 햇빛에 몸을 말리고 있는 고양이를 마주하기도 하는 일상이 되었다. 래브라도 리트리버와 골든 리트리버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고 정비소 안에 드러누워 있는 사모예드를 바라보기도 한다. 시바견이 목줄을 달고 주인을 이끌고 가는 산책길을 뒤에서 따라가기도 한다. 


  새에게 악의를 담아 말을 배우게 하는 사람과 펫숍이 생명을 살고 판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사람. 가쿠토와 고타는 이상한 일들을 해결하면서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의미를 깨닫는다. 어렸을 때 키운 개가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동물을 생각 없이 키우기도 한다.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은 외로운 것들을 지켜주는 힘이라는 것을 이 소설은 따뜻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무시무시한 기억들에서 벗어나 동물들과의 행복한 일들을 만들 것이라는 다짐이 쌓인다. 


"펫숍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위한 곳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믿고 싶습니다. 서로 마음이 통하고 있다고 굳게 믿으며 반려동물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통도마다 않겠다는 인간이라는 동물을요. 펫숍은 친구 같은 반려동물과 함께 지내며 행복을 느끼는, 그런 인간이라는 동물을 돕기 위한 장소입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동물들이 정말로 행복하다고 느끼기를, 끊임없이 기원하는 곳입니다. "


  살아있는 것과 온기를 나누고 싶은가. 혼자 살아서 반려동물과 함께하지 못해 속상한가. <펫숍 보이즈>를 읽기 시작하자. 그곳에서 귀여운 아이와 새, 고양이, 사모예드, 말미잘, 파충류, 양서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보자. 북적북적한 '유어 셀프'에서 다정하게 나의 기분을 알아채는 사람들과 함께 미스터리 한 사건을 풀어가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띠지는 스티커로도 잘라서 쓸 수 있다. 동물과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프린트 된 스티커를 붙이며 그들의 이름을 떠올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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