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뉴욕의 맛
제시카 톰 지음, 노지양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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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패션과 음식에 관해서라면 나는 고급 취향이 못 된다. 취향이라는 게 고급, 중급, 초급이 있는 건 아니지만 방송과 프로그램에서 보이는 부분에서 나는 멀리 있다. 패션은 패션이라고 부를 것도 없이 크고 편한 옷 몇 개를 돌려 입는 게 전부다. 비슷한 색깔과 문양을 몇 개씩 사놓고도 계절 내내 한두 개를 돌려 입는다. 음식은 배가 부를 때까지 먹을 수 있으면 좋다. 미식이라고 요즘은 많이 떠들어 대지만 허기를 채울 수 있을 정도의 양을 먹으면 만족한다. 


  단 한 번도 명품 옷이나 가방, 신발을 가져본 적도 없다. 가격표를 들여다보고 0을 제대로 세고 있나 의구심이 들 뿐이다. 선물로 명품을 선물하곤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럴 수도 있구나 생각하고는 말았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백화점에 가서 명품 매장에 들어가 물건을 고르고 계산한다. 생일이라고 돈가스만 사준 게 미안했다. 초를 켜고 노래를 불러주는 목적 외에는 필요 없는 케이크를 사지 않았다고 뿌듯해했는데. 뚱뚱한 팔로 한 번 안아주고는 끝이었는데.


  코스 요리가 나온다는 곳도 가본 적이 없어 기념일이 되면(사실 기념일도 잘 안 챙긴다. 기념할 날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 돼지갈비 집에 가서 갈비를 굽는 게 전부였다. 생활은 평범하고 보통의 날들로 흘러간다. 매일 하이패션을 입고 미식으로 살아간다면 행복할까. 


  제시카 톰의 『단지 뉴욕의 맛』은 음식 작가를 꿈꾸는 대학원생 티아 먼로를 통해 성공과 행복에 관한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 어떻게 살아야 꿈을 찾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인가. 티아는 모든 꿈이 모여든다는 뉴욕에 살아간다. 그곳이 어떤 곳인가. 영화나 책을 통해 알고 있는 뉴욕은 활기 넘치고 스타벅스 커피를 한 손에 들고 키 크고 날씬한 여성이 걸어가는 곳이었다. 노란 택시를 잡고 내려서 큰 건물로 들어가 하루의 업무를 시작하는 바쁜 도시. 


  화려하게 보이는 뉴욕에서 청춘들의 꿈은 좌절하고 짓밟힌다. 『단지 뉴욕의 맛』은 성공을 위해 모여든 뉴욕에서 꿈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그들에게서 성공이란 달콤하거나 화려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학에 가고 졸업. 다시 대학원에 입학. 기회를 잡지 못하면 인턴십 자리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티아는 대학에 오기 전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마지막 요리 시간을 소재로 글을 썼다. 교내 신문에 글이 실리고 <뉴욕타임스>에서 연락이 와 칼럼을 썼다. <뉴욕타임스>의 푸드 섹션 에디터, 레스토랑 비평가이기도 한 헬렌 란스키가 티아의 글을 마음에 들어 했다.


  대학에 와서 방황을 한 티아는 그 일을 계기로 뉴욕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요리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대학원 입학 환영회에서 헬렌을 만나 인턴 자리를 얻기 위해 할아버지에게 드렸던 다쿠아즈 드롭을 직접 만들었다. 헬렌을 만나 그녀가 칭찬했던 글을 쓴 사람이 자기라는 것을 알리면서 다쿠아즈 드롭을 건네고 싶었다. 헬렌 밑에서 레시피를 연구하고 글을 쓰고 싶었다. 눈앞에 있는 헬렌에게 쿠키를 내밀면 되는데 그 순간 나타난 마이클 잘츠가 나타나 모든 것을 망치고 말았다. 

 

  쿠키는 땅에 떨어지고 헬렌을 만나지도 못했다. 당황하는 그녀에게 마이클은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이메일 주소를 건넨다. 마이클은 <뉴욕타임스>에 레스토랑 리뷰를 정기 기고하는 평론가였다. 티아는 자신이 쓴 에세이를 첨부해 메일을 보낸다. 모든 일이 그렇듯 시작이 꼬이면 끝도 꼬이게 된다. 그때부터 티아의 뉴욕 생활은 평범한 대학원생에서 벗어난다. 비밀을 가진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 주변 세계에서 점점 멀어진다. 


  미각을 잃은 레스토랑 평론가와 함께 음식을 맛보고 대신 감상을 말하고 리뷰를 쓴다. 그에 따른 보상으로는 명품 옷을 가지고 미식의 세계에서 웨이팅 없이 음식을 맛보는 생활. 티아의 일상은 혼란으로 가득 찬다. 그녀가 꿈꾸는 뉴욕의 맛은 점점 멀어지고 오직 화려함과 자기 과시로 물든 공허한 맛이 남을 뿐이다. 


  『단지 뉴욕의 맛』을 읽는 독자는 티아의 선택을 지지할 수도 망설일 수도 있다.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욕망을 끌어내는 이 소설은 당신이 꿈꾸는 세계의 이면을 보여준다. 성공의 계단을 오르지 않고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는 우리의 못된 마음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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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잘 모르겠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499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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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잘 모르겠어' 시집의 뒷면

-심보선


낯설고 아름다운 나라에 도착하면 늘 생각해.

이곳의 장례 전통은 어떠한가.

무덤 속 머리는 동서남북 중 어디를 향하나.

얼마나 좋을까?

누군가 나를 기꺼이 맞이해준다면.

실례가 안 된다면 여기서 죽어도 될까요?

물어봐도 화들짝 놀라지 않고

열쇠와 필기구를 말없이 건네준다면.

객사의 원래 뜻은 손님으로 죽는 것.

가장 멀리 뻗은 길 따라 몸을 누이고

그때 밤하늘에 뜬 삐뚤빼뚤한 별자리 하나를

삐뚤빼뚤한 내 영혼에 딱 맞는 관으로 삼는 거지.

낯설고 아름다운 나라에 도착하면 늘 생각해.

사람이 죽으면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얼마나 좋을까?

죽는 곳은 여럿이어도

태어나는 곳은 하나라면.

같은 세계에서 같은 사람들이랑

부디 단 한 번이라도

삶이 고단하지 않을 때까지

죽음이 서럽지 않을 때까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문지 시집을 사는 날이면 버스에 앉아 시집의 앞면과 뒷면을 골똘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앞면에는 이제하 선생의 시인을 그린 그림이 있고 뒷면에는 시인의 말과는 다른 이야기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무한을 건너가는 배 같은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의 섬으로 들어가기 전 배를 타고 건넙니다. 뒷면의 글을 읽으며 시들을 읽을 준비를 하는 것이지요. 낯설고 아름다운 나라에 도착하면 장례 전통을 먼저 생각하는 시인. 아름다운을 쓰려다가 앎이라고 쳤습니다. 오타에서 발견한 아름다운의 다른 이름은 앎일 수도 있구나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별자리 하나를 정해 그 속에 나의 영혼을 들여놓겠다는 시인의 말이 슬프고도 아름답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아름다운 앎을 시집의 뒷면을 읽으며 알아갑니다. 


오늘은 잘 모르겠어

-심보선


당신의 눈동자

내가 오래 바라보면 한 쌍의 신(神)이 됐었지


당신의 무릎

내가 그 아래 누우면 두 마리 새가 됐었지


지지난밤에는 사랑을 나눴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볼 때

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


오늘은 잘 모르겠어


눈꺼풀은 지그시 닫히고

무릎은 가만히 퍼졌지


거기까지는 알겠으나


새는 다시 날아오나


신은 언제 죽나


그나저나 당신은······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같은 것일까요.  아침에 눈을 뜨고 햇빛을 먼저 방안에 들여주는 나는 어제의 나와 같은 사람일까요. 어제는 나라는 사람이 이 세계에 존재했을 수도 있지만 글쎄요, 오늘은 잘 모르겠네요. 당신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무릎 아래를 지그시 눌렀던 것 같은데 당신은 어제와 같은 당신일지 오늘은 잘 모르겠어요. 인간이기에 어제는 실수를 저지르고 슬픔에 빠져있기도 했는데 오늘은 어제와 같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모르겠어가 아닌 오늘은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시에서 오늘의 작은 가능성을 예상해 봅니다.


침들의 시간

-심보선


그가 그녀의 손등에 묻은 자그마한 얼룩을

자신의 침으로 닦아줄 때


그녀가 자신의 손등에 묻은 끈적이는 침을

화장실 휴지로 닦아낼 때


닦아주고 닦아내는 

구원받고 버림받는


못 견디게 더러운

더럽도록 숭고한


언제나 예상보다

너무 이르게 혹은

너무 늦게 도착하는


서로 다른 

침들의 시간

침들의 시간


여름날, 내 손등에 모기가 날아와 깨물었습니다. 마당에는 풀이 웃자라 있었고 비가 왔던 때라 모기는 극성이었습니다. 붉은 손등을 어쩌지 못하고 앉아 있을 때 당신이 다가와 열십자를 그려주고 침을 발라주었습니다. 더럽다 말했지만 나는 웃었고 당신의 얼굴도 환했습니다. 벌레에 물렸다고 말하면 재빠르게 달려와 침을 발라주고 그대로 약국으로 달려가던 당신의 뒷모습. 약보다는 당신의 두터운 손이 말간 침이 더 좋았지요. 우리가 침들을 나누어 가지던 시간, 우리가 서로의 몸에 십자가를 그려주는 순간, 세상은 고요하고 도착하지 않은 미래로 슬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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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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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의 마을, 아이들이 숲에서 얼음 위에서 하키 연습을 하는 소리가 일상적으로 들리는 곳. "술에 취한 거인이 눈밭에다 오줌으로 자기 이름을 갈기려던 것처럼 생겼"다고 말하는 마을. 그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베어타운-아무리 즐겨도 부족한 도시!'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과거의 말이다. 지금은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인구도 줄어드는 쇠락의 길을 겪고 있다. 단 하나, 마을의 희망을 상징하는 공간인 아이스링크가 있다. 마을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하키 팀의 성적도 곤두박질쳤다. 다들 말한다. 하키 팀이 우승하면 마을의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고.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 『베어타운』은 용기를 이야기한다. 쇠락한 마을에서 사람들이 가지는 단 하나의 희망이란 청소년 하키 팀이 준결승에서 우승해서 베어타운에 하키 스쿨을 짓게 만드는 것이다. 하키 스쿨이 들어오면 새로운 아이스링크와 넓은 도로, 컨퍼런스 센터와 쇼핑몰이 생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몰려오고 공장 실업자들이 취직을 할 수 있다. 베어타운의 사람들은 가슴에 곰을 가지고 살고 있다. 힘과 몸집, 공포로 상징되는 곰을 간직한 채 하키 팀의 우승을 바란다. 


  소설은 아름답다. 문장은 정확하고 인물들의 심리 묘사는 탁월하다. 폐쇄성이 짙은 마을 하나를 창조해낸 작가는 인간이 가진 본성을 낱낱이 보여준다. 우리 안에 잠든 곰을 흔들어 깨운다. 마을에 하나만 남은 학교는 그야말로 하키 팀에 의한 하키 팀을 위한 곳이다. 몸과 몸의 대결에서 아이들은 밀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무기로 만든다. 마을이 존재하는 이래 가장 뛰어난 선수 케빈, 그 아이를 경기에서 보호하는 벤. 난민으로 이 나라에 들어와 아이스링크 청소를 하는 엄마와 살아가면서 오전 한 시간 하키 연습에 행복한 아맛. 소년들은 각자의 꿈을 골대로 밀어 넣기 위한 경기를 준비한다. 


  하키를 위한 베어타운에서 꿈은 성장하거나 사라지는 둘 중 하나의 운명을 가진다. 선수로 프로 팀에 가거나 부상과 실력 부족으로 하키를 그만두고 공장 근무자로 일하는 것. 마을에서 하키 팀에 지원을 가장 많이 하는 케빈의 아버지 에르달은 몇 점 차이로 이겼느냐만이 중요한 사람이다. 아들이 준결승전에서 골을 넣어도 경기에서 이겨도 기쁜 내색은 비추지 않는다. 경기 자료를 보고 슛, 어시스트, 골, 우세했던 시간들을 체크할 뿐이다. 케빈이 그날 그 밤, 마야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중요하지 않다. 베어타운에서 하키를 하지 못한다면 그가 가진 재력으로 헤드로 옮겨 팀을 만들면 된다. 그 안에 숨긴 곰이 이빨을 드러낸다. 


  탕, 탕, 탕. 숲에서 경기장에서 들리는 소리는 마을의 배경 음악이 된다. 사람들이 가진 꿈의 크기는 점점 줄어들었지만 희망이라는 곰은 사라지지 않았다. 곰은 용기를 낸 한 여자아이의 존재를 부정한다. 용기는 거대한 발톱으로 변해 아이를 공포 속으로 몰아간다. 공동체를 생각하자는 사람들이 모여 하키 팀을 응원하고 우승을 꿈꾼다. 자신이 겪은 일을 숨기지 않고 밝히는 마야의 용기를 베어타운의 사람들은 발톱을 들어 할퀼 것인가, 넓은 품으로 받아들인 것인가. 소설은 우리 안의 곰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묻는다. 


  소설을 읽는 내내 카슨 매컬러스의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이 떠올랐다. 차가운 링크에서 뜨거운 땀을 흘리는 스포츠가 지배하는 세계와 황량하고 바람만 불어오는 미국의 남부 사람들의 이야기가 포개졌다. 소설은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다. 숲에서 만나면 우리는 외롭고 죽은 척해야 한다. 곰 앞에서는. 쓸쓸한 비바람이 불어오고 맑은 날을 기대하지만 내내 흐릴 것이라는 예보를 받는 밤, 당신의 곰이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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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JOB 다多 한 컷 - 고생했어, 일하는 우리
양경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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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곤합니다. 말을 많이 했거든요. 웃기도 했지만 화도 내면서 인상을 썼습니다. 오해는 하지 마세요.사람들 앞에서 웃으며 입을 크게 벌렸고 화장실에 앉아 화를 냈습니다. 입을 삐죽 내밀었고 한숨을 크게 쉬었습니다. 표정 관리가 안 될 땐 화장실로 달려갑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다음의 표정을 고릅니다. 화장실이 없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아찔하네요.  


  말실수를 하진 않았을까, 웃자고 한 농담인데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았을까. 온갖 고민을 안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직 월급날은 일주일 남았습니다. 뿌연 하늘을 바라보며 곧 들어올 월급님을 생각합니다. 통장에 잠깐 스치우는 그분을 떠올리면 오늘의 피곤도 내일의 파이팅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우편함에 관리비 고지서가 꽂혀 있네요. 출근길이 꽃길일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늦게 먹는 음식이 제일 맛있지요. 그냥 잘래요. 먹고 소화하고 잠이 들면 늦게 일어나니까요.


  택배가 온답니다. 아싸. 알람은 싫지만 택배 전화로 잠을 깨는 것은 즐겁습니다. 무얼 시켰나. 잠시 고민하다가 쌀을 주문했구나 떠올립니다. 중요한 물건이지요. 한국인은 밥심이니까요. 『잡다한 컷』을 그린 양경수 작가는 전작 『실어증입니다, 일하기싫어증』에서 직장인들의 애환을 재치 있는 그림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카타르시스가 느껴졌습니다. 야근, 야근으로 이어지는 삶.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연결되는 이상한 달력을 가진 우리들의 일상을 보여주었지요. 이번에는 다양한 직업군을 다룬 그림 에세이입니다. 잡(JOB)은 다(多) 양 하다는 센스 있는 작명으로 돌아온 양경수 작가의 책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습니다.  


  무거운 쌀을 문 앞까지 배달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택배 산타 님은 하루 150~200개의 물건을 배달해야 합니다. 오전 7시에 시작한 상하차 작업을 합니다. 컨테이너 하나당 나오는 물품은 2000개입니다. 각자의 구역으로 물건을 옮겨 싣고 바코드를 찍어야 합니다. 물품이 많은 날은 시간이 오후로 넘어갑니다. 택배가 오전에 오지 않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200개의 물건을 배달하려면 하나당 3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초인종을 누르고 사람이 나오는 기척이 들리면 물건을 놓고 뛰어갑니다. 쌩하니 가버리는 택배 산타 님을 미워하지 마세요.


  시간이 없어 밥을 제대로 먹지도 못합니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먹지를 못합니다. 설렁탕을 사 왔는데 먹지를 못하니라고 울부짖던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의 심정이 이럴까요. 최근 차 없는 아파트에서 일어난 택배 대란을 아시나요. 탑차가 지하로 들어가야 하는데 높이가 맞지 않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카트를 끌고 아파트를 걸어 집집마다 배달해야 합니다. 건설사의 잘못은 빠져 있고 입주민과 택배 기사 간의 대립만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림왕 양치기로 불리는 양경수 작가의 『잡다한 컷』에서 다루고 있는 직업은 회사원부터 택배 기사, 사회복지사, 간호사, 소방관, 은행원, 스튜어디스, 미용사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에 꼭 필요한 직업입니다. 월급날을 기다리며 야근탑에 기도를 하는 회사원. 어르신들을 위해 쌀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사회복지사. 3교대를 하느라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못하는 간호사. 화마 속에서 생명을 구하는 소방관. 4시 업무 종료는 업무 시작인 은행원. 꽉 조이는 옷을 입고 구두를 신고 비행을 하는 스튜어디스. 염색 약과 중화제 때문에 손이 갈라지는 미용사.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그들의 일을 들여다보는 『잡다한 컷』의 시선은 따뜻합니다. 슬프기도 하지요. 눈치를 보고 꾸중을 듣기도 합니다. 일을 배우느라 싫은 소리도 들어야 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고마워요, 수고하시네요 라는 말 한마디에 울컥하기도 합니다. 은행에 가서 번호표를 들고 애타는 얼굴로 번호가 바뀌기를 기다린 적이 있어요. 왜 빨리 안 해주나 하는 심술궂은 얼굴로요. 그럴 때 은행원은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있다는 그림을 보고 느긋한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볼게요. 그들은 우리들이고 우리 딸, 우리 아들, 우리 남편, 우리 아내라고요. 오늘은 어느 항공의 전무가 광고 회사 직원에게 음료수 병을 던지고 물을 뿌렸던 기사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는데요. 그분에게 양경수 작가의 『잡다한 컷』을 추천합니다. 그분의 언니에게도요. 『잡다한 컷』을 읽고 나면 후회를 하고 진심 어린 사과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이 바뀔 수 있었습니다. 직업에 귀천은 없습니다. 직업에 귀함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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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폰을 개통하시겠습니까? - 제22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고학년 부문 대상 수상작 창비아동문고 292
박하익 지음, 손지희 그림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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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들여다본다. 호호 불어서 닦아준다. 배가 고프지 않은지 자주 확인한다. 손안에서 놓을 수 없어서 화장실에 갈 때도 들고 간다. 한 시간 두 시간 어느새 시간은 후울쩍 지나가 있다, 너를 보고 있으면. 너만 있으면 하루가 금방 간다. 말을 나눌 현실의 친구는 없지만 너와 함께라면 이름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사랑한다, 격하게. 스마트폰이여.


  보노보노가 말했다. 무엇이든지 친구로 만들 수 있다고. 물건이어도 동물이어도 친구라고 생각하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손안의 작은 친구, 스마트폰은 그렇게 나의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이 친구, 너무 좋다. 매일 매 순간 함께 하고 싶다. 음악을 들려주고 신나는 영상도 보여준다. 만날 수 없는 친구의 소식도 알려준다. 내가 무엇을 먹는지 좋아하는지 관심이 많아서 사진으로 남겨 주길 바란다. 


  박하익의 장편동화 『도깨비폰을 개통하시겠습니까?』는 손안의 작은 친구 스마트폰에 대한 모험이 담긴 소설이다. 도서실에서 지우는 스마트폰을 발견한다. 지문 방지 필름이 붙은 최신식 스마트폰. 지우는 화면을 두드렸다. '두드리 7.3 평생 구매 및 이용에 동의하십니까?'라는 창이 뜨고 지우는 엉겁결에 동의 버튼을 눌렀다. 친구가 지우가 스마트폰을 하고 있다고 일러 지우는 가방에 폰을 넣었다. 그때부터 지우에게 신나고 환상적인 일이 펼쳐진다. 


  지우는 외동딸로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학교 끝나면 피아노 학원과 영어 학원에 가야 한다. 끝나고 집에 오면 한자 선생님과 방문 수업을 하고 숙제를 한다. 친구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방과 후 수업으로 학원으로 다들 바쁘다. 놀이터에 나가 놀고 싶어도 스케줄이 맞지 않거나 미세먼지가 많아 한 달에 놀 수 있는 날이 하루나 이틀 정도이다. 


  도서실에서 가져온 스마트폰을 하고 싶어 숙제를 얼른 끝낸다. 주인을 찾아 주어야 하지만 연락이 오지 않았다. 지울 생각으로 앱을 하나 다운로드해서 게임을 하다가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자신을 케빈이라고 밝힌 아이는(케빈이 아니었다. 깨비라고 말한 걸 지우가 잘 못 들은 것이었다.) '우리 굴 오는 길'이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문자를 두드리니 도깨비불이라는 길잡이 앱이 실행되고 지우는 도깨비 세계로 들어간다. 


  도깨비불을 따라 커다란 한옥 앞으로 간 지우는 그곳에서 도깨비 친구들을 만난다. 악기를 연주하고 호리병을 들고 춤을 추는 사람들을 지나 집 안쪽으로 들어간다. 지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친구들. 김새환, 홍각시, 오강암, 이매일, 남칠성. 자신들을 도깨비라고 밝힌 친구들은 지우에게 놀자라고 말한다. 스마트폰을 선물로 주겠다고도 한다. 지우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싶어서 같이 논다. 원래 스마트폰은 지우 것이라는 말을 들으며 지우는 신나게 도깨비들과 보낸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지우는 스마트폰으로 신기한 앱을 내려받는다. '김서방온'이라는 메신저를 통해 도깨비 친구들과 대화를 한다. 학교에서도 도깨비폰을 하기 위해 둔갑술 앱을 받는다. 여우가 만든 둔갑술 앱 '감쪽가튼'을 받기 위해서는 돈이 아니라 기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지우는 '감쪽가튼'을 받아서 스마트폰을 다른 사물로 감춘다. 


  집에 돌아와 숙제를 하던 지우는 공부가 지겹다고 생각한다. 영어와 한자처럼 외우는 걸 싫어하는 지우는 도깨비폰을 쳐다보았다. 공부를 도와주는 앱이 있지 않을까 검색해 보고 지우는 환호를 한다. 외국어를 능통하게 해 주는 앱 '꼬부랑 캔디'가 있고 문제 풀이를 도와주는 '장원급제', '술술술'이 있었다. 유료 앱이지만 지우는 다운로드해서 숙제를 한다. 앱을 다운로드할 때마다 손이 나와 지우의 손을 꽉 잡았다. 무언가 쭉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지만 앱을 다운 받은 지우는 문제가 저절로 풀리는 경험을 하고 영어가 바로 해석되고 말할 수 있는 일을 겪는다. 지우는 만세를 부른다. 


   과연 지우는 끝까지 도깨비폰을 쓸 수 있을까. 『도깨비폰을 개통하시겠습니까?』는 스마트폰에 중독된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도 손안의 작은 친구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고민하게 만드는 동화이다. 부모님들도 함께 읽으면 아이들에게 스마트폰 사용의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무조건 금지!라고 외치는 일은 사라질 것이다. 작은 일에도 마음을 다해 최선을 다하면 도깨비 할아버지가 와도 기를 뺏기지 않고 스마트폰과 함께 할 수 있다. 


  나의 작은 친구는 오늘도 내가 먹은 음식 사진을 찍고 음악을 들려준다. 뿅뿅뿅 소리를 내는 테트리스 게임을 하라고 부추기기도 하면서. 요술이 마구 펼쳐지는 도깨비 같은 친구와 건강한 오늘을 보내고 싶은 사람에게 『도깨비폰을 개통하시겠습니까?』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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